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 대량학살된 팔레스타인들을 위하여, 다른만화시리즈 02 다른만화 시리즈 2
데이비드 폴론스키, 아리 폴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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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괴롭거나 부끄러운 일이라서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 참여해서 아주 일부의 기억만을 잃어버린 아리 폴먼처럼 말이다. 그럼으로써 아리는 자신의 행동이 아주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잊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그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아리는 기억을 잃는 게 아니라 죄책감에 시달렸겠지. 

아리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전쟁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알게 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 마을의 주민이 무참히 학살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거기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특히 난민촌으로 돌아가는 노인이 절규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아니, 막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을 위해 조명탄을 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그래서 아리는 그때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잊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책으로 펴낸 것이라 중간중간 장면이 급격히 바뀌어서 몇 번을 읽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배경이 된 사건이 1982년이라니 불과 20년도 안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알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서 샤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몰랐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샤론이 그 사건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임시켰고 다시는 국방장관이 되지 못하도록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오히려 더 힘이 있는 총리가 되었으니 이스라엘 국민의 속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뭐,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통령으로 선택한 우리도 오십 보 백 보일 테지만.) 그들이 자기네는 평화를 존중한다고 해도 과연 그 말이 진실인지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긴 지금도 전쟁을 일으키고 팔레스타인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는 걸 보면 그런 말을 할 사람들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나마 작은 희망을 갖는 것은 이와 같은 자기고발적인 영화를 만들고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뽀죡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사태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그 일의 발단이 그다지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문득 결자해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결자의 힘이 약하니, 원. 만약 팔레스타인이 힘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나올 수 있었을까. 미국이라는 거대한 힘을 등에 업고 지금까지 취했던 행동들은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동안 학대받았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 다른 민족을 똑같이 응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대민족의 생활방식과 교육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난 그것마저도 괜히 거부감이 든다. 그들이 그렇게 교육시키고 철저하게 생활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들끼리만 잘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배타적인 것은 분명 옳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남을 인정할 줄 아는 관용이 통하는 세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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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작은 미술관
나카가와 모토코 지음, 신명호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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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모임을 통해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을 찾는다며 회원들이 나를 추천했었다. 그래서 결국 인터뷰를 했던 것이고. 그쪽에서 이야기하길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어른이 더 좋아하게 된 사례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어쩜 딱 내 얘기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 내가 처음부터 그림책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도서관을 드나들며 연령에 맞는 책이 그림책인지라 많이 보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더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은 지금도 그림책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대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림책을 구입하지 않는다는데 난 아직도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고 만다. 그러면서 때로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감탄하며 보고 또 보곤 한다. 또 좋은 그림책을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여간해서는 그림책을 집어들지 않는다. 그림책이라고 꼭 유아들만 보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간혹 어떤 출판사에서는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그림책을 펴내지만 선입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부모들도 그림책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안겨주지 않는 이유도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만약 이 책을 본다면 그런 생각을 조금은 바꾸지 않을까. 

그림책 이론서가 꽤 있지만 이 책은 그동안 보아왔던 책과는 약간 다르다. 특히 꼭 들어가는, 그림책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의 작품들부터 일률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위주로 보되 주제도 함께 생각하며, 또한 최근의 작품들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인지 다른 책에서 당연히 보았던 책을 '또' 보게 되는 일은 없다.  

그림책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읽어야 한다. 또 줄글에서 행간을 읽듯이 그림과 그림 사이의 의미도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림책을 볼 때는 겉표지부터 마지막 뒤표지까지 한 장도 빼놓지 말고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속표지는 그냥 책을 만들 때 으레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림책에서는 예외다. 때로는 거기에 아주 큰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여기서는 피터 시스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들고 있다.  

또한 뒤표지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겉표지와 뒤표지를 쫙 펴서 보여준다. 간혹 그 두 면이 연결되어 어떤 암시를 주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저자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 경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마을>에서 뒤표지에 야모의 가족이 바할을 데리고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에서 전쟁을 피해 어딘가로 떠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나마 그 그림으로 안도했다고나 할까. 마지막 문장에 "그 해 겨울, 마을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암울한 메시지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아마도 도서전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시골을 생각하며 서서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반전이 주는 충격이 대단했다.)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단 한 문장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게다가 그림이 하나도 없는 바탕에 덜렁 글만 있었으니... 

여기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있어서 그 책들이 무척 궁금하다. 그 외에는 모두 본 책들이라 다시금 그림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보면 그림책의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 그것을 감상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림책 한 권을 세세하게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듯 직관을 이용해서 본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림책을 작은 미술관이라고 표현했나 보다. 

저자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공감되기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학부모들로부터 어린이에게 어떤 그림책을 보여주면 좋은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회피한다고 하듯이 책 내용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접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어차피 느낌이라는 것은 모두 다르고 심지어는 한 개인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법이니까. 이제 막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거나 그림책의 매력에 빠질 듯 말 듯한 사람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차이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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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독서 -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하루 15분 책읽기
김선욱 지음 / 북포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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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난감한 경우는 외출했을 때 시간이 남는데 책을 챙기지 못했을 경우다. 특히 시간이 남으리라 예상 못했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외출할 때면 무조건 책을 챙긴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싫어하다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는 혹시 문자중독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처럼 그렇게 시간을 쪼개가며 독서를 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그 정도는 아니리라 쉽게 장담할 수 있다. 

나야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책과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하니까 어린이책을 많이 보니 어쨌든 독서를 꾸준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남편은 직장을, 그것도 멀리 다니다 보니 독서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선뜻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읽어보고 재미있었던 책이나 본인이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읽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래도 꽤 보고 있다. 사실 남편은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느꼈기 때문에 일단은 흥미있는 분야의 책이라도 열심히 읽는 것일 게다. 그래서인지 깔끔한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집에 책이 많다 못해(주로 아이들 책이다.) 놓을 자리가 없어도 그냥 넘어간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책을 읽는 것을 독려하고 격려해준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의 저자에 비하면 새발의 피나 마찬가지다. 아침에 번잡한 출근길이 싫다며 일찍 나가는 것까지는 비슷하나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읽을 정도의 열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래도 독서를 꽤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독을 한다. 어린이 책이야 어차피 다양하게 읽어야 하니까, 그리고 활동과 관련된 것이니까 다양하게 읽지만 나를 위한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서점에 가도 사회과학 도서에서 서성이기 시작한 것이 아직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쪽에 대단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읽어서인가 보다. 저자의 말대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많이 읽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별로 흥미없어 하는 분야인 시와 자기계발서 쪽은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책이란 어떤 분야든 읽으면 모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읽고 나서는 아는데 집어들기까지가 쉽지 않다. 

대학 4학년 즈음부터 시사주간지를 보기 시작했다. 한때는 거기에 있는 모든 기사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도서관에 가서 주간지를 보곤 했다. 실제로 그래서 한동안은 기사를 전부 읽었다. 신문을 읽을 때도 되도록이면 거의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문을 그렇게 읽으려면 정말이지 하루 종일 신문만 봐야하는 상황이 된다. 또 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어떻고. 그런데 저자는 굳이 신문을 그렇게 열독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리드기사를 읽으며 꼭 봐야 할 것만 챙겨읽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얼마나 고마운 이야기였는지 모른다. 숙제를 꼭 해야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물론 지금은 신문을 거의 안 보지만 주간지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관심없는 기사라도 비중있게 다룬 것은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런데 마음이 이제 좀 가벼워졌다. 그래, 그 시간에 책을 읽으니 됐지, 뭐. 

그래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차원에서 읽었는데 웬걸, 의외로 다짐해야 할 것도 많고 고쳐야 할 것도 많다. 전에 <월든>을 읽으며 소로우는 어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을까 감탄하고 부러웠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누구라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상당히 읽는다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비록 소로우처럼은 아니더라도)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각각 따로 알고 있던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지식망을 형성할 테니 말이다. 혹자(밥 먹으며 저자의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우리 딸이 그런다.)는 어떻게 저자처럼 그렇게 잠도 줄여가며, 편안한 자리도 마다하고 지하철에서 서서 책을 읽느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책에 빠져보지 않았거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원래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은 힘들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법 아닌가. 물론 나도 저자처럼 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새해에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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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역마살 인생 김병택의 대화체 소설 1
김병택 지음 / 이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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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살아온 과정을 책으로 쓰자면 몇 권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아마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삶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너나없이 못 먹고 힘든 시절이지만 그래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모르고 지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힘들게 살았다는 저자. 그런데 단순히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기 보다 정해진 틀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제도권 교육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공부에 별 뜻이 없었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돈 벌겠다고 집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그런 생활이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신념과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끝까지 자식을 믿어줬기에 지금의 저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전혀 연고도 없는 곳으로 떠나기 좋아했던 저자였기에 나중에는 제주도에 가서 양을 키우는 일까지 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지는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을까 싶다. 역마살 인생이라는 말을 괜스레 붙인것은 아니라는데 절로 공감이 간다. 어디 그 뿐인가. 결국 외국으로 건너가서 거기서도 많은 일을 겪고 여러 차례 옮겨다녔다고 하니 확실히 역마살이 끼었다. 그래도 한국인이기에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책에서는 쉽게 어떤 일을 겪었고 무슨 일을 했었는지 비교적 간략하게 이야기하지만 실제 겪었을 당시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지나고 나면 힘든 기억도 추억이라는 이름에 희석되는 법이니까. 저자는 성공을 목표로 삶을 전부 희생하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가 되면 만족할 줄 알고 본인이 갖고 남는 것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아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예전에야 개천에서 용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은 일종의 요행을 바라는 것처럼 되었다. 예전이야 학교 다니면서 낭만이라는 것도 즐길 여유가 있었지만 무한경쟁만이 남아 있는 지금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러기에 저자가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며 이래도 성공하지 않느냐, 청소년기에 본인처럼 제대로 학교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의 이야기는 좀 걸린다. 그 당시는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 상황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견해는 차라리 언급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물론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리고 지난 해 봄부터 있었던 촛불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는데 요즘 현재 이곳의 모습을 본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씌어진 시기가 지금보다는 조금 앞선 때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미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외국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자녀교육에 관한 의견에는 동의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자가 자녀를 키울 당시(게다가 외국이지 않은가)와 지금의 상황이 너무 변했다는 것이 이상론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기본적인 자세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그게 옳다는 데 동의한다. 저자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오지랖도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는 그런 마음을 과연 나는 가질 수 있을까. 원래 사람은 가지면 가질 수록 더 욕심내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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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사람의 길을 말하다
한정주 지음 / 예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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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이 시작할 당시 그 회오리 안에 있었던 인물, 그러나 결코 어느 한 쪽에 깊이 가담하지 않았던 인물인 율곡. 정치적 입장이나 인맥으로 보자면 서인에 속했지만 당파적 입장보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인물이었기에 율곡이 세상을 뜨고 나서 당파 싸움이 심해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율곡에 대해 <자경문>을 기본으로 해서 그의 삶의 철학을 살펴보는 기회가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대개 알고 있는 이이의 업적이나 생활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특히 그가 평생의 철학으로 삼았다는 <자경문> 뿐만 아니라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그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펴본다.

'입지'를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 장인 '정의'장까지 총 7개의 장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정치란, 그리고 세상이란 결국 비슷한 틀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율곡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율곡이 하고자 하는 말들이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이 책을 기획하게 된 이유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일까. 이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고 저자가 훈계하는 듯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 이야기들이 때로는 마음에 콕 박히기도 하지만 가끔은 뻔한 이야기를 다시 듣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마치 별 마음에도 없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듯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집어들면서 기대했던 것(율곡에 대해 자세히 알고 동시에 그 시대의 역사적 지식도 넓히는 것)과 약간은 다른 방향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역사적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상당히 많이 나온다. 어떤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할테니까.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저자의 견해가 들어간 사실이 전부일 거라고 기대했던 것 뿐이다.

전제군주제든 대통령제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리더가 잘나서 모든 것을 혼자만 이끌어간다면 그것은 자칫 독재에 빠질 염려가 있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독선과 오만에 빠질 수가 있다. 차라리 진짜 잘나서 그런다면 그건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나지 않았는데 잘났다고 착각하는 리더라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능력있는 인재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도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자 덕목이다. 아니, 어쩌면 요즘처럼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야 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을런지.

어쨌든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만약 이이가 선조가 아닌 다른 임금을 만났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선조가 현명했는지는 모르나 리더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율곡이 그처럼 개혁을 부르짖으며 잘못을 일러줘도 계속 미루기만 하거나 당장 닥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까. 그리고 비록 율곡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처한 것을 보면 답답하기까지 하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말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이럴 때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면서 일종의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그러면서 그것을 현실에 대입해서 잘못을 투영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만약 그때 선조가 이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조금이라고 개혁을 했다면. 아니면 이이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다면... 저자는 이이의 삶을 통해 진정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했을 텐데 난 또 이렇게 '현실'에 투영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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