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에게는 모든 하루가 다 똑같고 동일한 길이이다.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이 책은 아름다운 나머지 너무도 짧았던 날들을 회상하며 쓰였다. ut hora, Ora, sic dies nostri(우리의 날은 시간과 같다).

반면 숙련공의 유출은 한 나라의 쇠퇴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쇠퇴의 징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유능한 수공업자를 잃은 이탈리아는 역동적이고 고도로 수용적인 사회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정체되고 보수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마침, 숙련 노동력을 수입하던 나라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도 채택했는데 이 새로운 신앙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지상주의는 문자 해득을 장려함으로써 인적 자원의 질적 향상에 기여했다. 이것들과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여 155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경제력의 균형추가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사리온 추기경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서방의 최신 기술을 배우라고 촉구한 지 두 세기가 지난 후, 기술 발달과 경제 발전의 지도적 위치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야금술에 한해서는 스웨덴이 차지하게 되었다.

생산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의 상당 부분은 수요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 즉 중간계급과 시계를 구입할 여유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율이 꾸준하게 증대하는 상황과 엮여 있었다. 수요와 공급 양 측면에서 발전이 결합하여 시계는 더 널리 유포되었다.1

초창기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중세 수공업자들이 정확성에서 눈에 띄는 개선을 이뤄내지 못한 반면, 신기하고 매우 복잡한 운동 장치가 달린 시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탈진기를 제어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톱니바퀴에 또 다른 톱니바퀴를 추가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한편으로 복잡한 운동 장치는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체의 회합會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인간사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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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2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8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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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의 우크라이나의 민중 운동은 어떠한 해악적 외부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형제단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삶의 연원을 순구한 사도(使徒) 시대 기독교에서 찾았고, 코자크 제도의 기원은 자유, 평등, 형제애에 바탕을 둔 고대 슬라브인들의 민주주의의 토대와 결부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국처럼 차르를 사랑하지 않고, 폴란드처럼 지주를 사랑하지 않으며 대신 코자크 제도, 즉 형제단을 만들었다고 코스토마로프는 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28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다룬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는 리투아니아-폴란드, 모스크바(러시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코자크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의 의지와 열망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17세기)에 이르면 코자크 체제는 이미 충분히 정비되고 확정되었다. 이 제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단순함과 자유로운 성격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코자크 형제단의 영혼과 몸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코자크 조직에서 경이로운 조직 구성의 소질을, 다시 말해 단순한 수단과 원시적이고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이토록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소질을 보여주었다. 코자크 조직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여전히 드니프로 강 하류 유역(니즈)에 자리잡고 있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5


 흐루셰브스키에게 '코자크'는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다. 코자크와 지휘자 헤트만을 선출하는 방식은 아래로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조직을 연결시켜주었고, 코자크의 군사력은 대외적으로 이들은 폴란드, 러시아 지배계급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자치권을 가진 군사집단. 훗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에 의해 헤트만 통치권이 폐지되기 전까지 코자크 제도는 우크라니아 민족을 유지하는 중추였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코자크들의 최고 지도자는 보통 헤트만이라고 불린 선출된 장교가 맡았다. 이 직위를 맡은 지휘관들은 코자크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폴란드 정부와 심지어 국왕에게 서신을 보낸 때에도 스스로 헤트만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 반면,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최선임지휘관'이라 불렀다(p27)... 코자크들은 자기네 최고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권리는 코자크 자치의 기초였다. 코자크들은 단지 자신들이 선출한 헤트만을 인정할 권한만을 폴란드 정부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선출 결과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의 헤트만 선출과 해임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정부가 무엇은 원하는지 그 희망사항의 의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8


 코자크들은 폴란드와 용병계약을 체결하고 형식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코자크들이 강성해지길 원치 않는 폴란드 지배계급은 실질적인 자치를 억누르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쳤기에, 이들은 또다른 외세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코자크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은 이들 두 나라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스웨덴과 투르크에게도 손을 내민 그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우안과 좌안이 각각 폴란드와 모스크바(러시아)에 분할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나 독립의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보편법칙인 듯하다.


 페트로 사하이다치니는 폴란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다시 코자크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터이니 그때까지 폴란드와 전쟁으로 치달아서는 안 되며 코자크들은 국왕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코자크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6


 흐멜니츠키는 타타르 칸에게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투르크의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칸으로 하여금 술탄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전쟁에 나서게 강요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동시에 모스크바와도 접촉해 이 나라가 폴란드와 전쟁에 나서게 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모스크바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는 우크라이나를 차르의 지배권 아래 두겠다고 약속했다. 흐멜니츠키는 투르크의 종주권 아래 있는 이웃 국가들, 곧 몰다비아의 군주와 트란실바니아 공과도 교섭했다... 이러한 모든 교섭 중 우크라이나의 장래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흐멜니츠키와 모스크바국의 협상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46


 스웨덴에서는 카를 10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는 폴란드와의 옛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과 트란실바니아는 폴란드를 완전히 패배시킬 희망을 갖게 되었고, 두 나라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정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귀족들과 정부의 학정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신교도 권문세가의 지원을 기대했고, 오랜 기간 동안 트란실바니아와 스웨덴을 폴란드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교섭해 온 흐멜니츠키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연합해서 참여하자는 스웨덴 왕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61


 그리고, 폴란드-러시아의 분할점령기간 동안 코자크의 장교층들은 각각 폴란드 지주와 러시아 귀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크라이나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민중과 코자크의 긴밀한 연대는 이로써 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한 기둥의 힘을 사라졌다. 식민통치가 가져오는 가장 큰 폐해는 수탈이나 약탈이 아닌 계급분할,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이며, 이들이 갖지 못한 정당성의 상실은 매우 오랜 기간 사회 문제로 남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흐루셰브스키 역시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 정신의 근간을 동방정교회와 정교회 중심의 교육제도, 문학에서 찾는다. 


 모스크바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기에 코자크 장교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로 관급소유지를 후하게 나누어 주었고, 헤트만의 청원도 들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모스크바 정부는 코자크 장교들에게 안단한 멍에를 덮어 씌웠다. 그러나 이 멍에는 달콤한 것이었으니, 코자크 장교단은 기꺼이 이를 받아쓰고 그 속에는 모스크바 정부가 지시하는 길을 가볍게 따라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권력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행하면서 장교단의 이익에 봉사했다. 그들은 코자크 군단 토지를 사유화하고 주민들을 농노화하는 이 같은 과정에서 모스크바 권력에 협력했다(p246)... 헤트만 사모일로비치와 마제파의 시대는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1648~1649년의 위대한 봉기에 의해 형성된 자유로운 체제의 운명이 결정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이 자유로운 체제가 무너진 폐허 위에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새로운 예속이 형성된 시기였고, 이 예속이 그후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유산과 새싹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것은 토지의 탈취와 주민의 농노화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47


 18세기 후반 드니프로 좌안 지역과 자포로쟈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제도가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드니프로 우안 지역과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고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었다. 폴란드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 최후의 민중 운동을 진압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통합교회를 도입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생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자마자 폴란드 자체의 국가생활이 예상치 못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71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민중어는 출판물과 학교 교육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문학에서는 결코 그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러시아 검열 기관이 우크라이나어와 고대슬라브어 혼합어인 우크라이나 문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이 언어가 사멸지경과 빠져버리자, 순수 우크라이나어는 유일한 현지 언어로서 심지어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00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의 마지막은 우크라이나 문학에 기반한 민족의식이 폴란드-러시아에게 분할, 폴란드의 삼국분할, 오스트리아 지배, 볼셰비키 혁명, 독일 지배 등 숨가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도 이어져왔음을 기록한다. 민족 역사의 많은 시기 동안 독립된 국가가 아닌 예속된 상황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비극과 비극 안에서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언어인 우크라이나 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를 둘러싼 우크라니아-러시아 갈등의 문제가 중요성을 이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고,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드네프르 강 좌안과 우안의 서로 다른 성향이 폴란드-러시아 지배에 있음을 독자들은 역사로부터 알게 된다.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의 모든 문제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인이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문학은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 사항을 이해하며 농노적 예속 상태에 놓인 몽매하고 불행한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사회적-정치적 방법을 깨닫는 길로 차츰 다가갔다. 상층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토양과 만나야 했고, 우크라이나 생활의 모든 희망은 촌락 주민 대중과 그들의 해방 및 정신적 발달의 전망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 민중을 인간적인 관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문제가 우크라이나 소생의 중심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13

교육과 서책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하이다치니는 키예프의 교회인사들 및 학계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 생활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었다. 수백 년간 세인의 인식에서 사라져 망각 속에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옛 문화적, 민족적 의미를 점점 더 잊어가고 있던 키예프가 16세기에 갑자기 새로운 생명을 찾게 되었다(p53)... 키예프 인맥은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 사회의 상류 계층과 처음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이제까지 코자크들은 단지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을 뿐이다. 농민들은 코자크들을 통해 농노제의 멍에에서 해방될 기회를 찾고 있었다. - P60

흐멜니츠키와 코자크 장교단은 자신들의 계획이 모스크바국의 계획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새로운 자유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 폴란드와 싸우는 데 필요한 지원을 모스크바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국은 우크라이나를 새로 얻은 자국 영토로 간주해 여타의 행정구역이나 영토처럼 지배하려 했다. 모스크바국이 폴란드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전에도 차지했던 적이 있는 벨라루스 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P159

테테랴와 브루호베츠키가 각각 헤트만에 선출되면서 헤트만령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상급권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고, 좌안 지역은 모스크바국의 상급권 아래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힘은 더욱더 약화되어 이 나라의 해방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졌다. 양 진영의 반목으로 인해 많은 힘이 낭비되었고 설장가상으로 혼란과 무관심, 정치적 의식의 취약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욕을 달성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음모자들과 야심가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수중에 권력을 틀어쥐었다. - P202

코자크 장교단은 리투아니아 기본법을 현행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법규집의 일관된 특징을 이루고 있던 신분제 원칙과 귀족적 특권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귀족신분이라 자칭했고 ‘소러시아 귀족단‘이라는 이 용어는 18세기 중반 이후 공식용어에서 점점 더 널리 사용되었다. 코자크 장교들은 리투아니아 기본법 가운데 귀족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규정들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써 폴란드 귀족층이 누렸던 똑같은 권리를 우크라니아의 체제와 생활에서도 차지하려 했다. - P363

우크라이나의 정파들과 정당들은 원칙적으로 연방 제도가 미래를 위해 가장 유용한 삶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우크라이나 정체성에 대해 비우호적이고 한마디로 적대적인 온갖 세력들이, 러시아 국가의 통일성과 분리불가성을 옹호했던 온갖 세력들이 연방제라는 보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연방제를 지지하고 있엇는데, 그 목적은 오직 하나, 곧 러시아 제국의 유산과 러시아 제국의 통일성이라는 노선을 내세워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과 경제건설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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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22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513쪽을 넘어서는 두툼한 역사서, 겨울호랑이님.발췌해주신 문장으로 살짝살짝.간만보고 갑니다^^;,항상 깊게 꾸준히.읽으시는.겨울호랑이님께 감탄사를.맘 속으로 연발하고 가게됩니다. 형제단은 말그대로 brothers뉘앙스인 걸까요?^^;

겨울호랑이 2022-05-22 13:5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말씀하신 형제단은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으로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는 18세기 폴란드-러시아 분할 점령 이후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가톨릭-정교회의 통합교단에 대한 정교회 차원에서의 대응과 함께 교육, 출판 등을 통한 문화투쟁이 그려집니다. 한길 그레이트 문고에서 출판된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이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구요. 우크라이나 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더 깊게 공부해야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큰 줄기를 잡은 독서였습니다. ^^:)

2022-05-23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7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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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금속문화 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문화적 영향, 온갖 소식과 지식,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형태들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 땅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경로들은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는 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지대로부터 온갖 문물이 전파되었던 흑해 연안으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서아시아, 투르케스탄과 오늘날의 페르시아로부터 흑해 북부 초원을 거쳐서 이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또한 오늘날의 헝가리에 해당하는 도나우 강 유역 지역에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지중해 연안의 영향으로 금속 기술이 발달해 있던 알프스 기슭 나라들로부터 문물이 전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끝으로 우리 선조들은 서쪽의 독일인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 옛말 가운데 독일어로부터 차용한 명칭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흑해 연안 지역으로부터, 그리스 식민도시들로부터 이 땅에 전해진 문물이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105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1>는 시간적으로 선사시대부터 16세기 리투아니아-폴란드 왕국 지배하의 시대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그리스, 로마에서 찾으면서, 친서방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중심을 키예프로 잡지만, 저자는 흑해 연안에 자리잡은 그리스-로마의 후계자로 민족문화의 성격을 규정지으며, '슬라브의 우크라이나'와는 선을 긋는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의 쇠퇴원인을 제공한 외적(外適)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노마흐의 막내아들 유리의 자손들(후일의 모스크바 왕조의 조상들)은 볼가 강 유역지방에서 뿌리를 내린 후, 그들 스스로 공들 중에서 최고 지위를 확보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이를 위해 키예프를 더욱 약화시키고 키예프 공을 전혀 중요치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유리의 아들 안드레이는 우크라이나에서 공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이 분쟁에 개입했고 1169년 키예프를 짓밟으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키예프에 자기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이 군대는 실제로 키예프를 점령한 후 이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이미 키예프의 전면적인 쇠퇴가 시작되었다. 훗날 타타르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살육은 앞서 일어난 이 대혼란에 무엇인가를 조금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드니프로 강 유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삶은 일반적으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96


 비잔티움 제국과 새로운 로마라고도 불리던 그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 무렵 당대 세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광채와 문화, 영광과 힘의 정점이었다. 그 당시에 생겨난 이러저러한 새로운 국가의 창시자들, 건설자들은 세계의 등불인 이 비잔티움의 광채와 영광으로 자신과 자기 권력을 치장하려고 애썼으며,  또 이를 위해 비잔티움 황제 궁정과 인척 관계를 맺고 이로부터 여러 가지 귀중품을 얻으려고 애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0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기틀이 키예프 루스 대공 볼로디미르 1세(958~1015)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키예프 공국 내의 여러 가문들과의 관계 설정, 정교회와의 연계 등을 통해 '루스'의 일원이라는 공동체 이념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이러한 기틀은 이어지는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결속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민족의 근간은 키예프 루스 시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비잔틴 문화가 우크라이나 지방 곳곳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볼로디미르는 혈연관계가 없는 총독이나 공, 혹은 키예프 공의 가문과의 연관 관계가 약화되거나 망각되거나 한 먼 친척들 대신 키예프의 각 영지들마다 자기 친아들들을 앉혔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만 해도 이미 추후의 관계를 위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키예프 국가의 뭇 지방에서는 왕조적 이념이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26


 이제는 공통이 신앙과 교회, 키예프 수도대주교 산하에 위치하는 공통의 고위 성직자층과 성직자 집단, 서책 문화와 강력한 교회적 색채를 띤 학식, 그리고 예술도 역시 이들을 한데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때까지는 동방의 예술 곧 페르시아-아랍 예술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그리스 예술의 영향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국가종교와 결부된 비잔티움 문화와 예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루스-비잔티움' 문화가 우크라이나 땅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키예프 국가에 속한 동유럽 지역 전역에서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6


 키예프 국가에 의해 그것도 주로 볼로디미르 시기에 추가된 이 모든 새로운 유대는 우크라이나 땅과 우크라이나의 종족들을 서로 통합시켜 준 것만으로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벨라루스 땅과 대러시아 땅도 역시 감싸 안았으며, 종족적, 민속지적 차이들을 지우고 약화시켰다. 이같은 차이들은 신앙과 교회 곡위 성직자층, 서책 문화, 법률의 공통성과 루스라는 공통의 이름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미 느낄 수 없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7


 볼로디미르와 아들 야로슬라프를 이은 후계자들의 계승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서유럽의 봉건제와는 다르게 주민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민중만의 역량은 후대 위기상황에서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주류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주민들은 이미 기들이 자기네 현지의 세습지배가문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런 가문 출신의 공들을 옹호하고 지켜주었으며, 새로운 골육상쟁, 새로운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다른 공들이 이 공들을 해당 지배영지로부터 몰아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루스 국가는 다만 명목상으로만 키예프 공을 수석으로 인정할 뿐 실제로는 키예프 공에게서 완전히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고 지배하는 독자적인 공의 가계, 곧 세습지배가문의 다스림을 받는 개별적 공령들로 결정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세분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65


 공의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일정한 공령에서 공고하게 지위를 굳히게 됨과 동시에 공과 공령, 즉 공령, 즉 공령 주민들 사이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발전해 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공에 대해 큰 힘을 가지게 되었고 공의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공을 거부하고자 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81


  키예프 루스 시대 후반부의 느슨한 영주들의 연대는 13세기 몽골인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몽골제국에게 복속당하게 된다. 뒤이어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에 차례로 지배당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위기를 겪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치를 인정해 주었던 몽골제국과는 달리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던 폴란드 치하에서 폴란드 문화가 확산되면서 민족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희망으로 떠오른 세력이 바로 '코자크'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는 한 유목민 집단이 우크라이나 주민들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그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나운 성격도 상실해 버리고 나면 그런 유목민들 대신 또 다시 새로운 약탈적 유목민 집단을 쉴새 없이 흑해 연안 초원지대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삶과 문화에 이미 그토록 여러 차례 심각한 타격을 입힌 바 있다. 이러한 약탈 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할 또 하나의 침입이 123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쳐들어온 몽골-타타르인들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10


 리투아니아 공들과 폴란드 사이에서 1380년까지 할리치나-볼린 공령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고도 끈질긴 싸움의 종말은 갑작스러웠다. 그것은 곧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리투아니아 대공의 통치권 아래 연합을 하되, 리투아니아 대공이 폴란드 왕관을 얻는 대신 리투아니아의 모든 영토를 폴란드에 합쳐 영원히 '통합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의 단순한 일개 지방으로 전환시키면서 두 나라를 통일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p366)... 그들 사이에 이러한 약정이 1385년 8월 15일 리투아니아의 크레보에서 맺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크레보 연합조약'으로, 이는 우크라이나 땅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향후 역사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중요한 조약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68


 1569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이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사회 체제는 완전히 폴란드 방식으로 재편되었는데, 이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p468)... 우크라이나의 생활은 폴란드식으로 변하였고 폴란드화하였다. 이것은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일어난 총체적 변화였으므로 우크라이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자체의 민족성과 단절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우크라이나적 요소들은 우크라이나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던져버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69


 원래 타타르 한국에 의해 폐허가 된 키예프 지역으로 몰려든 이들을 일컫는 코자크 집단은 경계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었지만, 무역에 종사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던 집단과의 충돌을 통해 서서히 우크라이나 민족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몽골,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지배 아래에서 사라져가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기는 이들 경계인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들의 활약상은 <우크라이나의 역사 2>에서 본격화된다.


 해마다 봄만 되면 키예프 지방의 폴리시아 뿐 아니라 볼린, 벨라루스 같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키예프로 몰려와서 이곳 '출경(出境) 장소'에서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어렵, 맹수 사냥, 꿀벌치기 등을 했다. 그들은 '바타가'라 불리는 두레(아르텔)를 만들어 모인 후 우두머리인 오타만을 뽑았고, 무기와 필요한 물자를 준비해서 이른 봄이 되면 초원 '출경 장소'로 떠났다... 노획물을 얻기 위해 한두 번 초원에 머무른 적이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이는 자기네 살림살이를 좀 더 낫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출경활동 자체에 이끌렸고 이것이 그들의 통상적인 생존수단이 되었으며, 그들은 출경활동을 할 수 있는 곳 가까이 머물렀다. 이런 활동은 코자체스트보, 즉 코자크 일이라 불렸고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코자크라 불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22


 민중 생활의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코자크 집단은 새로운 힘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코자크 집단은 이제 단순히 동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생활에서 등장한 생활방식의 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폴란드 국가의 귀족지배체제 전체에 대항하여 솟아오른 큰 사회적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민대중에게 폴란드 귀족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했고 폴란드 귀족체제 자체를 향해서도 파괴와 몰락이 닥치리라고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 생활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코자크들이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비범한 흡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코자크 집단이 성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86


 폴란드 지배는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을 농노로 전락시키고 경제를 황폐화시켰으며, 도시를 몰락시키고 우크라이나 소시민들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우크라이나인들 중에서는 토지소유자 계급만이 유일하게 국가 법률에 의해 정치생활에 참여하고 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511


 16세기 코자크의 대두까지 다룬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속에서 저자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비잔틴에서 찾는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폴란드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통합과의 저항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동방정교회의 적통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인만의 독창성은 저자에 의하면 키에프 루스 시기에 성립된 민중의 민족의식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코자크 집단으로 표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구 소련 지역의 일부가 아닌, 슬라브 민족이면서 그리스-로마 문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우크라이나인의 모습을 <우크라이나의 역사 1>을 통해 발견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들이 바라보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생기는데, 이는 후에 러시아사를 통해 정리하는 것으로 일단 넘기자...

확산 이주 이후에 우크라이나 땅에서 가장 큰 상업 중심지가 되어간 곳은 키예프이다. 도시의 위치가 그 같은 성장을 유리하게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드니프로 강을 따라, 그리고 이 강의 가장 중요한 지류로서 키예프 위쪽에서 드니프로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프리퍄트 강과 데스나 강을 따라 운반되어 온 모든 상품들이 키예프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강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상업로였다. - P157

일반적으로 말해, 공령들의 개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 공령은 각기 개별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각각의 공령에서는 현지의 관계가 각기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체제와 생활방식의 공통적 특징들도 강화되면서 현지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키예프의 법은 공들과 드루쥐나들에 의해 모든 공령에 보급되었고, 현지의 재핀과 행정에 도입되었다. - P283

14세기 중반에 우크라이나 땅의 정치적 자립성은 종식되었다. 할리치나는 폴란드가 점령했고 볼린은 점차 리투아니아의 일개 지방으로 전환되었다. 키예프 지방과 체르니히브 지방에 있던 다른 공령들도 역시 리투아니아 출신 공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국가생활은 종식되었다. 우크라이나는 규모와 연륜이 다양한 공령들로 이루어졌고 공의 가문 구성원들이 증가함에 따라 공령들은 점차 세분화되고 영세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p336)... 12세기 후반부터 수즈달 공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면서 고의적으로 키예프 공들의 권위를 깎아내렸고 12세기 말부터는 할리치나의 공이 서부 우크라이나 전체의 수석군주가 되었다. 키예프는 얼마 동안 여전히 드니프로 강 유역 지방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 후에는 차츰 이곳에서도 중요성을 잃어 버렸다. - P337

리투아니아에 대항하고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의 공들과 영주들에게 강요한 굴욕적인 상황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이 일파(一派) 사람들 사이에서 꺼지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힘을 믿고 정교도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정교도들이 정교 국가인 몰다비아와 특히 모스크바에 의지하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오래전부터 옛 키예프 국가의 고토를 수합한다는 과업에서 리투아니아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 P394

시간이 지날수록 코자크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변경지대 적들과의 전투 외에는 어떤 의무에도 얽매지 않는 자유인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이 점점 더 강하게 발전하고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코자크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선출된 코자크 권력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말에는 코자크 신분, 코자크 지위가 형성되었으며 인민대중은 코자크 권리와 특혜를 누리기 위해 코자크 집단에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코자크 집단은 커다란 사회 세력이자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 되어갔다. - P457

16세기 마지막 4분기부터 17세기 전반 사이 동부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완전히 변했다. 얼마 전까지 타타르인들이 다녔던 도로에는 몇몇 도시가 새로 생겼고, 얼마 전까지 코자크들의 출경지점이었던 곳에는 마을들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 형성되었다. 귀족들의 크고 작은 성이 출현했고 자주 대리인과 관리인들이 이곳으로 파견되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직 야생마들만이 풀을 뜯고, 초원의 나리새 풀만 바람결에 윙윙거리던 곳에 폴란드의 법제도와 질서가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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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8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터키가 기독교의 ‘정교’ 혹은 정통 기독교라는 것을 좀 더 마케팅 잘 하면 이태리 로마보다 터키 이스탄불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관심 갖고 더 많이 방문할텐데요, 현재 이슬람 국가라 홍보에 한계가 있는 거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9 08:26   좋아요 1 | URL
터키의 많은 지역이 과거 비잔티움 제국이었기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슬람 시대를 거치며 모스크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당처럼요. 이에 더해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난 기독교 처형 등으로 갖는 순교지로서 의미도 로마가 갖는 부분이라, 동방교회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서방교회 중심지 로마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성지라 생각됩니다. ^^:)

종이달 2022-05-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0 23:04   좋아요 0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
 

 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러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추종했다. 러시아 정부의 관제민족주의를 실리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루스인의 통합이라는 과제에 대러시아인 못지않게 진심으로 열중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는 사실 상당히 모호했고 우크라이나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주의‘를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비판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재통일을 가능케 했으니 이를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유제포비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P26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 루스의 역사》7권은  ‘코자크의 시대‘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10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코자크 지도자들과 코자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채워지고 있다. 흐루셰브스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까지 여긴다. 1991년 독립 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와 역사학계는 코자크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흐루셰브스키의 역사 해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 P64

흐루셰브스키의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 동서 우크라이나의 연결성, 단일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옛 키예프 루스의 동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을 구분하여 서부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구성 부분으로 확신하는 반면 동북부지방은 이 구성에서 제외해 버린다. 동북지역이외부자로 여겨지는 반면 서부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적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공들의 통치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 P68

같은 동슬라브 민족이라 할지라도 벨라루스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상반되게, 흐루셰브스키는 러시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키예프 루스 시기에 키예프 공령과 마찬가지로 류리코비치들이 통치하고 있던 수즈달 공령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을 키예프 루스에서 제외하고 이를 외부자로 부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에는 루스 혹은 그 변형인 러시아 (루스의 땅)라는 나라 이름을 좀처럼 인정해 주고자 하지 않는다. 루스의 형용사이자 러시아의 형용사이기도 한 ‘루스키‘라는 말을 그는 오로지 우크라이나-루스를 위한 형용사로만 사용하고자 한다.  - P71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성이 러시아와는 다르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할리치나에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비판적인 서술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제국 지배자의 사정을이해해 가면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흐루셰브스키인지라 그가 이끄는 중앙 라다 정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 군을 불러들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독일 세력의 지원을 받자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독일을 서방의 일원으로 보았고 러시아보다는 독일과의 정치적 동맹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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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경제는 농업활동, 노점, 수공업 작업장, 상점, 증권 거래소, 은행, 정기시장(定期市場), 그리고 물론 시장에 연결된 생산과 교환의 메커니즘들을 뜻한다. 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명료한, 심지어 "투명한(transparent)"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활발히 움직여가고 또 그렇기 때문에 파악하기 쉬운 과정들에 대해서 먼저 연구하기 시작했다. 즉 경제학은 처음부터 다른 것들을 사상한 채 이런 특권적인 분야만 골라서 보았던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2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의 기본가정은 '물질문명',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로 구분된다. 경제학(Economics)가 관심을 갖는 정량화(定量化)된 경제영역이 '시장경제' 부분이라면, 그 아래로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가사노동 등이 위치한 물밀문명 영역이, 상층부에는 계급화된 '자본주의' 영역이 위치한다.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물질생활(la vie materielle)" 혹은 "물질문명(la civilisation materielle)"이라고 명명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동적인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있다. 이러한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 질서를 교란시킨다. 원하든, 아니면 의식적으로 원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비정상과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며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시장경제의 투명성 위에 위치하면서 그 시장경제에 대해서 일종의 상방(上方) 한계를 이루는 이 두 번째의 불투명한 영역은 나에게는 특히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영역이었다. 시장경제 없이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 자리잡고 그곳에서 번영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3


 이러한 구조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권의 책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이 각각 대응한다. 이하 각 권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지만, 피라미드구조로 형성된 삼분법 구조 위에서 브로델이 끌어내려고 한 결론만 간략하게 확인하도록 하자...


 나는 다만 경제의 하층(下層)이 상당히 두텁게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상관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여튼 그것이 존재하며 독립된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총화이며 우리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삼분할(tripartition)" 체제, 여러 층을 가진 경제라는 개념은 과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모델이며 타당한 관찰의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지상층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는 불완전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상층에서 하층까지 모두 아우르는 자본주의 "체제(systeme)"라고 하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67


PS. 물질문명을 다루는 1권에서는 마귈론 투생 사마의 <먹거리의 역사>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는 3권 세계의 시간편과 함께 정리하면 좋을 듯하다. 이는 다음 페이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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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11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앞으로 올려주실 글들이 기대가 되네요*^^* 항상 지적 자극이 되는 글 올려주셔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1 16:18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솜씨로 대작의 전체 모습을 리뷰 안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번 기회에 정리해보려 합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 격려해주시니 미루지 말고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4-11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재독이신가 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4-11 19:31   좋아요 1 | URL
네, 매번 정리한다 해놓고 계속 밀렸네요. 이번 기회에 리뷰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