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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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즐겨보는 SBS의 웃찾사의 <기묘한 이야기>란 코너가 있다. 세 명의 개그맨들이 나와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개그 코드로 풀어내면서, 늘상 ‘이렇게 세상엔 풀리지 않는 일들이 많아요’라며 마무리 짓는다. 이웃나라 일본에도 이렇게 기묘한 이야기, 괴담이 오래전부터 유행이었나 보다. 괴담동아리가 있어, 돌아가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비채에서 출간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도 읽어 보아서 그런지 뒤늦게 알게 된 미야베 미유키(이하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 미스터리 <미야베 월드 2막> 시리즈에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드디어 <피리술사>로 에도 시대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기존에 출간된 책들이 많아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수집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수많은 미미 여사의 책 중에서 읽은 책이라곤 달랑 <화차> 하나였는데, 미미 여사가 시대물을 또 다룰 줄은 미처 몰랐다. <항설백물어>의 교고쿠 나쓰히코 작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단박에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아마 비슷한 소재를 다루니 서로 교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기묘하게도 가장 늦게 출간된 책으로 에도 시대의 막을 열었다. 소설의 변조 괴담 매니아/청자로 등장하는 에도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는 정혼자가 변사를 당하면서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 에도 숙부 댁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전작인 <흑백>과 <안주>를 읽었다면 더 깊이 이해를 할 수 있으련만. 아직까진 부족하다. 그렇게 영혼이 부서진 오치카를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냥 그런 항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변조 괴담 컬렉터라고나 할까. 일단 미미 여사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괴담의 화자(話者)들이 이야기 하는 데 있어 부담을 가지지 않기 위해 여성 청자를 배치했다. 게다가 그 여성 청자는 에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색이다. 뭐 정도라면 그 어떤 이도 숨기고 싶은 비밀도 술술 풀어내지 않을까 싶은데, 오치카 아가씬 마음도 예뻐서 화자를 배려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괴담에 단련이 되면서 상대방이 부담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질문으로 초반 리드를 잡는다.

 

다음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 중의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17세기 에도 시대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기술이다. 하오리니 기모노 같은 일반적인 복식은 물론이고, 사무라이 계급 그리고 소설의 중심이 되는 상인들의 복식에도 상세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지위나 신분을 통한 심리상태와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에도 시대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절기에 따른 관습이나 일본 전국을 아우르는 이야기답게 각 고장의 다양한 면모를 앉은 자리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이런 부분들은 미미 여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피리술사>는 모두 여섯 편의 길고 짧은 변조 괴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도의 꽃이라는 오치카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결혼을 앞두고 정혼자의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흑백의 방에 와서 나누는 얘기는 여느 카페에서 흘려듣는 연애고민상담을 떠올리게 한다. 다마토리 거울연못이라는 곳에 가서 연인들이 가서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보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설이 있는데, 화자 오몬 아가씨의 할머니가 도전했다가 그대로 되었다고 했던가. 워밍업이 생각보다 부담 없고 간단해서 좋았다. 흑백의 방에서는 굳이 실명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괴담에 관련된 지명도 말할 필요가 없다.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주위에서 진지하게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가지고 있는 고민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청자인 오치카 역시 힐링의 여정 중에 있긴 하지만.

 

연작소설답게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풍경과 그에 따른 미시마야의 쥐 울음소리 흉내내기 같은 행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상인들의 이야기답게 상가(商街) 고유의 풍습 그리고 끔찍하긴 하지만 떼강도가 들이닥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이야기도 접할 수가 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시마야도 하마터면 떼강도의 공격을 받을 뻔했다고 하지 않았다고 하던가.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우는 아기> 이야기가 가장 이번 시리즈에서 슬프면서도 기묘하지 않았나 싶다. 겉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의 악행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는 아기의 운명은 고달프지 않을까. 말 못하는 아기의 의사소통방식이 고작 울음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 같다.

 

40년 전 천재지변으로 온 식구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모두 잃은 중년남자의 한 맺힌 고백도 절절하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평생의 짐이 된 이야기를 오치카 아가씨 앞에서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내의 풍모가 에도 시대 풍습을 담은 우키요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소설의 백미는 표제작은 <피리술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로 번의 재정을 담당하는 산골마을에서 벌어진 변조 괴담을 들려주기 위해 어느 풋내기 무사가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를 찾아온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무가에서 장남보다 여자 아이가 더 중시되었다는 무사 이치로타의 기묘한 고백담은 식인괴수 마구루의 등장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는 무사의 성장이야기가 배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무사는 오치카에게 자신이 극복해야 할 괴담과 어머니가 알려준 비밀을 들려줌으로서 비로소 의젓한 한 명의 무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미신으로 치부될 법한 괴담 이야기가 우주여행이 가능하게 된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치카 아가씨와 같이 듣는 청자의 입장이 된 독자는 마지막 <절기 얼굴> 일화에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뚜렷한 선과 악의 구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정작 선과 악의 경계 구별은 모호하기만 하다는 것을 말이다.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상인’의 존재야말로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타인의 몸을 빌어 비명횡사해서 저승으로 간 이들의 넋을 진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예의 상인을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죄과를 뉘우치고 스스럼없이 절기 얼굴의 운명을 받아들인 하루이치 삼촌 역시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오치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황마다 대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상인을 통해 죽은 약혼자 요시스케 씨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하고.

 

미시마야 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의 두 번째 막을 열어 젖힌 느낌은 최고다. 사실 처음에 책의 두께를 보고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재밌는 소설은 확실히 분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야기 중매꾼에 해당하는 두꺼비 도안 노인과 요즘 신문에 해당하는 에도시대 가와라반 덕분에 미시마야에 이야기를 오치카에서 들려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물론 미미 여사는 좀 더 새롭고 기괴한 이야기를 창작하느라 수고가 되겠지만. 네 번째 미시마야 시리즈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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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북스피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마포 김사장님의 미미 여사 관련 글을 읽고 있어요. 갑자기 미미 여사 작품들 정주행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국내에 소개된 책이 너무 많아서 독서를 시작한다면 몇 년 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5-02-10 09:46   좋아요 0 | URL
오오 얼굴책에 마포 김사장님의 글이 종종
올라오는군요.
전 이번에 <피리술사>로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물
에 푹 빠지게 되었답니다.
말씀 대로 미미여사의 책이 엄청 많아서 다 읽
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습니다.

댄스는 맨홀 2015-02-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과 안주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피리술사가 이어지는 이야기였네요. 읽어봐야 겠어요.

레삭매냐 2015-02-11 22:35   좋아요 0 | URL
미시마야 시리즈 <흑백>으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안주>도 사서 쟁여 두었구요.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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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들어 한 15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도통 손에서 놓을 줄 몰랐던 프랑스 출신 작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가 그 중에서 제일 재밌었다고 한다면 표본이 너무 적다고 욕을 먹으려나. 다 읽고 나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는데, 하나는 이 책이 자그마치 60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완전범죄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였다.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게 아니었던가? 미안하다 객쩍은 농담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본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가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타인의 삶을 사는 리플리의 모습이 소설의 주인공 힐데가르트 마이스너의 그것과 겹쳐 보였다. 전후 패전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서른네 살 먹은 힐데가르트의 현실은 보잘 것 없지만, 그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된 여자다. 그런데 그것이 심각한 범죄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도 수상한 시절을 살다 보니 주변의 모든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두기 마련인데, 이런 독자와 달리 자신을 가난에서 구해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그녀의 도발적인 자세가 어째 불안하기만 하다.

 

어느 억만장자가 신붓감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자마자 힐데가르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어필하는 편지를 보내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린다. 마침내 기다리는 답장이 도착하고, 코트다쥐르의 칸에서 미래의 공모가 안톤 코르프와 만남을 가진다. 물론 코르프가 그녀가 꿈에 그리던 부를 안겨줄 드라마 속 주인공은 아니다. 그는 그 꿈을 실현시켜줄 남자의 오랜 비서란다. 코르프는 가난탈출에 목숨 건 힐데가르트가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유혹을 제안한다. 자신이 모시는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의 마음을 빼앗아 그와 결혼해서 그의 재산을 가지라는 유혹이다. 물론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배려를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그녀를 입양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미래에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가련한 힐데가르트는 능란한 공모자 코르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임무에 착수한다.

 

자 이쯤에서 우리의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독일 출신의 괴팍한 노인네는 수상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았는데, 그렇게 자신에게 집중된 재산은 자본주의의 특성상 자가 증식을 거듭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재화의 모습으로 그에게 보답했다. 돈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칼 리치먼드는 주변의 자메이카 출신 하인들을 개처럼 부리는 등 그야말로 졸부 행세에 여념이 없다. 그의 비서 안톤 코르프는 무소불능한 자본 권력을 행사하는 자기 주인의 헛된 자존심이야말로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제는 자신의 의붓딸이 된 힐데가르트를 간호인으로 동원해서 공략에 나선다.

 

이 정도라면 <지푸라기 여자>가 그저 그런 재밌는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십대 작가 카트린 아를레는 자신이 삶에서 체험한 것들을 뛰어넘는 범상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소설의 서사를 비틀기 시작한다. 힐데가르트와 코르프의 굳건해 보이는 동맹은 졸부 칼 리치먼드의 급사 때문에 종착역을 알 수 없는 과속에 돌입한다. 결국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던 막대한 유산 상속을 위해 힐데가르트는 새로운 유언장의 공증을 위해 자기 남편의 죽음을 감추는 자충수를 둔다. 문제는 칼 리치먼드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타인에 의한 살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니 도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이렇게 노선 이탈을 마구 감행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물론, 독자는 기대를 벗어난 서사구조의 일탈에 스릴을 느끼면서 힐데가르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여신의 마지막 결정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도저히 힐데가르트의 의도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고지식한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가난이 싫어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한 패전국 출신의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무력한 여성이 마주하게 되는 운명을 무조건 사회 부조리 혹은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연합군의 폭격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독일 사람들은 특히 그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합법적인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무조건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가난이 싫어 돈 많은 갑부와 결혼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도리어 묻는 힐데가르트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지 묻고 싶다. 그런 점에서 안톤 코르프가 지적한 대로, 부자가 되기 위해 지난한 노력과 시간, 행운 그리고 모욕 등을 감수할 수 있는 자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예언(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다)이 과연 이십여 년 산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점이 믿을 수가 없다.

 

카트린 아를레 작가는 추리 범죄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발한 트릭 대신,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묘수랍시고 쓰지만 개미지옥처럼 서서히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한다. 악당이 결국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되는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하긴 진실과 가치가 전도되고,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미상불 지푸라기에 매달린 여자가 낯설 일도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은밀한 유혹>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을 거듭해온 <지푸라기 여자>가 요즘 원소스멀티유즈 미디어셀러의 대세를 타고 새롭게 단장을 할 모양인가 보다. 모쪼록 진부한 해피엔딩 결말 대신 원작에 충실한 비극적 결말의 영화적 구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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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이 나와서 오래되고 어색한 번역의 동서문화사판을 읽지 않아서 좋아요. ^^

레삭매냐 2015-02-09 10:43   좋아요 0 | URL
그동안 같은 제목의 책이 여러권 나왔더라구요.
생각보다 재밌에 읽었답니다 :)
 
채플린의 마지막 춤
파비오 스타시 지음, 임희연 옮김 / 가치창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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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 전에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에 대한 학기 리포트를 쓴 적이 있다.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을 뒤져 가며 당시 신문에 실린 영화 광고와 리뷰를 참고했고, 또 많은 참고서적을 찾아 공들여 리포트를 썼었다. 그런데 난 정작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는 보지 않았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리포트가 아닌 탓이었을까. 그리고 보니 난 개인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한 편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동안 영화에 미쳐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파비오 스타시의 <채플린의 마지막 춤>을 읽으면서 이 ‘소설’(중요한 포인트다)에 실린 글이 사실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구인지 구분할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리뷰 쓰기에 앞서 고백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영화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술의 종합체였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기술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빛이 빚어내는 예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19세기 후반에 들어 비로소 실버스크린에 영사기를 돌려 빛의 서커스를 담아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딱 맞춰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출신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등장은 막 시작되던 무성영화 시절 전설이 될 스타탄생의 예고편이었다. 파비오 스타시 작가는 보드빌과 니클로데온 그리고 래그타임 같은 음악이 유행하던 호시절의 찰리 채플린의 미국행에서 다양한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미국 여행이라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통해 그저 그랬던 코미디 배우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체험하면서 대배우가 되기에 이른다.

 

그전에 앞서 사신(死神)을 등장시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 시절의 찰리 채플린이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죽음과 경주하는 아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그러니까 사신을 웃겨야 채플린은 살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린 아들 때문이라고 둘러 대지만, 그가 회상하는 그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질주였던 셈이다. 또 다른 장치로는 찰리 채플린이 영화배우 혹은 감독의 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 원인제공을 한 캐릭터로 만인의 연인이자 희대의 곡예사였던 에스터 노이만과 채플린의 주장대로라면 진짜 영화인 시네마토그래프의 발명가 아를르켕의 로맨스를 등장시킨다.

 

사실 아무리 봐도 허구로 보이는 찰리 채플린의 미국 주유기를 통해 훗날 자신의 무형의 자산이 될 체험 과정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유능한 복서로 다부진 체구의 그가 링 위에서 한 대당 5센트씩 벌었다는 이야기, 먹고 살기 위해 유대인 가게에서 사탕을 팔았다거나 혹은 인쇄소에서 비로소 문학 작품을 만나게 되는 과정, 어느 순간 열독하게 돼서 처음 연출로 데뷔하게 되는 과정에서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그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영국 출신으로 산업혁명 시절을 재현해냈다는 설정 등은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리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고난이 대배우가 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는 발명왕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사실은 특허권을 독점하고 이윤창출에 눈먼 자본가였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영사기 역시 기존에 존재하던 기술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막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영화판에서 빛이 보기 시작한 찰리 채플린의 특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고 자신이 굳게 믿는 아를르켕이 사랑한 여인 에스터를 찾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모험에 또 한 번 나서게 된다. 사실 이 여정에서 그가 환상의 여인 에스터를 찾을 수 있냐, 찾지 못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 자체가 자신의 자아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성취이기에.

 

찰리 채플린 식 개그에 과문한 탓인지 모름지기 손에 땀을 쥐어야 한 절체절명의 사신 웃기기 시퀀스에서도 그다지 깊은 감흥을 받지 못했다. 작가가 그린 노고에 비해 독자의 제한적인 유머에 대한 상상력 때문이리라. <채플린의 마지막 춤>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 재미를 더하는데, 정작 마지막 롤에서는 너무 진중한 전개 때문에 피날레에 대한 흥미를 급감시켜 버렸다. 우리 모두는 이미 찰리 채플린이 88세가 되던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래 전 리포트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미국에서 볼셰비키로 몰려 추방당하고 타의에 의해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파비오 스타시 작가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것 또한 작가의 영역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도리가 없다.

 

1세기 전 상황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아 옮긴이 주가 친절하게 등장하는 부분은 좋은데, 어쩔 경우에는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 때문에 책읽기의 흐름이 종종 멈춰지는 불편이 느껴졌다. 그냥 각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기와 엄청난 대성공에 막 진입하던 시절의 기록으로는 좋았지만, 찰리 채플린 삶 전반에 대한 글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사실과 허구가 서로 공존하는 소설구성이 어쩌면 평생을 희극 배우로 산 인물에 대한 헌사로 안성맞춤일 수도 있겠다는 감상으로 부족한 리뷰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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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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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태생 자체가 정확할 수가 없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의적 기억을 풀어내는 소설가의 기억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내 착각이었다. 작년 스웨덴 한림원이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주면서 그 이유로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의 파리) 점령기의 생활세계를 드러냈다”고 했다. 그런데 후자만 기억하고 전자는 아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전에 읽은 두 편 소설 모두 전자의 조건에는 해당하지만, 후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사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읽기 전에 시발점을 바로 이 작품 <도라 브루더>로 시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도라 브루더>야말로 내가 판단할 때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이 어디 자신의 뜻대로 되는 법이 있었던가. 어쨌든 세 번째로 만난 모디아노의 책은 언제나 그렇듯 모호하면서도 또 여전히 시간의 탐색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모디아노는 과거의 어느 사건을 파고드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그런데 소설 속의 화자(소설가)가 글을 쓰고 있다고 발표한 현재 시점의 1996년이 아닌 1941년의 어느 실종 신고로 독자를 조용하게 이끈다. 그리고 보니 책의 표지에 파리 시내 지도가 한 장 실린 것을 깜빡했다. 모디아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파리의 지명과 대략적인 위치 파악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위한 것이리라. 과거에 군부대의 병영이 있었다는 클리냥쿠르, 영화를 보기 위해 찾던 오르나노 대로 같은 이름이 갖는 프랑스 내부의 문화 사회적적 의미를 과연 나는 이 책을 통해 잡아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반세기도 더 지난 시절의 일에 관심을 갖는 화자가 나는 더 궁금하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15세 소녀, 도라 브루더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렇게 알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지금도 터부시하는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유대인 일대검거사건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독일법령이 우선시되는 점령기였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법권의 도움과 꼴라보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1만 3,152명이 되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잡아들일 수가 있었을까. 더 큰 문제는 그들 중 대다수는 외국인 신분이 아닌 어엿한 프랑스 시민권자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국가란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투렐 억류 센터와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최종목적지인 아우슈비츠였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화자는 그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흘러 알제리 사태의 복판에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흘리기도 하고, 나치 독일의 점령기 시절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의 수상쩍은 암거래 에피소드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아버지와의 불화 같은 개인적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것이 바로 종잡을 수 없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주특기인 모호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의 얼개 구조다. 이렇게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은 우리가 과거에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져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의 흔적들은 기록에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아주 사고해 보이는 징후들조차 놓치지 않고 탐문과 서류 조사, 별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몇 장의 기념사진 그리고 정말 우연하게 얻어 걸린 고시장에서 사들인 금방 사그라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오래된 편지까지 끈기를 가지고 꼼꼼하게 살핀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기록하는 독일식 방식이 도운이 되기도 한다. 마치 무슨 암호처럼 보이는 체포와 호송 절차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내가 도라 브루더를 추적하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우리는 끈질긴 소설가의 추적 덕분에 점령기 시대 유대인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빈약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네들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도라의 부모님인 에른스트와 세실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베테랑으로 식민지 부대에서 숱한 전투를 치르고 100%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끝내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역시 나치 독일의 점령 이후 강화된 유대인 등록과 검거 열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 반항적이며 독자적 자질과 방탕기가 다분했던 십대 소녀 도라 브루더는 도피 행각을 계속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도라였지만, 부계와 모계 덕분에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고 기독교계 기숙사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을 거라고 소설가는 추정한다. 아무리 삶에서 달아나려고 노력했음에도 도라의 운명은 다른 유대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조용하게 증언한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이 소설에서 설정한 시간이라는 시니피앙(기표)과 짝을 이루는 시니피에(기의)는 시간의 이빨, 다시 말해서 망각이다. 작가는 점령기라는 자의적 시간이 그리는 궤적에 놓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고증을 통한 추적에 나선다. 시간의 탐색과 재구성을 통해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유대인 소녀의 운명을 추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가혹한 홀로코스트 시대에 아무런 대응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던 무력한 개인의 운명을 읽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하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도라 브루더에 대한 추적은 어느 순간, 수면 아래로 잦아들고 대신 그의 삶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사회적인 폭압과 갈등이 만연해 있던 1940년대와 2015년 현재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망각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의 객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주체가 될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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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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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두 번 갔다. 여느 여행자처럼 두 번 모두 수박 겉 핥식의 그런 여행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파리에 갔을 적에는 한 번 가본 곳이라고 기시감 덕분에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읽으면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생각에 작가가 들려주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내게는 오데옹 사거리, 브레트빌 대로 그리고 뇌이 시청 같은 낯선 지명보다 여전히 홍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리고 종로의 피맛골이 더 친근한 걸 보면 말이다.

 

먼저 이 책이 내가 읽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재작년 수상자였던 앨리스 먼로의 책도 서너 권 사두고는 아예 읽어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모옌의 책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과 아집에 발동된 거부감이 스스로를 기만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 난 그래도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의 이런 저런 책은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다 읽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가 눈에 띄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놀랍게도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 모쪼록 이참에 노벨문학상은 어렵고 재밌지 않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다. 아, 그리고 160쪽 가량의 짧은 분량이었다는 점도 속독에 한몫했다.

 

작가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라고 명명한 카페 <르 콩데>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며 한 잔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우정을 쌓던 바로 그 곳에서 첫 번째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조금은 이질적 존재로 다가온다. 문득 <르 콩데>가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화자 나는 그런 곳이야말로 정의할 수 없는 자력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한편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폭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런 통과의례의 절차를 거쳐야만 자신들의 패거리에 낄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에 합의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증언한다.

 

화자가 소개하는 이름 중의 배턴을 이어 받아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몇몇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 받은 캐릭터가 바로 본명을 알 수 없는 루키라는 여자다.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장’은 자신의 노트에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시간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사진사가 카메라로 작업을 하듯 그렇게 정교하게 적어 넣는다. 마치 영화 <스모크>에서 담뱃가게 주인 하비 케이틀이 매일 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첫 번째 인스톨의 말미에 자신은 고등광산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운 듯 밝히며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긴다.

 

다음 주자로 등장한 화자는 좀 더 흥미로운 인물로 배치가 되어 있다. 스스로 예술편집자라고 카페 <르 콩데>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사립탐정 피에르 케슬레가 누군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에 가미된 미스터리 효모를 들뛰게 만든다. 그가 찾는 사람이 바로 <르 콩데> 카페의 단골손님 루키이고, 그녀의 처녀적 이름은 자클린 들랑크 그리고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피에르 슈로의 집나간 부인이라는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탐정은 사건 의뢰 받은 사람을 찾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클린의 도피 혹은 방황에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가 오래전 ‘미성년자의 방황’을 경험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다. 그렇다면 남편을 떠난 자클린의 도피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란 말인가.

 

자자, 이제 드디어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클린 들랑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차례다. 그녀는 물랭루주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쩔 수 없이 저녁 시간을 홀로 보내야했다. 성정이 예민해지고 가슴이 들끓을 그런 청소년기에 그녀는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그렇게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고, 경찰을 연락을 받은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에 돌아오게 된다. 물론 그 정도로 자클린이 벌이는 (현실세계에서의) 도피 행각이 멈출 리 없다. 그러다 해골이란 별명을 가진 자네트 골이라는 여자와 만나 ‘눈’을 맞는 경험도 하게 된다. 그렇게 도피 중에 그녀가 자주 들렀던 서점 주인이 그녀에게 건넨 “그래, 당신의 행복을 찾으셨나요?”란 질문은 화두처럼 상냥하면서도 신비하게 그녀를 매료시킨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점 주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의 나머지 두 꼭지는 자클린의 친구 롤랑이 맡는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그는 자신이 전생에서부터 그녀를 알았던 것 같다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다시 위대한 철학자의 ‘영원한 회귀’ 사상까지 도입해서 고대 철학자가 줄기차게 주장한 고통의 경감과 쾌락의 증진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그런 결론에 방점을 찍는다. 뒤표지에 실린 ‘도망치는 순간’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놀랍다, 그저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나의 소설의 얼개에 지레짐작을 정통으로 박살내준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자신의 소설에서 장기로 삼은 시간을 통한 기억의 탐색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어느 순간엔가 서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스쳐지나가지 않았을까는 추론을 도달하는 개연성 설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밥 스톰스가 주최한 파티에서 벌어지는 시(詩) 배틀은 또 어떤가.

 

영화 <라쇼몽>처럼 직접적인 교차 서술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를 무대로 활동하는 캐릭터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펼치며 벌이는 느슨하면서도 삶의 어느 순간에 서로 연결된 이야기들은 매력적이다. 삶 속에서 도피와 방황을 반복하던 자클린이 특정한 시간에 좌초되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 도착했을 지도 모른다는 고등광산학교 학생의 추측도 흥미롭다. 자클린을 찾아 나선 사립탐정 케슬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가 언급한 진실이 토해지는 순간이야말로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의 고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젊음’은 삶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단절되었거나, 방황 혹은 도피하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니었을까.

 

그동안 출간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들을 많이도 모아 두었다. 올해 을미년을 모디아노의 해로 삼아 천천히 읽어도 될 정도다. 바로 <팔월의 일요일들>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이 소설에도 그가 구사하는 어느덧 익숙해진 기억 속의 탐색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꾸준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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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레삭매냐님. 잘 지내시죠? ^^ 저번 주에 책방에서 운 좋게 모다이노의 <슬픈 빌라>를 구입했어요. 저도 모다이노 작품을 정주행 독서를 해보려고 합니다.

레삭매냐 2015-01-24 10:1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싸이러스님!
저도 헌책방에서 모디아노의 책들을 찾아 헤맸는데
생각처럼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노벨문학상
위업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간신히 <도라 브루더> 구한 뒤에는 이런저런 루트로
잔뜩 쟁여 두게 되서 싸이러스님처럼 정주행 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