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t repeat the past? 

Why, of course you can.

-the Great Gatsby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아니었다. 피츠제럴드가 그리고 바즈 루어만이 꿈꾸고 디카프리오가 발현하고 김영하가 옮기고 가장 잘된 오해를 근사하게 내놓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으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츠비의 이야기였으나 데이지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온전히 뻗어 나가는 야심이었으나 결국, 스스로 빈집에 갇히는 마음이었다. 




 그 빈집에 이르르기까지, 원하던 바를 얻으면 그다음의 선택이 도사리고 있다.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면 원하던 것은 여전히 반짝거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별빛처럼 남아있다. 그 별은 바즈 루어만의 '스타'라는 화려함으로 색색들이 윤색되고 오해되었다.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보다 장르적이었고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피츠제럴드의 데이지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순수와 타락, 뉴 머니와 올드 머니, 바다와 맞닿은 대저택 등으로 서로 대립하던 모든 개념을 멜팅 팟에 섞어 만든 바즈 루어만의 개츠비를 구경하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필연적으로 눈이 어지럽고 귀가 쿵쾅거렸다. 완벽의 반대말은 과잉이다.




 넘쳐흐르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넘쳐흘러야 확신이 생기는 때도 있다. 물랑 루즈가 그랬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다. 아예 다른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이 그랬다. 그러나 버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마천루의 공허함을 제거한 그랑 멜로 판타지가 되었다. 3D 입체 촬영과 비욘세, 제이 지, 티파니, 프라다, 브룩스 브루더스, 뷰익과 쿠페를 통해 감독이 뜻한 바는 개츠비의 이루지 못한 허망한 사랑이었다. 더군다나 화면을 떠돌아다니다 강력히 모습을 드러내는 활자는 닉 캐러웨이의 나래이션을 원치 않는 순간에 확성기로 외치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 흥청망청 타락한 밀주와 재즈의 시대, 파티 피플과 화려한 저택을 말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혼란을 보기 위해 꼭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재즈와 힙합, 1920년과 2013년은 다른 명제이다. 닉 캐러웨이의 출발과 결말은 개츠비에게 발이 묶였으며 개츠비의 위태로운 헛발질은 데이지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점에서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릭터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버즈 루어만의 개츠비가 어느 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이를 랑글랑 소매처럼 부풀린, 설명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감독 본인만의 생각을 보여준다면,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 개츠비는 훨씬 다채로운 측면을 보인다. 이것은 장르의 차이가 아닌 관점과 창작자 본연의 기본적인 자세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소설은 소설가가 허구의 인물을 필터 삼아 현실의 사건을 가상의 시나리오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츠제럴드가 겪은 1920년대의 미국은 개츠비의 데이지였을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어떤 여자였을까. 배우 디카프리오가 말한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 할 물건 같은 여자. 실제 사람의 모습은 여러 사건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또렷하고 단층적인 인물이다. 데이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오히려 개츠비다. 그녀의 조각을 그녀의 전체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는 데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피츠제럴드는 이런 다층적인 단어의 구조, 이항대립과 양가적 특성을 통해 어떤 문제에 답을 하는 듯하면서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겉과 속이 같지 않고 그 안의 숨겨진 세계, 1920년의 뉴욕을 고스란히 겪은 인물로서의 개츠비를 보여줄 뿐이다.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개츠비의 불행한 청춘, 데이지의 파행적 결혼생활, 부부의 관계를 공고히 함에 필요한 노리개에 불과한 개츠비와 머틀의 죽음이 있을 뿐, 실제 데이지와 개츠비가 무엇을 느꼈든 둘 사이의 감정은 다른 이들이 겪어야 할 모든 상황에 있어야 할 수단의 톱니바퀴가 될 뿐이다. 불길이 타오르는데 불구경을 할 뿐 모인 이들의 머리가 텅 빈 상황이다. 또한, 생활을 관통하는 물질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개츠비가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서는 데이지가 그 모습을 증명한다. 저택과 셔츠에 감동하는 눈물이 또한 그렇다. 개츠비 역시 신분과 돈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자 노르망디 신 시청의 철문을 떼어와 오래된 것 같이 보이는 저택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바라보면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갈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독자와 작가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며 만족과 충족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종이와 스크린의 주인공은 욕망과 갈망 그 자체이다. 개츠비는 범죄자이면서도 영웅이며 불사신이면서 인간이다. 공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은 닉 캐러웨이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텍스트와 영상은 주관적인 경험의 해석을 거쳐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의미가 된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작품은,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는 상상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은 경험, 해석, 환상을 거쳐 보편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 




 그 '무언가'는 개츠비를 통해 만질 수 있는, 우리가 처한 삶의 비극과 허무함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결국, 호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모든 노력을 다 바쳐 얻고자 한 것을 허망하게 잃고 마는 결말.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 그에서 오는 무력감은 인간의 숙명으로 떠돌아다닌다. 이 작품이 멜로의 외피를 뒤집어썼을지언정 인간이 본디 지니고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삶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직전에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서 오는 인간의 무력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사실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은 원하던 에메랄드빛의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 오는 허무함. 설령 거의 확신하게 된다 하여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느끼는 절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려는, 그 길이 무엇이든 길의 끝까지 가고야 마는 힘. 




 피츠제럴드는 전혀 위대하지 않은 존재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설파하여 독자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쥐어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너지면서도 마천루처럼 위로, 위로, 계속해 나가는 개츠비는 인간 삶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앞으로도 다양한 각색으로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심각한 오독이 될 수는 있어도 지루한 도돌이표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지쳐도 계속되는 확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에 쓰러질 때에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엔 이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다음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두었을 때 우리는 누구나 글자와 영상을 떠나 각자의 경험과 뒤섞인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와 영화감상을 넘어선 우리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까.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 -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the Great Gat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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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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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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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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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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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가 저런 인터뷰를 했어요? 와- 디카프리오가 좋았는데 저 발췌문 보고 더 좋아졌어요. 말씀하신대로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요. 저 발췌문을 보니 저는 디카프리오가 읽는 책들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책을 읽을까, 그는? 하고 말이죠. 전 아직 이 영화 보기전인데, 보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요, 쟌님.

Jeanne_Hebuterne 2013-05-24 13:40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저런 인터뷰를 보면 디카프리오는 참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전체를 보려고 하고 그것을 어떻게 반영할까를 많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원작과 영화 각색에서 강조한 개츠비에 관한 묘사를 때론 뒤로 넘김으로, 때론 정신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달라지는 머리 모양새, 입가에 머물거나 지팡이를 움켜쥔 손 매무새, 어깨를 펴거나 허리를 숙이는 등 자세를 활용해서까지 무척 섬세하게 표현해요. 활자가 영상으로 변할 때 새로이 추가하여 보여줄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디카프리오를 보노라면 비록 그 연기가 자연스러움과는 약간 거리를 둔 장르적이라는 특색이 있지만, 그 점까지도 버즈 루어만의 과장된 해석을 덮어주는 장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가 읽는 책은 알 수 없지만(검색해봤지요!)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작품의 배경까지 자세히 탐구하는 데에서 그 이해력의 힘이 나온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시들해지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경우엔, 버즈 루어만이야 원래 침소봉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고 거기다 액자 구성, 그래픽, 화려한 음악 및 화면 구성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지를 늘상 보여주었기에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가 눈앞에서 이미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보고나니 제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데이지를 좀 많이 다르게 그려버렸기에 아쉬웠더랍니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으로 이 작품을 접할 때, 데이지가 셔츠를 보고 우는 대목에서 그녀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는데 버즈 루어만은 거기다 다른 설명을 집어넣어서 작품의 기본 얼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 버려요. 필요 이상으로 능력을 과시한 흔적 탓에 초반 한 시간은 정신이 없고 후반 한 시간은 집중력이 확 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한 알라딘 서재의 반응이 뜨거워서,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화제성과 대중성의 힘을 느끼는 중입니다. 만약 다락방님이 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해요. 요즘 이 작품만큼 알라딘 서재 분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엿보이기도 해서요.

2013-05-2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5 0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착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삶이 주는 일반적인 해답 이외에는. 그 해답이란 이렇다. 사람은 그날그날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꿈을 꾸어 잊는다는 것은 적어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바랄 수 없다. 이제 목이 긴 병의 여인들이 부르던 그 노래가 있는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에서의 꿈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안나 카레니나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아우르는 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 그 하나하나가 갖는 밀도가 아우러져 이루는 전체를 조망하려는 욕심을 비춥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갖는 감정과 상황, 각자의 개별성을 찬찬히 다루는 데 더 집중하곤 합니다. 후자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전자는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단편에서조차 비교, 대조를 통해 전체를 아우르곤 하지요. 그것은 집의 안팎을 한번에 쓱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가 관심을 두는 어떤 주제에 관한 응축물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때 전체와 총합은 다릅니다. 어떠한 요소가 한데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는 한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결과가 전체라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전체란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와 소설은 그 걸음을 늘 함께 해온 것은 아닙니다. 드물게 영화 이후 소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노희경 작가, 김형경 작가가 그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소설이 먼저, 그다음이 영화입니다. 이때의 주제와 변주는 종종 창의적인 결과를 만드는데,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전형이나 모범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재미있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는 작년 겨울 개봉 레 미제라블, 봄 개봉작인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하지요. 물론 웜 바디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굵직한 작품,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각색을 시도했습니다

 

 

 

 각색에 참여한 인물을 살펴볼까요. 키라 나이틀리, 아론 테일러 존슨, 주드 로. 장소는 런던 근교 셰퍼튼 스튜디오이며 의상은 재클린 듀란입니다. 영국 감독과 영국 배우들이 영국에서 발렌시아가와 샤넬, 디올 풍의 의상을 입고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키라 나이틀리가 그 이름을 올렸는데 어떤 점에서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레타 가르보가 있습니다. 1935년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스타덤의 그레타 가르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는지 영화 속 의상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가르보의 안나 카레니나는 종종 미국 켄터키주의 여자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종종 1967년의 러시아판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레빈의 역할이 무척 사소했을지언정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합니다. 이는 감독이 레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인데, 소설에서는 레빈이 더 비중이 높지만, 영화의 기본 캐릭터는 안나라는 점을 볼 때 감독으로써는 이례적인 선택이 분명합니다. 1948년에는 비비안 리가 가냘프고 우아한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쾌활한 남부 아가씨와는 달리 신경쇠약 직전의 안나였어요.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가 나오기 직전에는 1997년 소피 마르소의 안나가 있습니다. 실제 러시아인들이 상상하는 안나 카레니나와 너무 다른데다 국적도 러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평단의 호평은 얻어내지 못했다는데 국적 보다는 페르소나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Ivan Nikolaevich Kramskoi, , 1883, Oil on canvase

;러시아인의 안나 카레니나 이미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상류층에 맞설 힘이 없는 개인이 우연한 사건을 만나 파국에 이르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공의 개성이 특출하기는 하나, 환경에 비해 크게 우위를 점하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경우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해지지 못하고 파국을 피하려 하지만 파국에 부딪힙니다. 그녀는 일반 독자, 혹은 관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녀는 브론스키를 원합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꿈꾸듯 구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 브론스키를 얻습니다. 결국은 브론스키를 잃는 과정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 파장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직함이 죄가 되는 과정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도 보여주지요. 영화의 관심 역시 '브론스키와 춤을 춘 그날과 안나가 기차에 뛰어들던 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는 과정입니다

 

 

 

 이 평이한 토대의 서사가 이렇게도 자주 영화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틈이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로서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음이 어떤지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뿐, '어떻게' 그리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도, 레빈도 아닌 19세기 러시아 상류층 사회입니다. 비중이 조금 큰 인물은 레빈, 그리고 키티 정도입니다. 안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나가 죽은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모든 것은 안나와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레빈, 키티, 오블론스키,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이 모두를 사회라는 관점에서 조금씩 들여다보기에 안나 카레니나 한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도 효율적인 각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톨스토이는 안나를 처음에는 키티의 눈으로, 그 다음에는 브론스키의 눈으로, 그런 다음에는 카레닌의 눈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를 보듯이요. 소설에서 자살 직전 안나의 내면 독백은 아주 이례적인 일일 정도입니다. ,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는 만들기 쉽기 때문에 자주 가능한 일입니다

 




Keira Knightley in Joe Wright's Anna Karenina




 

 

 

 조 라이트는 이전의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와는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전의 두 작품도 각각 제인 오스틴, 이언 매튜언의 작품으로 소설을 각색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더 과감해지기로 한 듯 아예 무대를 연극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과 취소를 몇 번이나 뒤집고 촬영 전에도 몇 번을 방문한 끝에 촬영을 석 달 앞두고 조 라이트는 런던 근교의 세퍼튼 스튜디오로 장소를 결정합니다. 프러덕션 디자이너 사라 그린우드와 세트 디자이너 케이티 스펜서는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도 조 라이트와 함께 일했으며 그들의 경력을 연극무대에서 시작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해 함께 일했기에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 배경에 있어 균열이 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 그 이상으로 공동 작업에 기반을 둔 매체이니까요

 

 

 

 그리하여 탄생한 안나 카레니나의 배경은 정교하고 역동적인 세트, 연극 무대의 형식을 빌려 온 구성입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연극의 막이 오릅니다. 카메라는 무대 앞, , , , , 우를 훑습니다. 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문을 열고 러시아의 설원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입니다. 러닝 타임이 마감 시간처럼 존재하는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이 무대 효과를 통해 시간을 절약했기에 키티와 레빈의 이야기를 할 여유가 있습니다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엔 될 수 있으면 낮은 기둥, 무너질 것 같은 대들보, 어두컴컴한 조명을 씁니다. 역광으로 인물을 비추다 광활한 초원 위에 선 레빈을 보여주는 식으로 마치 생쥐와 인간을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그러다 카레닌의 침실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대리석, 높은 기둥, 그의 자기 과시적 품성, 딱딱함, 좁은 시야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 침실과 무대를 배경으로 안나는 검은 옷을, 붉은 옷을, 키티는 흰 옷과 파스텔톤의 크림색 옷을, 카레닌은 회색의 제목을 입고 오갑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각색이 허용되고 창의적으로 차용된 부분이 의상 부분일 겁니다. 코코 샤넬이 태어나기도 전인 시점에 안나 카레니나는 동백꽃 모티브의 코코 샤넬 주얼리를 하고 나옵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지방시, 발렌시아가, 샤넬풍입니다. 자신의 외도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될 때에 그녀는 붉은색 드레스를, 다른 이들은 모두가 옅고 밝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처음 춤을 출 때엔 검은 드레스를 입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대사는 인물의 허울만 비출 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사보다는 종으로 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각자의 집,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의상, 대사보다 직접적인 움직임과 춤입니다

 

 


 



 

Yi-Lin Cheng for Focus Features

 


 

 매체의 특성을 잠시 생각해보자면, 소설의 독자, 영화의 관객은 무엇을 할까요. 행간을 읽고 단어를 파악하고 문단에 따라 호흡을 달리하는 이들이 독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 그럴싸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는 이들이지요. 아무 곳에서 쓸 데가 없어서 오히려 독자는 자유롭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영화의 관객은 시퀀스를 따라갑니다. 카메라가 눈이 되어주고 음향은 귀가 됩니다. 의상이 색채를 덧입히고 빛이 이 모두를 아우르지요. 관객은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롤랜드 아처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될 때, 대부에서 마피아 보스가 어두컴컴한 실내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지시할 때,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가 정신 나간 듯 정원을 헤매거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마침내는 낯선 자신에게 침잠해 들어갈 때, 관객은 종이 위 활자가 마침내는 누군가의 의도를 투영한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목격합니다. 물론 문학과 영화, 이 두 장르를 상하로 파악해서는 안 되지요. 예술의 장르가 기능 올림픽의 종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이 두 장르가 종종 서로 대화를 나눌 때 그 묘한 접점과 발화를 바라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인간이 헤맬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원을 보여줍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성공 혹은 실패를 맛보며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을 내딛다 농노제 폐지를 생각하는 레빈에게 그가 더 큰 비중을 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문학을 아마도 톨스토이는 선택했을 것입니다. 글은 모두 다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어떤 글을 읽는가에의 문제라고 본다면, 대문호와 그저 글을 쓰는 이의 차이는, 인간의 한계를 조망하고 생각의 깊이를 하나의 축으로 전개해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독자는 이 모든 글 사이에서 끝없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영화는, 그것이 이미 있는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한 것이든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것이든 그 형식 본연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모든 안나 카레니나에 앞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조 라이트는 형식과 주제의 연관성을 깊이 생각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연극을 차용해 그 폭을 넓게 하고 요점은 카메라, 의상, 세트로 간결하게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멜로에 집중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 개인이 이런 사회와 부딪혔을 때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비극, 떨어질 때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허무함, 그럼에도 계속되는 타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요. 작가가 문장을 고민하듯 감독은 형식을 고민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재미있는 실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과 영화의 대화를 통해 독자와 관객은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겠지요. 사회를 생각하고 개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계단의 아래를 돌아보는 일, 그런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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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4-2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저희 집 근처 극장에서 너무 어이없게 빨리 막을 내려버리더라고요. 시간 텀도 너무 어중간했고요. 참, 아쉬웠는데 쟌느님 덕택에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톨스토이는 정말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대단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2 11:25   좋아요 0 | URL
이럴 땐 멀티플렉스가 참 야속하지요. 옛날에는 한 달까지도 영화 상영을 지속할지를 두고 봤는데, 요즘은 개봉일에서 사나흘이면 상영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하더군요. 상영한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인기가 없으면 상영시간대가 영화를 보기 어려운 시간대로 변경되어버리고요. 이 영화가 참신해서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블랑카님께서 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음악, 의상, 조명, 세트, 그리고 제가 여기에는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 동영상을 링크하기는 했지만, 안무가 대사 이상으로 발언권을 얻어서 굉장한 파급력을 보여줍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형식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한다면 오 년 후에는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보일 것 같아요. 의상은 보디스가 분리되어 있어서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면 투피스의 형상이고 무척 현대적이기까지 한데,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더군요.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체를 조망하려 한 톨스토이의 원작 전부를 담지는 못했지만(그건 어느 영화도 불가능하겠지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시간을 절약한 덕분에 안나와 브론스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을 둘러볼 여유를 갖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요. 집나가서 객사하시지만 않으셨더라도......늘 천재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서재의 공식 오프닝은 2012년 3월 21일이었으나, 서재 주소의 날짜는4월 27일이지요.

한 달 후 일 년 후를 과연 기약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일주년 기념 선물을 보내주셔서, 이에 화답하느라 궁색하게나마 일 년을 돌아봅니다. 남들처럼 그럴싸한 말을 하는 재주가 없어서 간결한 집계로 대신합니다.

 보잘것없고 게으르고 오락가락하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이곳에 흔적을 남긴 것이 일 년. 지켜보아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나마 남깁니다.  

 

 

 

 가장 리뷰가 많은 폴더 : A

 

D : 2편

180일의 엘불리

근대회화의 혁명

 

K : 2편

Westminster Legacy - Chamber Music Collection [59CD] [세계 최초 한국 1000조 한정반]>

극장전

 

B : 4편

폴 스미스 스타일

셜록

어두운 기억 속으로

Coldplay

 

F : 5편

집착

한 달 후, 일 년 후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폴리나

고통

한 여자

 

R : 1편

무도회가 끝난 뒤-러시아

 

A: 6편

선셋 파크

드링킹

케빈에 대하여

진화심리학

올리브 키터리지

모든 날이 소중하다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리뷰

너는 모른다-케빈에 대하여(2012) : 추천수 96

http://blog.aladin.co.kr/0427/5810750

 

 

가장 추천를 많이 받은 페이퍼

20120826 : 추천수 54

(대학살의 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aladin.co.kr/0427/5814498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리뷰

한 달 후 일 년 후 : 댓글 8

http://blog.aladin.co.kr/0427/5979998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페이퍼

suede :댓글 19

http://blog.aladin.co.kr/0427/6165526

 

 

 

 

 

 

 

 

고마워요.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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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1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생일이라고 선물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까, 쟌님? 와- 대단해요!
언제나 고마운, 그런 사람이 있다니 말이지요.
:)

Jeanne_Hebuterne 2013-04-18 13:09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제가 잊었거나 인식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는 이의 축하가 정말 고마워서 이렇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답니다. 저는 생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일정 기간을 두고 무언가를 돌아보기에는 기념일이 좋지요.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hnine 2013-04-1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어디서 이런 음악을 찾으셨어요? 정말 기발하네요.
0427이 그래서 0427이었군요 ^^
서재, 장수시키세요! ^^

Jeanne_Hebuterne 2013-04-18 12:51   좋아요 0 | URL
이 음악, 그럴싸하지요? HAPPY BIRTHDAY VARIATION인데 제목에 걸맞게, 생일에 참 적합한 음악입니다. 여러 음악가 풍의 음악을 들으면 그 작곡자들의 특징을 짚어낸 감각이 재미있게 느껴지지요. 제가 진득하지 못하고 뒤죽박죽 한 면이 있어서 조바심이 납니다만 그래도 일 년이라는 시간을 넘었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꾸려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다크아이즈 2013-04-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왕 부럽습니다.^^*
열흘이나 앞서 추카해주는 센스하며,
초콜릿과 텀블러라뇨...
왠지 아주 가까이 계신 분 같아요.
것도 부럽습니다.


Jeanne_Hebuterne 2013-04-18 15:51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자세히 보시면 포스트잇에 정성껏 편지도 써서 보내주셨다는 자랑을 덧붙입니다. 무엇보다도 끈기 없는 성정의 제가 이렇게나마 리뷰와 페이퍼를 조금씩 남겨온 데에는 이러한 격려가 큰 힘이 되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었답니다. 저는 무심하여 제때 무언가를 제대로 축하하는 데 서투른데, 종종 이렇게 친절한 선물을 받으면 더 고마워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긴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인지도 헛갈리곤 해요. 팜므느와르님도 여기 오래오래 있어요!

테레사 2013-04-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늘 궁금했습니다. 왜 서재가 이 숫자일까?..그리고 이 분은 직업적 평론가가 아닐까? 음악, 미술 또는 .....장방형으로 뻗쳐있던 관심사와 깊은 통찰력...무엇보다 최근들어 긴글을 써 본 적 없는 저로서 부러울 수밖에 없는, 길고 호흡이 긴 글들....그럼에도 1년밖에 안되었군요....정말이지 부럽습니다..축하드려도 되는 거죠? ^^

Jeanne_Hebuterne 2013-04-18 13:04   좋아요 0 | URL
서재 나름의 생일, 저 나름의 작은 기념일이랍니다. 누구나, 특히 이곳을 활용하시는 분들은 책, 영화, 음악, 미술 작품 등을 감상할 테고, 그러다보면 자기 생각을 짧게나마 정리하고 누군가에게 소개하거나 의견을 묻고 싶어질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저 읽을만한, 시간 낭비가 되지나 않을 그런 감상을 남기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인데 테레사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엉키지 않는 긴 호흡, 바스러지지 않는 굳건한 토대, 다른 무언가를 뽑아내는 의미, 이런 것들을 일주년이 된 지금 더 지향하게 되었어요. 일 년밖에 되지 않았고 남긴 글은 더 얼마 되지 않아 집계 내기가 상당히 쉬웠답니다. 아쉬운 대로나마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어요 :)

blanca 2013-04-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텀블러군요! 저는 언제나 여기에 계셔 주시는 님이 고맙답니다. 제가 여기에 글을 쓰기 전부터도 jeanne님을 기억하지요. 특유의 그 느낌, 이미지. 우아, 그런데 추천수가 어마어마하군요!

Jeanne_Hebuterne 2013-04-18 13:55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님! 스타벅스에 관련한 블랑카 님의 글을 읽으니 이상하게도 반가워져서 블랑카님의 서재에도 자랑했었지요? 전 종종 이런 종류의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와락 달려드는 순간이 있어요. 그럼에도 부담스러워하시지 않고(?) 계속 있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블랑카님의 칭찬은 늘 듣는 이를 잘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답니다. 그만큼 블랑카님 자신만의 통찰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축하 고마워요, 블랑카님!

추천 수,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외계인의 일이 아닌가 의심 중입니다.

Jeanne 2013-07-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은 제 영어이름이 jeanne라서 같은 이름 우연히 보고 서재 구경왔는데 0427이어서 순간 놀랐네요 제 생일이거든요... ㅎㅎ 그래서 이렇게 인사하고 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7-29 17:27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 라는 댓글을 달게 만드는 인사 :)

Jeanne 2013-07-2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이셨군요 글보면서 짐작했었는데 맞네요 잘 지내셨어요?

Jeanne_Hebuterne 2013-07-29 17:28   좋아요 0 | URL
조용히, 없는듯, 있는 듯, Jeanne님, 잘 있었지요? 가는 길을 잊었는데 찾아갈 수 있어 다행입니다. 보고싶었어요:)
 



I've made up my mind, 이제 결정했어.
Don't need to think it over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어.
If i'm wrong, i am right 만약 내가 틀린건지 맞는건지
Don't need to look no further, 더 볼 필요도 없이,
This ain't lust 이건 욕망이 아니야.
i know this is love 나는 이게 사랑이란 걸 알아.
But, if i tell the world 그렇지만 내가 온 세상에다 대고 말한다 해도
i'll never say enough 충분하지 않아.
'cause it was not said to you 왜냐하면 너한테만은 말을 못했으니까.
And that's exactly what i need to do 바로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인데
If i end up with you 만약 내가 너랑 끝까지 간다면


Should i give up, 내가 포기해야 할까.
Or should i just keep chasin' pavements? 아니면 계속계속 이 길을 걸으면 될까?
Even if it leads nowhere 이 길이 무의미해도
Or would it be a waste 괜한 짓이라 해도
Even if i knew my place 설령 내가 갈 곳을 안다 해도
Should i leave it there 그곳을 가야만 할까
Should I give up, 내가 포기해야 하는건지
Or should I just keep chasin' pavements 아니면 그저 계속 이 길을 걸으면 되는건지
Even if it leads nowhere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 하더라도.

i build myself up 갈피를 잡았어.
And fly around in circles 그리고 주변을 빙빙 돌다가
Waitin' as my heart drops 내 심장이 떨어질 때 까지 기다리다가
And my back begins to tingle 그러다 등이 아릴 때
Finally, could this be it 마침내 그렇게 되겠지.


Or should i give up 아니면 내가 단념할까.
Or should i just keep chasin' pavements 그냥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하나
Even if it leads nowhere 그 길이 무의미해도
Or would it be a waste 괜한 짓이어도
Even if i knew my place 내가 갈 곳을 내가 안다 해도
Should i leave it there 그곳으로 가야만 할까


Should i give up 내가 포기해야 하나.
Or should i just keep chasin' pavements 아니면 그저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야 하나
Even if it leads nowhere 그 길이 무의미해도
Or would it be a waste 괜한 짓이어도
Even if i knew my place should i leave it there 갈 곳을 알아도 그곳으로 가야 하나
Should i give up 내가 포기해야 할까
Or should i just keep on chasin' pavements 아니면 이대로 계속 걸어야 하나
Should i just keep on chasin' pavements 그저 이대로 계속 이 길을 따라 가야 할까

 

-Adele, Chasing pavement. from "19"

 


















 

 


2008년 1월 29일, 이 노래가 담긴 이 음반이 발매된 날짜.

2011년 9월 22일, 링크의 저 공연이 있었던 날짜, 로열 앨버트 홀.

2013년 3월 21일로 넘어가기 직전의 20일 밤. 지금 이 시각. 봄을 시기하는 겨울이 건재함을 알리는 시기. 봄눈이 내리고 기온이 하강하고 기압도 떨어지고 빗방울이 눈송이가 하지만 마침내 햇빛에 사라지는 날. 


 


 

높은 건물의 창가에 기대어 손에 뜨거운 머그잔을 들고 안에 든 무언가를 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누군가 무단횡단을 한다. 도넛 배달을 하는 트럭 지붕에는 커다랗게 도넛 그림이 있었고 멀리 검은빛 새가 날았다. 낮게 깔린 하늘을 배경으로 누군가는 길을 가리키고 누군가는 길을 물었다. 저렇게 해서 알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적당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질문과 그것을 답해주는 이의 목소리가 적당히 정답기를 바랐다. 세상은 다채로웠다. 

 

 


 사람은 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고 그 시간은 길지 않다. 

 급히 묶었던 신발 끈.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내며 닫았던 문. 그럴 필요 없었던 모질었던 순간.  그 시간에는 길잃은 자의 의지가 있었다. 무언가를 더듬어서라도 문을 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아델의 목소리는 그런 목소리이다. 무언가를 결심하기 전 마지막으로 망설이는 사람의 그림자이다. 이제 결정했다는 문장 뒤를 잇는 모든 문장 속 주어 I는 모두 다 소문자였다.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던 목소리인데 끝없이 질문할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있을까. 아니면 나만 이럴까. 죽도록 우물을 파다 우물 속으로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할까. 너무 큰 소리를 내며 닫아버려서 이제 그 문 뒤에서 히키코모리가 되는 건 아닐까. 급히 뛰느라 어디를 뛰는지 몰랐는데 어느 순간 마녀 유바바가 나타나면 어쩌나. 모든 것에 확신이 없어질 때 질문을 하는 자도 자신이어야 하고, 질문을 받는 자도 자신이어야 한다. 나이도 잠시 잊고, 국적도 잊고, 인종도 잊고, 그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비로소 아델이 보인다. 주어를 모두 다 소문자로 써야 했고 확신은 하는데 말할 수 없고 어디까지 걸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 사람이 보인다. 

 

 



 그 이전의 찬란했던 기대가, 설렘이 불안으로 바뀐 아델의 검은색 앨범, 19가 보인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구르다가도 어느새 길을 걷게 된다. 길잃은 자들의 송가, 방향을 찾는 자의 나침반. 그것은 당시 아델의 경험대로 사랑일 수도, 사랑 이외의 모든 어떤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고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으며 질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간이 무척 짧다는 것. 때로는 서두를 수도, 때로는 지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끝이 언젠가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혹은 설렘 탓에 우리는 '끝없는 듯한' 이라는 케케묵은 문구를 종종 불안하게 떠올린다. 그래서 다시 길을 걷는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어떤 갈래가 될지, 돌아보거나 내다보려 하면서. 

 

 

 

 강렬한 기대, 헛헛한 결과. 

 자신에 대한 실망, 남는 것 없는 시간.

 내가 정작 가장 끝없이 강력히 지금까지도 싸워오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가장 나중 지닌 것을 떠올릴 수도 없는 순간. 

 나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길잃은 개를 보고 불쌍해서 안고 회사 사무실까지 데리고 들어가 우유를 주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날개를 다쳐 길에 떨어진 나비가 불쌍해서 화단에 옮겨준 다음 그 다음 날 그 길을 지날 때 다시 확인해 보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나무에서 야옹거리며 울기만 하는 작은 아기 고양이를 꺼내어 주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정기적으로 지구 건너편의 누군가를 후원하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밤마다 어느 배우의 음성을 밤새 들으며 자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뜀틀을 가볍게 넘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아침마다 노란 원형 통에 든 물고기 밥을 물고기에다 주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폭풍우 치는 밤, 연못에 있는 물고기들은 어쩌나 걱정은 되는데 무서워서 나가보질 못하던 그 사람이 그리웠다.

 즉, 나는 모든 내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말한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꼭 고을의 원님들은 한밤중에 혼자 호롱불빛 아래 앉아있다 묘령의 넋을 만나나. 그것은 인생의 지리멸렬한 클리셰였다. 얘야. 공부하지 않으면 성적이 나쁘단다. 숙제를 게을리해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그리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모든 목소리가 나는 그리웠다. 내가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이 끝도 없는 길을 계속 걸어야 할까. 이제 마음 좀 잡았는데, 내 심장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내 등이 아플 때까지 이러다 보면. 이렇게 노래하는 아델이 그리웠다. 나는, 이라고 계속 말하고 싶었다. 주어를 강렬히 살리고 틈을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말하고 싶은 경우가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늘 그 말을 꼭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추측에 그칠 뿐인 허무하고 완벽한 날들.


 


 그 모든 측은지심은 어디로 갔나. 다른 무언가를 누군가를 애타게 걱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생각한 주제넘은 욕심은 어디로 갔나. 모두 다 나였다. 그러나 모두 다 내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나는 그리워하고 애태우다 아직도 내가 나에게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부적처럼, 혹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트럼프 여왕의 미소처럼 지닐 수밖에. 그러면서 꼭 신발 밑창 아래 천 원짜리 한 장 숨긴 거지처럼 살아있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 끊이지 않는 노력의 결실을 읽으면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운 구석이 더 많으며 그걸 망치는 건 오로지 나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메리 올리버는 그 무엇도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간결하다.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젠체하지도 않는다. 어떤 무엇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메리 올리버는 자기 자신을 척도로 삼는다. 천천히 들여다본다. 함부로 손내밀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옆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잠시 부는 바람이 아니다. 끝을 짐작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대양에 이르는 강물처럼 그녀의 시는 오랜 시간 한결같은 목소리를 잃지 않는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섹션의 스티브 도빈스가 평했듯 그녀의 시는 기분전환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문학이다. 이러한 은유와 환원, 관찰과 노력은 친절하고 다정한 안내이다. 길을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고 끝없는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을 때면 나는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고 싶어질 것 같다. 문학은 이렇게 기댈 어깨를 내어준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문 열쇠구멍으로 기어 들어왔어. 난 거미를 조심스럽게 창문에 올려놓고 나뭇잎을 조금 줬어. 그녀가(만일 암놈이라면) 거기서 바람의 그리 부드럽지 않은 말을 듣고, 남은 생을 계획할 수 있도록.


거미는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어. 밤에 어떤 모험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잠든 것이었는지, 모르겠어. 


 이윽고 거미는 작은 병 모양이 되더니, 방충망에 위아래로 줄 몇 가닥을 만들었어.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떠나 버렸어.


 무덥고 먼지 낀 세상이었어. 희미한 빛이 비치는, 그리고 위험한. 한번은 작은 깡충거미가 현관 난간 위를 기어가다가, 내 손에 들어와, 뒷다리로 서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초록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모았어. 너는 그게 아니라고 하겠지만 진짜로 그랬어. 따뜻한 여름날이었어. 요트 몇 척이 항구 주변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항구는 뻗어나가 대양이 되지.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열쇠구멍의 작은 거미야, 행운을 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살아라. 


-메리 올리버 산문시, '괜찮아?'


 

 

 


 

 




 

















 


 

 



 그러다 잠시 떠올려 본다. 내가 낮에 갔던 그 길은, 그 장소는, 내가 잡았던 머그잔은.




 지금 어둠 속에 가만히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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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쟌님.
인용해주신 산문시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읽은 기억이 없어요. 분명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는데 말이지요. 이 책에 이런 시가 있었던가? 왜 나는 몰랐지? 하고요.

22쪽에서 왜 생각났는지 알겠어요? '날개를 다쳐 길에 떨어진 나비가 불쌍해서 화단에 옮겨준 다음 그 다음 날 그 길을 지날 때 다시 확인해 보던' 쟌님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아귀가 다시 바닷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쟌님이 생각났어요.

Jeanne_Hebuterne 2013-03-25 09:5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그 사람은 사라졌어요. 그래서 잠시 그리워했지만 없는 것을 다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3-2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 노랫말 빼고 일곱 째 단락 자화상 묘사 부분 넘흐 좋습니다.
저도 이런 글 쓰고 싶어요. 절대 쓸 수 없겠지만...
이래서 님 글이 무조건 좋다는^^*
(좀 말이 안 되나? 이유가 있는데 무조건 좋다고 말하니 ㅋ)

Jeanne_Hebuterne 2013-03-25 10:04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측은지심을 몽땅 잃어서 저런 사람이 없어져버린 것이 아주 조금 안타까웠어요. 아마 그 안타까움이 2% 가량 남아있어서 팜므느와르님께서 그 부분이 좋다고 생각해주셨지 싶습니다.
없는 걸 끄집어낼 수 없는 노릇이지만 좀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면 일말의 희망이 보이려나, 생각해본 월요일입니다. 한 주 잘 보내시길 바래요!
 

                           PAT 

           I'm married!

                          TIFFANY
           So am I!

                          PAT
           What the fuck are you doing? Your husband's dead!

                          TIFFANY
           Where is your wife?

                          PAT
           You're crazy!

                          TIFFANY
           I'm not the one that just got out of that hospital in Baltimore.

-Silverlinings Playbook의 대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Silverlinings Playbook은 그 발걸음이 심상치 않은 영화입니다. 네, 저는 저 괴상한 대사로 서두를 대신했지요. 얼마나 난장판 코미디인지를 제대로 보여 드릴 길이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는 이 영화는 전반부와 중반부의 출중함을 후반부의 구태의연함으로 한순간에 날려버려도 가까스로 그 축을 잡아끄는 몇몇 시사점 때문에 다시 생각하게 되는 묘한 작품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행복한 미국 가족의 영화입니다. 크로니핀, 트래저딘 등의 약품을 이야기하던 남녀가 서로 걸레, 미친놈(저도 고상한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만 인용은 제대로 해야지요)으로 몰아붙입니다. '앞으로 순탄하게 잘 살 거야. 아가씨 같은 사람은 사주 보러 올 필요 없어' 라는 점술인의 말을 들은 다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이 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일이 이 영화에서는 줄줄이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대책불능의 미친 스크루볼 코미디이며 후반은 그저 그래서 마지막 오 분 정도는 안 보고 그냥 나와도 영화 감상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아마 안 보고 나오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가로와 세로로 이어진 지그재그의 축에서 이 영화는 참신하게 살아납니다.

 

 

 

 

 

1.가로

 

 

 

 

 

 

 

 

 

 

 

 

 

 

 

 

 

 

 

“당신이 필요해요, 팻 피플스. 젠장, 죽을 만큼 필요하다고요!”
그녀는 내 목에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내 살갗에 떨구었다. 보통 여자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는 사뭇 달랐지만, 분명 솔직한 말이었다.-책 속에서

 

 

 

 

 원작이 태초에, 각본은 그다음에. 각색이 모든 곳에. 헐리우드의 모토일 겁니다. 배우로 활동하던 맷 데이먼이 감독상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것도, 마카로니 웨스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랜토리노로 돌아오는 것도 어쩌면 각색과 제작의 분업화에 다름 아닐 겁니다. 이야기가 있었다면 카메라가 그것을 바꿉니다. 각색은 원하는 숨결의 강도를 조절하지요. 이를테면, 네, 육두문자를 남발해 가면서요.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절망적으로 거리를 달리면서요.

 

 

 

 

 당신 미쳤어! 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볼티모어의 정신병원에 있었던 건 당신이야. 라고 말하는 여자. 나 결혼했어요! 라는 말에 나도요! 라고 말하는 여자. 스크루볼 코미디가 간단하게 관객을 끌어들이는 가장 편한 방법을 감독은 택했습니다. 등장인물 전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스포츠 게임에 거는 아버지, 아내와 역사 선생의 샤워 섹스 장면을 목격하고 역사 선생을 죽기 직전까지 구타한 다음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와서도 여전히 아내를 되찾으려 전전긍긍하는 팻, 남편이 죽은 다음 남녀 불문하고 회사 사람 전부와 섹스를 해서 해고당한 티파니, 업무 스트레스와 홈 홈 스윗 홈을 외치는 아내 사이에서 질식사 할 것 같은 친구까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등장인물 중 제정신인 사람은 팻의 어머니 돌로레스 밖에 안보입니다. 이쯤되면 이 영화는 미친 사람들의 코미디가 아니라 미친 미합중국 국민의 자화상이라 보아도 좋을 정도예요.

 

 

 

 

 '파이터'에서부터 미친 가족을 보여주었던 데이비드 O.러셀은 이번에는 각도를 좀 따스하게 틀었습니다. 본인은 아니라 하겠지만 어떤 장면은 미국의 또 다른 잘 짜인 로맨틱 코미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떠올리게도 했어요. 쥴스는 마이클을, 마이클은 키미를 보고 죽도록 뛰는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서로의 등을 보고 뛰는 사람들입니다. 짝사랑을 한눈에 보여주던 그 장면이 이번에는 팻의 등을 보고 뛰는 티파니로 변주됩니다. 처음 저녁을 먹기로 할 때에서야 우리는 티파니의 등을 보게 됩니다. 앉아있거나 정지해 있는 스윗 홈의 베로니카와는 달리 티파니와 팻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올려다 보게되지요.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이 감독의 시선은 참 자상하고 친절해요. 나서지 않고 길을 안내해주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모든 감독이 지닌 당연한 자격사항이라 오히려 우리에겐 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2.세로

 

 

TIFFANY

What meds are you on?

PAT
Me? None. I used to be on Lithium and Seroquel and Abilify,

but I don't take them anymore, no.

They make me foggy and they also make me bloated.

TIFFANY
Yeah, I was on Xanax and Effexor, but I agree, I wasn't as sharp,

so I stopped.
PAT
You ever take Klonopin?

TIFFANY
Klonopin? Yeah.

PAT
Right?

TIFFANY
Jesus.

PAT
It's like, "What? What day is it?"
How about Trazodone?

TIFFANY
Trazodone!

PAT
Oh, it flattens you out. I mean, you are done. It takes the light
right out of your eyes.

TIFFANY
God, I bet it does.


I'm tired. I wanna go.

VERONICA
No. No, no, no, no. We haven't, we haven't even finished the salad
yet, or the duck. I made the Fire and Ice cake.

TIFFANY
I said I'm tired. (to Pat) Are you gonna walk me home or what?

PAT
You mean me?

TIFFANY
Yeah, you. Are you gonna walk me home?

PAT
You have poor social skills. You have a problem.


TIFFANY
I have a problem? You say more inappropriate things than
appropriate things. You scare people.

PAT
I tell the truth. But you're mean.

TIFFANY
What? I'm not telling the truth?

RONNIE
Um, maybe I should drive them home separately?

VERONICA
You can drive them both home. Now.

TIFFANY
Stop talking about me in third person.

VERONICA
You can take Tiffany home first.

TIFFANY
You love it when I have problems.
You love it, Von, because then you can be the good one. Just say it.

VERONICA
No.

VERONICA

I don't. I don't. I just wanted to have a nice, I just wanted to
have a nice dinner.

TIFFANY
Oh, God.

VERONICA
What is your problem?!

TIFFANY
Nothing's my problem! I'm fine. I'm tired and I wanna go.

Come on, are you ready?

VERONICA
You really, you really wanna go right now?

TIFFANY
Yes, I really wanna go! It's been great.

RONNIE
Okay, guys, the baby is sleeping!

TIFFANY
Sorry. I don't wanna wake up the baby. Bye.




 

 팻은 티파니에게 예의가 없고 심술궂다고 말하고 티파니는 팻에게 부적절한 말을 엉뚱한 자리에서 꺼내 사람들을 언짢게 한다고 말하지요. 저는 이 비비 꼬아대는 개성이 데이비드 O. 러셀의 각색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책은 영화보다 더 친절하고 은근한 방법을 택합니다. 눈빛이 얽히고 증오의 불꽃이 튀는 미친 남녀의 마음을 실버라이닝적 시점에서 슬쩍 풀어내고 있거든요.

 

 

 

 

 데이비드 O. 러셀은 윈터스 본의 전사 제니퍼 로렌스를 불안증에 걸린 연약한 여자로, 차가운 바람둥이 남자 브래들리 쿠퍼를 재기하려 안간힘을 쓰는 루저로 만들어놨습니다.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팻은 그 패배감이 구두 밑창에 숨겨둔 천 원짜리처럼 숨겨져 있어서 그가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뛰는 장면에서는 Beck Hansen의 Loser가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어요. 브래들리 쿠퍼는 날을 드러내고 제니퍼 로렌스는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나는 이제 막 시작이다'는 데이비드 O.러셀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헐리우드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선댄스 키드의 힘이에요. 이야기가 포화상태입니까? 거기서 거기일까요? 하려는 말은 모두 뻔할까요? 이것은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한 가지 이야기, 혹은 천만 가지 이야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선댄스 출신의 감독들은 분명 열세 번째 이야기를 할 겁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선댄스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것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 이후 더한 거대 자본과 시스템을 만나 참사를 겪거나 토머스 빈터베르그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유명무실한 영화를 만들었던 그런 일이 미국 인디 영화 감독들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 잡담

Best Picture: "Argo."
Actor: Daniel Day-Lewis, "Lincoln."
Actress: Jennifer Lawrence, "Silver Linings Playbook."
Supporting Actor: Christoph Waltz, "Django Unchained."
Supporting Actress: Anne Hathaway, "Les Miserables."
Directing: Ang Lee, "Life of Pi."
Foreign Language Film: "Amour."
Adapted Screenplay: Chris Terrio, "Argo."
Original Screenplay: Quentin Tarantino, "Django Unchained."
Animated Feature Film: "Brave."
Production Design: "Lincoln."
Cinematography: "Life of Pi."
Sound Mixing: "Les Miserables."
Sound Editing (tie): "Skyfall" and ''Zero Dark Thirty."
Original Score: "Life of Pi," Mychael Danna.
Original Song: "Skyfall" from "Skyfall," Adele Adkins and Paul Epworth.
Costume: "Anna Karenina."
Documentary Feature: "Searching for Sugar Man."
Documentary (Short Subject): "Inocente."
Film Editing: "Argo."
Makeup and Hairstyling: "Les Miserables."
Animated Short Film: "Paperman."
Live Action Short Film: "Curfew."
Visual Effects: "Life of Pi."

 

 

 

 

 

 네, 그저 그렇습니다. 저의 예상과는 달리 링컨이 상을 휩쓸지도 않았고 레 미즈에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지도 않았어요.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은, 당연한 결과였지요. 라이프 오브 파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아카데미는 권위보다는 젊어지려는 발버둥을 하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온갖 부문에서 후보작들을 남발하는 것은 기회균등보다는 하향 평준화의 달성일 뿐입니다. 이것은 권위 있는 시상식, 그 나라의 영화적 전통을 만드는 틀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인지도 낮은 누군가가 나와서 pc에도 어긋나는 재미도 없는 농담으로 시작해서 퍼스트 레이디의 이미지 변신의 무대로 이어진 다음 그저 그런 수상 결과만 낳는 쇼가 되지 않는 대신에요.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제니퍼 로렌스의 여우주연상 수상입니다. 작년은 '대처'의 메릴 스트립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카데미의 참신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상대는 제시카 체스테인, 에마뉘엘 리바, 퀴벤자네 월리스, 나오미 왓츠였지요. 후보들 중에서는 발군이며 제니퍼 로렌스의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럴 법 했지요. (속닥-그러나 그럼에도 뭔가 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챕터는 아카데미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의 작은 교집합에 관한 잡담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 관한 잡담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상까지 타니,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꼬리표 아닙니까?

 

 

 

 

3.날실과 씨실

 

 

 

 

 

 

 

 

 

 

 

 

 

 

 

 

 

  • 1-1. Silver Lining Titles - Danny Elfman
  • 1-2. My Cherie Amour - Stevie Wonder
  • 1-3. Always Alright - Alabama Shakes
  • 1-4. Unsquare Dance - The Dave Brubeck Quartet
  • 1-5. Buffalo - Alt-J
  • 1-6. The Moon Of Manakoora - Les Paul / Mary Ford
  • 1-7. Monster Mash - CrabCorps
  • 1-8. Goodnight Moon - Ambrosia Parsley / Elegant Too
  • 1-9. Now I'm A Fool - Eagles Of Death Metal
  • 1-10. Walking Home - Danny Elfman
  • 1-11. Girl From The North Country - Bob Dylan
  • 1-12. Silver Lining - Jessie J
  • 1-13. Hey Big Brother - Rare Earth
  • 1-14. Maria - Dave Brubeck / The Dave Brubeck Quartet 
  •  

     

     

     

     사운드트랙입니다. 대니 엘프만,데이브 브루벡 쿼텟, 밥 딜런을 축으로 하겠어요. 그러고는 살짝 알라바마 쉐이크와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을 군데군데 뿌리고, 타이틀곡이 하나쯤 필요하니 Jessie J를 영입한 것이겠지요. 그렇기는 해도 Jessie J의 뮤직비디오는 영화 홍보와 싱글 판매를 동시에 노린 모양인데, 좀 중구난방인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 그저 제 생각일 뿐이지만 아이 엠 러브처럼 비범하지도, 그렇다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처럼 괴상하지도 않고(이 사운드 트랙 들어보신 분은 제 기분을 아실 겁니다), 아델의 스카이폴처럼 주제를 한순간에 녹여내지도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리스트입니다.

     

     축이 있기는 합니다만 비율을 알기 어렵게 혼용되어 약간 번잡스러운 느낌이 있어요. 이 영화가 도그마 필름도 아니고(음악은 극중 라디오나 주인공이 듣는 음악이 아닐 시에는 별도 삽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지요), 기왕 넣을 바엔 아주 마음대로 넣겠다는 고집이 엿보이는 의지의 선곡입니다. 하긴, 그것이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힘이기도 했어요. 물론 그만한 패기가 있는지는, 다음 영화를 지켜보아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아직 이 감독은 본인의 말대로, 이제 막 시작입니다. 우리는 포스트 마틴 스콜세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 케네스 듀란도 십 년 전 그것이 궁금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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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01 0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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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01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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