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국보 : 상·하 세트 - 전2권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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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영화까지 봤다. 리뷰가 책 리뷰가 될지 영화 리뷰가 될지 잘 모르겠다.^^;;; 먼저 알게 된 건 영화인데, 상영시간이 3시간이나 된다고 해서 망설이고 있다가,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책을 발견하는 바람에 “둘 다 보자!”가 되어 버렸다. 휴가중이라 가능했다. 책이 상하권 합하면 750쪽이 넘는다. 게다가 영화도 길지, 난 능력자가 아니라서 이런 감상은 시간이 많아야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주인공 키쿠오의 소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담았다. 그의 일대기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폭력에 목숨을 잃는 장면을 목도한다. 난 솔직히 책과 영화 모두 이 장면을 보면서 혀를 찼는데.... 일본 영화나 우리 영화나 조폭 얘기가 나오면 혐오의 감정이 끓어오른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기껏해야 주먹질 칼질 도끼질 밖에 못하는 것들이 예쁜 여자 옆에 끼고 부하들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폭력으로 얻은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꼬락서니라니.... 키쿠오 아빠도 솔직히 마찬가지지. 멋진 척 해봤자 조폭이 조폭이지 뭐. 그쪽 파의 신년회에서 소년 키쿠오는 가부키 춤을 선보이는데, 그때 당대 최고 배우 한지로가 초청받아 참여했다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그것도 잠시, 다른 파의 습격을 받아 잔치 자리는 난장판 피바다가 되고.... (아 역겨워) 아 그리고 걔네들 역겨운 짓의 최고봉 있잖아. 작두랑 신체 절단. 진짜 지구 최고 욕을 해도 모자란다. 책에는 좀 나중에 이 장면도 나온다. (영화에는 다행히 안 나왔다.) 인간은 어떻게 두면 그렇게 폭력을 자행하게 되는 걸까. 나도 내 안의 폭력성을 느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라고 하겠는데, 나처럼 쫄보는 그걸 발현하지 못하고 겁대가리 없는 인간들은 발현하고 그러는 걸까? 인류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 전쟁의 역사, 피의 역사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는 걸까.

사실 이건 이야기의 발단에 불과하니 이렇게 길게 말할 것도 못되는데 내가 너무 혐오하다 보니 흥분했다....ㅠ 이렇게 해서 아버지를 잃고 모든 기반을 상실한 소년 키쿠오는 그날 함께 있었던 한지로 가문에 맡겨져 오사카로 오게 되고 가부키 연습생이 된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당시 가부키는 세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는 이미 수련을 받고 있는 친아들, 슌스케가 있었다. 둘의 경쟁 관계, 긴장 구도는 작중 피할 수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들은 형제처럼, 친구처럼, 동료처럼 자랐다. 그들의 인생인 가부키를 함께 수련하며. 키쿠오가 맨처음부터 맨마지막까지 나오는 제1주인공이라면, 슌스케는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오고 조금 먼저 사라지는 제2주인공이다. 난 그냥 그들 둘이 투톱인 이야기로 읽고 싶었다. 그렇게 봐도 무리는 없겠다.

여기서 가부키 얘기를 좀 해보면, 나는 사실 일본의 전통 예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가부키도 그 여장 배우의 모습이 일본 디자인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익숙한 정도다. 영화를 보며 그 뛰어난 영상미에 매료되었지만 솔직히 그 장르 자체의 매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는 가부키라는 장르보다도 예술(무대예술) 그 자체를 다룬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예술을 향한 열정,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인가. 그건 인생 전체를 걸 만큼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사라져가는 장르의 예술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배우들을 보면서, 이 책의 타케노처럼 쉽게 말할 수 있다.
“가부키 배우라는 사람들은 이런 지루한 공연을 진심으로 대단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억지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 아니냐고.” (상권 167쪽)
(이렇게 말한 타케노는 뒤로 갈수록 달라진다)
솔직히 가부키는 잘 몰라서 생각조차 안해봤고 그 외 시들어가는 예술 장르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도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기능을 전수받은 이들이 그것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 또한 생존의 욕구이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그 둘이 무대에 데뷔하는 날, 한지로 씨가 격려한 말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하루라도 연습 쉰 적 있었니? 네가 무대에서 춤동작을 까먹어도, 네 몸이 알아서 춤을 춰 줄 거야.” (상권 181쪽)
나는 평생 무엇을 이렇게까지 수련한 적이 없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그 깊이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자신은 없고, 부럽기는 하고.^^;;;

둘의 필연적 갈등이 떠오른 것은 한지로 씨가 부상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의 대역을 당연히 아들이 하게 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지로 씨는 키쿠오를 지명했다. 재능이 피를 이겼다고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때 못나게 굴지 않는 슌스케의 대응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버틸 수는 없었나 보다. 어느 날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잠적해 버렸고 지방을 떠돌다 10년이 지나서야 다른 가문의 명배우 눈에 띄어 다시 중앙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둘의 운명은 계속 교차하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전화위복이 되었다가, 전복위화가 된다. 칭찬과 갈채를 받는가 하면 억울한 비난으로 매장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그들도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이른다. 그래도 여장 배우로서의 아름다운 선을 유지하는 게 참 놀랍다. 작중 가장 흐뭇하고 안정된 시기는 그들이 함께 무대를 만드는 콤비 시기였다. 영화도 이때의 영상이 참 멋지다.

그러나 행복은 늘 왜 길지 않은가.... 슌스케에게 닥쳐온 고난.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고자 하는 그의 집념을 뒷받침해주며 알맞은 상대역을 해준 사람은 키쿠오. 영화에선 그 마지막 무대에 많은 관객들이 울컥하며 가슴을 부여잡았을 것 같다. 때론 갈등했지만 둘은 정말 아름다웠다. 훌륭한 배우의 자식과 제자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3시간이나 되는 영화의 마지막은 키쿠오의 노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잘생긴 배우라서 머리만 하얗지 얼굴은...^^) 후반부로 갈수록 책과 영화는 많이 달라진다. 특히 키쿠오가 젊은 시절 만났던 요정의 게이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야노에 대한 서사가 많이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딸이 상처받은 시점이다. 그가 신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딸이 뭘 기도하냐고 묻는데 그때 그는 “기도가 아니라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대답한다.
“가부키를 잘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일본 제일의 가부키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그 대신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영화에선 이 장면에서 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와같이 이 작품에선 주인공들이 인생을 바쳐 (어쩌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바쳐) 예술을 추구한다. 예술이란 뭐길래 그럴까.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막이 내린 무대에서 키쿠오가 눈물을 흘리며 내뱉은 “아름답다...”라는 말이다. 그래 예술을 아름다움이랑 동의어로 봐도 좋겠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도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때로 그들은 그 안에 갇힌 불쌍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에서는 그를 비단잉어로 비유한 부분이 나오는데 비유가 절묘해서 그 심정이 이해되었다. 갇힌 비단잉어. 하지만 그 잉어는 스스로 자유를 찾는다.
“꺼내 줘 꺼내 줘 하고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는데 모두가 알아채지 못하고, 아니 모두가 모르는 척을 하고 가만 내버려두었던 그 잉어는, 어느새 그 작은 수조 속에서 맑은 강물을 상상하기 시작했던 거겠지요. 맑은 그 강물에서 마음껏 헤엄치기 시작했던 거겠지요.” (하권 336쪽)

[예술 안에 갇힌 그들이 예술 안에서 자유를 얻다.]
영화평론가는 아니지만 이걸 나의 한줄평으로 삼겠다. 별점은 4.5점!^^

사족 : 책이 재밌고 지루할 새가 없는데 나한테는 쭉쭉 나가진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방대한 서사이다보니 등장인물이 많은 편인데 일본 이름들은 왤케 헷갈려...^^;;; (이중 많은 인물들이 영화에선 생략되기도 했고 얼굴과 같이 나오니까 책처럼 헷갈리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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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신
한윤섭 지음, 이로우 그림 / 라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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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꽤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풍기고, 내용 또한 그것을 향해 독자를 집중시키는 책이다. 은근슬쩍 웃기면서 한자락 보여주고 지나가는 방식이 아니고 아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고 할까. 희곡과 동화로 왕성하게 이야기를 펼치시는 한윤섭 작가님의 책이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

"이야기의 시작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시각에 나도 동의하고, 누구나 이야기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이 책의 주제에도 공감한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일 같아 보이는 그 '이야기'가 사실 인간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있으며 결국 쓸데없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물론 그걸 직업적으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재능을 가지면 안되니까 말이다. 프레드릭이 있고 다른 쥐들이 있었듯이. 그러나 그게 프레드릭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같은 평범인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바로 '이야기'!!

이 책은 액자 형식인데 바깥쪽은 아주 얇고 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쪽과 바깥쪽을 연결하는 매개는 <이야기의 신>이라는 책이다.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제목이 손글씨로 쓰여 있고 속이 빈 책이었다. 노트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듯한. 여백은 채우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누구든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다. 이 책의 '나'는 열두살에 동네 놀이터 벤치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이 책을 보게 됐고 할머니에게 이끌려 할머니와 주고받듯 이야기 만들기를 경험하게 된다.

초등학교 국어 교육과정에도 이 '이야기 만들기'가 들어있다. 작년 4학년 때도 한 단원이 통째로 창작 단원이었는데 2학년으로 와 바뀐 교육과정을 보니 마지막에 '나도 작가'라는 단원이 있다. 2학년 수준에서는 '뒷이야기 이어 짓기' 정도로만 나와 있지만 전체 창작도 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쓸 데 있는 생각만 하면 너무 재미 없을 거야. 아무 것도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상상으로 가는 문이야." (66쪽)
이 말대로라면 어린 아이들이 더 쓸데없는 생각을 잘하고 상상력도 풍부하니 이야기도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준 할머니의 설명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아주 작은 점처럼 나타나. 그 작은 점이 나타나면, 집중을 해서 그 점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거야. 그러면 작은 점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거지. 우주의 빅뱅처럼. 이야기도 똑같은 원리야." (27~28쪽)
그 점은 낱말 하나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고 그림의 한 장면일 수도, 꿈의 한 장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살면서 저런 빅뱅의 체험을 못해 보았지만, 아이들을 인도해갈 수는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4학년 이상이라면 이 책을 함께 읽고 불씨를 당긴 후 시작하면 참 좋을 것 같다. 혼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길 작가님이 바라고 쓴 책 같은데, 함께 읽기를 한다면 훨씬 더 쉽게 재미있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해가면서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AI 생각이 나네.... 난 일부러 피하듯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몇가지 설정해주고 지시하면 아주 그럴듯한 창작품이 튀어나오는 세상이잖아.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이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난 모르겠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AI 수업 연수에서 이런 창작 관련 도구들을 소개해주시고 결과물을 보여주실 때 난 단번에 거부감이 들더라구. 뻔지르르하면 뭐하냐. 걔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닌데. 더 무서운 거는 그게 본인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야. 깡통이 속에 꽉 차있다고 착각하는 거랑 똑같지 않아?

모르는 소리 말라고, 그렇게 시대에 뒤떨어져서 어쩌냐고 걱정한다면 괜찮아, 나 이제 낼모레 퇴직 할거거든. 내가 계속 남아있다면 이런 책 같이 읽고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쓸 거야. 그중에 하나 골라 도화지를 접어 장면마다 그림도 그려넣어서 그림책도 만들 거야. 그걸 집에 가져가면 엄마가 바로 재활용박스에 넣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시대가 가는 건가... 그럼 그때도 '이야기'는 소중한 것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오늘 리뷰는 이렇게 모르겠다로 마쳐야겠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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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사냥꾼
세라핀 므뉘 지음, 마리옹 뒤발 그림, 성미경 옮김 / 분홍고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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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아마도 내가 평생 가보지 못할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만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그런 사람들도 만날 수 없으니 모르는 채로 살아가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책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유리라는 아이를 만났다.

 

시베리아의 환경은 혹독하다. 그런 곳에서도 환경에 적응한 동식물들이 있듯이 사람들도 추위를 견뎌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살던 터전은 더 이상 절대적일 수 없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떠나간다. 유리의 이웃들도 그렇게 떠나갔다.

유리가 사는 곳에는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 태어나 쭉 살거나, 아니면 떠나가죠.”

 

이 책은 자연 다큐멘터리 그림책이라 할 만하다.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의 모습과 그곳의 생태를 잘 소개하고 있어서 정보책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혹독한 환경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주변부에서, 아니면 껍데기에서 깨작깨작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얼음 사냥꾼이라는 일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일은 바이칼 호수의 얼음을 잘라 집집마다 날라 주는 일이다. 겨울 동안 수도를 쓸 수 없는 이곳 사람들은 이 얼음을 녹여 생활용수로 사용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물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다. 바이칼 호수는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 저장고라고 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리가 서울-부산 거리보다 기니 정말 바다 같은 호수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겠다. 윗 문단에서 표현한 지구의 중심부에는 이렇게 깨끗한 자연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너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위태롭겠지? 여기까지 침투한다면 그냥 지구는 폭싹 썩어 문드러진 것이겠지. 제발 그렇게 되진 않기를 이 책을 보면서 비는 마음이 되었다.

 

호수 속에서, 호숫가에서, 호수 위 하늘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도 소개해주어서 좋았다. ‘오물이라는 다소 어감이 안좋은(?^^) 물고기 이름도 처음 알게 되었다. 새끼들을 품고 잠든 담비, 북극여우, 눈산양 등 동물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다.

 

유리가 부디 그곳에서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주변부에서 깨작거리며 사는 내가 부디 그들의 삶에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에서 만난 친구로서 유리와 이웃들에게 안녕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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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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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님을 이런 책을 읽을 때 깨닫는다. 보통사람의 글이 사실이나 경험의 서술,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잘쓴 글은 독자를 흔들고 이끈다. 늘 겪으면서도 직면하지 못하는 상황을 눈앞에 펼쳐놓기도 하고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거기 있기도 하고, 같은 아픔에 감정을 격동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찌꺼기를 뱉어내고 말개진 아침을 맞이하게 하기도 한다. 이상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한 '잘쓴 글'의 특징이다. 다른 측면에서의 잘쓴 글도 물론 있을 것이다.

읽어보니 왜 이 작가님의 단편을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각편들은 다 다른 소재와 다른 인물의 이야기면서도 묘하게 관통하는 한줄기가 있는 느낌이다. 그게 작가의 마음 아닐까 생각했다. 별볼일 없고, 어쩔 수 없고, 답답하고 연약하고 속물적인 존재로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고 싶어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부끄러워지는)

이 인물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이들이 특별히 멋져서가 아니고, 그나마 1이라도 성찰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알츠하이머가 뇌의 기능을 하나하나 정지시키듯이 마음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오히려 쿨해보이고 멋져보이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갈 바를 모르고 주춤대는 자신의 마음과 고민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화자들에게 우리는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겼다. 보통 내가 단편 리뷰를 쓸 때는 한 편 한 편 언급하다가 글이 길어지곤 하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 각 편이 다 매력적이었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도 있는데, 그건 다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1. 어떤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내 이름이어서 깜짝 놀람. (좀처럼 없는 일) 그가 하는 일과 상황에도 공감되어서 마음이 많이 갔다.

2. 각 편 제목들이 다 좋아서 어떤 제목이 표제가 되어도 다 좋을 듯했다. 그중에서 표제작이 된 <안녕이라 그랬어>는 '음 그래 역시 표제작이 될만한 작품이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갔는데, 다른 작품이 표제작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다. 40대의 에이미(은미)가 시골집에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팔리지 않는 시골집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화상영어공부를 통해 로버트라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줄거리고, 그 이면에는 옛 연인인 헌수와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던 날에 들었던 'Love Hurts' 라는 노래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영어에 서툴렀던 그녀는 당시에 'I'm young' 이라는 가사를 '안녕'이라고 들었었지. 안녕. 너무 많은 뜻이 담긴 한국말. 지금도 영어에 유창하지 못한 그녀는 마음에 가득한 지난일과 감정을 결국 말하지 못하고 '안녕'의 뜻을 로버트에게 설명하다 대화가 종료된다. 그 뜻은 '평안하시라'였다. 누군가에겐 영어만큼이나 어려운 평안하다는 일. 하지만 그들의 평안을 빌고 싶다. 지금 몇살이든, 옆에 누가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안녕이라고. 안녕하라고.

3. 마지막 작품 <빗방울처럼>에 나는 가장 이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 속 사건이 내 인생에 실화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작품만큼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인간이란 어쩜 그렇게 자기 경험 위주인지 모르겠다. 그 사건은 바로 '누수'였다. 윗집 누수가 우리집에 피해를 주고 그게 금방 해결되지 않는 상황.

지수에 비한다면 나는 문제를 함께 걱정할 가족도 있고, 집도 아파트고 윗집주인과 연락도 하고 있으니 어찌든 해결방안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작품에서 묘사한,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그 물방울소리가 몇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런데 그 소리에 반전이 있다. 우리집이 그랬듯이 지수네도 누수는 고쳤고, 천장 도배도 새로 했다. 그런데도 들리는 물방울 소리의 환청. 그건 신경쇠약의 소리가 아니라 이번엔 살라는 소리였다.
안돼.
그러지마.
살아.
물방울은 이제 천장이 아닌 지수의 뺨에 흐른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본인이 너무 맘에 들어 우겨서 계약한 빌라집에서 전세사기를 당하고, 떠앉은 빚을 해결하느라 착한 남편이 과로로 죽고, 집은 물이 새고 혼자 남은 지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까. 누수의 스트레스는 그 힘듦의 천분의 일도 안될텐데도 그걸 겪어봤다는 이유로 나는 마치 그녀를 이해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의 환청이 그녀에게 살라고 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게 처음 만난 외국인 도배사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한마디에서 퍼진 파동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게 소설은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늘 뒷전이었는데 일을 그만둘 시점이 되자 비로소 손에 조금 잡히는 느낌이 든다. 누수라는 단순경험이 주인공에게 연민과 응원을 가져다주는 걸 보니 내가 못한 경험을 소설을 통해서 간접경험하는 것도 세상살이에 나쁘지 않아보인다. 다음 책으로는 요 책 전에 나온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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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1~2 세트 - 전2권 - 펀자이씨툰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엄유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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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펀자이씨툰’이라는 인스타툰에서 관련 내용만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스타를 안해서 접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다. 책을 읽고보니 너무 매력적이어서 출간된 ‘펀자이씨툰’을 모두 읽어보리라 결심할 정도였다. 이 책 앞에 출간된 책들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데 재미있을 것 같다.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책이다. 제목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전작들은 본인의 이야기, 이 책은 부모님과 가족의 이야기.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내용들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그런데, 요즘 같은 인스타의 시대에는 예사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흔히 인스타의 폐해라고 거론되는 보여주기, 과장, 가식의 느낌이 없는 점이 매력인 것 같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진정성을 꾸며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검색해보니 작가의 어머니는 그 연세에 드물게 상당히 많이 배운 분이고, 교수에다 작가인 분이었다. 강연도 많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센스와 유머가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분, 교양을 잃지 않으면서 웃기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식 있고 지혜로우신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병,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순간을 달리는’ 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어머니는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고 꼿꼿하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웃기신다. 아버지 또한 적절히 장단을 맞추시고. 이렇게 잘 어울리는 노부부도 드물겠다 싶었다. 작가님 또한 부모님의 그런 모습에 마음속의 염려와 고통을 애써 잠재우며 씩씩하게 대처한다. 알츠하이머가 이야기의 발단인데,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니, 정말 특별한 가족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음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다 같은 인생인데 당연한 일이다. 부모님은 자식이 부담 갖고 찾아오길 원치 않으셨지만, 돌봄을 책임지게 된 자식의 입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가님처럼 위 아래 형제가 모두 외국에 나가 독박 돌봄 처지가 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시설에 보내드리는 것은 최후의 경우가 아니면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지다. (시설 얘기까지 책에 나오진 않았고 내 생각이 그렇다) 본인의 작업도 해야 하는 작가님 입장에서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많은 갈등이 따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분도 책에는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많이 공감했다. 그렇다고 다른 가족들이 못됐거나 얌체인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때로 화를 내고 갈등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옛 기억은 생생하지만 조금 전 기억을 잊는 것이 주 증상이었는데 가장 가슴이 철렁한 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게 너무 가슴아플 것 같다.ㅠㅠ) 그리고 기억을 더 이상 쌓을 수 없어 생기는 한계를 절감한 순간, 공황장애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아픈 일들을 굳이 감추지 않으면서도 마냥 슬픔만을 주지는 않는다.
“엄마는 더 이상 글을 쓰거나 사람들 앞에 서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꺼져가던 말들이 나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누군가에게 웃음과 위로가 된다.
그렇게 잠깐 다시 빛이 난다.
만약, 크리스마스 전구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이 없다면
그리고 다시 켜지는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소멸되어가는 당신의 기억 대신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딸은 불행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슬픔을 크리스마스 전구에 비유할 수 있게 살아주시는 어머니가 계셔서 참 다행이다.

소통의 의욕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같은 말을 수십번 물어보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참고 대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한 김에 전화라도 한 번? 그리고 펀자이씨툰 전작들을 읽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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