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원신문에서 우석훈 선생이 오늘날의 20대를 진단하는 기고문을 올렸다. 글의 말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석훈 선생이 그동한 줄곧 주장해왔던 이야기인지라, 별 낯설음은 없었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상징자본'이 가장 많은 20대 대학원생들에게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걸어본다는 언급을 보고, 나는 그가 한국의 20대 대학원생들에게 행여 너무 큰 기대를 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우석훈 선생도,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들이 교수들의 '시다바리'로 살아가는 그 인생을 모를리 없는 바, 그 부분을 얕게라도 지적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문제는 사실 오늘날 대학원을 둘러싼 존재의 여건들보다 '인식의 전환'이 얼마만큼 대학원생들 스스로에게 있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할 것 같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에게 '지식인'이라는 명명이 참 친숙해 보였지만, 난 오늘날 대학원생들에게 이러한 표현을 붙여주고 싶다. '기능인'. bk 프로젝트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논문을 공장 기계돌리듯이 '찍어내는'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좋은 사유가 나올 수 있을까. 사회를 진단하고, 자신의 학문 영역 속에 뿌리 박은 고착된 불편함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긴 할까.  문제는 대학원생들 스스로도 '성과주의'와 학문의 장 안에서 내가 어떤 모델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지향점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나머지, 자신을 둘러싼 학문적 환경의 다양한 문제와 제도의 생성에 대한 의식적 성찰을 거의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모든 20대 동료 연구자들이 자신의 '교육사'를 써보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교에 들어와서 대학원 사회에 진입하기까지, 내가 반드시 청산해고 가야했던 것은 없었을까를 묻길 바란다. 이른바 오늘날 20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연장된 폐해'를 거부하지 못하고,계속 가져간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한 단계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어떤 습성의 존재들이 우리를 계속 '순응하는 아이'들로 만들어버린다. 나이는 점점 먹지만, '어린이' 그 상태로 머물게 하는 사회적 구조들. 머리에  든 이론의 조각들은  많지만, 그것을 사회 현실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대학원생들이라면? 죄송하게도 나는 과감하게 말하건대, 이 질문에는 어느 정도 우리나라 대학원생들에 대한 어두운 기운이 깔려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갔다고 시인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먹구름이 빨리 사라지길 그 누구보다 희망하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오늘날 20대를 둘러싼 진단의 지형, '누구누구탓의 정치'로 돌린다면, 그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20대들은 새로운 지식들을 접속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난 듯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론과 정보들을 '알고 있다고' 나타낼 수 있는 능력도 좀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지식의 정치학'의 부재다. 이것은 지식을 현실 정치와의 교전을 향한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지식을 늘 움직여줘야 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푸코의 통치성을 알았다고,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알았다고,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알았다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가 의심할 수 없다고 여기는 지식들에 대한 의혹을 나타내야 한다. 그 다음, 그런 의혹의 태도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성찰할 수 있고, 부당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이란 곳은 단지 비싼 돈을 주고, 자신의 몸에 '지식 액세서리'를 둘렀다고 자랑하는 패션쇼 공간일 뿐일게다.  

독설이 이어져서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고, 내 주위 대학원 동료들도 그렇고 이런 지식의 신상품들을 소유했다고, 지식의 액세서리를 몸에 둘렀다고 으시대는 '패션모델'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지식 자체를 앎에서 그치고, 지식 자체를 내 안에 소유했다고 느끼는 데서 그치는 것을 너무나 잘 하는 오늘날 20대들의 현실 속에서, 우석훈 선생의 <88만원세대>또한, 기업의 면접 질문 중 하나로 들어가버리는 이 상황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정말 '정답'처럼 술술 외우며, 사유는 커녕, 성공하기 위한 진입의 기능적 도구로 이용해버리는 태도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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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대의 역사 서문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성철 옮김 / 책세상 / 2002년 3월
절판


개별적인 것, 특히 이른바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입증 과정에서 언급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사실은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원전들은, 우리가 그에 준하여 관찰하는 한, 진부한 지식을 위한 단순한 연구에서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될 것이다.-17~18쪽

문화사는 과거 인류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존재했고, 원했고, 생각했고, 할 수 있었는지 말해준다. 문화사는 이와 함께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 변하지 않는 것이 순간적인 것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하게 보이고, 하나의 특성이 하나의 행위보다 더 위대하고 교훈적으로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행위들은 해당하는 내적 능력의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고, 내적 능력이야말로 그 행위들을 언제나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19쪽

이 모든 것을 소망하는 것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임무는, 가능한 한 우매한 기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역사의 발전을 인식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말한 대로 혁명의 시대는 우리가 이와 같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의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자신이 수많은 파도 가운데 한 물결에 의해 휩쓸려 다니는 다소 부서지기 쉬운 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0쪽

빈곤과 두뇌 형성에서의 신체적인 퇴화는 정치적 평등과 심한 대립 관계에 있다. 빈곤은 비록 모든 문명 단계의 한 구성 요소이지만, 이전에는 빈곤이 집중적이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전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빈곤이 떠들썩해졌고, 빈곤은 더 이상 빈곤이 아니길 원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영원한 수정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104쪽

우리는 차라리 운명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고 싶다. 매 시대에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불가피한 것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불가피한 것에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고 만일 생존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들이 우리를 덮친다면, 생존에 대한 명쾌하고 분명한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끝으로 개개인의 삶을 위해, 즉 그 개인이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고 세계를 고찰할 때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햇빛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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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저분한 연구실을 때로는 아무말 없이, 때로는 한 숨과 함께 청소해주시던 할머니께서 내가 있는 대학원을 떠난지 한 달이 지났다. 할머니께서 떠난 이유는 단 하나, '고령'이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 나의 손을 잡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할 때, 나는 웃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방패막으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변호'를 가장한, 이럴 때면 등장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무기력함과의 조우다. 나는 대학원 게시판에 할머니가 왜 일을 그만두셔야 하는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글을 올리려다가, 행여 글 속의 선의가 할머니를 괴롭힐 수도 있을 것 같아, 교수님에게 메일을 드렸다. 교수님이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선의를 늘 무시하지 않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는 나의 스승의 조그만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그 배려를 통해 할머니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 많은 연세임에도, 꿋꿋하고 명랑하게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고, 용역 단체의 이유모를 압박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12시는 점심 시간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구수한 음식 냄새가 화장실 옆 작은 방에서 나올 때면, 나는 할머니께서 이제 식사를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연구실로 향했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 할머니가 계시던 좁은 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할머니의 송별회를 열어주고 있었다. 짭쪼름한 음식들과 시골 기운이 가득 풍기는 상다리 모양의 밥상, 그리고 할머니들의 수다. 그것은 이색적인 풍경이 아닌, 뭔가 보존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떠났다. 밤을 새고 나면 연구실을 맴도는 '아저씨'냄새를 뚫고, 주섬주섬 쓰레기통을 비우시는 할머니, '귀차니즘'으로 인해 분리수거가 되지 않아 폭식 상태가 된 대학원 쓰레기통을 희미한 신음 소리로 새벽부터 치우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유난히 '할머니'에게 약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쌀쌀한 풍경 속에서 쌩뚱맞게 철 지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온갖 언어들이 횡행하는 이 대학원 건물 속에서, 그리 큰 재미는 없다. 큰 감동도 없다. 상당히 심심하고, 어찌보면 유약한 기운마저 흐르는 이 공간 속에서, 가장 강건한 사람은 나도 내 동료 연구자도 교수들도 아닌 할머니, 그 할머니의 지속된 배려였다. 할머니, 잘 계시죠? 이 인사는 할머니의 온기를 박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성의 온기를 체험하겠다고 온 나의 결심을 다시 매만지는 고백 그 이상의 작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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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내가 작다는 걸 많이 느끼게 되는 시절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2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으시다뇨.^^;; 비가 오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대림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와 같은 소설을 읽으면, '책'에 대한 형형색색의 애정이 느껴진다. 베르나르의 <여행의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은 책에 대한 애정이 무엇인지를 유려한 문체로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그 잔상이 오래 간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면, 책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책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 보게 된다.  

이 책의 작가인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애서가의 수준을 넘어 수집가의 일반적 속성을 가진 것 같다. 물론 이 얇은 소설에서 그것을 진득하게 경험하기란 어렵지만, 작가는 책을 사랑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표현하려고, 그리고 나누려고 시도한다. 그 표현과 공유의 순간에 책 속 문자의 힘이 매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책과 책을 이어주는, 그리고 그 책을 집어들고 있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로 인식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인간의 입장으로 책을 바라보지 않는다. '책'의 입장을 묻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책'이 된다. 책의 물질성이 확보되면서, 그 물질성으로 인해 말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책의 행위는 단순한 의인화의 효과를 넘어, 책을 매만지고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묻는다.  

책에 대한 입장에서, 책의 입장으로. 우리는 책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이 정말 책과 함께 나누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책의 입장을 묻고, 또 묻는 것은 전혀 미련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행동을 너무나 간과해 왔다. 그렇다면 책의 입장을 묻는다는 것은 어느 것일까. 자신이 가는 서점, 도서관, 카페에서 어느새 매만지고 있는 책의 형태를 살피기, 그리고 책 속 구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을 관찰하기,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방치되어 있는 내 방 속 책들의 존재를 자주 들여다보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책'은 '책을 다루는 어느 책'처럼,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에 관심을 가진다. 안드레아는 이 상황 속에서, 그리고 안드레아 뿐만 아니라, 안드레아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겨둔다.   

책의 입장이 나타나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책의 목소리를 통해, 책을 둘러싼 비평도 시도한다. 책의 불안전한 존재로 인해, 그 존재를 에두르는 해석이 책의 균열을 혹은 책의 평화를 가져다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직' 책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인간은 여전히 '읽는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책의 존재는 그래서 잊혀질 수 없고, 지나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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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국가'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를 소환해야 할 것 같다. 국가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으로 혹은 '존재'로 여기게 한다. 국가가 '인식'이라면, 그것은 국가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는 심리적 위안 혹은 불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존재'라면, 그것은 사실 '인식'과 동떨어질 수 없는 범위 가운데, '나'가 처한 현실의 조각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국가'를 '깨닫는'것을 말한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쥬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차 스피박의 대담은 국가를 인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문화학적으로 소환하면서, 국가를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의 '생각'으로 다시 이야기해볼 것을 간,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쥬디스 버틀러는 '언어'를 통해 국가를 재정의한다. state는 국가라는 뜻과, 상태라는 뜻을 둘 다 갖고 있는데, 버틀러는 이 두 뜻을 같이 가지고 가면서, 국가를 '상태'로 규정한다. 국가가 '상태'일 때, 국가는 일정한 모습을 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건강한가? 국가는 아픈가? 국가는 씩씩한가? 국가는 우울한가?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면서, 사실 국가의 상태를 목도하고, 점검하고 있다. 국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그러나, 주권과 자유라는 가치 속에서 그것의 색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한다. 우리는 오늘날 주권과 주권의 충돌을 통해 더 나은 주권이 그것보다 더 낫지 않다고 하는 주권들을 말살하는 장면들을 자주 체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질문할 것이다. 어는 것이 더 '나은' 주권인가? 우리는 이것을 국가가 할 일이라는 이유로, 혹은 일상의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인해, 그냥 거기에 맡겨놓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가를 향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재미있는 구경거리' 혹은 '내 알 바 아니요'주의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자신만큼은 우월한 주권의 편에 있다는 큰 오만함과 착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버틀러와 스피박은 도전적으로 묻는다. 버틀러와 스피박은 한나 아렌트와 조르조 아감벤 등이 주장한 정치철학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면서, 과연 이 시대에 민족- 국가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따져본다.  

다 알다시피, 주권이라는 것이 성립되면서, 그 주권이 모든 주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계의 차원에서 더욱 심각하다. 전쟁을 통해, 평화와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소유하던 풍경은 어느새 권력의 우열 관계 속에서 빼앗기게 되었다.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점점 또 다른 주권자들의 목소리에 의해 타자화되고, 그 타자화의 효과는 결국 인간을 둘러싼 '평등 의식'이라는 것을 '텍스트' 이상의 가치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배운' 평등으로서 평등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자위하지만, 그러한 의식이 배움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게 하진 않는다. 배운 평등이 아닌, '생각하는 '평등이 필요한 이 시기에, 이 책이 논의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 공간을 마련하는 학문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식시장에서 이런 책들이 나올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이 이론의 실천성을 박제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론을 다루고 있는 학계 사람들이라는 점이 안타까운 아이러니다. 자신의 지성을 내세워,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한 뒤, 그것의 소비를 일종의 자기 자랑으로 내세우는 지식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실상 '성실한'것이 아니라, 얄팍한 이론 수입에 능한 지식상인의 '재주'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또 다른 '성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길 원한다. 그 성실성은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 속 장면들과의 끊임없는 부딪힘이다. 이 책에 나온 해외 불법 이주자들의 저항은 사실 '해외토픽'이라는 소소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 흥미거리로서의 인식을 뛰어 넘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삶의 풍경에 스며들어, '스며듦의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였을때, 버틀러가 지적한 '상태'로서의 국가는 상당히 흥미롭고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우리가 국가를 '상태'로 생각했을 때, 국가가 갖고 있는 모순들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건강성을 보장하는 이 정부의 획일화된 언어는, 결국 그 언어의 힘 속에서 또 다른 건강하지 않음을 가려버린다. 그러한 건강하지 않음 속에서 '국민'들은 삶의 공기가 탁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국가의 '자세'는 그것에 저항하는 국민의 '행위'를 너무나도 안이하게 '반(反)'이라는 언어로 규정해버린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러한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권리를 그냥 놓아두는 것 자체만으로,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권리 자체를 여전히 잘 지키고 있다는 대중의 인식이다. 권리라는 것은 행사함으로써, 그 모순과 발전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권리'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권리를 위한 권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본 책의 메시지는 그래서 소중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과 주권이 충돌하고, 이 충돌의 과정이 결국 한 국가 안의 사람들 간의 이질성을 자연스럽게 생산한다. 내가 갖고 있는 주권은 더 나은 주권이며, 더 나은 주권은 '당신'이 가진 주권은 별로 생각할 가치가 없으며, 이로써 당신이 삶을 살 '자격'마저 어쩔 수 없는 강함과 약함의 운명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의 굴레에 빠진다.  

이 운명의 갈등은 나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통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통로가 더욱 견실하려면, 우리는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이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고수하려는 사람, 심지어 만드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격'이 있다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본의 힘과 결부되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것처럼,,결국 인간이 인간의 평화를 위해 만들어 놓았던 규칙,,질서..법의 생산.,.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증가가..인간의 행위 자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를 어찌할 것인가. 정치를, 경제를 욕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 안이한 문제 해결 의식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준엄한 자기 비판 의식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탓'의 정치를 일상 속에서 순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으로만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탓'의 정치는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또 다른 이들의 생각을, 문제의식을 '구경거리'로만 간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를 '상태'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탓'으로 돌려, 국가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인 '나'의 상태와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얼마나 국가와 개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국가가 인간에게, 인간이 국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을지를 복기, 분석, 예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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