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SE : 스틸북 DVD (2disc)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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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혹성탈출>의 새로운 이야기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십년 전에 나온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주연의 <혹성탈출>을 다시 봤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원작에 비할 바 아니지만, 리메이크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우주시대에 미공군 소속의 리오 데이비슨(마크 월버그 분)은 벌써 2년째 우주공간을 떠돌고 있는 중이다. 세이모스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사람을 대신해서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훈련을 맡고 있던 리오는 엄청난 자기장을 만나 세이모스가 탄 알파비행선이 사라지자, 상부의 명령에도 스스로 비행선을 몰고 자기장 속으로 돌입한다. 초반에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영상이 등장하는데, 구조요청을 하는 시퀀스다.

리오가 불시착한 행성은 원숭이 아니 유인원이 지배하는 행성이다. 예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을 사냥하듯 유인원들은 인간을 노예로 잡아들인다. 유에스 에어 포스 소속의 리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유인원 사회에서 하등동물 취급을 받는 인간옹호론자인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 분)의 도움을 받아 우주모선인 오베론의 신호를 찾아 나선다.

한편, 리오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쎄이드 장군(팀 로스 분)은 유인원 사회의 존속을 위해 아예 인간을 말살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친다. 리오의 정체를 알아본 쎄이드는 그를 끝까지 추격한다. 오리지널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단 찰톤 헤스톤은 죽어가는 쎄이드의 아버지이자 세이모스의 직계 후손으로 등장해서 아들에게 놀라운 비밀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유인원이 인간의 노예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쎄이드는 리오를 반드시 찾아내 죽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리오 일행은 칼리마라는 인간 금지 구역이자 고대 유적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칼리마는 CAution LIve aniMAls의 약자였다. 그제야 리오는 모선 오베론이 자신이 우주공간에서 실종된 후, 이 행성에 불시착해서 유인원에게 습격당하고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팀 버튼은 시간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과 유인원 군단의 대격돌이 임박한 순간, 우주에서 유인원의 위대한 조상 세이모스가 도착하면서 가까스로 파국을 모면하게 된다.

아리와의 적당한 로맨스를 뒤로 하고 리오는 지구로 귀환을 서두른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지구로 돌아온 리오는 역시 불시착한 워싱턴 DC에서 놀라운 걸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영웅 쎄이드를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곧이어 도착한 유인원 경찰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번 여름에 개봉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래 20세기 폭스에서 전작의 상업적 성공으로 속편을 제작하려고 하다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시저라는 이름의 뛰어난 재능의 침팬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중에 거의 인간지능에 가까운 발전을 이루고, 동료 유인원들을 선동해서 인간에게 반항한다는 줄거리라고 한다.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유인원이 어떻게 첨단장비로 무장한 인간에게 대항할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터미네이터3>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기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과거의 보랏빛 전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기계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된 사무자동화의 영향으로 작금의 생활이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바뀌었을 진 몰라도, 인간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예전처럼 필요하지 않게 된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하기 시작했다.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역전은 미래사회에어쩌면 인류가 직면할지도 모를 그런 경고가 아닐까.

내심 쎄이드가 어떻게 지구에 오게 됐고, 지구에서 영웅대접을 받게 된 과정을 설명해줄 속편을 기다리던 팬의 입장에선 외전격의 새로운 버전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영화제작 환경이 광속으로 바뀌다 보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새로운 외전의 개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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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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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진,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공통점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롤리타>로 널리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었다. 그전에 <롤리타>와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샀지만, 정작 나보코프의 책을 읽기는 처음이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모국어인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나보코프 특유 언어유희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 세바스토폴을 떠난 나보코프 가족은 영국에 정착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슬라브어와 로망스어를 전공한 나보코프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보코프 가족은 19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2년 뒤, 러시아 군주주의자에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1937년 프랑스로 그리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계속되는 망명을 해야 했던 나보코프는 1955년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의 대성공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절망>은 1936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작가에 의해 1937년 그리고 1966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절망>은 독일계 망명 러시아인으로 초콜릿 사업을 하는 부르주아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게르만이 사업 때문에 방문한 프라하 인근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 펠릭스라는 부랑자를 만나게 되면서 빚어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측되는 게르만을 내레이터로 삼아, 소설에 직접 개입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아, <절망>만으로 그의 스타일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주변 상황에 대한 모호한 설명과 묘사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줄기를 잡아간다.

게르만의 위태로운 삶의 한 축에는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어리바리하고 경박하다고 평가하는 아내 리다가 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사촌이자 형편없는 실력의 화가 아르달리온이 있지만, 게르만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게르만의 관심은 오로지 파산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가 고른 방법은 실재했던 이류 보험사기의 재구성이다. 완벽을 꿈꾸는 범죄가 언제나 그렇듯 게르만의 어이없는 실수로 바로 꼬리가 잡힌다.

시인이자 작가라고 자부하는 주인공 게르만의 삶에 대한 자전적 서술은 독자에게 모호하게 다가온다.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나보코프가 구사하는 러시아어 특유의 언어유희는 주석이 없었다면 독해할 수가 있었을까? 게르만은 분명히 펠릭스에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데, 그 목적은 펠릭스의 예상대로 자신에게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소설 <절망>에는 마치 암실에서 인화지에 상이 맺히듯이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게르만의 행동과 사고를 쫓는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당대의 석학인 장 폴 사르트르도 이 책을 오독했을 정도로 나보코프의 <절망>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나보코프는 게르만이 자신의 도플갱어라고 굳게 믿는 펠릭스의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일체의 도덕적 교훈을 배제한 서사의 마법을 좇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착역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말미에 실린 역자의 친절한 해설은 소설의 모호함과 혼란을 식혀 주는 시원한 청량제처럼 다가온다. 대개 해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절망>의 경우엔 꼭 읽어야만 했다. 해설의 도움으로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 도스토옙스키으로 대표되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보코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나보코프의 <절망>은 1978년에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절망:양지로의 여행>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었다. 영국 출신의 배우 더크 보가드가 게르만 역을 맡은 영문판 결말을 그대로 재현한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나보코프의 소설을 제대로 읽었는지 찜찜하다. 조만간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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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홈
황시운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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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홈”하면 역시 서태지다. 최근에 비밀결혼과 이혼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수가 전면에 등장하는 소설 <컴백홈>은 그렇게 서태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황시운 작가는 자신의 첫 장편으로 어쩌면 자신의 우상이었을지도 모를 그런 가수에 대한 오마주를 바친다.

창비장편소설상이라는 타이틀에 빛나는 <컴백홈>의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녀 박유미 양이다. 이름 한 번 빼어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앳된 소녀의 과체중이다. 0.1톤을 한참 웃도는 주인공의 육중한 몸무게는 고통의 원천이자 세상으로부터 소외의 주범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 음식에 탐닉하고 주체할 수 없는 폭식의 나락에 빠져든 걸까?

지금도 그런 진 모르겠지만 한 때 시대정신의 선두주자였던 아티스트 서태지와 얽힌 운명의 끈이 있다고 유미는 굳게 믿는다. 기성세대의 간섭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 선구자의 도전은 쉽지 않았다. 서태지의 그런 도전정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유미는 언젠가 그와 함께 달나라로 갈 꿈을 꾼다. 놀랍군! 그런데 그러기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선행조건이 있으니 그건 바로 다이어트 성공이다.

유미의 육중한 몸매는 학교에서 “슈퍼울트라 개량돼지”라는 잔혹한 별명과 함께 공식 왕따로 늘상 얻어터지고 삥을 뜯긴다. 게다가 그녀를 괴롭히는 일진 짱 지은은 유미가 인정하는 유일한 친구다. 경제적으로 무기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돈벌이 전선에 나서고, 상대적으로 자식에게 무심한 가정환경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파괴되어 가는 오늘날 가정의 모든 단면이 유미네 집구석이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유미는 혹독한 다이어트를 통해 보통 사람이 되는 고행에 나선다. 폭식과 거식의 반복을 통해 자발적 거식증 환자로 되기로 작정하고 프로아나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폭식의 아름다운 추억을 아는 유미가 쉽사리 프로아나가 되기는 쉽지 않다. 끝없이 계속되는 음식의 유혹을 참아 가면서, 고통스러운 폭토의 과정을 겪는 유미가 그저 애처로울 따름이다. 한편, 유미를 괴롭히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편이 되준 지은이 어느 날 갑자기 미혼모가 되어 종적을 감춘다. 사정도 모르고 호스로 자신을 사정없이 내치는 엄마를 “까고” 가출한 유미는 지은을 찾아가 엄마가 되어가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친구의 변신에 혼란을 느낀다.

<컴백홈>에는 정말 21세기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봤음직한 모든 문제가 줄줄이 쏘시지처럼 달려나온다. 집에서도 친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인 유미는 오로지 MP3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게서 위로를 받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음악조차도 철저하게 신비주의로 무장한 상업 아티스트가 소산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해당 아티스트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그 아티스트가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가정이 흔들리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인 경제 문제에는 해답이 없다. 실업이 곧 생존을 위협하게 된 작금의 상황에서 자영업자로 내몰리는 가장의 선택지는 너무나 좁게 느껴진다. 어쩌면 자식에게까지 철저하게 무관심한 유미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딸이 가출했는데,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그의 무심함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사실 유미네 집안의 가족사를 따지고 보면, 유미네 엄마도 할 말은 없을 것 같다. 둥지의 김선생이 말하는 것처럼 새끼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종자라니 어쩌겠는가.

‘돌진하는 이야기꾼’이라는 황시운 작가는 독자에게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 묻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는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양아치, 날라리가 되기 위해서도 기본은 받쳐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작가는 날카롭게 꼬집는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성공의 사다리를 악착같이 기어오르기 위해 내면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외모라는 외적인 요인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초상에 급소를 찌르는 포복절도에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골계미를 추구하면서도 냉정한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 작가의 냉정함이랄까?

백문이 무소용이다. 직접 읽어 보고, 작가의 맹랑한 글쓰기를 몸소 체험해 보라. 스포일이 될까 봐 소심하게 적지 못한 구구절절한 잔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5월의 마지막 날에 만난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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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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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우리가 흔히 버트런드 러셀이라고 부르는 영국 출신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그리고 반전운동가로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석학의 공식 이름이다. 게다가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가지고 있다. <런던통신 1931-1935>은 지난 2005년에 <인간과 그밖의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Mortals and Others>의 개정판이다. 6년 전에 나온 책이 비해 엄청 뚱뚱해졌다.

<런던통신>에는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모두 1931년에서부터 1935년까지 5년간 발표된 135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책을 읽기 전에 항상 목차를 꼼꼼하게 살펴보곤 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글은 <나폴레옹이 행복했더라면>이었다. 80년 전의 교육 현장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은 불행했나 보다. 아이들의 즐거움은 기성세대는 허용할 수가 없었던 걸까? 러셀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애정과 상식 그리고 착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문한다. 행복의 비결이 그렇게 간단하다니! 인류사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위인이나 영웅들의 유년 시절엔 잔혹한 요소가 숨어 있었다고 러셀은 꼬집는다. 러셀의 말대로 그런 요소가 성취의 원동력이 되었을진 모르겠지만, 불행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20세기 초반에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볼 때 여전히 신생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미국과의 비교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노인들의 ‘소싯적’ 경험 타령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보다도 세월은 더 많이 산 경험에 기인한 선입견을 경계하라고 러셀은 주장한다. 유럽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런 경험이 없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창조성이야말로 저물어 가는 제국 영국을 대신해서 신흥국가 미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유럽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도 빼놓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면서 느낀 점을 러셀과 공감하다니 영광이다. 관광객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이 관광수입을 올려 준다는 명목으로 현지인들의 일상을 방해할 권리가 있던가? 우리는 과연 그들 나름의 규범과 질서를 준수하면서 관광의 즐거움을 찾고 있는 걸까?

<돈을 향한 공포, 돈에 의한 공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병폐 중의 하나인 금전만능주의를 경고한다. 교육 시스템과 영화 같은 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 금전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다른 모든 가치를 초월한 성공의 지표로 인식되는 세태를 이 철학자는 한탄한다. 게다가 소위 말하는 부자들이 한 세기 전의 부자들처럼 교양과 문화 면에서 존경받을 만한 행태를 보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공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고흐나 렘브란트의 유산은 자본의 증식을 위한 투자의 대상일 뿐이다.

진보주의자였던 러셀은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교육과 경제 민주주의가 따르지 않는 정치 민주주의는 엉터리라고 선언한다. 대중의 교육과 경제적 소외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온다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의 일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러셀은 민주주의 완벽한 체제라는 동의하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위험하다고 밝히고 있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다양한 주장을 드러낸 석학의 면면을 짧은 글에 담기란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삶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지난 세기의 산 증인이 들려주는 에세이의 울림은 그래서 더 깊다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만난 러셀의 텍스트가 에세이라는 형식이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고 쉬워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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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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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작년부터 야심 차게 선전해온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형사 전집의 첫 번째인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읽었다. 사람이 구식이어서 그런지 요즘 케이블 텔레비전만 켜면 등장하는 최첨단 스타일의 수사 방식보다는 우직하게 옛 스타일을 고수하는 피터 러브시의 피터 다이아몬드 같은 구닥다리 형사가 좋다. 그러니 휴대전화나 팩스 혹은 첨단을 달리는 지문감식기 같은 장비가 없던 1930년대 창조된 캐릭터인 쥘 매그레 반장도 마음에 들 수밖에.

이미 유럽에서는 1930년대에서부터 국제적 수사공조가 이루어졌는지, 라트비아 출신의 수상한 인물인 피에트르가 유럽을 가로질러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가 우리의 주인공 매그레 반장의 손에 들어온다.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매그레 반장은 삽으로 석탄을 퍼 넣는 주철 난로의 온기를 쬐어 가며, 근처 식당에서 배달된 샌드위치와 맥주를 즐기며 상대와의 ‘게임’을 즐긴다. 이제 막 근대적인 수사 시스템이 체계를 갖추어가던 시절의 이야기가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통해 소개된다.

이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마중 나간 기차역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매그레 반장을 특유의 ‘촉’을 발동시켜 유력한 용의자로 짐작되는 피에르트의 뒤를 쫓는다. 세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의 뒷골목과 노르망디의 페캉을 누비면서 범인이 남긴 단서를 수집하는 매그레. 이런 큰 덩치에 잠복이 어울리지 않지만, 범인도 인간인 이상 반드시 틈을 보일 것이라는 “균열 이론”을 자신한다. 이 균열 이론이야말로 매그레 반장이 사건 해결을 자신하는 원천이다.

미행에 나섰다가 암살당할 뻔하고, 신뢰하는 단짝 파트너를 잃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매그레 반장은 굽히지 않는다. 형사는 그에게 천직이었을까? 휴대전화는커녕 전화도 교환원을 통해서 해야 하고, 제대로 된 자동차도 없어서 택시를 타고 미행하는 묘사는 올드스쿨 스타일 수사의 전형이었다. 조르주 심농은 형사가 ‘게임의 상대’(범인)와 집요한 승부를 통해 형성하게 되는 기묘한 심리적 교감도 빠트리지 않는다. 내가 범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라는 역지사지의 추리는 매그레 반장을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은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조르주 심농은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1930년대 파리의 시대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다. 세계 곳곳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파리를 찾은 삶의 군상이 그의 손끝에서 부활한다. 빽빽하게 세입자로 들어찬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외국인의 모습이나 오페라 극장 그리고 심야의 살롱을 찾는 부유한 미국 사업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이 드러난다. 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등장하는 왜 외국인이 프랑스 땅에 들어와 사느냐는 작가의 극우적 시선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프랑스를 위대하게 만든 혁명의 삼박자였던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을 심농은 잊었던 걸까?

이 책을 주문하면서 함께 산 버즈북에서 그의 경력 중에 오점으로 남아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부역 혐의를 중점적으로 찾아봤다. 전후 나치 부역 혐의로 거주지 지정을 받았고, 1949년 모리스 가르송의 변호로 혐의를 벗었다는 점 정도가 전부였다. 심농이 만약 레지스탕스 저널의 편집장이었던 알베르 카뮈나 레지스탕스 영웅이었던 장 물랭처럼 조국을 위해 적극적인 저항활동을 했다면 과연 이런 혐의를 받았을까? 그가 남긴 한마디 코너에서 빠진 “N"은 어쩌면 나치에 대한 그의 변명이 아니었을까? 부족한 정보로는 심농의 전중 활동에 대한 평가는 잠시 유보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자그마치 75권에 달한다는 매그레 반장 시리즈를 다 읽을 자신은 없다. 언제나 그렇지만 시간이 늘 부족하고 읽은 책들은 차고 넘치니 말이다. 책 디자인은 참 마음에 든다. 기존의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집 중에서 나중에 선별해서 몇 권 읽어야지 싶다. 그나저나 로베르토 볼라뇨의 다른 책들은 언제나 볼 수 있는 걸까. 심농의 시리즈보다 더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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