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나는 이런 학생이었구나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49351  

글 : 주성철 
 

블로그 주소: blog.cine21.com/jjcrowex


“<씨네21> 블로그 같기도 하고, <한겨레21> 블로그 같기도 하고.” 이 아리송한 말은 ‘굿모닝 대디 굿나잇 마미’ 블로거인 김신식씨의 자평이다. 그는 현재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취업준비생이다. 그만큼 그의 블로그에는 영화 얘기 외에도 정치, 사회를 포함해 TV와 광고 등 여러 대중문화의 갈래들을 아우르는 글들이 많다. 삼성 애니콜의 새로운 광고를 보고 ‘애니밴드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6년 만에 돌아온 박진영에게 ‘정치적 딴따라’라고 말하는 그의 글들은 물론 스펙트럼도 넓지만 글의 수준도 상당하다. 몇달 전 노현정과 김옥빈에 대해 쓴 글은 열띤 논쟁을 끌어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코너를 웹상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씨네21> 블로그 섹션에서 그의 블로그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그러한 점에 기인한 바 크다. 그 역시 다른 블로거들처럼 시작은 소박했다. 2005년 12월14일 곽경택 감독의 <태풍>을 보고 리뷰를 올린 게 첫 번째 포스팅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습작 노트를 넘어 ‘잘 꾸며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이후 블로그를 통해 웹진 <매거진t>의 리뷰어로도 활동하게 됐고, 현재 담당교수도 <씨네21> 영화평론 공모 수상자였던 염찬희씨라 그가 말하는 <씨네21>과의 인연은 질기다. 게다가 올해 1월부터는 매달 <씨네21> <필름2.0> <무비위크>, 세 잡지의 기사들을 꼼꼼히 비교하는 글을 올려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졸업 준비 때문인지 지난 10월은 쉬었지만 앞으로도 빠짐없이 포스팅하려고 한다. 그가 학생이기 때문에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성공회대에서 주최한 ‘문화읽기와 글쓰기’라는 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데, 꽤 글이 준수해서 심사를 맡았던 교수가 베껴 쓴 것은 아닐까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었다. 급기야 교수가 웹서핑을 하다가 똑같은 글을 찾게 돼 문제가 됐는데, 알고 보니 그 블로그가 바로 ‘굿모닝 대디 굿모닝 마미’ 바로 자신의 블로그였던 것이다.

블로거로서 그에게 최근 가장 많은 고민을 던져준 것은 바로 <디 워> 논란이다. “단순히 평론가는 나쁘다, 대중은 좋다는 구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며 “그 중간을 차지하는, 그러니까 비평가라는 프로페셔널한 위치도 아니고 마냥 수동적인 소비의 객체도 아닌 이른바 ‘사이버 시네필’의 존재에 주목하고 싶다”는 게 그의 얘기다. 여러 교양과 정보를 수집해 적절히 재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인터넷 집단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데, 그 과도기적 상황이 기형적 형태로 돌출된 것이 지난 <디 워> 논란이었다는 얘기다. 그가 우메다 모치오가 말한 ‘웹 진화론’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를 확장해 그는 블로그를 ‘투명인간의 산소호흡기’로 정의한다. 미디어라는 공적 영역과 반면에 자신의 속내와 비밀을 마음껏 털어놓은 사적 영역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곳이 바로 블로그인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 블로그는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학습 공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포스트


평론가, 씨네필, 그리고 팝콘청년 [포스트 보기]



나날이 변화하는 21세기 미디어 트렌드 중에서 생비자(prosumer)라고 하는 위치에 관심이 많다. 그런 생각에서 나온 포스트가 바로 지난해 9월22일에 올렸던 ‘평론가, 씨네필, 그리고 팝콘청년’이었다. 발터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글을 좋아하는데, 베냐민은 일찍이 “관중은 카메라에 나타난 배우와의 거리감을 통해 비평가의 태도를 취할 수가 있게 됐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대목을 참 좋아하는데 지난 8월 <디 워>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단순히 ‘평론가 vs 대중’이라는 구도로 환원하는 것을 상당히 표피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7천원 내고 왜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항변하는 관객을 나는 ‘팝콘청년’이라 표현하고 싶은데, 이런 의견들이 사실은 가장 솔직할뿐더러 그들이 가장 경계하고 싫어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평론가집단이다. 문화연구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말한,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유일하게 말할 권리’를 지닌 이들이 바로 평론가들이라면 이들간의 불신은 상당하다. 그리고 그 간극이 주는 괴리감 또한 심하다. 나는 영상-텍스트의 메시지를 자신의 목소리로 해독하려는 대중의 능동성이라고 할까(물론 다 능동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른바 영상담론을 형성하는 3주체인 평론가와 시네필, 그리고 팝콘청년의 관계가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씨네21>의 독자편집위원회에 관심이 많다. 또 현재 <씨네21> 블로그는 다른 블로그 서비스들에 비해 비밀글 쓰기 같은 것도 안 되는데, 좀더 정교한 블로그 활성화 방안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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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4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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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아렌트 누님의 분노와 절규가 담긴 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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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문학평론가 권명아 선생이 제기한 문제,  왜 국문학이 이리도 '식민지 연구'에 매달리는가라는 문제는 요즘 국문학 수업을 청강하는 내게 흥미로운 사안이다. 몇 년 전부터 국문학, 역사학, 사회학 등등을 중심으로 '식민지 시기 연구'의 붐이 만들어지고 있다. 요즘 들리는 서점들 역사 코너에 가봐도 대부분이 이 시기 연구 저서들로 채워져 있었다. 알라딘 역사 파트 신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해 있는 문화연구 진영도 요즘 '역사적 문화연구'라는 이름 아래, 슬슬 이 시기 연구에 동참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나는 좀 이런 분위기가 우려스럽다.  

권명아 선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시기 연구의 과잉은 역사가 '현재의 진단학'으로 가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발굴'로서의 역사? 물론 좋지만, 그런 '발굴'로서의 역사가 역사 담론 속에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요즘 연구자들이 그냥 '역사 연구'라는 큰 공간 속에서, 남들이 하지 않은 '소재'의 빈 틈을 찾아가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아마도 '논문'이라는 대학 사회 내 제도적  산물 속에서, 어떤 창의의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발굴'로서의 역사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화살표가 서로를 겨누지 못하고, 난립의 상태만 조장하는 꼴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a라는 연구가가 한 의견을 제시하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소비될 뿐, 그 이상의 반론과 논쟁이 붙지 않는 형국. 그러다보니, 역사 담론은 더 많이 증가될수록, 소비의 운명에 갇히게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역사 담론의 과잉이 오히려 '비역사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사실 한국 사회가 '역사물'에 환호하고, 또 그런 환호가 실제로 많은지도 모르겠지만, 연구자들이 계속 '역사에 관심을 갖자'고 하는 말 속에서, 한정된 시기의 역사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되려 역사적인 것으로의 탈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오히려 그런 '과거' 시기 자체의 발굴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에 대한 충실한 명제, 과거 - 현재 - 미래의 가교가 되는 역사의 개념을 잊으려는 것은 아닐까. 일상의 정치적 무기력함을 과거에 대한 신비스러움으로 치환해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청강하러 들어간 국문학 수업 중, 젊은 연구자들이 너도나도 그 시기를 연구하겠다길래, 나는 좀 의아했다. 과연 당신은 그 시기가 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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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지음, 박은주 옮김 / 새물결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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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편 울리히와 비슷한 견해가 많네요. [위험사회]와 같이 읽으셔도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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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09-19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제목만큼 그렇게 '야심있는' 류의 책은 아닙니다. 제가 워낙 기든스 - 벡 이런 류의 사회학자들을 좋아하지 않는지라...문화연구자들은 너무 이들의 의견에 환호했고, 비판적인 대응을 못했죠.

얼그레이효과 2009-09-1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한국에서 '젠더'연구하시는 분들은, 이제 이 책의 메세지를 뛰어넘어야죠.
 
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 지극히 '상식적인' 리뷰입니다  

- 약간의 걱정 -

이 책을 통해 한윤형이 바라는 것은 '대화'이지 싶다. 좀 더 세게 표현하자면 '논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굳이 '한빠'들의 리뷰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 대한 강조점이 '한윤형' 이름 석 자에 멈추어 있는 것은 개마고원이나 한윤형 본인에게 불만족스러운 상황일 것 같다. 한윤형의 비평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 사회'라는 표현이 좀 부담스럽긴하지만, 여전히 '기특한 비평'의 수준으로만 본다면, 우리의 논의는 발전될 수 없다. 이러한 시선을 뛰어 넘어, 우리는 한윤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짚어내고, 그 짚어냄 속에 틈이 있다면, 헤집고 들어가 함께 너트, 볼트를 조여보는 게 좋을 듯하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는 자신의 인생사를 써놓았기 때문에, 그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 좋겠지만, 이 책은 한윤형이 작심을 하고 쓴 '역사비평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이 책을 둘러싸고 '한윤형'보다는 한윤형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들을 짚어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 청년에 대한 감탄 혹은 시기가 이 청년이 진단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가린다면, 우리는 결국 이 책을 또 하나의 '한윤형 자서전'으로의 의미로만 축소시키고 말 것이다.  

일간지나 주간지를 통해 사람들은 제발 진보 / 보수 논쟁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좀 거짓말인 것 같다. 인터넷을 보더라도,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불구경은 '진보/보수 논쟁'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왼쪽도 치고 오른쪽도 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일찍이 강준만 같은 학자가 자신의 포지션을 좀 인정해달라고 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그토록 설문조사를 통해 바라던, 진/보 논쟁의 해소라는 시선은 '강준만 그래서 당신은 어느 쪽이란 말이오?'란 아이러니에 갇혀 버린다. 차라리 나는 이렇게 본다. '진보 / 보수 논쟁의 해소'라는 것을 기자들에게 새해 소망처럼 이야기하는 자들은, '그냥 정치 싫다'라는 말을 하면 되는데, 그것을 괜히 '진보 /보수'의 프레임 탓으로 돌린다.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인터넷이나 떠돌아다니는 귀동냥 지식을 통해 접하는 '피상적 정치 교양'으로 보수 / 진보 논쟁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은 쉽다. 다만, 그 게임을 즐기는 차원에서 그치려고 하지, 더 이상의 '개입'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 이게 딱 우리나라 정치 현실이 아닐까 싶다. 고로 자신은 정치판의 더러운 현실을 욕할 자격이 있지만, 자신의 입은 딱 어떤 수준, 어떤 단계에서 '깔끔한 입'이 되어야 한다. 정치는 더럽다->정치를 말하는 나는 깨끗하다. (오호! 이건 그리스 시대 지식인들이 정치를 보던 시각인데!) 

본 책에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나 또한 저자처럼 '분열'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분열은 일정한 건강성이란 아주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킬 필요가 있는 윤리 안에서 이뤄지길 바란다. 이  윤리를 골몰하는 데 하버마스는 여생을 거의 다 바친 게 아닌 가 싶다. 근데, 그 윤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참 쉬운 도식 같아도 막상 꼼꼼하게 보면 '어렵다'. 이 '어렵다'는 표현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째, 그 윤리를 받아들이려는 나의 자세가 그것을 도저히 못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의 차원, 둘째, 그 윤리가 만들어진 연원, 과정 자체가 사실 엄청난 수고로움을 동반했다는 것에 대한 이해. 하버마스가 만들어 놓은 체계와 생활세계, 그리고 생활세계의 식민화 같은 개념들은 겉으로만 보면 되게 쉬운 것 같지만, 하버마스가 그 개념을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의 '소통'과 그 이상은 이론이나 현실이나 그 어떤 수고로움과 어려움이 공존하는 차원에 있음은 분명하다. (아 우리 시대 정말 소통을 쉽게 말하는 그 분이여!) 중요한 것은 전자다. 우리 사회(비단 우리나라만 그러겠나)는 전자에 취약하다. 좌파가 우파의 어떤 부분을 옹호하면, 좌파는 바로 '변절자'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성찰이니 자성이니 좋아하는 분들이 그런 '사상 검증'을 더 좋아하는 게 현실이다. 고로 사람들에게 남는 선택지항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성찰적 좌파'니, '성찰적 우파'니 하는 단어들은 완전히 이상적 언명일  뿐, 현실이 될 수가 없다. 좌파를 까면 바로 우파가 되고, 우파가 좌파의 일부를 좋아하면 '너 좌파지?'하는 세상에서, 한윤형 같은 사람에게 '너 민증 까봐, 너 사상-증 까봐'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 

민중은 곧 희망이며, 시민사회가 한국을 이 정도까지 발전시켰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소?'라고 묻고 싶다.  '단일표제주의'가 역사를 뒤덮는다면, 역사학 같은 것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국사 교과서만 백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 역사 학습이라면, 우리나라 사학과들 다 문닫아야 한다. 나는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이지만, 90년대를 기계적으로 '문화의 시대'라고 아예 깔아놓고 시작하는 게 싫다. 아니 어느 그 시대 '문화의 시대'가 아닌 적이 있었나. 문제는 이처럼 아예 전제된 상황을 전제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레이몽 부동이 푸코나 맑스를 '의혹의 철학자'라고 가리킨 것처럼, 우리 또한 역사를 통해 그런 '의심의 권리'들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그런 의심의 권리를 행사한 한 청년의 역사비평서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매일' 국가나 민족을 구구절절하게 인식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민족과 국가는, '사건으로서의' 민족, '사태로서의 국가'로 존재한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조금 더 나아가보자면, 우리는 '민족 없는 민족주의' '국가 없는 국가주의'를 외치면서, 민족주의나 파시즘 같은 단어들을 쉽게 남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그 남발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는 수고롭지만 즉각의 정념 대신, 애쓰는 논리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지는 어렵지 않다. 다만 어려운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일테다. '아이 쒸, 내 친구가 뉴라이트는 무조건 나쁘다고 했는데? 그 생각 하나가 사실 이 책이 일갈하려는 논쟁의 지점이다. 쉽게 요약해서 한윤형은 "야. 좀 까려면 제대로 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까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때 [백분토론]을 떠올린다. 그래, 왼쪽에 있는 너는 나쁜 놈, 오른쪽에 있는 너는  좋은 놈. 서로 영역 침범하지 마! 그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 부르디외가 말한 '신속한 두뇌'들이 달변으로 무차별 사살하는 것이 '제대로 까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 책이 요구하는 '제대로 까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것은 얻는 것, 동의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동의를 하는 것이다. 근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386 '아해'들이, '노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씩씩거리면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그럴 것이다. "야, 좀 봐줘. 안 그래도 요즘 대안도 없고, 서글픈데, 너까지 이러냐~. 좀 쉬어가면서 해라. 좀 약하게 해" 참 유아같은 발상이지만, 사실 이런 감정많지 않은가. 그러면서 '성찰하는 진보'니 하는 거 정말 우습다. 이 책은 그런 지점에서 말한다. "우리 좀 잘합시다. 남탓하지 말구요. 우리 좀 돌아보고,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자구요. 실력 좀 키우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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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을 결국 결론으로 내놓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과정이 좀 그렇네? 나는 이것을 '해피엔딩 콤플렉스'라고 부르고 싶다. 사람들은 '해피엔딩'으로 결국 가는거지?라고 먼저 묻고 나서야 한국이라는 , 한국정치라는 영화를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과정을 쭉 지켜보지도 않는 자들은 '낌새' 하나 가지고, '에이 이 영화 망했네. 뭐 이딴 식으로 영화 만들었냐"며 힐난한다. 진보가 말하는 정의로운 역사관이 존재한다면, 그 정의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로움에 딱딱 맞는 '순결한 정의'의 근거들로만 채워져야 한다고 믿는 것. 사람들은 '에이 설마?'하며, 한국 사회의 지적 감수성 레벨 수준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못해 강력하다. 순결한 정의로움이라는 표현도 우습지만, 진보나 보수나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의로움을 떠받드는 근거들이 상대방의 견해를 일정 부분 용인하면, '오염'된 것처럼 인식하는 태도.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태도들을 비판하는 실천서라고 할 수 있다.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해, 한윤형은 수고로움의 폭을 넓혀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이들의 견해를 참조하고 비판하여, 그 비판의 지점을 토대로 뉴라이트를 비판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역사, 민족, 이성, 정념, 논리라는 키워드를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좀 쌩뚱맞고 너무  큰 질문일지라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민족과 정념'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두 요인을 파고 들어가, 이성의 문체로 바라보려는 '논리의 시선'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이 부분은 여전히 숙제다. 그리고 그 숙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전쟁 한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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