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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름 ㅣ 소설의 첫 만남 22
권여선 지음, 박재인 그림 / 창비 / 2021년 7월
평점 :
도서관에서 권여선 작가님 책을 한권 빌렸는데 옆에 아주 얇은 이 책이 꽂혀 있었다. 오 금방 읽겠다 싶어서 같이 빌려왔고, 편한걸 선호하는 나는 원래 빌리려던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생각보다 더 짧은 책이었다. 중편 정도도 안되고 단편인 듯했다. 단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작품 분량에 비해서 여운은 깊고 길었다. 그러니 충분히 곱씹어 감상하라고 따로 출간한 것일까...? 어쨌든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책이다.
등장인물은 딱 둘이다. 50대로 짐작되는 엄마와 20대의 딸. 나와 비슷한 상황이다.
다른 점도 있다. 나는 평생 하던 일을 올해 그만두고 퇴직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엄마는 아직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완벽히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다는 점. 독립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연을 끊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 만 가닥이든 끊어 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 여야 했다." (21~22쪽)
딸 고2때 이혼하고 집을 나온 엄마는 이런 생각으로 누구와도 왕래 없이 혼자서 살아간다.
"당분간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73쪽)
여기에 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점이 놀랍다. 세상에 딸 아닌 어떤 존재가 이렇게 할까. 아들도 아주 드물게는 할 수 있겠지. 딸이라고 다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들 엄마들이 딸 엄마들을 부러워하는 건 대부분 이렇게 최후의 친구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딸이라서가 아닐까.
아빠의 재혼을 앞두고, 딸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1박2일의 여행을 제안했다. 못이기듯 따라나선 그 이틀이 이 책의 내용이다. 그들은 여행동안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약속한다. "반희 씨" "채운 씨" 이런 식으로.
방송 관련 현장 일을 하는 듯 보이는 딸은 큼직한 SUV 차량을 렌트해와서 산속 펜션으로 엄마를 이끈다. 차 안에서, 숙소에서 그들은 각잡고 대화를 한 건 아니지만 할 말들은 다 했다. 돌아오는 길 엄마와 딸은, 특히 엄마에게는 아주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나는 처음에 저렇게 벽을 치는 엄마를 이해했다. 이혼, 요즘 세상에 그게 뭐라고 인생에 오점이라도 남긴 듯이 주변을 끊어내나 하겠지만, 평생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은 포기하고 손을 놓아버린 엄마의 상한 자존심을 알 것 같았다. 단편이라 그간의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짐작을 했다.
아예 안나오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의 기억 소환에서 딸 열 살때의 일이 나온다. 그날 참을 수 없었던 엄마는 가출을 했고 남편과 아들의 문자가 빗발쳤다. 결국 엄마는 밤을 넘기지 못하고 귀가했는데, 바로 '채운이가 울고 있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그때 채운이는 엄마에게 안기지도 않고 눈을 흘기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엄마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서 엄마는 이후 몇년을 더 참은 것 같다. 열살에서 고2때까지. 남편과 무슨 갈등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인내의 과정에 엄마 자신은 없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큰 차로 산길을 운전하며 여행을 주도하던 씩씩한 딸이 공황 비슷한 증세를 보인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장면을 보며 '모자무싸' 드라마의 변은아가 생각났다. 버려진다는 공포감은 그런 것인가보다. 그들이 최악까지 가지 않은 건 다행히 변은아에게는 따뜻한 등을 내어준 새할머니가 있었고, 채운의 엄마는 이별을 몇년이나마 보류하고 더 보살펴주다 떠났다. 그래도 변은아는 어떤 장면에서 코피를 흘리고, 채운에게는 호흡곤란이 찾아온다.
채운이 '미래완료'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때 나는 이 책이 비록 단편이지만 안 보인 사건들을 구체화하고 상세화해서 드라마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16화는 너무 늘어지고, 8화 정도로? 생활 밀착형 드라마이면서 매 화마다 가슴에 꽂히는 단어들을 던져주는 드라마. 그 낱말 중 하나는 '미래완료'다.
"엄마, 나는 미래 완료라는 말이 그렇게 슬퍼. 언제부터인가 난 알았던 것 같아.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엄마가 나간 다음에 나 혼자 엄마 없이 살 거라는 걸. 나 고2때 진짜 엄마가 이혼하고 나갔잖아? 내가 상상한 그대로 미래 완료가 된 거야. 그렇게 될 줄 다 알면서 모른 척 살아온 거 같았어. 그리고 얼마 안 가 더 나쁜 미래완료가 생겨난 것 같았어.... (중략) .... 그러면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숨을 못 쉬겠어." (81쪽)
속소에서의 밤, 맥주 기운을 빌려서인지 채운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잠이 든다. 딸은 나와 달랐으면 하던, 그래서 천가닥 만가닥의 실이라도 끊어내려 하던, 추호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결벽스러운 어미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중간이라는 건 참 어렵다. 얼마전 읽었던 [용궁장의 고백]이라는 책에서는 부모가 천륜이라는 실을 물귀신처럼 틀어쥐고 자식의 피를 빨더니, 이 책의 엄마는 조금이라도 더럽게 얽힐까 봐 그렇게나 조심을 하네.... 하지만 20대의 딸이 정말 어른이네. 아직도 엄마 생각하며 사는 어린애 면도 있지만 그걸 이렇게 풀어가니 어찌 어른이 아닐소냐. 결국 모녀는 다소 구질구질하게 엉키더라도 인연의 실은 끊지 않고 살아갈 듯하다. 누추한 엄마 집에 놀러가고, 밥도 얻어먹고 그러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엄마의 결벽스러운 면과 독립적인 태도가 딸에게 신뢰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징징대는 어른보다 얼마나 낫냐고. 공공체육센터 청소일을 하고 감염병으로 (코로나 때겠지) 문을 닫자 음식솜씨를 발휘해 반찬가게에 납품을 하는 성실함과 생활력. 사실 이런 면이 있으니까 딸도 손내밀 수 있는거고 관계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홀로서기가 먼저고 다음이 관계다.
나 포함 수많은 엄마들의 모녀간, 모자간 아름다운 관계를 빌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