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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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다시피 이 시대에 '선언'은 사라졌다. '엥?'이라고 하겠지만, 내말인즉슨, '선언다운 선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앞서 나가려는 선언은 없다. 항상 '사후적인', 어떤 것에 대한 뒤늦은 예비책, 방어책들만이 가득하다. 아직 서른 살이 되지도 않은 두 젊은 청년이 이 세상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 선언문을 썼을 때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그러고 싶은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지적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은 여러 출판사의 버전으로 나왔지만, 강유원이 번역한 이 책은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어떤 아련함이 남아 있으면서도, 이 아련함이 위대한 선언문을 박제물로서 여기지 않도록 하려는 잔상이 남아있는 것 같아 권하고 싶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공산당선언 160주년 즈음이었는데, 역자인 강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60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유럽에 떠돌고 있는 유령이라 말했다. 2008년 오늘,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 160년 전에는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신성한 몰이사냥이 조직되었으나 2008년에는 무관심이라는 사태가 공산주의에게 벌어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세계의 많은 세력들에 의해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공산주의의 '견해', '목적', 그리고 '경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표명'할 의의가 있는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때이다. 121쪽. 

1848년 이후에 엥겔스가 계속해서 덧붙인 서문을 읽을 때는 이제는 곁에 없는 동료 맑스를 그리워하는 엥겔스의 감동스러운 문장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선언>의 공과를 지적하며, 그러한 공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강제적인 개입이 아닌, 역사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그 자리를 경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의지와 실천을 묻는 엥겔스의 겸허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나는 요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와 함께 본 책을 읽으면서, '국가 - 이데올로기 - 자본 - 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교환관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맑스의 놀라운 통찰력, 그리고 그 교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등한 주고받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탈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중세 시대 국가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특히 인간의 열정과 흥미를 감시하던 시기가 있었다. 돈을 매만지는 것이 나쁜 것으로 여겨지던 세상에, 점점 더 딜레마에 빠져가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향한 길을 통과하게 될 준비를 한다. 상업의 발흥과 함께 서로 간의 물질이 오고가고, 사람들의 물질성은 '이해관계'라는 단어와 결부된다. 즉, 이러한 이해관계를 통해 당시의 지식인들은 일정한 좋은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다의 갑론을박을 벌인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여기서 무한한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 인간이 자신을 향한 이해관계를 펼치는 행위가 오히려 공공적 가치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이러한 합리적 이기심이 마냥 좋은 미래만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맑스의 표현에 의하면, 생산관계, 생산양식, 생산력의 3항에 묶이면서, 이제 이 두 계급의 갈등이 시작된다. 국가사회학에서 맑스는 국가라는 것이 끊임없는 계급의 투쟁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맑스는 저 선사시대부터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당시까지를 존재의 역사, 물질의 역사로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관통하는 물질성이 가져다 준 풍경의 비극을 우리가 막지 않아야겠냐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통해 맑스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새로운 판을 짤 것을 촉구한다.  

나는 아직 많은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자신의 지적 골동품처럼 자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좌파'라고 당당히 소개하면서 이 책을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말하는 사람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지적 골동품'도, 자신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좌파 액세서리'도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써내려간 이 선언문의 당당함 만큼이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갖추고 있는 어떤 겸허함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앞에 나와 있는 초기 선언문 하나만을 읽고 다 읽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선언>이 나온 후, 이후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선언>의 서문을 다 읽은 후, 우리는 그 <선언>을 둘러싼 당대의 반응들을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어느 위대했던 젊은 두 청년의 야심이 묻어나는 삶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 고백의 중심에는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다. 지금 당신,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는가. <선언>은 여전히 책을 만지는 당신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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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과 여름을 뒤덮은 촛불 행렬 가운데 나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 사람들에게도 참석을 호소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신기한 사람'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광장은 뜨거웠지만, 연구실마저 뜨거워질 수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나의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청계광장을 향했다.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동료 연구자 한 명이라도 "같이 가!" 라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너무나 컸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비가 너무 내려서, '헛탕'을 치기도 했다. 문자가 왔다. 비가 와서 어떡하냐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광장에 간 나를 자신들의 저녁 식사 이야깃거리로 올린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토론 수업이 벌어지던 시간이었다. 당시 '촛불'이 활활 타오르던 그 때,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에는 '촛불'이야기가 나왔다. 토론이라는 것은 물론 '반대'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는 토론이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 속에는 남모를 서운함도 있기 마련이다. 다들 이렇게 어떤 의지를 분출하고 있는데, 그 의지를 '무섭다', '너무 진지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몰아가는 동료들의 표현에 따가운 '언침'을 놓고 싶었지만, 그 정도에서 참았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또 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수고'를 "어휴..난 그런 무리..그런 막 일제히 움직이는 거..나 원래 그런 것 싫어해서.."류의 표현 등으로 김을 새게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튀는 '사람들의 논리라든지, 표현 양식같은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사람을 '멋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비겁한 사람' 혹은 '예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유리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다원주의를 얄팍하게 포장한 상태를 드러낸 것 밖에는 안 된다. 어설픈 냉소주의라고 할까. 상대방이 뜨거운 논리로 나온다면, 자신 또한 뜨거운 논리로 맞부딪히는 것이 이야기 주고 받기의 '예의'가 아닐까.  

'촛불'당시를 상찬하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덕분인지, '촛불'의 달콤함은 어떤 미래를 낳았다기보다는, 2008년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촛불'은 우리에게 물론 긍정적 함의들을 주었지만, 연구자의 위치에서, 나는 그러한 긍정적 함의만을 주고 사라지는 지식인들, 학자들의 태도가 많이 아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상찬의 행위 속에는 '머리 좋은 구경꾼'의 위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생들이 모인 논문 발표회를 갔더니, 많은 대학원생들이 촛불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촛불'을 든 사람들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연구자들의 글은 없었다. 모두가 '현학'의 꼬리표만 달고, 이 현상을 어떤 고급스러운 이론으로 분석할 것인가에 골몰한 것 같았다. '촛불'은 좋은 연구 주제일지언정, 그 이상을 추동하는 기운은 대학원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많이 배우고, 많이 얻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로 '지성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학원이란 공간에 있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떤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연구 주제로서의 '촛불'이 광장의 진심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참 많은 이론들이 나왔고, 참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지만, 결국 이러한 이론과 견해들이 사그라진 촛불과 함께 잠들어버린 것에서 나는 오늘날 무력해진 지성인들의 기운을 짚어본다.   

혁명이 지식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혁명은 우리에게 진중한 의미를 던져주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역사적 상식' 이상으로 이야기해보려 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사그라들 2008년 말 당시, 누가 그랬다. "누가 요즘 '촛불' 을 이야기합니까?" 무엇인가를 바꾸어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마치 유행타는 교회 프로그램처럼 간주받는 세상 속에서 자기 검열의 기운은 개인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미안하게도 지금 한국의 대학원생들에게 이 세태를 진단하는 의견을 묻는다면, 당신은 '헛탕'을 칠 것이다. 대학원생들에게 학문은 '기능'이 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나의 냉소는 당분간 변하지 않을 듯하다. 모든 이론을 섭식하는 데는 참 능수능란하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사유해보려는 노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이것이 오늘날 대학사회의 현주소이자, 대학원의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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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군요! 촛불 든 거리와 다시 돌아온 일상의 터전은 많이 달랐죠. 몸이 먼저 느끼더군요.

얼그레이효과 2009-04-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먼저 느껴지더라는 말씀..깊이 새기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여학생과 연애 살림지식총서 151
김미지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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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릴린 멜롬의 <유방의 역사>라든지, 한스 페터 뒤르의 <에로틱한 가슴>과 같은 책을 읽을 때면, 늘 국가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중성은 정확히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여성은 국가의 이중성에 의해 역사적으로 많은 피해를 받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넓게 나아갈 필요도 없다.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우리가 휘황찬란하게 여기고 있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은폐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은 분명히 더 드러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남성 또한 그렇지만, 한국의 여성은 역사적으로 '동원'의 존재였으며, 그러한 존재를 뛰어 넘어, 여성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모색하려는 작업이 이 순간 강해지고 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책 제목에서 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이 책은 1920~30년대 한국 사회 내에서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을 국가가 당시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개괄한 책이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혹은 직접 드러날 정도로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인 것 같다. 그것이 이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면, 상당히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높은 학벌을 가진 남성 - 남편이 될 사람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여성이라는 구도가 있다고 친다면, 우리가 드라마에서 너무나 지겹도록 봤다시피, 여성은 '문제화'된다. 고집이 강할 것이다? 성격이 드셀 것이다? 등등등. 여성이 진정으로 그동안 갈고 닦았던 '능력'은 일순간, 하나의 '성격'으로 치환되고, 그 능력을 통해 사회에 나가서 말하려고 하는 진심은 다분히 논외거리로 치부된다. 바로 그 현실이 바로 오늘날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바로, 역사가 필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이것은 역사적 인식을 통해 과거의 형상을 되새기면서, 그 당시 사회가 갖고 있는 시대상의 면면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면면과 오늘날의 풍경들을 비교하면서, 우리 스스로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런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을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의 범주 안에 넣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로 남성 지식인들이었다. 이것은 사실 이 시기의 일만은 아니었다. 예로 들어 우리에게 '현모양처'의 대표로 불려지고 있는 신사임당의 경우를 본다면, 신사임당은 당시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갖고 있던 화가였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이러한 뛰어난 실력이 점점 그러한 그림을 즐겨보는 양반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녀자'가 더욱이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며, 남편을 내조해야 할 처지에 있는 '녀자'가 어떻게 뛰어난 남자 화가의 실력과 대등한가를 두고, 설왕설래를 벌이면서, 당시의 조선 지식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들을 평가절하하려고 애썼다. 그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송시열'이다. 송시열로 대변되는 남성 지식인들의 신사임당 그림 실력에 대한 평가 절하는, 결국 그녀의 뛰어난 산수도를 논외로 간주하고,  '아녀자'가 충분히 취미삼아 그릴 수 있는 '조충도'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그녀를 제한적 담론 안에서, 가정이라는 담론 안에서만 머물게 했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바로 이 책에 견주어본다면, 여성은 '하나의 대상화'로써, 언론과 지식인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책의 표지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국가는 여성의 배움을 용인하면서도, 그 용인의 시선을 '우려'의 시선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사회에 이러한 이중적 시선을 넌지시 던져주면서, 여성의 배움을 둘러싼 의미들을 옥죄인다.  

이 책 하나를 통해, '하이카라 여성'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책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국가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간주하고 작동시키는 일정한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학문은 그러한 메카니즘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고 전복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사건'과 '현상'에 일정한 의의를 주려는 노력을 벌인다. 고로 나는 이러한 책이 작은 '상식'의 선에서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책의 얇은 외형이 마치 "아,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큰 오산이다. 작고 얇은 책에서, 꽤 따갑고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더 찾아보려는 노력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 또한 그것을 '과거에 대한 상식'으로만 머무르지 말고, '오늘날의 문제화'로 삼길 바라는 듯하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 여성들이 교육받았던 학교에 대한 별명이다. 이 별명이 오늘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대'에 대한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 같아, 책 속 내용을 일부 발췌해 본다.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입의 도마위에 오르는 소재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과연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틀을, 역사적 의식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당시 우스개 소리로 부르던 여학교 별명들이 있다. 경성정신여학교는 정신병학교, 동덕여학교는 똥똥학교(영문명 Dong-Duk에서) 학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고, 배화여학교는 배워학교 즉 견습학교, 이화여학교는 외화(외화 = 사치) 학교라 하기도 했다. 특히 이화학당과 이화여전은 '로맨스 제작소', 유행의 원천지'로 유명하다는 말과 함께, '조선의 씨크걸의 집합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여학교 통신>, [신여성], 1933.6).

나는 이후 다른 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대'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일정한 도움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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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구원
자크 르 고프 지음 / 이학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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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종교라는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직종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직종은 바로 '고리대금업'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가 종교 스스로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 대상은 사람이며, 고리대금업은 사람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성의 정도가 종교 내에선 하나의 '일거리'로 떠오른다. 그 일거리란, 곧, 신의 섭리 안에 사는 '당신'을 영원히 신의 축복 속에 놓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축복을 주실 신의 넓은 아량과 은총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속적인 삶의 길들을 따르려는 '당신'에게 일정한 훈계를 할 것인가다.  

역사학자 루이 고척 같은 사람의 말처럼, 고대, 중세, 근대 같은 역사적 구분은 참 편의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시대적 구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역사적 구분이 가져다 주는 편의성에 기대지 말고, 더 심도있는 관찰과 추적을 통해, 세밀한 역사적 시간을 발견하라고 촉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단순한 '사건사'를 넘어 그 시대의 장기지속을 추동하는 요인들을 발견하고, 엄밀한 고증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상을 던져주려 했던 유럽의 '아날학파'의 작업은 그 일원이었던 자크 르 고프의 본 책에도 드러난다. 

우리가 이른바, 히스토리오그라피, 즉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먼저 이 책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을 본받는다면, 자신이 주목하려는 그 대상에 대한 분명한 집요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사서술에 있어 '방만한 욕심'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학은 그 무엇보다 겸손함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유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보려는 그 시대의 상 전체를 다 볼 수는 없다. 고로, 역사학은 '겸손함의 한정성'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문제의식으로 글쓰기를 하기를 요구한다. 자크 르 고프의 이 책이 가진 미덕은 '고리 대금업자'라는 그 하나의 포인트를 가지고, 일관되게 그 대상을 추적했다는 것이다. 르 고프는 이러한 추적을 통해, 일정한 중심을 잡고, 그 시대상의 확장을 꾀함으로써, 자신이 중세 전체를 다 이야기하려는 듯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히스토리오그라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글쓰기 일반에서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서술'의 논리'다. 고리대금업자가 왜 중세 시대에 그렇게 성직자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그 미움을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표는 역사서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역사서술의 기초를 논할 때, 자신이 궁금한 역사적 문제의식을 하나의 주제어가 아닌 일정한 문장, 그리고 그 문장 속에서도 의문문 형태의 가설로 표현해보길 권유한다.  고로 르 고프의 본 책의 키워드인 고리대금업자가 당시 중세 시대의 종교 장 안에서 어떻게 초기에 인식되었고, 왜 고리대금업자가 점점 더 종교적 질타에서 벗어나, 보다 완화된 부정적 인식의 틀 안에속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역사서술의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뒤르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성과 속으로 세상을 구분한다. (이는 지금도 종교가 쓰고 있는 구분법이다.) 이러한 성과 속의 딜레마는, 결국 종교와 인간의 문제인데, 인간이 접촉하고 있는 사회라는 곳이 과연 성과 속의 온전한 구분법을 그대로 용인하는 가의 측면이다. 종교는 바로,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그러한 사회의 움직임을 거리를 두는 것은 일종의 '인식론적 이상'일 뿐이다. 종교는 스스로를 믿는 인간의 '물질성'으로 인해 끊임없는 혼돈과 싸워야 하고, 그러한 혼돈을 일정한 질서 안에서 잠재우려면, 교화가 필요하고, 회개의 동원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르 고프가 연구한 중세 시대의 직종 중,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종교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본보기였다. 무엇으로? 그것을 혼냄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발전되는 사회의 형태 속에서, 그 형태가 계속해서 인간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 물질성이 결국 인간과 인간의 교환적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 그러한 속성을 간과할 수 없는 종교는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열어두게 된다. 그래서 발생한 하나의 종교적 아이디어는 바로 '연옥'이다. 일을 하지 않는 당신이여!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가, 당신이 빌려준 돈의 이자를 챙겨먹는 그 불쾌한 직업을 당장 때려치울지라!하는 준엄한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그래..요즘 세상에..그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지 뭐..걱정하지말거라...너 예전에는 바로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를 맛봐야 했지만,,,이제는 천국을 갈 수 있는 중간 방 정도는 사후에 예약받을 수 있어..연옥이라는 곳 말이야. 르 고프는 고리대금업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적 속성을 지연시켰는가에 주목한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이라는 직종이 추후 유럽의 자본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맑스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의 탄생에 대한 그의 말. 정말 인간이 소망하려는 그 형상이 바로 신을 탄생시킨 것은 또 아닐까. 오늘날 '돈'이 신이 된 세상에, 종교는 정말 자신이 신봉하려는 그 가치를 신으로 내세우고 있는가. 그 가치에 개입된 물질적 가치는 단순히 신의 강건한 모습을 보완하려는 도구일 뿐인가. 오히려 그 물질적 가치가 더욱 강조된 종교를 우리가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지적일까? 돈과 구원. 이 분명한 책 제목 만큼이나, 분명한 메시지가 책 안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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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들어오면서 내가 줄곧 고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따뜻한 사회과학이란 존재할까?"이다. 학문 간의 통합이 요청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은 따뜻하다', '사회과학은 차갑다'라는 인식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평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나에게 온기보다는 냉기가 사회과학과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된다. 물론 사회과학의 냉기는 우리 사회에 분명 필요한 이론을 만들어내고, 맛깔나는 목소리를 동반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정작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속한 사회를, 내가 바라보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대상인 '사회'에 애정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난 기본적으로 '애정이 있어야' 비판도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나에겐 나를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자 친구가 있다. 내가 그 친구의 사고를 존중하는 것은 그녀가 나를 비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비판할 때의 그 조각들을 조금씩 모으다보면, 이상하리만치 거부할 수 없는 사람 냄새가 묻어 있다. 우리는 이른바 '평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커피숍 거울에 대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국회 안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가정에서 우리의 입에 그리고 손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비판하고, 잘 평가하는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그런 능력들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언어가 넘쳐나고, 그 언어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이 분열되고, 또 분열되면서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상처들 또한 받으면서 산다.  

대학원에 오면, 뭔가 그러한 상처들을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할까. 하지만, 아직 모르겠다. 이 곳은 정녕 '따뜻한 사회과학'을 할 수 있는 곳일까, 나는 의문 속에 갇혀 있다. 사람이 들어가야 할 학문에, 사람은 빠져 있고, 오히려 그 '학문'이란 명명의 권위에 눌려, 학문이 사람을 짓누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따뜻함은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학술적 글쓰기 안에 들어있는 비판 의식 내 언급되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채 희생된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이 더더욱 잘 될수록, 글쓰기를 수행한 연구자는 좋은 논문을 발표하겠다는 욕심에 그 희생의 고통을 지나친다.  

사회에 대해 말을 하려는 노력들보다는, 그 사회를 도구로 삼아, 누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 내가 한국 사회  내 대학원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위기'라면, 이것은 정녕 과잉된 것일까. 사람의 존재를 연구하며, 사람의 절실함을 외면하지 않고, 사람의 고통과 비애를 함께 고민하고 또 다른 나아감의 연대로 지칭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녕 어려운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혹은 무슨 연구를 하세요? 혹은 무슨 전공이냐고 묻는다면,,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따뜻한 사회과학을 바라는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  인간을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지적인 대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출세와 야욕에 휩쓸려, 일시적으로 인간을 사용하고, 내팽기치는 것이 행여 글쓴이의 테크닉으로 좋은 논문으로 평가받을지라도, 그 좋은 논문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상자는 바로 당신의 지도교수가 아니라, 당신의 연구 속에 들어있는 연구대상자,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정녕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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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님의 연구성과를 어서 보고 싶네요.
아 이 글 참 잘어울리네요, 이 비오는 봄밤에.

얼그레이효과 2009-04-1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노력해야죠.

lucy 2009-10-2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랑 같네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
가끔 당신의 따뜻하고픈 바라'봄'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야 세상이 녹고 피가 잘 돌아 진짜 따뜻한 '봄'이 올거라고 믿어요.
음,, 난 따뜻한 당신보다 뜨거운 당신이 좋지만요, 키키-

얼그레이효과 2009-10-28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