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신
한윤섭 지음, 이로우 그림 / 라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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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꽤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풍기고, 내용 또한 그것을 향해 독자를 집중시키는 책이다. 은근슬쩍 웃기면서 한자락 보여주고 지나가는 방식이 아니고 아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고 할까. 희곡과 동화로 왕성하게 이야기를 펼치시는 한윤섭 작가님의 책이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

"이야기의 시작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시각에 나도 동의하고, 누구나 이야기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이 책의 주제에도 공감한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일 같아 보이는 그 '이야기'가 사실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있으며 결국 쓸데없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물론 그걸 직업적으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재능을 가지면 안되니까 말이다. 프레드릭이 있고 다른 쥐들이 있었듯이. 그러나 그게 프레드릭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같은 평범인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바로 '이야기'!!

이 책은 액자 형식인데 바깥쪽은 아주 얇고 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쪽과 바깥쪽을 연결하는 매개는 <이야기의 신>이라는 책이다.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제목이 손글씨로 쓰여 있고 속이 빈 책이었다. 노트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듯한. 여백은 채우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누구든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다. 이 책의 '나'는 열두살에 동네 놀이터 벤치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이 책을 보게 됐고 할머니에게 이끌려 할머니와 주고받듯 이야기 만들기를 경험하게 된다.

초등학교 국어 교육과정에도 이 '이야기 만들기'가 들어있다. 작년 4학년 때도 한 단원이 통째로 창작 단원이었는데 2학년으로 와 바뀐 교육과정을 보니 마지막에 '나도 작가'라는 단원이 있다. 2학년 수준에서는 '뒷이야기 이어 짓기' 정도로만 나와 있지만 전체 창작도 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쓸 데 있는 생각만 하면 너무 재미 없을 거야. 아무 것도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상상으로 가는 문이야." (66쪽)
이 말대로라면 어린 아이들이 더 쓸데없는 생각을 잘하고 상상력도 풍부하니 이야기도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준 할머니의 설명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아주 작은 점처럼 나타나. 그 작은 점이 나타나면, 집중을 해서 그 점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거야. 그러면 작은 점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거지. 우주의 빅뱅처럼. 이야기도 똑같은 원리야." (27~28쪽)
그 점은 낱말 하나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고 그림의 한 장면일 수도, 꿈의 한 장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살면서 저런 빅뱅의 체험을 못해 보았지만, 아이들을 인도해갈 수는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4학년 이상이라면 이 책을 함께 읽고 불씨를 당긴 후 시작하면 참 좋을 것 같다. 혼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길 작가님이 바라고 쓴 책 같은데, 함께 읽기를 한다면 훨씬 더 쉽게 재미있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해가면서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AI 생각이 나네.... 난 일부러 피하듯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몇가지 설정해주고 지시하면 아주 그럴듯한 창작품이 튀어나오는 세상이잖아.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이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난 모르겠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AI 수업 연수에서 이런 창작 관련 도구들을 소개해주시고 결과물을 보여주실 때 난 단번에 거부감이 들더라구. 뻔지르르하면 뭐하냐. 걔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닌데. 더 무서운 거는 그게 본인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야. 깡통이 속에 꽉 차있다고 착각하는 거랑 똑같지 않아?

모르는 소리 말라고, 그렇게 시대에 뒤떨어져서 어쩌냐고 걱정한다면 괜찮아, 나 이제 낼모레 퇴직 할거거든. 내가 계속 남아있다면 이런 책 같이 읽고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쓸 거야. 그중에 하나 골라 도화지를 접어 장면마다 그림도 그려넣어서 그림책도 만들 거야. 그걸 집에 가져가면 엄마가 바로 재활용박스에 넣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시대가 가는 건가... 그럼 그때도 '이야기'는 소중한 것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오늘 리뷰는 이렇게 모르겠다로 마쳐야겠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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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사냥꾼 생각하는 분홍고래 26
세라핀 므뉘 지음, 마리옹 뒤발 그림, 성미경 옮김 / 분홍고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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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아마도 내가 평생 가보지 못할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만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그런 사람들도 만날 수 없으니 모르는 채로 살아가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책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유리라는 아이를 만났다.

 

시베리아의 환경은 혹독하다. 그런 곳에서도 환경에 적응한 동식물들이 있듯이 사람들도 추위를 견뎌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살던 터전은 더 이상 절대적일 수 없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떠나간다. 유리의 이웃들도 그렇게 떠나갔다.

유리가 사는 곳에는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 태어나 쭉 살거나, 아니면 떠나가죠.”

 

이 책은 자연 다큐멘터리 그림책이라 할 만하다.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의 모습과 그곳의 생태를 잘 소개하고 있어서 정보책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혹독한 환경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주변부에서, 아니면 껍데기에서 깨작깨작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얼음 사냥꾼이라는 일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일은 바이칼 호수의 얼음을 잘라 집집마다 날라 주는 일이다. 겨울 동안 수도를 쓸 수 없는 이곳 사람들은 이 얼음을 녹여 생활용수로 사용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물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다. 바이칼 호수는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 저장고라고 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리가 서울-부산 거리보다 기니 정말 바다 같은 호수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겠다. 윗 문단에서 표현한 지구의 중심부에는 이렇게 깨끗한 자연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너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위태롭겠지? 여기까지 침투한다면 그냥 지구는 폭싹 썩어 문드러진 것이겠지. 제발 그렇게 되진 않기를 이 책을 보면서 비는 마음이 되었다.

 

호수 속에서, 호숫가에서, 호수 위 하늘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도 소개해주어서 좋았다. ‘오물이라는 다소 어감이 안좋은(?^^) 물고기 이름도 처음 알게 되었다. 새끼들을 품고 잠든 담비, 북극여우, 눈산양 등 동물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다.

 

유리가 부디 그곳에서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주변부에서 깨작거리며 사는 내가 부디 그들의 삶에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에서 만난 친구로서 유리와 이웃들에게 안녕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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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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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님을 이런 책을 읽을 때 깨닫는다. 보통사람의 글이 사실이나 경험의 서술,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잘쓴 글은 독자를 흔들고 이끈다. 늘 겪으면서도 직면하지 못하는 상황을 눈앞에 펼쳐놓기도 하고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거기 있기도 하고, 같은 아픔에 감정을 격동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찌꺼기를 뱉어내고 말개진 아침을 맞이하게 하기도 한다. 이상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한 '잘쓴 글'의 특징이다. 다른 측면에서의 잘쓴 글도 물론 있을 것이다.

읽어보니 왜 이 작가님의 단편을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각편들은 다 다른 소재와 다른 인물의 이야기면서도 묘하게 관통하는 한줄기가 있는 느낌이다. 그게 작가의 마음 아닐까 생각했다. 별볼일 없고, 어쩔 수 없고, 답답하고 연약하고 속물적인 존재로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고 싶어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부끄러워지는)

이 인물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이들이 특별히 멋져서가 아니고, 그나마 1이라도 성찰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알츠하이머가 뇌의 기능을 하나하나 정지시키듯이 마음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오히려 쿨해보이고 멋져보이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갈 바를 모르고 주춤대는 자신의 마음과 고민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화자들에게 우리는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겼다. 보통 내가 단편 리뷰를 쓸 때는 한 편 한 편 언급하다가 글이 길어지곤 하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 각 편이 다 매력적이었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도 있는데, 그건 다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1. 어떤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내 이름이어서 깜짝 놀람. (좀처럼 없는 일) 그가 하는 일과 상황에도 공감되어서 마음이 많이 갔다.

2. 각 편 제목들이 다 좋아서 어떤 제목이 표제가 되어도 다 좋을 듯했다. 그중에서 표제작이 된 <안녕이라 그랬어>는 '음 그래 역시 표제작이 될만한 작품이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갔는데, 다른 작품이 표제작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다. 40대의 에이미(은미)가 시골집에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팔리지 않는 시골집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화상영어공부를 통해 로버트라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줄거리고, 그 이면에는 옛 연인인 헌수와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던 날에 들었던 'Love Hurts' 라는 노래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영어에 서툴렀던 그녀는 당시에 'I'm young' 이라는 가사를 '안녕'이라고 들었었지. 안녕. 너무 많은 뜻이 담긴 한국말. 지금도 영어에 유창하지 못한 그녀는 마음에 가득한 지난일과 감정을 결국 말하지 못하고 '안녕'의 뜻을 로버트에게 설명하다 대화가 종료된다. 그 뜻은 '평안하시라'였다. 누군가에겐 영어만큼이나 어려운 평안하다는 일. 하지만 그들의 평안을 빌고 싶다. 지금 몇살이든, 옆에 누가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안녕이라고. 안녕하라고.

3. 마지막 작품 <빗방울처럼>에 나는 가장 이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 속 사건이 내 인생에 실화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작품만큼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인간이란 어쩜 그렇게 자기 경험 위주인지 모르겠다. 그 사건은 바로 '누수'였다. 윗집 누수가 우리집에 피해를 주고 그게 금방 해결되지 않는 상황.

지수에 비한다면 나는 문제를 함께 걱정할 가족도 있고, 집도 아파트고 윗집주인과 연락도 하고 있으니 어찌든 해결방안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작품에서 묘사한,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그 물방울소리가 몇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런데 그 소리에 반전이 있다. 우리집이 그랬듯이 지수네도 누수는 고쳤고, 천장 도배도 새로 했다. 그런데도 들리는 물방울 소리의 환청. 그건 신경쇠약의 소리가 아니라 이번엔 살라는 소리였다.
안돼.
그러지마.
살아.
물방울은 이제 천장이 아닌 지수의 뺨에 흐른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본인이 너무 맘에 들어 우겨서 계약한 빌라집에서 전세사기를 당하고, 떠앉은 빚을 해결하느라 착한 남편이 과로로 죽고, 집은 물이 새고 혼자 남은 지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까. 누수의 스트레스는 그 힘듦의 천분의 일도 안될텐데도 그걸 겪어봤다는 이유로 나는 마치 그녀를 이해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의 환청이 그녀에게 살라고 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게 처음 만난 외국인 도배사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한마디에서 퍼진 파동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게 소설은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늘 뒷전이었는데 일을 그만둘 시점이 되자 비로소 손에 조금 잡히는 느낌이 든다. 누수라는 단순경험이 주인공에게 연민과 응원을 가져다주는 걸 보니 내가 못한 경험을 소설을 통해서 간접경험하는 것도 세상살이에 나쁘지 않아보인다. 다음 책으로는 요 책 전에 나온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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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1~2 세트 - 전2권 - 펀자이씨툰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엄유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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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펀자이씨툰’이라는 인스타툰에서 관련 내용만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스타를 안해서 접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다. 책을 읽고보니 너무 매력적이어서 출간된 ‘펀자이씨툰’을 모두 읽어보리라 결심할 정도였다. 이 책 앞에 출간된 책들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데 재미있을 것 같다.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책이다. 제목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전작들은 본인의 이야기, 이 책은 부모님과 가족의 이야기.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내용들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그런데, 요즘 같은 인스타의 시대에는 예사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흔히 인스타의 폐해라고 거론되는 보여주기, 과장, 가식의 느낌이 없는 점이 매력인 것 같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진정성을 꾸며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검색해보니 작가의 어머니는 그 연세에 드물게 상당히 많이 배운 분이고, 교수에다 작가인 분이었다. 강연도 많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센스와 유머가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분, 교양을 잃지 않으면서 웃기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식 있고 지혜로우신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병,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순간을 달리는’ 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어머니는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고 꼿꼿하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웃기신다. 아버지 또한 적절히 장단을 맞추시고. 이렇게 잘 어울리는 노부부도 드물겠다 싶었다. 작가님 또한 부모님의 그런 모습에 마음속의 염려와 고통을 애써 잠재우며 씩씩하게 대처한다. 알츠하이머가 이야기의 발단인데,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니, 정말 특별한 가족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음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다 같은 인생인데 당연한 일이다. 부모님은 자식이 부담 갖고 찾아오길 원치 않으셨지만, 돌봄을 책임지게 된 자식의 입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가님처럼 위 아래 형제가 모두 외국에 나가 독박 돌봄 처지가 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시설에 보내드리는 것은 최후의 경우가 아니면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지다. (시설 얘기까지 책에 나오진 않았고 내 생각이 그렇다) 본인의 작업도 해야 하는 작가님 입장에서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많은 갈등이 따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분도 책에는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많이 공감했다. 그렇다고 다른 가족들이 못됐거나 얌체인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때로 화를 내고 갈등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옛 기억은 생생하지만 조금 전 기억을 잊는 것이 주 증상이었는데 가장 가슴이 철렁한 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게 너무 가슴아플 것 같다.ㅠㅠ) 그리고 기억을 더 이상 쌓을 수 없어 생기는 한계를 절감한 순간, 공황장애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아픈 일들을 굳이 감추지 않으면서도 마냥 슬픔만을 주지는 않는다.
“엄마는 더 이상 글을 쓰거나 사람들 앞에 서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꺼져가던 말들이 나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누군가에게 웃음과 위로가 된다.
그렇게 잠깐 다시 빛이 난다.
만약, 크리스마스 전구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이 없다면
그리고 다시 켜지는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소멸되어가는 당신의 기억 대신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딸은 불행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슬픔을 크리스마스 전구에 비유할 수 있게 살아주시는 어머니가 계셔서 참 다행이다.

소통의 의욕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같은 말을 수십번 물어보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참고 대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한 김에 전화라도 한 번? 그리고 펀자이씨툰 전작들을 읽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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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멜버른의 케어러 - 이민, 장애, 나이듦, 그리고 돌봄의 세계에서 내가 배운 것
루아나 지음 / 메멘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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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반납해야 하는 도서관책을 챙기다보니 3권 모두 노인, 퇴직, 돌봄에 관한 책이다. 아 이젠 정말 내가 현장을 떠나 뒷방의 세계로 들어가는구나, 읽는 책이 바로 내가 선 땅을 알려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장을 떠난다기보다는 제2의 현장을 만나는 이야기다.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그 현장이 바로 돌봄의 세계라서 다른 책들과 함께 늙음과 죽음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게된 것 뿐이다. 저자는 이민 전 중등교사였고 호주로 이민을 간 후에 그 사회에 익숙해지며 돌봄의 현장에 진입하게 되었다. 자격증을 따고 지금은 활발히 활동중이다.

이 책을 오늘 반납해야 하지만 한번 더 읽거나 모임에서 함께 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 책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잘 읽히는 책에 속한다. 하지만 생각할 영역이 여러가지다. 누군가는 저자의 개인적 삶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의 삶이 매우 고달팠었다. 교사로서의 삶이 몹시 소모적이고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으며(자세한 이야기는 없지만 같은 교사로서 다 알 것 같은ㅠ) 그 와중에 표준의 경우와 너무 다른 육아는 개인을 한계로 몰고 갔다. 결국 아들은 자폐와 ADHD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후 호주 이민, 적응 과정, 새로운 일에의 도전, 싱글맘으로 홀로서기 등의 과정이 이 책을 개인사로만 읽어도 충분히 의미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줄기에 덧붙여진 것들이 매우 많아 그것도 놓칠 수가 없다.

그중 하나는 장애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가 호주의 현장에서 뛰며 알려주는 현실은 자연스럽게 두 나라를 비교하게 만든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어느정도 흉내는 내고 있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아직 멀었구나.

올해 장애 학생이 많은 학년을 맡게 되었다. 반평균 2명씩 있다. 교사를 오래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학교의 모든 지원인력(특수교육 실무사 두명과 공익근무요원)을 총동원해도 턱도 없기 때문에 시간제 봉사자를 채용해서 지원에 보탠다. 우리 지원 선생님들은 정규 비정규 공익 할 것 없이 모두 마인드가 훌륭하셔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초반에는 그분들이 고마운건 고마운거고 교실에 나말고 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힘들었다. 이제 거기에 적응되자 이런 생각이 든다. 호주에선 장애인 비율이 20%가 넘는다고 한다. 반별 2명씩 있다고 놀라는 우리 학년 비율도 10%에 불과하다. 나의 체감으로는 장애학생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특히 신경다양성 측면에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진단되지 않은 장애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되겠다. 지원이 필요한 학생의 영역을 좀 넓히고 지원도 확대되면 좋겠다. 일반교사+특수교사의 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학급의 정원을 줄이고, 모든 학교에 특수학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일부 학교에만 특수학급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도 있다. 특수교육이나 지원인력은 진단받은 특수교육대상자에게만 해당되고, 그 진단이란 부모의 동의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니 대상자가 없는 학교도 존재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전체적으로 인식부터 개선되어야 한다. 작년에 모 지역 특수학급에 살인적인 인원과 업무를 몰아놓고 인력충원의 호소를 무시하고 방치한 결과 슬픈 일이 일어났다. 이게 우리나라 현실의 한 단면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잠시 귀국할 때마다 신문물의 작동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난 생각했다. 아 호주가 우리보다 훨씬 아날로그로 사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조급증에 쏟아붓는 그 예산들을 훨씬 사람에 투자해도 되는 것 아닌가.... 결국 그 아까운 젊은 특수교사의 죽음은 그 알량한 예산 안 쓰려고 버티다가 그렇게 만든거 아니야? 말만 꺼내도 화가 난다.ㅠㅠ

호주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장애 자체의 불편함을 제외하고는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장애=불행의 공식은 절대 없었다. 신경다양성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다양함의 일부일 뿐이다. 어떤 곳이든 보편적 설계가 당연하게 적용되어 있었고, 번거로움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수영장 장면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배울 건 빨리 배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직업에 대한 것이다. 직업의 안정성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방식이 무척 좋아보였다. 우리나라처럼 '하려면 밤낮없이 죽어라고 하고 못하면 말고' 이런 식이 아니라 자신의 체력과 나이, 생활방식에 따라 다양한 시간선택이 가능한 일자리들이 많으면 좋겠다. 모두들 대학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나와야 하는 학력 낭비의 한국은 곧 젊음과 세월 낭비이기도 한 것 같다. 직장의 유연함은 근무환경의 향상으로도 이어지고 그건 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마인드로 이어진다.

다음은 노년에 대한 생각이다. 저자의 돌봄 일은 크게 두가지 분야이다. 장애인과 노인. 노인을 돌보면서 저자는 한국의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짓기도 했다. 돌봄은 정말 정신 육체 양면으로 고된 일이었다. 저자도 나처럼 작은 키에 저질체력이신 것 같은데도 이 일을 열심히 배워 해나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호주의 노인 돌봄 환경은 우리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돌봄인들이 육체적으로 무리하지 않으면서 노인들의 기본적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여러가지 기계들(기중기, 기립기 등)의 사용은 꼭 필요할 것 같다. 저런 걸 쓰기 전에 죽고 싶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겠지.ㅠ 이런 것을 포함해서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을 다양성의 범주에 넣는 인식이 인상적이었다. "저러느니 죽는게 낫겠다", "저러고 왜 살아" 따위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편에서 생각해보면 너무 고통스러운 한계까지 몰아가지 않는 치료, 그러니까 연명치료가 아닌 통증치료(최소한의 존엄사)에 집중하는 의료체계로의 전환을 간절히 원한다. 내가 죽을 때 되기 전에 부디.

기록 좀 남기고 반납하자 하고 생각한 리뷰가 중언부언 길어졌네.... 이 책은 그대로 덮고 잊어버리긴 아까워서 이어지는 대화나 독서가 더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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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side21 2025-12-2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수교육 협력강사로 일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기진맥진님의 기나긴 리뷰에서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마치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듯한 동지애를 불러일으키네요. 진정성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일반교사와 특수교사의 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비정규직 협력강사는 길을 잃을 때가 좀 있었답니다. 아는 작가님이 이 책 북토크 사회를 본다 하시기에 검색해보다가 이런 귀한 리뷰를 읽게 되었네요. 언제나 책으로 이어지는 신비한 인연에 감탄합니다. 몸과 마음이 따뜻한 연먈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진맥진 2025-12-27 18:51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신 마음에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현장이 조금씩이라도 쭉 좋아지길 바랍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