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보니 책과 책사이의 공통분모를 보게 됩니다. 음악도 다른 가수들이 계속 리바이벌하고 싶듯이 그림책도 그런 리바이벌 욕구가 있네요. 그 중의 하나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아기돼지 삼형제> 이의로 이 책은 그림책작가들이 색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가 봅니다. 저와 저의 아이들이 즐기고 있는 < 아기돼지삼형제>의 변형된 책들입니다
글자없는 그림책으로 유명한 데이빗 위즈너의 <아기돼지 세마리>는 아이들에게 결코 쉬운 텍스트는 아닙니다. 전 이 책 처음 받아보고 , 이 작가가 무슨 심뽀로 이 그림책을 만들었는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 받은 인상은, 아이들책에도 포스트모던한 그림책이 다있네 그려, 였습니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골격으로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좀 이해불가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돼지는 배고픈 늑대에 쫓겨 이야기 밖으로 나옵니다. 돼지들은 이야기의 안과 밖을 종횡무진 활보하면서 용을 만나 용의 도움으로 늑대를 물리친다는 아주 단순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이야기 형식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종이 비행기를 타고 이야기 밖으로 나가 다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이 뫼비우스띠 같은 이야기 구조가 재미있는지 거부는 하지 않더라구요. 저 또한 이러한 실험적 그림책은 아주 기분좋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의 아이들이 이 책 나중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이 책은 순전히 늑대의 입장에서 자기가 왜 아기 돼지 삼형를 잡아 먹었는지에 대한 변론그림책입니다. 이 책 읽고 나면 얼마나 어의가 없는지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그림책이야말로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책 읽을때마다 노홍철씨 연상됩니다. 뭐랄까 ! 이 작가 만나 이야기 해보면 작가의 수다에 압도되어, 꼼짝없이 그의 뻔뻔스럽고 능청스러운 말에 곧이 곧대로 다 넘어갈 것 같아요. 봐요, 늑대도 좀 뻔뻔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 저의 큰 놈은 아기 돼지 삼형제와 함께 이 작품 꼭 같이 나란히 진열해 놓는 거 보면 두 작품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 줄 아는가 봅니다. 그래도 작가가 다르다고는 생각 못하더라구요.
여성의 시각으로 본 유럽풍의 페니미즘 요소가 강한 <아기돼지 세자매>입니다. 이 그림책은 기존의 <아기돼지 삼형제>가 남성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예로 늑대는 강자로 아기돼지는 약자로 표현된다면 강한 주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 그 이야기를 전복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책은 그러면에서 보면 마초적인 시각을 많이 희석시켜준다고나 할까! 너무 확대 해석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이 책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심상치 않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이런, 발칙한 돼지같으니라구. 도대체 그 못된 먹은 심보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 하긴 뭐 돼지가 다 착하라는 법 없고 늑대가 다 못된 법은 없으니깐. 늑대는 얼마나 억울할까. 우리 인간들에게 넌 나쁜 놈이야하고 찍혀으니...이 그림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 없이 깨부순 작품이라고나 할 수 있습니다.. 사고나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야말로 열린 사고의 기본일 터. 무엇 무엇은 착하고 무엇 무엇은 나쁘다라는 인식은 어느정도는 어릴때부터 읽어 온 책에서 연유된 것은 아닐까 ? 여러 빛깔의 스펙트럼 같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책은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고 싶어요. 전 우리 아들이 지금 8살인데 이제는 그림보다는 글을 읽을려고 할 때마다 조바심같은 것이 생겨요. 그래서 지금도 엄마가 읽어줄테니깐 넌 그림만 봐하고 말하지만 저의 아들의 시선은 이제 글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이런 저의 신조때문에 아들은 글을 늦게 깨쳤고 학교 들어가서 많이 고생했지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도 그림을 번번히 놓치는 저 자신에 비추어보면 아직까지는 글보다는 그림을 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