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다

서점에서 우연히 한 장을 넘기게 됐는데 필이 확 꽂혀 바로 샀다

그리고 주인공 진희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나라는 말은 아니다"

가볍게 살고 싶다

그러나 아무렇게 막 살고 싶지는 않다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에 인생을 걸고 세상의 온갖 의미를 다 부여하고 그 사랑이 끝나면 마치 죽을 것 같은 집요하고 무거운 사랑은 피하고 싶다

그 동안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겁고 칙칙하고 우울했다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돼, 하는 식의 강렬한 감정만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집착의 정도는 심해지고 결국 자신과 상대방을 소모시킨 후 곧 피폐해지고 만다

은희경이 주장하는 사랑의 방식, 사랑의 감정에도 균형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애인은 셋 정도는 확보해 둬야 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우아한 말이가!!

애인이 둘도 아닌 셋 정도 되면 한 사람에게만 빠지지 않게 되고, 스스로 감정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랑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더 충실하게 된다

사랑을 위해서 인생의 향로를 결정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사랑의 위대함 따위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희생 정신으로 똘똘 뭉친 감동적인 사랑 얘기가 들리기도 하지만 그건 예외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강렬한 사랑은 집착이고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은 강한 집착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물론 애인을 하나도 아닌 셋씩이나 두려면 기본적으로 자신이 매력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책에서는 주인공 강진희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직업도 대학 교수이고 날씬하며 지적이라는 걸 곳곳에서 간접적으로 묘사해 준다

특히 현석이라는 멋진 남자를 유혹하는데 성공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인물평을 하나도 하지 않고서도, 오히려 현석이 얼마나 매력적인 남자인가를 묘사하므로써 그 정도의 남자를 애인으로 만들 정도면 알 만 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독자에게 세련되게 가르쳐 준다

은희경 글쓰기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배다른 동생이 예쁘다는 점이나 애인이 잘 생겼다, 학교에서 진희에게 관심있는 교수들이 많다는 식으로, 진희의 외모에 대한 진술 없이도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물론 결말은 마음에 안 든다

이혼한 전 남편과의 재회 장면이 책에서 아무 역할을 못하고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게 발각되서 사표를 내는 것도 진부한 결말이고 그가 끝까지 현석의 청혼을 거절하는 장면에서도, 사랑에 대한 진희의 가치관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독자들이 진희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이해했을 거라 믿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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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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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으로 읽은 은희경 소설이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없이 우연히 책장을 넘기게 됐는데 문체와 묘사력의 놀라움에 빠져 금방 한 권을 다 읽어 버렸다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만은 은희경의 묘사력이 탁월하다고 말하고 싶다

60년대 시골을 어쩌면 그렇게도 생생하고 맛깔스럽게 그려내는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문체에 관심이 많은데 이문열이나 박완서의 경지까지는 못 가더라도, 어쨌든 그들과는 다른 의미로 탁월한 묘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그녀의 다른 소설들을 읽으면서 실망한 적도 있긴 한데 어쨌든 이 책은 그녀의 최고 작품 중 하나라 할 만 하다

언젠가 베스트 극장에서 이 소설을 단막극화 한 적이 있는데 참 지루했다

당연한 결과다

이 책은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이 책은 문체와 묘사력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어색하기 그지없던 윤손하의 연기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세상을 일찍 알아 버린 12세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질구레한 일상과 소시민들의 위악성에 대한 이야기

12세라는 나이가 현실에서는 지나치게 어리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재밌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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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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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너무 재밌는 소설이다
"GO" 라는 제목 만큼이나 산뜻하고 유쾌하다
재일 한국인이 쓴 소설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우울하고 무거운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같은 묵직한 주제를 산뜻하고 유쾌한 터치로 풀어 간다
문득 "호밀밭의 파수꾼" 이 생각난다
재일 교포라는 정체성 문제를 뺀다면 두 소설의 스토리 전개나 문체 등은 아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 "나" 는 조총련에 소속된 재일 한국인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 국적이 아닌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므로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다
이 문제는 너무 어렵고 중요한 것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전에는 왜 그들이 귀화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 얘기한다면 그 사회에 적응해서 사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미 백 여년의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언뜻 보면 배타적이기까지 한 재일 한국인들에게 일본인이 불친절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글에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속내를 읽었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자발적이 아니라 징용 등으로 식민지 시절 끌려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다 해도 평등하게 대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일본인의 기본적인 정서에는 재일 한국인이 한 단계 낮은 종족이라는 편견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마치 미국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뭉치는 것만이 그나마 일본 사회에서 버티고 살아갈 힘이 된다고 했다
국적을 바꾸나 안 바꾸나 차별받는 게 마찬가지라면 민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뭉쳐서 대항하는 게 훨씬 낫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일본에 있는 한국인은 이념적으로 나뉘어서 서로를 공격한다고 한다
분단의 역사가 빚어낸 불행일 것이다
조총련계와 민단으로 나뉘어 북한과 남한의 대리전을 일본에서 펼치는 식이다
한국에서 건너 온 1세대는 그렇다 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2세대, 3세대들은 과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뿌리가 한국일 뿐, 어찌 보면 일본인과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단지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근거없는 차별에 시달려야 한다
이들에게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옳은 일일까?
차별하는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사람들이지만, 재일 한국인의 폐쇄성이나 집단주의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북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후 민족 고등학교 대신, 일본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집단 이지메에 시달린다
누구도 개인에게 전체의 대의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대체 전체라는 힘의 논리로 차별하는 기득권 세력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 소설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단 주인공 "나" 부터가 대단히 매혹적이다
권투 선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 는 주먹 힘이 세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컴플렉스를 갖지 않는다
차별하는 놈들의 사고방식은 바꾸기 힘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놈들이 덤비면 때려 눕히면 된다
즉 그들보다 정신적으로 더 여유있고 성숙한 셈이다
"나" 의 아버지는 권투 선수 출신으로 파칭코 경품 교환소를 운영하면서 살아간다
보통 아버지 하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늙어감에 대한 애잔함 등이 묻어나기 쉬운데, 이 소설 속의 아버지는 60이 가까운 나이에도 아들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도 혼자 마크르스와 니체를 읽어 낼 정도의 지력을 가진 강인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나" 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고 언젠가는 꺽어야 할 목표로 삼는다
아들에게 넘어야 할 산으로 건재하는 한,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강력한 보호막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나" 가 아버지를 도덕적으로 존경하는 것도 아니다
"나" 는 걸핏하면 아버지를 망할 놈의 영감탱이라고 속으로 지껄인다
어찌 보면 "나" 는 옳든 그르든 무조건 연장자 우선인 유교 문화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의 친구로 공부 밖에 모르는 정일이가 등장한다
정일이는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이유로 까닭없이 맞는 "나" 를 위해 용감하게 선생 앞에서 "나" 를 편들어 준 후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 후 둘은 친구가 됐는데, 그는 일본의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민족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일본 고등학교로 간다는 "나" 를 때리는 선생에게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조국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대드는 모습을 보면서, 정일이라는 캐릭터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 밖에 모르는 이 샌님은, 실은 재일 한국인 학교의 깡패 같은 동료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과 친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본인에게 기죽지 않고 대등하게 싸우는 걸 보면서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같은 재일 한국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북한이나 남한에 휘둘려 정작 재일 한국인의 생존에 대해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민족 학교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지만, 우리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정일이는 일본인에게 절대 지지 않는 "나" 를 자랑스러워 한다
이 똑똑하고 반듯한 소년은 어처구니 없게 일본 고교생이 휘두르는 잭 나이프에 경동맥을 다쳐 과출혈로 죽고 만다
일본인이 조선인 여자 후배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겁도 없이 덤빈 것이다
단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공부 밖에 몰랐던 이 소심한 소년이 자기와 실상 아무 관계도 없는 여자 후배를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을 때, 과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너무 순진해 죽음의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일까?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민족 학교로 돌아와 재일 한국인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겠다는 그의 다짐은 가식이 아닌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가 전철 안에서 과출혈로 죽어갈 때 어떤 승객도 그를 돕지 않았다
제발 이것이 소설 속의 한 장면이길 바란다
설마 일본인이 이렇게까지 냉담하고 잔인하지는 않으리라 기대한다

"나" 는 국적이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나" 의 아버지 역시 나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그저 떠도는 부초일 뿐이라는 구절을 즐겨 외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그저 나라는 개인으로 당당히 혼자 설 수 있고, 또 그 홀로서기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해 주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문득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난다
재일 교포들의 부당한 대우를 성토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이 땅의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돌아봐진다
한국인은 더러운 피가 흐른다고 교육받은 "나" 의 여자 친구 사쿠라이는, "나" 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연락을 끊는다
일본인의 차별을 정신 상태가 한 수 아래인 놈들의 우스운 짓거리로 치부하던 이 당당한 청년은, 사랑하는 여자의 편견과 외면에는 대항할 힘을 잃는다
그러나 사쿠라이는 자기가 받은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 라는 청년의 매력을 통해 깨닫고 다시 그에게 돌아온다
한국인, 일본인, 혹은 전라도 사람, 서울 사람, 우리를 규정짓는 집단의 아우라를 벗어 던지고 그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평가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 본다

(고등학생인 사쿠라이의 과감한 육체 행위는 무척 놀랍다 고등학생들도 이성 친구가 생기면 꺼리낌 없이 호텔로 들어가 일을 치루는 것이 일본의 전반적인 분위기인지, 아니면 소설에서 오버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더구나 첫 섹스가 아니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경험있는 척 남자를 리드하려고 하는 여학생의 자세가 놀랍다 일본 여성들은 모텔비도 남자와 똑같이 낸다고 하던데 정말 여자가 성의 주체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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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양 2005-01-0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읽으셨군요. 제게 추천해주신 만큼 제가 오늘 추천 꾹 눌러드릴께요.

marine 2005-01-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모과양님 감사^^ 얼른 읽어 보세요,재밌답니다 혹시 "호밀밭의 파수꾼" 읽으셨어요?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예요

여울 2005-01-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여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백인/흑인/아시안, 일본인/백인-흑인/아시안; 한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지역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라구. 인종차별은 하물며... ...그는 외국인노동자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듯 했어요. 일본역시 흑인-백인이라면 예전 우리가 이태원에 영어한마디한다고 따라다니던 식?으로 인종차별이 유난히 심한 것 같더군요. 미국이든 일본이든 중학생 대상(수준에서)으로 정치를 한다고 보면 지속적으로 그틀을 유지하려고 보아야하겠지요. 남과 나를 구분짓고 이름지으려는 자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합니다. 요원하겠지만 외국인노동자, 소수에 대한 배려와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자중심주의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겠어요.(공부 좀 하세요. ㅎㅎ 책만 보시는 것 아니죠.)

marine 2005-01-0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의 성의있는 코멘트,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공부하려고 책 안 빌렸어요 취직 시험 보려니까 긴장돼요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상과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
영화를 먼저 본 탓일까?
난 이 소설이 "슈퍼스타 감사용" 의 원작인 줄 알았고, 영화를 먼저 본 나는 당연히 이 소설의 주인공도 감사용일 줄 알았다
그런데 왠 걸, 감사용은 무지하게 못 던지 패전 전문 투수로 딱 한 번 등장한다
이름 특이한 선수로 그저 한 번 언급될 뿐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이혁재가 열연한 포수 금광옥이 주인공 친구에게 편지도 보내면서 두 세번 등장한다
대체 나는 왜 이 영화와 소설을 한 가지로 생각했을까?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프로야구 원년 꼴찌 팀 때문이었을까?

요즘은 이런 식의 가벼운 글쓰기가 유행인가 보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나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을 볼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은희경식 성장 소설 같기도 하다
무겁지 않아 빠르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아주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농구선수 이원우를 생각했다
혹시 이원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런지?
그는 내 중학교 시절 우상이었는데, 내가 그를 좋아할 때는 이미 은퇴를 앞둔 노장 선수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초반은 "농구대잔치" 라는 실업 농구가 한창 인기있을 무렵이었는데 기아의 독무대였다
사람들이 허재에 미치고 이충희에게 열광할 그 때, 나는 유독 현대의 노장 선수 이원우를 응원했다
당시 현대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단 한 차례도 못 이기고 기아에게 굴복했다
이충희도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를 앞둘 무렵이었고 기아는 일명 "허동택" 트리오와 한기범 등을 앞세워 최고의 라인업을 자랑했다
잘 나가는 팀보다 좀 떨어지는 팀을 응원하고 더구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농구 경기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맨날 우승하는 OB 대신 꼴지를 도맡는 삼미를 응원해서 기가 죽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 는 꼴지만 전전하다가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면서 성장한다
1류 팀에 소속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에 전념한 결과 야구에 빠져든 전적에도 불구하고 일류대에 무사히 진학한다
(죽어라 입시 경쟁에 시달려야 할 중고 시절, 야구나 음악 등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면 여지없이 입시 경쟁에서 탈락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나" 만큼 삼미를 아끼던 조상훈과 주인공이 나란히 일류대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잘난 놈들의 잘난 이야기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잘나가는 사람들 이야기라면 삼미 대신 OB 같은 우승팀 좋아해야 전체적인 분위기가 맞는 거 아닐까?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잘 나가는 놈들이 맨날 꼴지만 차지하는 인생의 패배자들 심정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이런 생각하는 거 보면 나도 좀 뒤틀린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잘난 놈들 이야기는 주위에 하도 널려 있어 사람들이 읽으려고 안 할 것이다
일류대 나와서 예쁜 여자와 연애도 하고 과외 알바로 아버지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대기업에 취직한 "나" 는 쭉 그렇게 평탄한 인생을 살 것 같지만, 곧 IMF로 정리해고 된다
신문이나 TV에서 정리해고 어쩌고 할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소설에서 한 개인이 겪는 불행으로 등장하자,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각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 외의 모든 정신적 문제들은, 신념이나 정의, 가치 등등을 다 포함해 다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해 버린다
일단 내 입으로 밥이 들어가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매달 나와야 삶의 의미나 보람 같은 것도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같이 일류대에 진학했던 조상훈은 아버지가 비명횡사 한 후 급작스런 집안의 몰락으로 일본에 건너가 홈리스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다
그 사이 "나"는 IMF 한파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와 이혼한다
한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달릴 것 같던 이들은 어느새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프로 세계에 사라남지 못한, 아마추어 실력에 불과한 야구팀을 좋아하는 두 사람의 인생 역경은,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제와 정신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 끔찍한 무한경쟁 체제를 비판하면서 부와 성공 대신 삶의 여유를 즐기며 사는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보다 더 잘 살겠다는 이기심과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원리가 아닌가?
개인들이 치열하게 투쟁하고 사회는 냉정하게 이들을 평가하는 덕분에 결국 우리 모두는 조금씩 더 편한 삶을 누려오고 있다
복지 국가란 경쟁에서 탈락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웬만한 삶은 누릴 수 있게끔 도와 주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능력 위주의 평가가 불가피 하다면,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사회가 도와 주는 시스템이 잘 작동할 때 비로소 안정되고 바람직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조건 경영 악화를 피하기 위해 직원들을 쫓아내는 현재의 기업 분위기는 문제가 많다
거리로 쫓아낸 사람들을 받아 줄 완충 지대가 전무한 가운데, 즉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에 맡겨 버리는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에서, 정리해고 당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이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직원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어야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일부 경제 평론가들의 말은, 그야말로 유럽 같은 복지 국가에서나 해당되는 얘기다

성공과 부를 획득하는 것, 즉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낙오되지 않고 이기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겠지만, 세상은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고 무엇이 낫다고 규정지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일류대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면서 워커 홀릭처럼 일하는 것도 좋고, 우유 배달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미쳐 사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삶의 형태가 다양성이라는 원칙 아래 누구도 비난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잘 유지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주인공 "나" 는 IMF 때 정리해고 된 후 삼미 슈퍼스타즈를 좋아하던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과 모여 팬클럽 창단식을 갖는다
그들의 야구 모토는 치기 어려운 공 치지 않고, 받기 어려운 공 안 받는다는 식이다
하도 프로 의식 어쩌고 하면서 자신의 전 삶을 바쳐 최고가 되라고 압박을 가하니까 역설적으로 편할대로 사는 아마추어리즘을 추종하는 것이다
(사실 대충 하는 것과 아마추어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란 돈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즉 경제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을 뿐이지 뭔가에 미쳐서 하는 건 프로나 아마추어나 다 똑같은 거 아닌가?)

마지막에 이혼한 아내와 다시 합치는 과정은 좀 작위스럽다
워커 홀릭이던 "나"는 가정을 거의 돌보지 못했고 결국 아내는 외로움에 지쳐 이혼하고 만다
그런데 "나" 가 대기업에서 쫓겨난 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활동을 통해 성공과 부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게 되자 다시 그 아내와 재결합 한 것이다
이건 좀 교훈적이고 억지스런 결말이다
어차피 아내라는 캐릭터 자체가 별 의미없이 그려지긴 하지만 말이다

재치있는 글솜씨가 돋보이는 괜찮은 책이다
심사위원의 지적대로 다소 경박해 보이기도 하고 깊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가벼운 글쓰기가 바로 주제라고 하면 문제될 것도 없다
문득 이원우라는 잊혀진 농구 선수를 주제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은퇴 후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드라마틱한 죽음도 생각할 꺼리를 많이 남긴다
꼴찌를 전전하던 야구팀도 몇 십 년 후 이렇게 아름다운 책으로 되살아 나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나처럼 어린 시절을 이원우와 함께 보낸 팬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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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4-12-3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마지막 코멘트가 될 것 같군요. 만나뵙게 되서 영광이었구요. 내년 한해도 독서계획 뜻대로 되시길 바랍니다. 즐거운 송년보내시구. 복 많이 받으셔요.

marine 2004-12-3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울마당님. 감사합니다 저도 만나뵙게 되서 정말 기쁘답니다 내년에는 취직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올해처럼 맘 편하게 책을 읽지는 못할 것 같아요 2005년도에는 늘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랍니다^^

마태우스 2005-01-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원우 알아요. 성깔 있게 생겼고, 3점슛도 잘했죠. 이충희랑 쌍포가 터지는 날에는 어느 팀도 쉽게 이기지 못했어요. 근데 그 허재 때문에...흑흑.

marine 2005-01-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마태우스님도 농구 좋아하셨군요^^ 맞아요 성질이 좀 있어서 스포츠 신문에 코트의 악동, 코트의 여우 이런 수식어가 붙었어요 그 놈의 허재 때문에 워낙 고전을 면치 못해서 이원우 은퇴할 때까지 허재를 무지하게 싫어했답니다 ^^ 그런데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 허재가 이원우를 존경한다는 말을 했어요 자기도 이원우처럼 나이 많이 들어도 코트에서 뛰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그 기사 본 후 허재에 대한 미움을 버렸답니다 ^^ 그런데 뇌종양으로 죽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너무 충격이었죠...아들도 농구한다는데 훌륭한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독특해서 읽고 싶었는데, 역시 실망스럽다


단편이 소설적 완결 구조를 갖춘다는 건 참 어렵다


짜임새 있는 중,단편은 어쩌면 작가의 능력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문열에게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면 "아우와의 만남"이 들어 있는 이문열 중단편집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저문 날의 삽화"가 있는 박완서 단편 모음집도 참 좋다


(그녀는 도시의 소시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 위악성과 삶의 애환을 어쩜 그렇게 잘 표현하는지!!)


 


이건 e-book으로 읽은 최초의 책이다


장편 소설인 줄 알았는데 의의로 80 페이지 남짓되는 짧은 소설이다


그래서 뭔가 일어날 줄 알았지만,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사실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몇 군데 있다


그럴듯한 직업을 갖지 못할 게 뻔한 희망없는 여대생이 갖는 서글픔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개학해서 학교에 가면 멋진 옷을 입고 자태를 뽐낼 여학생들 틈에 낄 수도 없다는 부분에서는, 능력도 없는데 예쁘지도 않은 평범한 소시민이 갖는 삶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우리 대부분은 다 그렇다


잘난 사람들 틈에 끼어 한없이 초라해지고 비참해져 일탈을 꿈꾼다


그렇지만 대부분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는데. 유독 배수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간다


 


여대생이 집을 나가 백화점 직원으로 사는 게 쉬운 일일까?


또,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예쁘지 않다고 스스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흔히 쉽게 사랑을 한다


그래서 소설이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주인공들은 쉽게 사랑을 하고, 쉽게 일탈을 하며, 대체적으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쿨하다!!


(주인공의 쿨한 성격은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보는 것만큼이나 흔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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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2-0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셨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김영하의 단편짐 ' 엘리베이터에 끼인 남자' 를 추천합니다. '호출' 이 더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영화에선 느끼지 못하는 단편의 짜릿함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좀 더 고전으로 간다면 체호프 단편과 심리소설의 달인 로얼드 달의 ' 당신을 닮은 사람 ' 도 같이요. 로얼드 달은 동화에서도 특이한 정신세계를 보여줬는데, 그의 심리소설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동서미스테리북스에서 나왔어요.

marine 2004-12-0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김영하의 다른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 를 읽고 좀 실망해서 그 책은 안 읽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로얼드 달은 처음 듣는 사람이예요 도서관에서 찾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