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상 Mr. Know 세계문학 48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책.
일본 소설은 왠지 조잡스러운 느낌이 들어 (이를테면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잘 안 읽게 되는데 일단 표지가 예쁘고, 일본의 대표적 작가라고 하고, 리뷰가 좋아서 빌리게 됐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간만에 정말 몰두해서 빠져들고 있다.
사실 분량이 꽤 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말대로 쉬운 문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정말 괜찮은 소설이다.
마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을 보는 것 같다.
그 책은 19세기 영국 상류층 관습에 너무 무지해 공감이 영 안 됐는데 오히려 <세설>은 가까운 일본의 풍속을 그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간혹 반도의 부인들 이야기가 나와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생각나 소설 내용과는 상관없이 콧망울이 시큰해질 때도 있긴 했다.
괜한 비교가 되곤 했다.
20세기 초의 일본은 이렇게 잘 사는데, 이렇게 여유있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온갖 문화적 기술적 혜택을 누리고 사는데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식민 치하의 통치에 시달리며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가.
소설에서 딱히 식민지 현실을 언급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등장하는 반도인들 이야기가, 부유한 상류층인 주인공들의 삶과 비교되어 괜시리 마음이 아팠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늘 생각하는데도 이런 부분에서 울컥 한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 반발심 이런 건 없는데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뒤쳐져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우리 조상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이광수 등이 쓴 신소설을 읽어보면 20세기 초의 우리 옛 모습이 이렇게 잘 그려졌을까?
워낙 소설을 안 읽는 편이라 우리 근대 소설도 거의 못 봤는데 문득 <무정>이나 <유정> 같은 소설들이 보고 싶어진다.
풍속소설이 이렇게도 재밌는지 처음 알았다.
얼마 전에 읽은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정말 힘들게 의무감으로 읽었는데, 이 소설은 일반 대중에게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품격은 매우 고상하다.
쉬운 문체로도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같은 소설도 꼭 읽어 봐야겠다. 

쓰루코와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 네 자매의 이야기가 밑의 두 자매의 혼담과 맞물려 펼쳐진다.
특이한 것은 양자 제도였다.
딸만 넷인 아버지는 큰 사위와 작은 사위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어간다.
양자라고 하면 성을 바꾸는 것일텐데 사위들이 그것도 두 명이나 양자로 간다는 게 신선한 풍속이었다.
몰락한 상류층으로 나오긴 하지만 가문의 전통이나 품격은 가지고 있는 이 집안의 네 자매들의 생활방식이 참 흥미진진하다.
마치 사라져 버린 우리 양반 가문을 보는 느낌이랄까?
집에 애 보는 식모와 밥 하는 하인들이 따로 있는 것도 신기하고 신분제가 폐쇄됐는데도 여전히 도련님, 아가씨 하는 계급 시대의 유산도 보인다.
가부키가 굉장히 중요한 문화 행사로 나온다.
막내 다에코가 가장 다이나믹한 여성인데, 인형 제작에 흥미가 있고 전통춤도 잘 추며, 양재일로 직업까지 가지려고 한다.
직업부인이 되는 것은 가난한 여자들이나 하는 천박한 일로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시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다에코는 놀랍게도 신분이 다른 사진사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
원래 그녀는 비슷한 신분의 오쿠바타케와 도망을 쳐서 지역신문에 날 정도였는데, 오쿠바타케네 집 하인이었던 이타쿠라를 좋아하게 된다.
물난리가 났을 때 사진사였던 이타쿠라가 그녀를 구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게이샤와의 사이에서 애까지 낳은 난봉꾼에다가 멋만 부릴 줄 알지 생활 능력은 없는 오쿠바타게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미국까지 가서 사진 기술을 배워 온 믿음직한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결심하는 모습에서 다에코의 현대성을 느낀다.
언니 유키고는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가문에 걸맞는 남자를 찾기 위해 아직도 선을 보러 다니는데 동생 다에코는 직접 인형 제작으로 전시회도 열고 돈도 벌고 심지어 프랑스까지 양재 기술을 배우러 갈 계획도 세울 만큼 대찬 구석이 있다.
두 자매의 가치관과 행동들이 비교되어 무척 흥미롭다.
뜻밖에도 신분의 차를 넘어 결혼을 결심한 다에코 때문에 집안은 난리가 나는데서 1권이 끝난다.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어 내릴 곳을 잊곤 한다.
잠깐 본 하권의 첫 장에서 이타쿠라가 유양돌기염 수술을 하다가 정신을 잃는 것으로 나와 급하게 다에코가 도쿄를 떠나는 걸로 되어 있던데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유키코는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까?
유산했던 사치코는 다시 애를 가질 수 있을까? 
일일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더 인상깊었던 것은 오사카의 지방 문화였다.
여기 나온 간사이 지방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수도 도쿄와는 전혀 다른 지역색이 강한 곳 같다.
모든 게 수도 중심인 나라에 살다 보니, 지방색 강한 이런 문화는 낯설고 신선해 보인다.
자매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간사이 지방을 굉장히 사랑하고 저자 역시 애정어린 눈으로 간사이 문화를 기술한다.
남자면서도 어쩜 이렇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하게 풀어 쓰는지.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보다는 훨씬 더 재밌게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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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Mr. Know 세계문학 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글 쓰는 스타일이 부드럽다.
어렵지 않고 쉽게 풀어서 마음에 콕콕 박히게 쓴다.
현재형 문장들이 속도감을 주면서도 다소 눈에 거슬리기도 했으나 내 수준에서 음미할 수 있는 편안한 문장들이다.
초등학교 교사와 세일즈맨 등을 전전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토마스 만의 소설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편한 느낌이 좋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쓴 제임스 존스의 문체를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감정을 표출해 마음에 콕콕 와 닿는다. 

영화를 먼저 봐서인지 끔찍한 전쟁 장면을 접할 때마다 더 생생하게 와 닿는 느낌이다.
특히 학생들을 선동해 전쟁터로 몰고 간 공명심 많은 선생에 대한 분노라든가, 빵을 먹어 치우는 쥐떼들과의 전쟁, 전투 중에 죽어가는 전우를 데려가지도 포기하지도 못해 안절부절 하는 모습 등은 영화에서도 정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전쟁은 대체 뭐란 말인가.
주인공이 휴가를 나와 선술집에서 만난 교장은, 자네 같은 일개 병사는 주변 밖에 모른다면서 작전과 지령 등을 떠벌린다.
진짜 전투가 뭔지도 모르는 후방의 안전한 민간인 주제에 파리를 점령해 버렸어야 한다느니 하는 몽상 같은 술자리의 객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능상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적어도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을 제일 먼저 전방에 배치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덜 싸우게 될 게 틀림없다.
혹은 싸운다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내는 이런 끔찍한 전면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부추기는 입바르고 교활한 정치인들을 먼저 최전방에 배치해야 한다.
히틀러에게 제일 먼저 소총을 주고 부대 최전선에 세워 돌격 앞으로를 외치게 했었어야 하는데! 

저자가 직접 1차 대전을 경험해서인지 포탄 속을 뚫고 나가는 병사들의 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젊음의 치기에 몸을 맡겨도 괜찮을 너무 아름다운 나이에, 포탄과 쥐떼와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 속을 헤매어야 하다니!
전쟁은 아무리 미화를 시켜도 끔찍하고 잔인하며 개인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대재앙이다.
이런 엄청난 참상을 겪고도 독일이 다시 2차 대전을 일으켰다는 게 정말 신기할 지경이다.
군대에 가면 화장실 욕이 일상화 될 수 밖에 없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가장 본능적인 것, 가장 원초적인 것을 까발려야 조금의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남기지 않고 정말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고자 하는 본능, 배부르게 먹고 쉬고자 하는 욕구.
이른바 문명이라는 걸 이룬 후부터, 생산력이 높아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채운 다음부터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니, 문화니, 자아실현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눈을 뜰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부모 자식간에 살뜰한 정을 표현할 여유도 없다는 문장이 아프게 와 닿았다.
군대에서는 포만감과 휴식만 있으면 천국이라는 말, 적군의 포화 앞에 노출된 최전방의 병사가 아니라면 제대로 느끼기 힘들 것 같다.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고 또 끔찍하고 안타깝다.
군인들이 이 끔찍한 참상을 겪고 나서 사회에 제대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정말 이해가 된다.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 같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살아 남은 자의 고통을.
미스터 노 시리즈는 손에 딱 잡히는 핸디형 사이즈에 가벼운 종이, 예쁜 디자인 등 뭐 하나 버릴 게 없는데 왜 벌써 이 책이 절판인지 안타깝다.
레마르크의 다른 소설, 개선문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도 읽어 봐야겠다. 

 

반납 날짜에 밀려 드디어 다 읽었다.
대출을 하면 밑줄긋기나 메모를 할 수 없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대신 언제까지 읽어야 한다는 기한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강제성이 있어 좋기도 하다.
사실 내 책 보다 대출한 책을 항상 먼저 읽는다.
결말은 너무 허무하고 비극적이다.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이라 당연히 주인공이 살아 남아 과거를 회상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비극적인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종전 직전 서부전선의 최전방에서 전사하고 만다.
사령부 보고서에는 파울 보이머가 사망한 날, 서부전선 이상없다고 기록된다.
전체로 보면 역사가 흘러가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겪어 내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사의 이런 엄청난 사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모르겠다.
영웅이 시대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같다.
역사책 속에 나오는 1차대전과, 소설 속에서 병사들이 겪어 내는 1차대전은 왜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문장이 쉽고 평이해서, 또 1인칭 시점으로 한 개인의 감정변화를 진솔하게 풀어내서 편하게 읽었다.
레마르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는 <개선문>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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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Mr. Know 세계문학 38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아, 정말 어렵게 읽은 책이다.
영화를 먼저 봤고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안 되서 원작을 봐야지 벼르다가 정말 힘들게 빌려서 읽었다.
여러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을 읽고 다른 단편들은 도저히 도전할 용기가 없다.
나는 일단 서사구조가 약하면 재미가 없다.
아무래도 내가 이해할 수준이 안 되는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다. 

소설 속의 타치오를, 영화에서 스웨덴 아역 배우가 정말 완벽하게 재현했다.
앞부분에 실린 아센바흐의 예술가로서의 고뇌는 영화에서 표현이 안 되지만 베네치아에 도착한 후 타치오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면은 정말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소설을 제대로 그려내기가 참 어려운데 굉장히 충실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타치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더운 베네치아 거리를 헤매는 아센바흐의 모습은 정말 완벽했다.
영화 속의 타치오는 토마스 만이 그리고자 했던 바로 그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소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성애, 사실 공감하기 어렵다.
예술가로서의 예민한 감각과 약한 체력을 가진 아센바흐가, 문장으로 귀족 칭호까지 하사받은 그가 거리의 어떤 남자에 의해 자극되어 자기도 모르게 여행을 떠나게 되고 거기서 마음을 움직이는 미소년을 만나 그 곁을 맴돌다가 전염병의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죽고 만다.
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서 피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젊어 보이려고 화장을 하는 노대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소설의 백미다.
결국 그는 단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해변가에서 숨을 거둔다.
동성애, 특히 어린 소년에 대한 애정, 문득 그리스인들의 동성애가 생각난다.
어른이 미소년을 상대로, 어쩌면 젊음에 대한 동경,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앞부분에서 작가는 아센바흐의 예술가적 자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약한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하고 자기 안에 함몰하는 남자.
미친듯이 몰아쳐서 글을 쓰기 보다는,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엄격한 자세로 집필하는 정말 독일인다운 작가.
삶의 욕망을 모두 금기시하고 게으름이나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고 오직 성실하게 문장을 이어나가는 남자.
일반적인 천재적인 예술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고 어쩌면 내가 그려온 그런 작가상이 아닐까 싶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즐거움은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오직 정신적인 것, 신성한 그 무엇을 향해 인고하고 절제하며 금욕하는 남자!
사실 이 소설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작가가 창조한 이 예술가에 대해 애정이 생기고 또 하나의 창조물 타치오에 대해서도 애착이 간다.
다들 재밌다고 감탄하는 <부텐부로크 가의 사람들> 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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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Mr. Know 세계문학 3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인가? 
소년소녀 주니어 세계명작전집에 있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굉장히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으며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포로를 심문했는데 이미 그 전에 잡혀서 혀가 잘렸던 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 때는 그 장면이 꽤나 공포스러워 혀를 자르다니,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제대로 읽지 못해 늘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예쁜 디자인과 가지고 다니기 쉬운 핸디형 사이즈로 출간되어 벼르고 있다가 읽게 됐다. 
이 책 역시 옆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이미 품절된 책이지만 빌릴 수 있었다. 
번역자가 얼마 전 재밌게 읽은 <러시아정교>의 저자 석영중씨라는 점이 더 믿음이 갔다.
처음에는 발음하기 힘든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입에 익숙치가 않아 속도가 안 났는데 금방 소설에 빠져 들어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성공할 것 같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다.
늘 놀라는 바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순조 시대 사람인데 대체 어쩜 이렇게 현대적인 구성과 문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춘향전 같은 우리 옛 소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등을 보면 인물의 심리나 사건의 묘사 등이 뛰어나긴 하지만 어쨌든 고전 소설의 기본틀, 이를테면 권선징악적 구조나 상투적인 문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유럽 소설들을 읽으면 우리 옛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사건의 전개, 플롯 같은 면에서 말이다. 

푸슈킨의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녀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죽을 만 하군, 고개를 끄덕일 만큼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뒷쪽에 실린 해설을 보니 나탈리아는 미모 외에는 별로 건질 게 없는, 낭비벽도 심하고 허영심이 많은, 거기다가 지참금마저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 아가씨였다고 한다.
나탈리아의 장모 역시 푸슈킨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지참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달리 대안이 없어 시집을 보내고 사위와 갈등이 심각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문호로 추앙받고 있는 푸슈킨의 비사들이 흥미롭다.
하여튼 이 소설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체 소설이다.
마치 재밌는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것 같아 찾아 봐야겠다.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라뇨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지에서 주정뱅이 프랑스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먼 변방의 요새로 초급장교가 되어 떠난다.
그를 따라간 충실한 하인의 이름은 사벨리치.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돌봐온 노인인데 이 사람은 뾰뜨르를 지키고 시중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한다.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과 현대대중사회의 괴리감이 이런 데서 온다.
우리가 인권이나 자유, 시민의 권리, 애국심, 정의 등을 논할 때 그 당시 제정 러시아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신앙심 등을 이야기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란 바로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다.
뾰뜨르에 대한 사벨리치의 복종과 절대적 헌신은 지극히 자발적이고, 복종이 곧 그 노인의 양심이자 가치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이런 종류의 복종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형의 가치, 이를테면 인권, 자유, 평등 이런 것들에 목숨을 바친다.
하여튼 이 노인네 캐릭터는 극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면서 잔재미를 준다.
특히 주인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장면은, 노예제도가 얼마나 강력하게 한 개인을 휘감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뾰뜨르는 벨로고르스끄 요새에 파견되어 그 곳 사령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그녀에게 대쉬했다가 차인 같은 장교, 쉬바브린.
뾰뜨르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허락은 커녕 오히려 다른 부대로 떠나게 되었을 판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뿌가쵸프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요새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인 것 같다.
까자끄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데 러시아 역사를 잘 몰라 그냥 짐작만 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역사책에서 보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레핀의 그림으로 다소 야만적이고 호전적으로 표현된 이 까자끄인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뾰뜨르는 요새로 발령받아 오던 중,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떤 안내자의 도움으로 헤쳐 나간 후 고마움의 표시로 털외투를 선물한 적이 있고 바로 그 인물이 후에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다.
뿌가쵸프는 요새를 점령한 직후 장교인 뾰뜨르를 교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눈밝은 하인 사벨리치가 뿌가쵸프를 알아채고 옛 인연을 기억해내 극적으로 살아난다.
흥미진진한 플롯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귀족이자 군인이며 또 기독교도인 뾰뜨르는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줬어도 반란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변절자 쉬바브린과는 다르게 뾰뜨르는 여제 폐하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남자로 나온다.
마치 사벨리치가 그 주인인 뾰뜨르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 큰 뿌가쵸프는 죽이려면 단칼에, 살리려면 확실하게, 라는 평소 신조대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뾰뜨르를 구해 주고 심지어 쉬바브린에게 납치된 마리야 이바노브나까지 그의 품으로 돌려 준다.
이런 부분들은 어쩐지 아기자기한하며 민속적인 느낌을 주고 그래서 소설이 무겁지 않고 흉악한 반란군 우두머리 뿌가쵸프에게도 동정심이 느껴진다.
또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러시아 귀족들이 절대적 복종이다.
비록 서구 역시 최근까지도 여성차별이 있어 왔고 여성은 집에만 있는 종속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자 군주들이 (그것도 매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걸 보면, 유교 사회의 남녀차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인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배우자인 독일인 황후를 여제로 옹립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무척 궁금하다.
조선 사회에라면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말이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만큼이나 대단한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뾰뜨르는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마리야를 자신의 영지로 피난시키고 다시 여제의 군대로 돌아가 싸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반란이 진압된 후 뿌가쵸프와 한통속이었다는 쉬바브린의 증언에 따라 그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뿌가쵸프에 의해 요새 사령관인 미노로프 대위 부부가 살해당하고 그들의 딸인 마리야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뿌가쵸프와 협상을 벌였던 사정은, 여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밝히지 못한다.
마리야는 직접 여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올라가고 우연히 만난 귀부인이 그녀의 진정서를 보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귀부인이 바로 여제였다.
물론 여제는 단번에 사건을 해결해 준다.
이 결말은 우연성에 기댄 고전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너무 싱겁게 일이 해결되어 (절대자의 등장) 좀 시시했지만 하여튼 그 과정까지 어찌나 흥미롭게 읽었던지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는데 마치 일일연속극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아마도 중간 이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중간 이름까지 꼬박꼬박 언급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이를테면 이반 꾸즈미치 미노로프 대위는 그냥 이반이 아니라 이반 꾸즈미치, 이렇게 불리고 주인공 역시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도 뾰뜨르 대신, 꼬박꼬박 뾰뜨르 안드레이치, 라고 불린다.
귀족만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러시아 풍속이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너무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미스터 노> 시리즈가 무척 마음에 든다.
다른 소설도 이 시리즈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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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11-0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미스터 노 시리즈 책들 중 일부를 반값(?)에 팔던데, 품절이 왜 이렇게 많이 뜨는지 모르겠어요.ㅡ.ㅡ;;;

marine 2009-11-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이 많아서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상호대차 서비스, 정말 좋더라구요. 경기도내 도서관끼리 택배료도 안 받고 진짜 좋은 써비스인 듯.
 
댄스 댄스 댄스 2부 - 그림자와 춤추는 공백지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상실의 시대> 와 그의 에세이를 워낙 재밌게 읽은 나로서는 솔직히 이 책은 실망스럽다.
아마도 내가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 생각난다.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죽음, 방 안에 잘 모셔진 여섯 구의 백골... 익숙치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나 하루키 좋아하는 거 맞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1권에서는 고혼다라고 번역하더니 2권에서는 느닷없이 고탄다로 바뀌는 건 또 뭐냐.
번역 어설프다.
개정판으로 봤으면 좀 나았으려나?
아니면 양사나이를 찾는 앞권을 미리 읽었어야 연결이 되려나.  

다만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이런 위안은 받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죄다 고독하고 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러나 많이 외로워 하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키면서 쿨하게 산다.
남들과 엮이지 않고 다른 이의 호의에 기대지 않고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정의 벽을 친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고립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과의 그 적당한 거리감이 좋다.
한국처럼 가족주의, 온정주의, 지연, 학연 등으로 엮인 나라에서 하루키가 보여주는 인간 군상은 어쩐지 상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왠지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황량한 도시에 혼자 버려져 있어도 그다지 외롭지가 않다.
마치 내가 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원래 인생은 그런 거야,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아,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요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독신 남자가 말이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나는 주구장창 커피만 마시는 독신 여성이 등장할 것 같다. 

잘 생긴 남자, 배우 고혼다의 자살은 다소 충격이었다.
앞부분 설명에서 고혼다가 키키의 살해자라고 나오고, 뒷쪽으로 가면 국제 콜걸 조직이 등장하길래 난 무슨 스릴러인 줄 알았네.
소설 분위기로 봤을 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지.
고혼다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같다.
현실과 꿈의 세계가 오락가락 하고 인격이 순간순간 변하는 남자.
어쩌면 정말로 연예계를 떠났어야 죽음을 혹은 살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혼다가 자동차를 몰고 바다로 뛰어 들어간 걸 보면서 자살한 연예인들도 그런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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