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폴레옹이 놓친 것은 술탄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력과 해군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술탄은 두 나라가 프랑스보다 자신들의 위협과 야심을 무력으로 뒷받침할 능력이 더 있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새로운 러시아-오스만 동맹에 대한 술탄 셀림 3세의 헌신이 3차 대불동맹전쟁의 승패에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곧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러시아-오스만 관계에서 커져가는 긴장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동안 발생한 지정학적 재배열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3차 대불동맹전쟁 이후 프랑스는 중유럽을 지배하게 되었고 발칸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전 베네치아 영토들을 획득했다. 프랑스 정부의 대리인들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아 발칸의 다양한 지역들로 파견된 한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프랑스 영사관은 반러시아 공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테르니히가 이 주제를 나폴레옹한테 꺼냈을 때 그는 배제되기는커녕 실은 오스트리아가 발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시기하는 오스트리아를 이용해 그 지역에서 더 이상의 팽창을 막을 수 있길 바랐다.

1813~1815년 동안 유럽이 나폴레옹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 오스만 중앙정부는 잠시 결정적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유럽의 갈등에 중립을 선언했고, 이탈리아로 원정을 감행하도록 러시아 전함이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영국의 제의를 거절했다. 술탄 마무드는 잠깐 열린 기회의 창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지방들에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방어적 개발주의라는, 궁극적으로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프로그램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러시아와의 전쟁 종식으로 그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정치적인 행보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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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역사도서관 교양 18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김위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이른바 '상업혁명'은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를 바꿔 놓은 일종의 사회혁명이기도 했다. 사회 변화와 더불어 한 계층이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Hansa 同盟)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 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48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중세 유럽의 상인들 Tre Storie Extra Vaganti >는 상인(商人, merchant)을 주제로 한 짧은 대중역사서다. 14세기 초 대상인의 등장 시기와 이후 17세기와 18세기 화폐(貨幣)경제에서 상인의 움직임이 가져온 변화를 통해 독자들은 당시 생생한 경제활동을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시를 주름잡은 상인은 대상인(grandi mercanti), 다시 말해 보통 상인과는 달리 대체로 국제 교역에 종사하며 상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및 금융업(환전과 은행 업무)을 겸하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경제 조직체가 육지 무역쪽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른바 '콤파니아'라고 불렸다. 콤파니아의 탄탄한 기반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족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vecchio)이 판단 ·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여기에 복종해야 했고 이들에게는 '불평'(mugugno)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은 콤파니아에서 일할 사람을 선별하고 콤파니아의 모든 자본을 관리하였다. 이것도 새로 생겨난 요소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50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바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피렌체의 중심 가문의 바르디(Bardi) 가문 이야기다. 중세 말기 봉건제와 교회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이들의 공백을 대신하는 대상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현대 영어 company에 해당하는 콤파니아(Compagnia)가 장원을 대신하여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왕과 귀족들에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여해 주고, 대신 사치품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보던 르네상스 거상(巨商)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30년대 초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피렌체의 경제는 말 그대로 완전히 전복되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p60)... 여러 콤파니아가 파산하자 그 여파를 받아 2차, 3차 산업도 일거에 붕괴되었다. 보통, 콤파니아는 상업 활동 이외에도 은행업과 수공업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콤파니아가 도산하자 신용이 삽시간에 치명적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와 관려된 모든 영역이 피해를 입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1

이들의 투자가 항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한 왕에게 자금을 빌려 준 경우 그들이 가진 채권은 휴지조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푸거(Fugger)가문처럼 바르디 가문은 잉글랜드 군주에게 투자를 하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 군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에 더해 피렌체 전체 경기가 수축 국면에 진입하면서 많은 콤파니아들이 무너지는 등 바르디 가문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디 가문의 처세와 그들의 생존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세 콤파니아는 좋은 운수를 타고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앞에서 설명한 1330년대와 1340년대 같은 최악의 시기에, 그리고 바르디 가문의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는 그런 때에 창립되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가문 특유의 방식이었던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르디 가문 사람 몇몇이 이미 피렌체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하면 입김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피에로데이 바르디의 주도로 콤파니아의 일부 회원은 피렌체의 정부 체제를 전복하려고 쿠데타를 꾀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6

교환 중심의 시장 경제라면 바르디 가문은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바르디 가문의 모습은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대처를 잘 보여준다. 막강한 경제력을 활용해서 '화폐위조'라는 중대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치력을 발휘해 독점권을 강화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근대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18세기 유럽 경제를 분석하며 자본주의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치폴라는 넌지시 자본주의의 기원은 이보다 이전 시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바르디 가문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법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였다. 베르니오 법령을 새로 제정한 후 피에로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정성 들여 작성한 법령에 의거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자들을 모두 응징함으로써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제거하였고, 그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약탈권을 독점하였다. 그 이상 극악무도해지기도 힘들 것이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72

특히 바르디 가문 출신의 세 사람이 확신했던두 가지 사실은, 첫째, 경찰의 손에 잡힐 확률은 거의 없다는 점, 둘째, 혹 잡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형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는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특권층에 속했고, 이 때문에 특별히 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실제로 이들은 법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96

다른 두 편의 이야기의 중심도 역시 상인들이다. 화폐의 품질을 조악하게 만들어 유통시켜 막대한 부을 축적하고 한 나라(오스만 투르크)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해상무역을 통해 더 큰 세력으로 커나간 상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14세기 이미 자본주의 형태를 갖춘 대상인들의 현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안의 담긴 이야기는 간략하지만 이야기들이 던지는 메세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현대 무기산업자본, 환율을 이용하여 경제소국에게 외환위기를 강요하는 투기자본의 모습과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대기업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발견할 수 있다. 불과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경제사 관련 서적을 우리가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도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 문제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세로 가야할 듯하다. 과연 중세 경제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세 유럽의 상인들>을 읽으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이후 다른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 정부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조악해질 대로 조악해질 악화 루이지노의 유통을 막아 낼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은화 부족 현상을 감내하던 터키 경제는 위조된 대량의 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더 이상 현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없었다. 생필품의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올랐고 빵조차 사 먹기가 힘들었다. 터키 제국에는 루이지노 화폐가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도 이 화폐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모두들 이 화폐가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13

상인은 점차 신분이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은 프랑스어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며 소매업을 하던 자나 신분 상승을 꿈도 꿀 수 없던 사람에게는 마르샹(marchand)이라는 이름표가 그대로 남았다. 그 외의 사람, 즉 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던 특권층을 위해 네고시앙(negocian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인간사에 흔히 일어나듯이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싸움, 적대감, 경쟁의식이 생기곤 한다. 어떤 네고시앙을 마르샹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자크 사바리는 다행히도 자신이 네고시앙이라 믿었고 수많은 네고시앙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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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대해 팽배한 증오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하자 전면적 반란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티롤, 이탈리아의 봉기 소식은 나폴레옹을 불안감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파괴하는 훨씬 더 중요한 과제에 집중했다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앞서 주목한 대로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프랑스와의 전쟁 전야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쓴 오스트리아는 재정적 도움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 250만 파운드 선불 지급을 비롯해 750만 파운드의 보조금에 대한 대가로 병력 40만을 동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런던은 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며, 영국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전쟁이 진행되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런던이 결정할 것이다.

사실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공격을 가능케 하도록 나폴레옹의 주의를 분산한다는 맥락에서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 담화에서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다 잃었다면 나는 전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멸에 우리가 기여하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패배는 덴마크가 한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음을 뜻하는데, 덴마크 농업의 성장은 해상 활동의 증대를 자극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에 덴마크가 결국 휘말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싶은 욕망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스웨덴 군주들은 1536년 이래로 덴마크와 공동의 왕위로 연결된 노르웨이를 획득할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1807년의 전반적 상황은 1800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승리를 거둬 발트해 연안까지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대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궁정의 신입자였지만 곧 왕위 배후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새로운 제2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조국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스웨덴의 동부 국경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에 알맞은 보상이라고 여기는 서쪽의 노르웨이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베르나도트의 확고한 결심이 1813~1814년의 6차 대불동맹전쟁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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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봉쇄는 영국 무역을 겨냥한 광범위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조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륙 체제는 유럽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제도적·경제적 조직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념을 반영했다. 물론 나폴레옹이 생각하는 새로운 유럽 조직에서 프랑스는 최상의 경제적 우위를 누릴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동일한 게 아니었다. 대륙 봉쇄는 해상 경쟁자를 약화시키고자 육상 강국이 실행하는 경제 정책이었다. 나폴레옹의 칙령은 해상에서 영국의 우위와 영국 항구를 상대로 고전적인 봉쇄조치를 시행할 수 없는 프랑스 해군의 능력 부족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반면에 대륙 체제는 개념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새로운 정치적·경제적 실체를 창출하는 것이었고 대륙에 훨씬 더 큰 구조조정을 수반했다.

비록 나폴레옹 제국은 일시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언제나 대륙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품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유럽 체제, 유럽 법전, 유럽 사법부를 창설하고 싶었다. 유럽에는 오로지 하나의 국민만이 있을 것이었다"라고 그는 나중에 유배 생활 중에 주장했다. 하지만 훗날 여러 세대의 작가와 저자들에 의해 대중화된 이 ‘유럽 합중국’이라는 비전은 유럽연합의 초기 판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회원국들 간의 평등이나 자유무역과 [상품과 사람의] 제한 없는 이동이라는 요건을 갖춘 경제 연합의 창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프랑스를 최우선으로"라고 그가 지적했듯이─상품의 이동을 제한하는 옛 관세를 부활시킴으로써 프랑스의 상업을 보호할 계층화된 경제체제를 구상했다.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은 이 체제를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철저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 있다. 이런 측면에서 여러 요인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의 패착과 더 중요하게도 러시아에서의 패착은 이 체제에 결정타를 가했다. 둘째, 영국의 국가적·경제적 안보는 봉쇄에 대처해 스스로를 조정한 영국 재정 시스템의 유연성 덕분에 진정으로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해군은 영국의 제해권을 위협하거나 유럽 대륙에서 영국 상품을 배제할 수 있는 봉쇄를 실효적으로 강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대륙 봉쇄 체제가 실패한 원인은 그 내부적 모순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사실 영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대단히 높고 프랑스는 한마디로 영국을 대체할 능력이 없으니 영국 상품이 유럽 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정책들은 그 정책들을 견디도록 강요받은 이들로부터 자연히 커다란 불만과 분노를 자아냈다. 전에는 번영을 누렸던 많은 지역들의 경제, 특히 네덜란드와 한자 도시들의 대형 상업 중심지들은 봉쇄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더욱이 틸지트 조약 체결 이후로 15개월 동안 유럽 지정학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터였다. 사실 틸지트의 초창기 희열은 증발해버렸고 양측에는 이제 차가운 현실주의가 들어섰다. 러시아는 분명히 나폴레옹과의 동맹의 장단점을 따지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영국과의 대결에서 여전히 프랑스의 중요한 맹방인 오스만 제국과 관련해 러시아에 양보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1808~1809년의 사건들은 에스파냐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의 전역 이후에 프랑스는 에스파냐 중부와 북부 대부분을 다시 장악했지만 많은 지역들에서 계속해서 힘겨운 싸움에 직면했다.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일부 지역들은 프랑스군에 강력히 저항했고 도시들의 용감한 방어는 에스파냐 저항 세력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을 뿐이었다.

이것은 소름 끼치도록 비인간적인 열성과 총체성을 띤 전쟁, 〈전쟁의 참상Los desastres de la guerra〉이란 제목의 고야의 잊을 수 없는 연작 판화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을 제기했다. 프랑스는 개혁, 점령, 협력, 억압을 조합한 전통적인 수법에 의존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이 수법이 통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그들은 "프랑스가 에스파냐를 피 흘리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프랑스를 더 피 흘리게 하면서" 전쟁의 끔찍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된 상대와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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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상업혁명‘은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를 바꿔 놓은 일종의 사회혁명이기도 했다. 사회 변화와 더불어 한 계층이 사라지는가 하면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Hansa 同盟)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 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P48

이탈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경제 조직체가 육지 무역쪽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른바 ‘콤파니아‘라고 불렸다. 콤파니아의 탄탄한 기반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족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vecchio)이 판단 ·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여기에 복종해야 했고 이들에게는 ‘불평‘(mugugno)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은 콤파니아에서 일할 사람을 선별하고 콤파니아의 모든 자본을 관리하였다. 이것도 새로 생겨난 요소였다.  - P50

베네토 주의 화폐 위조 문제를 연구한 라인홀드 뮬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가치가 높은 동전이든 낮은 동전이든 간에화폐를 위조해서 얻어내는 수익은 미미했다. 대부분의 화폐 위조범이 얼마 안 되는  돈에서 수익을 얻어 내고자 할 때 감수해야 하는 가장 큰위험은 자신의 신변 문제였다." 이런 사실은 바르디 가문의 실패한 사업에도 해당된다. 보통 동전을 위조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익을 얻었다. 첫째, 합법적인 동전과 비교했을 때 위조 화폐에는 은이 조금밖에 포함되지 않았다. 둘째, 위조범은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이를 모두 자기의 수익금으로 돌렸다." - P95

특히 바르디 가문 출신의 세 사람이 확신했던두 가지 사실은, 첫째, 경찰의 손에 잡힐 확률은 거의 없다는 점, 둘째,혹 잡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형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는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특권층에 속했고, 이 때문에 특별히 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실제로 이들은 법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 P96

이제 루이지노 화폐는 상품 교환을 위한 매개물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더욱이 이 상품에 대한 수요는 아주 컸다. 따라서 이 상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이 상품은  화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상인이 루이지노 화폐를 터키로 가져가 매겼던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고 이는 모든 통화 체제에 혼란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루이지노 화폐에 열광해 눈이 먼 터키 사람을보고 프랑스 투기꾼은 터키인의 순진함을 이용해 먹기로 마음먹었다. - P102

모순된 사실이지만 프랑스에는 상업과 관련해 내세울 만한 전통이없었을뿐더러 상업과 귀족 신분은 병행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신념이 당시  프랑스  사회를 강하게 지배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낮거나 역량이 부족한 사람만이 상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수억벌었다 하더라도 상인과 그의 후손은 천민 혹은 아주 낮은 사회 계층에 속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해상 무역만은 예외에 속했다. - P119

상인은 점차 신분이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그영향은 프랑스어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며 소매업을 하던 자나 신분 상승을 꿈도 꿀 수 없던 사람에게는 마르샹(marchand)이라는 이름표가 그대로 남았다. 그 외의 사람, 즉 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던 특권층을 위해 네고시앙(negocian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인간사에 흔히 일어나듯이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싸움, 적대감,  경쟁의식이 생기곤 한다. 어떤 네고시앙을 마르샹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자크 사바리는 다행히도 자신이 네고시앙이라 믿었고 수많은 네고시앙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 P121

유대 상인은 거의 모든 세관에서 낙찰권을 따내맥주나 브랜디 혹은 럼주에 매기는 세금을 관리하기 때문에 모든 귀족은 유별날 정도로 유대인을 환대한다. 더욱이 귀족 소유의 농토를 책임지고 관리해 주는 사람도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귀족으로부터 항상 환대를 받는다. (중략) 폴란드의 부르주아 계층 역시 상업에 손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단스크 시의 항구를 통해 이루어지는상거래는 소규모에 불과한데, 그 이유는 프러시아, 특히 그단스크 시가 거의 모든 폴란드 제품을 독점하여 외국인에게 직접 공급하기 때문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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