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별 아래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어느 날

 

 

눈꺼풀이 물에 젖은 새의 날갯죽지처럼 축 처져 어디론가 밀려갈 듯한 담요 속.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물기 어린 얼굴이 거울에 아른거린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하루가 조용히 깨어나는 시각.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말리고 살짝 내려앉은 먼지를 못본 척 하며 집을 나선다. 그 어 느날, 늦은 시각 탓에 고개를 떨군 탓에 못본 사이 집 근처 신축 빌딩은 어느새 콘크리트를 다지던 그 모습에서 벗어나 제법 건물의 외양을 갖추었다. 하룻밤새 창문을 가리는 건물이 생겼다. 거리에는 낯선 억양과 날 선 얼굴이 보인다. 열두 달 다른 열두 개의 얼굴이었다. 저녁, 스스로 몸을 추스르며 조용한 공간에서 버튼 하나를 살짝 건드리면,




어느새 가득한 음악.



바쁘겠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결국 

 


 


돌아오는 어느 귀퉁이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던 어느 날 하루.

 

 


 



 

 

드보르작 8번 교향곡.

 

 

케르테츠와 런던 심포니의 조화로움과도 같은 잘 짜인 틀이 하루 종일 그리웠던 어느 날. 그 끝에서 듣는 한 자락. 차분하다가도 어느 순간 격렬해지고 윙윙거리는 말벌떼 같은 현의 목소리가 그득하다. 목관의 목가적인 맑은 고요함, 때로는 호흡조차 영원히 멈추지 않을듯한 플루트, 살며시 감싸며 흘러나오던 왈츠. 체코의 국민 작곡가였으며 32세 처음 작곡을 시작하여 브람스의 인정을 받은 드보르작의 8번 교향곡은 은근히 민족적인 색채가 곡에 스민다. 유유자적 느긋하다가도 휘몰아치고 밝은가 하면 어두워지지만, 전반적으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힘이 느껴진다. 

 


 

첼로, 클라리넷, 호른이 플루트와 함께 여는 1악장. 


아다지오의 2악장은 규칙을 벗어나려고 한 듯한 개성. 은근한 밝음과 함께.


유난히 로맨틱한 3악장. 목관이 깔아둔 카펫 위를 바이올린이 미끄러진다. 마치 인간의 목소리 같은 오보에와 플루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마침내


트럼펫이 시작하여 수차례의 변주를 거친 끝에 처음, 1악장의 G장조로 되돌아가는 이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한밤, 깜깜해서 별도 보이지 않는 시월의 찬 바람. 

 

 

 

 

어느 날

 

 

 

뜀틀 같은 날. 고개를 들어 무심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다 내 얼굴을 어딘가에 비추게 되었던 날. 몸을 살짝 숙이고 무채색 공기를 내 몸속에 울리게 하면, 누군가에게도 그게 전해질까? 괴괴한 공기. 머무는 공간의 나무 탁자. 내가 곧 조금씩 사용해 가며 길들일 가죽 지갑. 처음이 중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중요한 때에 사용하려고 생각한 정겨운 사물들. 그 아래 놓인 오늘의 음반을 뒤적여 본다. 그리하여 플레이어에 넣은 시디는 박하우스와 칼 뵘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빌헬름 박하우스.

 

 

요즈음에는 각 국가별 연주자들의 특성이 점차로 흐릿해져가는 추세이지만 그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그 경계가 지금에 비하여 또렷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일인.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충실한 해설자였으며 별명인 '사자왕'답게 강력한 타건, 풍성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칼 뵘의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레전드 시리즈의 모차르트, 브람스 협주곡. 담담한 모차르트와 우아한 브람스. 건반을 스치는 손끝은 깨끗하고 음향의 폭은 넓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 속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952년 모노 사운드이지만 칼 뵘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박하우스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일체감 측면에서 볼 때 모노 사운드가 (내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단순히 독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로의 반응에 따라 담담하게 진행 방향을 조절해 가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 브람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한 연주.

 

 

 

 

 

협주곡 구성으로는 보기 드문 4악장 구성인데 스케르초 풍의 2악장이 덧붙여져 협주곡과 교향곡의 단계를 넘나드는 구성을 보자면 브람스가 만들고자 한 것은 아마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닌 피아노가 함께 하는 교향곡 정도가 아니었을까. 1번과 2번 사이 틈이 무려 20년이다. 20년간의 시간, 20년간의 생각. 그 끝에 드러나는 2악장의 스케르초. 그는 완성 직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의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라고 썼다고 한다. 브람스가 일컬은 작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풍기는 장대하고 원숙한 느낌. 독주 악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동등한 조화로움을 엿보고 싶을 때 듣게 되는 음반.

 

 

 

 

처음 문을 여는 호른의 솔로. 따뜻한 주제를 이어받는 피아노.

뒤를 받쳐주는 당당한 현악의 1악장.

 

단호한 피아노. 뜨거운 스케르초의 2악장.

그 끝이 무겁고 화려하다.

 

현악으로 여는 3악장.

끓어오름을 식히는, 아득하게 펼쳐지는 클라리넷.

 

생기 넘치게 마무리하는 경쾌한 4악장.

이 네 개의 얼굴이 차츰, 가을빛.

 

 

 

 

 

 

어느 날


 

짧게 깎은 머리카락처럼 무심한 하루. 전화기 속에서, 종이 속에서, 컴퓨터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하루. 누군가 잊힐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꼭 알고 있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날. 전 날의 도돌이표, 그 다음 날의 못갖춘마디. 계절을 더 깊게 만들던 시간. 그래서 마주치게 되는 가을, 리히터의 쇼팽. 

 

 

 


 

루빈슈타인의 쇼팽은 따스하다. 겨울밤 담요 속.

모라베츠의 쇼팽은 몽글몽글하다. 김이 서린 창가.

리히터의 쇼팽은 차갑다. 찍어누르는 청명하고 분명한 대답.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네이가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 전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히고 1960년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바흐의 평균에서 쇼팽, 차이콥스키, 슈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남겼다. 얕은 곳에서 슬쩍 비추는 것이 아닌 깊은 긴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기본에 충실한 연주.

 

 


'추격'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 음반 속 리히터의 피아노는 하나같이 명료하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놀림의 루빈슈타인, 슬쩍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는듯한 모라베츠의 쇼팽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다. 방대한 레파토리, 충실한 해석,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개성.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시간으로 불러내는 그의 강력하고 정직한 연주를 들으면 그는 필시 피아노의 한계가 아닌 이야기를 불러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조심스레 든다. 

 


 

오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이루어낸 분명함을 듣는 밤과 낮. 일 년의 중턱, 한 달의 중턱, 한 주의 중턱, 이 많은 턱을 넘노라면 무언가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소리는 그림자를 거두어 어디론가 스며들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엇이 되어 있을 어느 날.

 

 

                 가을의 어느 날. 청명면서도 따스한, 세상에 있기 힘들지도 모를

 

 

   무언가를 그리는 오후를 음악으로 처언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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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뭐하다 이제야 나타난겁니까 쟌님. 이제나저제나 이 서재를 들락거렸단 말입니다.
어느날 중의 한 날인 오늘,
쟌님이 다시 나타났네요.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지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맛있는 것도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다락방님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서 다락방님 서재에서 기웃기웃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봐야겠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레와 2013-10-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갔다 왔어요!

Jeanne_Hebuterne 2013-10-23 12:0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제가 요즘 좀 정신이 없어 이모양이어요. 흐흑. 잘 지내시지요? 레와 님 사진 보고 싶어요! 언제 또 전시회 안하시나, 은근 기다리는 1인!

dreamout 2013-10-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요즘 제법 듣고 있는데. ^^

Jeanne_Hebuterne 2013-10-26 13:11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아, 리히터의 슈베르트를 듣고 계셨군요! 많이 궁금한 연주자였답니다. 가을에 듣기 좋지요?
 

 



 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에서 생트 콜롱브가 간직한 보쟁의 정물 한 점.


내게는 바니타스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 정물을 물끄러미.




 살짝 머금었다 삼키는 와인 향이 가을이었다. 더워도 물기를 가득 품어도 멈추어도.


 시간을 잊은 듯, 멈춘 먼지 속 고즈넉함.


 째깍, 하는 짧은 공간 넓게 가라앉은 글씨.


 이제 곧 시계가 빨리빨리를 외치면 불어올 차가운 입김.


 가을이 또 하나 쌓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숨결을 듣는 시간. 

 화가의 붓질 소리. 수프 한 그릇 위에 아른거리는 뜨거운 공기. 

 들뜬 높음이 서서히 몸을 숙이고 가을을 맞는 몸짓.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듯한 체온을 새로이 느긴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풀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긑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맞춘다-나의 시와 함께




김현승, 절대고독




 

 아쉬운 일, 안타까운 일, 작은 성취를 느꼈던 일, 아름다움에 눈을 감았던 무엇.

 어린아이가 누는 오줌 소리, 깊은 밤, 바람에 흩날리던 물소리.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없는 목소리, 나룻배를 타고 가서 닿는 세계.





 

아내가 그 옆에 온 것을 아홉번째 느낀 때는 봄이었다. 1679년 6월 대 박해가 있었던 해였다. 그는 탁자 위에 포도주와 고프레를 담은 접시를 꺼내놓았다. 그는 오두막에서 연주했다. 그는 순간 연주를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요? 내 나룻배는 어디 있소? 내가 당신을 볼 때 흐르는 내 눈물은 어디 있소?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미친 거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당신 나룻배는 강가에서 오래 전에 썩었어요. 저곳 세상은 당신 배처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아요."

 "당신을 만질 수 없어 고통스럽소."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어요."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노르망디 지방의 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 '말더듬는존재'로 문단에 데뷔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의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훑어보면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의 영향, 5개 국어 습득,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 혈관 파열, 이런 낱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말없이 생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담대함, 맑고 조용하지만 정확한 눈빛을 보여주는 그의 글은 소리와 냄새, 촉각과 모양의 감각을 일깨운다. 시간을 '옛날'과 '지난날'로 떠올리곤 하는 그의 글은 산문이면서 운문이기도 하며, 문학인 동시에 음악이기도 하다. 




 언어가 이루는 성취, 인간이 몸속에 품은 태초의 기억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순서대로 말 더듬는 존재, 뷔르템베르크의 살롱, 샹보르의 계단, 세상의 모든 아침,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 출혈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글쓰기는 크게 변하고, 중국과 일본 여행 이후 그 변모된 글쓰기의 첫 결과물인 '은밀한 생', 그리고 그 이후 '로마의 테라스', '마지막 왕국', '빌라 아말리아' 등을 살펴보면, 그의 문학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시, 수필, 우화, 민화, 잠언, 단편, 이론, 인용, 사색, 몽상이 모두 뒤섞인 글. 글씨가 스치는 소리조차 만지지 않으려는 개인의 흘려보내는 성취.





 혈관 출혈 이후 '내 안에서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파스칼 키냐르. 엄청난 독서의 흔적.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경계를 없애는 글쓰기. 아는 것을 가장 많이 모르는 것으로 바꾸고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듯 하지만 조용히 그 층층 쌓인 구조를 말푀유처럼 조밀하게, 그러나 뭉텅이 채로 내놓는 손길. 자신의 글을 보아 내면서 '덧없는 글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고, 자신의 지식을 '박학적 무지'로 말하는 글에는 일관되게 근원에 관한 탐구, 방향성 없는 시간, 부드럽게 연속되어 하나가 되었으나 파편화된 세계를 노래하는 작가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니네."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누군가가 먼저 어루만졌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스미는 차고 따스함 속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이렇게 내 손에 있고, 이 영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손끝에 잡힌 치맛자락 주름이 다시 펼쳐지지 않듯 한 번 지나간 소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 아내가 죽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혈관 파열 이전 그가 쓴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상실로 시작하여 음악, 예술, 사랑, 괴로움, 죽음을 펼쳐나간다. 그 속에 살랑이며 보이는 것은 말 속에 숨은 시, 소리 뒤에 감춘 삶이다. 




  알면서도 흘리는 것. 감췄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잡지 않는 것. 심연과 망각, 흐르는 무엇.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는 길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음악이 잡힌다. 들리지 않는 움직임은 유리 상자 속 나비일 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유리 벽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글씨를 햇빛 아래, 안갯속에, 작은 오두막 속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는 것 이면에 흐르는, 우리의 귓바퀴를 울리는 친숙한 소리. 그리고 가끔 반짝반짝 들리는 언어의 숨결. 






 영화 속 나이 든 마랭 마레는 '모든 음은 죽어가며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은 자연의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무심한데 인간만이 그것을 붙들고 묻는다. 사랑인가? 경쟁인가? 회한인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귓바퀴에 닿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덧붙이고 고치고 바로잡는다.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다시 잡으려는 노력은, 흐르는 물줄기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안은 태생적 한계이다.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무엇. 파스칼 키냐르가 걷는 그 길의 무엇인가는 굳이 그 무엇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제자는 구태여 묻고 스승은 답한다. 방향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와 그저 흐를 뿐이라고 바라보는 자의 대화. 손에서 모든 것을 스르륵,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난함. 답은 질문을 전제한다. 마랭 마레의 질문을 따라가노라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니라는 대답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음악은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음악 뒤에 숨은 문학과 예술의 그림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왜 연주하시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아.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영화에서는 소설 속의 낱말을 담금질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도를 더 명확히 한다. 배우는 이의 세계를 부순 다음 다시 하나하나 채워가는 생트 콜롱브의 음악을 조용히 따라가 보노라면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파스칼 키냐르는 일부러 만들어진 아름다움, 작고 유쾌한 재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아침'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그러나 더 분명해지는 느낌 한자락. 파스칼 키냐르는 '말을 하고 음악을 듣는 살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없었을 그 최초의 기억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는 사람일거라는 작은 생각 조각.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나룻배마저 썩은 경계가 없는 공간. 끊어지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 시간 속의 사람.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의 근원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보고, 듣고, 사는 내게 파스칼 키냐르가 남긴 단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지금 여기,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바로크 고음악이 귀 끝에 닿으면, 이제 가을. 







비올은 비올라 다 감바와 비올라 다 브리치오, 즉 다리에 끼우고 연주하는 방식과 팔로 들고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나뉘었는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비올라 다 감바가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르네상스, 로크 시대 악기를 재현, 연주하는 스페인 출신 고음악 연주자 Jordi Savall이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아 작업하였다. 그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인 르 콩세르 드 나시옹을 만들기도하였는데, '세상의 모든 아침'에 흐르는 음악은 자신이 르 콩세르 드 나시옹과 함께한 것. 






*김현승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인용문은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발췌.


*칼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의인화된 알레고리, 트롱프뢰유와 바니타스, 혹은 포르루아얄파와 자유 사상파, 그럼에도 똑같은 사랑, 똑같은 단념, 똑같은 밤, 똑같은 추위. 파스칼 키냐르가 스치듯 배경으로 준비한 이 많은 무엇과 무엇들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더 생생하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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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답을 얻는가는 어떤 질문을 했는가에 달려있다.

-토머스 쿤





 실크햇에서 비둘기가 나타나는 순간.

 소리가 보이고 이미지가 드러나고 조형이 그려지는 순간.

 타인의 재능을 누린다는 속설에도 끊임없이 창작하는 사람.

 나는 앞서 말한 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야 개봉일에 설국열차를 관람한 후 탄 지하철에서는 묘한 덜컹거림이 느껴졌다. 꼬리 칸과 앞칸, 무임승차를 한 가난한 이들과 철도 덕후, 존엄을 보여주는 지도자와 힘없이 바스러지는 사람들.

 봉테일이라고 불릴만큼 디테일에 능하다는 감독, 콘티를 짜는 데 거침이 없는 감독. 한 작품에 컨셉 아티스트를 셋이나 둔 영화, 헐리우드의 자본과 시스템이 더해진 유명 배우들의 연기.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를 함께 보는 즐거움.

 


 









 숨이 가쁜 질주와 정교한 액션. 크리스 에반스의 액션은 잘 짜여진 가운데 고속촬영과 망원렌즈의 사용으로 인해 우아하고 고전적으로까지 보인다. 정확한 동선의 슬로 모션을 보노라면 '저 속도로 대체 언제 엔진까지 간단 말인가?' 하는 한탄이 들다가도 칸칸이 나타나는 역사 진행 방향을 보노라면 이 모든 봉기와 저지는 필연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엔진 칸까지 쉼 없이 달려가다가 그 직전 호흡을 멈추고 쉼표를 찍은 다음에, 그리고 마침내 그다음 칸에 가서는 180도 돌려세운 방향과 앵글을 볼 때, 그 필연의 리듬에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의문 끝에서 맺어지는, 앞으로 앞으로 가는 커티스의 방향과 옆을 틈틈이 바라보는 남궁민수의 시선이 빚어내는 생태학의 고리. 






 그 고리와 순환 속에서 연민은 제 스스로 몸집을 작게 했다. 안녕, 하고 작게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감독의 차가운 시선을 보노라면, 그의 연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도를 튼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살짝 든다. 맡은 역을 하면 정확히 다음 칸에서는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는 죽은 이 처럼, 배우들은 캐릭터에 철저히 종속되어 소비되고 열차의 칸은 사람의 역할을 단칼에 나누는 듯하다. 돌격과 저지 이외의 상호작용이 배제된 듯하지만, 열차의 모든 칸을 훑고 나면 기차의 앞과 끝은 결국 한 사회 속에서 움직이는 유기체로 호흡하며, 그 속 각자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허물어진 작은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 안의 힘은 서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거나 옆으로 새어나간다.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돌려 종이로 내 손에 만져지는 활자를 들여다본다. 매체가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결국 이 두 작품-설국열차,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은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창작자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다루고 배열하는지를 전작에 비해 냉엄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이전 봉준호 감독의 작품과 달리 약간 우둘투둘한 결을 보인다. 작가와 작품은 종종 인과성에서 어긋나 이렇게 다르게, 팔딱팔딱. 그래서 설국열차의 원작도,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도 아닌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그로 인해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본 것이 맞는가? 하는 일련의 질문에 관한 물음 이전에 가십이 설국열차에서 먼저 새어 나왔다면,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는 창작자의 두려움, 예술에 관한 두려움, 이해와 인정, 지지라는 문제, 예술 안팎의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창작자의 어려움, 아이디어와 기교, 예술과 공예, 은유와 자기참조 등의 문제를 폭넓고 쉽게 다룬다. 창작자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답지가 아닌 지침서로 이 책을 참조하면, 종종 나는 지나치게 내 주관을 앞세워 몇몇 작품을 감상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뒤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헨리 제임스가 남긴 이러한 구절을 만난 순간.


 

 



 


 작가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제기할 수 있는 생산적인 질문 세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 두 질문은 천진할 정도로 정직하다. 즉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공했는가?"이다. 그리고 재기 넘치는 세번째는 이것이다. "창작할 가치가 있었는가?"

 이 분류는 첫 두 질문만으로도 인정할 만하다. 이 질문들은 예술을 현실 세계의 가치과 경험에 비추어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수준에 두고 보게 해주며, 감상자가 창작자의 시각을 감상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해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간단히 말해 행동주의, 페미니즘, 후기모더니즘 등 온갖 미학적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작품 그 자체를 대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질문, "창작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는 진정 우주를 여는 질문이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예술 문제들은 그 본질이 다른 것들보다 더 흥미로운가? 더 적절한가? 아니면 더 의미있는가? 더 어려운가? 또는 더 도발적인가? 현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맞춰 춤추고 있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에서 

 


  

 


 스크린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봉준호가 하려 했던 것은 계급투쟁의 이야기가 아닌 사회생물학의 구심점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생존자의 숫자, 인종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 더 중요한 핵심이 따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칸칸이 나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내딛는 곳도 전체 궤도에서 그다지 중요한 지점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생명체는 앞으로 나가고, 또 다른 생명체는 옆을 계속 바라본다는 점이 계속 엇박자로 드러났다. 전진과 관찰의 정점이 바로 엔진 바로 앞 칸, 배우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의 대화로 우리 앞에 드러났을 뿐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한 메세지를 그가 던진 적은 없었다. 



 


 


 이 가로 세로의 축 위에서 어쩌면 봉준호는 아직 세상에 유일한 하나의 규범을 만들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미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자신 나름의 기준을 이 감독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이들의 기차라는 제한된 세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장면의 박진감, 혹은 액션의 뒷이야기를 하지만 어쩌면 봉준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를 뒤적여보면, '아이디어' 및 '자기 복제'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어떤 한계는 기술이 오히려 너무 쉽다는 것에서 온 문제였다. 관객이 느끼는 현란하거나 단조롭거나 아름답거나 추한 모든 장면의 이미지와 소리로 드러나는 느낌은 결국 감독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기능 올림픽이 아닌 아이디어의 세계이다.


 



 이러한 또렷한, 감독의 머릿속의 어떤 부분이 형상화된 세계 속에서도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만약, 내게도 그런 미는 힘이나 당기는 힘이 있다면 어떤 존재에 있어 내가 당기는 만큼, 혹은 미는 만큼의 탄성이 다시 내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칼이라면 탄성이 느껴지는 순간 멈추어야 할 것이고 펜이라면 계속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라면 어떨까.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윌슨은 한 생물이 성적 활동을 넘어서 상호작용을 해야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정의를 내린 적 있다. 집합체, 군체, 개체, 집단, 이들이 하는 것은 교류와 상호작용이다. 얼음까지 뚫고 달리는 설국열차 안에서 커티스라는 개별의 개체가 열차 전체의 집단을 훑고 지나가며 마침내는 집합체 내에서 충돌하는 이야기. 이 내러티브를 다루는 화술은 어쩌면 천지개벽과 같이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보다 더 효율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와 그럼에도 창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당위가 아닌 존재로 설명되어야 옳다.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닫힌 공간을 바라보는 봉준호의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목적과 출발, 혹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노라면, 설국열차가 다다르는 목적지가 실은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실은 내가 설국열차에서 듣고 본 모든 것은 내가 본 것이 아닌 봉준호가 보여준 것이었다. 





 읽고자 하면 보일 것이다. 이때 보는 내 눈에 묻은 읽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내 눈에 맺히는 무언가의 정체를 들여다보려 하는 일은 늘 영화를 바라보는 내게 지워진 단 하나의 의무였다. 내 입술에 묻은 것과 상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혼동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 이번에 바라본 설국열차는 봉준호가 이제 그 자신의 리듬과 반복으로 자신을 인용해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변주를 다시금 꾀한다는 상황에 놓였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까?






에셔 <손을 그리는 손>


 



 모든 작품은 앞선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차피 모든 주제는 새로울 수가 없다. 이야기는 가득찼고 새로운 것 대신 이상한 것이 더 쉬울 지경인데, 꼭 모두가 '새로움'에 목말라야 할까? 오히려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왜 그 이야기를 펼쳐 보여야 했는지를 살피는 편이 더 작품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 혹은 저것. 둘 중 하나가 아닌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주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설국열차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다루는 창조자로서의 봉준호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열차가 칸칸으로 이어져 긴 행렬을 만들듯, 아마도 봉준호의 영화도 긴 행렬을 만들듯 싶다. 이 중 어떤 것은 삐걱거릴 수도, 어떤 것은 화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작이 아닌 차기작이 있는 감독의 경우, 종종 자기참조와 반복, 패러디 등이 서로 연관되어 만들어낼 세계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것. 묘한 불협화음과 엇박자의 리듬, 차가운 질감의 설국열차 이후의 창작이 자못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영감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극으로, 혹자는 절망감으로 예술을 창조한다. 예술 창조는 위험한 세계, 신성한 세계, 금지된 세계, 유혹의 세계, 그 모든 세계를 맛볼 수 있게 하여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연관될 수 없었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따라서 사실상 예술 창조란 예술 그 자체가아니라 자신이 찾는 세계와의 연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예술 창조는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곧 접촉이며 예술 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접촉의 본성을 드러낸다. 예술 창조를 통하여 예술가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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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얻는다'고 말했던 E.E.커밍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저는 '설국열차'를 아무 생각없이 탔던 탓인지 엔진칸까지 가 볼 욕심도 별로 생기지 않더라구요. 열차칸에서 몹시도 답답하던 차에 그나마 막판에 한방 '뻥' 터트려주는 바람에 시원한 겨울 풍경 속으로 나오고 나니 '숨'을 좀 돌릴 수 있겠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다 큰 대학생 아들에게 한 말은 '아들아. 아빠가 네 말을 들을 걸 그랬구나...' 였답니다. '다양한 의견'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 주세요. Jeanne_Hebuterne님의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 *

다양성

다양성이라는 것은 자연이 좇고 있는 가장 전반적인 방식이며, 정신은 더 부드럽고 더 많은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물질로 되어 있다. 이 다양성은 육체보다 정신에 더 많기 때문에 나는 우리 기분과 의도가 합치하는 것을 보는 일이 더 드물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 두 의견이 똑같아 본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은 털 두 개와 씨앗 두 낱알이 똑같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견의 가장 보편적인 소질, 그것은 다양성이다.
-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Jeanne_Hebuterne 2013-08-17 12:09   좋아요 0 | URL
oren님, 설국열차, 보셨군요. 질문과 대답에 관한 경구를 보노라면 제각각의 색채가 또렷해 보이곤 해요. 오렌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엔진칸까지의 행로,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조바심 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도 있었겠지요. 열차칸에서 답답했던 마음, 이해 가요. 막히고 닫히고 폐쇄된 공간이었지요. '문 여는 데 환장을 했나' 하고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던 송강호의 눈빛이 괜한 것이 아니었어요.
겨울 풍경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요. 코카콜라를 보면 곰이 안떠오르는데 그 포즈의 곰을 보면 코카콜라가 자동연상되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코카콜라를 떠올리기도 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비범한 화술과 의아한 결말의 영화라고도 하던데, 이만큼 이 여름, 많은 관심을 몰고 다니는 영화가 드물 거란 생각을 해봤답니다. oren님의 멋진 댓글, 잘 읽었습니다. 덧붙여 주신 글은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곧 가을이에요. 곧, 곧. 잘 보내고 잘 맞이해야 하는 때가 또다시 왔습니다, oren님.
건강하시기를.

saint236 2013-08-1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티스의 전진을 보면서 처음에는 응원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앞으로 나가서 어쩌자는 거지? 기관을 차지하면, 기차를 수중에 넣으면 그 다음은? 멈추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 열차의 주인이 누가 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더군요. 그 결말은 마지막에서나 나타나듯이 새로운 윌포드의 강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답답한 마음을 남궁민수가 풀어주지만 이 또한 답답할 따름이지요. 나가서 어쩌자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체제의 전복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고요. 봉감독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겟지요?

Jeanne_Hebuterne 2013-08-17 12:14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안녕하세요. 영화를 보시면서 '다음'을 생각하셨군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윗 댓글에서 오렌 님께서 일러주셨듯) 다양한 의견을 가지게 되는 듯합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봉준호는 봉준호이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부럽거나 샘나거나 하는 많은 일들이 생존과 연관되면 얼마나 따가워지는지도.

열차는 인류 역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하는데, 봉준호 감독은 아마 좀 더 다채로운 색채 대신 일관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이 영화에서는 종으로 횡오르 가는 방향이 종종 심하게 의식이 되거든요. 성화봉송을 할 때의 직선, 커티스도 앞으로 앞으로 가면서 한 곳을 향한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것이 어쩌면 세상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선과 악을 떠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오. 목적과 목표는 약간 다른 것이어서 그것이 늘 함께 하지는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보면 saint236님께서 봉준호 감독에게 바랐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주말입니다. 뭔가 다른 색상의 하루,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
 

일요일마다 뜰을 가꾸는 것 외에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자신의 집을 새로 칠하는 것을 즐겼다. 금요일 저녁에 되면 그는 서둘러 여러 통의 도료를 사고, 벽을 닦고, 바닥에 비닐 덮개를 덮는 것으로 시작해, 매끈한 표면 위에 의욕적으로 붓질을 하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까지 해야하긴 했지만 그 일을 대개 일요일 저녁이면 끝났다. 페인트 냄새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폴 폴콘은 냄새만으로도 그 조합을 알아낼 수 있었고 성분을 열거할 수 있었다. 드문 도취 상태 속에서 시너 냄새를 흠씬 들이마신 탓에 가볍게 취한 상태가 된 그는, 다음날 직장으로 돌아갈 태세가 되어 흡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몇 년 동안 그의 집은 밝은 파랑에서 어두운 파랑으로, 크림빛 흰색에서 '기존 칠 색깔이 엷게 내비치는' 흰색으로, 초록색으로, 황갈색으로, 시에나토색으로, 적자색으로, 베이지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폴 폴콘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다시 칠해졌음에도, 새로운 빛깔을 입었음에도 그의 집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색조와 농담이 어떻든 간에, 몇 차례는 이전의 칠이 마르기가 무섭게 새로 칠했건만, 그 집은 변두리 도로가, 두 동의 아파트 건물 사이에 낀 누옥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삶이 웃어주지 않는, 붓질로는 바귈 수 없는 딱한 사내인 채였다.

-파스 브뤼크네르, '아이를 지우는화학자'. 김남주 번역.






밤새 들리는 독백. 얼음처럼 찍히는 방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이상한 접속으로 너덜대는 단어. 시선.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옥죄였는지 그 남자가 얼마나 자신을 거들떠보았는지 그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는지 살과 뼈, 피와 고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새롭지도 놀랍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말들을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일치하지 않는 인과. 자리에 남은 회한. 써먹을 데도 없는 추억 따위. 넘치는 독백. 몇십 년 후면 썩어 문드러질 거면서 영원히 청년인 체하는 늙음. 그저 말하고 싶었다. 말 걸지 말랬다. 라고. 




그러니까 내게. 그 강렬한 적의가 물러난 다음 찾아오는 무관심의 세계가 조용하고 즐거웠다. 새벽녘 산책길처럼.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조용히 나무처럼 걷다가(이기호), 그 행위를 하다가(아니 에르노),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게 되었다(카라바지오의 회화). 그리하여 마침내 믿는 자가 되라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그러나 아직도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를 듣는 시기. 귀가 아직 어둡고 눈은 이제 마지막 맑음을 발악하는 시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른 이들 사이 앉아 생각했더랬다.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성행위를 한 결과가 이 거리에 이렇게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이룩한 거짓말이 서고에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족저근막염이 무대에 올려졌다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고 사강의 시간은 덧없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믿을 것은 오로지 예술'이라든지 '참된 것은 오직 진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날과 그 날의 양식. 그 날과 그 날의 입막음과 귀막음을 어쩔 수 없이 체득하여 태어나고 더럽히고 소모된 다음 삶에서 삶을 창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휴식.




지리멸렬함 사이에서 낚아올린 한 척의 대형 컨테이너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속되게 표현해선 안 될 것이었다. 책을 쓰신 분과 엮으신 분께서 연락이 온 것은 어느 여름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표현해서도 안 될 일이다. 수많은 도리질과 끄덕임 끝에 찾아온 침묵. 말로 말을 표현하려는 덧없음을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덧붙이는 말은 눈물에도 땀에도 피에도 얼룩지지 못 할 거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저기요.......'라고 슬며시 옆에 앉고 싶은 마음. 당장 내일 떠나서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 하여도 이 방백의 머리가 구차해지지 않을 솔직힌 에세이. 답장하지 않아도 '왜 연락이 없어요?' 라고 묻지 않을 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지냈지요?'라는 미소를 보내는 글. 







이 글 엮음을 읽다가 몇 번이나 잊었던 정원을 만났다. 겹겹이 꽃잎을 포갠 수베니어 드 바덴바덴. 농염한 붉음의 건강한 녹아웃. 테두리 핑크의 니콜. 카르멘 머리카락에 꽂아도 좋을듯한 적색의 마리안델. 이 모든 것이 장미였으되 이렇게도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니. 라고 언젠가 장미정원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말해 달라고, 나를 번역해 달라고 하는 수많은 외침 속에서 저자가 뽑아낸 말과 글과 음악과 그림. 나는 이 프랑스식 서재에 있는 동안 내도록 그 사람이 만든 차단의 세계 속에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만든 세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문학과 산문을 번역한 저자의 느낀 점, 뒷이야기, 생각, 작품에 관한 감상이 이 한 권의 책에 스몄다. 구름에 달이 가듯, 파니 핑크가 바라보았던 그 달이 슬며시 웃는 듯 보일 때도 있고 구름이 아예 오르페오의 얼굴을 가릴 때도 있다. 거미줄 같은 미궁에 갇혔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를 일컬어 저자는 '내 위에 있었던 텍스트'라고 말한다. 거들먹거리지 않고 뻐기지 않는 솔직한 말. 옮기면서 힘들었던 순간, 뿌듯한 순간. 믿고 싶었던 순간과 결실을 얻어내게 되기까지의 긴 길. 각 작품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소중한 묶음. 책 뒷표지의 시는 마치 그 저녁의 바순 소리처럼 고요하고 오보에처럼 따뜻했다. 지나치게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모른 체 방관하지도 않는 소중한 텍스트. 저자의 글을 읽노라면 이렇게 텍스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진다. 너무 가까워 읽는 이를 장악하지도, 너무 멀어 그 거리가 아득해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 적당한 관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텍스트의 생명력 자체가 지닌 탄성의 굳은살이기도 했다. 적당히 오래 신은 신이 편안한 것은, 실은 신의 가죽이 나의 발 모양에 맞게 모양이 달라진 것이기도 하나 내 발이 그 가죽에 알맞게 굳은살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리와 자연의 일. 관성과 타성이 하는 일. 그걸 못 참아서 굳이 묻는 독자에게 저자는 누차 조용히 웃어 보인다.





이 조용한 웃음에는 그러나 번역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도, 번역은 모름지기 어때야 한다는 정언명령도 없다. 그것을 채운 것은 고요한 한숨, 밤새 하던 고민, 몇 년을 지속해온 습관 같은 눈빛이다. 작가의 말을, 옮긴 이의 말을 꼭 읽는 그 사람. 다 끊어버리고 밤새 걷던 그 사람. 그 남자의 눈빛을 말하던 그 사람. 그 여자의 손길을 말하던 그 사람. 피와 뼈와 살과 땀으로 이루어진 냄새나는 존재의 그 사람에게 조용히 하는 저자의 말.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백석을, 박두진을, 이문구를 김우창을 읽었다. -책속에서, 여는 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오후 네 시, 로베르 인명사전,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모든 여자는 러시아 시인을 사랑한다, 페스트, 추락,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면의 생, 솔로몬 왕의 고뇌,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 녹턴, 나를 보내지 마, 창조자 피카소, 달리,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저자의 눈과 손과 머릿속을 거쳐 사람들이 만나볼 수 있는 작품. 

다른 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불가사의한 길이 얼마나 거미줄처럼 촘촘한지, 그 세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이면서도 어지간해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확인한 다음 눈에 보이는 세계. 자신 너머 있는 어떤 세계. 무지개 너머의 무엇을 쫓는 저자의 발자취를 되짚다 보면 비단 그것이 문학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산문과 운문을 별개로, 회화와 음악을 외따로 떨어뜨리지 않고 함께 즐기는 사람이 드문 세상, 책장을 넘기다 만난 음악의 음성이 반가워 책장을 조금 더 천천히 넘겼던 이가 있었을까? 나 말고도 있었겠지? 그 사람도 그랬겠지?








 



음악에 관해 쓰인 글 중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어떤 전기 속에서 미셸 슈나이더는 "음악은 떼어놓는다. '음악의 편린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면 나는 기이한 방식으로 나 자신과의 접촉을 끊는다.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로부터, 하나의 대화로부터 나를 떼어낸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음악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떼어내지 말아야 한다. 청중도, 악보도(굴드는 악보를 갖고 연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악기도, 심지어는 마지막 차례물인 음 마저도." 라고 쓰고 있다.(Gallimard, 1998, 1994) 음악이나 연주에 대한 기준이나 기호에는 자의성이 개입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해도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근거가 대책 없이 심정적인 기울어짐 앞에서 빛을 잃고 마는 데 바로 음악듣기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연주회가 끝난 직후에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청중들에게 흩뿌려진 내 몸의 조각들이 돌아와 다시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다시 합체된 나는 서글픈 시 속을, 태평양보다 더 강한 한 줄기 물살 속을 떠돈다. 청중이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 물살에 쓸려가고 말리라. (...) 연주회 대 나는 청중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미소를, 들어 올린 손에 눈길을 준다. 내게 몹시 친숙하고 필요한 존재가 된 그 낯선 이들 각각에게 나는 음악이 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런 순간 객석과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책속에서.








 






따옴표 안의 엘렌 그리모의 말. 저자가 전하는 전언. 이런 것을 보면 악보와 텍스트, 화폭을 통해 구현하는 진정성의 맥락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손끝으로 어루만졌던 플라스틱 조각이든, 숨결이 닿았던 책장이든,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청자로서 이 구성 앞에서 조용히 앉은 하나의 사물이 되는 기분이다.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나름의 우위에 둔 작가, 좋아하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팬덤은 하나의 울타리를 형성한다 했던가. '꺅! 우리 오빠 멋있죠!!!'라고 느낌표 세 개 정도를 찍은 말꼬리의 여고생이 아니더라도 이 반가운 마음을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까.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든 속된 것이든 호오의 감정과 냉철하게 무언가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함께 할때 저자의 눈에서 시작해 손끝에서 끝난 결과로서 책이 내 앞에 놓였다. 






독자란 무엇인가? 그들이 누구이길래 평을 내리고 좋네 마네 옳네 그르네 말을 세상에 침 튀기며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읽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연히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저자의 글 엮음에는 사람에 따라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의 범주가 다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의 필모그라피가 있고 우리는 제각각 다른 독자이니까. 그 다양함 속에서 엘리자베스 던켈의 작품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보기엔 훨씬 좋은 책들이 왜 그렇게 형편없이 안 나가느냐고 푸녀하고 싶은 것일까? 일간지 전면 광고를 딱 한 번 치면 수천 부는 팔아야 손해 보지 않는다던데 출판 광고가 왜들 그렇게 커지는 거냐고, 텔레비전 광고를 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그나마 매절로 계약한 원고료를 밀리고 있고, 그 얘기에 관한 한 사장은 어째서 언제나 부재중이냐고, 양과 질 양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단행본 출판사에서 질 위주로 펴내는 책의 인세는 왜 책으로 대신해야 하는 거냐고, 박봉의 강사에게서 그 책을 공짜로 받아든 학생들이 왜 화가 나야 하는 거냐고, 문화로서의 책은 어디 가고 상품만 범람하고 있느냐는 얘기를 지루하고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아니,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그 모두가 어느 정도 우리들 독자 책임이라는걸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직무 유기를 해온 것이 아니냐고. 그 때문에 나는 험담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책 속에서







잠시 떠나는 청명한 휴가. 책장을 넘기다 걸음을 쉬게 해주는 책의 살결이 들어간 미농지. 호흡을 조절하며 무심히 던진 듯하지만 의미 있는 한 문장씩, 던져진 말. 저자의 서재를 직접 찍은 사진 몇 장을 지나고 나면 만나게 되는 저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시 한 자락까지.





여름. 못미더운 휴가의 계절. 매미가 울고 햇빛이 뜨겁고 바람이 무더운 생명과 생식과 탄식과 죽음의 시각. 하지만 이건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일 년 사시사철 그럴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 너머 숨쉬는 책장. 그 살결을 누가 어루만져줄세라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방백과 묵독을 번갈아 할 사람들. '나의 프랑스식 서재' 초대장은 늘 그 사람 곁에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든 환영한다는 작은 꼬리표를 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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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멸렬함 사이에서 낚아올린 한 척의 대형 컨테이너선'이라고 하신 뜻을 저도 알것 같아요. 그렇게 속되게 표현하면 안될것 같다고 하시는 뜻도 ^^
엘렌 그리모는 글도 참 잘 쓰는군요.

Jeanne_Hebuterne 2013-07-29 17:24   좋아요 0 | URL
hnine님 :)


이 책 참 좋지요? 오랜 시간을 한가지 일에 바친 저자의 때로는 외로운 마음, 때로는 아련한 마음, 때로는 벅찬 심정, 소중한 순간이 작품별로 깔끔하게 펼쳐졌었지요.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지도 않고 부러 멋만 부리지도 않는 분위기까지.


사람들은 종종 '옮기는 것'에의 비중을 폄하하거나 '뜻만 통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도 하지만, 해본 사람은 알겠지요. 그것이 어떤 일인지. 참 좋았어요, 이 책이.

 

 

 

벚꽃은 이미 사라졌다. 바닷물은 뜨거웠다. 낙엽은 없어졌다. 눈은 녹았다.
늘 쉼표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일렀다.

 

 


조용조용.
두런두런.
시끌시끌.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끼워 넣고 애써 모른 척 하늘하늘한 비싼 스카프를 가방 손잡이에 조심스레 동여맸다. 누가 알아볼세라. 누가 못 알아볼세라.
정작 오른쪽 첫째, 둘째 셋째 손가락 끝 손톱이 땅   파다 나온 두더지 마냥 새까맸다.
냉동 블루베리를 먹을 때엔 젓가락으로 집어먹든지 해야 했었다.
 
 
 릭샤를 타고 싶었는지. 루프트한자 777기를 타고 싶었는지. 보잉 747을 타고 싶었는지. A380을 타고 싶었는지. 하다못해 컨베이어 벨트에 내가 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더위.

 


 나는 그 시간을 까마득히 잊었다. 꽃의 피렌체, 물의 베니스, 바람의 샌프란시스코, 마천루의 뉴욕, 얼마간의 화폐와 구겨넣은 몸.
비행기에서 창문이 깨어지면 어떨까? 공항에서 길을 잃으면?
여행자 보험 하나 들라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죽어 엄마에게 보험금을 타는 행운은 너무 큰 것 같애'라고 말하며 보험 하나 안 들었을 때, 나는 꼭 그렇게 다른 이의 마음을 후려치고야 만다. 나는 늘 개구리가 아닌 전갈이었다. 전갈 속이라고 편했을까마는.
 

 

 


 떠나지 못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공포영화를 골라봤다. 스릴러 소설과 추리 소설을 머리맡에 성경처럼 두었다. 자궁 속 태아처럼 웅크렸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에 나오는 사내가 떠올랐다.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며 쥐스키 쎄 뚜 파 비앙. 아직은 괜찮아. 라고 속삭였다고 주인공이 말하던 그 사내. 지금쯤 떨어졌을까? 부딪힐 때 후련했을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그게 나일 수도 있을까? 그게 왜 만만하게 나여야 했을까? 

 

 


 
공포. 추리. 스릴러.
헉!
하다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나는 아니야'라고 읊조리는 이 단순한 쾌락에 올여름 안착했다.
읽은 것도 없던 내가 아는 것이 더 없어졌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고 세상에 확실한 것 없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된다. 애쓰지 마라. 이것은 찰스 부코스키의 `DON'T TRY'와 만났다 헤어졌다. 이 글은 그러므로 그 만남과 헤어짐의 체념과 한숨, 원망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더위를 향한. 그러고 보면  날씨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어둑한 낯선 공간에서 펼쳐  든 첫번째 책은 '끝까지 연기하라'였다. Play to the end.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책속에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으나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되찾고 싶은 배우. 토비에게 그녀가 다시 연락한다. 수상한 남자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지금의 남편감에겐 말할 수 없고 정황상 토비의 팬이 분명하다는 이유가 있다면 결국, 그리하여, 그래서, 이혼한 거나 다름없는 전남편에게 연락하게 된 것은 허름한 결말의 시작이다.

 

 

 

 원인과 결과가 종종 1;1로 대응하지 않는 희끄무레한 현실에서 기연가미연가 갈팡질팡해오다가 인과의 사슬을 쫓는 세계의 문을 열다니, 책장이 휙휙 넘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전개가 빠르다. 생각할 시간 없이 독자를 몰아치는 속도감은 존 그리샴 원작의 각색 야망의 함정(the firm)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표정이 변한다. 전처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 데릭은 처음과 중간, 뒤가 다른 인물이었다. 유명하지만 잡지표지를 장식할 정도는 아닌 토비의 팬이라고 하였다가(처음)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당일 공연을 취소하고 자신을 만나라는 편지를 보냈다가(중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쑥 나타난다(끝).

 

 


 이 사이 토비가 하는 일은 연기가 아닌 연기였다. 맡은 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배역을 미루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시트콤의 작법이 아니던가? 인물을 설정한다. 상황에 밀어 넣는다. 급류에 휘말리듯 인물은 그 속에서 길을 잃는데, 그 그림자가 피노키오의 코 만큼 길어지면 상황 끝. 이 아스라한 아지랑이가 다 뭘까? 상황은 논리적이고 인과는 충실하다. 그런데 주인공 토비만이 길을 잃었다. 헤밍웨이가 고쳐 써도 구제할 수 없고 코넌 도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듯하다.

 

 

 

 마지막장을 덮고, 로밍조차 필요없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다 깨닫는다. 그에게는 동기가 없었다. 휘말려들었으니 발버둥 쳐야 하건만 어느 커다란 그림자로부터 발버둥 치는 데릭이 훨씬 더 파닥거렸다. 아내를 사랑하는 로저가 당기는 방아쇠가 훨씬 의연했다. 저절로 발이 달린 듯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어느 기업의 그림자가 더 짙었다. 오로지 사건의 소용돌이에 어쩌다 들어온 토비만, 뭘 연기하는지 모를 연기를 하려 애쓰고 있었다. 독자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왜? 하는 물음에서 나온다면 이미 모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넘긴 다음 '그래서?'라는 의문이 답을 들은 후에도 남는다면 못내 아쉽다. 틀과 고형물이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으나 손에 담긴 형체가 녹아버렸다.

 

 

 

 

 

닉은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진짜 내가 아니었다. 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다. -책속에서

 

 

 

 

그러다 만난 정반대의 여자가 에이미였다. 어메이징 에이미. 완벽한 결혼생활을 일평생 지속하여 한 마리 자웅동체 플라나리아처럼 보이는 부모 아래 자란 실패라고는 모르는 사람. 그런 에이미가 농담 잘하고 잘생긴 뉴욕 신문기자 닉을 만났다. 작가는 그녀를 똑똑하고 섹시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스포츠와 포커, 음담패설을 즐기고, 게임을 좋아하고, 핫도그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44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분통을 터뜨리자)의 틀에 넣는 것에 비해 남자에 관한 묘사는 좀 의뭉스럽다. 에이미는 형용사와 부사로 존재하고 닉은 동사로 존재한다. 그러나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를 빼고 남는 것이야말로 '진짜'이곤 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닉을 지질하고 멍청하고 의뭉스러운데다 바람피우고 그걸 들키기까지 하는 등신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동사의 무덤을 지나고 나면 몇 년에 걸쳐 일기를 쓰고 관계의 중심에 도달하고 살을 빼거나 찌우고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생각대로 입히는 에이미가 만든 형용사와 부사의 하늘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이 자의로 맺는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가 사랑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쯤에서 프랑수아즈 사랑의 웃음이 떠오른다. "사랑이라고! 천만에,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열정이다. "

 

 

 

 과연 그녀가 진짜였을까? 과연 그가 진짜였을까?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복잡하게 좋은 사람으로, 상대를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네 편과 내 편. 지리멸렬함과 멋있음. 이 편 가르기가 얼마나 유치하며 우스운 것인지를 작가는 교묘한 미소로 비꼰다. 세상에는 좋으면서도 나쁜 것이 있다. 사랑의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선택하는지와 같은 문제다. 위스키. 와인. 럼. 보드카. 마가리타. 롱티. 하다못해 대마초와 하시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구한다. 어메이징 에이미가 그랬듯이, 닉이 그랬듯이. 이 둘의 결혼생활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주저없이 예측한다. 이만한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긴장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열정의 한 종류가 아니던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싼 심리소설.

 

 

 

 그 모든 것이 거짓과 진실의 연쇄 속에서, 먹고 먹히는 생태계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는 언젠가 에이미의 부모처럼 플라나리아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만 그 플라나리아가 되면, 결핍을 모를까? 대상은 종종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을 결핍의 눈길로 바라보는 나였을 것이다. 다이어트 하는 여자가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음식만 생각하듯 담배 끊은 사람이 꿈에서도 담배를 피우듯 문제는 결핍이었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본문에서

 

 

 

 


 어느날 여자를 잃은 남자가 여자를 찾아나선다. 결핍은 그러나 남자의 것이 아닌 사라진 여자의 것이었다. 흔적없이 약혼녀가 사라졌고 마침 먼 친척, 휴직 중인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이야기는 변영주 감독의 영화로도 모습을 보였다. 홀로 뒤늦게 읽는 이 소설은 적절한 일상과 적절한 사건을 먹구름처럼 몰고 온다. 돈을 갚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빚쟁이. 자신의 소비도 아니면서 빚으로 태어나는 구덩이 속에 던져진 사람들.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의 카드, 담보대출, 사채, 개인파산에 관해 면밀히 조사한 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는 그녀의 힘은 섬세한 묘사, 지금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회 인식, 그 안에 안간힘을 쓰는 살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서 나온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고 결핍은 더 큰 결핍을 낳는다. 쇼코가 사람을 죽이고 신분을 위장하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된 취향, 위태로운 소비습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다 나였어'라고 인정하기조차 힘든 허물.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나락. 그것은 쇼코에게 필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것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는 누구도 선하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하지 않다. 중심은 강력하고 모습을 단 한 번 드러내는 여자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힘을 발산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혼마의 시선을 따라갈수록 그녀가 더 잘 보인다. 추리소설의 기본, 동기. 인물을 인물이게 하는 토대, 성격. 동기와 토대는 치밀한 현장조사를 토대로 독자를 압도한다. 차가운 장르 속 따뜻한 손길. 

 

 

 

 

 

여기가 어디였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잠시 잊게 해주는 소설 세 권을 덮자, 갑자기. 

 

 


옆자리 앉은 여자가 말을 걸었다. '손톱이 새까맣네요?'
그녀의 입술엔 관리하지 않아 일어난 각질이 너덜거렸다. 목엔 어울리지 않는 고급 크리스탈 목걸이 펜던트가 반짝, 했다. 무어라고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고 씁슬한 웃음이 마음에 스몄다. 나는 쇼코도, 에이미도, 토비도 아니었구나. 나의 스카프와 저 여자의 입술 각질은, 나의 손톱과 저 여자의 펜던트는 무슨 대화를 나눌까. 현실을 잊게 하는 허상, 현실로 다시 등을 떠미는 허상. 질문과 대답. 분명한 관계. 부표처럼 떠오르는 증거는 이 더위 속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묵직함은 질량이 아닌 무게일 때 그 정도가 더해진다. 저 홀로 존재할 때가 아닌, 중력가속도가 더해진 관계의 틀 속에 있을 때 묵직해지는 실체가 이 소설 세 권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뜬금-다음에 어딘가 이동하고 싶을 때에는 음악 파일에 귀를 적셔야겠다. 아직 가야 할 더위와 지쳐선 안 될 일상이 수두룩하다. 물론, 추리와 스릴러의 세계였다면 언제 갑자기 끝날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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