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마다 뜰을 가꾸는 것 외에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자신의 집을 새로 칠하는 것을 즐겼다. 금요일 저녁에 되면 그는 서둘러 여러 통의 도료를 사고, 벽을 닦고, 바닥에 비닐 덮개를 덮는 것으로 시작해, 매끈한 표면 위에 의욕적으로 붓질을 하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까지 해야하긴 했지만 그 일을 대개 일요일 저녁이면 끝났다. 페인트 냄새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폴 폴콘은 냄새만으로도 그 조합을 알아낼 수 있었고 성분을 열거할 수 있었다. 드문 도취 상태 속에서 시너 냄새를 흠씬 들이마신 탓에 가볍게 취한 상태가 된 그는, 다음날 직장으로 돌아갈 태세가 되어 흡족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몇 년 동안 그의 집은 밝은 파랑에서 어두운 파랑으로, 크림빛 흰색에서 '기존 칠 색깔이 엷게 내비치는' 흰색으로, 초록색으로, 황갈색으로, 시에나토색으로, 적자색으로, 베이지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폴 폴콘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다시 칠해졌음에도, 새로운 빛깔을 입었음에도 그의 집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색조와 농담이 어떻든 간에, 몇 차례는 이전의 칠이 마르기가 무섭게 새로 칠했건만, 그 집은 변두리 도로가, 두 동의 아파트 건물 사이에 낀 누옥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삶이 웃어주지 않는, 붓질로는 바귈 수 없는 딱한 사내인 채였다.

-파스 브뤼크네르, '아이를 지우는화학자'. 김남주 번역.






밤새 들리는 독백. 얼음처럼 찍히는 방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이상한 접속으로 너덜대는 단어. 시선.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옥죄였는지 그 남자가 얼마나 자신을 거들떠보았는지 그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는지 살과 뼈, 피와 고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새롭지도 놀랍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말들을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일치하지 않는 인과. 자리에 남은 회한. 써먹을 데도 없는 추억 따위. 넘치는 독백. 몇십 년 후면 썩어 문드러질 거면서 영원히 청년인 체하는 늙음. 그저 말하고 싶었다. 말 걸지 말랬다. 라고. 




그러니까 내게. 그 강렬한 적의가 물러난 다음 찾아오는 무관심의 세계가 조용하고 즐거웠다. 새벽녘 산책길처럼.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조용히 나무처럼 걷다가(이기호), 그 행위를 하다가(아니 에르노),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게 되었다(카라바지오의 회화). 그리하여 마침내 믿는 자가 되라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그러나 아직도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를 듣는 시기. 귀가 아직 어둡고 눈은 이제 마지막 맑음을 발악하는 시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른 이들 사이 앉아 생각했더랬다.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성행위를 한 결과가 이 거리에 이렇게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이룩한 거짓말이 서고에 넘친다니. 이렇게나 많은 족저근막염이 무대에 올려졌다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고 사강의 시간은 덧없었다. 그 사람은 지금도 '믿을 것은 오로지 예술'이라든지 '참된 것은 오직 진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날과 그 날의 양식. 그 날과 그 날의 입막음과 귀막음을 어쩔 수 없이 체득하여 태어나고 더럽히고 소모된 다음 삶에서 삶을 창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휴식.




지리멸렬함 사이에서 낚아올린 한 척의 대형 컨테이너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속되게 표현해선 안 될 것이었다. 책을 쓰신 분과 엮으신 분께서 연락이 온 것은 어느 여름날. 아니, 이 책을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표현해서도 안 될 일이다. 수많은 도리질과 끄덕임 끝에 찾아온 침묵. 말로 말을 표현하려는 덧없음을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덧붙이는 말은 눈물에도 땀에도 피에도 얼룩지지 못 할 거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저기요.......'라고 슬며시 옆에 앉고 싶은 마음. 당장 내일 떠나서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 하여도 이 방백의 머리가 구차해지지 않을 솔직힌 에세이. 답장하지 않아도 '왜 연락이 없어요?' 라고 묻지 않을 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지냈지요?'라는 미소를 보내는 글. 







이 글 엮음을 읽다가 몇 번이나 잊었던 정원을 만났다. 겹겹이 꽃잎을 포갠 수베니어 드 바덴바덴. 농염한 붉음의 건강한 녹아웃. 테두리 핑크의 니콜. 카르멘 머리카락에 꽂아도 좋을듯한 적색의 마리안델. 이 모든 것이 장미였으되 이렇게도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니. 라고 언젠가 장미정원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말해 달라고, 나를 번역해 달라고 하는 수많은 외침 속에서 저자가 뽑아낸 말과 글과 음악과 그림. 나는 이 프랑스식 서재에 있는 동안 내도록 그 사람이 만든 차단의 세계 속에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만든 세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문학과 산문을 번역한 저자의 느낀 점, 뒷이야기, 생각, 작품에 관한 감상이 이 한 권의 책에 스몄다. 구름에 달이 가듯, 파니 핑크가 바라보았던 그 달이 슬며시 웃는 듯 보일 때도 있고 구름이 아예 오르페오의 얼굴을 가릴 때도 있다. 거미줄 같은 미궁에 갇혔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를 일컬어 저자는 '내 위에 있었던 텍스트'라고 말한다. 거들먹거리지 않고 뻐기지 않는 솔직한 말. 옮기면서 힘들었던 순간, 뿌듯한 순간. 믿고 싶었던 순간과 결실을 얻어내게 되기까지의 긴 길. 각 작품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소중한 묶음. 책 뒷표지의 시는 마치 그 저녁의 바순 소리처럼 고요하고 오보에처럼 따뜻했다. 지나치게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모른 체 방관하지도 않는 소중한 텍스트. 저자의 글을 읽노라면 이렇게 텍스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진다. 너무 가까워 읽는 이를 장악하지도, 너무 멀어 그 거리가 아득해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 적당한 관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텍스트의 생명력 자체가 지닌 탄성의 굳은살이기도 했다. 적당히 오래 신은 신이 편안한 것은, 실은 신의 가죽이 나의 발 모양에 맞게 모양이 달라진 것이기도 하나 내 발이 그 가죽에 알맞게 굳은살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리와 자연의 일. 관성과 타성이 하는 일. 그걸 못 참아서 굳이 묻는 독자에게 저자는 누차 조용히 웃어 보인다.





이 조용한 웃음에는 그러나 번역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도, 번역은 모름지기 어때야 한다는 정언명령도 없다. 그것을 채운 것은 고요한 한숨, 밤새 하던 고민, 몇 년을 지속해온 습관 같은 눈빛이다. 작가의 말을, 옮긴 이의 말을 꼭 읽는 그 사람. 다 끊어버리고 밤새 걷던 그 사람. 그 남자의 눈빛을 말하던 그 사람. 그 여자의 손길을 말하던 그 사람. 피와 뼈와 살과 땀으로 이루어진 냄새나는 존재의 그 사람에게 조용히 하는 저자의 말.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백석을, 박두진을, 이문구를 김우창을 읽었다. -책속에서, 여는 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오후 네 시, 로베르 인명사전,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모든 여자는 러시아 시인을 사랑한다, 페스트, 추락,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면의 생, 솔로몬 왕의 고뇌,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 녹턴, 나를 보내지 마, 창조자 피카소, 달리,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저자의 눈과 손과 머릿속을 거쳐 사람들이 만나볼 수 있는 작품. 

다른 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불가사의한 길이 얼마나 거미줄처럼 촘촘한지, 그 세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이면서도 어지간해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확인한 다음 눈에 보이는 세계. 자신 너머 있는 어떤 세계. 무지개 너머의 무엇을 쫓는 저자의 발자취를 되짚다 보면 비단 그것이 문학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산문과 운문을 별개로, 회화와 음악을 외따로 떨어뜨리지 않고 함께 즐기는 사람이 드문 세상, 책장을 넘기다 만난 음악의 음성이 반가워 책장을 조금 더 천천히 넘겼던 이가 있었을까? 나 말고도 있었겠지? 그 사람도 그랬겠지?








 



음악에 관해 쓰인 글 중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어떤 전기 속에서 미셸 슈나이더는 "음악은 떼어놓는다. '음악의 편린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면 나는 기이한 방식으로 나 자신과의 접촉을 끊는다.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로부터, 하나의 대화로부터 나를 떼어낸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음악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떼어내지 말아야 한다. 청중도, 악보도(굴드는 악보를 갖고 연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악기도, 심지어는 마지막 차례물인 음 마저도." 라고 쓰고 있다.(Gallimard, 1998, 1994) 음악이나 연주에 대한 기준이나 기호에는 자의성이 개입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해도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근거가 대책 없이 심정적인 기울어짐 앞에서 빛을 잃고 마는 데 바로 음악듣기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연주회가 끝난 직후에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청중들에게 흩뿌려진 내 몸의 조각들이 돌아와 다시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다시 합체된 나는 서글픈 시 속을, 태평양보다 더 강한 한 줄기 물살 속을 떠돈다. 청중이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 물살에 쓸려가고 말리라. (...) 연주회 대 나는 청중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미소를, 들어 올린 손에 눈길을 준다. 내게 몹시 친숙하고 필요한 존재가 된 그 낯선 이들 각각에게 나는 음악이 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런 순간 객석과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책속에서.








 






따옴표 안의 엘렌 그리모의 말. 저자가 전하는 전언. 이런 것을 보면 악보와 텍스트, 화폭을 통해 구현하는 진정성의 맥락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손끝으로 어루만졌던 플라스틱 조각이든, 숨결이 닿았던 책장이든,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청자로서 이 구성 앞에서 조용히 앉은 하나의 사물이 되는 기분이다.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나름의 우위에 둔 작가, 좋아하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팬덤은 하나의 울타리를 형성한다 했던가. '꺅! 우리 오빠 멋있죠!!!'라고 느낌표 세 개 정도를 찍은 말꼬리의 여고생이 아니더라도 이 반가운 마음을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까.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든 속된 것이든 호오의 감정과 냉철하게 무언가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함께 할때 저자의 눈에서 시작해 손끝에서 끝난 결과로서 책이 내 앞에 놓였다. 






독자란 무엇인가? 그들이 누구이길래 평을 내리고 좋네 마네 옳네 그르네 말을 세상에 침 튀기며 이야기하는 걸까? 내가 읽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연히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저자의 글 엮음에는 사람에 따라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의 범주가 다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의 필모그라피가 있고 우리는 제각각 다른 독자이니까. 그 다양함 속에서 엘리자베스 던켈의 작품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보기엔 훨씬 좋은 책들이 왜 그렇게 형편없이 안 나가느냐고 푸녀하고 싶은 것일까? 일간지 전면 광고를 딱 한 번 치면 수천 부는 팔아야 손해 보지 않는다던데 출판 광고가 왜들 그렇게 커지는 거냐고, 텔레비전 광고를 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그나마 매절로 계약한 원고료를 밀리고 있고, 그 얘기에 관한 한 사장은 어째서 언제나 부재중이냐고, 양과 질 양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단행본 출판사에서 질 위주로 펴내는 책의 인세는 왜 책으로 대신해야 하는 거냐고, 박봉의 강사에게서 그 책을 공짜로 받아든 학생들이 왜 화가 나야 하는 거냐고, 문화로서의 책은 어디 가고 상품만 범람하고 있느냐는 얘기를 지루하고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아니,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그 모두가 어느 정도 우리들 독자 책임이라는걸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직무 유기를 해온 것이 아니냐고. 그 때문에 나는 험담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책 속에서







잠시 떠나는 청명한 휴가. 책장을 넘기다 걸음을 쉬게 해주는 책의 살결이 들어간 미농지. 호흡을 조절하며 무심히 던진 듯하지만 의미 있는 한 문장씩, 던져진 말. 저자의 서재를 직접 찍은 사진 몇 장을 지나고 나면 만나게 되는 저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시 한 자락까지.





여름. 못미더운 휴가의 계절. 매미가 울고 햇빛이 뜨겁고 바람이 무더운 생명과 생식과 탄식과 죽음의 시각. 하지만 이건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일 년 사시사철 그럴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 너머 숨쉬는 책장. 그 살결을 누가 어루만져줄세라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방백과 묵독을 번갈아 할 사람들. '나의 프랑스식 서재' 초대장은 늘 그 사람 곁에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든 환영한다는 작은 꼬리표를 달고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3-07-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멸렬함 사이에서 낚아올린 한 척의 대형 컨테이너선'이라고 하신 뜻을 저도 알것 같아요. 그렇게 속되게 표현하면 안될것 같다고 하시는 뜻도 ^^
엘렌 그리모는 글도 참 잘 쓰는군요.

Jeanne_Hebuterne 2013-07-29 17:24   좋아요 0 | URL
hnine님 :)


이 책 참 좋지요? 오랜 시간을 한가지 일에 바친 저자의 때로는 외로운 마음, 때로는 아련한 마음, 때로는 벅찬 심정, 소중한 순간이 작품별로 깔끔하게 펼쳐졌었지요.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지도 않고 부러 멋만 부리지도 않는 분위기까지.


사람들은 종종 '옮기는 것'에의 비중을 폄하하거나 '뜻만 통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도 하지만, 해본 사람은 알겠지요. 그것이 어떤 일인지. 참 좋았어요, 이 책이.

 

 

 

벚꽃은 이미 사라졌다. 바닷물은 뜨거웠다. 낙엽은 없어졌다. 눈은 녹았다.
늘 쉼표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일렀다.

 

 


조용조용.
두런두런.
시끌시끌.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끼워 넣고 애써 모른 척 하늘하늘한 비싼 스카프를 가방 손잡이에 조심스레 동여맸다. 누가 알아볼세라. 누가 못 알아볼세라.
정작 오른쪽 첫째, 둘째 셋째 손가락 끝 손톱이 땅   파다 나온 두더지 마냥 새까맸다.
냉동 블루베리를 먹을 때엔 젓가락으로 집어먹든지 해야 했었다.
 
 
 릭샤를 타고 싶었는지. 루프트한자 777기를 타고 싶었는지. 보잉 747을 타고 싶었는지. A380을 타고 싶었는지. 하다못해 컨베이어 벨트에 내가 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더위.

 


 나는 그 시간을 까마득히 잊었다. 꽃의 피렌체, 물의 베니스, 바람의 샌프란시스코, 마천루의 뉴욕, 얼마간의 화폐와 구겨넣은 몸.
비행기에서 창문이 깨어지면 어떨까? 공항에서 길을 잃으면?
여행자 보험 하나 들라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죽어 엄마에게 보험금을 타는 행운은 너무 큰 것 같애'라고 말하며 보험 하나 안 들었을 때, 나는 꼭 그렇게 다른 이의 마음을 후려치고야 만다. 나는 늘 개구리가 아닌 전갈이었다. 전갈 속이라고 편했을까마는.
 

 

 


 떠나지 못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공포영화를 골라봤다. 스릴러 소설과 추리 소설을 머리맡에 성경처럼 두었다. 자궁 속 태아처럼 웅크렸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에 나오는 사내가 떠올랐다.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며 쥐스키 쎄 뚜 파 비앙. 아직은 괜찮아. 라고 속삭였다고 주인공이 말하던 그 사내. 지금쯤 떨어졌을까? 부딪힐 때 후련했을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그게 나일 수도 있을까? 그게 왜 만만하게 나여야 했을까? 

 

 


 
공포. 추리. 스릴러.
헉!
하다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나는 아니야'라고 읊조리는 이 단순한 쾌락에 올여름 안착했다.
읽은 것도 없던 내가 아는 것이 더 없어졌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고 세상에 확실한 것 없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된다. 애쓰지 마라. 이것은 찰스 부코스키의 `DON'T TRY'와 만났다 헤어졌다. 이 글은 그러므로 그 만남과 헤어짐의 체념과 한숨, 원망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더위를 향한. 그러고 보면  날씨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어둑한 낯선 공간에서 펼쳐  든 첫번째 책은 '끝까지 연기하라'였다. Play to the end.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책속에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으나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되찾고 싶은 배우. 토비에게 그녀가 다시 연락한다. 수상한 남자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지금의 남편감에겐 말할 수 없고 정황상 토비의 팬이 분명하다는 이유가 있다면 결국, 그리하여, 그래서, 이혼한 거나 다름없는 전남편에게 연락하게 된 것은 허름한 결말의 시작이다.

 

 

 

 원인과 결과가 종종 1;1로 대응하지 않는 희끄무레한 현실에서 기연가미연가 갈팡질팡해오다가 인과의 사슬을 쫓는 세계의 문을 열다니, 책장이 휙휙 넘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전개가 빠르다. 생각할 시간 없이 독자를 몰아치는 속도감은 존 그리샴 원작의 각색 야망의 함정(the firm)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표정이 변한다. 전처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 데릭은 처음과 중간, 뒤가 다른 인물이었다. 유명하지만 잡지표지를 장식할 정도는 아닌 토비의 팬이라고 하였다가(처음)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당일 공연을 취소하고 자신을 만나라는 편지를 보냈다가(중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쑥 나타난다(끝).

 

 


 이 사이 토비가 하는 일은 연기가 아닌 연기였다. 맡은 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배역을 미루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시트콤의 작법이 아니던가? 인물을 설정한다. 상황에 밀어 넣는다. 급류에 휘말리듯 인물은 그 속에서 길을 잃는데, 그 그림자가 피노키오의 코 만큼 길어지면 상황 끝. 이 아스라한 아지랑이가 다 뭘까? 상황은 논리적이고 인과는 충실하다. 그런데 주인공 토비만이 길을 잃었다. 헤밍웨이가 고쳐 써도 구제할 수 없고 코넌 도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듯하다.

 

 

 

 마지막장을 덮고, 로밍조차 필요없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다 깨닫는다. 그에게는 동기가 없었다. 휘말려들었으니 발버둥 쳐야 하건만 어느 커다란 그림자로부터 발버둥 치는 데릭이 훨씬 더 파닥거렸다. 아내를 사랑하는 로저가 당기는 방아쇠가 훨씬 의연했다. 저절로 발이 달린 듯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어느 기업의 그림자가 더 짙었다. 오로지 사건의 소용돌이에 어쩌다 들어온 토비만, 뭘 연기하는지 모를 연기를 하려 애쓰고 있었다. 독자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왜? 하는 물음에서 나온다면 이미 모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넘긴 다음 '그래서?'라는 의문이 답을 들은 후에도 남는다면 못내 아쉽다. 틀과 고형물이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으나 손에 담긴 형체가 녹아버렸다.

 

 

 

 

 

닉은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진짜 내가 아니었다. 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다. -책속에서

 

 

 

 

그러다 만난 정반대의 여자가 에이미였다. 어메이징 에이미. 완벽한 결혼생활을 일평생 지속하여 한 마리 자웅동체 플라나리아처럼 보이는 부모 아래 자란 실패라고는 모르는 사람. 그런 에이미가 농담 잘하고 잘생긴 뉴욕 신문기자 닉을 만났다. 작가는 그녀를 똑똑하고 섹시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스포츠와 포커, 음담패설을 즐기고, 게임을 좋아하고, 핫도그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44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분통을 터뜨리자)의 틀에 넣는 것에 비해 남자에 관한 묘사는 좀 의뭉스럽다. 에이미는 형용사와 부사로 존재하고 닉은 동사로 존재한다. 그러나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를 빼고 남는 것이야말로 '진짜'이곤 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닉을 지질하고 멍청하고 의뭉스러운데다 바람피우고 그걸 들키기까지 하는 등신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동사의 무덤을 지나고 나면 몇 년에 걸쳐 일기를 쓰고 관계의 중심에 도달하고 살을 빼거나 찌우고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생각대로 입히는 에이미가 만든 형용사와 부사의 하늘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이 자의로 맺는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가 사랑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쯤에서 프랑수아즈 사랑의 웃음이 떠오른다. "사랑이라고! 천만에,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열정이다. "

 

 

 

 과연 그녀가 진짜였을까? 과연 그가 진짜였을까?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복잡하게 좋은 사람으로, 상대를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네 편과 내 편. 지리멸렬함과 멋있음. 이 편 가르기가 얼마나 유치하며 우스운 것인지를 작가는 교묘한 미소로 비꼰다. 세상에는 좋으면서도 나쁜 것이 있다. 사랑의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선택하는지와 같은 문제다. 위스키. 와인. 럼. 보드카. 마가리타. 롱티. 하다못해 대마초와 하시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구한다. 어메이징 에이미가 그랬듯이, 닉이 그랬듯이. 이 둘의 결혼생활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주저없이 예측한다. 이만한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긴장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열정의 한 종류가 아니던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싼 심리소설.

 

 

 

 그 모든 것이 거짓과 진실의 연쇄 속에서, 먹고 먹히는 생태계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는 언젠가 에이미의 부모처럼 플라나리아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만 그 플라나리아가 되면, 결핍을 모를까? 대상은 종종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을 결핍의 눈길로 바라보는 나였을 것이다. 다이어트 하는 여자가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음식만 생각하듯 담배 끊은 사람이 꿈에서도 담배를 피우듯 문제는 결핍이었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본문에서

 

 

 

 


 어느날 여자를 잃은 남자가 여자를 찾아나선다. 결핍은 그러나 남자의 것이 아닌 사라진 여자의 것이었다. 흔적없이 약혼녀가 사라졌고 마침 먼 친척, 휴직 중인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이야기는 변영주 감독의 영화로도 모습을 보였다. 홀로 뒤늦게 읽는 이 소설은 적절한 일상과 적절한 사건을 먹구름처럼 몰고 온다. 돈을 갚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빚쟁이. 자신의 소비도 아니면서 빚으로 태어나는 구덩이 속에 던져진 사람들.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의 카드, 담보대출, 사채, 개인파산에 관해 면밀히 조사한 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는 그녀의 힘은 섬세한 묘사, 지금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회 인식, 그 안에 안간힘을 쓰는 살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서 나온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고 결핍은 더 큰 결핍을 낳는다. 쇼코가 사람을 죽이고 신분을 위장하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된 취향, 위태로운 소비습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다 나였어'라고 인정하기조차 힘든 허물. 숨만 쉬어도 불어나는 나락. 그것은 쇼코에게 필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것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는 누구도 선하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하지 않다. 중심은 강력하고 모습을 단 한 번 드러내는 여자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힘을 발산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혼마의 시선을 따라갈수록 그녀가 더 잘 보인다. 추리소설의 기본, 동기. 인물을 인물이게 하는 토대, 성격. 동기와 토대는 치밀한 현장조사를 토대로 독자를 압도한다. 차가운 장르 속 따뜻한 손길. 

 

 

 

 

 

여기가 어디였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잠시 잊게 해주는 소설 세 권을 덮자, 갑자기. 

 

 


옆자리 앉은 여자가 말을 걸었다. '손톱이 새까맣네요?'
그녀의 입술엔 관리하지 않아 일어난 각질이 너덜거렸다. 목엔 어울리지 않는 고급 크리스탈 목걸이 펜던트가 반짝, 했다. 무어라고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고 씁슬한 웃음이 마음에 스몄다. 나는 쇼코도, 에이미도, 토비도 아니었구나. 나의 스카프와 저 여자의 입술 각질은, 나의 손톱과 저 여자의 펜던트는 무슨 대화를 나눌까. 현실을 잊게 하는 허상, 현실로 다시 등을 떠미는 허상. 질문과 대답. 분명한 관계. 부표처럼 떠오르는 증거는 이 더위 속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묵직함은 질량이 아닌 무게일 때 그 정도가 더해진다. 저 홀로 존재할 때가 아닌, 중력가속도가 더해진 관계의 틀 속에 있을 때 묵직해지는 실체가 이 소설 세 권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뜬금-다음에 어딘가 이동하고 싶을 때에는 음악 파일에 귀를 적셔야겠다. 아직 가야 할 더위와 지쳐선 안 될 일상이 수두룩하다. 물론, 추리와 스릴러의 세계였다면 언제 갑자기 끝날지 모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순간. 

혹은 '여름을 보내고 나는 우네. 가엾은 내 계절이 사라졌네.' 라고 읊조리는 남자. 열정과 열망 사이 엉거주춤하고 자리 잡은 남자. 평범해서 보편적인 이야기. 오백일의 썸머는 모든 케케묵은 해묵은 악감정을 싱싱한 횟감 건지듯 끌어올리는 영화였다.





 나는 여기서 연애 끝에는 결국 bitch(이 단어는 아예 영화 도입부 나레이션 첫머리에 나온다)가 되는 여자에 관한 이미지라든지 너무 소심한 남자의 표정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안과 밖에서 이야기해서 이미 내가 숟가락을 얹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대신 나는 익숙한 그 집 앞을, 자기연민을, 반성을 생각하고 싶다. 마음이 가난하고 입술이 못생겨 빈집에 사랑을 가두었음을 깨닫는 사람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생각을. 





 그 모든 보편성과 그 모든 특별함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만이 아름답다는 환상, 자신의 사랑은 더없이 빛난다는 착각. 자신은 누구보다도 고운 결을 가졌다는 난데없는 횡포. 이것이 모여 사랑을 만든다면, 진짜 그것은 어디 있을까.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였다. 이것은 폄하나 곡해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뮤지컬 기법, 쇼트 뒤섞기, 그래픽 사용, 음악을 제3의 화자로 빌려 오기 등. 사랑에 들떠(열정) 춤을 추며 거리를 걷는 톰을 보았는데 그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되어 발을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분명 거울 속엔 액션 스타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좀 더 보면 레지나 스펙터의 <히어로>가 나온다. 노래 가사를 적당한 순간에 잘라 대사로 활용하는 기법이야 워낙 많은 영화에 나왔으니 새로울 것도 없으며 뮤지컬은 아예 바즈 루어만의 특기가 아니던가. 사랑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내러티브가 개성 없음이 개성인 평범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주목할 만한 연기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아우라가 강하지 않아 상대 배역의 틀을 구속하지 않고(이를테면 키아누 리브스가 이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백지와도 같아  무엇이든 그 얼굴 표정 위에 쓸 수 있는 배우. 마크 웹 감독은 주이 디샤넬, 조셉 고든 레빗을 투 톱으로 내세우면서 '과연 감독이 원하는 바를 반영할 수 있는 배우란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하는가?'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헐리우드가 지난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찾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지난 시대에서 살아남은 어떤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대조가 더욱 극명하다. '레전드', '아웃사이더'와 같은 청춘물을 찍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청춘스타였으나 지금 유일하게 살아남은 톰 크루즈를 보면 그렇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맷 딜런에 기세가 눌렸으나 지금 누가 그들을 주목한단 말인가? 그 극명한 개성이 그를 살렸으나 지금의 조셉 고든 레빗은 완벽히 다른 예를 보여준다. 크리스 파인, 라이언 고슬링, 채닝 테이텀과 같이 개성 또렷한 배우를 뒤로하고 배트맨, 인셉션, 링컨 등의 필모그라피를 기록하는 조셉 고든 레빗을 바라보면, 아마도 그가 다음 세대의 더스틴 호프먼 같이 변화무쌍한 표정을 선보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이 지루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톰이 썸머를 바라볼 때엔 스미스의 노래가 흐른다. 내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혹은 우리가 어떤 관계냐, 라고 물을 때엔 카롤라 브루니의 'someone told me'가 흐른다. 내러티브의 순차적 구성이라면 클리셰가 되었을 많은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리듬감을 지닌다. 착각과 현실, 꿈과 이상, 시작과 끝. 그 대조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두 사람 각자가 서로가 얼마나 다른가를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작업일 뿐이다. 이 영화가 67회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에 올랐다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마크 웹이 장르의 차용, 사운드트랙의 활용, 장면의 편집과 재배치, 고전 영화 패러디, 화면 분할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테크놀러지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더더군다나 모두나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야기해 더는 새롭기 어려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시작이 어둡다. 급박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분홍빛이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리라 기대하는 순간 시작을 여는 시퀀스는 사랑의 위기. 팬케이크를 먹다가 '우리 이제 그만 보자.'라고 말하는 썸머의 얼굴이 보인다. '네 이야기가 아니야. 이 못돼먹은 엑스' 라는 내용의 자막이 깔릴 때부터 알아보았건만 익숙한 그 공식은 뒤틀린 채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야 사랑의 시작-위기-갈등 해소-행복한 결말이 아니던가. 그 익숙함을 깨뜨릴 때 우리는 건축을 바라보는 듯한 재미까지 느낀다. 극 중 톰이 건축에 관심을 두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썸머의 팔등에 그릴 때 풍겨오던 달달함이 잿빛 도시로 사그라지고, 여름 다음 가을이 올 때 그것을 맞이하는 그가 미소 짓게 되는 것은 마침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시간의 틈이 손끝에 만져져서이지, 그 우연성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 앞으로 올 어떤 일이었다. 





  그 앞으로 올 일. 복사기 앞에서의 키스, 회식 자리에서의 노래, 서로의 취향을 바라보기, 영화 함께 보기, 썸머의 집에 가서 그녀가 매일 보는 벽과 천장을 보는 일. 

 

 

 이미 지나간 것. 영화 '졸업'을 보고 우는 그녀에게 거절할 만한 제안만 골라서 하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스미스 노래를 틀어주고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기, 자신만의 관심을 그녀에게 투사하기.






 운명과 판타지를 착각하는 일이었으니, 그 모든 실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모든 이미지와 유사성을 지닌 어떤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영화의 시작부터 감독이 원했던 것이 분명해진다. 삐걱대는 문과 덜컹대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살인을 암시하듯 이케아 매장을 구경하는 톰과 썸머의 모습, 복사기 앞에서 우스꽝스런 노래를 부르는 썸머와 그것을 들으며 킥킥대는 톰의 모습 등은 분명 행복한 연인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 뼈대이자 동시에 뒤트는 디스크의 통증과도 같은 조각 모음이다. 장르 영화의 공식, 관습, 도상.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관습, 도상. 즉, 톰과 썸머의 공식, 관습, 도상. 이 세 가지가 500일의 썸머를 겪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처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즉 그 과정을 겪는 한 사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그 감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고백과 토로가 있었다. 그것을 아우르는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오백일의 시간이었다. 연애란 어차피 사람이 맺는 가장 강렬한 대인관계의 일종이다. 아마 복사기 앞에서 키스한 다음 톰의 몸속에서는 도파민, 노레피네프린, 세로토닌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이케아에서 썸머와 함께 가구를 구경할 때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었을 것이다. 온갖 호르몬의 폭발을 겪으며 생각하고, 꿈꾸고, 착각한다.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때가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톰이 썸머를 몰랐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몰랐음에도 마지막까지 몰랐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 줄리언 반즈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왔던 말, '너 끝까지 감을 못잡는구나. 아예 그냥 그렇게 살지그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지는 찰나, 뒤따르는 고백이 있었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목소리.






 관계 대부분은 다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결정이 남지 않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야말로 일생의 로맨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톰의 목소리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흐름에서다. 오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타인이 남지만, 이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자기 자신이 남는다. 










 환상과 착각, 오해와 등 돌림. 생각과 분석, 돌이킴과 목마름. 사랑했던 그 이유로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마침내는 무관심하게 된 다음 어여삐 어루만지게 되는 대상. 기억의 윤색과 보정을 거치면, 사람 마음속에서는 모든 관계가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터널이나 동굴을 통과할 때 뒤돌아보는 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자의 귓가엔 아마 다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어떤 한 시기가 끝나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라는 것은 마침내는 돌아보지 않을 때일 것이다. 모든 것에의 이유가 결국,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누군가를 위한 속이 빈 인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한 다음 스스로 건네는 악수 같은 것이 가능한 순간. 종종 사람은 문을 잘 닫기 위해 문을 열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여태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불안. 고드름. 맨발. 유령. 굴뚝. 꽁꽁.

 행복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때 제목을 통해 시인이 완성한 본문.

 저 시를 읽으면 펄펄 내리는 눈이 떠오른다. 뽀드득, 눈을 밟으면 펑펑 내리지 않고 펄펄 서럽게 내리는 눈 위로 어떤 흡혈귀 소녀의 피가 떨어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일컬은 '피와 눈물의 연금술'. 

 세상 모든 열두 살이 따스하거나 연민이 따스함의 외피를 쓴 것은 아니다.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열두 살 소년 오스카와 열두 살 그 언저리 즈음 되었다고 말하는 흡혈귀 이엘리의 이야기다. 영화 전에 스웨덴 원작 소설 렛 미 인이 있었다. 영화 후에 미국 버전 렛 미 인도 있었고 그 뒷이야기도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른다. 모리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많은 세상의 렛 미 인을 떠올려 본다.






 

LET THE RIGHT ONE SLIP IN-MORRISEY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Let the wrong ones go 
They cannot 
They cannot 
They cannot do what you want them to do
Oh ...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들어가도 되니?






 소설 속 이엘리와 소설 밖 이엘리가 물어볼 때.

 글씨가 그것을 읽는 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영상이 그것을 보는 내 눈 밖에서 스프레이처럼 퍼져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씨네 21의 이화정 기자가 쓴 스페셜 기사를 보면 촬영감독은 스프레이 라이트로 이 촉촉한 아날로그를 만들어 냈다 전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풍경은 순간과 영원, 동화와 호러, 혈관 속 피가 흐르는 아이와 피를 마시는 아이 사이 내리는 하얀 눈으로 남아 그곳을 지켰다.












 먹기 위해 죽여야 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는 존재. 여기에 숭고미를 덧입힐 수도, 로맨티시즘을 깔아줄 수도, 호러를 장착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 이미지가 찰나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꽤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 아벨 페라라의 영화, 박찬욱의 박쥐, 앤 라이스의 연작 등, 이 계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이만큼 부옇게 슬프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가장 간단히 답해야 하는 경우의 난처한 표정. 추운 것을 잊어버린 아이와 하얀 입김을 더 하얀 눈 속에 내뿜는 아이의 이야기.





 용기 대신 연민, 동정 대신 동조.






 어떤 엇갈림은 설명을 생략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래서'와 같은 부사를 뺀다. 형용사와 부사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명사와 동사다. 영화의 강점이 그 간결한 압축과 보여주기에 있다면 소설의 강점은 서사를 덮는 깊이의 공간이다. 영화와 소설이 이렇게 만날 때, 종종 글씨와 영상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 고민하는 때도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관한 경우가 '렛 미 인'일 것이다. 같은 나무가 설원에 서 있는데, 그 나뭇가지 끝 맺힌 눈송이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 영화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것을 둘러싼 촉촉한 어둠, 쏟아지는 피에 따라 달라진다. 소설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 아래 먼저 기다리고 있던 쏟아지는 눈빛에 따라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장르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영화를 살펴보자면 이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장르에 취미를 지닌 감독도 아니며 현란한 그래픽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는 듯 하다. 대신 에로티시즘과 장르적 습성을 제거하고 이야기의 핵심인 두 아이를 그저 바라볼 뿐.

 피를 마시지 못해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상한 냄새가 나도 오스카를 앞에 두고 침만 꼴깍 삼키고 스스로를 노려보는 이엘리. '내가 만약 초대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다가도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오스카. 이 두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눈송이가 허공에서 잠시 엇갈리는 것 같다. 







 또렷하게 손끝에 앉았던 눈송이가 몇 년도 지난 지금, 유월의 끝자락에 녹는다. 고드름처럼 자라던 불안은 이제 싹을 틔웠나. 살아있는 아이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아이의 영원은 만나서 '가벼운 키스'라는 모르스부호를 똑똑, 보냈는데 어떤 이의 터널과 어떤 이의 영원은 어떤 생채기를 남겼을까. 삼 초 만에 녹든, 삼 년 만에 녹든,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일 뿐. 영화 올드 보이에서 나온 말과 같이, 모래알이든 돌덩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엘리의 맨발이 밟던 눈송이. 오스카의 언 손이 만지던 루빅 큐브. 

 한 존재의 위장을 채울 피, 한 존재의 혈관을 채울 피.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Oskar: Who are you?

Eli: I'm like you.

Oskar: What do you mean?

Eli: What are you staring at? Well?

Eli: Are you looking at me?

Eli: So scream! Squeal!

Eli: Those were the first words I heard you say.

Oskar: I don't kill people.

Eli: No, but you'd like to. If you could... To get revenge. Right?

Oskar: Yes.

Eli: Oskar, I do it because I have to.

Eli: Be me, for a while.

[pause]

Eli: Please Oskar... Be me, for a little while.






 상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도 너와 같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건 어떤 걸까. 말해주어야 안다는 건, 하루키가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를 통해 들려주었듯이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물안개 같은 빛. 쏟아지는 어둠. 내리는 눈조차 소리를 삼가고 그 동세만 남길 것 같은 눈부신 어둠. 영하 삼십도, 낮은 불과 다섯 시간. 오스카가 지르는 비명은 이상할 만치 괴괴하게 퍼졌다. 세상에 없을 듯한 일과 한계 서로 부딪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색상에 덧입히는 작가와 감독의 무채색이 선명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13-06-24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은 왜 갑자기 렛미인을 다시(?) 보았을까요?

여태천의 크리스마스 - 그 서늘함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고,
제가 좋아하는 님 식 단상 이를테면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뭐, 이런 걸 발견할 때 어쩔 수 없이 전 님이 부럽습니다. ^^*

Jeanne_Hebuterne 2013-06-25 12:27   좋아요 0 | URL



닿아도 다다를 수 없는 관계, 불러도 온전히 부를 수 없는 관계, 한 쪽이 그렇다고 말해도 한쪽이 답할 수 없는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이 작품이 떠올랐어요. 소설과 영화, 양쪽 모두 제가 꽤 흥미롭게 감상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몇 년 전 책 출간 당시 리뷰를 썼는데 지금은 없는 그 리뷰와 제가 지금 다시 응축시키려 노력한 감상이 어떻게 다르게 나올지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무리 춥고 서늘하다 해도 저 두 아이가 내뿜는 하이얀 입김과 눈을 따르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시를 잘 읽지 못했는데 요즘 추천을 받아 읽고 있어요. 잘못 읽거나 옮기지 않았는지 조바심이 나는데, 팜므 느와르 님의 섬세한 감성이 부럽기만 합니다. 제가 은근히 무뚝뚝하고 직선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요. 그 와중에 팜므 느와르 님께서 예쁘게 봐주시는 저런 생각이 비집고 나오는 것은, 이 작품이 워낙 훌륭해서겠지요!


여행 잘 다녀오셨으니 이제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주셔야지요? 그곳의 건조함과 이곳의 습기를 열네 시간 비행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잘 섞어 풀어주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

 

 


<Lufthansa, Boeing 747-400. D-ABVX 1:500 SCALE>

 


 짐을 잘 꾸릴 것 깨어질 수 있는 물건은 굳게 다물고 열 몇 시간 동안은 모두와 끊어진다는 안도감을 넣을 것 10킬로그램짜리 핸드 캐리는 그것으로 끝. 짐을 잘 풀 것 낯선 호텔 낯익은 언제나 똑같은 침대 속 지문은 피부에 내 피부는 ICN에서 AMS까지 혹은 LHR, WAW. 프리데릭 쇼팽 공항에 닿았을 때에는 건조하고 기온 낮은 여름밤 길을 잃고 걸었던 밤 길을 찾은 한낮 23킬로그램짜리 위탁 수하물은 이것으로 끝. 바디스캔 입국심사 출국심사 낯선 외국어 그러다 보면 속삭이는 동체. 


 


 중력에 매달린 상상은 육중한 동체가 랜딩 기어를 올릴 때 살짝 따뜻해졌다. 건조하고 추운 밤에는 비행기 창을 들어올려도 감감무소식.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엔진 소리 항공성 치매 콕핏 턴오버 퀵턴 비상구 그러나 지금의 비상구 앞좌석의 다행 발에는 보드라운 슬리퍼 소리를 막는 귀마개 기억력을 되살리는 외교통상부 문자 런웨이의 불빛 쓸 일 없기를 바라는 슬라이딩 보드 그리고 먼 곳의 공기. 달의 언저리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긴 시간.


 


 공기 속 여행의 실제는 사라짐이 아니라 돌아옴이었다.




 34인치의 피치 안에 도사린 여행, 들뜨거나 가라앉은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때 내가 디뎠던 발밑의 내가 걸었던 구름 온도는 꽤 차갑거나 뜨거웠다. 사뿐히 들어 올리던 생각과 차분히 놓아두던 마음의 위치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반짝, 불빛을 보여주며 어두운 밤을 오르던 그 공간에 있었다.




 잠시 이 육중하고 건조하고 오래된 미래의 공간을 그린 책을 들여다본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펼쳐보면 런던 히드로 공항의 풍경과 비행기의 모습이 데생이 아닌 스케치 밑그림으로 펼쳐진다.




 




 터미널 옆의 관제실에는 위성들이 추적한, 영국항공의 모든 비행기들의 실시간 위치를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가 있다. 지구 전역에 약 180대의 비행기가 떠있으며, 이들은 약 10만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여남은 대는 북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고, 다섯 대는 허리케인을 에둘러 버뮤다 서쪽으로 가고 있고, 한 대는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항로를 타고 가는 것이 보인다. 이 지도는 가슴 뭉클한 불침번을 상징한다. 각 비행기가 고향의 비행장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 있다 해도, 아무리 속박에서 벗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런던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에서 결코 멀리 떠나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비행기 한대 한대가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매일 밤 비행기 몇 대가 게이트에서 거대한 격납고로 끌려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건널판과 크레인들이 일련의 수갑인 양 그 유기체처럼 생긴 몸을 둘러싼다. 항공기는 자신은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수줍어 하는 경향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나 홍콩에서부터 먼 여행을 하고서도 자신에게 허용된 비행시간인 9000 시간의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점검은 그들이 개별성을 드러낼 기회를 준다. 승객들에게는 747기가 모두 똑같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점검과정에서는 별도의 이름과 병력을 가진 하나의 기계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G-BNLH는 1990년부터 날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대서양 상공에서 유압장치가 세 번 샜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이어가 한 번 터졌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날개의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부품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 격납고에 들어온 이 비행기는 다른 병과 더불어 고장난 좌석 12 개, 벽 패널에 커다란 자주색 매니큐어 자국, 옆에 있는 세면대를 이용할 때마다 저절로 점화되는 뒤쪽 취사실의 고집 센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등 다른 증상도 있었다. 


 30명이 밤새도록 이 비행기를 붙들고 일을 한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비행기는 대개의 경우 매우 관대하지만, 밸브 같은아주 작은 것에 생긴 고장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그때까지의 경력 전체가 박살나고, 직경이 1 밀리미터도 안되는 혈전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느 비행기의 몸통을 둘러싼 건널판을 따라 비행기 외부를 구경하다가 코의 원뿔에 손을 대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층층이 쌓여 꼼짝도 않는 적운을 가르고 길을 내던 코였다. 






 세 자리 코드와 두 자리 기호도, 위도와 경도도 달라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을 무엇. 바닥에 가라앉았다가도 또다시 떠오르는 마음. 때로 그것은 크게 보이거나 작게 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작은 창문을 통해 구름과 바다와 하늘, 마을과 도시와 밤과 낮을 바라보고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 이동한다. 50톤의 747, 10킬로미터의 고도와 0.7기압 안에서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어 시간은 더해지거나 덜어진다. 이 덧셈과 뺄셈은 이전에는 오로지 새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쉬었다 갈 수 없는 고단함, 돌아가야 한다는 두고 온 가방.

 떠남과 돌아옴은 완성하거나 끝내기에는 버거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몸을 실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공항과 비행기 같은 것을.





 알랭 드 보통은 공항과 항공기를 여행의 설렘과 작업의 고단함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활로 바라본다. 공항 한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공항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는 이 책의 마지막을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매듭짓는다. 여행자가, 그리고 우리가 곧 모든 것을 잊을 것임을. 이국의 모든 것. 보딩 전까지 서는 긴 줄. 대륙을 몇 개 문장으로 줄이고 다시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곧 다시 새로움을, '지금' 눈앞에 없는 무언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덧붙인다. 우리의 삶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사이를 오가는 추와도 같다.




쉬운 것은 앞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에는 작은 사람들. 그 먹색을, 무지갯빛을, 장미향과 카레의 냄새를 만지기 위해 가끔 사람들은 열 몇 시간을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보낸 다음 다시 애써 닿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은 옛날 동전, 벼룩시장에서 산 레코드판, 약간 쌀쌀한 늦가을 목에 둘렀던 머플러. 그리고 그것을 둘러주었던 누군가 내쉬었던 반 박자 늦은 숨 같은 것을 찾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발밑의 중력이 사리지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떠올랐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잠시, 이 1:500 스케일의 정교한 수집가용 모델을 만져본다. 꼭 스르르 커진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다시 어디론가 가볍게 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내가 어느날 다시 무언가를 찾고 싶어 오백배 더 몸집을 부풀린 이 구조물에 몸을 싣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초여름 저녁. 돌아오거나 떠날 때, 내 손끝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대신 입술 끝에 조용히 닿아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선물해 주신 ㄱ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멀리서 전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reamout 2013-06-0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 7분여 동안 잠시 떠날 수 있었어요. 덕분에.

Jeanne_Hebuterne 2013-06-02 00:38   좋아요 0 | URL


dreamout 님께서 떠나셨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dreamout 님의 말씀에 생각하니 드뷔쉬의 음악과 항공기 안에서의 일들, 어디론가 잠시라도 떠나는 일은 밤에 생각하면 더 조용하고 넓게 머릿속에서 퍼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고단한 일상과 누군가의 설렘이 만나는데 그 범위가 우리에게 일상의 영역을 벗어난 경험을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이 저녁과 밤에 생각하니 더 떠나고 싶어지기도 해요. 당장 그러지 못할 때의 이러한 글과 음악이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반가워요.

덧-오랜만이에요, dreamout 님. 잘 지내셨지요? 곧 무덥고 습한 계절이 닥치면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보아야겠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책과 음악으로 적당히 잠시 떠났다 돌아오기도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