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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포포프 - 잊힌 아이들을 돕는 비밀스러운 밤의 시간 ㅣ 다산어린이문학
안야 포르틴 지음, 밀라 웨스틴 그림, 정보람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7월
평점 :
2020년에 핀란드아동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된 책이라고 한다. 이력에 걸맞게 흥미롭고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다. 가장 매력적인 소재는 '라디오'였다. 요즘의 어린이 독자들에게도 통할 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린시절은 라디오의 시대였다. 나는 라디오를 사랑했다. 정말,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라디오가 TV, 컴퓨터, 스마트폰에 차례로 자리를 내주는 급변의 시기를 내가 살아왔구나. 어릴 때 TV가 없었던 우리 삼남매는 5시면 라디오의 어린이방송을 들었다. 우리가 '연속극'이라고 부르던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소리로만 감상하는 것이니 일종의 낭독극이라 할까. 기억나는 제목은 '어린왕자'와 '운디네' 등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수준높은 명작들을 들려주었네. "아저씨, 나 양 한마리만 그려줘." 하던 성우분(여자성우였음)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운디네의 마지막은 어찌나 슬프던지 눈물바람이었던 기억이 나고... 가끔 그시간에 아빠가 고교야구 듣는다고 하나밖에 없는 라디오를 차지하면 언니랑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곤 했다.
라디오 면에선 조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방송을 즐겨들었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라든지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방송들. (찾아보니 아직도 하고 있다! 놀랍다.) 송승환, 김창완, 이수만 등등 시조새 같은 분들의 진행을 들었고 커서는 이문세로 정착했다. (이문세 이후로는 잘 모른다.^^;;;)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가 됐었을까 의심스럽지만 고3때도 들으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정신적 안정감을 준다고 할까. 친구 같다고 할까. 내게 라디오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라디오 소재의 이 책에 눈길이 갔던 것 같다.
이 책에는 매우 현실적인 설정과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섞여있다. 먼저 현실적인 설정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양상으로 학대 상황에 처해진 아이들이 많다' 는 것이다. 난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다. 심하고 약하고의 차이가 있고, 본인들이 그걸 알거나 아니면 아예 인식도 못하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생각보다 꽤 흔한 일이라고 본다. 국내 작품이 아닌 먼 유럽의 작품이라도 비슷하구나....
비현실적인 설정은 작품 속 어른들 중 일부(대표적으로 아만다)가 잊혀진 아이들의 한숨에 반응하는 귀를 가졌다는 것이다. 아만다와 알프레드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만다는 아빠가 팽개쳐두고 남겨진 알프레드의 한숨을 들었고, 신문을 배달하는 길에 신문과 함께 사과, 양말 등을 투입구에 넣어주었다. 그러다 두 사람은 맞닥뜨리게 되고, 알프레드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집을 떠나 아만다의 집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알프레드는 알게 된다. 아만다가 찾아가는 아이들이 자기 말고도 있다는 것을. 어떤 아이는 온 집안이 부모가 마신 술병이고, 어떤 아이는 자기도 어린데 동생을 전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보다 더 끔찍한 상황도 있다. 여기서 바로 그 흥미로운 소재가 나온다. 라디오! 아만다의 집은 할머니께 물려받은 것인데, 할머니의 친척 아주머니의 친구가 러시아 물리학자 포포프라고. 그가 남겨둔 설계도와 통신기기를 두 사람이 찾아낸 것이다. 100년도 넘은 것들을.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찾아내고 하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주파수 맞추기 위해 다이얼 돌리면 지지직 소리가 나던 어릴 적 기억도 났고.... 아만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잊혀진 아이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을 하자는 것. 방송 시작을 알리는 안내문을 먹을것을 갖다준 것과 같은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전달해 준 후, 어느 토요일 새벽 드디어 방송을 개시했다. 이름하여 '라디오 포포프' 이 책의 제목이다.
진행자는 알프레드다. 매주 다른 이야기로 방송을 잘 진행한다. 알프레드의 방송 원고를 읽으면서 라디오 방송 원고를 쓰는 일도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방송에서 인상적인 멘트는 이것이었다.
"가끔은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걸 기억하세요. 세상엔 언제나 여러분의 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있답니다. 여러분이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 때 여러분을 생각하는 누군가가요." (100쪽)
그 '잊혀진 아이들'은 주파수를 맞추고 라디오 포포프를 듣는데 성공했을까? 아만다의 민감한 귀는 그걸 구별해냈다.
"약간의 기다림과 흥분. 그리고 희망도 있었지. 내 귀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105쪽)
자신들과 다를 것 없는 아이가 진행하는 서툰 방송을 듣기 위해 1주일을 기다리는 그 마음은 어떤 것일지. 알 것 같았다. 왕년의 라디오 애청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테지.
한편, 아만다의 배달 일을 돕던 알프레드는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겨우 아빠 눈을 피해 아만다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는 아들을 찾겠다고 학교도 한번 찾아오는데.... 아빠가 아들 찾는게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걸 보는 양 왜 이렇게 조마조마한겨.... 이 부분 이야기가 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부모의 존재가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 책에 나온 '잊혀진 아이들'은 다행이다. 아만다와 같은 어른들이 소수지만 있었고, 라디오 포포프가 이어준 공감과 연대가 있었으니까.
가정에서의 아동학대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다. 오죽하면 이 작가가 '밝은 귀'라는 설정을 했을까. 그런 귀가 없다면 알아채기 어렵다는 게 아니겠나. 그 안에서 비틀려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다. 우리나라도 아동학대법을 만들었지만 그 아이들을 구제하는데 쓰이지 못하고 엉뚱한 데만 찔러 피를 보고 있다. 참 어려운 문제다. 작가는 그 해법을 '이웃'으로 본 것은 아닐까. '밝은 귀'는 이웃들의 눈과 감각인 것이겠지. 하지만 요즘처럼 오지랖이 혐오받는 세상에 이건 가능할까.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알프레드에게 많은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 책의 결말처럼 부모 복이 평생을 좌우하는 프레임이 아니길, 그리고 부모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길, 이웃의 사랑과 연대가 가능하길 바란다. 이웃의 역할에 대해선 나도 가장 자신없는 영역이긴 한데...ㅠ
이 책은 일단 재밌으니 어린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어른들도 많은 생각을 하고 나눌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