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은 어떤 무협지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상행위라고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대맥'이라는, 용대운의 '비도탈명'과 그 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품들을 상당한 부분 표절한, 그러나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상행위라.  요즘의 연구에 의하며 간혹 원숭이나 다른 포유류과의 동물들 중 물물교환 비슷한 것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도 일정부분 교환이라는 형태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의미의 상행위는 인간류만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오늘, 늦잠을 잔 덕분에 급하게 출근해서 예정된 스케줄과 분량에 맞춘 일을 겨우 마치고, 점심 운동 후, Jack in the Box에서 오더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럼 가장 오래된 상행위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각을 trigger한 것은 최근에 본, 잊을만하면 나오는 종교인의 성폭력 혐의에 대한 뉴스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fly JANG, 조두순, 유수대형교회 마몬사제들, 이런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가장 오래된 상행위는 결국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대의 종교시설을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1) 공인된 매매춘, (2) 현물거래, (3) 제사, (4) 점성술, 그리고 (5) 이런 서비스의 댓가로 신에게 바쳐지는 십일조 같은 것으로 연명하는 신관계급 등이 그것들이다.  매매춘의 경우 다산과 다복, 그리고 풍작을 기원하는 형태로써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규모도 상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제사와 점성술, 그리고 치성에 동반되는 예물의 현물거래를 위한 환전소가 따로 있었음은 성서시대, 그리고 예수시대를 지나서, 지금까지도 사실상 이름과 형태를 바꾸어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그 목적과 범주가 물론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성당, 교회, 그리고 절집에서 늘 볼 수 있는 성물판매소, 헌금접수처, etc.를 떠올리면 대략 모양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를 대행하는 신관계급은 일종의 서비스업에 종사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의 신성한 의무를 위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상속에서 제외되거나, 또는 농사와 목축을 포함하여 일체의 사적인 영리활동을 금지하는 댓가로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의 일정부분에 그들의 지분이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면, 이 역시 교환의 한 형태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일련의 활동이 상행위였음은 현대종교의 feature를 보면 더욱 자명하다.  여기에 공인된 매매춘은 현대의 법적인 제재와 성서의 가르침을 도입하는 시점에서 근절되었다고 보이지만, 종교라는 시스템의 상위 카스트에 위치한 분들을 보면 꼭 그런건만도 아닌 듯 하다. 

 

그리고 그 상행위를 지탱하는 것은 브라만이 아닌, 우리들, 평신도들이다.  간통/추락사건을 격무/과로사로 바꾼 fly JANG사건, 9세 여아를 폭력강간하여 평생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의 상처를 입힌 조두순을 선처해달라던 그 교회신도들, 큰목사님들의 이런 저런 여성편력을 조직적으로 덮어주는 대형유사종교시설.  불교와 카톨릭은 뭐 다를까?  상대적으로 권력과 금력의 집중이 덜 한 편이고, 덜 알려지고, 덜 일어나는 경향이 있지만, 식구감싸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의 추악한 면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의 신성함과 이 경우 천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종교상행위를 가르는 것은 종이 한 장만큼이나 얇은 자정력인 듯 싶다. 

 

최근에 큰 이슈가 되고있는 인도의 그 사건의 목사를 떠올리며 분노보다는 부끄러움과 아픔이 느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Forgettable. 2013-08-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내장산 국립공원에 갔다가 상행위 금지를 성행위 금지로 잘못보고 혼자 깜. 짝. 놀랐었는데,, 또 그렇게 봤네요. 눈에 음란마귀라도 씐건가.. 뭐 관련 없는 댓글이긴 하지만 뭐라도 말하고싶어서요. ^^;

transient-guest 2013-08-28 08:35   좋아요 0 | URL
저도 글을 쓰는 내내 헛갈려했답니다.ㅎㅎㅎ
 
심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현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송'이라고 번역하기도 그렇고, '심판'이라고 보기도 그렇다.  영문으로는 Trial이라고 번역하면 - 독일어가 원문일테니까 - 딱 좋을 주인공의 passion을 보면, '소송'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주인공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소송'의 대상이 되어 온갖 잡스러운 인물을 거쳐, 종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소송'에 일체화하여 구속시키게 되지만, 역시 'trial'이라고 할 때, 느껴지는 원인모를 고통스러운 궤적이 '소송'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심판'은 더더욱 부적절하다.  어떤 작가는 '소송'보다는 '심판'이 더 어울린다고 했지만, 주인공의 고통스럽고, 쓸모없는 시도들을 보면 '심판'은 영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이라는 번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 찾아와서, 주인공이 '소송'의 대상이 되었고, 재판을 거쳐 구형될 것이라고 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지점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주인공은 당시로 보면 전형적인 화이트 칼라인데, 원인을 전혀 알 수 없는 구속에 휘말리면서 그의 일상은 이 '사건'에 주도되어 버리고, 매사, 이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하루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더우기 매우 mysterious하게도,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이 시점부터는, 직간접적으로 그의 사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 삶과 죽음을 투영하는 해석도 있고, 사회정치적인 분석도 있는데, 어느 하나도 정확하지는 않다.  굳이 철학적인 고찰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형태를 바꿔 존재해온 국가권력의 구속을 투영하면 이 책은 사회풍자가 된다.  삶과 죽음을 테마로 잡고 이 책을 보면, 이 또한 투영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진정한 위대함은 timelessness가 아닐까?

 

아무튼간데, 카프카는 난해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조지 오웰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표적인 그 시대의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실제로 노동을 하고, 노동자들과 생활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왕당파의 반대편에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런 참여를 통해 얻어진 경험과 지식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세계에 반영된 철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나 같이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조망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함.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잡기 위해 기껏 내가 해보는 것은 파스타 요리와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 정도가 되겠다.  그러니 조지 오웰은 특히 요즘처럼 사이비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번 정도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멋진 풍운아같다.

 

과연 사람은 돈이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푸성귀를 뜯어 먹는 것이 아닌, 도시에서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방세를 겨우 내면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는 여관에서 돈이 떨어지면, 그리고 더 이상 전당잡힐 물건도 다 떨어지면, 그야말로 굶는 것이 답이 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과 욕구도 그러니까,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배고프면, 힘이 빠지다 못해, 뇌가 흐물흐물해지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다는데, 요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불의에 저항하고 대항하려해도, 실제로는 허상에 가까운 스펙쌓기와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면서 정신을 굶기는 우리들 말이다. 

 

굶다 못해, 이상한 직장이라도 일단 받아들이고, 일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직업은, 그나마 연줄을 통해서, 호텔식당의 접시닦이가 되겠다.  12-14시간을 꼬박 일하고,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역시 허상뿐인 고급식당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준비된 음식을 거리낌없이 사먹는 상류층.  요즘이야 이런 정도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시절의 파리는 참으로 더러웠다.  갑을관계는 여기서도 존재하는데, 이 구조의 가장 하층부에 존재하는 접시닦이생활을 끝내고 런던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름아닌 빈민구제소.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일자리가 없어지고, 무일푼으로 런던을 살아갈 수가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이 얼마나 조지 오웰의 실제 낭만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경험한 것이 더하면 더했지 이 작품에서 서술된 모습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듯.  보통 조지 오웰하면 '동물 농장'이나 '1984'를 떠올리겠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나 '위건 부두로 가는 길'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훌륭한 르뽀 작가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조금씩 읽으려고 사둔 2차대전 중에 그가 쓴 신문/라디오 사설 모음도 상당히 훌륭한 사료가 된다. 

 

참고로, 영어로 읽을 때에는 조지 오웰보다는 조올지 올웰에 가깝게 읽는 것이 맞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왕국 일본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 만화규장각지식총서 3
이현석 지음 / 부천만화정보센터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누가 뭐라고 해도, 일본은 만화와 게임 및 이들의 파생산업의 왕국이다.  일본의 애니매이션과 게임, 또는 피규어나 장난감과 함께, 가히 일본의 만화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국에도 만화가 있고, 미국의 경우도 상당히 유서가 깊고 작품성도 뛰어난 초인만화가 있지만, 만화라면 뭐니뭐니해도 일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쪽의 다른 면이 존재하는 법인데, 저자는 특히 일본만화의 이 다른 한 쪽을, 업계의 전반적인 정보와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멀티밀리언셀러들이 물론 다수 존재하고 그들의 부와 명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손익분기점의 안팎에서 지분율을 높이고 수입을 올리기 위해 피가 튀는 고생을 하기도 한다.  솔직히 만화가라고 하면, 더구나 상당히 그 시스템이 전문화된 일본이라면, 좀더 편안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면서, 적절한 수입을 올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전문화 때문에 더욱 쉽지 않은 수익모델이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스토리 작가와 작화가의 수입배분, 거기에 출판사의 몫, 그리고 작화가가 스스로 부담하는 잔업작화가 비용을 빼면, 실제로는 평균적인 월급쟁이의 연봉만큼의 수입을 올리기에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본의 만화산업은 우리가 유추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도 여전히 비주류의 문화라는 점인데, 그 거대한 마켓과 세계적인 인지도를 생각할 때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장르소설분야가 받는 문학계의 냉대와 차별을 떠올리면 조금 공감이 가겠지만, 그래도 이런 큰 산업을 '점잖은' 사람의 affair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인식이라는 점은 역시 놀랍기만 하다. 

 

따라서, 저자는 말한다.  일본의 만화업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또한 유학을 통해 막연하게 일본에서 몇 년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망상 역시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매사에 현실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내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지겹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은 구성이지만, 그래도 한번 정도 읽어 볼 만하다.  참고서로도 유용한 것 같다.  별 것 아닌 지식이나마 이렇게 또 조금 늘어나는 것 역시 이 책이 준 선물이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디오를 보는 남자'라는 영화가 있다.  같은 이름의 원작은 임영태라는 작가가 썼고, 1995년 무렵에 출판되었다가 현재는 헌책방에서도 찾기 어려운, 절판된지 한참이 지난 것 같다.  그간 몇 주 갑자기 바쁘게 지내다가 간만에 조금은 한가한 오후가 되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조차도 나온지 십 년은 더 넘은지라, 주연으로 나온 배우의 얼굴이 지금보다는 더 젊다. 

 

주인공, 장현성은 40대의 이혼남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돌연 회사에 취직해서, 승진을 하고 안정이 되어갈 무렵, 퇴사하고 비디오 가게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책의 그것이 같을지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영화는 잔잔하게 그가 보내는 비디오 가게를 중심으로 챗바퀴 같아 보이는 일상을 보여준다.  일견 지겹게 느껴지거나, 잉여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들이 나에게는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데, 무엇인가 큰 짐을 내려놓은듯한, 마치 니어링 부부나, 쏘로우의 하루를 보는듯한 기분이 나기 때문이다. 

 

부유하기는 커녕, 예나지금이나 비디오 가게로 큰 돈을 벌기보다는 소상인스럽게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정도의 삶이지만, 크게 무엇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장현성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존재를 유지시킨다.  그런 그의 일상에 로맨스 비스무리한 것이 매우 이상한 경로로 찾아오고, 그 경로를 역추적하는 것이 중후반부 스토리의 큰 부분을 이룬다.  그런데, 난 사실 이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주인공과 단골손님들이 보여주는 그 시절 소시민들의 일상에 애틋한 그리움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의 내 삶과, 장현성의 삶이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이혼을 하지 않았고, 사시를 포기하지도 않았으며, 삶의 궤적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장현성의 그것처럼 나 또한 상당히 제한적인 human interaction을 경험하면서 내 시간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의 업무의 상당부분은 머리의 스위치를 끄고서도 진행할 수 있다면, 나의 업무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업무진척과 관련이슈에 따라 오히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을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비디오 가게를 보면 예전에 한국에 살 적에 다니던 동네의 작은 비디오 가게가 떠오른다.  주인 아저씨는 항상 카운터 책상 앞에 앉아있고, 손님은 그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비디오를 고르던 90년대, 황금기의 그 모습.  미국에 와서는 Blockbuster라는 전국구 체인망을 가진 대형 비디오가게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지만, 90년대에는 그래도 비디오 가게를 가는 것은 주말에서 가능하던 큰 treat이었음은 분명하다.  금요일 저녁, 그렇게 고이 빌려온 비디오 테입으로 영화를 보다가, 못내 여러 번 보고 싶은 영화는 용돈을 모아서 하나씩 사 모으거나, 카피를 뜨던 기억이 난다.  책이나 영화나 귀하던 시절에는 하나를 가지고 참 여러 번을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기억하는, 미국에 온 첫 해에 생일선물로 받은 이소룡 영화 4부작 - 당산대형, 맹룡과강, 정무문, 그리고 사망유희 - 그 이듬해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터미네이터 1-2 합본.  그래서인지 DVD와 BR DVD를 넘어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다운으로 rent를 하여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때 모은 비디오 테잎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비디오는 커녕 DVD로도 무엇을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턴테이블을 돌려 LP를 듣는 것처럼, 투박하고 둔탁한 VCR을 켜고, 찰칵 소리가 나도록 깊숙히 비디오 테잎을 밀어넣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않나 싶다.  요컨데,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의 내 모습, 그 시절의 그 기분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사무실에 자꾸 장난감을 채워놓으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전 그 물건들, 이제는 버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그때의 그 물건들이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은 나만의 공간인 내 사무실 밖에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가면 그렇게 오래된 브라운관 TV와 함께, VCR과 테잎들을 한켠에 가져다 놓아야 할 것 같다. 

 

빠른 인터넷을 이용하여 streamline하여 영화를 보는 것은 참으로 편한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MP3로 수백개의 곡을 한꺼번에 저장하여 듣는 것 역시 예전의 방식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리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예전에 느꼈던 설레임이라는, 작지만 가장 중요한 감정의 요소가 빠져있다.  무엇인가를 꺼내어 다른 기계에 넣고 틀어주는 그 간단한 형식이 주는 잠깐의 기다림, 그 기다림이 주는 곧 나올 무엇인가에 대한 설레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게 그저 심드렁할때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역시 아날로그가 정신건강에는 훨씬 더 좋다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불변의 진리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같다.  하다못해 귀가 예민한 분들은 디지털로 음악을 들으면 현기증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도시보다는, 덜 소비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조금은 slow한 근교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푸성귀 정도는 뜯어 먹을 수 있게 뒷뜰을 가꾸면서 말이다.  그런 삶이 오기는 올 것이다.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놀 2013-08-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꿈꾸면서 아름다운 나날 누리는 그날 맞이하시기를 빌어요~

transient-guest 2013-08-17 01: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8-1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비디오가 최첨단을 상징하던 때가 있었죠.언젠가는 지금의 MP3라든가 다운로드로 영화보는 것도 아날로그식 추억이라고 회고할 때가 올 거예요.

transient-guest 2013-08-17 01:46   좋아요 0 | URL
디지털식 추억이라고 회고할지도 모르겠어요.ㅎㅎ 완전히 다른, 지금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다른 기술이 나온다면 말이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