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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분토론에서 20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이런 테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은, 결국 누가 냉소와 회의를 섹시하게 표출할 수 있는가에 있다는 점이다.어떤 긍정과 어떤 부정이 다 쳐들어와서 가장 무기력한 상태가 된 20대 담론에서, 섹시한 냉소주의는 그나마 지금의 20대가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소심한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냉소주의의 승리를 통해 기성세대 패널은 20대의 그 어떤 발언이든, "맞다, 우리가 잘못했다"라는 반성의 발언으로 대응한 채, '착한 토론자'가 되기에 급급하다.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의 차원보다,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의 차원까지 넓게 퍼진 냉소는, 요구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불신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내가 보기에 오한숙희 선생이 이 토론에 참여하기 전에 20대 학생들에게 받았던 우려라는 "꼰대형 발언'의 진실은, 사실 "너 이렇게 개념없이 살지 말아라"라는 훈계의 측면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식상한 꼰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20대에 대한 시선을 이야기하자마자, 함께 자리에 참여한 20대에게 반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래, 사실 난 너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어. 너 세상살기 많이 힘들지?"라고 갑자기 자신의 견해 수정에 급급한 그 모습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게다. 

이번 백분토론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인간'이란 것 자체가 수사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홍대에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어느 여학생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늘 카운터 펀치 흉내를 보여준다는 느낌만을 주는 또 하나의 '수사'같아서 싫다)

가장 실망했던 장면은, 가장 꼰대와는 거리가 먼 생물적 나이를 가진  한 패널이 갖고 있는 '꼰대'스러운 현실 감각의 배설이었다.  '방황의 권리'를 가져보라는 신문과 잡지에 무수히 게재된 칼럼보다 더 늙고 주름많은 '방향을 생각해보라'는 대안 제시는,그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에 쓰고 싶었던 책 속 구절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홍윤기 선생이 계속 '솔직하게 말해보자'라고 하면서 던진 "이러다 망할꺼다"라는 말이 차라리 더 위로가 된다. 망하거나 죽은 자리에 꽃이 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내가 갖고 있는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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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8-0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던 일이지만, 손석희 이후 백분토론이 실망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일부러 챙겨서 보다가 요사인... 얼그레이님 글을 읽으니, 짐작이 갑니다만.

얼그레이효과 2010-08-01 23:14   좋아요 0 | URL
박미지님이 짐작하신 대로일겁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사회자의 맛이 없어졌습니다.
 

난 '큰 일'을 볼 때, 변을 확인하고 물을 내리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습관이 들어서, 어른이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그러다보니 하루에 몇 번은 똥의 모습을 본다. 문득 똥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밥의 미래는 다양하겠지만, 주로 '나'라는 놈을 통해 '똥'이 될 운명에 처한다. 내 입에 들어가기 전, 밥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원하는 존재지만, 정작 내 몸에 들어가면, '밥'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똥'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똥보다는 밥을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삶을 말풍선으로 그려본다면, 우리는 그 '삶'을 위해 말풍선 안에 밥을 채워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똥'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똥은 피하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똥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모욕이다. 많은 이들이 이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 밥상을 엎어버리다  - 더 불쌍한 똥이 되기 위해 

 

하지만 스스로를 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고다 요시이에의 만화 <자학의 시>를 보면서 밥과 똥의 생각을 더 깊이 해봤다. <자학의 시>에는 날마다 밥상을 엎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남편 이사오가 등장한다. 그는 소위 "밥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쓰레기도 제대로 못버리고, 아내 유키에가 어렵게 벌어온 돈을 경마와 빠진꼬,술에 다 써버리는 특기(?)만 있는 남자에게 남은 건, 남에게 받는 스트레스 집에선 받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뿐이다.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과 "똥보다 못한 놈"의 사이에서, '자학'이 남편 이사오와 아내 유키에에게 스며든다. 이사오의 '신경질 놀이'인 밥상 뒤엎기는 단순히 아내 이사오에게 부리는 신경질이라곤 볼 수 없다. 만화를 침착하게 보다 보면, 이사오는 결국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는가"를 매번 밥상을 뒤엎어버림으로써 묻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밥상을 뒤엎으면서 그는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이라는 걸 스스로 부인하고 만다. '자학'인 것이다. 자신이 하고 다니는 짓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 유키에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 대한 분노는 더 차갑다. 만약 아내 유키에가 이사오의 이런 짓에 분노로 맞대응했다면, 이 만화는 재미없는 홈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유키에는 밥상이 매번 뒤엎어져도 그것에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사오가 자신을 더욱 사랑해주길 원한다. 이웃들이 남편과 헤어지라고 해도, 또 그 어떤 험담을 해도, 유키에는 그것에 대해 "맞아요, 맞아,못살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비로움은 이사오의 자학 강도를 더 세게 보이도록 한다. 

밥상을 뒤엎으면서, 이사오는 밥을 먹을 권리를 포기한다. (물론 그 이후의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을 쌀 권리를 유보한다.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집에서라도 듣기 싫어서.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생존을 '짠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주위를 휘감는 건 "더 불쌍한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다. 





 

 

 

 

 

 

# 자학과 나르시시즘  - 맹정현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 

<자학의 시>를 통해 밥과 똥, 그리고 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어떤 텍스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서 맹정현 선생이 기고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이 그 주인공이다.   

 
맹정현 선생은 오늘날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기획 속에서 '나르시시즘'의 유형과 한국 사회의 '오늘'을 연결지어 이야기한다. '나르시시즘'은 자학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학'은 생존과 자살 가운데, 사는 자가 취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나르시시즘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자살은 할 수 없는(왠지 모르게 삶에 대한 그런 식의 종말은 스스로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듯한, 더 나아가 그런 식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주체) 그러나, 생존에 대해 그렇게 큰 확신도 없는 주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자학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부정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학에 중독되었을 때, 그것의 결말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학은 더 괴로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 삶에 살아가긴 하지만, 그 삶에 대하여 힘이 생기지 않는 현실, 그 체감. 자학의 종말은 무기력으로 치닫는다. <자학의 시>에서 남편 이사오는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 480,481쪽



- 아내 유키에가 보여주는 '복합적 나르시시즘'

 

아내 유키에는 매번 웃는 모습,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편과는 다른 '건강함'을 영위하는 듯한 캐릭터이지만, 사실 <자학의 시 2>에서 공개된 유키에의 과거를 보면, 그녀의 웃음 자체가 삶을 향한 건강함이라기보단, '자학'의 일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버지. 날마다 찾아오는 사채꾼에 겁이 나지만,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이 벌어온 돈을 도박과 음주에 써버린다. 학교에서 그녀는 왕따다. 가난이 만든 왕따. 그는 부끄러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들은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이타심은 매번 다른 친구들의 이용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더 다가왔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 했는데, 이제는 날 받아주겠지?"라는 식의 물음 섞인 행위를 시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행위는 답없이 혹은 차가운 상태의 답으로 다가온다. '인정'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 '비-인정'으로 되돌아올 때 나타나는 '마조히즘'의 나르시시즘'. 맹정현이 말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여기서 돌출된다. "이제 난 똥이 아니겠지?"라고 물었을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그래 이제 너는 똥이 아니야"라는 답을 듣길 바라는 상태. 그러나 정작 타자는 "넌 아직 똥이야"라고 말하면, 주체는 스스로를 예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 "나는 똥이야"라는 위치로. (물론 맹정현 선생이 본문에서 언급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한국의 민족성에 관한 언급에 밀착된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차이가 있다)

주체가 스스로를 예외의 상태로 위치지었을 때, 여기서 발생하는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애잔함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울음의 의미'를 띤 웃음으로 더 극화된다. 학급에서 '왕따'가 된 순간, 유키에가 선망하는 타자 후지사와는 유키에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여학우로 묘사된다. 피아노도 잘 치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예쁜 후지사와를 보면서, 유키에는 스스로의 비극을 극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학의 시'가 극명해지는 순간은,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 때, 그리고 후지사와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자고 할 때이다. 유키에는 후지사와가 쉬는 시간에 자신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자고 할 때, '거짓-볼일'을 만든다. 오줌 /똥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타자인 후지사와가 그녀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거짓으로 '볼 일'을 보는 척한다. '거짓-오줌/똥'의 존재. 그녀는 여기서 강렬한 자학의 시를 쓴다. 이사오가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자조를 불쌍하게 내비치며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면, 유키에는 거짓 오줌/ 똥, 즉 오줌과 똥이 나오지 않지만, 나온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극한의 자학을 선보인다.  더 불쌍한 똥이 된 유키에.

 

 

# 윤리와 원한 ....(그리고 자학)

어느새 우리 삶에 익숙해진 무리짓기와 따돌리기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밥과 똥, 그리고 그 두 존재의 변화를 책임지는 인간의 윤리일 것이다. 윤리가 주는 사유의 선택지는 이제 어긋난 선과 악의 구분법으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매번 일어나는 병리로서의 언어들, 그것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작별하며, 윤리의 자장 안에서 합리화를 외치는 사람들. 결국 그들이 외면하는 건 '똥을 잊기 위해 사투하는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똥보다 못한 놈/년"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때를 놓칠 세라, '자학의 공연장'을 설치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똥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그녀는 스스로가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날마다 폭발물을 설치하려 한다. 누군가 알아서 '똥이 되어준다'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이 증가할수록, 늘어나는 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양산되는 자학- 나르시시즘이다. 해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학은 나르시시즘을 볼 수 없고, 나르시시즘은 자학을 볼 수 없기에, "나는 똥이지 않아"라는 가녀린 나르시시즘(타인에게 강조하는 그 명령과 같은)이 또 다른 자학과 이어지는 고리의 끈끈함은 인간에게 남은 윤리의 굴레이다. 우리는 똥을 잊으려 할수록, 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을 스스로 누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회피와 부정이 우리 시대의 안전지대에 들어가기 위한 쾌락이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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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이라 가격에 민감하다. 그러다보니  간단하게 장을 본다 하더라도 대형 할인점을 가는 경우가 많다. 운동도 할 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우리 동네의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그 위치에 조용히 자리 잡은 편의점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단골 편의점이 올해 초에 문을 닫고, 노부부가 욕심을 갖고 차린 편의점인데, 주인 아저씨의 표정은 고저가 크다. 너무 크게 사람들을 반가워해주거나, 때론 늦은 밤 술에 취해 벌건 목을 보여주면서 나오는 그 우울함의 큰 차이. 그것때문에 요즘은 돈을 더 주고서라도 '불안지대'에 자주 들린다. 이 곳이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건 이유가 있다. 편의점이 위치한 그 곳이 우리 동네에서  가게가 문을 열고 닫는 주기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전에 할인마트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나도 모르게 할인마트 봉지를 들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하나 샀다. (소심한 사람들에겐 이 상황 참 곤욕이다. 어찌 보면 에티켓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뭘 그런 것까지 신경쓰냐는 그 고민) 아저씨가 큰 웃음으로 반겨주길래, 이 아저씨 참 대인배구나 싶었더만, 텅텅 빈 가게에 라디오에 나오는 사연에 웃고 계셨다는 것을 눈치 채고선 미안해졌다.아저씨 냄새가 가게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알바도 못 구하고, 혼자 밤을 샜나보다. 

 "라면 하나 더 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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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26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소심함에 진한 동질감 느낍니다^^ 저희 동네에도 상황 동일합니다. 궁벽진 동네에 근래에 대형할인마트가 생겨서 온동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고 인적 끊긴 작은 수퍼 주인들의 침울한 표정을 대하노라면 -- 대형할인점 개업 허가 문제 같은 것은 시장 논리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무기라곤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과 최첨단 무기 즐비하게 가진 사람을 마주세우고 싸우라는 것이 공정하다는 게 지금의 시장 논리이지 뭐겠습니까. -- ...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8   좋아요 0 | URL
다각도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최근 <시민과 세계>를 통해 재점화된 '민주적 애국주의'논쟁을 살펴봤다. '민주적 애국주의'를 주창했던 장은주 선생이 가장 격분하고 있는 상대는 서동진 선생인데, 서동진 선생이 '공화국으로만은 안된다'라는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장은주 선생의 견해를 볼 때, 요약해볼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안착'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안착'은 특히 현실정치에서 진보진영을 담당하고 있는 측에게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장은주 선생이 설명하는 '애국적 민주주의'와 서영표 선생이 주장하는 '진보진영의 풀뿌리 지역화에 대한 접근'이 진보진영 틀 안에서 유사한 목적을 갖고 있다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인 모토로만 일관하지 말고, 구체적 현실에 입각해서, 그 현실에 맞는 요인들을 진보 진영의 '가시적 성과'로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진보진영의 지역 현실에 대한 접근(서영표)이나, 장은주 선생이 논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전환을 통한, 국가와 시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진보진영이 고민하는 것은 그 의의 자체까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장은주 선생의 그 유의미한 고민과 더불어 그 고민이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장은주 선생이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재반박문을 읽어보면, 반박자들이 걱정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오용에 대한 우려를 장은주 선생도 개념을 만들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예로 들어, '애국의 오용'을 통해 우파들이 자랑처럼 끌고 다니는 반공정신이나 경제발전주의 같은 것에서 오는 은폐된 현실을 놓치고 마는 전략은 아니냐라는 우려에 대해 장은주 선생은 이미 그런 우려를 알고서 출발하는 개념이 '민주적 애국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장은주 선생이 말하려는 '애국'의 개념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과시욕이나 강요된 충정이 아니라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다. 장은주 선생은 애국의 개념을 보다 유연하게 발전시켜보자고 권유하는데, 즉 이것은 국가와 시민간의 관계에서 시민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국가의 존재를 사유하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공화주의는 시민의 활발한 의사소통과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논의의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시민 스스로가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면모를 발휘하게 하는 것,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포괄이 '민주적 애국주의'의 기본 토대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애국'을 통해 그가 강조하려는 건, 국가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정체성을 시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역사의 흔적들을 제대로 각인하며, 그 각인의 과정을 통해 무시할 수 없는 시민의 정체성들을 계속해서 누적해나가자고 하는 듯하다. 

여기서 '애'의 핵심은 그의 논의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민족주의', '종족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애'의 역할 혹은 기능은 시민의 자발성과 능동성으로 구성된 시민으로서의 능력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은주 선생이 반박론자들에게 기분 나빠했던 것은, 첫째, 자신이 이런 개념을 만들었을 때 반박론자들이 우려하고 있던 부분들을 이미 알고, 그 개념 자체를 만들었다는 것, 즉, 자신이 개념을 만들 때 그 정도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겠냐는 것에 대한 서운함인 듯하다. 둘째, '민주적 애국주의'를 추상화된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는 서동진 선생의 견해를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이 마냥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격노했다.  

근데, 내가 보기엔 서동진 선생의 견해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전략의 추상화에 대한 우려보다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무슨무슨주의가 과연 당대의 포인트를 제대로 조준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동진 선생이 늘 강조해왔던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변화 과정에 대한 꾸준한 지식인의 개입과 관심이란 그 태도를 인식한다면,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갖고 있는 사회적 현실 감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나도 '민주적 애국주의'가 갖는 우려는 여기서 출발하는 듯하다. 이건 비단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무슨무슨주의로 시작하는 거시적 개념이라는데서 오는 반발심이 아니라,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애국)'이냐라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가 장은주 선생이 주창하는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것이 과연 '~주의'로까지 격상될 수 있을만한 것인가 자체도 의문이다. 차라리 우리 안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시민들이 국가의 존재를 구성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이 정도로 요약가능한 지극히 원론적이고 상식적인 시선이 진보진영에게 당장 필요한 '실용 전략'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개념의 전환'에 있어, 그가 강조하는 그 애국의 차원에서 시민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나머지, 시민의 이중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더욱 더 우려스럽다. 그가 민주적 애국주의를 통해 논하려는 시민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강화, 이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능력 확장 등등. 이런 긍정적인 부분들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은 사회 현실 속에서 시민이 갖는 그 변화무쌍한 의견 배치와 대립 그리고 대중의 오용을 간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애국의 개념이 오용될 것을 우려하는 데서 나타나는 그 적대의 대상을 비단 뉴라이트 같은 곳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장은주 선생 스스로가 민주적 애국주의의 건전한 주체로 상정되고 있는 시민에 대한 비판과도 연계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을 너무나 건전한 도덕적 주체로만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민의 권리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에서 논하고, 국가보다 우위에 둔다고 해서, 시민이 갖는 정치력의 향상이 바로 선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외려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의사소통이란 정치적 표피를 쓴 윤리에 종속된 공동체를 논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우려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최근 윤리에 종속되어버린 정치에 대한 우려와도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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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에 대해 고민중이다. 살면서 늘 착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조금 고치는 중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적을 안 만들려는 자세, 그 특유의 겸손함으로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의를 갖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주는 '은근한 개인주의'라고 할까. 그런 사람에게서 배출되는 '겸손함'이 내겐 세상을 향한 또 다른 냉소로 느껴지곤 한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속에 많이 쌓아두고, 타인을 평가하면서 한꺼번에 '폭발 모드'를 보이는데, 그 모드가 끝나면 그들은 신기하게  고양이 눈웃음을 치며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길 원하는 '범생이'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때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던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난 이 때부터 이런 류의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근데 식스센스급 반전은 가끔 내가 그런 캐릭터로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나야말로 '나쁜'남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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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있는 남자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7-22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살아야 할 터인데요.ㅎ

비로그인 2010-07-23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지 않습니까. 허허 :)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9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그래서 사실 저도 가끔은 폭발하는데. 그냥 혼자 집에서 폭발하곤 맙니다.ㅋ

Lusy 2010-08-1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착한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