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이름이 좋아, 또 전경린이라는 작가 이름이 예뻐서 꼭 읽어 보고 싶던 책이었다


조금만 읽고 자려고 했는데 소설의 흡입력에 끌려 한 권을 다 읽고 말았다


그리고 오랫만에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작가는 등장 인물의 이름을 짓는데 꽤 고심한 것 같다


흔한 이름들이 아니다


주인공 "미흔"도 그렇고, 남편 "효경"도 여자 이름 같은데 남자에게 주어지니까 묘한 분위기가 풍긴다


아들 "수"는 말할 것도 없고, 미흔과 게임을 벌이는 "규"도 흔하지 않는 외자 이름이다


간통하다 들켜 시아버지를 낫으로 살해한 엽기적인 마을 여자의 이름도 "부희"다


"수"와 "규"가 제일 마음에 든다


 


그녀에게 몇 달 간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 정사만 벌이는 게임을 제안한 "규"란 남자는 사설 우체국의 주인이다


부동산과 주식 등으로 재산을 축적해 가고, 돈 많은 이혼녀와 결혼해 그녀의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의 아이는 갖지 않는, 잘 생긴 바람둥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도시에서 자라고 방학 때 잠깐 규에게 다녀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탤런트 이종원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밀애"에서 남자 주인공 "규" 역을 맡은 배우인데, 소설에서 묘사된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는 시골 의사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에 미흔이 다리를 삐어 보건소로 가자 뭔가 이뤄지는 줄 알고 긴장하며 읽었다)


가벼운 사랑을 하면서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고, 내면에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여자에게 냉정하려고 애쓰는, 그렇지만 사실은 사랑에 대한 열정을 숨겨 놓은, 겉보기에는 차갑고 자유로운, 또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포기해 버린 권태로운, 그리고 아주 잘 생긴 남자, 규!!


이종원을 생각하니까 "규"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져서 감정 이입이 쉬웠다


그래, 시골에 그 정도 남자가 있다면 권태로운 결혼 생활 도중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사실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먼저 깬 사람은 남편 효경이다


인쇄소 사장인 효경은 여직원과 바람을 피우고 낙태까지 시킨다


그리고 대담한 여직원이 집에 찾아와 직접 미흔에게 낙태한 사실을 말하면서,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예민하고 여리며, 결벽증이 있는 미흔은 자신의 인생에 하나 뿐이라고 믿던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며 헤어지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한 채, 만성 두통에 시달리며 산다


결국 효경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울 생활을 접고 미흔을 위해 시골로 내려가 서점을 연다


 


나는 미흔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편을 용서하지도 못하면서 절대 넌 나를 못 버려, 넌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며 나를 부양해야 돼, 하는 식으로 남편을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흘러 가는 대로 내버려 둘 뿐이다


나라면 이혼을 할 것이다


자식을 생각하고, 여전히 남편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고,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또 남편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길 원한다면, 용서하고 잊어 버릴 것이다


미흔처럼 스스로와 남편을 괴롭히며 몇 년을 한 집에서 사는 건 못 견딜 것 같다


 


시골로 내려 온 젊은 여자는 당연하게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역시 혼자 사는 젊고 부유하며 잘 생긴 남자와 썸씽이 생긴다


규가 미흔에게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섹스만 즐기는 4개월짜리 게임을 제안했을 때, 통속적이고 유치한 싸구려 비디오를 보는 기분이 들어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결국 나이 들어 남녀가 만나면 섹스 빼고 서로에게 원하는 게 뭐가 있겠어? 하는 식의 냉소적인 시선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잘생기고 고독해 보이는 괜찮은 남자 같은 규도 결국 원하는 건 섹스일 뿐이다, 사랑 따윈 없지...


 


그런데 미흔은 규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섹스를 즐기기 위해 만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규에게 빠져 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규에게 게임을 허락했던 이유도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미흔 자신은 섹스할 상대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감정을 교류할 사랑하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통속 소설과는 다르게, 오히려 현실적으로 규 역시 미흔에게 빠져 든다


그렇다고 둘이 죽고 못사는 사이도 아니다


다만 서로를 그리워 하고, 생각하면 애틋해지고, 상대의 고통을 보면 마음이 아파지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책을 읽으면서 사랑의 감정이란 반드시 그 상대여서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 되면 빠질 수 있는 감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은 자칫 집착으로 사랑을 변질시킬지도 모른다


 


규를 사랑하는 미흔의 감정은 소설 곳곳에 잘 드러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절박함과 그리움, 혹은 안타까움과 떨림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단지 섹스를  위해 만나는 사이라 할지라도, 남녀간의 감정 교류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는 흥분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사랑 따위는 없어, 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사람도 막상 이성에게 호감이 느껴지고, 그의 불행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면 흔들리기 마련일 것이다


규에게 부치지도 못할 장문의 편지를 쓰고, 가방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결국 남편에게 들켜 어이없이 발각되고 마는 미흔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감정의 과잉이 넘치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그 격렬함을 쏟아 낼 수도 없고, 스스로 삭이지도 못해 가장 주도면밀 해야 할 때조차 (증거를 남기면 안 되는 불륜의 경우에도)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규가 보고 싶어 잠옷 바람으로 창문을 넘어 그의 집으로 숨어 들어 온 미흔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내는 규를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도 미흔을 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마저 사랑의 격렬함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일상의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눌렸을 것이다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관계는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행동해야만 일상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랑도 즐길 수 있다


한밤중에 연인이 보고 싶어 잠옷 바람으로 남편 몰래 자기 집으로 기어 들어 온 여자는 위험하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미흔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두려워 했다


사랑이란 늘 조용한 (그러나 권태로운) 일상을 뒤흔들어 논다


 


결국 작은 시골 마을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남편 효경만 모른 채 퍼져 나간다


규는 미흔을 보호하기 위해 바람둥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게 일부러 다른 여자와 어울린다


미흔이 규의 깊은 뜻을 안다는 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젊은 여자와 나도는데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할만한 냉철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미흔은 더욱 더 질투심과 소유욕으로 몸이 단다


마지막 끝이라도 잘 맺자는 심정으로 규를 만나러 간 미흔은 그 모텔을 나오다가 남편에게 들통이 난다


꼭 소설이 아니라 할지라도 현실에서도 이런 어이없는 우연은 흔하게 일어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간 자리에서 꼭 덜미가 잡히게 마련이다


효경은 모텔에서 나오는 미흔을 보고 이성을 잃고 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편지의 주인이 누구냐고 몰아 세운다


물론 미흔은 두려움에 떨지만 끝까지 함구한다


효경이 규에게 찾아가 행패 부리는 꼴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남편의 손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남자가 봉변 당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한 양, 그녀는 효경의 폭력에 몸을 맡긴 채 끝까지 규의 이름을 불지 않는다


 


그녀는 효경에게 짖밟히면서 과연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분노할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이 남아 있었나, 의심스러워 한다


미흔은 왜 효경이 분노하는지 의아해 하며, 왠지 그 분노가 가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왜 효경은 미흔을 죽일 듯 달려 들었을까?


배신당했다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미흔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둘의 결혼 생활을 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져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서 억지로 유지해 나가는 지경이었는데, 왜 효경은 미흔에게 그토록 분노하며 폭력을 휘두를 정도까지 흥분했을까?


나중에 효경이 심경을 고백한다


"왜 하필 그 때였니? 내가 너와 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결심한 그 때,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때, 왜 하필 그 순간에 나를 배신하거니?..."


 


효경에게 발각된 후 온 몸에 멍 투성이 된 미흔을 차마 보내지 못하고 자신의 차에 태우고 떠나는 규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규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 약속 장소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는 미흔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오히려 한걸음에 달려 오고 만 규의 아픈 마음이 그대로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떠난다고 해도 결국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은 당신을 이대로 보낼 수 없소, 어쨌든 오늘은 보낼 수가 없소..."


자신으로 인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사랑하는 여자를 그대로 보낼 수 있는 베짱 좋은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호텔에서 단 하룻밤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 온다


오는 길에 과속으로 사고가 나고 규는 큰 부상을 입는다


 


소설에는 규의 그 다음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가 미흔이기 때문에 미흔이 규의 소식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므로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떤 식의 결말이든 다 신파고, 통속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끝까지 규의 근황에 대한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다만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다리 병신이 됐다는 말도 있고, 뇌에 손상을 받아 바보가 됐다는 말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라 옛날처럼 행복하게 잘 산다는 식으로 모호한 결말을 낼 뿐이다


중요한 건 미흔의 결말이다


불륜이 발각된 후 미흔은 규의 이름을 대는 대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효경에게 힘없이 해결책을 알려 준다


"날 버려"


결국 효경은 처음에는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지만, 미흔의 말대로 한다


미흔이 낯선 도시로 소리없이 사라진 후 그녀를 찾아 수개월을 헤매지만, 막상 그녀와 대면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효경은 쓸쓸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과, 이제는 정말로 그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오히려 진정으로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미흔에게 함께 산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베풀어 재산도 떼어주고, 원한다면 아무 때나 아들 수를 봐도 좋다고 허락한다


또 진정으로 니가 잘 살길 바란다고 그녀의 행복도 빌어준다


 


미흔은 이제 사설 우체국의 직원이 되어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살아간다


사랑이 헤집고 간 일상을 담담히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규를 그리워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유효 기간이 끝나 버린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마저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 6개월의 짧은 사랑으로 자신의 전 인생이 바뀐 것에 대해 미흔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도 가치있는 일이었다고 자위할까?


내가 보기에 미흔은 삶이란 이렇게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쏟아 내는 원래 가변적인 것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운명론자일 것 같다


그녀는 특별히 규를 그리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효경이 바람 피우기 이전의 행복한 가정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런대로 성실하게 살아갈 것만 같다


 


사실은 그게 현명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폭풍 같은 사랑의 감정이 몰려 온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삶의 안정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성적으로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을까?


꼭 사랑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사랑이란 감정은 제어하기 힘든 욕구이기 마련이다


불행한 결말이 예기되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격렬한 감정을 내 삶 속으로 받아 들이고 말 것 같다


대신 자신이 잃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 하지 않아야 하겠지


나쁜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는 소설 속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주변 사람이나 상대의 입장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사람이 더 많이, 더 오래 사랑할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과 남편과, 기타 자신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버리고 (심지어 상대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몰두하는 사람, 바로 그 나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느끼는 사랑이란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아주 저급한 감정이 아닐까?


사랑의 위대함, 희생정신, 이타심 따위는 다 책에서나 나오는 얘기 같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허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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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4-11-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영화 밀애를 보고나서 이 책을 접했습니다. 원작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서.... 영화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남녀관계를 참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통속소설이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이종원의 절제미가 멋져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동감.

하이드 2004-12-0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밀애 보고 나서 책 읽었어요.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고 생각해요. 전경린씨 글도 좋아하지만, 변영주 감독의 한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로 이루어진 영화도 못지 않게 가슴 떨렸지요.

marine 2004-12-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대로 이 책을 본 후 이종원이 "규" 를 어떻게 그렸을지 너무 궁금해 "밀애" 를 보게 됐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이종원을 상상했거든요 결론적으로는 다소 실망했지만...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대를 많이 한 책인데, 별로다
아주 재미없지는 않은데, 전경린 소설이나 은희경 소설처럼 느낌이 확 오는 건 아니다
특히 "오빠가 돌아왔다"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문학상 후보에 올라 참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의외로 너무 싱겁다
왜 이런 소설이 문학상 후보에 오를까?
그럼 그 상 수준도 알 만 한 거 아닌가?

내가 김영하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는 그림도 수준이 되야 보듯, 글도 한글로 쓰여졌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그의 에세이 때문이었다
현대 미술이 난해하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막상 소설이 어렵다는 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착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의 시각기 좋았다
한글로 쓰여졌다고, 그래서 읽을 줄 안다고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
소설 역시 수준이 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문학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김영하의 소설은 한글만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만큼 평이하다
그나마 억지스런 플롯이 없고 그런대로 무난한게 다행일 정도다
문체의 개성도 없고 별 재미도 없다
원래 단편이라는 게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기 참 어려운 분야이긴 하다
자기 문학의 뿌리인 중단편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문열의 고백은, 그래서 참으로 공감하는 바다
중단편이야 말로 작가의 수준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문열을 이 짧은 소설에서 자기 역량을 참으로 잘 드러낸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 아니겠는가?
이문열 수준의 단편 쓰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은희경도 단편은 실망스럽다

이 책의 중심 단편인 "오빠가 돌아 왔다" 는 해체 직전의 콩가루 가족 이야기를 중학교 1학년 여자애 눈으로 그린다
구청에 민원 넣어서 먹고 사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맞고 살다가 이제는 아버지를 때리는 오빠, 알콜 중독자 남편을 떠나 함바집에서 먹고 사는 엄마, 그리고 중학생인 나, 오빠가 데리고 들어 온 열 일곱 살 짜리 올케
이렇게 이뤄진 기묘한 가족이다

일단 아버지가 오빠를 때리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 오빠가 아버지의 야구 방망이를 뺏어 다시 아버지를 구타하는 건 완전히 콩가루 집안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면 천인공노할 범죄지만, 아버지가 아들 죽이는 것은 그래도 심정적으로 이해를 받는 우리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경선의 말처럼 돈과 직업이 없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대우받을 자격이 없다
하다못해 폐지를 나르는 인부일만 해도 자신은 아버지의 리어커를 떳떳히 밀 수 있다는 경선의 심정을 이해한다
떳떳하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일명 고발꾼) 돈도 못 벌어 오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면 아버지 직책을 반납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에다, 심지어 딸의 속옷을 훔치기까지 한다
폭력을 휘두름은 물론이다
이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자식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버리지 못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는 오빠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어린 시절 자신을 구타하고 이제는 자기가 아버지를 때리는 처지지만, 그래도 어쩔 것인가?
부자간의 연을 끊을 수도 없다
갈수록 약해지는 아버지를 팽개쳐 버릴 만큼 잔인한 성격은 못 된다
결국 오빠는 택배 회사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먹여 살린다
비록 아버지를 구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 후 함바집을 하면서 혼자 산다
어린 자식들을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남겨 두고 함바집에서 먹고 자고 한다
이 어머니도 모성이 부족한, 말하자면 교양이나 의무감이 없는 여자다
남편이 싫다면 자식이라도 데리고 나와서 교육시켜야 할 게 아닌가?
그래도 가족에 대한 소박한 꿈은 있었나 보다
아들이 데리고 온 열 일곱 살 짜리 여자애에게 옷도 사 입히고 데리고 일도 시키면서 어떻게든 가정을 이루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온 걸 계기로 어머니는 집으로 들어 온다
이혼은 했지만 한 집에서 산다

그들은 야유회를 나간다
매운탕 집에서 호기롭게 4만원을 계산하는 오빠의 모습에서 경선은 힘을 느낀다
오빠의 어린 동거녀 역시 남자 친구를 뿌듯하게 바라 본다
겨우 돈 4만원이지만,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식비로 계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콩가루 집안에서는 대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기서도 아버지는 일찌감치 술에 취해 곯아 떨어진다
대체 이 아버지란 인간은 왜 이렇게도 무능할까?

어린 동겨녀는 지금은 너무 어려 콩가루 집안에서 시아버지와 싸가지 없는 시누이의 시중을 들며 살지만 과연 언제까지 참고 살까?
조금만 나이 들면 비전이 안 보이는 이 집을 박차고 나가지 않을까?
그녀와 경선이 싸우는 장면은 참 재밌다
작가는 마치 어린 여학생들 싸움을 눈으로 보고 그린 것처럼, 참 실감나게 잘 묘사했다
오빠의 여동생 경선은 이런 콩가루 집안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싸가지 없고 천방지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만 생각이 있어도 이런 집에 들어와 살림하고 사는 여자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할텐데, 하긴 중학교 1학년 짜리가 뭘 알겠는가?
어머니만이 그 여자애의 고마움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 식이라도 올려 주려고 한다
아마 도망가는 게 걱정되서겠지

하여간 이런 우스꽝스런 가족도 가족이랍시고 어떻게 해서든 모양 갖추고 살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가족이란 아무리 허접하고 한심해도 일단 같이 모여 살면 나름의 의미가 생기는 걸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남편에게 다시 돌아 온 어머니나, 아버지의 역할을 전혀 못하는,오히려 가족에게 해가 되는 아버지라도 모시고 살아 보려는 오빠나, 이런 거지 같은 집구석에 남자 하나 보고 따라 온 어린 동거녀 등 다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소시민의 애환이 묻어나는 캐릭터들이다
오직 어린 주인공 경선만이 이 콩가루 가족의 의미를 진실로 되물을 뻔이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 가족은 함께 살 이유가 전혀 없다
해체되는 게 마땅한데도 어떻게 해서든 가족의 형태를 유지해 보려는 가엾은 몸부림에 그녀는 일침을 가한다
이렇게 우스꽝스런 가족이 다 있어? 참 나...

"보물선" 이야기는 부유층의 실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정말 펀드 매니저들은 이렇게 금방 돈을 버는 걸까?
주가 조작 같은 불법적인 일을 자행해서 결국 금감원에 걸려 들긴 하지만, 돈 버는 과정이 너무 쉬워 약간 우울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엄청난 부의 축적을 당연시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 봐도 돈 많은 사람들은 참 쉽게 돈을 번다
그들이 소비 가치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명품족들이 될 것이다
이들을 정말 양심적인 부자로 볼 수 있을까?
세이노 같은 사람은 부자에게 색안경 끼지 말라고 하지만 돈놀이 통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자들에게 도저히 관대해지가 어렵다
의사나 변호사가 자기 직업을 통해 돈 버는 건 그래도 인정하지만, 부동산 투기해서 혹은 증권으로 돈 버는 사람들의 선명성은 인정할 수 없다
이건 자본주의의 명백한 모순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부럽긴 하다
상류층의 생활은 까발리면 부러움과 함께 분노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쉬쉬 덮는 모양이다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낫지
여기 등장하는 이형식이란 인물도 참 독특하다
이순신 동상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세웠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물선을 이용한다
이 보물선이라면 이미 신문에서 여러 차례 다뤘던 소재다
작가가 나름대로 소설로 각색한 것 같다
대체 이형식은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믿음을 수 십년째 간직한 것일까?
사람마다 독특한 가치 체계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참 신기하다
결국 그는 주변 투자가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산 후 동상을 폭발시킨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고 만 것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터미널"의 톰 행크스도 비슷한 사람이다
남이 전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째즈 연주가의 싸인 한 장을 위해 공항에서 9개월을 머물렀다
대체 그 싸인이 뭐라고...
그런데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이런 비합리적인 믿음들이 한 두 개 쯤은 꼭 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소용없다
혹시 나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는 건 아닐까?

"너의 의미"에서는 바람둥이 속물 감독에게 빠진 젊은 여류 소설가가 나온다
타자의 눈으로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너무나 진지하다
그래서 다들 안 된다고 충고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나?
객관성을 잃기란 이렇게 쉬운 모양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나마 좀 재밌는 편이다
살인 사건이 주는 충격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이 흐른다
진숙이란 여자는 학교 다닐 때 여러 남자들의 걸레 역할을 한다
걸레, 여자를 일컫는 최악의 단어
걸레 빤다고 행주 되냐는 끔찍한 농담도 있다
남자들은 쉽게 성을 즐겨도 아무 흠이 안 되는 반면 (기껏해야 바람둥이 내지는 여자 밝힌다는 것 정도?) 여자가 섹스를 즐기면 걸레가 된다
남녀 차별이라고 강변해 봤자 그게 현실인데 어쩌랴...
진숙이란 여자는 여성 해방론자도 아니면서 왜 이 남자 저 남자의 노리개가 된 걸까?
그녀의 자췻방을 드나들던 그 세 남자는 얼마나 그녀를 우습게 봤을까?
성이란 이처럼 가볍게 생각하면 사람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런 와중에도 중권이란 남자는 진숙을 사랑하고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얼핏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다
창녀를 사랑하는 꼴이니까
즐길 때는 언제고 저만 순정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 아니냐고 강변한다
결국 그녀에 대한 소유욕과 이혼에다 부도 난 자기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중권은 몇 년 만에 귀국한 진숙을 죽이고 만다
아마 자기 처지에 대한 비관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자신을 성 노리개 취급한 남자들을 비웃는 진숙의 발언은 그저 트리거 역할 밖에는 안 됐을 것이다
가엾은 진숙...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에 사는 여자들은 성을 좀 더 중요하게 취급하고 아무 남자한테나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네들의 의식이 깨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를 사랑하고도"에 등장하는 유부남 보좌관의 캐릭터는 냉소적이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이다
은희경 소설에 즐겨 등장하는 이 캐릭터는, 세상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에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 버린다
마치 "여우와 신포도"의 우화처럼 말이다
인숙과 모텔에 들어가면서 이런 데 자주 오냐는 말에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처음이야" 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위안을 준다
보좌관이 꽤 가난하다는 것을 인숙은 금방 눈치챈다
맥주 마시고 영수증 챙기는 걸 보고 단박에 알아 버린다
이렇게 눈썰미 좋은 여자가 왜 보잘 것 없는 유부남에게 빠지는 걸까?
국회의원도 아니고 그 보좌관에게 말이다
하긴 국회의원이면 완전히 중년 넘어선 거의 할아버지지만, 보좌관은 빽 없어도 일단 30대 아저씨잖아?

인숙은 상당히 예쁜 여자로 나온다
또 관계를 깨끗이 정리할 만큼 다부진 면도 있다
이런 애가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빠진 걸 보면, 그녀도 상당히 로맨티스트인 것 같다

진숙은 스토킹 하는 수영 강사에게 신경 끄고 니 일이나 잘 하라고 쏘아 붙인다
나 같으면 그래도 동정심이라도 있어서 이렇게 못할 것이다
감히 너 같은 놈이 날 넘 봐? 라는 심리가 아니라면 냉정하게 끊기 힘들다
하여간 유부남이나 바람둥이와 사랑에 빠지면 절대 안 된다
이 놈들은 기본적으로 진정성이 없는 족속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림자를 판 사나이" 는 신부님이 등장하고 자연 발화라는 소재를 이용해 독특했다
자연 발화는 어떤 잡지 부록에서 처음 접한 것인데, 스웨덴 직공이 몸에 불이 붙어 주변을 태우고 자신도 죽었다는 얘기였다
또 미국의 어느 마을에 살인자가 침입했는데 주인이 그를 신고해서 체포됐는데, 범인이 감옥을 탈출해 다시 가족에게 나타났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남자는 스스로 불타 죽었다고 한다
수백 마일 밖에서 살인 사건을 목격한 텔레비젼 인간과 함께 무척 인상깊던 이야기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런데 이 단편에도 등장한다
주인공의 친구 미경의 남편이 그 자연발화로 사망한 것이다

주인공의 또다른 친구 바오로는 그 잘 생긴 얼굴로 신부가 된다
왜 그랬을까?
정작 신부가 되어서는 기계적으로 영성체를 하고 복음을 전한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실상 많은 신부들이 그러리라 본다
목사라면 그래도 가족이라도 있고 원래 교회는 좀 더 열성적이지만, 성당은 독신주의 때문에 근본적으로 외롭고 또 안정되고 정적인 분위기다
목사보다 신부가 훨씬 더 외로운 존재일 것 같다
이렇게 기계적인 성직 생활을 반복한다면 곧 우울증이 덮칠 것 같다
더구나 잘 생기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천주교 조직에서 큰 직책을 맡지 않는 이상 곧 회의주의에 빠질 것 같다

이 바로오를 사랑하는 여대생이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 나이에는 나 보다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은 누구든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젊은 신부라면 신자 입장에서는 더욱 존경스러울 것이다
잘 생기기까지 했다면 말 다 했지, 뭐
그런데 정작 섹스를 벌인 상대는 그 여대생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첫사랑 미경이었다
남편이 죽은 걸 알고 그녀와 우연히 술집에서 마주친 후 섹스를 치룬 것이다
아마 신부들, 이런 비밀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능을, 그것도 남자의 본능을 억제한다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며 실패할 확률이 크다
그렇다고 성직자에게 가족을 허락하면 치부의 위험이 있고, 참 어려운 문제다

왜 바오로는 미경과 섹스를 했을까?
여대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차마 그녀에게 풀지는 못하고 대신 옛사랑에게?
남편이 죽은 그녀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렇다면 옛사랑을 농락한 꼴이 되지 않는가?
또 그는 왜 그 엄청난 도덕적 타락을 친구인 주인공에게 털어 놨을까?
원래 인간은 비밀을 간직하기 어려운 건가?

주인공의 가벼운 삶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서 혼자 요리를 해 먹고 글을 쓰는 단순한 삶, 기본적인 생계만 유지된다면 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도 왠지 인생을 가볍게 만드는 기분이다
모든 게 환상일 뿐일까?
한편으로는 미경 부부의 부유한 삶을 동경하고 질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소박한 삶을 원하는 내 이중적인 심리 구조...
진짜 원하는 삶은 그런 소박한 것인데 남과 비교되는 것 때문에, 즉 남보다 더 잘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부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 같다
내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데도 경쟁심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쫒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내 자신의 삶을 사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는 도서관에서 읽어야겠다
소설집을 다 읽기는 시간 낭비 같다
카프카의 말처럼 내 머리를 강타하는 책이 아니라면 시간내서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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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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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책은 도무지 정이 안 간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인정받은 걸 보면 프랑스 문학은 우리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로베르트 인명사전" 에서도 느낀 바지만, 도대체가 플롯이랄 게 없다
그저 대화법으로 일관하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그녀의 소설은 오히려 희곡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워낙 뜨는 작가라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특히 이 책은 노통의 책 치고는 긴 장편이라 뭔가 그녀만의 매력을 보여 줄 거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다

그녀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도 독특하다
프랑스 소설을 많이 안 접해서 그런가?
생소하기 그지없다
지난 번 소설에서도 "플렉튀르드"라는 기묘한 이름의 여자애가 등장하더니, 이번에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프레텍스타 타슈"라는 이상한 이름의 노인이 나온다
그래도 여기자의 이름인 "니나"는 마음에 든다
어쨌든 아멜리는 등장 인물의 이름이 주는 어감 만큼이나 독특하고 이상한 소설을 풀어 낸다
내 생각에 그녀의 사고 방식 역시 아주 독특할 것 같다
김영하나 배수하의 소설에서도 느끼는 바지만, 이문열류의 반듯한 문체와 구성에 익숙한 나 같은 독자는 아무래도 현대 문학을 즐기기 어려운 것 같다

타슈는 한 마디로 싸이코다
여자의 생리가 불결한 것이라면 남자의 사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자가 초경을 하듯, 남자 역시 나이가 되면 첫 사정을 경험한다
꿈 속에서 몽정을 통해 팬티를 적시는 그 지저분한 정액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자의 생리를 불결하게 본다면 당연히 남자의 사정도 역겹게 느껴야 정상이다
둘 다 혐오해야 그나마 성적 욕구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해가 간다
반면 한 쪽만, 특히 여자 쪽의 초경을 혐오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힌 멍청한 인간인가를 드러내는 단면일 뿐이다
바보 같은 타슈!!
사랑해 마지 않던 레오폴딘이 수영장에서 초경을 경험했다고 목졸라 죽일 때, 자기 팬티를 적시던 그 정액을 한 번이라도 생각한 걸까?
이 소설을 여자인 아멜리 노통이 쓴 걸 보면 그녀 역시 그저 관념에 치우쳐 구상을 한 것 같다
남자 작가라면 본인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구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계속 대화체로만 나간다
"로베르트 인명사전" 의 특징은 개연성이라고는 없는 전개인데 이 소설 역시 그저 통통 튀듯 문장을 써 나갈 뿐이다
타슈가 네 명의 기자들을 KO시키는 장면이나, 반대로 니나에게 KO패 당하는 과정이 전혀 통쾌하지 않다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부족하다
대체 왜 그녀가 주목받는 소설가가 됐을까?
현대 문학은 이처럼 파괴성과 우연성에 기대야 뜨는 것일까?

폴 오스터의 소설과 거의 흡사한 표지 때문에 "열린책들" 에서 출간된 건 줄 알았다
"살인자의 건강법" 이라는 제목 자체는 참으로 통통 튄다
아멜리 소설의 미덕이 있다면 이처럼 톡톡 튀는 제목과 더불어 짧은 분량에 있다
그나마 읽기는 편하다

소설에는 수많은 프랑스의 작가들과 작품이 등장한다
타슈라는 캐릭터 역시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이렇게 특이한 작가가 있기는 있는 걸까?
외국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럴 때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책들은 왠만한 것은 다 알기 때문에 공감하기 쉽지만, 아무래도 서양 책과 작가에 대한 지식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서재 결혼시키기" 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책과 작가들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해 얼마나 지루하게 읽었던가!!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미국 작가들은 좀 더 알려진 편이다)
이 소설에서 알고 있는 작가는 기껏해야 사르트르 뿐이었다
만약 역자의 각주가 없었다면 아멜리가 창조해 낸 작가들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타슈의 캐릭터가 뚱보라는 것은 흥미롭다
"로베르트 인명사전" 에서는 거식증에 걸린 발레리나를 내세웠는데, 이번에는 폭식증에 걸린 뚱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음식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나는 이런 캐릭터에 관심이 많다
내 생각에 아멜리 역시 음식에 대한 집착이 강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캐릭터를 공들여 묘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의 궁전"에 등장하는 에핑의 아들도 끔찍한 뚱보였는데, 이 소설에서 타슈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금욕 생활을 하면서 먹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 버린 폭식증 환자다

타슈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명한 작가라면 몸매 따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즉 아무리 뚱뚱해도 그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식욕을 굳이 억제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83세까지 생존한 걸 보면 건강에도 별 이상은 없었던 모양이다
금욕 생활까지 하는데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세상 사는 낙이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반드시 직접 식료품을 사러 간다
그리고 직접 요리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는 미식가가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음식만 먹는 독한 편식가라는 점에서 나와 비슷하다
나 역시 맛있고 비싼 요리를 찾는 게 아니라, 내 입맛에 딱 맞는 일부 음식만 총애한다
특정 음식에 대한 집착이야 말로 진정으로 음식과의 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타슈를 이해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버터 기름을 상당히 느끼한 것으로 표현했는데 원래 버터는 고소한 이미지 아닐까?
프랑스에서는 매우 느끼한 이미지로 통하나 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이국적인 음식이 주는 좋은 이미지만 남은 것 같다
어쨌든 아주 좋아하지만 칼로리 때문에 먹지 못하는 버터를, 너무 느끼해 토할 지경이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버터에 대한 애정이 꽤 식어 버렸다

고전은 제대로 읽히지 않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라는 타슈의 말은 "이미지와 환상" 에서 부어스틴이 지적한 바 있다
호메로스의 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냐는 타슈의 비난은 일리가 있다
그는 22편의 소설을 썼지만,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 조차 제대로 자신의 책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를 인터뷰 하러 온 네 명의 기자를 쫓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반면 니나는 22편의 소설을 완벽하게, 그것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전장터에 뛰어든 셈이다
그러니 그녀의 공격에 타슈가 당황할 수 밖에
솔직히 작가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터뷰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또 읽었다 할지라도 느낀 바 없이 그저 줄거리 읽기에 그친다면 인터뷰 할 자격이 없다
강준만의 한탄처럼 인터뷰어가 공부를 하고 질문하면 인터뷰이도 흥이 나는 법인데 제대로 된 사전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 수박 겉핥기 식의 질문을 하면 짜증이 날 만 하다

니나는 그의 소설들을 정독하면서 유일한 미완성 소설인 "살인자의 건강법" 이 자서전임을 직감한다
타슈는 대범하게도 소년 시절의 살인을 소설 형식을 빌어 고백한 것이다
타슈와 그의 사촌 누이 레오폴딘은 플라토닉 러브를 하는 사이로,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숲 속에서 생활한다
특히 그들은 수영장 안에서 수중 생활을 즐긴다
그런데 어느 날 레오폴딘이 수영장에서 초경을 하고 만다
(이 모티브는 만화책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육체적 성의 욕구를 더러운 것으로 간주한 타슈는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결국 그들이 살던 성도 불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다
그 후 타슈는 금욕주의자로 소설만 쓰면서 음식에 빠져 살아 간다

한 마디로 타슈는 정신병자다
어쩌다 문학적 재능이 있어 노벨상까지 탔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히 그는 정신이상자다
성적 욕구를 더러운 것으로 혐오하는 것도 그렇고, 가장 사랑해 마지 않던 누이를 목졸라 죽인 것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방화까지 저지른다
그를 가족처럼 키워 준 외삼촌댁 내외가 사는 성에다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뻔뻔하게 소설로 남긴다
이런 미친 놈!!

결국 타슈가 니나의 추리에 굴복한 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정말 어안이 벙벙 했다
일단 작가의 전개 자체가 말이 안 되고, 또 소설 안에서 보면 타슈는 완전히 미친 놈이다
니나는 그가 정신분열자라 판단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고 만다
목졸라 죽였으니 혈흔이 남을 것이고, 그녀는 수사 대상이 됐을텐데 소설은 논리적 설명을 거부한 채 타슈의 소설이 더욱 유명해진 것으로 끝을 맺는다
어쨌든 그 뻔뻔한 노인의 속셈을 간파하고 오히려 그에게 교살의 끔찍함을 선사한 점만은 높이 산다

아멜리 소설에서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일단 성의없는 사건 전개나 개연성 없는 플롯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녀의 다른 소설들도 열심히 읽어 볼 생각이다
어쨌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만큼 뭔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제발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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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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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폴 오스터다운 소설이다
누군가 "달의 궁전" 과 이 책이 가장 재밌다고 했는데, 확실히 재밌는 소설이다
"달의 궁전" 만큼 인상적인 건 아니지만, 꽤나 독자를 끌어당기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그의 놀라운 독서력과 필력이 더해져 문학성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플롯을 구성하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아멜리 노통처럼 말도 안 되는 즉흥적인 전개를 하지는 않는다
그가 중요한 구미 작가 중 하나라는 말이 실감난다

공중 부양이 가능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거의 100% 믿어 버렸는데 (그래서 인터넷에서 검색할 생각까지 했다), 역자 후기를 보니 창작물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사람에 대한 꿈은 늘 있어 왔다
그는 아마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것 같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우리의 주인공 월트는 나 자신을 완벽히 잊고 내 영혼을 밖으로 흘려 보낼 수 있다면, 공기보다 가벼운 자신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한다
이거야 말로 해탈의 경지가 아닐까?
자신을 완벽히 잊어 버릴 때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역설이 성립함을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완벽한 자신에로의 몰입 아닐까?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월트의 사부 예후디나 그를 사랑하는 후원자 위더스푼 부인의 특이한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예후디란 이름은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기 보다는, 왠지 다른 곳에서 건너온 듯한 이미지를 풍긴다
참 이상한 게 있다
예후디는 비록 그의 후견인이긴 했지만 월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반면 월트의 삼촌 슬림은 피붙이인데도 그를 죽이려 든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말이 항상 참이지는 않나 보다
슬림의 캐릭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정말 외삼촌이 조카를 유괴해 돈을 뜯어 내고 죽일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렸을 때 키워 준 외삼촌이 말이다
소설의 과장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만약 외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라면 어떨까?
아버지라도 자식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핏줄이라는 것도 실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왜 피붙이인 외삼촌 보다 아무 관계도 없는 (비록 후견인이긴 하지만) 예후디와 더 끈끈하게 얽힐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나라면, 내가 소설가라면 내 상식에 비추어 절대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오스터 소설의 특징은 어느 순간 부자가 되고 (주로 뜻하지 않은 행운에 의해), 또 어느 순간 알거지가 되는 급작스런 변화에 있다
그는 특히 돈에 관한 문제는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갑작스런 부자, 또 그만큼 어처구니 없이 빠른 몰락
그는 주인공의 인생을 늘 들었다 놓았다 한다
사실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늘 평탄한 사람은 없다
다만 워낙 긴 생을 살아 가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오스터의 소설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찌 보면 우연으로 점철된 것이 바로 인생임을 요즘 들어 느낀다
문제는 우리가 그 우연에 어떻게 반응하냐에 달렸다

월트가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됐을 때 예후디의 대응 방식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월트는 그런 예후디를 가르켜 밀림에서도 집처럼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절대 끝은 없다고 믿었다
완전한 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이나 포기는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또다른 계획을 세우는 남자!
이런 자세로 인생을 산다면 크게 두려워 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기절할 정도로 놀랄 만한 일들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호들갑을 떨며 받아들일 뿐이다

예후디가 죽은 후 깡패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 하는 월트는 향락에 빠진다
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는 야구선수 디지 딘이었다
오스터는 여기서도 야구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 준다
월트는 어렸을 때부터 카디널즈 팀을 광적으로 좋아하는데, 이 카디널즈를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가 바로 디지 딘이다
그런데 디지는 몇 시즌 못 가 곧 형편없는 선수로 전락한다
월트는 한 때 공중 부양의 묘기를 선보이다 땅으로 추락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를 명예롭게 은퇴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차마 그가 마이너 리그로 내려가 옛 영광을 좀먹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디지를 은퇴시키는 방법은 놀랍게도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야구에서의 은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에서 아예 은퇴시킨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만약 그가 디지를 죽였다면 정말 미친 놈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당시 월트는 소비적인 삶에 젖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는 디지의 영광이 전설에 묻히길 원했다
현실적인 추락을 지켜 볼 수 없었던 월트는 권총으로 그에게 자살을 권한다
철천지 원수인 외삼촌 슬림에게도 총을 쏘지 못한 소심하고 여린 월트가 디지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는 그저 관념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즉 살의 그 자체는 없었다
불행히도 그 시각에 디지의 아내가 나타났고 결국 디지는 월트의 손에 죽는 대신 그를 경찰에게 넘길 수 있었다

오스터의 멋진 표현처럼 하느님 노릇을 하려고 했던 죄목으로 월트는 자신의 나이트 클럽을 처분한다
이제 그는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몰락이지만, 월트의 정신 상태를 쭉 읽어 온 독자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독자를 이해시키는 힘이야 말로 오스터의 매력이다)
오스터 주인공들의 특징은 행운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는 한편, 행운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도 의연하게 대처한다는데 있다
에핑의 유산을 상속하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 키티를 얻는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MS가,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 사막을 걸을 때도 떠오르는 달을 보고 행복함을 느꼈듯, 우리의 주인공 월트 역시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의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삶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즉 세속적인 성공 여부는), 월트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초연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때 시카고에서 제일 큰 나이트 클럽 사장이었고, 그 보다 오래 전에는 유명한 공중 곡예사였던 월트는 제빵 공장 노동자로서의 삶에도 만족하고 살아 간다
그는 거기서 아내 몰리를 만나 30여년을 해후한다
몰리는 결코 아름답지 않고 아이도 낳지 못하지만, 또 그들이 가난했지만 월트는 몰리의 형제들과 조카들에 둘러 싸여 나름대로 만족스런 인생을 산다
그 자신이 물질적인 성공의 가치를 마음으로부터 포기했다면, 나이트 클럽 사장으로서의 삶 보다 훨씬 더 건전하고 경건하며 의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수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소설은 생각보다 멀리까지 나간다
그 아내 몰리도 죽고 아내의 유방암 치료비로 전 재산을 탕진한 월트는 상실감 때문에 술에 의존하다 알콜 중독자 치료서까지 들어 간다
그런 방황을 보면 아직까지 그는 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아내가 죽은 것은 엄청난 정신적 상처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또 나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든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높이 대우해 줄 가치있는 존재다

오스터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치인 우연이 또다시 등장한다
덴버로 직장을 구하러 가던 도중 월트는 예후디와 함께 나는 연습을 하던 위치토의 옛 집을 찾아 간다
어린 시절 예후디가 심은 묘목이 아름드리 나무가 된 모습을 지켜 보는 그 흥분감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추억 속의 장소가 40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감회에 젖을 것이다
뜻밖에도 그 곳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바로 위더스푼 부인!!
예후디를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월트의 파트너가 된다
물론 그들은 20여년의 나이차가 나는 커플이라기 보다는 모자지간 같은 관계다
이 위더스푼 부인 역시 입체적인 캐릭터인데, 술과 섹스와 돈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여자가 이 세 가지의 가치를 깨달았다면 정말 후회없는 인생을 살 것 같다
(남자들은 이것들의 가치를 금방 깨닫는데 여자들은 잘 모르거나 아주 늙어서야 알게 된다)

위더스푼과 월트는 서로에게 좋은 의지처가 돼 준다
결국 월트는 인생의 마지막 십 여년을 위더스푼과 보낸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맨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만약 스무 살 무렵 위더스푼 부인을 만났을 때 그가 그녀의 사업 제안을 받아 들였다면 이 두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처음부터 행복을 찾았을까?
아니면 그 당시는 서로 너무나 젊었기 때문에 어차피 이뤄지기 힘들었을까?
인생이란 늘 알 수 없는 법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가정 따위도 필요없다

KKK 단이 나타나 수 아주머니와 이솝을 화형에 처했을 때, 예후디와 월트가 느꼈을 분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대체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명분이 있길래 사람을 마음대로 처형하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인종주의란 것이 실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한 논리인지 그 머리로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 혹시 기독교인이 있을까?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히틀러도 완전히 미친 놈이지
월트가 디지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다
설사 죄가 있더라도 누가 그들에게 처벌할 권리를 주었는가?
인종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지는,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만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일 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서 얌전하게 대학 생활을 준비하던 가엾은 흑인 친구 이솝!!
또 어린 예후디를 거둬서 키워 준 인디언 수 아주머니!!
그들을 단지 유색이란 이유만으로 아무 원한 관계도 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KKK 단의 만행이 잊혀지지 않는다

공중부양이라는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소재를 이용해 이처럼 진지한 소설을 쓴 오스터의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확실히 이 책은 "뉴욕 3부작" 이나 "신탁의 밤" 보다는 재밌다
소설의 미덕이 재미라고 본다면 독자에게 훌륭한 보상을 한 셈이다
여전히 오스터는 매혹적이다
아무래도 그의 소설들을 더 탐색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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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말 그대로 환상적인 책이다
여기서 환상이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책, 사라져 버린 책을 말한다
폴 오스터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혹시 "뉴욕 3부작" 의 기묘한 줄거리에 질린 사람이라면 이 책과 "달의 궁전" 을 꼭 권한다
"공중 곡예사" 도 재밌지만 이건 정말 재밌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독서, 은둔, 액자 소설 등으로 뒤덮혀 있다
주인공은 늘 독서열에 불타고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숨어 버리며 주인공의 얘기를 다른 사람이 들려 주는 화자가 꼭 존재한다
모든 소설이 다 그런 형식을 취한다
그는 문장을 참 잘 쓴다
이문열과는 다른 의미로 글을 잘 쓴다
이문열은 문체 자체가 훌륭한데 비해, 오스터는 묘사력이 뛰어나다
사물이나 풍경 묘사가 아니라 주변 정황이나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어쩜 이렇게 술술 잘 풀어 놓는지...
오스터의 높은 독서열이 소설의 수준을 높혀 주는 것 같다
역시 최고의 글쓰기 비법은 다독인 것일까?

이 소설의 화자인 데이비드 짐머는 "달의 궁전" 에 나오는 마르코의 친구다
마르코가 굶어 죽기 직전 집으로 데려가 숙식을 제공하고 돌봐 준 바로 그 짐머다
마르코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그를 만나는데, 그 당시 짐머는 아내가 죽었고 폐인 같이 살 때였다고 나온다
전작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두 번 인용되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창작하기 보다는 기존의 인물을 변형시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영화배우다
오스터는 또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추억이 강한 편인데 여기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코메디 배우가 등장한다
찰리 채플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920년대라면 오스터 역시 태어나기 전인데, 아마 과거 기록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 같다
이미 영화의 역사도 100여 년이 되기 때문에 무성 영화 시대는 이제 새로운 신화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오스터라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 하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오스터처럼 대단한 이야기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지 이야기만 잘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얘기도 수준 높게 잘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안정효가 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 떠오른다
비슷한 느낌의 책이다

짐머의 아내와 아이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후 그는 폐인이 된다
사실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괴롭긴 하겠지만 인생을 망쳐 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울까?
아직 경험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과장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브리지드가 실종된 후 그녀의 아버지가 고통을 견디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 하는 심정이 들었다
브리지드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실종되자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녀를 찾아 다닌다
딸이 사라져 버렸을 때 아버지가 느껴야 할 고통은 얼마나 클까?
사이가 좋았던 딸도 아니고 잘해 준 것도 없는 딸인데 화해할 기회도 안 주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면 그 동안 잘못한 게 얼마나 후회가 되겠는가!!
브리지드의 아버지 오팰런은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찾아 헤맨다
차라리 시신이라도 발견되면 포기할텐데 실종됐으므로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도 없다
결국 오팰런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딸에 대한 죄책감과 부질없는 희망으로 자신의 삶을 갉아 먹는 것이다

짐머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그는 가족을 잃는 댓가로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다
돈이, 혹은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 행복이 어느 정도 본질적일까?
때로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돈이 없으면 당장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 돈을 가졌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혹은 물질이 생활을 안락하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보다 정신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즉 최저 생계 수준만 유지할 수 있다면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서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오스터 소설의 은둔자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났지만 형편없는 새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산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대부분이 책이었다
책 속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헥터 역시 헐리우드 대스타라는 최고의 물질적인 자리를 버리고 나왔지만 (물론 어쩔 수 없긴 했다) 부둣가의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그는 책을 읽으며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맛봤다
나는 이 설정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달라진다
행복이 충만한 자기 만족감이라면 만족에 대한 기분을 바꾸면 된다

짐머는 아내와 아이들이 죽은 후 피폐한 삶을 산다
사실 그는 대학 교수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굳이 큰 재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물질적인 것에 큰 가치를 주거나 가족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큰 돈까지 안겨 준 비행기 사고가 고맙기도 하겠지만 (아마 로또 복권 당첨된 기분일 것이다), 짐머는 대단히 가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비행기 사고가 가져다 준 불행은 엄청난 보상금으로도 절대 회복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짐머는 보상금을 아낌없이 다른 곳에 쓴다
술과 마약 등 자신을 좀먹는 일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남은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 쓴다
아내 헬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고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와 유치원에 놀이 기구를 제공한다
또 그와 헬렌의 피붙이들에게도 나눠 준다
만약 내 가족이 내가 죽는 불행을 당한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돈을 얻게 된다면 우리 엄마 아빠 역시 내 이름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할 것 같다
나를 잃은 슬픔은 다른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가족이란 바로 이런 존재들인가...
(어제 읽은 "변신" 에 나오는 가족과는 참 다르긴 하지만)

짐머가 헥터의 영화에서 위로를 얻는 장면도 공감이 간다
삶의 의욕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을 웃기는 코메디 배우에게 집중한다
아마 그 순간에는 어떤 것에라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뭐라도 살아갈 희망이 있어야 하니까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타당한 것일 필요는 없다
하여간 자기 마음을 의지할 수 있으면 된다
짐머는 헥터에게 빠져 그의 영화들을 모두 섭렵하고 책을 쓴다
헥터의 영화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유럽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앨머의 등장은 그를 다시 삶 속으로 끌어 들인다
여기서 삶이란 행복과 기쁨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앨머는 짐머를 헥터에게 데려가기 위해 권총까지 꺼내 들고 첫 만남에서부터 섹스를 하는 좀 특이한 여자인데 결론적으로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했다
프리다가 헥터에 관한 전기를 불태우는 걸 보고 그녀를 밀친다는 게 우발적 살인이 되버린 후 죄책감과 불안감에 자살하는 장면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헥터의 일생을 수집하는데 7년이나 매달렸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의 전기를 쓴 짐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며 헥터의 아내와도 격렬하게 다퉜을 것이다
그녀가 정상적인 감정 상태였다면, 또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헥터나 짐머에게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일 인상적인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헥터다
오스터 소설에 절대 빠지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바로 헥터 같은 은둔자다
그들은 왜 안락한 현실을 포기하고 고통스런 익명의 삶으로 뛰어들까?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없다
나는 현재 누리고 있는 것 보다 더 얻기 위해 늘 긴장하며 산다
혹시 내 것을 뺏기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 하다
그래서 여유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떠난다
물론 정신적인 충격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라면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 익명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은 없지만, 대신 의무감이나 구속감도 똑같이 사라진다

가장 큰 의무감이라면 물론 가족에 대한 것이리라
이런 생각하면 큰일나겠지만 가끔 가족이 없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럼 정말 내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멋대로 살아도 미안해 할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로 인해 실망하고 속상해 할 사람이 없다면 나는 좀 더 자유롭게 내 맘대로 살 것 같다
이것도 그저 환상일 뿐일까?
가족은 내 삶의 큰 원천이지만 때로 구속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정한 길대로 따라 가라고 요구하는 그런 구속 말이다
가장이 되면 특히 그럴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라면 가끔은 그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헥터는 헐리우드를 떠난 후 부둣가에서 거친 노동을 하면서 산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브리지드를 배신하고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 돌로레스의 손에 죽는데 도의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보속하는 마음으로 밑바닥 삶을 받아 들인다
만약 헥터가 헐리우드의 삶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돌로레스 역시 바로 은퇴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했더라도 우발적인 살인 내지는 정당방위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명성을 위해 사건을 숨겼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그 사건이 알려지면 돌로레스나 헥터가 편안하게 사라질 수는 없었겠지만 평생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것이 가엾은 브리지드의 가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눈에 총을 맞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암매장된 딸을 찾기 위해 평생을 매달린 아버지 오팰런을 생각해 보라
결국 헥터의 행동은 비겁했다
그가 브리지드의 동생 노라의 구혼을 뿌리친 것은 당연하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헥터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심한 육체 노동을 하고 책을 도피처로 삼는다
사실 그는 이민자의 아들로 정규 교육을 못 받았다
더구나 연예인의 화려하고 무절제한 삶에 익숙한 헥터가 책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헥터의 기질 속에는 예술적이고 지적인 면이 풍부했던 것은 아닐까?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그 수준이 형편없더라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좋지도 않지만 나쁠 것도 없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
상대적인 박탈감만 안 갖는다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뭘 하든지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생활 보호 대상자를 생각해 보라 직업이 없어도 나라에서 쌀과 반찬값을 준다) 도서관에 가면 책은 널려 있다
결혼을 해서 책임질 사람이 생기면 다르지만, 혼자 몸이라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더구나 나라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 안정된 직업이 있다
나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

노라가 헥터에게 반한 걸 보면 자매간에 닮은 구석이 있나 보다
브리지드는 헥터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가 다른 여자들과 놀아난 것도 참아 준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은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
비록 당신이 지금은 다른 여자들과 만나지만, 시간이 가면 내 사랑의 진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유일한 안식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자의적이고 허망하기까지 한 믿음에 매달리는 가엾은 여자!!
결국 헥터가 돌로레스와 약혼까지 한 후 브리지드는 자살을 기도한다
헤어졌다고 자살까지 할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헥터에게 매달렸는지 알 만 하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해 봤지만 그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죽을 생각은 안 해 봤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브리지드는 헥터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안다
그리고 돌로레스에게 찾아간다
아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위협감을 느낀 돌로레스는 권총으로 위협한다는 게 그만 총을 발사하고 만다
살인 무기가 허용된 미국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돌로레스는 그 후 연예계를 은퇴하고 결혼한 뒤 곧 사고로 죽는다
그녀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는데, 혹시 그녀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암매장 당한 딸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가엾은 오펠런에 관해 알았더라면 편한 잠을 자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말이다
어쩌면 사고로 죽는 순간 자기 손에 죽은 브리지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헥터가 노라의 사랑을 받게 된 까닭은 일단 그가 헐리우드 배우를 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것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성실한 태도에 있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가진 것 없는 남자지만 헥터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유능했다
브리지드 가족의 집이었고 또 죄책감을 덜기 위해 헥터는 가게 일에 헌신적으로 매달린다
사실 그렇게라도 집중하지 않았다면 헥터는 브리지드의 집에서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책에서 구원을 찾은 헥터는 노라에게 수업을 받으며 지적 교양을 넓혀 간다
만약 이 정도로 신실하게 사는 남자라면 (더구나 잘 생겼다면) 나도 한 번쯤 호감을 느낄 것 같다
비록 그가 객관적으로는 가진 게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노라는 진실된 여자였다
상원의원의 아들이 가진 명예와 재산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에 숨겨진 가치를 볼 줄 아는 여자!!
그래서인지 노라는 학교 선생님에서 시작해 교장까지 진급한다
비록 헥터가 떠날 때는 괴로웠겠지만 그 후 그녀의 삶이 평탄하고 행복했을 것 같다
또 헥터가 자신이 언니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걸 평생 몰랐기 때문에 더욱 다행스럽다
만약 헥터가 노라를 사랑해 그 사실을 고백했다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언니를 죽인 범인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동생의 괴로움이라니!!
헥터는 노라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또 브리지드의 가족에게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녀 곁을 떠나고 만다

헥터란 남자는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소설이기 때문에 뭐든 잘 풀리는 걸까?
내가 보기에 노라와 잘 안 된 걸로 그의 운은 다한 것 같은데, 즉 그녀 곁을 떠난 후 막노동자로 인생을 마감할 것 같은데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다
은행 강도에게 인질로 잡힌 프리다를 대신해 총에 맞은 후 놀랍게도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뭐가 딱딱 들어 맞으려고 프리다는 부잣집 딸이었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 한다
프리다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반했을까?
아무래도 헥터에게 큰 매력이 있나 보다
책을 읽을 때는 코메디 배우라길래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논리적으로 꿰맞추다 보니까 그가 엄청나게 잘 생겨야 (장동건이나 송승헌처럼) 여자들 마다 그에게 반한 게 설명이 된다

프리다와 헥터는 시골로 이주해 농장을 짓고 영화를 찍으며 살아 간다
둘 사이의 아들은 벌에 쏘여 일찍 죽었다
이 부부는 그 충격을 이기기 위해 영화 찍는 일에 몰입한다
사람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열정이 있기 마련인데, 짐머가 헥터의 전기에 매달린 것처럼 프리다와 헥터 역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영화 촬영에 몰두한다
책에서는 헥터만 몰입하는 걸로 나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프리다 역시 헥터 같은 열정으로 매달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돈이 들어가는 일을 평생 후원했을 리 없고 그가 죽고 난 후 편집증적으로 영화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부는 쿵짝이 잘 맞았다
아마 프리다는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헥터와 함께 영화에 매달렸을 것이다

어쨌든 헥터가 죽은 뒤 그의 영화는 모조리 파기된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없애기 위해 찍은 영화라...
사실 일기나 다른 글들도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해서 쓴다
즉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내적 만족감을 위해 쓰기도 한다
영화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만드는데 돈이 좀 들어가서 그렇지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적인 기록이라면 남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가들도 가끔 일기나 유고들을 없애 달라고 하지 않는가?
헥터는 자신의 전기를 쓴 짐머에게만은 그 작품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리다를 설득해 그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프리다는 완전무결성을 위해 첫 약속처럼 누구에게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헥터가 죽기 전 날 도착한 짐머는 그와 단 5분 밖에는 얘기를 못하고 그의 단편 한 작품을 보게 된다
짐머는 프리다가 헥터를 질식사 시켰다고 추리한다

정말 프리다는 헥터가 모든 것을 발설할까 봐 두려워 그를 살해했을까?
90이 넘은, 오늘 내일 하는 노인이니 죽인다고 큰 죄책감은 없겠지만, 더구나 그녀 자신도 80이 넘은 나이니 삶에 미련 같은 것도 없겠지만, 헥터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까 봐 평생 사랑한 남편을 죽이기까지 한 걸 보면 그녀 성격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프리다는 앨머의 전기마저 불태워 버릴 정도로 집요했다
결국 그 편집증적인 태도 때문에 앨머에게 우발적이지만 죽기까지 했다
프리다는 뭐가 두려웠을까?
세상에 헥터의 작품이 알려지면 자신들이 평생 쏟아 부은 노력이 헛것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갖히기는 한다
한편 모든 것을 정리할 때이므로 너그러워지기도 하는데, 하여간 프리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꽤나 완고한 여자였을 것 같다

짐머가 본 단 하나의 단편에서도 나오듯, 헥터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를 곧 파괴하므로써 죄책감을 덜려고 한다
"프로스트의 내면적 삶" 을 보면 작가인 프로스트는 사랑하는 클레인이 죽어가자 자신의 소설을 하나씩 불태운다
클레인은 죽기 전 그 소설의 완성을 보려고 간절히 소원하는데 어느 순간 프로스트는 자신이 소설을 없애 버려야 그녀가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만든,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을 파괴하므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역설을 보여준다
헥터는 브리지드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평생을 바쳐 만든 영화를 모두 파괴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형벌을 내리는 것일테니까
프리다의 경우는 벌에 쏘여 죽은 어린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부담감을 벗기 위해서였을까?
어쨌든 자기 학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드문 경우라 하겠다

아주 재밌고 인상적인 책이다
특히 마지막 결론이 마음에 든다
짐머는 앨머의 성격상 헥터의 단편들을 복사해 놨을 거라 믿는다
사실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헥터의 전기를 7년씩이나 쓰면서 그의 과거 행적을 전부 조사하고 다닌 앨머가, 헥터가 죽는 즉시 불타 없어질 영화들을 그대로 방치했을 리 없다
이 부부는 헥터가 죽으면 영화도 없앨 거라고 늘 공언했기 때문에 앨머는 분명히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영화는 그녀의 아버지가 촬영하고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헥터와 프리다만의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짐머는 앨머가 어딘가에 그 영화들을 복사해 놨을 거라 믿고 누군가가 영화를 발견해 내면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리라 믿는다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난 사실 앨머와 헥터의 관계를 의심했다
프리다가 앨머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거나, 앨머가 성적으로 액티브한 걸 보면 둘 사이에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오스터는 진부한 형식을 거부한다
또 짐머 역시 평생 앨머만 그리워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사실 둘은 겨우 8일 동안 알고 지냈을 뿐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그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려 하지만 심장마비를 겪은 후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건을 기록한다
그리고 헥터처럼 죽은 후 출간하라고 유언한다
그러니까 헥터가 살아 있을 때는 이 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 책은 헥터와 앨머가 죽고 프리다가 모든 기록을 없애 버렸으므로 증거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환상의 책" 이 되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참 대단한 작가다
그가 비록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가는 아닐지라도 독자에게 이 정도의 재미와 생각할 꺼리를 준다면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물론 둘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말이다
그가 한국 사람이라면 이 독후감을 보내고 싶다
과연 그 자신은 자기 소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훌륭한 작가도 처음에는 책이 안 팔려 야구 게임을 팔러 다녔다고 하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글을 써야 하려나 보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훌륭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백날 글 써도 여전히 게임이나 팔고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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