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망했다. 미루고 또 미뤄진 페이퍼. 여기에 모인 책을 제외하고도 책은 계속 읽고 있으니까. 내용과 느낌이 기억나는 대로 적어내기로 했다. 사실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둔 ritual같은 거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난 이걸 모아서 책으로 낼만큼 절절하고 깊은 문장의 맛을 주지 못하니까. 결국은 페이퍼나 리뷰나 오롯이 나를 위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남은 7월과 8월 한달이 간만에 나에게 주어진 조용한 시간이다.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열심히 읽고, 글도 열심히 쓰고, 카페도 열심히 나가고, 커피도 즐기고, 술은 아주 자제하고 - 일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줄여놓은 사이즈, 내다버린 옷들, 다시 돈주고 사들여야 할 수 도 있기에 - 멋진 시간을 보낼 것이다. 비록 첫 이틀은 좀 망쳤지만. 수요일. 해가 지기 전 - 오후 6:47인데, 해가 지려면 한 시간 이상 남았다 -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즐기며 차가운 아이스 커피와 딱 한 시간 남은 notebook의 밧데리, 그리고 책 한 권이 준비물의 전부다. PC는 충전기를 집에 두고 왔지만, 커피는 한번에 50센트면 계속 리필이 가능하다.
읽고 난 후에 알았지만, 처음부터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바로 파악할 수 없었던 트릭을 배치한 교활한 작가. 철망인지, 철창인지를 barrier로 두고, 마주본 부부의 대화까지도 트릭의 일부였다니. 물론 트릭을 알고 나면 대화만 봐도 바로 감이 오지만, 트릭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지극히 상식적으로 들리는 대화.
그런데 정작 사건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사건을 꼬아버린 덕분에 그야말로 트릭에 트릭을 배치하는 방법이 결론을 식상하게 보게 했다. 어디선가 비슷한 전개를 본 적이 분명히 있으니 새롭지도 않았던 결말이었다. 그저 추리활극으로 즐긴 정도.
그나저나 술집여자를 데려다가 결혼할 수 있는 멘탈이 더 대단할 듯.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웃음과 몸을 파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를 떠나서 그 거래에서 나타나는 seller의 사고방식을 전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직후 혼란속에서, 이런 저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그 시기의 행위와 현대의 행위와는 다르다고 본다. 내가 정말 어려웠을 때, 옷가게에서 시간당 7불인가 받고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대졸출신의 먹물조폭이 될 수는 없었던 것처럼, 돈이 없어서, 가정형편 때문에 모든 인물고운 처자들이 다 술집에 나가서 앉아있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일반론이기는 하지만, 돈,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허영을 채우기 위해서, 또는 좀더 빨리 목표지점까지 가기 위해서 integrity를 파는 행위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자들의 관점에서는 또 다르게 해석될 소지도 있겠지만. 결국 주인공이 호스테스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비극 - 직접적인 원인은 돈이었고, 가족은 이 여자를 이용하려 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남편의 배반은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일테니까 - 이란 건 과정과 결론을 떠나서 변하지 않는 현실이 아닌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이제 아주 쬐끔은 조심스럽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저자와 책을 읽는 행위, 그리고 이야기를 남기는 서재활동을 통해서 교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도 어떤 이야기도 대화가 아닌 글로 쓰이는 경우 매우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지난 번의 책과는 달리 이번의 책은 나와 겹치는 접점이 너무 없었다. 읽으면서 헤아려보니 내가 아는 책과 읽은 책을 합쳐 두 권 정도만 나오더라. 늘 책에 몰입해서 자신의 이야기로 잘 녹여내는 다락방님의 책이지만, 너무 아는 것이 없으니 공감하는 건 쉽지 않았다는 뜻. 더 안좋은 건 아직은 이라는 단서가 비록 붙겠지만, 여기서 말한 책들 중 관심이 가는 책도 적었다는 것도 조금은 책을 온전히 읽어내는데 방해가 된 것 같다. 많이 기다리던 책인데 아쉽기 그지 없었다는. 어쩌면 저자의 글과 이야기에 익숙해진 탓도 있을까? 첫 책을 읽을 땐 잘 몰랐으니까, 미지와의 조우처럼 완전히 빈 스케치북에 내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렸더라면, 이번엔 이런 저런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이미 여기저기 그려져있는 종이위에 내 그림을 그려야했으니까. 책을 읽는 것도 때로는 쓰는 행위만큼이나 고민 가득할 때가 있나보다.
버블붕괴를 전후로 하필이면 그때가 또 세기말이었던 일본. 클라이맥스가 되었던 고베대지진과 옴진리교의 사린가스살포사건. 90년대 말 일본이란 총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인듯, 종종 20세기소년이나 1Q84의 기시감을 주는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솔직히 작가의 이름값에 비해서 그저 그랬다. 그래도 유명한 작품이 많은데 작가의 책을 더 구해서 봐야하나 고민 중이다.
SF가이드 총서의 첫 번째. 우연한 기회에 서브컬쳐를 다루는 내 동년배의 블로그를 알게 되어 가끔씩 기웃거리다가 알게된 책이다. 비록 팬시한 제본은 아니지만, SF와 판타지의 팬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저자와 시리즈다. 무엇보다 reference로써의 역할도 훌륭한 것이 다양하게 분류되는 SF와 판타지를 다루면서 유명한 책이 많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구한 렌즈맨 시리즈나 종다리호의 모험 시리즈는 순전히 이 책을 읽은 덕분이다. 여담이지만, 이 두 시리즈는 원본을 구할 수는 없었고 정식출판보다는 주문에 맞춰 제본해서 보내주는 수준의 책을 구했는데, 알았더라면 주문하지 않았을만큼 그저그런 디자인의 책이다. 아마도 나온지 오래되어 copyright이 다 expire해서 그렇게 장사가 되는 것 같다. 모든 스페이스 오페라는 SF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SF가 스페이스 오페라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즉 SF 안에서도 하위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정의를 고찰하면서 주요작품들을 다뤄주고 있다. 내용은 아무래도 survey스타일이라서 세부적으로 외운 건 없다. 종종 들여다보면서 예전에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들을 원본으로 찾아볼 것이다.

같은 총서의 두 번째. 좀더 세부화된 장르적인 접근에서, 멸절이나 대파국 같은 큰 재난을 주된 테제로 잡은 SF소설을 다뤘다. 아무래도 이런 테마는, 비록 그전에도 꾸준히 있어왔지만,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냉전시대의 핵경쟁이 시작되면서 활짝 핀 것으로 해석된다. 나만해도 기억하기로는 대략 80년대까지는 핵전쟁을 걱정했던 것 같다. 아이들도 아주 자연스럽게 핵폭발, 핵겨울, 소련의 핵무기, 미국의 대응전략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 지금이야 오히려 이게 상호억제라는 희한한 개념 때문에 전면적인 핵전쟁보다는 소형핵무기를 이용한 소규모 테러가 더 걱정인 세상이지만. 이런 멸절 이후 인류는 (1)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거나, (2) 외계인이 짠 하고 나타나서 모두를 구해서 노예(!)로 삼거나, (3)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4) 혼란을 딛고 재건에 몰두하거나 하는 건 좀 평이한 이야기같고, '나는 전설이다'처럼 보다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세부적인 하위장르만 해도 매우 다양한 작품군이 있어 SF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요즘의 트렌드는 A.I.나 좀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봤다.
책에 나이가 중요하진 않겠지만, 라이트노벨을 읽을 땐 늘 주위를 살피게 된다. 나도 모르게, 이미 이런 그림체의 표지는 주변의 눈치를 보는 나이가 된 것 같아 조금은 서글프다. 차라리 더 어릴 때 이렇게 귀여운 표지의 책을 많이 읽어두었을 것을.
잊고 싶은 기억을 먹어치워서 지워주는 기억술사는 urban legend로 취급된다. 하지만 실체에 가까이 가다보면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닿을 듯 말듯 가물가물하게, 그렇게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기억을 없앤 당사자는 정작 큰 문제가 없지만, 그 당사자의 사라진 기억과 함께 사라진 타인들과의 추억은 일종의 부수적인 피해. 책을 읽는 내내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던져보기는 하지만, 어디로도 기울 수 없을만큼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비블리아 고서당은 왜 더 이상 번역되어 나오지 않고 있을까? 일본엔 작년에 신작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일단 어느 시리즈를 들여온다면 끝까지 출판할 각오를 갖고 사업에 임하는 회사는 없나?
마음을 가다듬고 각오를 다진 끝에 미루고 미루던 정리를 일단 한 건 했다. 오늘은 서점에 좀더 머무르면서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부지런히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련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지 싶은데 일단 어제와 오늘까지는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