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  내가 알기로는 이 단어는 표준어가 아니다. 그래서  작은따옴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작은따옴표의 또 다른 효과, 바로 강조의 효과를 안다면, '뒷담화'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둘러싼 가장 흥미롭고 심각한 사회심리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은 '뒷담화'를 한 번도 안 당해본적이 있는가? 다시 이 문장을 살펴보니, 내가 '당해본'이라는 표현을 썼다. '뒷담화'는 사실 우리가 늘상 쓸 때 연상하는, 반드시 부정적인 기운이 있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좋은 뒷담화'. 생각보다 가깝게 다가오지 않지만 있다고 연상은 해보자.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뒷담화'라는 표현을 언급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이다.  

당신은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단어를 쳐본 적이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질문들이 지식in에 올라와 있다. 그렇다면 '뒷담화'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그것을 좀 '경험적'으로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만들어질 것 같다. 일단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A의 얼굴이 안 좋다. B는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다. B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A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다. 그러다 입을 연다. A왈,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거다..그  친구 있잖아..C 걔 되게 재수없지 않냐? 하는 헤어스타일이랑 옷도 그렇고,,학교에서 계속 추근대는 것 같아서 좀 그래." B왈, "너 C 보면 인사도 잘 하고, 잘 받아주더만.." A왈, "에이.야 어떻게 걔 면상에 대놓고 싫은 티 내냐." 너무 예를 간단하게 든 것 같지만, 약간의 양해를 부탁하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 한다.  

일단 내가 보기에 '뒷담화'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주목하는 현대인의 시각성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도시는 인간의 시각성과 늘 함께 해왔다. 그러한 시각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구경거리'로서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책의 내용을 보면, 당시 19세기 말 파리는 인간의 시체를 보는 것도 하나의 인기있는 구경거리라고 하니, 인간의 시각성은 상당히 긴 역사적 흔적을 갖고 있는 개념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살아간다. 당신이 친구와 함께 신촌 현대백화점 주변을 거닐다가, 어깨를 부딪히기 싫어 이리저리 동선을 바꾸는 동안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목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곧잘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찰나'가 가져다주는 얕은 혹은 깊은 인상들은 도마위에 오른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뒷담화'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뒷담화'는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기 검열의 과잉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이중성은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고 싶은 것과 누군가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의 긴장감을 매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요즘 대세는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다. 누군가에게 혼이 날까봐, 누군가의 웃음 소재가 될까봐 사람들은 상당히 착하게 행동한다. 나는 사실 뉴스나 신문을 통해 매번 우리나라가 이제 이런 악행이 벌어지는 나라라고 흥분하다가도, 길거리를 나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착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는 것에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을 때, 그 주목을 받으려는 문화적 실천이 정작 자신만의 희열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사는 사람들이 성의있게 자신을 보여주었는데도 원하지 않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어찌되었든 불행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뒷담화'의 대상에 오르는 유형은 정치인과 연예인이다. 이들은 도시의 구경거리이자, 고로 도시에서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로 인하여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뒷담화'는 오늘날 말과 글의 과잉 속에서 '언어상품'의 대표성을 띈다. 텔레비전 토크쇼는 '뒷담화'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미디어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MBC 명랑히어로의 한 코너였던 <두 번 살다>라는 프로그램을 나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상의 장례식을 위해 가상적 죽음을 체험하고 싶은 연예인 한 명이 초대되고, 그 연예인이 원하는 분위기의 빈소가 마련된다. 그리고 '천상의 방'이라고 하는 곳에 MC와 함께 들어가, 자신을 찾아오는 조문객들의 반응을 모니터로 살핀다.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주인공 연예인을 조문하기 위해, 지인들이 찾아오고, 자리에 앉아 '가상적 고인'을 기리기 위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상황에서 '뒷담화'는 비록 가상이지만 형성된다.  천상의 방에 들어가있는 주인공 연예인은 모니터를 보다가, 자신을 지나치게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사진을 열고, 경고 혹은 반박을 할 수 있다.  

'뒷담화'때문에 죽은 사람을 보았는가? 우리는 많은 연예인을 잃었다. '뒷담화'는 언어가 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젊은 날 고민이 많을 때 늘 써먹었던 인간관계 상의 그 '가면 놀이'라는 표현을 불가피하게 끌어온다. 삶은 연극무대라면서, 이 연극무대에 살아남기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좋은 연기를 펼쳐야 하며, 그 좋은 연기를 위해 뒷받침될 수 있는 가시적인 신체 기술을 사용한다. 마음은 씁쓸하지만, 더욱 상냥하게.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기발한 이론을 만든 학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어빙 고프만은 일찍이 이러한 사회 현상을 예견했고, <자아 표현과 인상 관리> , <오명>이라는 책 등을 통해, 현대인의 자아가 표현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술했다.  

'뒷담화'는 '비밀'과도 연관이 있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지키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비밀'이 아닐까. 소위 입이 싼 사람들이 많다. 이 현상을 두고 젠더적 관점을 언급하며, 여자들이 특히 심하다라고 확 선을 긋는 사람이 있지만, 남자인 내가 봐도 요즘 남자들의 '입의 가벼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투명인간의 심화'라고 스스로 지칭하고 싶다. 여기서 '투명인간'이란 으레 우리가 아는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모든 말을 해야 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우리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많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시 A와 B의 이야기를 끌어오자. 

A가 기분이 안 좋은 얼굴로 B가 있는 카페에 들어 왔다. B는 물어본다. "너 왜 그래..?" A는 망설이다가 말한다. "있잖아.예전에..아니다..너 이거 내가 말하기 전에 비밀 지켜줄 수 있지?" B는 고개를 끄덕인다. A는 B를 믿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면서,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한다는 걸 모르니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커피를 마신다. 며칠 후, B가 친구 C를 술집에서 만난다. C가 술을 마시다가 B에게 말한다. "야, 너 아냐? A 가 D 좋아한대.." B는 놀랜다. 그리고 말한다.     "어.. 야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D는 말한다. "나? A가 말해주던데.."  요즘 비밀은 그렇게 비밀같지 않다. 언젠가 공개될 비밀. 봉인이 쉽게 풀리는 비밀. '뒷담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연예인들이 오늘날 수난을 당하는 이유도 '투명인간'을 강요하는 미디어를 비롯한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말 실수가 많은 것도 갈수록 자신을 드러내기를 강요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입이 달다. 너무 쓴 말을 많이 해서. 나도 방금 뒷담화를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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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내가 속해있는 곳을 '고발'해보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판 자체를 바꿔보겠다는 것이냐,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 일 년 반 동안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당신이 속해있는 그곳이 어디인데? 대학원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사람들 입에서 "대학원이나 가 볼까?"라고 인식이 되는 그 '대학원'이 맞다.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대학원이나'하던 자신이 대학원 특유의 장 논리에 차츰 적응해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그런 말을 했던 자신도 '타자화'시킨다. 쉽게 말해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라, 대학원이 사실 들어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부터 시작해서, "막상 들어오면 죽어, 졸업을 누가 함부로 시켜주나?" 등등 다양한 반응들을 체내에 흡수하거나,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학원을 '대학원사회'로 명명함으로써 나타나는 다양한 의미들을 고려해볼 때, 대학원은 '대학원이나 가볼까?'의 그곳이 맞고, '막상 들어와서 제대로 하면 지옥같은 곳'의 그곳도 맞다. 대학원을 거친 많은 조언자들이 그렇듯이 이 곳은 정말 '혼자놀음'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갈리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글을 보면, 상당히 오랫동안 대학원 생활을 한 것 같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일 년 반 정도 대학원 생활을 한 20대 석사과정생이다. 대학원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인 기반도 탄탄하지 못할 뿐 더러, 이 곳에 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이상하리만치 불쾌한 자극들이 이 곳을 탈출하자고 유도하고 있다. 근데 내 심경이 좀 복잡하다. 뭔가 이 곳의 어두운 기운들을 다 '까발리고' 가고 싶다. 이건 비단 내가 속한 대학원 한 곳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 속한 대학원 전체를 한 번 '까발리고'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러기위해선 탈출과 동시에 오랜 기거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려면, 그리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려면 나는 '내부고발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질문의 유형이 있다. 일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이봐 인생은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지"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일정한 질문의 유형 중에 또 하나는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온, 그리고 주입받는 "자네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와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살면서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 쪽을 스스로 많이 고민해 봤다. 이제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무엇을 읊조린다는 것이 많은 인생의 선배들에게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공개하자면, 나는 '역사'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은 요즘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사실 한국 사회 전체가 어찌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교육은 국가의 문제, 개인의 문제이며, 이것을 좀 더 심화시키자면, '문화'의 문제이다. 교육이 문화라는 것과 연결될 때,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 공교육과 사교육과 같은 '교육 현실'의 차원을 넘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장 자리가 잡혀있지 않은 대목이다.  

나는 참고로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커뮤니케이션학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방송학이라고 알고 있는 학과에 속해 공부하고 있다. 나의 전공을 밝히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문화'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다.  내가 속한 커뮤니케이션학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깊이가 없는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학문은 오늘날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길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새 이 학과는 성찰할 수 있는 지식인을 키워낼 수 있는 지적 토양의 장이 되기보다는, 사회에서 한 번 뜰 수 있는 짭짤한 '기능인'만을 키우는 학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사회를 비판하는 것만이 커뮤니케이션학의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사회'와 결부되어 있어야 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도구화된 목적'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대학원생들이, 그리고 학부생들이.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것이 교수들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연구에 '도구화'되는 제자들, 그 과정 속에서 '벌벌 기어야'하는 제자들의 입장을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기전에 많이 들어왔고, 각 종 기사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가 대학원생들의 몫도 있다고 이제 생각한다. '요즘 대학원생'들이란 표현이 거슬릴 수 있겠지만, 나는 과감히 쓰겠다. '요즘 대학원생들' 의 문제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다양한 문제들에 묻혀, 그리 적극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심각하고 중요하게 고민해 봐야 할 측면이다.  

나는 바로 그 측면을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학문의 외피로 인한 현학적 문체를 떨구어내고, 최대한 거칠게 쓸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대학원'사회의 어두움에 대한 성찰이 한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안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선배연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수들을 질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 속에 나 또한 얽혀 있으며, 나는 이러한 이중적 위치 속에서 반성의 주체로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 또한 숨길 수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던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알았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때문이었다. 그의 사회학은 소위 '재귀 사회학'으로 불리면서, 그는 학자 자신이 연구를 할 때, 자신을 둘러싼 여건들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들 중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라는 책이 한 권 있다. 나는 지난 겨울에 그 책을 읽으면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록'의 순간이 필요함을 계속 재촉했고, 그 결심을 오늘에서야 내렸다.   

성찰할 수 있는 인생 속 몇 번의 시기 가운데, 나는 지성의 최고점을 찍을 수 있는 데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고려하고 있는 '대학원'이라는 공간이 사실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혹은 얼마나 수동적이며, 얼마나 기능적인지를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을 위한 자기 성찰의 측면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을 위해선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지만) 계속 쓴 물을 단 맛이 느껴질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은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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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1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사회성'이 길러져야 하는데 - 저는 요새 이 '사회성'이란 말이 사람을 얼마나 억압하고 통제하는가 생각합니다 - 복종 내지는 타협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데 고발하는 이들은 당연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나름 내부고발이라면 내부고발,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15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발'은 제 자격으로는 너무 과분하고, 또 제가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고^^;; 겸손하게...차분하게..우리나라 지식장의 구조들을 살펴보고 싶은 기분으로..'소고'를 펼치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3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올모스트 페이머스>란 작품이 있다.  (잠깐 논외로 빠지지만,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최고 작품은 내가 보기에는 <제리 맥과이어>보다는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지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감독이 사회에 던지려고 하는 메시지의  경로들이 차분하고 아름답다.)아마 한국에서 영화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다 봤을 작품일 것이다. 감독의 자전적 고백이 강한 이 작품은, 미국에서 유명한 대중문화잡지인 <롤링스톤즈>에 글을 기고하게 된 주인공 소년이 자신이 취재하게 된 스틸워터라는 밴드와 동행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갈등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밴드 열라 좋은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구려? 왜 이리 속들이 지저분해? 이렇게 글쓰면 안되는데..좀 구라를 쳐? 아니면 본 것 그대로 쓸까? 아, 그렇지만 그대로 쓰기엔 너무 친해졌는데.." 소년은 글을 쓰려고 타자기 앞에 앉았지만,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소년은 스승으로 모시는 한 대중음악평론가에게 전화로 고민을 털어놓는다. 당시 이 역할을 <카포티>와 <다우트>의 주연이었던 필립 셰이무어 호프만이 맡았는데, 인상적인 대사를 뱉는다. " 정직하고, 잔인해라.." (영어 대사 그대로 직역하자면,,자비롭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한윤형. 내가 그를 알게된 것은 한국 지성계의 '명문가'로 칭송받던 고종석이 <씨네21>에서 질투가 날 정도의 글솜씨를 가진 젊은이가 있다고,, 그리고 그 젊은이 중 한 명이 한윤형이라고 (지금은 사라진 코너)' 유토디토'에 고백한 글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유토디토'의 마지막을 한윤형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에 비유하여 '유토디토'의 사라짐을 아쉬워했던 것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또 돌이켜보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기록'과 '보존'을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 때문에) 

나도 한윤형과 같은 '20대'다. 한윤형을 비롯하여, 노정태, 김현진 등과 같은 사람들의 글쓰기를 볼 때마다, 대학'교'에서 '원'으로 갈아타고, 뭔가 사회에 의미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나 엄청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엄마, 아빠, 친구들아 나 함부로 건들지 말그래이. 안 그러면 느그들 손해다!"하고 으르렁거리는 내 모습이 챙피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 공간을 빌어, 한국 사회를 비판하자면,,그 가운데서 가장 썩은 곳 중에 하나가..당연 '대학 사회'이고, '대학원 사회'임은 나는 감히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가운데,,(이른바 '식자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나름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는 친구들에게 "어이,,자네 참 글이 좋은데말이야..이런 이론이 아쉬워. 이런 학문적 구조를 보강하면. 자네 대성할 것 같다고" 결국 '남 도와주는 척'하다가, '자기 잘난 척'으로 끝나는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한윤형의 이 책에도 '먹물'을 뿌리지 않기를 당부하는 바다.  

이런 생각을 언급하는 것이 내가 소위 한윤형의 사주를 받은 '서평청부업자'라서가 아니다. 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론이란 분명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문제는(아마 많은 사람들이..)..이론을 '영향'이 아닌 '기능'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론이란 알면 끝!인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이론과 개념, 시선을 만들어보려고, 그것을 그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본 한윤형의 분투기는 인상적이다. 나의 주요 공간은 연구실이지만, 나는 현장의 복잡다단함을 '이론'으로 다 해결해버리려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해지겠다. 경험은 분명 우리 삶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현장 환원주의' , '광장 환원주의'는 아니다. 나에게 '경험'이란,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을 포함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아, 이 사람 자기가 속한 20대들을 향해 꼰대들이 늘 말하는 20대들 왜 이리 생각이 없어? 하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거야?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 같았다. 다만 한윤형이 본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능력에 대해 우리는 보다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한윤형의 글쓰기는 '논리'라는 것이 가로새겨진다.  말을 하는 논리, 글을 쓰는 논리. 그 엄청난 '방법서'가 나왔음에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시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가장 자전거를 빨리 탈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다 알 것 같다. (나도 어릴 적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지만,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는 법'이란 설명서를 같이 준 가게는 없었던 것 같다) 자전거를 잘 탈려고, (그것도 한 번에!) 이리저리 재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라리 대일밴드 붙이는 한이 있더라도,,생각보다 넘어지는 것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고..그냥 한 번 넘어질 때까지..자전거 타 볼 걸"일 것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물론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삶의 상처를 강조하는 것 같다. 그 상처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가에 앞서, 아니 그것을 뛰어 넘어, 나의 상처와 연관된 모든 현상들을  글로, 말로 풀어보기. 그 시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더 진솔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엄중하고 탁월한 논리는 결국 자신의 성실성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종의 '야망'도 있어야하리라.

문학평론가 권명아 선생님이나,,김우창 선생님이 우리 시대 '젊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자주 썼던 표현..'시행착오를 겪을 권리', '방황할 권리'가 없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사실 한윤형이 경계하는 386식 발언일 수도 있지만),,그러한 권리들의 복원 혹은 추구를 보다 '자기식'대로 지향하는 것은 필요한 자세라고 본다. (비단 이러한 제안이 나를 어설픈 낭만주의자로 몰지 않기를! 나는 이 서평을 보는 당신들의 내면과 지성을 존중한다. 고로 내 지적이 마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같은 아방가르드를 한국 사회에 들어오려는 게냐!라고 묻는 것이라면..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너무 '자기계발서 ver.'로 몰고 갔나? 아니다. 이 책의 진가는 자기 세대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한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떤 경로를 통해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사회와 이어질 때 어떤 정기능과 역기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기해부학적' 기술에 있다. 그리고 그런 기술 속에서 저자는 요즘 세대들에게 빈곤과 부재의 대상이라는 '정치'를 가져온다. 아까 앞에서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언급한 부분이지만, 이 책의 미덕은 '정직하고 잔인하다'는 점이다.  

좀 깊이 생각해보자면, 나는 우리 세대의 지적인 영토와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옛날에 대학교에서 전공수업을 듣다가 흥미로운 멘트가 교수님에게 나왔다. "요즘 세대들은 본받을 지적인 스승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죠..우리 때는 백낙청..리영희...신영복...김우창..이 있었는데 요즘은 누굴 따르죠?" 내가 당시 손에 든 책이 흥미롭게도 한윤형의 글에 자주 언급되는 강준만 교수의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강연을 하러 왔을 때가 기억난다. 리영희를 추억하는 많은 할머니, 아저씨들이 강연을 보러 왔지만, 정작 그 자리를 내어준 대학교 내 학생들은 "리영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멀뚱멀뚱 쳐다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책 조금 본다는 친구들, 수업 조금 열심히 듣는다는 친구들은) '강준만'하면, '진중권'하면..알았다. 그렇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강준만은, 진중권은 그리고 여전히 '어떤 존재'로 남아있는 것 같다. 저자는 그런 지적인 영향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언급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언급은 지루한 지적 계보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 인생 속에서 '야릇하게' 담겨있어 그리 부담이 없을듯하다. 

행여 이러한 리뷰가 일부 지식인들에게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것이냐! 혹시 한윤형의 책이 그런 것이냐라고 간주될 수 있을 위험, 혹은 위협이 우려되는데, 나는 '지성'을 좋아하며, 이 책은 거칠고 잔인하지만,,온갖 포장과 미화에 매몰되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글을 썼는지도 모르는 이들의 글쓰기 행위를 반성하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책 속 사진만 보면, 그는 말년 병장의 포스와 일부러 가난뱅이 행세를 하며, 조선의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는 어진 암행어사 같은 기운도 보인다.(너무 과잉 해석인가^^?)  

이 책을 덮고 나면,그에게 풍기는 '독설'의 기운도,,혹은 누군가를 닮고 싶어하는 그 '애정'의 기운도..결국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흐뭇함이 남는다.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 내가 요즘 대학원생이라는 그 가냘픈 '지적 호칭'아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사람이 말살된) '학문-폭력'을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라는 고민하는 가운데,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를 나와 같은 세대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다. 결국 배움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의 인연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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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잡아라
마크 카츠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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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란 때론 우리가 전혀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던 존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마크 커츠의 『소리를 잡아라』또한, 앎의 이러한 속성을 체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앎의 대상은 소리의 존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성 매체들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 기술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뤄진 이론적 도해의 풍경을 선보인다. ‘녹음의 사회문화사’라고 요약할 수 있는 본 책에서 저자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며, 기술과 이용자 간의 상호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녹음이 단순히 소리를 담는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녹음은 소리를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하나의 예술적 산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포노그래프 효과’라고 소개된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축음기의 출현, 디스크와 예술가들의 생산 양식 변화, DJ 배틀이 가져다준 문화적 변혁, 디지털 샘플링 예술이 갖고 있는 정치와 윤리 , 사이버 공간에서의 음악 감상이 몰고 온 감각과 자본, 윤리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녹음을 통해 음악가들은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린 ‘담긴 소리’를 자유롭게 들으면서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녹음을 통해 소리는 진정 ‘사물’이 된 것이다. 소리가 사물이 되는 순간,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과 윤리의 만남을 도모한다. 그것은 자본의 매개적 기능 때문이다. 물론 공연에서 직접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것은 감각 - 자본 - 윤리의 관계가 비교적 투명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입증하지만, 녹음을 통해 소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 mp3는 공개되어 있는 ‘어둠 시장’의 교환물로서 이는 곧 청각의 권리가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한 것이 본 책의 8장 : 사이버 공간에서 음악 감상하기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갈등 구도를 진부하게 느낄 수 있는 현대 문화인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귀한 소리는, 축음기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가정 내 생활 방식의 변화,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유명 음악가들이 레코드 길이에 맞춰 자신의 곡 분량을 정하고 작곡했던 이야기, 오늘날 대중음악 생산자들이 샘플링을 통해 이미 존재했던 과거의 ‘음- 조각’들을 변용, 접합하는 데서 부딪히는 윤리적 논란들일 것이다. 

 
녹음이 가능해진 것이 신기한 시대를 지나, 우리는 이러한 신기함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져 준 앎의 코스를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금 내가 글을 쓰며 듣고 있는 권순헌 연주의 <슈만 :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와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Praise you>를 어떻게 ‘연달아’ 들을 수 있었을까라는 ‘천진난만한(?) 감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 감탄의 세기가 기립박수를 칠 정도는 아니다.^^ 암튼, 이 책이 던진 ‘녹음’이란 개념은 예술을 통해 묶인 우리들의 지식과 감성에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책 제목 그대로 소리가 인간의 그물망 안에 들어옴으로써, 소리가 직조해내는 그물망의 색과 형태는 보다 다채로워 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채로움 속에서, 소리의 사물화가 건네는 변혁의 기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성의 분할을 요청한다. 우린 이 요청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미 반응하고 있으며, 그 반응의 민감함을 보다 잘 인식하는 세계의 예술가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창조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생각난다. 상우가 담고 있던 그 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1) 녹음을 통해 이뤄진  ‘연달아 듣기’의 의미는 슈만과 팻보이 슬림의 노먼 쿡 사이에 생성된 생과 사의 경계를 포함한다. 즉, 슈만은 죽었고, 노먼 쿡은 살아 있다. 이는 국적의 경계도 포함한다. 슈만은 독일 사람이고, 노먼 쿡은 영국 사람이다. 녹음이 없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이러한 조건 아래, 음악을 연달아 듣기 위해 쏟을 원시적 노력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기고한 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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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
존 A. 워커 지음, 홍옥숙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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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키워드인 '명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성격에 상응한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명성은 분명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에 의해 매겨진 하나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은 '관계지향적'이다. 이러한 관계지향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에서 찾아내려는 예술세계 내 '의미의 망'을 불러낼 수 있는 요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의미의 망'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으로 설명될 수 있고, 때론 하워드 베커의 '예술세계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나 베커가 설명하는 두 이론은 차이가 있지만, 예술세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지니는 특성을 지향한다. 이것에 충실하자면, 예술가는 독존적일 수 없다. 예술가가 바라보는 풍경, 혹은 예술가를 둘러싼 풍경에 문화 ㆍ예술사회학은 귀를 기울인다. '예술'이 '예술세계'로 명명되었을 때, 그 효과는 세계 내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소환한다. 예술세계의 각 요소에 대한 소환은 문화를 매개하는 사람들, 예술세계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제도, 대중과의 소통 방식을 도모하는 매체 및 (예술을 하는 데 중요한) 현대 기술의 특성 들을 문제화한다. 그렇다고 이 문제화의 과정이 예술가를 둘러싼 맥락 찾기에 매몰된 나머지, 예술가의 자율성에 기인한 예술적 창작의 영역을 훼손해선 안 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우리가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작품 속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이 표출하는 주제의식 등을 유념하면서, 그 주제의식을 둘러싼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 등을 배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커가 그려내는 스타와 예술가의 상관성은 오늘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상관성이 빚어내는 접점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넘어선 일정한 '전략'이 동반된 커뮤니케이션 행위와 그 행위로 이어진 '관계의 고리'를 그릴 수 있게 된다. 본 책은 스타와 예술가들의 내면에 숨겨진 일정한 '야심'이 드러나는 스타일리쉬한 예술 행위에 주목하면서, '의미의 망'이 직조해내는 관계성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연기 혹은 노래 이외 할 줄 아는 게 있어?”라고 무시해 왔던 스타들의 모습에 대한 일정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대중 앞에서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예술가의 입장에선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자본', 그것이 형성하는 관계의 경계가 아우르는 폐쇄성 및 유연성이 자신의 이름을 견고히 하는 데, 또 널리 알리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사회자본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여, 서로의 미적 스타일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그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된다. 이는 예술을 소비하는 일정한 계급층들의 담화적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대표적으로 '살롱'문화가 있다). 이처럼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예술세계는 예술을 생산하는 예술 생산자, 이들의 작품을 알리고 평가하는 문화 매개자, 그리고 이를 소비하는 예술 소비자들의 관계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이음새와 강도를 관통하는 것은 본 책이 강조하는 대중문화의 상관성에 따르자면,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방식, 매체의 힘과 그것을 반영하는 예술 생산 방식의 특이점들과 결부된다.


'사회과학자'의 감수성을 체득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풍경'이라는 개념이 선사하는 효과는 '내가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넘어, '내 주위를 둘러싼 풍경의 이채로움은 과연 무엇인가'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목은 다양한 '의미의 망'들을 만들고, 풍경의 개념을 다채롭게 한다. 풍경을 문화에 비유해 보았을 때, 우리는 문화가 표층과 심층이 겹친 '중층 구조'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풍경의 표면을 보며 감탄하지만, 연구자로서 가지는 혹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가지는 특유의 지적 감수성은 풍경의 그 표면을 넘어선 심층의 의혹과 신비함을 매만지게 한다. 중요한 것은 표층과 심층의 관계 인식과 조절이다. 그리고 배치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풍경을 디자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과 그 자율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어떻게 매만질 것인가. 그 이상적 감촉을 위한 학문적 실천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한 때다. 

 
-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올려진 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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