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습관 혹은 공부하는 습관  하나. 자취를 한 지, 거의 13년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습관이 있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집에서 공부할 때, 모든 미디어를 다 틀어놓고 하는 편이다. 일단 컴퓨터를 켜고, 벅스플레이어에서 좀 마음이 안정되는 템포의 R&B를 틀어놓는다. 그 다음에 텔레비전을 틀어서,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채널로 맞춰 놓는다. 눈은 페이퍼에 가 있다. 잘 깎아놓은 2B연필로, 중요한 문장에 별 표시를 한다. 그러면서, 귀로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중계를 '본다'. 텔레비전이 '라디오'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해, 못 챙긴 사회 이슈들을 점검해본다. 웹페이지를 클릭할 때마다, 나는 컴퓨터 특유의 탈칵 소리가 들리면, 더 마음이 안정 된다.  이런 생활이 구체적으로 자리잡은 건, 대학교 일 학년 때부터 였는데, 습관이 되니, 오히려 소음이 없으면 공부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학우가 있었는데, 그 학우의 형과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다. 도착지가 먼 거리라, 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소리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더랬다. 지금 기억으론 정확히 무슨 과인지 모르겠다. 다만, 아직도 기억하는 건, 자신은 음악과 소음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악도 멜로디, 리듬 이렇게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는 과학적 기준에 부합하는 그런 특정한 소음으로 여기고, 습관적으로 분석하게 되어버린단다. 놀라운 건, 그 분은 그래서 자신에게 고요함은 자신의 연구거리가 줄어드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다.  

나도 가끔 스스로를 연구거리로 삼고, 실험할 때가 있다. 하루는 정말 조용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지, 마음 먹고 연필을 잡았는데, 실패했다. 손이 나도 모르게 스포츠 채널로 가고, 인터넷 벅스플레이어로 갔다. 어쩔 때는 아예 신나는 댄스 가요를 틀어놓고, 텔레비전도 출연진들의 웃음 소리가 큰 예능 프로그램(특히, 강호동이 출연하는 프로)을 틀어놓고, 공부를 한 적이 있더랬다. 또 이건 너무 소리가 컸는지, 공부가 되지 않았다.  

요즘 가장 공부가 잘 되는 조건은, 인터넷으로 장한나 베스트 콜렉션을 틀어 놓고, 텔레비전엔 CNN이나 전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스포츠만을 중계하는 스타 스포츠로 채널을 골라 놓은 때이다. 이제 이런 소음이 방해꾼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떠는 수다같다.  언젠가 메탈리카의 battery를 무한 반복 듣기로 해놓고, 무릎팍도사나 강심장,스타킹만 나오는 채널이 있어, 그것만 골라놓고 공부를 내가 계속할 수 있다면, 나는 나만의 '엠시스퀘어'회사를 차릴 방안을 강구할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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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1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고등학교 때 워크맨을 엠씨스퀘어라고 불렀어요. 소음 차단용. 음악 소리는 거슬리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그 원인을 스스로 발견하기를.

저는 초 이기적 인간이어서요, 제가 만든 소음은 하나도 안거슬려요. 아무리 커도. 그런데 다른 사람이 만드는 소음은 정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음악을 트는 편이 더 집중이 잘 되는 거죠. 참, 이기적인 인간이죠. 꼭 소음 뿐만 아니고요, 방도, 제가 어질른 건 하나도 안거슬리는데, 남이 뭐 조금만 어질러놓으면 그게 또 그렇게 거슬려요. 참,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말이죠. 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2:46   좋아요 0 | URL
웬디님, 저랑 비슷하시네요.^^;;

L.SHIN 2010-05-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당한 소음은 오히려 집중력에 도움이 될 때가 있죠.
다른 소리입니다만,
저는..아주 시끄러운 하드/메탈 락 음악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잘도 잔답니다.
그것도 일종의 '익숙함'과 '반복성'에서 오는 요상한 습관이 된 거 같아요(웃음)

얼그레이효과 2010-05-14 00:06   좋아요 0 | URL
shin님, 오우 메탈 음악에 주무신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밤에 혼자 잘 때,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자는 버릇은 있는 것 같네요. 일종의 알람 기능으로 쓰기도 한답니다. 눈 뜨면 뉴스 이런 식으로. (웃음)

Alicia 2010-05-1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은소리에 민감해요. 특히 전자제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음을 싫어해요.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문자찍는 소리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이런거요.
그런데 밖에서 농구하면서 소리지르는 거, 음대 성악과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이런건 괜찮아요.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5 00:10   좋아요 0 | URL
저랑 어떤 면에선 '소리 취향'이 비슷하신듯^^
 





 

 

 

 

 

 

 

 

 

 

 

sk 야구 경기를 보면, 박정권 타석이 될 때마다, 늘 이택광 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선생님, 죄송합니다.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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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5-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저의 간질간질한 기시감의 정체를 확실히 까발려주셨군요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2 01:13   좋아요 0 | URL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군요.^^;;
 



몇 년 전,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읽었을 때, 나는 어떤 흉내를 내고 싶었다. 이름하여,  

 

'세상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그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생각나는대로 글쓰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코의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조금 흉내를 내볼까 한다.  

 

세상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뉴스 검색을 해서 알 수 있는 문제를, 커뮤니티 유저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을 싫어한다.(오늘 맨유 대 첼시 경기 몇 시에요? 같은.이런 사람들 대부분, 정말 그 문제를 모르기보다는, 그냥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란, 내 못된 심보가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글에 덧글로, "그냥 찾아보시면 될 것을, 뭘 이런 질문을 올립니까?"라고 까칠한 덧글을 다는 사람도 싫어한다.(질문한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는 그 태도가 싫기 때문이다.)나는 그 질문에 답글이 안 달릴 때, 결국 자신의 글을 지워버리는 사람도 싫어한다.(일단 올렸으면 친절하게 누군가 답해줄 때까지 기다려도 될 텐데, 현대인 특유의 소심함을 보는 것 같아서 싫다.)   

블로그에서 

인기지수가 반영되어 있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나서,방문자 수와 나머지 포인트들을 지웠다 살렸다 하는 사람이 싫다. 

(그래서 나는 한때 내가 싫다. 혹은 순수한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의도의 불순함을 파헤쳐보려고 괜한 프로이드 놀이를 하는 내가 더욱 싫다.)

카페에서

나는 카페에서 뻔히 자리가 몇 군데 비었는데도, 사람들 눈치 보면서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 여자가 싫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갈수록 많이 보게 되는 그 진부한 풍경도 싫다. 더군다나 그 진부한 풍경의 주인공이 가끔 나일때는 더욱 싫다. 나는 카페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누군가가 전화했을 때, "음, 나 일중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이건 예전에 내가 적은 에세이에 그 뜻이 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의 심리를 파헤쳐보고, 뒷담화하는 내가 더 싫을 때가 많다. 

 대학원에서 

나는 오랜만에 간 학교 연구실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 내게 '졸업논문 잘 되가'라는 그 인사를 하는 동료가 제일 싫다. 대학원에서 그런 가식적인 우월함과 안정감을 확보하게 되는 인사가 '졸업논문 잘 되가'라는 것, 그리고 그 인사에 전염된 사람들은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게 더 싫다.  

- 수업 시간에 

수업 시간에 텍스트는 꼼꼼히 읽었다는 성실함을 확인받기 전에, 그 텍스트에 대한 집중적인 탐독은 접어두고, 찜찔방 대화로 바로 돌입하는 친구들의 태도가 싫다. 그들은 아감벤도 랑시에르도 하루면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불성실한 탐독 태도를, 성실함과 우월감으로 바꾸려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것을 간파한 교수의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엄청난 고함과 침묵을 유도하는 무반응이 아니라, 겸연쩍은 미소, 활짝 핀 미소라는 데서 그 무서움을 빛을 발한다. 하지만, 대부분 어리석은 제자들은 그 미소를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 미소의 뜻을 간파만 할 뿐, 다음에 더 날을 세운 채, 이론적 습득의 성실함 대신 자신의 지적 과시를 위한 연장을 다듬는다.  

# 다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학교 졸업 예정자인데, 자신의 높은 학점을 자랑하며, 스펙을 자랑하다가, 결국 이런 자랑 뒤에, 앞으로 교수가 되고 싶은데, 어느 대학원이 전도유망할까요라고 인터넷 커뮤니티 유저들에게 물어보는 멍청이가 싫다. (이런 것 보면, 공부머리와 인생머리는 따로 있는 듯 해서, 공부를 모욕하는 사람인 것 같아 더욱 싫다.)

- 지하철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 젊은 놈들이 어디 이 자리를 앉냐며 큰 소리로 꾸짖는 노인들을 다 싫어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관찰하며 책 읽기 좋아하는 내 집중된 태도를 방해하기 일쑤라 더 싫다. 다시 인터넷 커뮤니티 문제로 돌아가서, 그런 껄끄러운 문제를 올리면, "너희도 늙어봐라"는 투로 훈계하려는 '젊은 영감'들이 더 싫다. 그렇게 모범적인 친구들이 대낮에 마음에 드는 처자의 싸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한 번 가져와봤는데, 이 얼굴 평가해주세요?라고 그런 장면을 발견할 때, '젊은 영감'들에 대한 나의 증오는 배로 증가하는 것이 당연한 듯 하다.  

- 연애에 관하여

연애할 때, 왜 이리 고기를 못굽냐며 나를 타박하던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의 첫 말이 "너 외아들이지?'일 때, 더욱 싫다.  몇 달을 주기로 연애 대상이 바뀌는 건 좋은데, 싸이월드에 상대방 사진을 듬뿍 올리는 남/여자를 싫어한다 투데이 이즈에 흐렸다가 맑았다가가 너무 자주 바뀌고, 그것이 연애 주기와 겹칠 때 더욱 싫어한다. 결정적으로 싸이월드 일촌공개도 아닌 전체공개로, 현재 사귀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발산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 극장에서 

영화볼 때, 머리가 큰 것은 용서가 되는 데, 내 뒤에서 계속 자신의 발 힘을 자랑해보려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다. 차라리 그들이 발가락양말을 신고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건 용서가 될 정도로, 그 쿵쿵거리는 묵직한 소리는 어느새 노트 긁는 소리와 함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되었다.  

- 연예인에게 

열애설 터지면, 옛날과 다르다고, 당당모드를 밝히며, 애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그 애정을 안주 삼아 오락프로그램에 나와 다 밝히는 연예인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연예인에 대한 불만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만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 야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케이리그 서울 구장에 몇 만명 왔는데, 그 구장 내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료 입장이라며, 축구 관중 많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싫다. 

- 축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국에서 야구가 더 인기가 많아요? 축구가 더 인기가 많아요?라고 괜한 분란글 올리는 축구팬이 싫다. 

- 소설을 오랜만에 읽는다는 인문사회과학 탐독자들에게 

오랜만에 소설을 몰아서 읽는데, 소설 재미가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너무 과장된 감탄을 하는 "저는 사회과학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도장인사 하며, 그 재미를 늘어놓는 사람이 싫다. 소설을 모처럼 읽었는데, "요즘 한국 소설, 너무 밥맛이야.."라고 하는 사람도 싫다. 

 

-휴대폰 

휴대폰에 웃음 (^^)이모티콘 안 들어가 있다고,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을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웃음 표시 좀 넣으라고 구박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그리고 말줄임표..(..)만 넣으면, 이상한 사람 기운 빠진 사람 취급하는 것도 싫어한다. 단체 문자 보내지 말라고, 협박 넣는 사람도 싫어한다. 가장 싫은 협박은,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 텔레비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상의 흔적들이 남녀탐구생활에 나오거나, 달인에 나올 때 더 싫다.  (이 프로그램들은 일상의 발견을 점점 진부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개그로 만든다. 사람들은 공감과 진부함 사이에에서 웃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웃음의 기간은 그 프로그램들의 폐지를 유도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즉 그 프로그램들은 발견의 진부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나에게 

결국 이 싫어함의 대상에 내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을 때가 가장 싫다. 쓰고 나니, 안 풀리는 논문이나 더 붙잡고 있을 걸, 머리 푼다는 핑계로 이 잡글에 열중한 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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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달기가 무서버서...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47   좋아요 0 | URL
재미로 써 본 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5-11 23:4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냥 소심하게 글쓰기로 풀죠 뭐..ㅡ.,ㅡ ;;

웽스북스 2010-05-1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몇개 찔리는 게 있는데요. 저도 검색하면 될 걸, 커뮤니티 유저는 활동중인 커뮤니티가 없어서 안물어보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잘 물어요. 그게, 더 간편해서...(예..죄송합니다...)

그리고, 축구는 안좋아하지만, 미술관에 저는 돈내고 갔는데, 무료티켓 들고온 사람들이 절반도 넘어서 1시간 정도 기다려야 됐을 때 짜증냈었는데...(그래도 미술관은 좀 다르...지...않을까요? ㅎㅎ) 하지만 저도 공짜 티켓이 생기면 좋아해요. (하하하. 뭥미 이런...;;;;;)

아. 그러고보니 다음에는, 짜증글에 저는 이런데 괜찮아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싫다, 라고 쓰시는 건 아니겠죠? (어라. 갑자기 두려워진다. 하지만 낙장불입. 확인 누릅니다. ㅋㅋㅋ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2 09:46   좋아요 0 | URL
이런 리플 환영입니다.^^ (밤새고. 글을 확인해서. 글이 짧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ㅡ.ㅜ)

saint236 2010-05-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미나 교안을 만들기 싫어서 쉰다는 이유로 알라딘 서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일을 뒤로 미루는 내가 싫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11   좋아요 0 | URL
^^; 아, 그리고 네. 그 차(tea)의 의미가 맞습니다.^^ 평소에 얼그레이를 좋아해서요.
 


종말론자와 순응론자. 이 거친 표현은 사실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이란 책에서 선보인, 그 당시로는 '논란'이 된 표현이다. 그는 대중문화에 관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퇴행하는 부르주아지'의 시선을 갖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퇴행하는 부르주아지는 도덕에 관해 엄격하며, '포르노크라시'에 관해서 청소년들을 '쯧쯧거리는 태도'로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그런 태도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 분석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에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논하면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고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세상 밖의 일로 치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논한다는 것은, 바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문화의 '존폐'를 이야기하는 것이 비생산적임을 지적하며, 차라리 더 유익한 것은, 이러한 '매스컬쳐'가 주는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찾아보는 게 더 유익하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대중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지금, 에코의 이 말은 조금은 진부한 훈수일 수 있으나, 에코가 이러한 언급을 한 시기를 점쳐보면, 에코의 이 말은 일종의 '예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964년도 였고, 한국의 경우 196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들을 조금씩 공부한 사람들이 '대중사회 논쟁'이라는 테마를 갖고, 한국은 과연 대중사회인가? 한국에 대중문화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학 내 토론이 있기도 한 상황이었다.(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다면, 한국 언론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 중 하나인 ,  초창기 대중문화 이론에 대한 학문적 성격을 심어보려 노력한, '강현두 선생'의 저작들을 챙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읽어보면 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그가 집필하고 번역한 책의 서문에 언급된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 당시  한국 사회 내 대중문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참고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다만, 이 토론에서 대부분 넘쳐나는 것은, 결국 도덕과 결부된 / 종속된 문화론이었다. 국가라는 요인 또한 동떨어질 수 없었다. 또, 주로 외국에서 벌어지는 문화 논쟁에 관한 요약을 '이식'한 데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소위 한국의 대중문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하는 시기 구분이 있는데, 대부분 지금처럼 편하게 대중문화를 인식하고, 문화라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때를 1990년대로 잡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 구분의 인식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나는 참고로 이런 시기 구분을 깨보려는 연구를 하는 중이다.) 

다들 알겠지만, 90년대 이전, 한국의 1980년대만 해도, 특히 신문에서는 에코나 부르디외가 싫어하는 도덕적 엄격주의자들의 문화 비평이 많았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문화를 '도덕'과 일치시키며, 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인상 비평 류의 머무른 훈계조로 문화를 향유하려는 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데 골몰했다. 

어찌보면, 이런 실천적 비평은 문화연구자 그래엄 터너가 명명한 '문화와 문명'류의 스크루티니학파, 리비스와 그의 아류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에코가 유사 맑스주의가 불렀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공명하는 것이 있었다. 에코는 이들의 공명 지점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계몽의 변증법'과 '교양과 무질서'는 내가 보기엔 '실천 비평'이라는 테마 안에서 만나는데, 그 안에서 대중들은 늘 문화를 즐긴다는 것에 죄의식을 가져야 했다.(이들,즉 문화에 대한 엄격주의자들은 문화적 실천에 대한 훈수를 두고, 새로운 실천을 추구하거나, 혹은 그 실천을 폐기처분할 것을 제안하는데, 양 시선이 만나는 어떤 공유점이 있다는 것이 내가 공부하면서 정리한 생각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또한 '비판이론'이란 좋은 의의가 담긴 사유를 시도했지만, 그들이 리비스학파의 보수적 문화관과 함께 공유한 것은 문화를 즐기는 시민들에 대한 일종의 '선도부장'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죄의식 마케팅'?이라고 할까?)    

여기에 내가 더 심화시켜 보고 싶은 부분은 '선도부장론'이라고 부르고 싶은 지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선도부장론'은 문화와 도덕, 그리고 경제에 대한 측면을 아우른다. 그리고 이 아우름 속에 정치라는 중요한 비평의 목적이 있다. 에코가 말하는 '종말론적 지식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대표적으로 접할 수 있는 비평의 언어를 한국 사회에 투영해보면,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계속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에서 한 언급을 되짚어보면, 종말론적 지식인들의 수사에는 늘 '대중'이란 말이 깊은 분석의 지시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도덕적 감정을 앞세워 싸잡아 비난하기 위해 가장 쉬운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분석의 시각은 '문화산업'을 통해 대중의 수동성을 걱정한 아도르노 아저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종말론적 수사에 자리잡은 걱정의 언어들은, 좌파 특유의 레파토리로 오늘날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한국 사회의 진보는 성찰과 비난의 대상, 그 모호함 속에 갖혀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보는 망할 것이다라는 류의 지적들. 그래서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데만 골몰하는 지식인'들의 칼럼이 지난 촛불 이후에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고, 또 이것이 관성화되면서, 내겐 이런 물음이 남았다. (한윤형 군의 표현처럼),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누구는 대중이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버리라며, 대중의 우월함을 찬양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에게 그 우월함을 각성의 언어로 깨달아, 탁웡한 언어를 챙기라고 요구한다. 또 누구는 진보의 성찰성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성찰적 언어와 그 대안적 결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그동안 진보진영이 해 온 무능한 부분이 이러하다,저러하다라는 류의 것으로만 머문다. 나는 이러한 '비평의 흐름'들이 빈번해졌던 약 촛불 이후 지난 1년 반 간의 흐름을 보면서, 진보진영에게 대안이 없다라고 비난하는 대중의 모습과 지식인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느껴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보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묵시록적 발언으로 정작 현실 정치에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포장하여, 겁을 주고 나무라기에 바빴던 것은 아닐까. 

나는 강준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언급하듯이, 시민들에게 무조건 정치 현실을 비난하기에 바쁜 그 태도를 자제하라고 한 것을 하나의 비유로 삼고 싶다. 즉, 지식인들도, 진보 진영을 향해 성찰적 언어를 포장한 대안 없는 비판을 넘어서야 함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본 서영표 선생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 

진보진영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의 '정신차리라'는  언어 속에서, 그들은 지금의 정치 현실을 '뜨거운 냉소'로 일관하는 순응론자들에게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비평의 유효기간은 스크롤바를 다 내리면 끝이다.  (그런 점에서 시사인의 고종석 씨 최근 칼럼은 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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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5-1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권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보수 정당·진보 정당>, 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0 23:37   좋아요 0 | URL
네 빵가게님. 칼럼 내, 현상에 대한 지적은 저도 고종석씨 견해에 동의하는데, 제가 나름 '스포츠중계형'비평이라고 부르는, 그 태도가 제겐 좀 안일해보였거든요. 최근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글을 보면, 진보진영의 형편을 중계하기 바쁘거나, 노력을 아예 안 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식으로 싸잡아 보는 부분이 있어, 아쉬운 측면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누적되어 좀 이런 잡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5-11 01:00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했는데, 모 방송에서 지방선거 예측결과를 보도했나 봅니다. 당연히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했을테지요. 한나라당이 생각보다 압도적인 차이로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들었는데, 이 결과에 대해 제가  잘 가는 커뮤니티 몇몇을 돌아보니 많이 분개하시는 분들을 발견했습니다. "국민들이여,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겁니까"류의 말들. 하지만, 이런 분개를 넘어 좀 깊은 생각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뭐, 여론조사 저것 믿을 것 못되요. 나 이런 류 전화오면 확 끊어버리는 데 뭘, 이런 조사 어떻게 믿어 등의 그 과정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넘는 어떤 해석 과정을 넘어선 무엇 말이죠. 

여론조사가 주는 섹시함은 바로 그 숫자가 주는 불끈불끈한 매력적인 '능력 재현 기술'일 것입니다. 특히 '누가 되어야 한다'같은 당선의 입장에서 볼 때, 숫자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매력을 한 번 더 신봉하게 되는, 혹은 조명하게 되는 기능을 가집니다. 어쩌면 이런 기능은 수행적일 수 있습니다. 즉, 원래 이 사람의 힘이 대단해서 그 숫자의 힘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되는 차원도 있겠지만, 반면에, 그런 숫자의 힘을 신봉함으로써, 그 숫자가 그 사람의 힘을 '만들어주는' 역할도 무시 못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아마, '미디어 이벤트' 성격이 강하고, 갈수록 '이미지 정치'가 강조되는 현대 정치 세계에서, 더욱 더 강조될 것 같습니다. 

이런 여론조사가 갖는 수행성의 신화를 물리치기 위해서 저는 문화연구자 이엔 앙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둘 다 '숫자놀이의 신화'를 학술적으로 타파해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문화연구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인 이엔 앙은 <Living room wars>라는 유명한 아티클에서 '시청률 조사의 폭력'을 주장합니다. 즉, 갈수록 시장 논리의 개입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시청률'이라는 명목으로 '감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는 '시청률 조사 기기'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런 시청률 조사가 사람들의 시청 행위 구석구석을 분류화,명목화 시키면서, 시민들을 또 다른 '판옵티콘'안에 집어넣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주장엔 이런 논지가 숨어 있지요. 숫자의 힘을 의심하자. 그 숫자 안에 있는 자본주의의 간섭을 인식하자. 시장중심주의의 영향 안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소비하는 모습을 그렇게 분류해버리는 게, 과연 정당한가.   

 

또 하나의 장면. 이 장면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이란 책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부르디외는 여론조사라는 것은 결국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사람의 도덕적 의지가 설문조사 항에 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런 도덕적 의지가 일종의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 같은 '문항에 교묘하게 숨겨지면서, 그런 도덕적 의지를 정치적 응답으로 바꿔 낸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미디어에 관련된 유해도 조사를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유해도 조사의 신화 파괴는 생각보다 쉬운 게. 바로 부르디외가 언급한 그 대목이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건 우리네 일상에서 쉽게 하는 질문 놀이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내가 질문 낼 께. 하나 맞춰 봐"라고 시작하는. 만약 그 질문이 어떤 수치를 물어보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라면, 질문을 내는 사람은 이미 답을 내려놓고 그 답을 응답자에게 유도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미디어를 평소에 얼마나 자주 보시나요? 이 미디어는 우리나라에 나쁜 환경을 초래할까요?"라는 질문이 나오면, 거기서 우리는 어떤 응답을 하게 될까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으로 포장된 이 '도덕적 문항'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현실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학자의 견해를 통해, 우리는 여론조사가 갖는 숫자의 이면,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이 부분도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선거의 경우, '정치공학'이라는 표현이 부쩍 늘어났고, 선거 전략에 대한 이런저런 과학적 분석이 나타나면서, 더 복잡한 부분들이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이런 '여론조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끔 우리는 '만들어진 결과'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숫자를 곧이 곧대로 믿으라고 하는 그 '신봉의 강요'가 노리는 결과는, 현실에 대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욱 더 '열정적으로' 냉소주의를 가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라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시대는 보다 '열정적인 냉소'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의 맛을 끊지 못한 채, 이런저런 불합리한 정치적 관행의 덫에 빠져 나오길 싫어하는 정치인들은 이 '열정적인 냉소'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열정적인 냉소'. 우리는 이 뜨거움과 차가움이 섞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 잘 압니다. '미지근함'이지요. 내가 참여해도 결국 그 놈들이 될 텐데라는 그 미지근함 말이죠.  

'열정적인 냉소'를 무찌르기 위해선, 여론조사가 가진 '수행성'의 힘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바쁜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봄직한 일상 속 정치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때론, 그 숫자의 힘을 가지고 이런저런 조합으로 '정치 컨설턴트'를 자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숫자의 힘에 너무 큰 분개와 너무 큰 실망감, 너무 큰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연못에서 나오기. 일단 '저지르고 보기'라는 정치적 유희를 의심하기.   

이 의심이 지향하는 미래는, 이엔 앙이 말했던 '불확실성'입니다. 오히려 그 숫자가 주는 분명함에 대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적극적, 능동적 정치적 의지는 지금의 그 당연함을 전환시킬, 우리들의 소중한 정치적 의사 표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필사적인 '도전 의식'이 아닌가 싶어요. 여기서 제가 소망하는 '불확실성'은 우리의 의지를 꺾는 이 현실을 평하는 부정적 언어의 시장으로 진입하는 도구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정치적 열정의 복권을 말합니다.

하나,하나 해 가면 됩니다.  

이번 선거는 꼭 투표합시다! (결국 이  잡글의 한 줄 요약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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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7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8 03:3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