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하루
차인표 지음 / 사유와공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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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차인표 님은 진정 작가가 맞구나 생각했다. 배우로 각인된 분이어서 본업은 아닌 걸로 생각했던 걸까. 스토리와 문장들에 좀 놀라면서 읽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로 유명한 분이고 나의 2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윙크를 날린 그를 에세이도 아닌 장편소설로 만난다는게 상상이 잘 안 갔기 때문인 것 같다.

이분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언젠가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이라는 작품이 유명해져 역주행을 할 때부터다. 궁금해서 도서관에 가면 한번씩 찾아보곤 했었는데 항상 대출중이었고 나도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잊어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대출중이었지만 타관에 이 책이 한 권 남아있어서 상호대차로 대출해 읽어봤다. 읽고나서 <언젠가 우리가...> 책에 당장 대출예약을 눌러놓았다. 차인표 소설의 독서가 앞으로 몇권 이어질 듯하다.^^

이 책은 <오늘예보> 의 개정판이다. 3인의 인물들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얽힌 책이었고 개정판에선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추가되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무척 비극적이다. '코믹 감동 소설' 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물론 대사 등이 무척 웃기니까 코믹 맞지만 이렇게 비참한 스토리에 '코믹'자를 붙이는 게 맞나 읽는 내내 생각했다. 하지만 후기 성격의 마지막 장, [20년 후 그들의 하루]를 보고는 푸하하 웃고 완전 인정하고 말았다. 비참한 인생들은 어떤 선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이 후기는 없어야 현실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있어 좋았다. 한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걸 '차인표식 이야기'라고 부르면 안될까. 이런 이야기도 있길 나는 바라니까.

각 편의 구성은 꿈-오전-오후-해 질 무렵으로 모두 동일하다. 이런 면에서도 상당히 짜임새 있다고 느꼈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에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 등장시점이 절묘한 것도 웃음포인트 중 하나다. 차인표식 작명도 코믹하다.

첫 인물은 '나고단' 씨다. 그는 키가 작아 1번을 벗어나지 못했던 어린시절부터 한번도 기를 펴보지 못하고 살다 기껏 벌인 일들은 다 말아먹고 40대인 현재 노숙자다. 그가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동료(?) 노숙자들을 보며 느낀 마음에 너무 공감이 갔다. 내 마음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섬뜩한 마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이미 배고픔이 먹어 버렸다. 그런데 인간에개는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억울함이다. 무엇이 억울하냐고? 자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죽도록 억울한 것이다." (27쪽)
고단 씨는 자신이 이걸 잘 아는 이유가 초딩 시절 선생님과 친구들이 심어놓은 '독 가시' 때문이라고 말한다. 느닷없이 민주적 방법이라며 자유 짝짓기 방식이 도입된 학교. 키 1번 고단 씨를 고르는 여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반에는 코흘리개나 코딱지 같은 녀석들도 있었기 때문에 고단 씨의 마음에는 일말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끝까지 남은 건 고단 씨였다. 그 억울과 수치의 독 가시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이 대목을 읽으며 찔리고 염려가 되었다. 저렇게 사람이 사람을 지명해 고르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씩 학생들이 강력하게 원할 때 버스 좌석이나 모둠구성을 하며 자유방식을 사용해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이런 상처가 남지 않았기를....

그는 결국 많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다는 한강 다리로 갔는데, 거기서 만난 공익들, 드라마 엑스트라 포졸과 만나 실랑이한다. 이들이 다음 편 인물로 등장할 때 너무 재밌었다.^^

두번째 인물은 이보출 씨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직업이 엑스트라, 즉 보조출연이다. 이 편에선 보조출연자들의 고충과 애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보출이 아닌 정식 연기자, 그것도 톱 주연을 주로 해온 차인표 씨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그래도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일종의 동료여서인지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쪽 계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쓸 수 없는 내용이니까.

보출 씨의 역경은 단지 보출이어서가 아니고, 그가 빚을 지고 쫒기며 아들을 누나 집에 맡겨놓고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빚쟁이 또한 인생이 괴로운 사람이다. 그가 세번째 인물인 박대수 씨다.

박대수 씨는 조폭 출신이고 전과도 있다. 뒤늦게 딸을 낳고 착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딸이 난치병에 걸려 위독하다. 골수 기증자가 필요한데 희귀 혈액형이다. 그는 최후까지 남은 부하, 충성심은 끝내주지만 눈치와 센스는 디럽게 없는 김부장을 대동하고서 돈떼먹고 날른 보출 씨를 찾아다닌다. 정말 싫은 종류의 사람들이지만 아픈 딸 봉봉이 얘기가 나오면 너무 슬퍼....ㅠㅠ 그는 돈을 찾겠다고 눈이 벌게서 다니는데 병원에선 마지막을 예감한듯 "아이 옆에 있어주세요" 라고 전화가 와....ㅠ

마지막, 개정판에서 추가된 인물은 별명이 독자(독구은둔자)인 정유일 씨다. 지금은 공익이라 초소 근무를 하는데, 제대 후에 아무 대책이 없다. 한달에 두번씩 꼬박꼬박 헌혈을 하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비명횡사하시고 유일 씨는 더 안으로 웅크러들고 식욕만 비정상적으로 폭발하여 100키로 거구가 되었다. 거구인데 안쓰러.... 아들 가진 엄마 마음인지...ㅠ 유일 씨는 꿈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나는데 아버진 참 좋은 사람인거 같다. 마지막 꿈에 아버지는 기차 같은 것을 타고 떠나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슬픈 날, 힘든 날, 고통스럽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에만 집중해. 딱 하루 동안만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잘 살아 보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술이나 담배를 끊고 싶다면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만 끊어봐... (중략) ... 신에게 내일까지 보장해 달라고 매달리지 마. 내일은 내일 살면 돼. 오늘은 오늘을 살아." (280쪽)

눈물이 핑 돌았던 장면은 나고단 씨와 정유일 씨가 연결된 장면이었다. 나고단 씨가 죽으려고 하던 순간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물론 신의 음성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소설적 표현으로는 좀 안맞다고 생각하며 넘긴 장면이었는데, 마지막 편에서 보니 그건 하늘이 아닌 정유일 씨의 목소리였던 거다. 둘다 모른 채로 고단 씨의 귀에 들린 그 소리. 신은 그렇게 일하실 수도 있는 거다.

웃기면서도 애절했던 장면은 카메라 앵글에서 알짱대는 고단씨가 안비키고 고집부리자 "놔둬, CG로 지우게." 하자 고단 씨가 열폭하는 장면이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지운다'는 말에 열폭하는 것, 이거 코믹 장면일 수도 있지만 엄청 현실적이라고 난 생각했다. 나의 존재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존재로 기뻐하고, 누군가는 나의 부재로 슬퍼하고.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죽겠다고 나선 길에서 말이다.
"지우지 마, CG로 지우지 말라고. 난 아직 살아있어. 너희들이랑 똑같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 엉엉. 니들이 뭔데 날 지워. 엄연히 살아 있는데 왜 지워... (중략)... 지우지 말라고, 이 개새끼들아." (89쪽)

이렇게 돈없고 친구없고 가족없고 (혹은 아프고) 비참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중 네 장면을 작가는 잘도 포착했고 그것을 참 절묘하게도 잘 엮었다. 그러나 마지막 후기, 여기서 어떤 독자들은 홀딱 깰 수도 있겠다. 역시 배우라선가 참 드라마스러운 결말이네 할 수도 있겠다. (진짜로 분위기가 딱 드라마적^^)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게 좋았다. 하나의 기회와 실행에서 번져간 도미노가 행운과 행복의 도미노가 된 이 이야기가 좀 허황하긴 해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절묘하게 얽히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들 삶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전 청춘을 같이 보낸 친구를 만나고 왔다. 바빠서 못만난 세월이 길지만 아직도 "아이그 이것아" 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 차가운 밤의 거리에서 헤어지며 친구가 내 얼굴을 장갑으로 감싸며 인사를 해주었다.
"행복해라 이것아.^^"
대화 중 딱히 이유 없는 내 마음의 불안을 캐치한 친구가, 차인표 작가님과 똑같은 인사를 해준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인 내가 "당신은 소중해요."라는 인사를 많이 하며 살아왔던가 돌아보게 된다. 이 인사가 많은 독자들에게 전해지길 빈다. 이 인사를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차인표 작가님의 창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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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우주가 들린다면 창비청소년문학 139
최양선 지음 / 창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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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싱(fixing)이라는 존재가 보이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보건교사 안은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내용은 완전 다르다. 안은영이 보는 것이 주로 젤리 모양의 흉칙한 것이고 물리쳐야 하는 악한 존재라면,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는 픽싱은 고양이, 새, 돌, 물고기, 호랑이 등 모습이 다양하며 무조건 악한 존재도 아니다. 안은영에서처럼 물리치는 게 아니고 '잘 다스리고 품어야 하는' 존재라고 할까.

창비 청소년문고로 나온 책이고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이다. 화자인 수온이는 열한 살 때부터 타인의 픽싱을 보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의 조건은 '마음을 주고받으면 보인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픽싱은 있고 특별한 사람 눈에만 그게 보인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안은영이 그랬듯이 그걸 본다는 것은 보통 사람과 다른 일이고 괴로운 일이었기에 수온이는 되도록 보지 않으려 스스로 조용히 고립된다. 상황마저 마침 그랬다. 아빠와 단둘인데 아빠마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떠도느라 수온이는 혼자 사는 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다. 고딩이지만 학원도 안 다니고 생활을 위해 국수집에서 알바를 한다. 이 국수집은 중요한 배경이다.

홀로이던 수온에게 친구가 생기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웃사이더인 도경이다. 수행평가 팀을 짤 때, 아웃사이더는 서로를 알아보는 건지 도경이가 다가와 짝을 청했고 과제를 해나가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특별한 친구가 된다. 둘의 발표 주제와 내용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심었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기쁨, 슬픔, 불안, 환희, 미움 등의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의해 변화합니다. 감정의 에너지와 파동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로 분열되거나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95쪽)

우주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늘 읽고 있는 도경이의 이런 말에서도 작가의 생각이 엿보인다.
"우주와 인간은 연결되어 있어.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하나의 작은 우주인 셈이지." (77쪽)

그들이 보는 픽싱을 통해서 국수집 아저씨와 딸, 수온이의 옛 친구 다미와 엄마, 도경의 수영선수 시절 친구 은표, 수온이 아빠 등 인물들의 내면 문제와 그 해결이 보여지는 구성으로 되어있는 이야기다. 꽤 흥미롭고 잘 읽히는 책이며 다양한 상황과 마음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어떤 상태에 대해서는 경고의 빨간불도 감지하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내게는 다미와 다미 엄마 스토리가 가장 관심사였는데, 다미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심리묘사나 배경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 그 부분은 살짝 아쉽다. 다미가 엄마를 극복한 것은 다행이지만 나는 그 엄마도 좀 이해해보고 싶었나보다.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서 수온이나 도경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고립되었지만 무너지거나 매몰되지 않고 외로움의 힘으로 세상의 근본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맛있는 밥이라도 사주고 싶다. 아마 그런 접점을 찾을 기회와 주변머리가 내게 없겠지만.... 아이들이 이런 책도 읽으며 서로 마음을 연결하고 자신의, 타인의 우주를 귀하게 여긴다면.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면 좋은 세상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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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국보 : 상·하 세트 - 전2권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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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영화까지 봤다. 리뷰가 책 리뷰가 될지 영화 리뷰가 될지 잘 모르겠다.^^;;; 먼저 알게 된 건 영화인데, 상영시간이 3시간이나 된다고 해서 망설이고 있다가,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책을 발견하는 바람에 “둘 다 보자!”가 되어 버렸다. 휴가중이라 가능했다. 책이 상하권 합하면 750쪽이 넘는다. 게다가 영화도 길지, 난 능력자가 아니라서 이런 감상은 시간이 많아야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주인공 키쿠오의 소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담았다. 그의 일대기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폭력에 목숨을 잃는 장면을 목도한다. 난 솔직히 책과 영화 모두 이 장면을 보면서 혀를 찼는데.... 일본 영화나 우리 영화나 조폭 얘기가 나오면 혐오의 감정이 끓어오른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기껏해야 주먹질 칼질 도끼질 밖에 못하는 것들이 예쁜 여자 옆에 끼고 부하들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폭력으로 얻은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꼬락서니라니.... 키쿠오 아빠도 솔직히 마찬가지지. 멋진 척 해봤자 조폭이 조폭이지 뭐. 그쪽 파의 신년회에서 소년 키쿠오는 가부키 춤을 선보이는데, 그때 당대 최고 배우 한지로가 초청받아 참여했다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그것도 잠시, 다른 파의 습격을 받아 잔치 자리는 난장판 피바다가 되고.... (아 역겨워) 아 그리고 걔네들 역겨운 짓의 최고봉 있잖아. 작두랑 신체 절단. 진짜 지구 최고 욕을 해도 모자란다. 책에는 좀 나중에 이 장면도 나온다. (영화에는 다행히 안 나왔다.) 인간은 어떻게 두면 그렇게 폭력을 자행하게 되는 걸까. 나도 내 안의 폭력성을 느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라고 하겠는데, 나처럼 쫄보는 그걸 발현하지 못하고 겁대가리 없는 인간들은 발현하고 그러는 걸까? 인류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 전쟁의 역사, 피의 역사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는 걸까.

사실 이건 이야기의 발단에 불과하니 이렇게 길게 말할 것도 못되는데 내가 너무 혐오하다 보니 흥분했다....ㅠ 이렇게 해서 아버지를 잃고 모든 기반을 상실한 소년 키쿠오는 그날 함께 있었던 한지로 가문에 맡겨져 오사카로 오게 되고 가부키 연습생이 된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당시 가부키는 세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는 이미 수련을 받고 있는 친아들, 슌스케가 있었다. 둘의 경쟁 관계, 긴장 구도는 작중 피할 수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들은 형제처럼, 친구처럼, 동료처럼 자랐다. 그들의 인생인 가부키를 함께 수련하며. 키쿠오가 맨처음부터 맨마지막까지 나오는 제1주인공이라면, 슌스케는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오고 조금 먼저 사라지는 제2주인공이다. 난 그냥 그들 둘이 투톱인 이야기로 읽고 싶었다. 그렇게 봐도 무리는 없겠다.

여기서 가부키 얘기를 좀 해보면, 나는 사실 일본의 전통 예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가부키도 그 여장 배우의 모습이 일본 디자인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익숙한 정도다. 영화를 보며 그 뛰어난 영상미에 매료되었지만 솔직히 그 장르 자체의 매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는 가부키라는 장르보다도 예술(무대예술) 그 자체를 다룬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예술을 향한 열정,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인가. 그건 인생 전체를 걸 만큼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사라져가는 장르의 예술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배우들을 보면서, 이 책의 타케노처럼 쉽게 말할 수 있다.
“가부키 배우라는 사람들은 이런 지루한 공연을 진심으로 대단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억지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 아니냐고.” (상권 167쪽)
(이렇게 말한 타케노는 뒤로 갈수록 달라진다)
솔직히 가부키는 잘 몰라서 생각조차 안해봤고 그 외 시들어가는 예술 장르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도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기능을 전수받은 이들이 그것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 또한 생존의 욕구이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그 둘이 무대에 데뷔하는 날, 한지로 씨가 격려한 말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하루라도 연습 쉰 적 있었니? 네가 무대에서 춤동작을 까먹어도, 네 몸이 알아서 춤을 춰 줄 거야.” (상권 181쪽)
나는 평생 무엇을 이렇게까지 수련한 적이 없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그 깊이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자신은 없고, 부럽기는 하고.^^;;;

둘의 필연적 갈등이 떠오른 것은 한지로 씨가 부상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의 대역을 당연히 아들이 하게 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지로 씨는 키쿠오를 지명했다. 재능이 피를 이겼다고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때 못나게 굴지 않는 슌스케의 대응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버틸 수는 없었나 보다. 어느 날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잠적해 버렸고 지방을 떠돌다 10년이 지나서야 다른 가문의 명배우 눈에 띄어 다시 중앙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둘의 운명은 계속 교차하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전화위복이 되었다가, 전복위화가 된다. 칭찬과 갈채를 받는가 하면 억울한 비난으로 매장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그들도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이른다. 그래도 여장 배우로서의 아름다운 선을 유지하는 게 참 놀랍다. 작중 가장 흐뭇하고 안정된 시기는 그들이 함께 무대를 만드는 콤비 시기였다. 영화도 이때의 영상이 참 멋지다.

그러나 행복은 늘 왜 길지 않은가.... 슌스케에게 닥쳐온 고난.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자 하는 그의 집념을 뒷받침해주며 알맞은 상대역을 해준 사람은 키쿠오. 영화에선 그 마지막 무대에 많은 관객들이 울컥하며 가슴을 부여잡았을 것 같다. 때론 갈등했지만 둘은 정말 아름다웠다. 훌륭한 배우의 자식과 제자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3시간이나 되는 영화의 마지막은 키쿠오의 노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잘생긴 배우라서 머리만 하얗지 얼굴은...^^) 후반부로 갈수록 책과 영화는 많이 달라진다. 특히 키쿠오가 젊은 시절 만났던 요정의 게이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야노에 대한 서사가 많이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딸이 상처받은 시점이다. 그가 신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딸이 뭘 기도하냐고 묻는데 그때 그는 “기도가 아니라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대답한다.
“가부키를 잘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일본 제일의 가부키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그 대신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영화에선 이 장면에서 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와같이 이 작품에선 주인공들이 인생을 바쳐 (어쩌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바쳐) 예술을 추구한다. 예술이란 뭐길래 그럴까.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막이 내린 무대에서 키쿠오가 눈물을 흘리며 내뱉은 “아름답다...”라는 말이다. 그래 예술을 아름다움이랑 동의어로 봐도 좋겠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도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때로 그들은 그 안에 갇힌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에서는 그를 비단잉어로 비유한 부분이 나오는데 비유가 절묘해서 그 심정이 이해되었다. 갇힌 비단잉어. 하지만 그 잉어는 스스로 자유를 찾는다.
“꺼내 줘 꺼내 줘 하고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는데 모두가 알아채지 못하고, 아니 모두가 모르는 척을 하고 가만 내버려두었던 그 잉어는, 어느새 그 작은 수조 속에서 맑은 강물을 상상하기 시작했던 거겠지요. 맑은 그 강물에서 마음껏 헤엄치기 시작했던 거겠지요.” (하권 336쪽)

[예술 안에 갇힌 그들이 예술 안에서 자유를 얻다.]
영화평론가는 아니지만 이걸 나의 한줄평으로 삼겠다. 별점은 4.5점!^^

사족 : 책이 재밌고 지루할 새가 없는데 나한테는 쭉쭉 나가진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방대한 서사이다보니 등장인물이 많은 편인데 일본 이름들은 왤케 헷갈려...^^;;; (이중 많은 인물들이 영화에선 생략되기도 했고 얼굴과 같이 나오니까 책처럼 헷갈리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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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신
한윤섭 지음, 이로우 그림 / 라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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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꽤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풍기고, 내용 또한 그것을 향해 독자를 집중시키는 책이다. 은근슬쩍 웃기면서 한자락 보여주고 지나가는 방식이 아니고 아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고 할까. 희곡과 동화로 왕성하게 이야기를 펼치시는 한윤섭 작가님의 책이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

"이야기의 시작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시각에 나도 동의하고, 누구나 이야기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이 책의 주제에도 공감한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일 같아 보이는 그 '이야기'가 사실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있으며 결국 쓸데없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물론 그걸 직업적으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재능을 가지면 안되니까 말이다. 프레드릭이 있고 다른 쥐들이 있었듯이. 그러나 그게 프레드릭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같은 평범인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바로 '이야기'!!

이 책은 액자 형식인데 바깥쪽은 아주 얇고 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쪽과 바깥쪽을 연결하는 매개는 <이야기의 신>이라는 책이다.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제목이 손글씨로 쓰여 있고 속이 빈 책이었다. 노트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듯한. 여백은 채우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누구든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다. 이 책의 '나'는 열두살에 동네 놀이터 벤치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이 책을 보게 됐고 할머니에게 이끌려 할머니와 주고받듯 이야기 만들기를 경험하게 된다.

초등학교 국어 교육과정에도 이 '이야기 만들기'가 들어있다. 작년 4학년 때도 한 단원이 통째로 창작 단원이었는데 2학년으로 와 바뀐 교육과정을 보니 마지막에 '나도 작가'라는 단원이 있다. 2학년 수준에서는 '뒷이야기 이어 짓기' 정도로만 나와 있지만 전체 창작도 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쓸 데 있는 생각만 하면 너무 재미 없을 거야. 아무 것도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상상으로 가는 문이야." (66쪽)
이 말대로라면 어린 아이들이 더 쓸데없는 생각을 잘하고 상상력도 풍부하니 이야기도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준 할머니의 설명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아주 작은 점처럼 나타나. 그 작은 점이 나타나면, 집중을 해서 그 점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거야. 그러면 작은 점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거지. 우주의 빅뱅처럼. 이야기도 똑같은 원리야." (27~28쪽)
그 점은 낱말 하나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고 그림의 한 장면일 수도, 꿈의 한 장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살면서 저런 빅뱅의 체험을 못해 보았지만, 아이들을 인도해갈 수는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4학년 이상이라면 이 책을 함께 읽고 불씨를 당긴 후 시작하면 참 좋을 것 같다. 혼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길 작가님이 바라고 쓴 책 같은데, 함께 읽기를 한다면 훨씬 더 쉽게 재미있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해가면서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AI 생각이 나네.... 난 일부러 피하듯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몇가지 설정해주고 지시하면 아주 그럴듯한 창작품이 튀어나오는 세상이잖아.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이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난 모르겠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AI 수업 연수에서 이런 창작 관련 도구들을 소개해주시고 결과물을 보여주실 때 난 단번에 거부감이 들더라구. 뻔지르르하면 뭐하냐. 걔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닌데. 더 무서운 거는 그게 본인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야. 깡통이 속에 꽉 차있다고 착각하는 거랑 똑같지 않아?

모르는 소리 말라고, 그렇게 시대에 뒤떨어져서 어쩌냐고 걱정한다면 괜찮아, 나 이제 낼모레 퇴직 할거거든. 내가 계속 남아있다면 이런 책 같이 읽고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쓸 거야. 그중에 하나 골라 도화지를 접어 장면마다 그림도 그려넣어서 그림책도 만들 거야. 그걸 집에 가져가면 엄마가 바로 재활용박스에 넣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시대가 가는 건가... 그럼 그때도 '이야기'는 소중한 것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오늘 리뷰는 이렇게 모르겠다로 마쳐야겠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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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사냥꾼
세라핀 므뉘 지음, 마리옹 뒤발 그림, 성미경 옮김 / 분홍고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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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아마도 내가 평생 가보지 못할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만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그런 사람들도 만날 수 없으니 모르는 채로 살아가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책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유리라는 아이를 만났다.

 

시베리아의 환경은 혹독하다. 그런 곳에서도 환경에 적응한 동식물들이 있듯이 사람들도 추위를 견뎌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살던 터전은 더 이상 절대적일 수 없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떠나간다. 유리의 이웃들도 그렇게 떠나갔다.

유리가 사는 곳에는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 태어나 쭉 살거나, 아니면 떠나가죠.”

 

이 책은 자연 다큐멘터리 그림책이라 할 만하다.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의 모습과 그곳의 생태를 잘 소개하고 있어서 정보책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혹독한 환경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주변부에서, 아니면 껍데기에서 깨작깨작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얼음 사냥꾼이라는 일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일은 바이칼 호수의 얼음을 잘라 집집마다 날라 주는 일이다. 겨울 동안 수도를 쓸 수 없는 이곳 사람들은 이 얼음을 녹여 생활용수로 사용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물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다. 바이칼 호수는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 저장고라고 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리가 서울-부산 거리보다 기니 정말 바다 같은 호수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겠다. 윗 문단에서 표현한 지구의 중심부에는 이렇게 깨끗한 자연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너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위태롭겠지? 여기까지 침투한다면 그냥 지구는 폭싹 썩어 문드러진 것이겠지. 제발 그렇게 되진 않기를 이 책을 보면서 비는 마음이 되었다.

 

호수 속에서, 호숫가에서, 호수 위 하늘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도 소개해주어서 좋았다. ‘오물이라는 다소 어감이 안좋은(?^^) 물고기 이름도 처음 알게 되었다. 새끼들을 품고 잠든 담비, 북극여우, 눈산양 등 동물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다.

 

유리가 부디 그곳에서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주변부에서 깨작거리며 사는 내가 부디 그들의 삶에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에서 만난 친구로서 유리와 이웃들에게 안녕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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