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자전거 - 장애아 부모들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와 용기
스탠리 D. 클레인 지음, 킴 스키브 엮음, 이나경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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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장을 지키는 의사는 아니지만 의료에 종사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듣거나 바라보게 됩니다.

많은 수기에서 또 기사에서 환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주로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기타)이 냉정해 보인다는 기술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왜 그들은 냉정하거나 무심해 보일까?

의과대학을 다닐 때 임상 실습을 나갔던 시절을 되돌아 보면 환자/보호자와 비슷한 느낌을 우리도 자주 느꼈었는데 왜 지금은....

저는 익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년인데 벌써 옛것들에 대한 향수가 크게 일어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재현할 때 그 시절의 감동이 나에게 그 때처럼 오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에 처음 겪은 그 감흥은 이제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가치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특별히 무엇을 먹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그러나 그 행위 자체에 대해 식상함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이제 무감각한 상태로 접어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환자/보호자 등등의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처럼 무감동한 상태가 아니라 익숙하여서 표시를 내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책에서 느낀 것은 성공한 환자/보호자(병을 이겼다는 게 아닙니다)의 공통점은 상황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용어로는 합리화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겠지요.

사족) 오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첨언해 둡니다. 본문의 내용에 대하여 감동을 받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비교적 자주 접하여) 자연스러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2008년 2월 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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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정우희 그림, 최정은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198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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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쯤에 한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작은 누님이 사온 책이었는데, 문고판과 국판의 중간쯤 되는 크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마누엘이 죽는 장면 근처에서 가슴이 아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많은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그림이 이뻐 보여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에 이불 속에서 펼쳤습니다.

사이사이에 삽입된 그림이 참 이쁘네요.

글을 읽는 중간중간 눈이 흐려지는 일이 있었고, 아빠에게 담배를 사다주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짜내야 했고, 마누엘이 죽는 대목에서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40대 중반 남자가 글을 읽다가 울다니..

작가의 전기적인 글이라고 생각되는데(설명에도 그리 나오네요) 우리나라 동화에서 드물게 느낄 수 있는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로징냐를 본 듯하네요.

그런데 아래 초등학교 학생들의 독후감을 보니 차이가 많이 납니다. 작가가 40대에 쓴 글이여서 제가 더 큰 감흥을 느꼈을까요? 그렇다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옳은 분류가 아니겠습니까?  

(추가) yes24에는 2005년 판형으로 나오는데, 알라딘에서는 88년 판형으로 나오네요.

(2008년 12월 10일 작성)(09년 6월 8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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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Highteen Readers 12
쥘 르나르 지음 / 육문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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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마도 대학생 때쯤에 읽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누님이 사온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홍당무의 처지가 어두워 보여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읽었던 것 같은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여전하네요. Highteen Readers 시리즈에는 저자에 대해 자세한 소개가 없어서 다른 책을 보니 114년 전에 발표된 글이네요. 그렇다면 글 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당시엔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의 차별이 정당하다고 여겨졌었고, 프랑스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아주 당연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글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청소년이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11월 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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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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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쓴 후 찾아보니 이것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은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다시 보고 씁니다.

처음에 보고 남겨둔 짧은 소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마지막의 반전은 뒤통수를 때립니다. 허망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무리한 전개가 눈에 보여서 신문에 나온 서평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재삼 확인시켜주었고요."

이는 연금술사의 리뷰에도 남겨둔 글과 비슷한 것입니다.

"[포마]의 경우에는 지나친 광고가 평이한 작품을 가렸기 때문에 실망이 조금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이하다고 하는 것은 읽을거리 이외의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코엘료의 작품중 세 개만 읽어본 현재로써는 연금술사가 가장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셋 다 각각은 읽을 만한 줄거리와 전개를 가지고 있으며 읽는 동안 '읽는재미'를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이 작품은 제가 읽은 것 중 가장 후에 나온 것이여서 그런지 글의 완숙도는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존한 탓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탓인지 전개과정에 무리가 보이기도 합니다.

독자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을 역이용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계속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글 중의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무시하다가 마지막에 뒤통수를 맞을 뿐이지요.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에게는 행복한 것 아닐까요? 

(2008년 5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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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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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엘료의 작품 중에서 세 번째로 읽은 것입니다. 처음은 포르토벨로의 마녀였고 다음은 그 책에 대한 리뷰에서 언급된 연금술사 그리고 이것입니다.

연금술사는 1988년도 작품이고 이 것은 2003년도,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2007년도 작품인데 이것을 읽으면서 이미 읽은 코엘료의 다른 책을 쓴 그 작가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 작품이 모두 번역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요.

이미 연금술사 리뷰에 쓴 글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작가가 오랜 기간 동안 같은 느낌을 준다면 통일성/정체성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발전이 없는 것일까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최인호씨의 작품을 몇 읽었습니다. 누님이 읽는 것을 같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그러나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었죠. 또 그 이후에 접했던 이문열씨도 일부에서는 그랬고요. 아마 코엘료의 작품은 앞으로 한두 개 정도 더 읽고 그만둘지도 모릅니다. 변화가 없다면요.

그러나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분이 읽기에는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가 80년대에 접했었던 또 다른 작가인 시드니 셀던처럼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쓴 리뷰가 인터넷이 끊어지면서 날라가버려 맥이 빠져버렸습니다. 처음에 비해 불만족스럽지만 어쩌겠습니까? 글이란 그 순간의 감정이 담긴 생물이니까요.) 

(2008년 5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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