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로 읽는 모파상의 전쟁 이야기
기 드 모파상 원작, 디노 바탈리아 지음, 최정수 옮김 / 이숲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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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 드 모파상을 읽는다. 어떤 작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그렇듯 예상하지 못한 그런 계기로 촉발된다. 지난 주말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래픽 노블로 읽는 모파상의 전쟁 이야기>이란 책을 만났다. 모파상이 쓴 전쟁 이야기들을 그래픽 노블화한 작품이었는데, 대출은 안되고 관내열람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나가기 전에 다 읽어야 한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모두 8개의 전쟁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었고 도서관 탈출 전에 다 읽을 수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던 1870, 모파상은 칼리지를 졸업한 20세의 열혈청년이었다. 조국애로 피끓는 청춘은 당연히 자원입대해서 침략군에 맞서 싸운 모양이다. 전쟁 당시 그의 활약을 궁금했지만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달랑 한 줄만 기록되어 있었다. 에밀 졸라의 <패주>에서도 다뤄지고 있지만, 바당게 휘하 아래 프랑스군은 몰트케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전략과 전술, 보급 그리고 신무기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 시절 그랑 아미라 불리던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든 국토가 프랑스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불리던 유린되고, 자산은 약탈되었으며 학살이 벌어졌다.

 

바로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모파상이 쓴 8개의 단편의 무대가 펼쳐진다. 가장 먼저 만난 <두 친구>에서 프로이센군의 점령 아래, 낚시를 나갔던 친구 모리소와 소바주는 모래무지 낚시를 하다가 간첩으로 몰리게 된다. 교활한 프로이센군 장교는 자신에게 프랑스군의 암구어를 알려 주면 살려 준다는 말로 유혹했지만 모리소와 소바주는 적군 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총살당한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프로이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보통의 프랑스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 나는 이 그래픽 노블을 보고 나서 바로 모파상의 단편집을 찾았다. 그리고 4편의 원전을 읽었는데 극화를 맡은 디노 바탈리아 작가가 거의 완벽하게 원전을 그래픽 노블로 만들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물론 단편이 워낙 짧은 탓이기도 했지만 원전과 아주 흡사해서 비교해 가며 읽는 재미도 느낄 수가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프랑스군의 영웅적(?)인 활약상 대신, 모파상의 고향이었던 노르망디까지 진출한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사보타주와 유격전을 벌이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모파상은 사실주의적 접근으로 묘사한다. 맨 마지막 에피소드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밀롱 영감은 자그마치 16명의 프로이센 창기병들을 처치했다. 완벽할 수도 있었을 밀롱 영감의 활약은 마지막 습격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인 채로 발견이 되면서 마무리된다. 바댕게의 제2제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들어서면서 정부와 부르주아들이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도모하는 동안 프랑스 민중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무너뜨린 적군에 대항해서 이런 유격전을 시도했다는 점을 모파상은 문학으로 증언한다. 그런 점에서 증언문학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탐쟁이 주인공이 등장하는 <발터 슈나프스의 모험>에서는 본대에서 낙오한 프로이센군 병사의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사랑하는 아내와 네 자녀를 고향에 두고 전선으로 끌려온 발터 슈나프스는 프랑스 정복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 어떻게 하면 살아서 집에 돌아갈 궁리만 할 뿐이다. 모파상은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본질이 국민국가간의 영토전쟁의 탈을 쓰고 있지만, 보다 많은 이윤을 올리기 위한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의 전쟁이라는 점을 냉철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전장에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부상당하고 죽는 실체 역시 그들이 아닌 무산자 계급의 시민이 아니던가. 배가 너무 고파 프랑스 사람들의 식탁을 습격했다가 그들에게 포로가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어찌나 짠했는지 모른다. 모파상식 유머라고 할까.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집에 의탁된 네 명의 프로이센 병사들을 화형에 처한 소바주 아주머니의 이야기도 울림이 컸다. 소바주 아주머니 역시 최후를 앞두고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의연하게 총살대 앞에 선다. 당시 프로이센군의 총살대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또 처음 알게 됐다. 당시 외국 침략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얼마나 컸는지 알려주는 일화였다.

 

어제 모파상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비곗덩어리>를 읽고 있다. 지금까지 한 절반 정도를 읽었는데 역시나 전쟁이 불러온 비극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추태를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단편 역시 원전과 거의 유사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위기에 순간마다, 자신들이 경멸하던 비곗덩어리에게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며 손길을 내밀지만 또 그렇게 위기가 지나간 다음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의 역겨운 모습을 모파상은 기가 막힌 필치로 포착해낸다.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들이 국가 위기 상황이 닥치면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위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모파상의 단편들을 읽다가 너무나 유명한 <목걸이>를 읽었다. 제정 붕괴 후 전쟁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우 민족주의가 득세하는 와중의 혼란상과 다시 공화정을 엄습한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실체를 직격한 작품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이달에는 모파상을 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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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6-06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파상도 그래픽 노블이 있군요~! 모파상 좋습니다~! 단편들도 좋지만 장편들도 좋더라구요. <벨아미> 생각이 납니다 ㅋ

레삭매냐 2023-06-06 20:59   좋아요 1 | URL
그래픽 노블로 만나고 다시 원전
을 읽게 되는 선순환이라고나 할까요.

<벨아미> 그렇지 않아도 서가에서
보고 낭중에 봐야지 싶었답니다.

coolcat329 2023-06-07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비계덩어리랑 두 친구에요. 사랑 이야기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네요.

레삭매냐 2023-06-13 21:08   좋아요 0 | URL
결국 모파상 단편집은 못 다 읽고
반납하게 되었네요 ㅠㅠ

다음 기회를 노려 보겠습니다.
<비곗덩어리>도 마저 읽었어야
했는데 미즈키 시게루 선생의 책
들을 빌려야 해서 눈물을 머금고
그만.

저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다
룬 이야기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인어 소녀 Wow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도나 조 나폴리 글,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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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도서관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개관하는 동안 아무리 오래 버티고 있더라도 누가 나가라고 하지 않는다. 일단 비용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하는 책을 마음껏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책과의 만남이 항상 대기 중이다. 오늘은 모파상의 단편집들과 도나 조 나폴리의 <인어 소녀> 그래픽 노블을 만날 수가 있었다.

 

오션 원더스라는 아쿠아리움이 있었다. 그곳의 운영자 넵튠은 가스라이팅의 천재였다. 그는 바닷가에서 포획(?)인어 소녀로 돈벌이에 나선다. 자신이 운영하는 아쿠아리움에 인어 소녀가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이 점에서 그는 탁월한 마케터다. 인어 소녀가 그려진 티셔츠를 10달러에 팔아먹는다. 그리고 실제 그의 아쿠아리움에는 인어 소녀가 살고 있다.

 

바다의 신을 자처하는 넵튠은 원래 어부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어 소녀(미라)를 완벽한 가스라이팅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만 인어 소녀가 살 수 있을 거라는 말로 미라를 조종한다. 빌런 역의 넵튠은 자신의 보일 듯 말 듯하며 숨바꼭질 하듯 아쿠아리움을 찾은 고객들을 현혹하라고 미라에게 주문한다. 관람객들이 던진 동전 모으기 역시 미라의 몫이다. 하지만, 미라가 오션 원더스를 찾은 리비아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면서 넵튠이 통제하는 완벽한 세상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우리 인간이 갇혀 있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동시에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떠올랐다. 자신이 사는 세상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트루먼은 결국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지 않았던가. 인어 소녀 미라의 이야기도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우리는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또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게 되면 곧 실행에 옮겨야 하는 법이다.

 

우리의 미라는 문어 친구의 전폭적인 지지로 아쿠아리움 오션 원더스를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에 대한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다리가 있다는 점, 물 밖에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말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시간 그러니까 어느 타이밍에 미라가 오션 원더스를 벗어나는 가가 문제일 따름이다.

 

전형적 성장 서사의 그것을 따르면서 도나 조 나폴리의 <인어 소녀>는 자주적으로 성장해 가는 미라의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존을 도모해야 할 동물들을 아쿠아리움에 가두고 돈벌이에 나서는 시스템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어 소녀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규정하고 역시 상업주의에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냉소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디즈니에서 실사화된 <인어공주>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분출하는 가운데 만난 <인어 소녀>의 서사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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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5 0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을 레삭매냐님 서재에서 또 만나니 반가워서 ㅎㅎ
그러고보니 <트루먼 쇼>와도 겹치네요. 아...필립 K 딕의 무슨 작품이 <트루먼 쇼>로 영화화 된거라고 들었는데 무슨 작품이 또 뭔지 모르겠는^^

책의 세계는 어렵습니다 ㅎ


레삭매냐 2023-06-05 01:11   좋아요 2 | URL
오호 데이비드 위즈너
작가라는 분은 또 처음
인지라 - 찾아 봐야겠네요.

알려 주신 정보에 혹해서
제가 또 부지런히 찾아보니
<트루먼 쇼>는 필립 K 딕
이 1958년에 발표한 <어긋
난 시간>(Time Out of Joint)
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하
네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얄라알라 2023-06-05 01:21   좋아요 1 | URL
<이봐요 까망씨>라고 번역된 그림책 외,
꽤 많이 번역되었어요. 그 분의 작품이^^
전 글자 없는 그림책에 끌리더라고요.

레삭매냐 2023-06-05 08:29   좋아요 1 | URL
다음주에 도서관에 가면
빌려서 읽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3-06-05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긋난 시간>
감사합니다.

과연 제 장기 기억력이 얼마나 그 책제목을 가져가줄지 모르겠습니다

제겐 짐 캐리 때문인가 <트루먼 쇼>가 어둡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필립 K 딕 소설이 좀 분위기가 그래서, 의외였어요. <트루먼 쇼>가 그의 작품에서 출발된 거란 점이.

<어긋난 시간> 다시 한 번 외워보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3-06-05 08:31   좋아요 2 | URL
저는 개인적으로 <트루먼 쇼>가
짐 캐리 최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스 벤추라> <마스크> 같은
코믹 영화로 개그맨 같은 배우로
생각되기 쉽지만, 최소한 <트루먼
쇼>에서는 인생연기를 펼쳐 주었
으니까요.

다시 한 번 보고 잡네요, <트루먼 쇼>.

얄라알라 2023-06-05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매냐님!저와.의견일치를 보셨습니다. 저는 <트루먼 쇼>, 영화도 너무 좋았지만 짐캐리라는 배우를.그제서야.제대로 본 느낌이었어요. 대단하죠...훗날.연세드신후 그분의 인터뷰를 보아도 내강외유이신듯합니다. 저도 좋아해요. 다시보고싶넹요

레삭매냐 2023-06-06 09:30   좋아요 1 | URL
어려서 볼 적에는 고저
코미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또 다
른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우리 인간이란, 거
대한 돔에 갇혀 사는 트루
먼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암튼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6-13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트루먼 쇼>를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 <트루먼 쇼> 조만간 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6-13 21:09   좋아요 1 | URL
짐 캐리가 워낙 개그맨 캐릭이라
저평가된 부분이 있는데,

<트루먼쇼>에서는 최절정의 연기
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6-13 21:47   좋아요 1 | URL
전 짐 캐리 연기력 높게 평가합니다ㅎ 여러 이유로 연기력이 저평가되는 배우들이 있죠ㅎ
 
당당하게 실망시키기 - 터키 소녀의 진짜 진로탐험기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오즈게 사만즈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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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좀 빌린 지가 되었는데 지난달 말일날 꼼수로 한 권이라도 더 채우려고 읽기 시작했다가 회사에 두고 오는 바람에 나의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루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3일이 걸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비슷한 처지였던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생각이 났다. 오즈게 시만즈가 아타튀르크의 유령과 군사 독재가 횡행하던 1980년대 터키의 현실을 그렸다면, 사트라피는 회교혁명 이후 이란의 갑갑한 상황을 다뤘다.

 

어린 오즈게 시만즈는 언니처럼 학교에 가고 싶어한다. 어려서부터 몽상가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학교에 갔더니, 터키의 국부로 칭송되는 아타튀르크 칭송에 여념이 없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하던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고, 국가가 열강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서 터키 국가를 지켜낸 영웅이라고 모든 이가 말한다. 이웃 그리스와의 전쟁에서도 이겼다고 자랑한다. 나라의 입장마다 다르겠지만, 자신들이 그리스를 400년간 식민 지배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서도. 그것도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선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펠린과 오즈게의 부모님들은 지식인 계급 출신으로 좌파 성향이다. 아버지는 고아여서 그런진 몰라도, 자녀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한다. 아니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랬던가. 사만즈 집안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했기에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됐다. 언니 펠린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 아니면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더더욱 공부에 매진한다. 그리고 터키에서 일류대학이라는 보스포러스 대학에 진학해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은행 직원이 된다.

 

한편, 주인공 오즈게도 열심히 공부해서 언니의 뒤를 따라 보스포러스 대학에 진학에 성공했다. 문제는 오로지 일류 대학 진학이 목표였기 때문에, 전공을 비교적 커트라인이 낮은 수학과로 정했다는 점이다. 그전에 재학하던 이스탄불의 학교에서 계속해서 정학을 당하지 않았던가. 뭐랄까 목표 없는 십대 청소년의 전형적 일탈이라고 해야 할까. 관심도 없는 수학 대신 연극 공부를 하고 싶어하지만, 이러저러한 사회적 제약과 두 가지 공부를 병행하는 건 어쩌면 예정된 실패의 예고가 아니었을까.

 

대학에서 고군분투하는 오즈게 사만즈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젊은 시절 경험 부족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모습이 보였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막상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해서는 젊은이에게 어쩔 수 없는 혼란과 방황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는 말일까. 내가 오즈게였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보니 평소에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지만, 일과 후에는 책쟁이로 변신해서 책을 탐하고 읽은 책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그런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삶의 균형 맞추기란 너무 어려운 미션이지 싶다.

 

사실 <당당하게 실망시키기>를 다 읽고 나서 오즈게 사만즈의 그후가 궁금해졌다.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했던 십대 소녀는 결국 모국을 떠나 타국에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된 게 아닐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국 그리고 반대로 자신의 꿈을 성취시켜 주는데 성공한 타국의 거리는 오즈게가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면서 어린 시절 즐겨 보던 그리스에서 송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만큼이나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정신없는 가운데 리뷰를 적다 보니 고갱이가 다 휘발해 버린 느낌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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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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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도서관 방문은 이제 일상의 패턴이 되었다. 빌린 책을 반납하고 또 빌릴 책들을 둘러 본다. 참 지난 주말에는 아예 도서관 행사 때문에 주차가 안된다고 해서 멀리 차를 대고 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뭐 그 정도 쯤이야.

 

W.E. 보우먼의 <럼두들 등반기>를 우연히 서가에서 만났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재밌게 읽었더랬지. 이번에도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다. 골치가 아파서 말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을 만한 책을 나는 원한 모양이다. 그러기에 <럼두들 등반기>는 제격이었다. 1956년에 나온 책이라고 하니 67년의 시간여행을 한 셈이다.

 

6명의 영국 사내들이 12,000미터 그러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가상의 산 럼두들에 등반하는 과정을 그린 산악 코믹소설이다. 등반대장은 바인더라는 별명을 가진 이로 나레이터 역할에 충실하다.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데, 전혀 전문가적인 소양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점부터 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신나는 예고탄을 쏘아 올린다. 전문 길라잡이라는 정글은 출발지인 영국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럼두들 등반대와 홀로 떨어져서 이동한다. 아니 국내에서 이 모양인데, 아무도 오르지 않은 전인미답의 럼두들에서 그의 실력을 믿어도 되는 걸까?

 

절벽타기의 명수라는 벌리는 캠프에서부터 나가 자빠진다. 의사 선생인 프로운도 비실대기는 마찬가지다. 과학자 위시도 다른 멤버와 다를 바가 없으며, 영상전문가 셧은 기껏 찍은 필름들을 햇빛에 노출시켜 영상들을 못쓰게 만드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엉터리 등반대를 데리고 럼두들 등반에 나선 바인더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실 이런 엉터리 선수들이 구성되어야 산악 코믹소설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자못 진지하면서도 근엄한 말투로 등반대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바인더야말로 개인적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은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참 럼두들이 위치한 요기스탄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발탁된 통역사 콘스턴트를 빼놓을 뻔 했다. 의사소통은커녕 현지인들을 빡치게 만드는데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언급하고 싶다.

 

럼두들로 출발하기 전부터 럼두들 일행은 난관에 부딪힌다. 막대한 장비와 보급품들을 현지로 나르기 위해 포터들이 필요한데, 실수로 그만 3천명(이 숫자도 어마어마하지 않은가!)이 아닌 자그마치 삼만명이나 되는 이들이 집결한 것이다.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럼두들에 오르는 동안, 그들이 겪게 되는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등반대원들이 차례로 크레바스에 빠지게 되고, 한 명씩 차례로 동료들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느닷없이 샴페인 파티가 벌어진다. 그들은 결국 포터의 등에 얹혀 캠프로 이동하게 된다. 리더인 바인더는 이 모든 탓을 고소 피로증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동시에 대원들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그들의 사생활의 영역에 침투해서 무언가 팀원으로서의 단결력을 다지려는 무의미한 시도를 거듭한다.

 

대원들을 자극해서 한시라도 빨리 정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시무시한 요리 실력을 지닌 요기스탄 사람 요리사 퐁이었다. 아무도 그가 만드는 요리를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복통과 더불어 소화불량을 유발하는 그 때문에 모든 대원들을 정상을 향해 질주한다. 퐁을 상대하는 것도 결국 리더 바인더의 몫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화로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은 정말 요절복통의 끝판왕이었다.

 

럼두들에 오르겠다는 투지에 불타는 서구인들에 비해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가진 요기스탄 출신 포터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럼두들 등반대는 럼두들 등정에 실패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산이 아닌개벼는 애교에 가깝다. 사실 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싶었다. 참 서문을 맡은 빌 브라이슨과 김훈 역자의 도움으로 수시로 등장하는 숫자 153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저자 보우먼은 요기스탄 출신 포터들의 활약을 다루면서,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이들이 왜 자신들의 짐을 타인에게 맡기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에 이런 비판적인 시선을 당당하게 표현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쩌면 그들의 치부를 정확하게 타격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 반향을 보이지 않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15년 전에 읽을 적에는 마냥 재밌게만 읽었었는데, 지금 다시 읽게 되니 저자의 다른 의도에도 관심이 갔다. 원래 해학과 풍자라는 게 이런 비꼼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2023년의 <럼두들 등반기>는 재미와 동시에 다른 생각할 거리들을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물론 재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고.

 

[뱀다리] 국내에는 마운틴북스와 은행나무에서 두 번 출간되었다가 모두 절판됐다. 역자가 같은 분이라는 점이 재밌다. 번역이 좀 바뀌었을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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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5-29 0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는 책을 읽고 싶어요. 요즘 책이 왜 이리 안 읽히는지-_- 이 책은 예전에 분명 산 것 같은데(분명 읽진 않았지만-_-) 보이지 않네요. 품절..ㅠㅠ;;

레삭매냐 2023-05-29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독서 슬럼프인지
도통 책을 완독하기가 쉽지
가 않네요. 시작한 책들은
많은데 -

일단 책부터 고만 사야지
싶습니다.

15년 전에는 사서 읽고 이
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답니다.

새파랑 2023-05-29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5 년전에도 읽은 책이라니 대단하십니다. 그때도 좋고 지금도 좋군요~!!
15년전에 구매하신 책은 과연 어디있을까요? ㅋ

레삭매냐 2023-05-29 16:50   좋아요 1 | URL
아마 그 책은 실종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 때와는 다른 결이라고나
할까요.

서니데이 2023-06-01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도 이 책 전에 소개 읽은 것 같아요.
샀는데 읽지 않고 책장에 있는건 아닌지 찾아봐야겠어요.
레삭매냐님, 오늘부터 6월입니다.
즐거움 가득한 한 달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6-13 21:09   좋아요 1 | URL
답글이 아주~ 많이 늦었네요.

6월이 절반 정도 지나가 버렸
네요. 올해도 반절 정도 지나
간 셈인지요.

감사합니다.
 
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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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이번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알라딘 범계점을 방문했다. 이건 뭐 도장깨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참고로 괜찮은 책들을 사냥했던 안산과 북수원점은 문을 닫았다. 이젠 추억이 되었다.

 

딱 일주일 전에 데려온 녀석이 바로 캐런 헤스의 <황야를 벗어나서>였다. 원래 이 책을 사러 출동했지만, 실물을 보고 나서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라, 운문체 소설이야?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지만 우리 책쟁이들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지. 고민 끝에 결국 데려왔고, 오늘 아침에 다 읽었을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심경이 복잡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고민이 많았던 꼬맹이 빌리 조 켈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힐링이 되었달까. 1952년에 태어난 작가 캐런 헤스는 마치 대공황과 황사로 뒤덮인 1930년대 미국 팬핸들 지역을 살아보기라도 한 듯한 묘사로 독자의 염통을 사로잡는다.

 

이제부터 어쩔 수 없는 스포가 다수 출현하니, 원하지 않는 분들께서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농부다. 켈비 가족이 사는 땅인 팬핸들은 황사와 가뭄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가난으로 찌든 그런 동네다. 마치 한국에서 벼농사를 포기하지 못하듯 베이어드 역시 밀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작물의 다양화 타령을 해대지만, 현지의 농부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팬핸들 주민을 위협하는 황사는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갑자기 들이닥친 황사에 질식사하는 장면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을 포기하지 못한다. 땅과 얽힌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에게 피아노 연주를 배운 빌리 조는 피아노 연주의 꿈을 꾼다. 노래 잘하는 또래친구 매드 도그에게는 호감을 갖기도 한다. 선생님의 응원에 힘입어 빌리 조의 피아노 실력은 나날이 향상된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임신한 어머니와 남동생이 프랭클린이 죽는다. 밀농사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마당에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빌리 조는 손에 입은 화상으로 그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마저 할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소녀에게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고통과 시련은 상상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캐런 헤스가 설정한 이야기틀은 어쩌면 성장소설이라는 방식일 지도 모르겠다.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연못을 파겠다고 나선다. 그가 파는 연못은 사랑하는 아내와 빛도 보지 못하고 져버린 자식을 따라가겠다는 그런 상징처럼도 읽힌다. 매도 도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응원할 수 없는 빌리 조의 모습에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물론 저자의 설정이겠지만, 그렇다면 캐런 헤스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졸업식에 초청받아 피아노 연주에 나서지만, 빌리 조는 연주를 하지 못하고 졸업식장을 떠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저미게 받아들인 장면이었다. 너무 슬펐다. 꼬맹이 빌리 조가 받아들이기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았을까.

 

결국 빌리 조는 지긋지긋한 팬핸들과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전에 등장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서부로 간 이들처럼 빌리 조 역시 서부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조금은 진부하지만, 그 기차에서 만난 어느 아저씨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팬핸들에 내린 비가 힐링의 상징이 되는 것처럼, 새엄마 예비후보 루이즈가 등장하면서 우리 꼬맹이 빌리 조에게도 희망이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땅인 오클라호마 팬핸들 지역에 사는 이들이 한 세기 전에 겪은 가난과 시련 그리고 희망에 대한 메시지다. 그들에게 황사는 고난과 시련을 그리고 한줄기 비는 희망과 꿈을 상징한다. 아무도 고난과 시련을 원하지 않지만, 우리 삶에서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참사로 규정한 프릴랜드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대전 후, 잠시 동안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경제 번영과 호황의 추억은 과잉공급과 생산을 초래했고 그렇게 부풀려진 풍선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져 버렸다. 대형 참사는 어느 순간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그전부터 숱한 징조/시그널을 보낸다는 저자의 말이 예언처럼 다가왔다.

 

어떤 작가의 좋은 작품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캐런 헤스의 다른 작품들이 만나고 싶어졌다.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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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5-3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 처음 드는 작가, 궁금한 작가와 소설은 자꾸 늘어납니다. ㅎ

레삭매냐 2023-05-30 11:20   좋아요 0 | URL
그게 바로 이곳
북플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극하는 선순환
의 모델이라고 생각하
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