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가 오셨다. 엄마가 오시면 대체적으로 내가 하는 일이 비슷하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한 두 군데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거나 외곽에 있는 절에 모시고 간다. 그리고 엄마랑 나란히 앉아 tv 를 본다.  평소에 우리집은 tv 를 거의 보지 않는데 엄마가 오시면 어쩔 수 없이 tv 를 틀게 된다. 지난 일요일에, 엄마는 '더 먹고 가' 라는 프로그램을 보셨다. 난 그 프로를 처음 시청했는데 방랑식객 임지호 셰프와 강호동씨가 진행하는 요리프로그램이었다.

 

오래 전, tv 에서 임지호 셰프를 우연히 봤을 때 그분이 너무 경이로웠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때그때 만나는 재료들을 가지고 정갈하면서도 보기에 좋은 음식을 어쩜 그렇게 뚝딱 만들어 내는지 신기했다. 그 행위는 예술의 경지였다. 그것은 단지 음식만을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과의 조화로움이었다. 손으로 쓱싹 만들어내는 음식들에 생생함이 있었다. 깨를 손으로 으깨어 넣는 투박함이 소금을 아주 높은 곳에서 뿌려대는 허세보다 훨씬 더 정겹고 인간적이었다.

 

엄마 덕분에 '더 먹고 가' 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고, 거기에 임지호 셰프가 나와서 더 반가웠다. 그저께 요리의 재료는 '대구' 한 마리였다. 임지호 셰프는 대구 한마리를 철저히 분해해서, 각 부위로 다양한 요리를 빠르게 쓱싹 만들어냈다. 요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했으면 저런 경지에 이르는지 존경스러웠다.

 

'대구' 라는 생선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추억이 많다. 내가 어릴 때, 어시장에 대구가 많이 나오는 철이 되면 엄마는 그것을 통째로 사와 집에서 손질하셨다. 그 어느 부위도 버리지 않고 다양한 음식의 재료로 변화시켰다. 탕을 끓이고 아가미로 젖갈을 담그고, 대구살을 얇게 저며 햇볕에 말리셨다.

 

엄마와 tv 를 보며 어릴 적 얘기를 꺼내자 엄마는 대뜸 이런 말을 하셨다. 옛날에 큰언니 임신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선창에서 대구를 많이 사와 그것 손질하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다. 배는 부른데 너무 힘들었다고. 그리고 손질한 대구를 큰아버지 오시라고 해서 몇 마리 드렸다고 했다. 엄마, 아버지가 정말 그랬다고?  울 아버지 너무 나빴네, 어떡해? 아버지.

 

내일은 '대구' 에서 만큼은 좀 나쁘셨던 아버지 기일이고, 엄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신다. 같이 tv 를 보며 막장 드라마의 전말을 나에게 얘기해주시던 엄마는, 요즘 드라마를 보면서도 하나도 이해를 못하시며 나에게 계속 뭔말이냐고 물으신다. 과거의 기억속에만 존재하고, 현재는 금방 잊어버리는 엄마를 보면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다.

 

임지호 셰프가 해 준 음식을 강호동씨는 너무나도 맛있게, 아주 많이 먹는다. 엄마는 강호동같은 자식을 원하셨다. 당신이 해 준 음식을 뚝딱 먹어 주기를(해치워주기를) 원했지만, 입이 짧았고 병약했던 아버지와 우리들은 조금밖에 먹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미안하다. 하지만 그 어떤 식재료나 음식을 봐도 엄마가 생각날만큼, 엄마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그러니 엄마에게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건 다 엄마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엄마 덕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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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1-02-02 13: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 먹고 가‘, ‘더덕‘ 편 봤어요. 엄마랑 같이 봤으면 더덕을 사다가 해먹었을것 같아요. 더덕도 더덕이지만 tv 같이 볼 사람이 더 애틋해지는, ... 페넬로페님 글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1-02-02 15:11   좋아요 3 | URL
저도 이 프로 처음보고 좋아서 처음부터 하나씩 보려고 해요~~맛있는 것과 사람들을 보면 왜이리 애틋해지는지요**

미미 2021-02-02 14: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책도 있었네요! 저도 이분 요리하는것 보고 몇번 놀랐어요. 나물도 참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내놓으시더라구요. 엄마들은 정말 다 훌륭한 요리사인듯해요 따뜻한 글 잘읽었어용~♡

페넬로페 2021-02-02 15:15   좋아요 3 | URL
요리책 읽으며 하나하나 요리 하고 싶지만 제 솜씨 아니깐 별 기대는 안해요 ㅎㅎ
음식만 보면 엄마가 생각나 큰일났어요^^엄마도 그러신대요, 제 생각 하신다고 ㅠㅠ

scott 2021-02-02 14: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함께 식사하고 함께 걷고 함께 티비 보면서 엄마에 이야기를 들어주는것,,,
어머니는 페네로페님 만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
부모님, 특히 엄마의 마음은 손수 만드는 음식 배불리 먹는 자식에 모습을 보는것,
자식에게 줄것이라곤 💕밖에 없네요.


페넬로페 2021-02-02 15:17   좋아요 4 | URL
네, 엄마에게 해줄일이 그것뿐인데도 제 일을 며칠씩 못할정도로 시간이 많이 걸려요^^엄마 만나 행복한데도 걱정이 앞서요**

cyrus 2021-02-02 16: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에 ‘대구’가 있어서, 제가 사는 지역인 줄 알았어요.. ㅎㅎㅎ

작년에 코로나가 유행할 때 거의 집에서만 지냈어요.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잘 챙겨먹어서 그런지 잔병치레가 없어요. 집에만 있으니 자연스럽게 술도 못 마시게 되니 통풍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역시 어머니의 말씀 잘 들어야 해요. ^^

페넬로페 2021-02-02 16:58   좋아요 2 | URL
저 진짜 이 글 쓰면서 cyrus님 생각했어요^^대구를 그 대구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구나 하구요 ㅎㅎ
지금도 계속 어머니 말씀 잘 듣고 계시죠? 통풍은 엄청 통증이 심하다던데 건강 유의하세요**

감은빛 2021-02-02 18: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더이상 우리나라에서 대구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대구의 대다수가 일본에서 수입된다는 것, 그리고 일본산 수산물 대다수는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죠.

명태(황태, 노가리, 먹태 포함)와 대구는 거의 대다수가 일본에서 수입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해 방사능 전수 조사를 하지 않고 샘플조사만 하고 있구요. 의학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그놈의 기준치라는 걸 적용시켜 기준치 이하라서 안전하다는 거짓 주장을을 일삼고 있어요.

페넬로페님의 잔잔한 글에 이렇게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페넬로페 2021-02-02 19:39   좋아요 2 | URL
제가 남쪽 바다 출신이라 그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죠~~많은 생선이 일본에서 건너오고 그것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요**
어릴 때 그 넘치던 생선을 지금 많이 볼 수없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붕붕툐툐 2021-02-02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에게 음식을 해드리는 페넬로페님 넘 따뜻해요~(역시 음식 못한다는 건 다 뻥이었어!!)😻
다 엄마 덕분이다222222

페넬로페 2021-02-02 19:38   좋아요 2 | URL
ㅎㅎ~~엄마는 요리할 때 정성을 다하셨는데 전 그 정도까지는 안되는것 같아요^^
맞죠! 다 엄마 덕분**

그레이스 2021-02-02 19: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로그램 보고 임지호 셰프 식당 검색했는데 페넬로페님의 글은...♡
TV프로그램을 보고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생각과 감상이 다르네요^^
저는 대구에 관한 역사를 다룬 그림책 <대구이야기> 추천이요.ㅎㅎ

페넬로페 2021-02-02 19:44   좋아요 3 | URL
저도 검색했어요~~ㅎㅎ
‘대구 이야기‘ 책 읽어 볼께요^^

mini74 2021-02-02 2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ㅠㅠ 저 왜 울고 있죠 ㅠㅠ저희 아버지도 입이 짧으셨어요. 같은 반찬 두 번 안 먹는다고 엄마가 제게 아빠흉 보셨는데 ㅠ

페넬로페 2021-02-02 23:39   좋아요 3 | URL
mini님의 아버지도 그러셨군요~~우리들의 엄마는 그렇게 흉보시면서 또 열심히 다른 음식 만들어 내놓더라구요^^ㅜㅜ

서니데이 2021-02-04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버님의 기일은 잘 보내셨나요. 대구엔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어머님에 대한 페넬로페님의 사랑이 담긴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계속 떠올리기에 사라지지 않고 오래 머무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1-02-04 21:51   좋아요 2 | URL
네, 잘 보냈습니다~~서니데이님 말씀대로 추억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2-08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 편에서 현지에서 나는 식재료
로 해서 뚝딱 요리를 만들어 내시는 것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 -

페넬로페 2021-02-08 13:52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죠!
어쩜 그리 요리를 만들어내시는지 감탄합니다**
레삭님은 저에게 많은 책의 정보를 주시니 역시 기인이세요^^
 
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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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을 상상하고, 그가 나타낸 말과 행동의 배경과 사연들이 궁금하다. 잔잔하고 단아한 김금희 작가의 문장은 사람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김금희 문장의 큰 힘이다.

 

배경의 묘사가 좋은 소설 복자에게는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보다 어느 순간에 맞닥뜨리는 특별한 이유로 관계 맺기를 더 많이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깨질 확률이 더 크다.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키기가 힘들지만 나는 나이기에, 나의 관계를 결정한다.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사건과 그 소송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은 제주이다. 제주의 방언과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모티프로 사용한 소송의 과정은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난 그것이 더 좋았다. 힘없는 피해자들이 거대한 공룡과 싸우는 어렵고 끝없는 과정은 말 안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작가는 그 과정 중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오히려 빠져주어야만 그것에 도움이 되는 자의 상실과 억울함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질투와 어리석음은 많은 후회를 낳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돌고 돌아 먼발치에서 바라본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며, 많은 것이 이해될 수 있지만 그땐 어쩔 수 없는 내가, 순수하지만 덜 익은 아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된 우리들은 얼마나 또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영초롱이 돌아본 자신과 복자에게는, 이미 상처받은 유년의 아이들이 서로 기댈 곳을 찾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을 잃기 싫어하는 관계의 맺음과 끊어짐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만난 그들이 그 아무것도 아닌것을 넘기려고 하지만 또다른 난관에 부딪혀 두사람은 튕겨진다. 그런 두사람의 얼룩짐은 회복될 수 없는 듯 하지만, 복자에게 부치지 않는 편지를 쓰는 영초롱에게서 조금은 다가가려는 여지가 보인다. 나의 주체성으로 선택한 어떤 단호한 결정이라도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먹먹하고 감동적이다.

 

두 번 이나 연달아 읽었는데도 이 소설에 대한 글쓰기가 어려운 건 복자에게가 쉽게 읽히면서도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뜻이 될 수 있겠다. 평범한 듯한 소재로, 사람과 사건들을 잘 묶어놓았다. 영초롱과 복자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순수하면서도 심지가 있는 청년 고오세가 난 좋았다. 주인공 영초롱의 직업이 판사라서, 판사의 일에 대한 것도 많이 서술되어있다. 잠시 그곳에 다녀와 그 세계도 들여다봤다. 영초롱의 상사인 이영춘 부장판사가 그녀에게 읽으라고 했던 볼테르의 관용론의 어느 한 부분도 이 소설을 형성하는데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고 한다. 사표를 낸 영초롱과 더이상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하지 않는 영초롱의 동생 영웅은 이러한 것을 실패가 아니라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 라고 한다. 이 구절이 내가 선택한 이 소설의 한 문장이다. 앞으로 실패라는 감정을 느낄 때 이 문장을 생각한다면 힘이 날 것 같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었던 세상 편으로. - P15

내가 아빠를 미워했어. 아빠가 실패해서 아빠를 미워했어. 그런데 그러면 나는 아빠가 아니라 실패를 미워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빠를 안 미워했어.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P61

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 - P81

생선을 토막 내고 오징어를 손질하는 주인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파리떼가 그의 유일한 아우라 같았다고 고모는 적었다. 오직 그것만이 토막 난 생선처럼 종결되지도 않고 차양 아래 오징어처럼 다 물러지지도 않은 채 생이 계속된다고 증언하는 듯했다. 그 비린것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칼과 도마와 고무장갑에 내려앉았다가도 공기 중으로 와락 떠오르며 우리도 산다고.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고 끈질기게 기꺼이 산다고. - P143

내게 놀라웠던 건 볼테르의 마지막 물음이었다. "이렇듯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지나치면 범죄를 낳는다, 해서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사실상 기만이라고 냉소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 자체가 과연 그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었던가?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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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8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이 밑줄 쫘악 하신 문장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작가에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네요.
이분에 작품은 ‘편혜영이 수상한 김유정 작품집에서 처음 읽었었는데 그때 느낌이 수상작보다 잘썼다고 생각했는데,,,

종교라는게 늘 그랬듯이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삶에 복을 약속하지만 사람에 앞날이라는게 약속한데로 흘러가는게 아니라는것을...
복자에게 읽고나면 스쳐지난간 몇몇 사람들 모습이 떠오를것 같네요

페넬로페 2021-01-28 20:23   좋아요 3 | URL
네, 이 책엔 깊이 들여다봐야 할 좋은 문장들이 많아요~~
scott 님의 말씀대로 지나간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붕붕툐툐 2021-01-29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마트 도서관에 「복자에게」가 5권 있기에 요즘 유행하는 책인가 난 전혀 정보가 없는데... 하던 차에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읽게 되니 너무 좋으네요~ 완전 나이스 타이밍
!!^^😄

페넬로페 2021-01-29 13:57   좋아요 2 | URL
쉽게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는 책이예요~~
제주에 대한 묘사도 많아 가고 싶더라구요^^
 

알라딘 서재 친구인 scott 님이 요즘 매일 올려주시는 음악들이 참 좋다. 유튜브로 음악을 연결해주시어 듣기 수월하고, 그 음악의 유래와 거기에 딸린 시도 적어주시고 해서 하루 하루 종합선물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시대이지만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그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주는 좋은 것을 덥석 받아먹는 염치는 빠른 것 같다. 알라딘 친구분들이 해주시는 책, 영화, 커피얘기는 물론이고 각자 살아온 사연들, 현재 삶을 살아내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도 좋고 감동적이다.

 

scott 님이 올려주신 오늘,1월 25일의 음악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축제일인 '반스 나이트'에 대한 것인데 이 날은 '로버트 레비 번스'의 시를 읽고 전통 음식인 '해기스'를 먹는다고 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인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의 한 구절을 올려 주셨는데 그 글이 너무 좋았다.(궁금하시면 scott 님의 페이퍼를 읽어 보세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그 '위스키' 라는 단어에 25일 오늘, 난 지난 시절 생각에 내내 발목이 잡혀버렸다.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의 대학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었다. 대학 1학년부터 3학년때까지는 친척집과 기숙사를 전전했고 4학년때는 학교앞에서 하숙을 했다. 내가 하숙을 한 집엔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 동창인 L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L이 이웃에 있는 다른 하숙집에 사는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 J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L과 J는 학교 다닐때 친했지만 난 J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래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 처음엔 서먹했지만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J의 하숙집엔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불문과 학생인 A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크고 얼굴도 상당히 예뻤다. 불문과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좋은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였다. 그런 그 친구의 말에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어서 소탈하고 인간적으로 보였다.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술을 마시는지 몰라도 우리 때는 맥주, 소주, 동동주를 주로 마셨다. 우리 하숙집과 J의 하숙집 멤버들은 자주 모여 술을 마셨다. 집에서 용돈이 올라오는 날이면 돌아가며 한잔씩 술을 샀다. 다들 각박한 서울살이에 용돈이 모자라 허덕였지만 함께 술 한잔 마시며 얘기나누는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기에 누구나 그 자리를 좋아했고 인심좋게 한 턱씩 냈다. 이웃 하숙집의 J와 A는 둘다 주당인데다 유머가 풍부해 우리를 많이 웃겼다.

 

그런 우리들에게 한번씩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광주 친구인 A가 집에만 다녀오면 '시바스 리갈' 한 병씩을 가져오는 거였다. 집에 쟁여져있는 위스키를 자기 아버지 몰래 가져온다고 했다. 그렇게 예쁘고 우아한 친구가 술 한병씩을 슬쩍 해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위스키를 가져오는 날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소환되었다. 그땐 A의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저 같이 만나 놀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약간 고급스럽게 보일 수 있는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이 좋아 그 시간만을 즐긴 것 같다. 맛도 잘 모르면서 우리는 그 위스키를 마시며 시국에 대해 얘기하고, 친구의 연애사를 들어주고, 그 누군가의 뒷담화를 했다.

 

대학 생활 중 4학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자신의 진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도 우리는 그렇게 놀았으니 지금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어 있지 못한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의 하숙집 친구들은 평범하게 제 밥벌이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다들 지방 출신들이라 고향으로 내려간 친구들이 많아 거의 만나지는 못하고 소식만 가끔씩 주고 받는다. '위스키' 덕분에 오늘 그 시절을 생각했고 기분 좋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난 활짝 웃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처럼 우리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러 넣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곤함도 없었고 거리를 잴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그 시절이 빛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무라카미 하루키

 

하루 종일 수레를 몰아 달리지만

나루터 묻는 사람 보이질 않는다.

만약에 다시 통쾌하게 마시지 않으면

머리 위의 두건을 헛되게 하는 것이리라.

단지 잘못한 말 많을까 유감스럽지만

그대는 마땅히 이 술 취한 사람을 용서하시라.

-도연명,'음주' 20수 중에서 20수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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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1-25 23: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바스 리갈 너무 고급진거 아닌가요. 껌 하나를 세 등분해서 씹으며 친구들과 소주 마시던 생각이 나네요 *^^*페넬로페님의 대학생활이 참 따뜻하게 와닿습니다.

페넬로페 2021-01-25 23:28   좋아요 4 | URL
그니까요~~친구 덕분에 그런 엉뚱한 경험을 해봤어요 ㅎㅎ

scott 2021-01-25 23: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이페이퍼 쵝오 쵝오!!페넬로페님에 대학시절에 친구들과 나누던 언어는 바로 ! 위스키 ㅋㅋㅋ[사람과의 관계에서 피곤함도 없었고 거리를 잴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그 시절이 빛난다] 대학시절 에피소드 정말 위스키 에 톡쏘는 향처럼 솔직 담백하게~
하루키는 고딩때 처음 친구들과 바닷가에 모여서 집에서 몰래 가져온 위스키를 마셨는데 첫 모금 맛이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 같은 맛이였데요 ㅋㅋ 그때 그시절 회고하면서 쓴 단편이 ‘헛간을 태우다‘

페넬로페님 칭찬에 기분 업 됨 내일(12시땡!) 음악도 기대하세요 (*˘︶˘*).。.:*

페넬로페 2021-01-25 23:53   좋아요 4 | URL
이 페이퍼에 적힌 대로 추억을 소환해 준 scott님께 감사드려요~~
덕분에 음악도 듣고 친구들도 생각했어요^^

cyrus 2021-01-26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생 때 술이라면 가리지 않고 마셨어요. 역시 제일 좋았던 술자리는 친구 하숙집에 모여서 같이 마셨던 일이에요. ^^

페넬로페 2021-01-26 10:25   좋아요 2 | URL
하숙집이라는데가 사실 그렇게 모이기가 좋은 곳이었어요 ㅎㅎ^^

붕붕툐툐 2021-01-26 2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억 소환 페이퍼 넘 좋네요~ 하숙방을 경험하지 못해 아쉽지만, 그저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참 따뜻해지는 1인입니당~~

페넬로페 2021-01-26 23:33   좋아요 0 | URL
네, 위스키 덕분에 그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갔다 왔어요~~
좋은 추억은 지금 현재를 살아갈 힘을 주는것 같아요~~
모처럼 즐거웠어요^^

han22598 2021-01-27 05: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숙방의 좋은 추억이 있으시네요 ^^ 저 하숙방 추억은. 큰 개를 키우는 주인은 개를 무서워하는 저를 신경쓰지 않고 개를 마당에 매일 풀어놓으셨셔서 너무 무서웠던 기억의 하숙방1.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나도 추웠던 하숙방2. ㅠㅠ

페넬로페 2021-01-27 09:03   좋아요 1 | URL
han님의 추억엔 그런 사연이 있으시군요~~
타향살이를 하다보면 여러 힘든 일을 많이 만나죠^^
언젠가 han님의 얘기도 들려주세요**

라로 2021-01-28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숙을 해본적이 없어서 이 글이, 아니 페님의 경험이 무지 부럽네요!!
암튼, 위스키,,,제가 간호사 시험 보고 합격한 다음에 직장을 찾으려고 초조해하던 어느 날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고 (그 글은 얼음과 위스키에 대한 글이었어요) 좋은 위스키 검색해서 (비싼 것 어마무시 많지만) 저렴하면서 괜찮은 위스키를 두가지 사가지고 와서 꽐라가 됐다는.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하루키가 아주 위스키를 부른다니까요!!ㅋ

페넬로페 2021-01-28 18:17   좋아요 1 | URL
ㅎㅎ~~
하루키의 글이 우리를 위스키의 세계로 이끌어냈네요^^
항상 열심히 사시는 라로님을 응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02-10 14: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너무 좋네요!!!!!!!!

‘시바스 리갈‘ 같은 글이네요^^!

페넬로페 2021-02-10 14: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고양이 라디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연명 전집 대산세계문학총서 38
도연명 지음, 이치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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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불편하게 구성된 책은 저자와 독자와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책은 한자 원어를 읽을 수 있는 독자에게만 친절하다. 한자어에 대한 풀이와 주석만 있다. 한글로 번역된 글을 이해하지 못했을 땐, 그 부분에 대한 한자어를 찾아 거기에 따른 해설을 읽어야 한다. 시에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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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3 2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번역?역주를 달으신 분이 이치수 교수님이라고 경북대 중문과 교수(전에는 영남대 계셨음) 원래 루쉰. 마오둔 중국 근현대문 전공이세요 도연명은 중국동진-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시인인데,,한글로 번역된것도 이해하기 힘들정도라면 담당 편집자들은 이해 하고 출판 했을까요?

페넬로페 2021-01-23 21:07   좋아요 3 | URL
한글로 된 글이라도 완전 이해하려면 힘들잖아요~~
더군다나 한자어는 고사성어와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한글로 바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한글로 번역된 글은 일단 한글에 대한 주석이 바로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어요~~

그레이스 2021-01-23 21: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주해는 중국 학자들이 해놓은 것을 인용하는것이죠
뒷부분398~408p의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서 시마다 있는 각주도 다른 책과 거의 같습니다.
일단 번역된 시어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저도 어느정도 동의!
번역과 한시가 나란히 있어서 보기 좋았구요.
어떤 의미라는 것을 안 후에는 번역된 문장에 구애받지 않고 의미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책과 비교했을 때 또 하나 장점은 사언시 오언시 사 부를 구분해 놓았다는 것!
번역은 최근에 나온 책도 마찬가지!
어차피 한시로 읽지 않으면 그 맛은 살리기 힘들듯요

페넬로페 2021-01-23 21:14   좋아요 2 | URL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1-23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전공때문이 아니라 번역자의 시어가 문제인듯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고민인듯 합니다

붕붕툐툐 2021-01-25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이 잘못했네~ 페넬로페님 몰입을 방해하다닛!!😠

페넬로페 2021-01-25 10:01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저한테는 읽기 불편한 구성이었어요^^
 
도연명을 그리다 - 문학과 회화의 경계
위안싱페이 지음, 김수연 옮김 / 태학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도연명을 그리다》는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를 소재로 한 시와 그림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도연명' 그 자체보다 그의 글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하고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도서관의 '클래식' 동아리에서 선정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생각보다 많이 학술적이라 당황했다. 대충 책장을 넘겨보며 내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회의도 들었다. 그러나 동아리에서 선정된 책이고 랜선 모임을 앞두고 있었기에 책을 펼쳐들고 공부하듯 다시 읽어 나갔다. 각 페이지에 나오는 시를 읽고 그에 따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점점 책이 편안해지고, 도연명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다. 여기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음주' 20수 중 5수가 자주 나오는데, 도연명 전집을 따로 준비해 음주 20수를 비롯해 다른 시들과 산문들도 같이 읽었다. 여러가지 한자어와 고사성어를 찾아서 기록해가며 자세히 이 책을 읽어 나갔다. '도연명을 그리다' 는 이렇게 음미하듯 천천히 읽어야 빛이 나는 책이다. 

그냥 책장만 넘겨가며 이 책을 읽는다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도연명은 동진 말에서 송나라 초 시대의 사람이다.

 

도연명은 이처럼 사회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으며,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에 살았다. 이러한 가운데 현실과 이상의 괴리속에서 출사(出仕)와 퇴은(退隱)의 문제를 고민하는 도연명의 문학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도연명은 8월에 팽택령이 되었다가 11월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때 관리 생활에서의 괴로운 심경과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적은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 이다.-도연명 전집, 이치수, 문학과 지성사, p382~p383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는 그를 대표하는 시이다. 그는 80일 정도의 벼슬을 하였으나 독우(지방의 감찰관)의 방문을 앞두고 그들에게 구차하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만두고 그 유명한 귀거래사를 짓고는 표표히 고향으로 떠난다. 

 

'도화원기(桃花源記)' 는 도연명이 지은 유기(遊記)이다. 무릉지방의 복사꽃이 만발한 도화원에 세상을 등지고 모여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 '도화원기' 에서 나온 것이다.

 

 도화원기는 도연명의 이상을 표현했고 그 이상이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p147

 

'화도시(和陶詩)' 는 도연명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추화시(追和詩)'-옛사람을 추모하여, 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시-이다.

 

 후대 시인들은 적막하게 지낸 도연명의 삶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다투어 화도시를 지었다. 화도시는 내용도 다채롭고 그 양도 방대하다.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도연명처럼 국경을 초월하여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도연명은 중국 문화를 읽는 키워드이며, 특정한 이상적 삶을 상징한다.-p212

 

위안 싱페이의 '도연명을 그리다' 는 도연명 자체를 다루었다기보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콘텐츠화 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는 수많은 후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채국(국화를 따다)', '녹주(술을 거르다)', '호계삼소(호계에서 세 사람이 웃다)'등 도연명과 관련된 일화도 주요 제재가 된다. 그의 시의 운자를 따서 짓는 화도시도 유행처럼 번져갔다. 도연명처럼 속세를 떠난 은사, 망한 왕조의 유민, 높은 관직의 관료와 제왕(건륭제)까지도 화도시를 짓는다. 심지어 도연명의 삶과는 전혀 다르게 권력에 아첨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도 이 시류에 합류한다.

 

송대 이전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소개된 그림과 화도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인간이란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보편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그림들을 보며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거기에 표현된 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맞지 않는 삶을 거부하며 갈건을 쓰고 옷자락 휘날리며 표표히 걸어가는 도연명의 모습에서 결연함을 본다. 마음 맞는 벗을 만나 고개를 크게 뒤로 젖히며 한바탕 웃는다. 자신이 쓰고 있던 갈건을 벗어 펼치어 술을 거른다.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놀고 있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술 취한 사람과 취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국화를 따다가 먼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이와같은 소재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채롭고 멋있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각 시대의 화가에게로 가서 그들 각자의 사연과 생각으로 개별화된 모습으로 완성된다. 도연명의 삶을  평가할 필요도 없고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의 삶의 모습들을 역사의 흐름에 실어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귀거래사에 화운하다. 음주 스무수에 화운하다. 빈사에 화운하다. 귀원전거에 화운하다등 그 무수한 것들의 연결로 도연명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책은 그림 도록처럼 글과 그림이 짜임새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원문을 같이 실은 시의 해석도 좋다. 오언시와 사(辭)의 원문을 그 느낌에 맞게 잘 번역한 것 같다. 다만 본문의 내용에 대한 주석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내가 도연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의 태도나 행동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표현인지 아니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숨은 안일함으로 치부해야하는지 갈등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을 떠나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억지로 뭔가를 하지 못하는 인간 도연명을 만났다. 남들이 답답해하고 왜 저렇게 사느냐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수 없으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고 나에게도 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가지 않으랴

이미 마음이 몸에 부려졌다고

어찌 구슬프게 홀로 서러워하리오.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이 없고

다가올 일 뒤좇아야 하리.

실로 길을 헤맸어도 멀리 가지 않았거니와

지난날이 그르고 지금이 옳음을 깨달았네.

-도연명, '귀거래사' 중에서,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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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1 00: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귀거래사, 안빈낙도에 삶을꿈꾸며 노래 했던 도연명[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가지 않으랴 이미 마음이 몸에 부려졌다고 어찌 구슬프게 홀로 서러워하리오.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이 없고 다가올 일 뒤좇아야 하리. 실로 길을 헤맸어도 멀리 가지 않았거니와 지난날이 그르고 지금이 옳음을 깨달았네]이시 코로나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를 향해 말하는것 같네요 아파트 숲 벗어나 무릉도원에서 복숭아꽃나무 키우며 살고 싶은 1人

페넬로페 2021-01-21 01:00   좋아요 4 | URL
역시~~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scott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요**

그레이스 2021-01-21 0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그분?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페넬로페 2021-01-21 10:14   좋아요 1 | URL
앗! 네, 반갑습니다**

미미 2021-01-21 0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이 이 책에 빠져들었다는 과정이 인상적이네요.👍

페넬로페 2021-01-21 09:07   좋아요 4 | URL
리뷰쓰기전에 그 과정이 꼭 필요할것 같아 적었어요 ㅎㅎ

붕붕툐툐 2021-01-21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술적 책과 학구적 독자가 만났군요~ 페이퍼에 생각할 거리가 그득해서 넘 좋네욤~😍

페넬로페 2021-01-21 10:15   좋아요 2 | URL
붕붕툐툐님의 말씀이 화도시같아요^^
너무 좋은 해석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scott 2021-02-10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이달의 당선 2관왕 !!
👏👏

페넬로페 2021-02-10 17: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송구스럽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