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제국건국사 10
윤민혁 지음 / 시공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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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1871년 10월(4)
31장 10월 12일(1)
32장 10월 12일(2)
33장 10월 13일
에필로그

연합군의 작전을 전해들은 권철상은 도박을 결정합니다. 경기도 남부에서 양동하는 적과 한강을 도강하는 적을 연속으로 무찌를 계획입니다. 다행히 행주산성포대가 잘 버텨준다면 확실하게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주산성포대를 공격하던 미 혼성여단과 프랑스 연대는 측방의 기관총 공격으로 무력화됩니다. 한강을 오르던 해군은 포대가 건재하기 때문에 모두 격침됩니다. 한편 혼성여단을 뒤 따르던 본대인 영국군은 포대의 화력 앞에서 고착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강갑함(장갑함) 두 척은 천갑탄을 직격당하자 뚫리면서 침몰합니다. 한편 경기 남부로 진출한 셰리던 지상군사령관은 얼마 후운좋게 합류한 조선군 마군 및 보군 1개 대대가 앞을 가로막히고 측방을 계속 따라오던 마군여단에게 포위당하고 맙니다. 연합군은 시크 창기병연대2천과 미 기병대 400에 수병연대 500입니다. 조선군은 훈련도감 마군 1200, 어영청 마군 600, 금위영 마군 600, 총융청 마군 400 계 2800입니다. 거기에 수어청 마군 600과 보군 600이 앞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시크 연대가 돌격했지만 윈체스터 연발소총을 갖고 있던 마군이 화력에서 앞서기 때문에 괴멸당하고 맙니다. 조선군 기병대의 역습으로 수병 연대는 금세 무력화되고 맙니다. 아무래도 수병에게 육박전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행주포대 아래 고착된 영국군은 부교가 조선군에게 점령당하자 행주포대를 점령하고 노량진으로 돌아 철수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조선군이 노량진 주교를 미리 끊어버립니다. 이제 남은 길은 항복하거나 다시 부교를 건너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강화도 수로를 지키고 있던 연합함대는 조선에 도움을 주기로 한 제퍼슨 데이비스 호의 돌격 충돌(및 기뢰)로 뉴아이언사이드호가 격침당합니다. 다른 수로를 막고 있던 함정도 격침당하고 나머지 수로 내의 배들은 중신기전에서 발사된 황린을 포함한 로켓에 대부분이 불타버리고 맙니다.

원정사단은 퇴로에 버티고 있는 조선군을 만나게 되고 접전 후 항복합니다.

연합군 14000전사, 6000부상. 일본군 4800전사, 200 생환. 조선군 전사상자 11000.

조선은 여러 나라와 유리한 조건으로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됩니다.

어떤 분은 대체역사소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얼마전 유행하였던 판타지 유행인 이세계로의 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점은 이세계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과 혼자가 아니라 수백명이라는 것이지요. 1인 영웅이 아닌 현대인의 과거로의 이전 및 집단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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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건국사 9
윤민혁 지음 / 시공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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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1871년 9월(1)
25장 1871년 9월(2)
26장 1871년 9월(3)
27장 1871년 10월(1)
28장 1871년 10월(2)
29장 1871년 10월(3)

일본 해군은 남해안을 수색하였으나 여수까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되돌아가 보급을 받으려던 일본해군은 통영 인근 한산도에서 조선해군과 마주칩니다. 경상우수영, 좌수영, 전라좌수영 함대의 협격을 받은 일본함대는 6척 모두 수장됩니다. 상륙한 일본군 4천은 아무 소득없이 진격하지만 조선은 청야전술을 펴서 대구 이하를 비워버립니다. 일본군은 대구 아래까지 진격하였다가 불안하여지자 부산으로 후퇴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삼량진에는 이미 조선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일본군 뒤를 따라붙은 다른 부대가 합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3800이 전사하고 200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조선군은 500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일본해군과 육군 포로 250은 제물포로 육상 이동하여 연합군에 인도됩니다. 도착 인원은 180. 연합군 해군 포로(군산 앞에서 격침된 생존자) 70여명도 도착하여 함께 인도됩니다. 강화도민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연합군은 휘청거리게 됩니다. 일본군 포로를 넘겨받으며 남도양동군이 없어졌음을 깨닫게 된 연합군은 군을 이분하여 주력은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 국왕을 사로잡고, 일부는 경기 남부를 전횡하면서 헤집을 작전을 짭니다. 해군이 진입하려면 행주산성포대를 뒤엎어야 하므로 공격로가 그 쪽으로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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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건국사 8
윤민혁 지음 / 시공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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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1871년 초여름(1)
19장 1871년 초여름(2)
20장 1871년 7월(1)
21장 1871년 7월(2)
22장 1871년 8월(1)
23장 1871년 8월(2)

강화도에서 조선군의 강력한 저지를 경험한 연합군은 본대가 오기 전에는 본격적인 작전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친 프러시아 장교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던 권철상 일행이 적진 돌파를 하기 위해 접근합니다. 항의를 하고 선재표의 위력을 보여주자 끈질긴 저항을 겪은 연합군은 주춤합니다. 결국 권철상은 포로로 잡힌 조선군도 위문하고 강화부성도 방문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한편 최익현은 유흥기의 문하에 들기로 결정합니다. 영미 사절은 한양에 들어와 예조참판과 대좌하지만 항의만 받고 물러나게 됩니다. 본대가 도착하자 강화성이 포위됩니다. 정기원 진무사는 결국 최후의 일전을 결정합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부민들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군을 동원해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루고 나머지 군민이 항복하기로 한 것입니다. 야간 돌격을 감행하여 연합군은 45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혼성여단장도 중상을 입습니다. 정기원 진무사도 전사하였고 조선군은 70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소멸됩니다. 즉 영종도, 강화도에서 조선군은 4500이 소멸(전사/포로)하였고, 연합군은 1200의 피해를 냈습니다. 8월 일본의 사쓰마군과 해군이 참전합니다. 연합군은 서해안을 초계하며 위력항해를 하지만 군산 인근에서 조선해군의 반격을 받고 프리시트함 3척이 침몰당합니다. 조선해군은 9척의 전선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병선 등 다른 선박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던  연합함대는 충청수군이 가세하자 후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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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건국사 7
윤민혁 지음 / 시공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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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870년 전반
13징 1870년 후반
14장 1871년 초
15장 1871년 5월
16장 1871년 6월
17장 광성보 전투

조선에도 점차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첩보가 도착합니다. 한편 수운에 의지하던 운송은 이제 육운을 전담하는 회사가 생겨서 한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해군은 선재포를 몇 받게 되어 전선에 싣고 시험방포를 하게 됩니다. 프러시아는 영미프 연합군의 조선공세를 흘림으로써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사절을 통영으로 보내 프로시아와 접촉을 합니다. 오페르트가 있음을 안 권철상은 날카로워집니다. 오페르트는 권철상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며 선의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프러시아의 야심(필요시 식민지화)을 몰래 알립니다. 청은 조선을 장차 속국에서 일개 성으로 전락시킬 계획을 품고 일부 정보를 흘립니다. 한편 갑식보총의 밀매건을 은밀히 추적하던 군부는 결국 대원군이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되고 권철상은 대원군과 거래를 하게 됩니다. 묻어두는 대신 윤재혁 등 천주교인을 사죄 차원에서 의용병으로 징집하면서 죄를 사해주고 동시에 부족했던 군병력과 시설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윤준혁은 덕분에 행주산성포대의 연대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한편 일본도 사쓰마 번의 병력이 참전하기로 하였습니다. 해군으로 통합된 다른 번의 군함까지 몰고 6척의 전투함을 타고 남해안을 휩쓸 계획이죠. 그런데 권철상 등의 예상과 달리 연합군은 위력정찰을 6월에 실시하게 됩니다. 영종도를 기습한 연합군은 사상자 21명으로 조선군 6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습니다. 다시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을 하였는데 조선포병의 반격으로 이곳을 포트 브레이버리라고 명명합니다. 한편 손돌목돈대의 포대는 탄약고가 명중당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강화성을 제외하고 광성보와 대모산 일대에서 조선군 1531명이 전사하고 635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연합군은 319명 전사/실종, 463명 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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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건국사 6
윤민혁 지음 / 시공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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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868년 가을
7장 무진경장
8장 1869년 여름
9장 1869년 가을
10장 1869년 겨울
11장 텐진 사건

조영하는 경흥에 있으면서 러시아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리고 귀양이 풀려 귀경하자 대원군에게 보고합니다. 한편 재편된 훈국은 대규모 군사 무력시위(훈련)를 국왕과 대소신료 및 백성들 앞에서 실시합니다. 훈련도감은 보병 2개 연대와 기병 2개 대대, 포병 1개 연대로 편성되었습니다. 향후 중앙은 3개 여단, 각 도에 2개 대대, 함경 평안도는 각각 2개, 1개 연대 이런식으로 총 35000을 상비군으로 채택하기로 합니다. 동시에 토지의 개편이 이루어져 소작농에게 불하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은 각각 다른 이유로 공동전선을 펴고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합니다. 미국 인디언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참전을 요구합니다. 권철상은 이러한 2차 공세(병인양요가 1차 공세죠)를 무찌른 직후 개항을 하여 자주적 개항으로 틀 것을 이미 계획한 바 있습니다. 대원군이 동의해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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