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민중사 - 백년전쟁에서 현재까지
제라르 누아리엘 지음, 권희선 옮김 / 인문결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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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양측 진영은 민중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도부 엘리트들은 그들의 무절제한 폭발력을 두려워했다. 또한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하더라도, 장점이라고는 학살에 동원할 수 있는 머릿수가 많다는 것뿐인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재산과 부를 나누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과격함과 폭력은 왕권강화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국왕만이 진영과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_ 제라르 누아리엘, <프랑스 민중사>, p107/906

제라르 누아리엘의 <프랑스 민중사>의 배경은 잔다르크가 활약한 백년전쟁 시기로부터 현재 마크롱 대통령까지 시기다. 독자들은 백년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집권화가 시작된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민중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지배층이 권력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음을 확인한다. 이후 귀족과의 대립 속에서 프랑스 민중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 왕권은 중앙집권화에 성공했지만, 희생과 착취로 만들어진 절대군주제가 민중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역사를 진행시켰음도 함께 보게 된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떴을 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임에 틀림없었으나 나라는 이미 활력을 잃었고, 국민들은 가난에 지쳐 있었다.여기에 역사가 주는 교훈이 있다. 국가의 강성이 바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이다. _ 제라르 누아리엘, <프랑스 민중사>, p105/906

근대 이후의 시기에 <프랑스 민중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진 절대왕정 체제가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평등‘보다 ‘자유‘의 가치가 강조되고, 이러한 기조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어떻게 민족주의 국가에서 부활하게 되었는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변화된 사회와 사회가치 속에서 프랑스 민중의 현실을 톺아본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유, 평등, 박애(또는 형제애)의 나라 프랑스가 아닌 극우주의자 르펜이 강력한 세력을 얻고 있는 현재 프랑스의 모습을 우리는 알게된다.

대혁명의 이상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와 버린 현실. 이를 통해 저자가 내린 결론 - 민중의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 에 대해서는 리뷰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극우주의의 대두는 사회전반에서 확인된다. 선거에서 가장 많은 민중 유권자가 선택한 것은 기권이었다. 이는 정치를 위한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의미한다. 민중의 선거 외면은 현대 정치가 안고 있는 위기를 보여주는 중대한 현상 중 하나다. 사회 문제가 시사 이슈의 중심이었을 때에는 소외계층이 ‘부자‘, ‘부르주아‘, ‘기업가‘를 공격했다. 지금은, 여전히 투표장에 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외국인‘, ‘ 이주민‘, ‘무슬림‘을 공격하는 주장에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현혹되어 있다. _ 제라르 누아리엘, <프랑스 민중사>, p84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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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맬서스의 분석으로부터 결혼과 가족구조의 다양한 특징들을 구축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맬서스가 당연시했던 특성들로, 그가 언급하지도 않았고 무시해버렸던 것들이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결론의 상태와 목적에 관한 일련의 가정들인데, 그 가정들은 18세기 초엽의 잉글랜드 성직자들에게는 자명하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엔 독특한 것이었다. 맬서스는 단본제(monogamy)를 가정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복제 (polygamy)가 실행되고 있었다. 그는 남편과 아내의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가정했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남성 지배적이었다. 그는 결혼 해체를 가정하지 않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이론은 쉽게 허락되었다. 잉글랜드는 재혼이 허용되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재혼은 금지되거나 강제적이었다. 대부분 나라에서 혼인 후 가구 형태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구가 아니라 ‘부거제 (virilocal)‘ 나 ‘모거제(uxorilocal)‘ 였다. 대부분 사회에서 결혼 자금은 신랑과 신부가 엇비슷하게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 혹은 신부 한쪽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지출하였다. 맬서스 이론의 기본 가정인 이러한 특징들은 맬서스와 동시대인 중국, 인도, 동유럽, 남미 사람들에게는 매우 극단적인 것이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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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떴을 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임에 틀림없었으나 나라는 이미 활력을 잃었고, 국민들은 가난에 지쳐 있었다. 여기에 역사가 주는 교훈이 있다. 국가의 강성이 반드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이다. (p84/718) - P84

콜베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일종의 중상주의 경제 개념, 콜베르주의(colbertisme)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베르주의는 성장보다는 오로지 통상에 무게를 둔 경제이론이었다. 한 국가의 힘은 국고에 비축된 금와 은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 이 이론의 결론은 국가가 소비량보다 생산량을 늘려야 하며 수입보다 수출을 늘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콜베르 경제 이론을 바탕으로 통상위원회가 창설되어 식민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p108/718)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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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화적 해결책이 나온데에는 끊임없는 싸움에 지친 탓이 컸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양측 진영은 민중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도부 엘리트들은 그들의 무절제한 폭발력을 두려워했다. 또한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하더라도, 장점이라고는 학살에 동원할 수 있는 머릿수가 많다는 것뿐인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재산과 부를 나누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과격함과 폭력은 왕권강화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국왕만이 진영과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p99/906)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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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군주를 향해 이렇게 주장하고자 한다. 앞서 인용한 이유로, 인민을 억제하기 위해 그런 요새를 설치하는 것은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요새를 지어놓으면 당신은 국민을 억압하는 것을 덜 망설이면서 더 적극적으로 억압에 나설것이다. 그런 억압은 국민들을 격앙케 하여 당신의 파멸을 바라게 만든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요새는 더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다.  - P382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읽으며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면, 로마인들과 로마 원로원이 활용한 모든 행동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제 중에서도 고려할 만한 사항은 로마 인들이 집정관, 독재관, 군대지휘관들을 전투 현장에 파견할 때 부여했던 권한에 관한 사항이다. 명백한 점은 그들에게 부여한 권력이 아주 대단했다는 것이다.  - P418

로마 공화국의 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면, 그들이 쇠망하게 된 원인이 두 가지라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농지법을 둘러싼 투쟁, 다른 하나는 군 지휘권의 연장이다. 이 두 가지 일이 처음부터 잘 파악되어 적절한 대책을 세웠더라면 자유로운 삶의 방식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전보다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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