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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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좀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로서는 도저히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한 번 더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다만 오스터의 그 놀라운 문장력과 풍부한 예화들에는 감탄을 보낸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도 고전 읽기를 강조했지만 (사실 그가 많이 읽는 것 외에는 소설 잘 쓰는 별 비법이 없다고 한 게 아주 마음에 든다), 폴 오스터 역시 아주 많은 고전들을 읽는 것 같다

그가 읽은 책들에 대한 느낌들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또 그의 주인공들은 탐욕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다

쉽게 공감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계속 읽는 까닭은, 책에 몰두하는 바로 그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뉴욕 3부작"이라는 제목으로 세 중편들이 엮어졌기 때문에, 나머지 두 편을 다 읽으면 뭔가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아무 소득이 없다

세 편의 이야기는 다만 화자가 같을 뿐, 사건 자체로 보면 큰 연관성은 없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오스터가 사건의 전개 보다는 쫒는 자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문체를 중요시 했다고 하는데, 소설의 문체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스터의 작품을 적극 추천하는 바다

적어도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문체나 묘사력에 있어서는 아주 훌륭하다

사건 전개나 결말은 다소 마음에 안 들지만 말이다

세 편은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 상관이 없는 독립된 이야기다

다만 세 편 모두 은둔해 버린 누군가를 찾는 과정이고, 쫓기는 사람 보다는 쫓는 사람의 입장에서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령들"에서는 색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블루, 화이트, 그레이, 브라운, 바이올렛 등등

주인공 블루는 사설 탐정인데 화이트라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블랙을 감시한다

왜 감시하는 가는 모르고, 다만 화이트가 얻어 준 아파트에서 블랙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매주 보고서를 보내기만 하면 된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일은 1년을 넘기고, 그 사이 일에 충실하기 위해 연락을 끊는 바람에 그의 애인은 다른 남자와 만나 버린다

어느 날 블랙을 미행하던 도중, 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팔짱 끼고 가는 애인을 보는 순간 (블루는 그녀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이성을 잃고 의뢰인 화이트에 대한 분노를 폭발한다

대체 나는 왜 이 짓을 1년씩이나 하고 있었던가?

나는 왜 블랙이란 놈을 쫓고 있는가?

혹시 블랙과 화이트가 한통속이 되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소설은 어이없이 이렇게 끝나고 만다

사실 블랙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블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블랙과 화이트가 동일 인물인지도 모른다

혹은 화이트가 블랙에게는 블루의 미행을, 블루에게는 블랙의 미행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

다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을, 왜 감시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1년이 넘게 매달리는 남자의 심리 묘사는 그럴 듯 하다

결국 그 과정 속에서 블루란 인간의 삶은 완전히 파기되어,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마지막 "잠겨 있는 방"에서 이 모든 사건의 본질이 자명하게 드러날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유령의 도시"에서 등장한 화자는 이제 주인공이 되어 팬쇼라는 어린 시절 친구를 쫓는다

어느 날 그는 팬쇼의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팬쇼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거의 형제처럼 자란 두 사람은 성장 후 연락이 끊긴 채 살아가는데, 팬쇼가 행방불명 되기 전 평생 써 온 글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팬쇼의 아내 소피는 임신 중이었다

팬쇼가 쓴 책은 큰 히트를 치고, 주인공 "나"는 소피와 가까워져 그녀와 결혼한다

어느 날 팬쇼가 쓴 편지가 도착하는데, 그녀와 어린 아들을 니가 책임져 주길 바랬다면서 책을 펴 낸 인세로 잘 살라 당부하고, 절대 자신을 쫓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일까?

팬쇼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편집자는 그의 전기를 써 보라고 "나"에게 제안하고 "나"는 꺼림칙 하면서도 승낙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소피와도 멀어진다

마치 사라진 팬쇼가 "나"를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유령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실상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인데 괜한 당의성을 느껴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쫓는다

퀸은 스틸먼을 쫓고, 블루는 블랙을 쫓으며, "나"는 팬쇼를 쫓는다

처음에는 다 그렇고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 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

 

팬쇼를 찾아 파리에 갔을 때, 피터 스틸먼이라는 젊은이가 등장하는데 혹시 그가 "유령의 도시"에서 나온 바로 그 스틸먼인가 궁금했다

이 스틸먼의 등장으로 사건이 풀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게도 그냥 등장했을 뿐이다

사실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아 풀어진다면 그렇고 그런 추리 소설 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게 위안을 해도, 한숨이 나오긴 마찬가지다

도대체 개연성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처음에 소피가 팬쇼를 찾기 위해 고용한 사설 탐정 이름이 퀸으로 나오는데, "유령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쫓던 바로 그 퀸인가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 퀸으로 생각하기엔 정황이 안 맞는다

혹시 또 모르지, 텅빈 스틸먼의 집에서 사라진 퀸은 다른 곳에서 탐정 노릇을 하고 있었을지

오스터는 독자들에게 너무 불친절 하다

어쨌든 퀸은 스틸먼을 쫓았던 것처럼, 자기 삶을 버린 채 또 평생 팬쇼를 찾는다

 

마지막에 팬쇼가 "나"와 만난 후 그 동안의 정황을 기록한 빨간 노트를 주는데, 난 여기에 세 편의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 들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주인공 "나" 역시 그 노트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니, 나같이 추리력 부족한 독자는 당연히 모를 뿐이다

팬쇼는 자살하겠다고 말했는데, 실제 그가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안 나온다

 

다만 이런 추리는 할 수 있다

팬쇼는 자신을 둘러 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어느 날 종적을 감춘다

남겨진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했던 그는 친구 "나"에게 이 책임을 떠 넘긴다

만약 "나"가 조용히 살아 줬으면 그걸로 만족할텐데, 뜻밖에도 "나"는 자신을 뒤쫓는다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던 팬쇼에게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반면에 "나"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팬쇼로부터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와 인세를 선물받게 된다

그로서는 팬쇼가 제공한 이 행복들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지금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하지만, 거저 얻은 것인 만큼 뭔가 꺼림칙 했을 것이다

기왕이면 팬쇼가 완벽하게 사라지길, 즉 죽기를 바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팬쇼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에 팬쇼의 어머니와 섹스를 한다

팬쇼의 어머니 역시 아들로부터 소외당했다는 피해 의식에 젖어 사는 여자인데, 형제처럼 지내고 손자의 아버지까지 된 "나"를 아들과 동일시 한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하는 것은 곧 아들 팬쇼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두어 차례 관계를 가진 후 죄책감에 소피를 피하게 되고, 결국 팬쇼를 찾는데 더욱 몰두한다

말하자면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할 때까지, 미친듯이 매달리는 것이다

이런 "나"의 행동을 보면서 팬쇼는 분노했을 게 틀림없다

 

오스터는 은둔자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달의 궁전"에 등장하는 에핑과 "신탁의 밤"에 나오는 닉 보언에 이어, "뉴욕 3부작"의 팬쇼에 이르기까지 다들 자신을 알고 있는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부류인데, 과연 이게 가능할까 나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어디론가 증발해 다른 인물로 산다는 것, 글쎄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스터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일까?

오스터가 좋아하는 배경은 야구에 이어 뉴욕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뉴욕은 살아 있는 하나의 캐릭터로써 다가 온다

다음 소설은 좀 더 독자에게 친절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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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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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뉴욕 3부작"을 어려운 소설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런 느낌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쉽게 몰입이 안 된다

특히 잘 봉합되지 않은 듯한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달의 궁전"에서는 환상적으로 딱딱 들어맞는 결말을 맺었는데, "신탁의 밤"이나 "유리의 도시"는 다소 허무하다

 

폴 오스터는 인간이 처한 극단적인 가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가 노르웨이의 노벨상 수상자 함순이 쓴 "굶기"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의 소설에는 꼭 극단적인 기아가 등장한다

그것도 주인공이 선택해서 겪는 가난과 기아다

말하자면 해결책이 있는데도, 자신의 극기 정신을 시험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극한적인 상황으로 몰아 세운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퀸은 스틸먼 부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아파트 앞에서 거의 24시간 내내 보초를 선다

수중에 있는 돈이 300달러였는데, 그것을 다 쓰고 나면 현금지급기까지 가는 동안 침입자가 등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아껴서 쓴다

극단적인 단식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으로 남겨 두고 (사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거기에 가까이 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말하자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양의 식사로 버티는 것이다

또 잠자는 사이에 침입자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수면 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는 15분 간격으로 잠든다

15분 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생활 리듬을 맞춰 깨고 일어나다 보니, 나중에는 종소리와 맥박 소리를 구분하기 힘들다고까지 한다

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철제 쓰레기통 안에서 지낸다

청소부가 오기 직전에만 쓰레기통을 벗어날 수 있다

 

대체 그는 왜 이런 극단적인 일을 하는가?

스틸먼이란 남자를 지킬 필요가 뭐란 말인가?

피터 스틸먼은 생명의 은인도 아니고 국가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설사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대체 퀸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작가는 여기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아마도 자기 암시에 빠져 스스로를 세뇌시킨 것 같다

 

처음 퀸의 집에 전화가 걸려 오는데, 폴 오스터라는 사설 탐정을 찾는다

피터 스틸먼의 부인 버지니아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퀸에게 자꾸 부탁을 하고, 결국 퀸은 호기심이 일어 탐정 행세를 하게 된다

상대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다면, 때로는 그 사람 행세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퀸은 추리 소설 작가로,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은둔 생활 중이었다

말하자면 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아내와 아들은 일찌기 죽었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으며, 출판사와의 계약 문제도 대리인을 시키는데 그 대리인과도 직접 만나지 않고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할 정도다

이처럼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한 퀸은, 다시 폴 오스터라는 탐정 역할를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인다

(은둔하는 사람도 작가가 좋아하는 캐릭터다)

 

그의 의뢰인은 아버지에 의해 가둬진 가엾은 아들인데, 아버지 스틸먼은 신학 교수였다

인간 본연의 고유한 언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스틸먼은 두 살 먹은 아들을 9년 동안 방에 가두어 기른다

사회에서 말을 배우지 않아도 언어가 본능이기 때문에 스스로 말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스틸먼은, 과연 그 언어가 어떤 것인지 (바벨탑을 쌓기 전 모든 인류에게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은 바로 그 언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실험들이 과거에도 몇 번 행해졌는데 그들은 모두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또 늑대 소년 같은 case가 몇 건 발견되면서, 인간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언어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런데 이 늑대 소년들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 가지 언어를 배우긴 했지만, 물질과 섹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하고, 그 개념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질이야 그렇다 치치만 왜 섹스에 대해서 무감했을까?)

그런데도 스틸먼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에 근거해 바벨탑 이전 최초의 언어를 알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에 장황하게 소개된 여러 논문들을 읽으면서, 오늘날 인류의 번영을 이끈 건 어쩌면 과학 기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종교적인 담론들은 실상 우리 일상의 편안함에 별 기여를 못하는 것 같다)

 

결국 9년 만에 미치광이 아버지는 경찰에 붙들리고, 13년형을 산다

피터는 언어 치료사와 결혼해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런데 스틸먼이 출소하면서 협박 편지를 보냈고, 이 부부는 폴 오스터라는 유능한 사립 탐정에게 스틸먼의 동향을 살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퀸은 스틸먼을 집요하게 따라 다닌다

그는 스틸먼의 모든 행동들을 빨간 노트에 기록하고 감시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사라져 버린다

호텔에서 그를 놓친 퀸은 강박증에 휩싸여 아들 스틸먼 부부의 아파트 앞에서 거의 24시간 동안 감시를 한다

말하자면 스틸먼이 아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입구에서 원천봉쇄 하는 셈이다

 

나는 스틸먼이 퀸을 따돌리고 결국 아들을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작가는 뻔한 결말을 거부한다

스틸먼은 자살했고 (신문에 난다), 그가 열심히 지키던 아파트는 텅 비어 있다

스틸먼 부부는 진즉 이사를 갔던 것이다

공포에 시달려서였던지,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전화 번호도 먹통이 되서 찾을 길이 없다

더구나 퀸에게 사례금으로 준 수표는 부도 처리 됐다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자, 집주인은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버렸고 갈 곳이 없는 퀸은 텅 빈 스틸먼 부부의 아파트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버지 스틸먼을 추적할 때 쓴 빨간 노트에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하면서 햇빛이 비치면 글을 쓰고, 어두워지면 자는 식의 일상을 반복한다

신기하게도 음식은 항상 따듯하게 데워져 옆에 차려져 있다

그는 누가 가져다 놨는지 궁금해 하지도, 신기해 하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3인칭 시점인 줄 알았는데, 역시 화자는 따로 있었다

퀸의 행방을 찾던 책 속의 화자는 그가 남긴 빨간 노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었던 것이다

그 집에 갔을 때 퀸은 사라지고 노트만 남는다

화자는 퀸의 행운을 빌면서 이 어이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사건의 개요가 밝혀질 거라 믿었던 나 같은 순진한 독자는, 그저 황당할 뿐이다

어쩌면 퀸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처럼 어느 낯선 도시로 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오스터는 뉴욕을 떠난 퀸을 대상으로 또 다른 소설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특이하게도 작가의 실명이 등장한다

아멜리 노통의 "로베르트 인명사전"에서도 저자가 직접 등장해 주인공으로부터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폴 오스터는 사립 탐정이자 동명이인의 작가로 나온다

이 소설의 화자는 폴 오스터의 친구다

작가가 직접 등장한 만큼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 기대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름만 빌렸을 뿐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기 위해서였을까?

 

뉴욕 3부작이라는 제목으로 세 가진 중편을 엮은 작가의 편집이 신선하다

그렇지만 "신탁의 밤"처럼 크게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 독특한 아이디어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다

확실히 오스터는 내공이 깊은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가 읽었던 소설과 시 평론집 "굶기의 예술"에서도 느낀 바지만,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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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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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이 한 때 무척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일본 소설은 왠지 정이 안 가 (스타일이 나랑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안 읽고 영화로 봤다

아주 재미없었다

진혜림이 예쁘다는 생각만 했다

그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소설을 읽게 됐다

제목에 우선 끌렸다

"낙하하는 저녁"이라...

"울 준비는 되어 있다"처럼 제목 짓는데 대단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첫 도입부는 괜찮았다

툭툭 끊어지듯 묘사하는 서술 스타일이 신선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이야기의 힘을 잃고 방황한다

줄거리의 축이 없다고 해야 하나?

특히 하나코의 자살 장면에서는 좀 황당했다

왜 죽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혹은 개연성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실망스런 결론이다

꼭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툭툭 끊어지는 서술들, 일정한 줄거리가 없이 그저 주인공 마음대로 흘러가는 전개, 그리고 늘 황당하리만큼 어이없는 결론들

플롯이 사라진 것도 현대 소설의 특징인가?

혹자는 CF를 보는 듯한 영상미에 치중하는 소설들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

 

하나코란 여자에 대해 좀 더 개연적인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일상을 스케치 하듯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독자에게 아주 부족하다

하나코라는 캐릭터에 전혀 공감이 안 간다

마지막에 자살한 걸 보고 혹시 친동생을 사랑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결국 죽음으로 끝을 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대한 작가의 해설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또 나카지마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다

그저 막연히 하나코의 뒤를 봐 주는 후견인 비슷하구나, 느낄 뿐이다

 

다만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애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15개월에 걸친 실연"이라는 광고 문구가 마음에 와 닿는다

1년을 사랑하면, 그 배가 되는 시간이 흘려야 비로소 이별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익숙해진 신경 회로의 고리를 끊는데 꽤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이란 느낌에 속지 말라는 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문자를 보내고, 만나서 영화를 보고, 전화하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들에 얽매여 그 상대가 없어질까 봐 헤어짐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리카가 8년 동안 함께 산 다케오를 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15개월이 안쓰럽다

그렇지만 참 용감하게 잘 이겨낸다

지나친 비련에 빠지지 않고 자기 생활을 견지하면서 비교적 꿋꿋하게 견뎌 나간다

하루 쉬라고 하나코가 권했을 때, 단 하루라도 쉬게 되면 영영 일상의 궤도를 일탈해 버릴 것 같다고 굳이 휴가지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마지막에 하나코가 죽은 후 다케오네 집에 찾아가 그에게 덤비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확실히 일본은 섹스에 자유로운 것 같다

리카는 거의 다케오를 강간하려고 하는데, 럭비 선수 출신인 남자를 강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남자들은 섹스의 본능에 대해 누누히 강조하지만, 막상 하고 싶지 않을 때 여자가 덤비면 아주 싫은 모양이다

(문득 강간당할 때 너도 즐기지 않았냐는 뻔뻔한 놈들의 얼굴을 갈겨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리카는 그렇게 거절당한 후 비로소 다케오를 마음에서 접는다

이제 정말로 그를 잊은 모양이다

 

다케오가 단 사흘 만에 반한 하나코와 (리카와는 8년을 살았는데) 리카가 함께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 봤다

거의 남편이나 다름없던 남자의 새로운 애인과 한 집에 산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하나코의 캐릭터를 미루어 보면 충분히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데, 만약 이런 독특한 여자라면 나도 제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하나코가 정작 다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케오가 가엾어 마음아파 하던 리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너무 사랑하면, 비록 내가 버림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가 행복하길 바랄 수 있는 법이다

나의 비참함은 그대로 놔 두고, 그의 불행에 가슴아파 할 수 있다

 

꽤나 인기가 있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도 된 모양인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15개월에 걸친 이별 과정은 공감이 간다

(물론 진짜 이별은 단 사흘 만에 결정됐지만, 마음으로부터의 이별은 길었다)

리카처럼 실연을 견디는 순간들을 담담히 글로 써 간다면 조금은 편하게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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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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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보다 재미없는 책이다

"달의 궁전"에서 보여준 숨막히는 우연의 일치들은, "신탁의 밤"에서 그 힘을 잃고 길을 헤매는 기분이다

작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동어 반복인데, 폴 오스터는 워낙 개성이 뚜렷해서인지 어떤 책을 읽어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신탁의 밤"이라는 제목은 참 독특하고 매혹적이다

분위기로 봐서 뭔가 예언적인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의미였다

글을 쓰는 것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달의 궁전"에서 보여 준 세 가지 액자 소설을 여기서도 차용한다

시드니 오어는 소설을 쓰고, 그 소설 속의 주인공 닉 보언은 편집자이며, 소설 속에서 그는 르뮈엘 플래그가 등장하는 "신탁의 밤"을 읽는다

르뮈엘 플래그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는데, 결혼하는 날 밤 사랑하는 신부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미리 보고, 아직은 아무 죄도 없는 그녀를 버릴 수 없어 자신이 목을 매고 만다

미래를 아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예다

 

"달의 궁전"에 등장한 "문 팰리스"라는 레스토랑처럼, "신탁의 밤"에서는 "페이퍼 팰리스"라는 문구점이 등장한다

이 곳 주인은 중국인 장인데, 시드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자신이 투자하는 창녀촌으로 데리고 간다

그는 장을 부도덕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소개해 준 프랑스 미녀 마틴과 섹스를 한다

시드니는 자기도 모르게 유혹에 빠져 섹스했다는 사실에 괴로워 하며, 장에게 인사도 없이 창녀촌을 떠난다

사실 이 부분에서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서로 보면 술집에서 섹스한 것이 도덕적 괴로움을 주는 일인지, 의심스럽다

남자의 본능을 내세우며 스트레스를 푼다든지, 접대 받았다다는 식으로 전혀 양심에 꺼리끼지 않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보면 웃을 일이다

더구나 장은 창녀촌에 투자하는 자신을 비웃으면서, 정작 시드니 자신은 창녀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그와의 친구 관계를 끊어 버린다

여자를 소개만 받고 즐기기만 할 뿐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인가?

바니 클럽에 가면 그녀들의 몸매를 눈으로 즐길 수는 있으나, 직접적인 관계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자칭 도덕적이고 보수적이라는 한국에서는 버젓이 자행되는 매매춘이 문란하고 타락한 미국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요구하는 일인지, 참 아이러니컬 하다

우리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성 구조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시드니의 아내 그레이스와, 그녀의 후원자 존 트레즈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결론은 모호하다

존은 잘 나가는 소설가로 그레이스의 삼촌 같은 사람이고, 그녀와 결혼한 시드니에게도 무척 잘 대해 준다

시드니는 선배 작가로서 존을 존경한다

그런데 그레이스가 임신한 후 낙태 여부에 대해 고민하자, 존과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존 역시 그레이스가 낙태하길 원했던 것이다

또한 존의 아들 제이콥은 그레이스를 매우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자기 아버지와의 부적절한 관계 탓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레이스는 존과 시드니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누구 아이인지 확실치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시드니는 자기 소설 속의 소설인 "신탁의 밤"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며, 혹시 이 소설이 미래를 예언하는 게(자신과 그레이스의 파멸 같은) 될까 봐 찢어 버린다

궁핍으로부터 구원해 줄 소설이라고 열과 성을 다해 쓰던 소설을 말이다

 

시드니의 예감처럼 소설이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도 있을까?

흔히 불길한 일에 대한 직감이나 육감을 얘기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그 불길한 느낌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시드니는 존과 그레이스의 관계를 의심하고, 결정적으로 존의 아들 제이콥이 그레이스를 폭행해 유산까지 시키지만 그레이스가 문제 삼지 않는 한,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배우자의 부정에 대해, 남자 쪽이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데 시드니의 경우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사실이 밝혀지면 낫겠지만, 의심은 현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상을 낳기 때문에 더 괴로운 법이다

그런데도 불길한 일을 막기 위해 공들이던 소설을 찢어 버리고, 모든 것을 묻기로 결심한 시드니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알 만 하다

 

그의 소설에 빼 놓지 않고 등장하는 우연적인 사건이 여기서도 나오는데, 시드니 소설의 주인공 닉이 돌벼락을 맞고 죽을 뻔 한 후,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낯선 도시로 떠나는 대목이다

이거야 말로 "달의 궁전"에서 에핑이 사막에서 죽을 뻔 한 후 다른 인생을 사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닉은 전화 번호부 모으는 일을 하는 흑인 운전수 밑에서 일을 하면서, 그가 미치광이가 아닐까 염려하면서도 이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면 새로운 인생이란 없고, 차라리 뉴욕으로 돌아가 옛날 그대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뉴욕에서 돌벼락 맞은 사건이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안 끼친 게 된 셈이므로 그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기로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사건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는 주인공들은, 우연을 강조하는 오스터의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달의 궁전"에 익숙한 독자라면 식상할 것이고, 오스터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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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ian 2004-08-1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의 궁전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우연은 아닌 듯.
 
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독특한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이렇게 개성있는 소설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은 기분이다

제목과 소설 내용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데도, 묘한 어울림을 주면서 시선을 끄는 그런 제목 말이다

책 디자인도 꽤나 개성적이다

원래 노통의 소설들은 길이가 짧은 편인데, 이 소설도 200페이지가 채 못되고, 글씨도 커서 동화책 읽듯 금방 읽어버렸다

소설이 짧으면 완성 구조를 갖기 힘든데, 그녀는 명성만큼 재치있는 결말을 낸다

 

가장 내 마음을 끄는 대목은 발레를 향한 플렉트뤼드의 집념이다

클래식 발레가 추구하는 가장 큰 이상이 바로 중력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저자의 서술처럼 마치 비밀을 캐낸 기분이다

언젠가 발레를 소개하는 책자에서 그녀들은 끊임없이 날기를 원한다는 문장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그저 문학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발레리나들은 진짜로 날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혹독한 훈련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공중에서 떠 있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

아멜리의 표현대로 옆으로 길게 늘어 선 보조봉은 그녀들의 횃대다

 

플렉트뤼드를 통해 아멜리는 거식증에 빠지는 심리 구조를 잘 묘사한다

음식에 대한 욕구는 본능인데 대체 어떤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고 죽어 가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플렉트뤼드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발레리나가 되려면, 즉 공중을 날기 위해서 체중이 적게 나가야 한다는 건 필수 조건이다

발레 학교에서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해골이 되라고 강요한다

날씬한 사람은 보통으로 간주되고, 정상인 사람은 뚱뚱한 암소로 비유된다

이런 상황이니 먹는다는 행위에 두려움을 갖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먹고 싶은 본능을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참는 정도다

말하자면 굶는 것이 고통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거식증이 되면 먹는 행위가 오히려 고통이다

 

플렉트뤼드는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학교의 규칙을 완전히 내제화 시켜 자발적으로 음식을 거부한다

칼슘 보충을 위해 유일하게 허용된 탈지 요구르트마저 그녀는 거부한다

결국 골다공증에 걸려 어느 날 다리뼈가 부러지고 만다

 

식욕을 이겨낸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배설의 욕구를 참는 것처럼, 목적을 위해서 음식의 욕구를 이겨 내는 일은 고도의 절제를 요한다

그런데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렬하면 음식 자체를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거식증이 되고 만다

오히려 먹는 행위가 고통이 될 정도로 발레에 대한 그녀의 욕구는 절정에 이른다

이 정도라면 생명을 걸었다고 할 만 하다

그녀는 이제 뚱뚱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저 정도로 먹고 어떻게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사는지, 혹은 저렇게 먹기만 하고 인생의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다

 

사실 나는 하나의 목표에 집요하게 몰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마 대부분 이런 인물을 동경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이겨내는 사람들이니까

또한 이런 사람들은 그 목표에만 매달리니까 성과도 훌륭한 편이다

그 절제력에 반하고, 다시 그들이 이룬 업적에 존경을 표할 것이다

위인전을 보면 대부분 놀라울 정도의 자기 절제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버리고 목표에만 정진하는 얘기들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사실은 끔찍한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플렉트뤼드는 결국 다시는 발레를 할 수 없게 됐지만, 만약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발레리나로서 성공해 평범한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정들, 심지어 먹고자 하는 본능마저 메말라 버린 건조한 인간인데 말이다

 

자기 절제가 사실은 자신에 대한 가학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절제는 찬탄받아 마땅한 덕목이지만,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잃는 게 인생이다

그 뒤에 숨겨진 끔찍한 노력과 고통들, 그리고 감정의 메마름, 인간 관계의 단절 등도 늘 염두에 두면서 진짜 세상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항상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은 (사실 엄격한 의미의 반전도 아니지만) 마지막에 작가 아멜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살 직전, 첫사랑을 만나 구제받은 뒤 행복한 삶을 살려던 그녀에게 작가의 표현대로 "아멜리 노통이라는 끔찍한 불행이 찾아온다"

소설에 어떻게 자신을 등장시킬 생각을 했는지, 발상이 놀랍다

아마 그래서 겉표지에 나를 죽인 자의 이야기라고 소개를 한 모양이다

동화같은 이야기라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는데 (솔직히 제대로 결말을 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뒷통수를 치는 결말을 보여준다

아멜리가 각광받는 이유는 이런 비상투적인 결말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플렉트뤼드의 어머니는 19세에 결혼한 후 아이를 임신하는데, 임신 9개월 무렵 남편의 무능력함에 화가 나 총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그녀 역시 교도소에서 아이를 낳은 뒤 자살한다

아멜리는 플렉트뤼드에게 뱃속에서부터 살인을 관찰한 살인녀의 딸인 네가, 그동안 살인 충동을 어떻게 이겨왔는지 신기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계속 플렉트뤼드의 무의식 속에 살인 본능이 숨어 있다고 자극하고, 결국 플렉트뤼드 역시 어머니처럼 순간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녀를 죽인다

말하자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를 죽인 것이다!!

 

문장이나 구조가 뛰어난 소설은 아니지만, 발상이 신선하다

툭툭 끊는 듯 이어지는 서술 방식도 독특하다

배수아 소설을 보는 느낌도 든다

(그녀 소설보다는 훨씬 재밌다 배수아는 개성적인 듯 하면서도 사실은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를 한다)

일단 분량이 짧아 읽기가 편하다

그녀의 기발한 발상들을 좀 더 들여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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