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는 - 양과 늑대의 이야기 바람그림책 163
신순재 지음, 조미자 그림 / 천개의바람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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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제 일반적이고 타당한 상식처럼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서 '당연한 말 왜 해'가 될 수도 있고 새삼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책은 당연히 후자다.

이 책을 읽으며 맞아 그렇지 하고 다가온 구절을 두 개 적어본다면 이렇다
"너와 나 사이에는 '사이'가 있어.
우리가 친구 사이여도 그래.
아무리 사이좋은 친구라도
네가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네가 될 수 없으니까."

"우리 사이에 사이가 있어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
바위와 바위 사이에 틈이 있어서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내릴 수 있는 것처럼."

두 주인공은 양과 늑대다. 보통은 먹고 먹히는 관계로 나오지만 이 책에서 둘은 친구다. 그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조미자 작가님의 귀여운 그림 때문이다. 단순히 귀엽다는 말로는 뭔가 부족한, 예술적 귀여움? 신순재 작가님의 글이 절반의 아름다움을 담당한다면 나머지 담당은 조미자 작가님이다. 수채화의 자연스러운 붓터치와 번짐이 눈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아름답다. 언젠가 보았던 오래된 그림책에서 느꼈던 느낌이 나는 것도 같다.

"너와 나 사이에 ~~~가 있어."
라는 문장이 자주 반복된다.
딸기넝쿨이, 나비가, 길이, 시냇물이.....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 라는 문장도 의미가 깊다.
가장 새롭게 느껴진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또다른 사이들이 있어.
먼 사이도 있고 가까운 사이도 있지.
아무리 사이가 많아도 너와 나 사이는 변함없어."

관계에 성숙한 사람은 이 '사이'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복합성을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걸 인정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은 그 관계 자체마저도 산산조각을 내어버린다. 어른들도 많을테지만 나의 관심사는 주로 학생들이다. 특히 사춘기에 들어서서 또래관계가 가족관계보다 더 중요해진 아이들의 관계.

여기에서 집착은 금물이다. 소유욕 또한 그렇다. 잘못하면 지배욕, 조종욕구로까지 나아가는 비틀린 마음들을 많이 보았다. '사이'를 인정하지 않고 포개어지고싶어 안달하는 태도는 많은 무리수를 낳는다. 결국은 '사이'조차도 남지 않아 홀로 서서 울부짖거나 아예 마음의 문을 닫고 분을 삼키며 살아간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책은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층위대로 즐기고 해석할 수 있는 책이다. 직업적 눈으로 본다면 고학년 교실에서 관계 지도를 할 때 이 책을 도입으로 하면 참 좋을 것 같다.
- 너의 친구가 네가 될 순 없어.
- 너와 그 아이는 엄연히 다른 존재야. 포개질순 없어.
-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선이 있어. 친하다고 함부로 넘어선 안 돼.
- 혼자 있고 싶은 마음도 존중해 줘야 돼. 그럴 땐 흔쾌히 떨어져서 기다려.
- 세상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수많은 관계에 얽혀 살아가는 거야. 복합적인 다른 관계도 존중해 줘야 해.
- '내꺼' 라는 생각 금물이야. 내꺼가 못될 바엔 누구것도 될 수 없다라는 마음이 든다면 비극의 시작이야. 아니 범죄의 시작이랄까.

이상은 이 책과 달리 전혀 문학적이지 못한 나의 표현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하자.
"별과 별 사이 캄캄한 어둠이 있어서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이 별들의 빛남을 소중히 지키는 우리가 되길. 이 그림책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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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발 - 여섯 작가의 인생 분투기
김미옥 외 지음 / 파람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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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작가님의 페북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집근처 도서관에 신청했다. 작가님과 페친은 아니고, 작년에 이분의 책 두 권을 인상깊게 읽고나서 내가 유일하게 하고 있는 sns인 페북에서 팔로우를 했다. 그래서 가끔 근황을 보게 된다. 이 책은 단독저서가 아니고 어떤 강연에서 모였던 다양한 작가들이 의기투합하여 한꼭지씩 써낸 에세이집이다. 이들의 공통된 정체성을 말하자면 마이너라고 할까. (본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인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례인 것 같고, 사실 메이저와 마이너의 구분이 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다들 넘치도록 훌륭한 작가님들이시니.... 다만 엄청나게 고생하셨다는 것, 인생이 가시밭길이었다는 것 정도는 공통점이라 하겠다.

김미옥 작가님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미오기전에서 충분히 맛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어린시절 가정폭력의 기억이 조금 더 묘사되고 있었다. 칼에 대한 무의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그를 지배했을 정도의 폭력. 사람은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도 없고 가족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니 가족에 의한 악몽은 그렇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것으로 필사적으로 씻어내야 한다. 나라도 살려면 말이다. 가족의 희생과 사랑은 많은 작품들의 소재가 되곤 한다. 최근 것을 들자면 ‘폭싹 속았수다’ 같은 것. 하지만 그게 먼나라 이야기인 사람들, 남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함의 눈물을 삼켜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나이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냥 평상시에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투닥거리다가도 위기시에는 서로 돕는 정도라면 중간은 가는 것이다. 아니 중간보다 조금 더 위? 하여간 속된 말로 가족이 원수인 집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 교실을 거쳐간 많은 아이들 중에도.....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 가족 트라우마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겠으나, 망가짐이 필연은 아니라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님이 온갖 악몽에 지지 않았듯이. 쉽지는 않겠지만

두 번째 하서찬 작가님은 언젠가 한번 이름을 본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본 어떤 동화를 쓰셨나? 하고 봤더니 맞았다. 작품 중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은 <빨래는 지겨워>라는 동화가 한 권 있는데, 내가 그걸 아주 인상깊게 읽어서 리뷰를 자세히 써놓은 게 있었다. 그 리뷰의 제목이 ‘가족이 주는 상처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 이었다.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읽긴 읽었구나.... 작가님의 가족 이야기를 읽고 보니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 전체가 왜 시종일관 그 느낌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리뷰 중 이런 말도 적어놓은걸 보니, 작가님이 얼마나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반영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러한 아이어른 밑에서 자라는 아이 중 내적 힘이 강한 아이들은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어른아이가 되어 부모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놓은 판을 애써 제자리로 돌리거나 지킨다. [빨래는 지겨워]속의 아이는 때로 학교도 못가고 빨래를 한다. [악어가 된 엄마 아빠]속의 아이는 사람들이 악어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악어우리를 지킨다. 정말 안쓰럽고 대견하다. 이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3자는 기도한다. 제발 저 아이가 한계에 이르기 전에 부모가 철이 들기를. 혹은 아이가 더 철이 들어 자신의 삶과 부모의 삶을 이성적으로 분리하기를.”

여러 경험들을 종합해 보건대 전자의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인다. 사람 버릴 순 있어도 고칠 순 없다더니. 저자들은 모두 애써 후자에 이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이 작가님의 아버지가 가족 전체에 끼친 해악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편은 돈사고를 쳤고, 그 와중에 글을 써야 먹고 사는 작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수상작도 쓰시고 하셨네. 바라기는 그 일들이 경제적으로도 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 우리 집안에도 작가가 한 명 있는데, 그래서 그게 돈이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돈이 안되는 일에 지망생이 이토록 많은 직종이 또 있을까. 글을 쓴다는 건 대체 어떤 열망일까.

세 번째 김정배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신춘문에 200번 응모? 어떤 열망이 그 수많은 시도를 가능케 했을까. 결국 작가님은 스스로에게 ‘원고청탁’을 했고 그에 맞추어 성실한 글쓰기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도를 했는데 그건 ‘왼손으로 그림 그리기’ 였다. 나같은 사람이 주변인이었다면 참 쓸데없는 일도 가지가지 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도 또한 꾸준히 하자 의미가 생겨났다. 전시회도 열렸고, 그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었다. 사는데는 참 정답이 없다. 다만 흔들리지 않으려면 본인의 주관이 뚜렷해야 하겠다.

네 번째 김승일 작가님의 이야기는 너무 아팠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그 고통이 몸과 마음 모두 생생하게 다가왔다. 신체의 고통과 더불어 두려움, 수치심, 자괴감까지.... 그 시기를 그냥 버텨냈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어떻게 견뎠을까.... 그때의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걸까. 그 가해자놈은 지금쯤 천벌을 받았을까. 나라면 평생 그놈을 죽이는 상상을 하면서 살 것 같다. 하지만 작가님은 시를 썼고, 학생들에게 강연을 다닌다. 자신을 연 그 간절함에 대한 반응들이 도착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정한 마음을 지닌 자기 자신을 잘 지켜냈다. 오래오래 뒤척여왔을 그의 아픈 마음들을 깊이깊이 헤아려본다. 다정함을 지켜낸 마음 위에, 다정함을 지켜낸 마음이, 노을처럼 포개어지는 저녁이다." (169쪽)
참혹함을 이겨낸 그 다정함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지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그 다정함이 널리널리 가서 닿기를 바란다.

아픈 이야기 전에 이 작가님이 천문학자 지망생에서 문학도로 꿈을 바꾸게 된 중딩시절 이야기는 미소지으며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글에 대한 선생님들의 전폭적인 칭찬에 고무되는 모습에서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의 칭찬은 정확했네. 이렇게 아름다운 시인이 탄생했으니.

다섯 번째 박지음 작가님이 동질감을 표한 분은 김미옥 작가님이다. 두사람은 어떤 행사의 주인공과 사회자로 만났는데, 일곱째로 태어난 딸, 부모가 버리고 싶어했던 딸, 존재의 효용을 증명하려 악착같이 살아낸 삶 등에서 신기하게도 일치했다. 작가님은 그런 자신을 '바리데기'에 비유했다. 이 세대까지는 그래도 이렇게 신통한 강단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니 용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참 슬프고 두렵다.

친구 이야기, 친구 같은 사촌과 형제 이야기에도 공감했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일정 속에서 어거지로 떠난 여행에서 세상 풍파 날려보내며 하나되었던 그 마음을 기억한다. 추억과 아픔을 함께한 가족(친척)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강윤미 작가님은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육지로 대학을 오면서 홀로 외로운 시간을 많이 보냈다. 글쓰는 감성이 탁월하면서도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다. 어릴때부터 타고난 사람이 있더라고. 하지만 그는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경단녀(?)가 되었다. 아이들을 낳고 조력자 없이 양육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양육에 지친 일상과 예리한 감수성의 부조화는 그를 꽤나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던 것 같다.

시골에 살던 어린시절, 잠깐 맛보았던 피아노 레슨에의 미련을 평생 갖고 가는 모습이 나랑 비슷했다. (나는 아예 맛도 못봤지만) '취미로 하고 싶진 않아서' 시작하길 망설인다는 말이 뭔지 알것 같으면서도 나랑 다르다. 나는 그냥, 아름다움을 능숙하게 표현하고 그 표현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즉 예술의 소비자 뿐 아니라 생산자도 되고 싶은 거다. 재능이 없으니 이생망이긴 하지만. 그래서 난 작가님도 부럽다. 누구나 못가진 것을 동경하며 사는 것 같다. 아직은 가수로 치면 싱어게인(무명가수전)에 나올 작가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시라는 장르 자체가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외로운 분야이기도 하지만 작가님의 꿈과 독자가 만나는 접점이 많아지길 응원하고 싶다.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죽음처럼 두려워하는 실패란 무엇인가. 주저앉아버리지 않았다면,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애쓰고 있다면 지금도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 발자국들이 결국 어떤 무늬로 남을지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추스르고 다시 내딛는 수많은 발걸음에 이 책이 응원을 보내고 있다. 솔직하고 담담한 자신들의 이야기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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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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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 신청책이 들어왔다고 문자가 와서 찾으러 간 김에 신간코너를 살펴봤다. 담주에 휴일도 있으니 소설책 좀 빌려볼까 하고. 그랬더니 오쿠다 히데오가 눈에 띄는게 아닌가. 나는 소설을 잘 안읽는 편이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여러 권 읽었다. <남쪽으로 튀어>를 제일 먼저 읽었고 <인더풀>, <공중그네>로 옮겨갔는데 공중그네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던지 그 느낌이 생생하다. 리뷰를 안써놔서 내용은 다 까먹고 와, 뭐가 이렇게 재밌어 하던 느낌만 남아있다.

이 책을 대출해놓고 보니 개정판이네. <무코다 이발소>라는 제목으로 8년 전에 나온 책을 다시 펴냈다. 작가의 다른 책들에 비해선 인기가 적은 책이었던 것 같은데 왜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눈에 띄어 읽게 되었네. 전작들만큼 유머가 세진 않지만 은은하게는 깔려 있었고 재미도 은근히 있었다. 공감할 것도 많았다. 구판을 검색해보니 평점도 별로 안좋고 재미없다는 반응도 꽤 있는데, 세대가 다른 것 아닐까? 주인공 야스히코 같은 중늙은이(50대) 또래라면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위로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고, 아래로는 좌충우돌하는 젊은 성인 자녀가 있는 세대.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내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평생을 살았고 도시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홋카이도의 도마자와라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25년째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도마자와는 한때 탄광 덕에 번성했으나 이후 급속히 쇠퇴하여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이 자주 나오는데 이 상황 역시 우리나라의 어떤 지명들과 바로 연결할 수 있을만큼 유사하다.

그래도 소설이라 그런지, (소설이라 그런 거겠지? 일본의 촌락 문제가 우리보다 가벼워서는 아니겠지) 작지만 꽤나 낙관적인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야기의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까지 죽어라죽어라만 한다면 누가 희망을 입에 담을 것인가. 현실을 타개하려 몸부림을 쳐보는 것은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몸부림을 치는 동안만이라도 더이상 깊이 잠기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는 야스히코의 아들 가즈마사가 좌충우돌 대책없는 희망의 대표주자라 하겠다. 그 희망은 때로 한숨나오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결국 여기에서 위로와 든든함을 얻는다. 자기 입으로는 비관을 말하면서도 희망을 믿는 존재에게 기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것이 '촌락의 문제'이다. 고령화, 일손부족, 문화적 인프라와 시설 부족, 이런 문제는 양극화를 더욱 부채질하여 문제를 심화시킨다. 여기에 무슨 대책이 있겠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수업을 했었지. 이 책이 촌락문제 해결의 깃발을 휘두르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와 유사한 문제를 전반에 깔고 있는 책이라 내겐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촌락 문제를 바탕에 깔고 작가가 주로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다. 감정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점잖은 편인 야스히코가 무게중심처럼 가운데 서서 다양한 이웃들의 행동과 심리를 보여준다. 몇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연작소설 형식의 이야기다. 거기엔 도시에 나갔다가 가업을 잇겠다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무작정 좋아할 수 없어 착잡한 부모의 마음 포함)도 있고, 마을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공무원도 나온다. 어느날 쓰러져 실려간 여든 노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어야 할 현실적 어려움을 일깨운다. 40세 농부 총각 다이스케 씨가 중국인 여성들과의 선자리에 나가 겨우 신부를 구해와 가정을 이루는 모습 또한 이제 흔한 사례이다. 엄청나게 아는 척하는 이웃들과 엄청나게 숨고 싶어하는 다이스케 씨의 줄다리기를 보며 내 성격을 다시 상기하게 됐다. 나는 백퍼 다이스케 쪽인데. 도시의 익명성이 나에게는 너무나 편한데, 이걸 벗을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오려나.

그런가하면 오래전 마을을 떠났던 사나에가 40대 초반의 요염한 술집 마담으로 돌아와 야스히코 또래의 중늙은이들, 그보단 젊지만 중년인 남자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이야기, 마을이 영화촬영지로 정해져 한때 활기를 띠는 이야기 등은 웃음과 동시에 보통 사람들의 찌질한 심리를 잘 보여준다. 욕할 것까진 없는 딱 그만큼의 찌질함. 우리는 거의 모두 찌질하니까. 마지막엔 이웃의 자랑스러운 젊은 아들이 수배범으로 뉴스에 나오는 아프고 충격적인 사건까지.... 하지만 이 사건의 결말이 이 책 전체의 결말이 되는 히데오 식의 어둡지 않은 결말. 난 괜찮았다.

난 영화도 본 게 많지 않은 사람인데, 그중 몇편 본 일본영화 중에 이렇게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잔잔한 영화들이 있었다. 이 책도 꽤 재미난 영화가 될 수 있어 보이는데 왜 안 만들지? 혹시 나왔는데 내가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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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고라니 노란상상 그림책 121
김민우 지음 / 노란상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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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작업을 하시던 작가님이라고 하는데 그것과 관련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지만 만화를 읽는 느낌이 여러군데서 난다. 펜선이 돋보이는 그림체도 그렇고, 인물의 표정과 동작표현에서도 그렇다. 읽기 편하고 슬며시 웃음이 나며 은은한 감동도 있는 그림책이다.

배경이 시골 마을인 것도 좋다. 더구나 호란이네 집은 마당이 있는 1층 단독주택이다. 집을 나서면 논과 밭, 산을 다 볼 수 있는 동네. 어느날 호란이는 혼자서 고라니와 마주쳤다. 하교길인듯 책가방을 멘 채였다. 호란이 눈에 보인 고라니는 ‘황금 고라니’ 였다. 이 말을 하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가족도 친구들도. 오히려 놀림만 당하고 호란이는 화가 잔뜩 났다.

오직 한 사람 할아버지만이 호란이 말을 믿어준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할아버지는 어느 주말 풀이 죽은 호란이에게 산에 가자고 제안하신다. 함께 고라니를 찾으며 할아버지는 황금 고라니를 보면 바로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알려주신다. 해가 뉘엿하도록 고라니는 눈에 띄지 않고, 돌아가려는 바로 그 때! 두 사람은 보았다. 황금 고라니를! 이번에는 어미와 새끼로 보이는 두 마리였다. 잠깐 눈이 마주쳤던 고라니는 뒤돌아 달려갔다. 깜짝 놀라 정신이 없었던 호란이는 뒤늦게 소원을 안 빌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할아버지는요?”
“우리 호란이 소원이 이뤄지는게 할아비 소원이지.”
이렇게 하여 할아버지는 놓친 손녀의 소원을 되살려 주신다.

황금 고라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작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있었다는 것인지, 호란이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인지. 내 느낌으론 오후의 햇살이나 저녁노을에 비친 고라니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말하자면 빛의 예술?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손녀의 소원을 지켜주신 할아버지, 아무도 믿지 않을 때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되어주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니까.

“이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이 마음이 오기까지가 참 중요하다. 그때까지 그 단 한 사람의 존재는 참 중요하다. 마지막 장은 “내 소원은......” 하며 말줄임표로 끝나는데, 아주 여운이 많이 남는 결말이다. 마주보고 있는 고라니의 땡그란 눈이 궁금해하는 어린이 독자들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혹시 소원을 되살려 주신 할아버지에 대한 소원이 아닐까? 이렇게 마음은 돌고 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라는 뜻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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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로렌스! 안녕, 소피아! 웅진 세계그림책 275
도린 크로닌 지음, 브라이언 크로닌 그림, 제님 옮김 / 웅진주니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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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가인 도린 크로닌 작가의 책 중에서 읽어본 작품이 있다. 작품이 아주 많으신데 나는 탁탁 톡톡 음매~젖소가 편지를 쓴대요라는 유명한 작품을 읽어보았다. 그림작가 브라이언 크로닌 작가님은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두 작가님의 성이 같네?) 한 번도 본 적 없던 것 같은 새로운 그림이었다. 평범해 보이는데도 어쨌든 처음 보는 느낌이 확실한, 그런 그림이었다.

 

용기가 없고 경계가 확실한 두 주인공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진 않고 대체로 호의를 갖고 있지만 이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편하지 않다. 적당히 떨어져서 이야기 나누고 만나서 뭘 하는 건 용건이 있을 때만 하는 게 좋다. 남의 영역에 들어가는게 부담스럽고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 또한 사양한다. 이유는 아마도 게을러서인 것 같다. 귀찮은 게 싫어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용기 때문이었다. 나도 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주 이유는 게으름.^^;;;

 

로렌스는 사람이고 소피아는 새다. 로렌스는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고, 소피아는 나무 밑으로 내려올 용기가 없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보게되자 인사했고 호감을 표시했다. 그들이 만나기 적당한 장소는 마당. 로렌스는 여전히 울타리 안에서, 소피아는 나무 위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둘이는 살짝 겹쳐진 둘의 교집합 영역 안에서 최대한 함께 놀았다. 축구도 하고, 연극놀이도 하고.... 그들은 최대한 둘 간의 거리를 좁혔다. 소피아는 둥지를 최대한 가깝게 옮기고 로렌스는 나무 옆에 텐트를 치고. 그런 상태로 매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 경계마저도 의미없는 일이 일어났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서로에 대한 걱정은 그동안 지키던 경계를 단번에 넘어서서 상대방의 영역 안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넘어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지.... 둘은 이제부터 아무 경계 없는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은 두려움을 넘어선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성경구절과 같이. 그리고 그건 내 영역을 침범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두려움도 마찬가지로 넘어서게 되는 것 같다.

 

각자의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마음이 있는데 섣부르게 사랑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이들었지만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 두려움이 큰 탓이다. 다칠까 봐, 무안할까 봐, 실망할까 봐. 허상일까 봐. 부질없을까 봐. 이유는 다 댈 수도 없이 많다.

 

결국 선택일 것이다. 의지에 의한 선택도 있지만 이 책처럼 엉겁결의 선택도 있지. 우리에게 그 선택이 다가온다면 우리의 삶에 그만큼의 변화가 생길까? 이 책은 어른들에게 지나온 삶 전체를 생각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도 아주 잘 맞는 책이다. 폭풍우의 밤이 지나고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감동이다. 게다가 너무 귀엽기까지. 이 책을 보고 또 보며 소중하게 아끼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참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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