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여름방학 보름달문고 97
이퐁 지음, 오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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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나 환상적인 생각의 조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겠다. 우리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이 있다가 스스르 녹아 없어졌느냐, 용케 남아서 조각들이 튼튼하게 연결되어 구성되었느냐의 차이 아닐까. 작가님들은 후자이겠다. 나는 당연히 전자고. 그래서 나같은 독자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 아련한 추억같은... (마치 전생의 기억 같기도 한) 느낌을 갖게된다. 생각이 날듯말듯한 오래된 꿈 같기도 한.

다섯 편의 단편 중 두 번째 [왼쪽 세상에 가본 적 있어]가 특히 그랬다. 이 이야기는 ‘크라메싫어’ 라는 닉네임의 작성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이야기와 그 댓글들로 구성된다. 게시판 분류를 보니 [살다보면>이것좀봐줘]로 되어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것좀봐줘’ 라는 게시판의 익명 독자들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왼쪽 세상과 오른쪽 세상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게 부모님을 매우 걱정시켰다는 것도.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그곳이 왼쪽 세상에는 크라메라는 식인물고기가 우글우글한 강이었다) 그래서 유치원도 다니지 못하며 혼자 컸지만, 왼쪽 세상 덕에 혼자가 아니었다. 특히 거기서 만난 특별한 친구 덕분에. 하지만 지금 아이는 왼쪽 세상을 보지 못한다고 썼다. 왼쪽 눈에 사시 같은 증상 때문에 부모님 걱정이 컸는데, 그걸 교정하는 안경을 쓰자 왼쪽 세상도 사라졌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련하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다일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첫 번째 작품 [인터스텔라 여름방학]이 표제작이다. 우주여행을 하는 진짜 SF이면서 예상 외의 황당한 줄거리인 점이 마음에 든다. 명왕성 여행이 가능해진 미래인데, 자식을 최고 클라스로 만들려고 최고급 과외를 시키는 것은 여전하다고? 그것도 명왕성 행 우주선에서? 하지만 엄마는 속았다. 그 우주선은 명왕성으로 향하지 않았고, 루하에겐 지구를 변호해야 할 책임이 난데없이 주어진다. 과연 루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 번째 [돔돔세 견문록]은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부터. ‘쳇2153’이라는 이 지적존재는 고유의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 어떤 로봇에든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OP404라는, 오퍼튜니티의 후손 격인 구식 로봇의 몸에 들어가 임무수행을 하다가 어느 외딴돔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 사는 로봇들의 이름에서 유머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빙고, 옥산나, 유남생, 옥토팔 등. (이들은 번호로 부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망각의 전자기폭풍이 휩쓸어 방대한 데이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고, 넝마같이 남아있는 데이터로 이런저런 유추를 하며 살아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하긴 그렇네. 우린 왜 데이터는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나. 이런 시대에 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은 낡은 공책에 남겨진 손편지 한 장.... 이 미래의 미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을 보면 작가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다고? 어쨌든 다정하니 좋다.

[그날, 사비가 물었어]는 잘 뜯어보면 정말 슬픈 이야긴데.... 세상 막다른 곳에 몰린 아이가 초공간 차원 이동 파견 여행자에게 발견되어 함께 떠나는 이야기다. 지구 기준으로 말한다면 참혹한 결말이지만 ‘초공간 차원 이동 수기 공모전’에 낼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는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 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휴. 그래,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근데 그래도 되나.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내가 뭘 알겠어. 다만 이렇게 막다른 곳에 몰리는 아이들을 지구인들도 발견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로맨스로 마무리? 제목은 [한여름의 랑데부]다. 여름이와 산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근데 뭐, 이런 말이 있잖아. 사랑이 별거냐.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여기서는 그게 몽에뚜와르들의 동족 상봉을 위한 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해석해서 너무 웃겼는데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호르몬 어쩌구 하는 것보다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이냐. 그들의 랑데부를 그들은 개인사라고 생각했겠지만 몽에뚜와르들 입장에선 역사적 장면이었다니. 뭐 어떻게 생각하든 어떠랴. 인간의 눈에 안보이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야기들이 요즘 다 그게 그거 같다고 느끼는, 권태기(?)에 들어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겠다. 색다른 느낌과 상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익숙하고 편안한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색달라서 ‘??’와 ‘ㅋㅋ’의 느낌으로 보게 되는 작품들도 가끔 읽어주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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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는 모두 귀여워 작은 스푼
아시하라 가모 지음, 나카다 이쿠미 그림, 김윤수 옮김 / 스푼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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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소재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쓴 작품들을 보면서도 놀라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상을 가지고 쓴 작품들도 못지않게 놀랍다. 이런 걸 보면 ‘이런 일도 책이 돼? 그럼 나도 쓰겠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런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순간을 특별하게 포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일상을 특별하게. 이게 진짜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처음 보는 일본 작가의 책이다. (국내에 이 책만 번역되어 있음) 초등학교 3학년 교실의 세 가지 사건을 엮어 한 권의 동화로 만들었다. 주인공은 아야라는 여학생이다.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면도 있지만 속으로는 잘해보고 싶어하는 의욕이 충만하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 [평소와 다른 특별한 나]에서는 연극 발표회, 두 번째 [병아리가 되지는 못하지만]에서는 모둠별 춤 발표회를 한다. 아야가 잘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일 때, 그 마음을 알아본 친구들이 추천하고 응원해주어 아야는 열심히 연습한다. 위에서 내가 사소한 일상이라고 했는데, 사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야도, 아야네 반 아이들도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다기에는 너무 좋은 성품들을 갖고 있다. 일단 주어진 학급의 행사에 시큰둥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배역을 정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시기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고 친구들을 격려하거나 축하해 준다.(이게 특별히 인상 깊었다. 교사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서) 그리고 맡은 일을 잘해내려고 스스로 찾아보며 기본 이상의 노력을 한다.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책을 찾아본다든가, 집에 가서 영상을 찾아본다든가 등등 시킨 일 이상으로 스스로의 정성을 더 들인다.

첫 이야기의 주요 소재는 율무열매인데, 아야는 실수로 그걸 귓구멍에 넣어버렸다. 걱정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한 일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표시로 생각한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귓구멍에 들어있는 율무열매 때문인가 생각하는 아야가 허당 같으면서 귀엽다. 아이들의 책임만은 아니겠지만 요즘은 해맑은 아이들보다 어둡거나 꼬였거나 예민하거나 거칠거나 퉁명스럽거나 부정적이거나 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아이, 이런 교실이 오랜 추억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면 아이들이 아닌 것, 세 번째 이야기 [어떤 딸기도 모두 귀여워]에서는 남학생 두 명과 아야가 빈 미술실 구멍난 천장 속에 기어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ㅎㅎ 그리고 이 편에선 아야가 ‘딸기 경연 대회’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경연 대회가 뭔가 했더니 그냥 혼자서 딸기 한 팩을 놓고 어떤 딸기가 예쁜가 뽑는 일이었다.ㅎㅎ 나도 어렸을 때 딸기는 아니었지만 이런 비슷한 걸 혼자 하면서 놀기도 했었는데, 요즘 이러면서 노는 아이가 있으려나? 아야도 어릴 때 이후 아주 오랜만에 해보았다. 응? 그런데 어릴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챔피언을 뽑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딸기는 이래서 예쁘고, 저 딸기는 저래서 예쁘고. 결국 아야는 새로운 생각 하나를 갖게 되었다. 이럴 때 아야는 자기만의 공책을 꺼내서 적어놓는다.
딸기는 모두 모양이 달라.
그래서 모두 귀여워.
그래서 모두 맛있어.
-괴테
(괴테가 왜 나와? 이건 아야의 귀여운 무식과 허당력을 보여줌^^)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런저런 궁리와 상상을 하고 그걸 글로든 뭐든 표현하는 게 내가 느끼는 이 아이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건 큰 장점이자 역량이기도 하지 않을까? 난 교실에서 이런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아야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야와 친구들을 마주치자 장난을 걸었다. 아야가 무반응이자 “에이, 아야는 상상력이 없구나.” 라고 하셨는데, 아야는 내심 이 말씀이 속상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부모님이 웃으며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오해를 풀며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아야. 몬스터 부모는 일본이 원조이니 일본에도 “아이 마음에 상처를 주다니, 정서 학대 아닌가요?” 하면서 화를 내는 부모들이 있지 않을까? 고의적 잘못이나 치명적 실수가 아니라면 서로 이해할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말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장면인데 나는 부러움을 느끼며 읽었다.

이 책은 빵으로 치면 그냥 식빵 뜯어먹는 맛이라고 할까. 누군가는 참 밋밋한 이야기네, 이게 재밌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오랜 기간 읽다보니 이제 나의 취향이 보여. 충격적 반전이나 스펙터클한 사건도 좋지만 평범하고도 살짝 별나고 기특한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작은 이야기들이 좋아. 수없이 많은 작품 중에 이 작품을 출간하려고 번역하신 이유도 그래서일까? 덕분에 잔잔하고 평화로운 동화를 한 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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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교에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상상하고 해석하며 다시 생각하기
데니스 수마라 지음, 오윤주 옮김 / 노르웨이숲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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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러너
임지형 지음 / 상상스퀘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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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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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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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자전거 여행 4 - 세상 끝으로 창비아동문고
김남중 지음, 오승민 그림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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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이 작년에 나왔었구나. 모르고 있다가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발견하고 빌려왔다. 1권에서 2권이 나오기까진 10년이 걸렸는데, 이후로는 주기가 짧아진다. 4권은 약 1년만에 나온 것 같다. 부제가 ‘세상 끝으로’ 여서 이번 권이 완결편인가 생각하며 읽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마지막에 호진이가 새로운 자전거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을 보니 5권에서는 호진이가 이끄는 여정이 되겠구나 짐작해보았다. 짐작이야 틀려도 되는 거니까...^^;;;

앞에서 부제 이야길 했는데 ‘세상 끝으로’라니, 이게 무슨 일일까?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였다. 나는 가본 적이 없지만 얘기는 많이 들어봤다. 호진이의 할머니가 간절히 원하셔서 시작하게 된 여정. 엄마와 호진이가 동행한다.

호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자전거로 최대의 성취감을 맛보았던 6학년 시절은 그저 한때의 기억일 뿐이었다. 공부도 못하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호진이는 붕 떴던 발이 땅에 닿은 듯이 갑갑한 현실과 마주한다. 조금 아쉽긴 했다. 그정도 체험을 통해 성장했으면 공부를 못하더라도 뭔가 멋지게 살고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하지만 이게 보통 현실이다. 그리고 이번 네 번째 여정에서 호진이는 앞선 세 번의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 자전거 시리즈의 매력은 작가님의 경험이 배어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작가님이 자전거 매니아이고, 이 시리즈에 나온 코스 또한 모두 직접 다녀오신 것이라 머리로만은 쓸 수 없는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번 권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마찬가지로 직접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것도 사춘기 아들이랑 말이다. “둘째는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었고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순간순간 부딪쳤다.” 작가의 말에 있는 이 내용이 너무나 상상이 간다. 나도 사실 도전의식이나 호기심이 평균보다 부족한 인간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나보다도 더하니까.... 이렇게 작가님의 경험을 배경으로 했지만, 호진이는 어른들에게 툴툴대며 다닐 상황이 못되었다. 항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밀어붙여지는 호진이. 물론 그래야 독자들이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자전거 여행 시리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는' 여행이다. 음 그런데 자전거라는 제목을 붙여도 되나?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후반부에는 자전거를 타야 하는 상황이 닥쳐올 뿐 아니라 이 먼 곳에서 여자친구(전편들에 등장하는 '여행하는 자전거 친구') 멤버들의 도움의 손길을 받기도 한다. 읽는 내가 다 고맙고 반가웠다.

할머니가 이 여행을 고집하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생 일만 하시느라 여행 한 번 못해보신 분이 국내도 아니고 스페인까지 웬 고집인가 싶었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나라면 마지막 아니라 마지막 할아버지라도 그런 일은 벌이지 않을 것 같지만... 왜냐하면 어떤 불상사가 닥칠지 모르고, 그러면 딸과 손자에게 너무 미안한 일일 거라서. 하지만 할머니의 의지(내 관점에선 고집)는 강했고, 여정은 점점 극한으로 향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해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가보고 싶어한 ‘세상의 끝’ 까지.

사람은 가끔씩 만나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들 한다. 너무 붙어있으면 좋은 면만 보여주기 어려우니. 그래서 여행을 해봐야 그 사람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던가. 3대는 이번 여행 중 자주 싸웠다. 특히 할머니와 엄마가 그랬다. 호진이가 알지 못했던 젊은 시절 엄마의 꿈, 상처, 할머니의 슬픔 등이 여행 중에 다 터져나왔다. 상처가 터졌으니 아물기도 했고 화해도 있었다.

내 기준 너무 무모했던 여정에 도움이 손길이 있었던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값없이 도와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참혹하다는 소설이나 영화에 반기를 들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도 인간이고 이런 모습도 인간이니, 인간은 참 규정하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다.

그 힘든 여정 중에 몇 번의 미사가 있었는데, 매주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예배와는 다른 신성함이 느껴졌다. 인간은 그래서 안주하면 썩는 존재인 건가... (그래도 안주하고 싶다ㅠ) 여행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그 기도는 또 얼마나 진실한지. 그 길을 걷는다고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나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그 길을 걸으며 주변 풍경도, 걷는 사람들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인상적인 장면이 매우 많았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이 장면을 꼽고 싶다.

돌아온 호진이는 피할 수 없는 슬픔을 겪어냈고, 앞에서 언급했던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 시리즈의 다음 권 줄기가 어떨지 짐작되는 결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내가 호진이를 보며 약간 실망했던 부분은 마지막에 채워져 있었다. 그 부분을 적으면서 마치겠다.

“지금까지 인생은 자전거 여행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전거에서 내리면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자전거에서 내리더라도, 인생은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계속 가야 하는 순례였다. 어디를 가든, 어떻게 가든 과정이 더 중요한 여행. 과정이 아름다우면 결과가 어떻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꽃밭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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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의 정체 창비아동문고 343
전수경 지음, 김규아 그림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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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가는 계단』을 읽은 이후로 작가님의 동화를 거의 다 읽었다. 단편집은 처음 내신 것 같다. SF적 요소가 들어가 있던 대부분의 장편들과 아주 느낌이 다른, 아이들의 현실 생활과 작은 이야기들이 담겼다. 150쪽 정도의 두께에 여덟 편이나 담겼으니 각 편의 길이도 아주 짧다. 하지만 읽어보면 왠지 그다지 짧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앞에서 ‘작은 이야기’ 라고 했는데 그건 남의 입장에서 ‘작은’ 이야기지 당사자 입장에서는 우주보다 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여덟 편이 담긴 단편집이다.

첫 번째 이야기 「무회전 킥」에서는 축구를 잘하는 세호와, 세호에게 무회전킥을 배우려 하는 수미와 유진이가 나온다. 수미는 어쩌다 성공하지만 배우는 데 별 관심이 없고, 유진이는 잘 안되지만 해내려는 집념이 끈질기다. 그 집념이 친구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 바로 마음을 접는 유진이와 어이없어 하면서도 더 해볼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두 친구의 모습이 무심한 듯 펼쳐지는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 「허수의 정체」가 표제작이다. 허수가 뭐지? 수학 용어인가? 했는데 사람 이름이었다. 전학생. 여긴 세 개 회사의 공장이 모인 신도시여서 아이들의 출신이 뻔했기에 어느 아파트 사냐? 부모님 어느 회사 다니냐?가 당연한 질문처럼 되어버렸는데 허수는 그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허수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 말로 한 방 먹인 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는 듯하더니 돌연 다시 전학 가 버렸다. 아이들은 술렁였고 약간 배신감도 느낀 것 같았지만 총명하게도 자신들의 문제가 뭐였는지 깨달은 것 같다. 다른 전학생이 왔을 때 다른 질문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솔직히 처음의 질문도 아이들의 문제라곤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변한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이 책의 아이들, 참 착하다니까.

「하나, 둘, 셋」에는 드디어 고백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애가 시작되기 전, 고백까지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근데 이게 살짝 반전이면서 웃기네. 어릴 때부터 친했던 윤채와 성우가 서로의 연애를 돕기 위해 다리를 놔주는 과정인데, 별 관심이 없는 윤채에게 성우가 이런 말을 한다.
“연애는 말이야, 습관이고 버릇이야. 한 번 해야 또 할 수 있다고.”
풋, 하고 웃어버렸다. 늙어가는 내가 초딩한테 한 수 배우는겨? 하긴 빈익빈부익부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어. 모태솔로는 그대로 늙어가고, 잘하는 애들은 아주 공백기가 거의 없더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건 그에 비례하지 않더라.ㅎㅎ

「현악 사중주」에는 엄마끼리 친해 유치원 때부터 몇 년간 붙어다니다가 고학년이 되어 멀어진 나래와 현아가 나온다. 둘의 엄마는 관계 개선을 위해 작당을 하고 음악회 표를 끊었다. 하지만 넷이 탄 차 안에서는 답답한 긴장감만 가득하다. (고학년 씩이나 되었는데 엄마들이 그런 헛짓을 왜 해....) 중간에 내린 화장실 안에서 나래는 또 답답하고 영혼 없는 “미안해.” 소리를 하고 폭발한 나래는 참았던 말을 쏟아내 버린다. 그걸 나래 엄마가 듣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속상한 건 이해하지만 이때 나래 엄마의 처신이 아주 중요하다. 엄마의 처신은 무조건 혼내는 것도, 무조건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보니 나래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친구가 옆에 아무도 없게 생겼다. 고립을 자초하는 애들이 분명 있긴 있다니까. 그럴 때 부모는 속상한 마음을 참고 차분히 조언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그걸 못하면 답이 없다. 친구 탓 선생님 탓 이런 식으로 남 탓만 하다가는 자식 영원히 바보 만드는 것이다. 내가 당하는 것보다 자식이 당하는 게 백 배 더 눈뒤집히는 심정, 부모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해. 자식의 인간관계 내가 대신 해줄 것도 아닌걸.

「할아버지와 바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고, 내 또래 이상이 읽는다면 마음이 너무 무거울 작품이다. 노년의 문제를 동화 속에 이토록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담다니.ㅠㅠ 해수의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몸도 말도 기억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요양원에 입원하셨다. 아프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아야 하는 삶이 두렵다. 할아버지가 울고 계신 장면을, 해수가 놓고간 휴대폰을 다시 가지러 왔다가 보게 되었는데 내 심장이 다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갈수록 외롭고 고통스러운 노년기를 오래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에 대한 방책이란 없는 것일까. 해수는 동생 지수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애교있게 달려드는 지수에 비해 할아버지 곁에 가길 꺼린다. 안타까운 엄마가 할아버지께 좀더 친절하면 좋겠다고 부탁하자 해수가 이렇게 말한다.
“나라면 변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을 것 같아. 나는 할아버지를 보는 게..... 미안해.”
이 말에 엄마는 오열하고, 나도 무슨 말인지 너무나 알겠어서 마음이 쓰리다. 부디 조금이라도 더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노년이 되길.

「체험학습」에 나오는 주호는 조금 어려움을 가진 아이인 것 같다. 특히 타인과의 협의와 타협, 그리고 감정 조절에. 이런 아이들의 주변 사람들은 매우 피곤하고 힘들다. 주호는 오늘도 엄마가 김밥까지 다 싸놓았는데 아침에 갑자기 체험학습을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는지 아빠와 동생은 조용히 집을 나섰고 엄마도 말없이 컴퓨터를 켜고 자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엄마의 속이 어떨지.... 안쓰럽다. 하지만 엄마는 일을 접고 주호를 데리고 둘만의 체험학습을 떠났다. 거기서도 주호의 돌발행동을 볼 수 있는데, 엄마는 끝까지 화내지 않고 조용조용 설득한다. 나름 좋은 하루였다. 엄마가 많이 힘들겠다. 이러면서 주호는 조금씩 나아지겠지? 다음 체험학습은 주호가 꼭 참여하길 바란다.

「월간낚시」 나는 이 작품이 특히 맘에 들었다. 범준이는 한달에 한번 아빠를 만나러 정선에 온다. 부모님이 갈라선 것 같지만 정확하게 꼭 집어 나오진 않는다. 아빠를 만나면 낚시를 하러 간다. 낚시꾼들은 서로를 ‘조사님’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리집 남편은 내가 노는 취미가 하나도 없는 걸 걱정한다. 퇴직하면 어떻게 지낼거냐며.... 그러는 남편은 나보다도 더 일만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남편에게 어느날 딸이 배낚시를 가자고 제안하자 두말도 않고 따라나섰다. 원래 낚시를 좋아했다나? 둘이 신나게 놀고 온 다음날부터 쿠팡에서 아주 부피가 큰 택배가 오기 시작했는데 뭔진 모르지만 낚시 관련이래. 어이구 두야.... 나는 진짜 딸도 남편도 이해가 안 갔는데 이 동화를 보니 조금 이해가 갈까말까 하네.... 낚시도 꽤 매력이 있긴 한거 같아.... (그래도 난 안할거지만) 여기에 아주 멋진 말이 있었다.
“낚시는 보내는 거야. 잡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보내주기 위해선 낚시바늘을 제대로 빼주고 보내야 한다. 잘못 보냈다가는 평생 낚시바늘 끼운 채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보내는 일도 정성껏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깨달은 범준이. 점점 어른이 되어 가겠네.

마지막 여덟 번째 이야기 「우리 반 아침」에는 지금까지 나온 아이들이 총집합해서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이 학급 아이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교실 구석구석을 카메라가 쭉 훑고 지나간다. 어느 장면에는 조금 더 머무르고 어느 장면은 금방 지나가지만 어느 곳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비춘다. 마지막엔 지하철 출근길에 내릴 곳을 놓쳐서 지각하신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는데, 나 이 선생님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날 뻔했잖아. 무려 이 교실은 6학년. 그런데 선생님이 안 계셔도 교실은 평화롭고 구석구석 저마다의 모습으로 할 일을 하거나 사이좋게 놀고 있다. 이 책의 화자가 사람이 아니어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다. 깜비나무 화분이었다. 이 화분에 꽃이 핀 것을 다정하게 반기며 차분히 수업을 시작하는 학급 아이들.... 이런 천상의 평화가 있나. 보통 우리는 전쟁터라고 부르는데...^^;;;; 음 하지만 매 순간이 전쟁터는 아니니까, 이런 모습을 로망으로 삼고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지 뭐.

작가의 말 중에 “교실에서는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가 따로 없어요.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 반이 아니죠.” 라는 말씀에 매우 공감한다. 감기가 돌거나 유난히 가족체험학습을 많이 쓰는 시즌에는 일주일 내내 전원 출석이 하루도 없는 때가 있다. 그러다 전원 출석하는 날에는 비타민사탕 한 개씩이라도 주면서 자축(?)을 한다. 그렇게 너희들 모두가 중요하다는 모종의 액션을 취하고 싶다. 그게 진심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동화를 읽을 자격이 아직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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