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이 전부다 - 인생이 만든 광고, 광고로 배운 인생 아우름 29
권덕형 지음 / 샘터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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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을 쓰든 머리를 쓰든 열심히 노력을 해야만 밥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밥을 버는 일들 중에도 창조적인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 발명가나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고되겠지만 특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은 특히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쥐어 짜야만 하는 작업은 웬만한
사람들은 도전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제목이 '발견이 전부다'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발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으므로.

      


광고에 얽힌 에피소드가 그려질 줄 알고 가볍게 시작된 책 읽기가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만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른 작업자여서 그런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
혹은 보더라도 흘깃 지나쳐버리고 말 일들도 그들에게는 심오한 '발견'이 되는 모양이다.
볼만한 프로그램 앞뒤로 구성된 광고는 흔히 귀찮고 자본주의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아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광고쟁이들의 숨은 노력이 깃든 광고들을 보니 이제 그냥 지나쳐지지
않을 것도 같다.  몇 마디의 카피를 위해 혹은 영상을 위해 밤을 새는 작업을 거듭해서 인지
생각보다 직업인으로서의 생명이 짧은 느낌이다.
특히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니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세상일이라는게 활기차고 기가 뿜뿜 뿜어져 나오는 젊은 피도 중요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의 지혜도 얼마나 필요한 일인데 겨우 오십줄에 접어들면 퇴물취급이라니 가슴아프다.

      


광고 하나가 탄생되는 과정도 숭고하게 느껴질 만큼 작업도가 높으니 스트레스가 보통
심한 일이 아닐 것이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보통사람들과 다르니 피로도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 섬세하고 수준높은 작업을 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 그런지 웬만한 소설보다 더 가슴깊이
다가오는 글솜씨가 감동스럽다.
영혼을 팔아 글을 써야하는 작가들의 운명과 광고쟁이들의 운명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를 만나는 것이 큰 행운이라는 글귀를 보니 내가 오래전부터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그대로를 쓴 것 같아 더 가슴에 박힌다.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거듭나야 보석이 되듯이 나를 알아봐주는
상사나 친구의 만남은 인생을 변화시킬 만큼 소중하다.
나 역시 좋은 분들을 만나 숨어있던 재능을 끌어내주어 큰 어려움없이 사회생활을 했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본다.

      


오랫동안 공들인 평창올림픽이 막을 내리는 장면은 참 감동스럽다.
지구촌의 사람들이 모여 재능을 겨루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 모습은 인류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곳곳에서 멍들고 쓰러지고 있다.
쌍동이 아빠인 저자의 말처럼 내 가족이 살아갈 세상이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나누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그런 세상에서 살지 못했더라도 내 아이들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지구촌은 평화로운 세상이 될텐데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일까.

광고 한편이 탄생되기까지의 에피소드도 재미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감동을 주었던 광고를
소개받으면서 결국 인류가 원하는 것은 공존이 아닐까 생각한다.
광고속에 수많은 메시지들은 파괴나 반목이 아니다.
흘깃 지나가는 광고 한 편에도 인생이 있고 그 광고를 완성한 여러사람들의 노고가 있음을 다시
깨달으면서 광고 카피만 쓰지말고 좋은 소설이나 에세이도 많이 썼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썩 괜찮은 글쟁이가 되고도 남을 글솜씨여서 읽는 내내 참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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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잘 풀리는 철학적 사고술 - 니체가 알려주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 아우름 28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샘터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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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도대체 철학이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이런 책을 만날 때마다 묻게 된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닌 '철학'이라니...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이름이 떠오르고 니체도
떠오르는데 왠지 무거운 학문같아서 쉽게 다가서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철학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늘 의문을 가지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숨어있는 학문임을 알게된다.  누구든 살다보면 풀리지 않는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예를 들면 '신은 있는가' 라든가 '선(善)은 천국으로 향하는 문인가', '종교는 왜 필요하지'
같은 의문들 말이다.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매주 한 편씩 에세이를 써오게 하셨다.
그 때 내가 쓴 글중에 '신은 있는가'라는 글이 있었던 것 같다.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에 악은 왜 존재하고 고통은 왜 있으며 선한 자가 왜 보상받지 못하는가 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결국 우리는 신의 노예같은 존재가 아닌가...뭐 그랬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꽤 심오했던지 오랜 시간이 흘러 만났을 때 그 때 이야기를 하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님에게 하느님이 존재하는가와 왜 꼭 교회에 가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 제자였던 나의 질문에 꽤 당황하셨는데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베드로였고 그 베드로가 하느님을 위해 지은 것이 교회인데 가장 신성한 곳,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다..뭐 이렇게 대답을 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열 몇살의 소녀가 당돌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우리는 정답이 없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럴 때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장 많이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막 읽은 이 책에도 수많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사람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진정한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언어의 힘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을 꺼내고 인생을 변화시키고서야
진정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 그리고 그런 언어의 진수가 바로 철학책이라는 것에 또 동감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종교에서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옳다고 할 수 없다.'
같은 조언은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그동안의 의문 몇가지를 해소시켜준다.
불교에서 석가를 죽이고 달마의 목을 베라는 말에 늘 큰 의문을 가졌었다.
추앙해도 모자랄 대상을 죽이고 베다니...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상대의 지위나 직위, 자신의 관계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공평하게 보라는 뜻이란다. 말하자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일맥상통의 뜻일게다.


      


철학을 학문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한없이 어렵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수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지라고 생각하면 훨씬 쉽게 다가온다.
스스로 짐승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바라보면 집안에 기르는 개 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더 진화할 수록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아주 의외였다.
이성으로 무장한 내면에는 숨겨둔 야생성이 늘 숨쉬고 있고 그 야생성을 반려동물을 통해
반추하면서 위안을 삼는다는 주장에 은근 공감이 간다.
굳이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개에 물린 트라우마로 개라면 질색이었던 나 자신도
우연히 개를 키우면서 훨씬 마음이 순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을 보면 숨은 야생성의 반추인지
같은 종으로서의 애틋함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쉽게 상대를 동정하는 것조차 이기적인 행동이라니 모든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후회없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후회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가 알려주는 후회없는 인생법에 귀를 기울여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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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동물학교 1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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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있다고 믿나요? 혹시 믿는다면 윤회로 다음생에 환생하는 것도 믿으시나요?
인간은 욕심이 많은 존재인지라 영생을 추구하거나 다음생에 더 좋은 존재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생과 환생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좀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죄를 짓지 않고 좋은 일만 하다가 다시 좋은 곳에서 멋진 삶을 사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랄테니까요.
그렇다면 동물은 어떨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요.
누군가는 인간이 죽어 동물로 환생하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도 하고
동물이 사람으로 환생하면 죄없이 착하게 살다간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전제이긴 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주제임은 분명합니다.
여기 동물들의 영혼이 사람으로 환생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개, 고양이, 하이에나, 고슴도치 종류도 다양한 동물들이 '환생동물학교'에서 전생의
동물 습성을 깨끗하게 거둬내고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정말 이런 곳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 일단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동물들도 더 착하게 살다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어요?
아니 어쩌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사람에게도 혼이 있듯이 동물들도 분명 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은 어디로
갈까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오래전부터 영혼불멸을 꿈꿨던 인간들은 환생을 믿어
세상을 떠난 망자에게 부활의 메시지가 담긴 물건들은 함께 묻기도 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과거보다 행복하게 살다가는 동물들도 많지만
가혹하게 살다간 동물들도 역시 많습니다. 그래도 순하고 착한 영혼을 지닌 동물들이 환생학교에
들어가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상상은 정말 멋집니다.

      


개성이 강한 동물들이 모여서 사람이 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이 아주 코믹하게 그려집니다.
공만 보면 나도 모르게 공을 쫓게되는 강아지들의 습성을 보니 우리집 뚱이와 토리가 생각나네요.
지금도 마당에는 몇개의 공들이 굴러다니고 있으니 대체로 개를 기르는 집에는 모두 공놀이를
시키는 모양이에요. 그걸 잊지 못하고 환생학교에서도 공놀이를 즐기는 동물들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납니다. '그 버릇 개나줘라'라는 말이 있지만 개도 자기 버릇이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전생에 주인과의 추억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동물들 정말 함부로 하면 안되겠네요.

      


동물 학생들중에 하이에나인 비스콧은 전생에 주인이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주고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고슴도치 카마라는 진실을 알려줘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믿고 행복하게
살아가는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때로는 진실이 고통스런 순간이 있군요.
차라리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은 그런 순간들이요.

환생동물학교의 초보 선생은 여전히 동물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교육해야할지 난감해 합니다.
너무 인정이 많아서 때로는 제자들에게 끌려다니지만 착한 심성은 닮았으면 좋겠네요.
환생학교라는 소재가 참 신선합니다. 저도 잠깐 이런 곳이 있지 않을까 상상했었거든요.
과연 동물제자들은 사람공부를 해서 사람으로 환생을 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낙제를 해서 환생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 살짝 걱정도 되지만 다음 편엔 또 다른
좌충우돌 학교 적응기가 나올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환생하는게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잠시 고민좀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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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유물에 있다 - 고고학자, 시공을 넘어 인연을 발굴하는 사람들 아우름 27
강인욱 지음 / 샘터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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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라고 하면 참 지루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나지 않은 곳을 찾아 발굴하고 연구하는 작업은 신나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럼에도 고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유물에 숨은 진실을 밝히는 일은 짜릿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금방 생활에 적용되거나 이득을 주는 학문은 아니겠지만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발굴하는 의미있는 학문이고 인기가 없음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처럼 인연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 학문에 입문하고 고집스런 길을 걸어온
고고학자의 글에서 고단했지만 행복한 시간들을 만났다.

      


인류가 걸어온 발자욱에는 무수한 시간들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고 땅속에 숨어있는 유물
한점에는 이들의 숨결이 녹아있다. 표지에는 땅을 파고 유물을 수습하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과이 고상해보이거나 안락해보이지는 않는 고된 작업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닿을 수 없었던 시간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묻혀버릴 이야기들이 너무 흥미로웠다.

      


땅을 파서 보물을 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건지는 일이라는 말에 깊은 존경심이 우러난다.
인류가 누리는 지금의 이 풍요는 인류가 수만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토대위에 세웠졌기에
헌것을 부수고 새 것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과거의 흔적들을 사라지게하는
개발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는 의견에 동감한다.
금싸라기 같은 땅이 유적지라는 이유로 개발되지 못하고 잠들고 있는 것은 분명 아깝기는 하지만
수만년 전의 흔적들이 돈이라는 명분으로 사라져버린다면 지금의 우리는 너무 쉽게 귀한 보물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후손에게 풍요가 아닌 무책임을 전가하는 일이다.
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신을 지켜온 수많은 학자들이 너무 존경스러워 보인다.

      


오래된 동굴안에서 혹은 사막의 땅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유물 한점에도 그 시대를 살다간
이들의 스토리가 숨어있고 시간이 숨어있다. 어떤 간절함이 전해져 누군가에게 발견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전설로만 존재했던 실체가 유물로 나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상상하게 된다.
유라시아 끝에 자리잡은 한국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아내어 연구해온 외국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참 감동스럽다. 고독한 길임에도 꿋꿋하게 밟아온 그들의 족적이 있기에 우리는
잠시 그 시대를 상상하고 기억속에 붙들 수 있는 것이다.
시공을 넘어 인연을 발굴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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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이야기 더봄 중국문학 전집 1
쑤퉁 지음, 양성희 옮김 / 더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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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깃줄에 부부참새가 앉아 있었다. 포수가 총을 겨누는데 아내 참새가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재혼하지 말고 술도 줄이고 일찍 일찍 들어오고....'
그러자 포수에게 남편 참새가 외친다.
"아저씨 얼른 쏴 주세요"
참새 이야기라고 하면 우리는 이런 유머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에 제목에
등장하는 참새는 소설의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조연도 못되는 참새를 굳이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 하나
참새가 뒤에 있음을 모른다'라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지만 정작 그 뒤에 참새가 숨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이 고사성어를 책을 덮은 다음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 바오룬, 류성, 선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무대는 1980년대 개혁개방 격변의 시대로 아직은 문화혁명의 주역이었던 세대가
살아있고 공산주의의 억압에 찌들었던 세대이후 자유를 갈망하는 세대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열 여덟살인 바오룬의 가정이 바로 딱 이 시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흔을 넘긴 할아버지와 중년의 부모님과 함께 사는 바오룬은 여드름 투성이의 인물은 별
반반하지 않았고 공부도 못하는 소년인데 천성은 착해서 정신병원으로 쫓겨난 할아버니를
간병하게 된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바오룬은 발작을 일으키고 병원을 헤집어
놓는 할아버지를 묶다가 매듭을 기가 막히게 묶는 재주를 터득하게 된다.
후에 이 매듭을 묶는 재주가 저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는 걸 모르고 말이다.

      

바오룬과 동갑인 류성은 마을에서는 그나마 유지집안으로 정육점을 하는 부모덕에
가난을 모르고 자란 철부지 소년이다. 겉멋이 들어 허세도 심하지만 소심한 구석이 있다.
대략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그러듯 이 소년들에게도 첫사랑 비슷한 감정들이 스며드는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바로 선녀라는 열 다섯 소녀이다.
고아인 선녀는 정신병원의 정원사인 할아버지 부부에게 입양되어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가난하게 큰다. 성질도 어찌나 드센지 다소곳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얼굴과 몸매가 좀 남다르게 좋은 편이라 두 소년의 눈길을 끌어 삼각관계가 되고 만다.
하지만 바오룬은 자신의 감정이 뭔지 잘 모른다. 류성 역시 바오룬과 선녀를 연결해주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은근 자신이 선녀를 좋아한다는걸 미처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처럼 다소곳하고 가슴 설레이는 첫사랑이 아닌 다소 과격하고
시끄러운 사랑놀음에 휩싸이는데 결국 류성의 꼬임을 받은 바오룬은 선녀를 매듭으로 묶어놓고
도망가고 류성은 선녀를 강간하고 만다.
이렇게 세 사람은 불운한 운명에 휩싸이고 바오룬은 류성의 죄를 뒤집어쓰고 강간범으로
감옥게 갇히고 류성은 부모의 거간비로 죄를 모면하고 석방되지만 철저한 악인은 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10년 후 다시 만난 세 사람은 과거의 일로 다시 얽히게 되고 끔찍한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줄거리 그 자체는 크게 세련되거나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기의 중국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공산주의체재가 흔들리고 자본주의가 유입되는 시기의 중국은 '돈'이 최고라는 의식이
팽배하기 시작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던 인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악귀처럼 싸우게 된다.
그 와중에 온갖 범죄와 악이 싹트는 모습들이 드러난다.
졸부들을 상대로 웃음을 팔고 스폰서를 찾는 여자들, 과거 내노라했던 대장이었지만 지금은
졸부의 위협과 싸워야 하는 과거의 사람들, 그러면서도 효가 중요시되던 예전 관습이 겹치면서
혼란에 빠진 신세대들의 모습들이 우리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와는 다른 풍습들도 눈에 띈다. 혼이 빠져나갔다고 절망하면서 조상들의 유골을 찾아 헤매는
바오룬의 할아버지가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잘 모르면서도 자꾸 선녀에게 끌리는 바오룬이 비극으로 치닫는 계기가
아주 사소한 선녀의 말 한마디였다는 것에서 아직은 순박한 정서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세 주인공이 등장하는 80년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작가여서 더 리얼한 작품이 탄생
된 것 같다. 우리와는 다른 정서로 인해 몰입이 쉽지 않지만 중국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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