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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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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을 별로 안 읽는 편이라 그래도 고전은 읽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이 책은 교수님이 너무 재밌다고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됐다.
시사주간지에서도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해서 도서관에서 항상 대출 중이라 빌리는데도 정말 오래 걸렸다.
리뷰를 보니 무려 200여개가 붙어 있다.
과연 인기를 실감하겠다.
절반 정도를 읽고 있는데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이런 식의 건조한 문장을 안 좋아한다.
나는 사람의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풀어내고, 사건 위주로 속도감 있게 전개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를테면 은희경처럼 인간의 위선을 까발린다거나, 얼마 전에 완전 감탄하면서 읽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처럼 외부 환경과 투쟁하는 나약한 인간의 심리 변화 같은 소설에 열광한다.
이 소설은 맞는 비교인지 모르겠으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서술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문체나 풀어가는 스타일이 얼추 비슷해 보인다.
그 책도 참 힘들게 읽었는데 이 책도 빠져들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설정은 충격적이다.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지구에 큰 재앙이 생기고 이제 인간은 석기 시대처럼 먹을 것을 찾아 끝없이 방랑해야 한다.
온 세상은 눈에 덮혀 추위와 싸워야 하고 식량 따위는 없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길가다 사람을 발견하면 그를 죽이던지 죽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다.
주인공 남자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을 찾아 기약없는 방랑을 하고 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살해 위협, 배고픔, 추위...
아들은 혹시 아버지가 사람을 죽여서 먹을까 봐 두려워 한다.
보통 한국적 정서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희생적인 아버지상이 대부분인데 대체적으로 서구 소설들은 일방적인 희생이나 끈끈한 정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좋게 말하면 쿨 하고 좀 밋밋하다고 해야 할까?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자식은 꼭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기 보다는, 그냥 보호해 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 그러다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약간 체념 비슷한 허무감을 느꼈다.
평론에서는 그런 부모 자식 관계가 이 소설의 포인트라고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여튼 굉장히 건조하다. 

이들의 여정을 읽으면서 문명 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해 봤다.
대체 그들은 그 추운 빙하기를 어떻게 견뎌 냈을까?
제대로 된 옷도 없고 신발도 없고 (오늘 기사를 보니 구석기 초기에 이미 신발을 신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하지만) 추위를 가릴만한 집도 없고 비축해 놓은 곡식도 없고 그저 사냥을 하면서, 그것도 어설픈 돌맹이 몇 개로 덩치 큰 짐승들과 싸우면서 대체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새삼 인간의 진화 과정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어쩌면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질지게 살아남아 결국은 온 지구를 생존의 패러다이스로 만들고야 만 인간의 이 놀라운 업적이야 말로 신의 섭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면서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나는 걸핏하면 죽어 버릴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먹고 사는 게 왜 이리 비루하냐, 이런 식으로 도무지 적극적인 생의 의지라고는 없는데 어른들 말씀대로 정말 배가 불러서 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석기 시대 원시인들은 그 험한 환경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 남았을까?
이 책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힘든데 왜 기어이 살겠다고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걸어간다는 말인가?
죽느니 보다 못한 상황이니 차라리 죽어 버리지.
정말 자살은 지극히 문명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감나게 묘사된 자연 상태의 벌거벗겨진 인간의 삶을 읽으면서 생존 의지야 말로 인간의 본능이고 자살 충동이 우울증에 따라오는 확실한 정신병이구나 싶다.
이런 결론을 내는 게 좀 우습기도 하지만, 새삼 빙하기를 견뎌 내고 문명 사회를 이룩한 우리 조상들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또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 것 같고, 갇혀 있는 삶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불행하다, 이런 식의 감상은 진짜로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문명화 사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언어 유희가 아닐까 싶다.
아직 절반 밖에 못 읽었는데 나머지도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드디어 다 읽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불을 피우면서 뭔가를 구워 먹으려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총을 든 남자를 피해 그들이 도망가자 부자는 기대를 품고 장작더미로 간다.
그런데 꼬치에 꽂혀 있는 고기는 이럴 수가, 짐승이 아니라 머리가 잘린 아기였다!
지하철에서 이 부분 읽다가 토할 뻔 했다.
전국 시대에 인육이 성행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정말로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 후 아들은 우리는 사람을 안 먹을 거죠? 하면서 자주 확답을 받는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무서웠을지 상상이 간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던데 과연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된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객혈을 하다가 죽고 만다.
피를 쏟으며 기침을 하다가 결국 다음 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아버지 곁을, 소년은 떠나지 못한다.
길을 떠돌아 하는 만큼 담요는 추위를 막기 위해 필수인데도 아버지의 시신에 담요를 덮어 두고 떠난다.
마지막에 다른 일행에 합류하는 걸로 나오는데 소년이 늘 꿈꾸던 바로 그 착한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단순히 자연과의 투쟁이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존재가 내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되는 진정한 만인에 의한 투쟁 상태, 아, 정말 문명화 이전의 원시 사회는 무서웠겠구나.
오늘날 이 만큼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인권과 생명 존중의 풍조가 자리잡은 것도 기나긴 진화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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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특이해서 일단 영화로 먼저 봤고 손예진의 매력에 풍덩 빠져 책까지 읽게 됐다.
대체 얼마만에 읽은 소설이란 말인가!
요즘 소설이 트렌드는 역시 발랄한 문체와 재미인 것 같다.
지극히 현대적인 문체와 서술방식에 푹 빠져 정말 재밌게 읽고 있다.
이런 책에 비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체 얼마나 무겁단 말인가! 

영화가 책을 압도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긴 분량을 자랑하는 책에 비해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사건이나 주인공들의 심리 변화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 압축성을 관람객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가 성공의 관건이다.
결국 영화는 장면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변화나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기 보다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임팩티브한 영상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영화의 승부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이 책 역시 영화보다 소설이 더 재밌다.
시시각각 변하는 남자 주인공 덕훈의 심리변화와 속마음을 따라갈 수 있어 정말 재밌다.
축구와 연결지어 남녀간의 사랑과 결혼 등을 기술하는 기법이 신선하다.
흥미유지에 도움이 된다. 

나는 늘 인아처럼 결혼 안 하고 연애만 하는 삶을 꿈꿔왔다.
언젠가 나도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연애는 나랑 하고 결혼은 착한 여자와 하라는 소리도 했다.
나는 결혼제도가 너무 싫었고 어쩔 수 없이 시댁에 들어가는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못마땅했다.
여기 나온 인아의 대서처럼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안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혼을 하더라도 결국 이혼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에 아예 처음부터 나는 결혼은 안 하겠다 선언을 하고 연애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사회의 일반적인 제도에서 비껴 가려면 상당한 베짱과 능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걸 그 때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처럼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지성과 사회적 위치와 능력이 안 되는데 표준적인 라이프 스타일에서 혼자 떨어져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몰랐다.
나는 책에서 접하는 멋진 독신 여성들을 나와 동일시 했고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이 책 속의 인아도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른, 강단있고 무엇보다 섹스를 즐길 줄 아는, 정말로 술과 연애를 사랑하는 멋진 여자다.
영화 속의 손예진을 본다면 저 정도 여자라면 남편 둘 데리고 살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그 매력에 반할 것이다.
나는 손예진처럼 매력있는 여자도 아니고, 보부아르처럼 능력있는 지성인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인데 왜 그렇게 일반적인 룰을 싫어하고 거부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특별한 용기와 결심 없이도 결혼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하는 것이다.
골드 미스들이 늘고 있고 독신 가구도 증가한다지만 여전히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과 출산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아무래도 한 30여 년 후에나 태어났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인아의 연애관과는 조금 다르다.
인아는 남자처럼 섹스를 즐길 줄 아는 여자이고 그래서 사랑과 섹스가 별개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독점적인 관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야 말로 지극히 독점적이고 소유욕이 강하며 사랑할수록 집착하게 되고 특히 육체적 관계는 매우 배타적이라고 믿는다.
정말로 상대방의 다른 성관계에 대해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쿨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돈을 주고 성을 사는 행위조차도 파트너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데 하물며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야!
다양한 결혼의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지만, 인아처럼 진정한 의미의 자유연애주의자는 내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모든 사랑의 완성이 꼭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안정적으로 끝을 맺는지는 의문이다.
서로의 생활 공간을 유지하면서 독립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내 소망이다.
동거도 한 공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별로 탐탁치 않다.
그래서 주말부부처럼 가끔 만나는 사이도 괜찮을 것 같다. 

취미의 공유, 그것도 열렬히 좋아하는 축구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여자가 이렇게 축구 좋아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정말 덕훈의 입장에서는 인아가 너무 사랑스러울 것 같다.
내 경우에 빗대어 보자면 인문학 서적에 열정을 가진 사람, 도서관이나 서점 가는 걸 최고의 기분전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었는지를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파트너로써 완벽할 것 같다.
삼엽충에 관한 책을 읽은 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고대의 지배자를 모르고 살았다니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요! 라고 감탄하면서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사랑은 반드시 비슷한 사람끼리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취미와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 것 같다.
난 정말 리처드 포티가 쓴 <삼엽충>을 읽고 나서 내가 그동안 이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는 게 너무 기막히고 황당해서 탄식이 나왔는데 남자친구는 삼엽충이 뭔 벌레냐? 이런 어이없는 반응을 보여 좌절한 적이 있다.
삼엽충과 내 인생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흥분을 하는지.
그런데 또 이런 지식의 확장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니 더욱 열심히 책을 읽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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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Mr. Know 세계문학 44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책 표지가 너무 예뻐서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영화 제목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열린책들의 미스터 노 시리즈는 어떤 책이 됐든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디자인이나 판형이 참 예쁘다.

춘천에서 광주 가는 버스 안에서 다섯 시간 동안 읽은 책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원래 추리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다 보니 쉽게 빠져 들 수 없었고, 버스 안이라는 물리적 환경도 한 몫 거든 것 같다.
대충 줄거리만 맞춰 가면서 읽다가 집에 와서 다시 부분부분 재독을 했더니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이 됐다.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문체도 이른바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맞게 딱딱 끊어지는, 군더더기 없는 단문들을 선사한다.
헤밍웨이도 이런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내가 읽어 본 헤밍웨이 소설과는 꽤 다른 스타일이다.
책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중심으로 짧은 문장으로 사건 전개를 위주로 진행시킨다.
이런 걸 보면 셜록 홈즈 시리즈는 정말 어린이용 추리 소설 같다.

몰타의 매라는 전설이 실제로 있긴 한건지 궁금하다.
아니면 작가가 다빈치 코드처럼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제목이 일단 흥미롭다.
사실 몰타의 매를 찾는 과정 자체는 크게 긴박감이 넘치는 건 아니다.
그냥 세 사람이 암살을 당했을 뿐, 살인사건 자체가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선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이끌어 가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가 훨씬 더 사건을 긴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영화로 한 번 보고 싶다.
여주인공 브리지드 역을 대체 누가 맡았을지 궁금하다.
무려 세 번이나 영화화 됐다고 하는 걸 보면 꽤나 흥미진진한 소재인 것 같다.
결국은 이 여주인공이 모든 사건의 핵심인 셈인데, 마지막에 샘 스페이드가 브리지드를 경찰에 넘기면서 그녀에게 던지는 말이 이 소설의 압권이다.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 것, 냉정하게 사랑과 죄값을 구분하는 것, 스페이드라는 탐정의 캐릭터와 정말 잘 어울리고 앞쪽에 삽입된 플랫그리드라는 인물의 이야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해설에서도 그 부분이 구성상 매우 훌륭하다는 걸 지적한다.

사실 탐정이라는 직업 자체가 우리 문화권에서는 생소하다 보니 100% 완벅하게 몰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저자의 글솜씨 하나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표지를 보니 작가가 꽤나 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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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불행하다
카리 호타카이넨 지음, 김인순 옮김 / 책이좋은사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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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독특한 소설이다.
여러 명의 관점에서 쓴 것도 그렇고 결말도 특이하다.
핀란드라는 나라는 너무 생소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소설로 접하고 보니 호기심이 생긴다.
책 표지가 일단 예쁘고 누워서 읽어도 괜찮을 만큼 손에 딱 잡히는 작은 크기가 맘에 든다.
디자인을 굉장히 발랄하게 했지만 내용은 좀 우울하다.
핀란드는 인구밀도가 굉장히 낮다고 들었는데 역시 이 나라도 수도 헬싱키에 인구가 집중된 모양이다.
이런 복지국가에서도 주택 문제 때문에 이혼 문제까지 들먹여야 하다니, 한숨이 나온다.
여기는 아파트 대신 단독주택에서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야 뭐, 워낙 땅이 부족하니 고급 아파트를 찾는 거겠지만 사실 아파트는 이 소설의 표현대로 연립주택 내지는 공동주택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과 하나의 건물을 공유하면서 이런저런 눈치를 살펴야 하는, 비독립적인 주거 공간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당 있는 집에서 당연히 정원 가꾸며 살고 싶을 것이다.
그것도 서울 한 복판에서.
정말 대한민국 0.1%나 그런 꿈을 이루고 살겠지.
책에도 어떤 부동산 업자가 이런 말을 한다.
도심에 있는 주택 값을 깍으려고 하자, 그 돈으로 주택 사려면 교외에나 가 봐라, 그럼 넓고 좋은 집 많을 거다, 대신 연극이나 콘서트 같은 건 포기해라, 까페라고는 24시간 주유소가 전부일 거다...
결국 사람들은 직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화를 즐기기 위해, 또 교육 때문에 도시로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 같다.
인구가 힘이라더니, 시골은 사람이 없으니 문화 생활의 기반이 진입할 수가 없고, 그래서 더욱더 사람들은 시골을 떠나고...
악순환이다.
서울대나 국제고 같은 데를 깡촌 시골에 지어 놓으면 안 될까?
미국의 대학 도시들처럼 말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마티는 경찰관의 표현대로 이성적인 목표를 가졌을 경우 매우 착실하고 완벽하게 해냈을 사람이다.
집요하고 너무나 철저하며 완벽해서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가면 정신병자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부동산 업자의 뒤를 밟아 협박전화를 하기도 하고, 남의 정원에서 소변을 보고 그 주인에게 전화를 걸기고 한다.
주인공이 유쾌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다소 위험한 행동들이다.
특히 마지막에 원하는 집을 발견하고 집주인을 밧줄로 묶어 협박하는 장면은 경찰관에게 체포되기 충분하다.
아무 인연도 없는 집주인에게 다짜고짜 찾아가 내가 당신을 2층집에서 죽을 때까지 모실테니 시세의 70%만 받고 집을 팔아라, 이게 말이 되냔 말이지.
어쩌면 헬레나는 마티의 그런 집요한 성격에 질려 이혼을 한 건지도 모른다.
보다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면 좋았으련만!

<핀란드의 딸들>이라는 기획 프로그램에서 가사일에서 남녀분담이 거의 완벽하게 이뤄진 모습을 보여 줬는데 책에서는 한 술 더 떠 마티가 모든 요리를 책임진다.
헬레나는 그와 이혼한 후 스프 하나 제대로 끓이질 못해 인스턴트 스프를 데워서 아기에게 먹일 정도다.
식사 때문에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 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오히려 헬레네는 남편 마티가 사회 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집에만 틀어박혀 요리만 하는 걸 못 견뎌 할 정도였다.
정말 서구 사회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더불어 주거 공간에 대한 욕심은 만국 공통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빨리 돈 모아서 나도 내 집 마련해야겠다.
그래야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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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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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닉 혼비라면 "About a boy" 를 쓴 작가가 아닌가?
그 영화를 워낙 재밌게 봤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다.
더군다나 알라딘에서 읽은 리뷰가 맛깔스러워 꽤나 기대를 하고 집어든 책이건만...
역시 내가 축구에 관심이 없어서일까?
너무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농구 얘기를 하면 더 나을 것 같다.
축구에 관한 얘기라면 이 책 보다는 서형욱이 쓴 "유럽축구기행" 이 훨씬 흥미롭다.
팬에 관한 얘기라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 더 나을 것 같고.
하여튼 나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지루하고 심심했다.
외국 사람이 쓴 에세이라 그런지 문장이 와 닿지가 않았다.
그래도 조지 오웰의 소설은 마음에 콕콕 박히는 유머가 있잖아.
아,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거야...

 

이 책의 장점을 굳이 들자면, 내 소녀 시절의 열정을 추억하게 만든 걸 꼽겠다.
나는 언젠가 이런 책이 나오리라 기대하는데, 한창 아마추어 농구가 유행할 때 현대와 기아가 라이벌 관계일 때 나는 언제나 만년 2위인 현대를 응원했다.
이충희의 전성기가 지나고 허재와 김유택, 강동희 등이 한창 날리고 있을 때 한물 간 이충희나 이원우가 있는 현대 농구단의 광팬이었다.
그 때만 해도 서울에서만 경기가 있을 때라 지방에 살던 나는 직접 관람도 못하고 TV로만 중계 방송을 봤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했으면 팬클럽에라도 들텐데 그 때는 고작해야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 한귀퉁이 얻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렇게 수집한 신문 기사가 노트 한 권은 족히 넘었으니 나름 꽤나 애정을 갖고 팬 노릇을 했다.
남들은 죄다 기아를 응원하고 응원한 팀이 이겨 승리를 만끽하는데 나는 항상 그 팀에 패배하는, 꼭 기아의 밥 같은 현대만 응원하고 패배에 몸을 떨어야 하는 처지였으니, 어떻게 보면 닉 혼비가 아스날을 응원할 때의 그 열패감을 나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나중에 연세대가 한창 끗발을 날릴 때도 나는 이상하게 연대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고려대를 응원했다.
죄다 이상민이나 문경은, 서장훈, 우지원 같은 연세대 스타들을 환호하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고려대의 김병철이나 전희철, 현주엽 같은 스타성이 다소 부족한 선수들이 더 좋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선수들의 주소, 이원우는 노원구 상계동에 살았고, 현주엽이 사는 아파트 이름은 개나리 아파트였다.
나는 원체 마이너 기질을 타고난 모양이다.
나의 우상은 현대팀의 이충희도 아니고 늘 이충희에게 가려 빛을 못 본 비운의 가드 이원우였다.
이 사람은 결국 은퇴 후에 인간극장에 나올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불행하게도 뇌종양에 걸려 세 번의 수술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유명한 농구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국가 대표까지 지냈다) 언론의 주목도 못 받고, 하필 죽을 때가 허재 은퇴하는 날이라 정말 언론의 한 줄 기사거리도 못 되고 쓸쓸하게 사라졌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하여튼 내 중고시절은 닉 혼비가 아스날과 함께 성장한 것처럼 나도 현대 농구팀과 함께 자랐다.
그렇지만 그가 느낀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의미와는 매우 다르다.
요즘 10대 소녀들이 열광하는 그런 팬문화도 아닌 것 같고, 집단의 문화를 공유하기 위한 그런 제스처도 아니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꽂힌, 그런 취미와 비슷했다.
마치 지금 내가 책을 좋아하듯 나는 현대 농구팀을 사랑했다.
용병들이 등장하고 무지막지하게 덩크슛을 꽂아대는 프로농구는 내 취향이 아니다.
차라리 나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신체접촉 없이 깔끔하게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배구가 훨씬 좋다.
아니면 이충희나 이원우가 3점슛 라인에 서서 슛을 던지는 그런 아기자기한 실업농구가 더 좋다.
이원우의 죽음, 언젠가 꼴지팀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소설로 부활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의 딸 이름이 이혜민이었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들 현수도 농구선수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인간극장에 나온 이원우 선수의 형도 키가 컸던 기억이 난다.
아, 삶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신해철이 영국 갔다 온 다음에 영국인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축구를 사랑하고 즐긴다는 말을 했었다.
한 때 신해철의 팬이긴 했으나 요즘의 그 언론플레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말의 의미를,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한 느낌이 든다.
영국인에게 축구란 닉 혼비의 절묘한 표현처럼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월드컵 4강이 국력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외국 경기에서의 승리를 열망하는 한국 축구 문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같다.
단순히 축구 선진국이나 종주국 같은 간단한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같다.

 

이혼 문제가 얽혀 있어서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마음이 찌릿했다.
프랑스 여자를 따라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사춘기의 아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면서 할 수 있는 놀이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
축구 관람이란 얼마나 시의적절한 놀이였을까?
닉 혼비의 넋두리처럼 어색한 부자간에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가 참 부족하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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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현 2014-11-06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