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과 지구의 불규칙한 내부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전망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고동치는 불규칙성은 이미 복잡한 배열을 더 뒤흔들고 요동치게 하고 있다. 정치 조직체와 사회는 경제와 인구통계의 기반 위에서 구축된다. 이것은 결국 변덕스러운 자연의 의지라는 외적 영향 아래 성장하고 수축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인들은 홀로세라 불리는 역사적 기후 시대의 특정한 순간, 지중해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급격한 기후 변화가 지연되고 있던 시기였다. 더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이미 알려져 있던 세계를 가로질러 열대의 변두리까지 덩굴손처럼 뻗어나가 도시화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자연의 음모 속에서, 로마인들은 병원체가 진화의 잠재력을 분출하기 쉬운 질병 생태계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신종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압도적 힘에 포위되었다. 로마 제국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인류와 환경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오도라는 춤을 추거나 플루트 부는 기술 같은 특별한 재능은 없었으나 외설적인 행위와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하는 코미디에 탁월한 끼를 가진 서커스 배우가 되었다. 테오도라는 저속한 춤에 능했고, 그것이 바로 그녀와 취향이 비슷했으리라 짐작되는 유스티아누스를 사로잡은 비법이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결혼에 장애가 되는 법률이 개정되자 그녀는 유스티아누스의 아내가 되고, 나아가 제국의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_ 주디스 헤린, <비잔티움> , p85


 2022년 대통령선거까지 불과 100일도 안 남은 시점이기에 벌써 모든 이슈는 대선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고, 검색어의 상단은 대선 관련된 내용이 차리를 차지하는 요즘이다. 며칠 새 갑자기 뜨는 이슈 중 하나는 야당 후보 부인의 과거 문제일 것이다. 그의 과거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스티아누스 1세(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565)의 부인 테오도라 황후(Theodora, 500 ?~548)다.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유스티아누스를 만나 결국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그렇지만, 황후의 자리에 오른 테오도라는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황후 테오도라는 '니카' 반란 당시 도주하려는 황제 일행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작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자줏빛 어의는 빛나는 수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도망치지 않겠어요. 도망치느니 이 황후복을 입은 채 죽고 말겠어요." 유스티아누스도 아내 테오도라의 결연한 태도에 힘을 얻었는지 이윽고 반도들과 협상하거나 도주하기를 포기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p145)... 테오도라는 비잔티움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닌 여자들 가운데 최초는 아니었지만 가장 걸출한 여성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비잔티움의 황후와 황제 미망인들은 다른 중세사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_ 주디스 헤린, <비잔티움> , p146


 유명한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패널화에서 보여지듯 테오도라는 유스티아누스의 좋은 친구이자 반려자로 천년 제국 비잔티움의 초석을 놓은 인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테오도라의 비천한 출생 이야기는 스쳐지나가는 가벼운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들이 동로마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도 뚜렸했기 때문이리라.


 유스티아누스라는 인물 자신이 워낙 탁월한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명명백백한 증거는 세계적인 폭을 지닌 그의 정치적 목표와 유례없이 다양했던 그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의 성격에는 상당히 유쾌하지 못한 약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이런 약점들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의 정신의 힘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p49)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이끈 인물은 그가 아니라 벨리사리우스였고, 또 그와 나란히 나르세스였다. 거대한 법전 편찬을 완수한 인물은 그가 아니라 트리보니아누스였고, 가장 중요한 행정조치들을 강구한 인물은 그가 아니라 총독부 총독이었던 카파도키아의 요한네스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위대한 업적들을 고취시킨 인물은 바로 유스티아누스였다. _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p50


 2021년말 대선 정국 과정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를 보며 동로마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현재로서는 그가 대통령이 될 지 아닐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대통령이 되어 그의 공약대로 공정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면 이전의 모든 흠결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텐데,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중요하고 긴급한 현안이 많은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주요 사안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ps. 테오도라의 문제는 유스티아누스 치세가 괜찮아서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주위에서 말들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글말미에 떠올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21-12-10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사는 신기하군요. 다른 나라 역사는 자신이 몸 담은 곳과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저한테 테오도라 황후는 매력적이었거든요. 당시에 그 신분으로 거기까지 올라가다니… 물론 결점도 많았지만요.

겨울호랑이 2021-12-10 07:18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말씀처럼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역사는 다른 문화, 사회적 배경탓인지 때로는 신기하고 이해가 잘 안가는 일이 일어나는 듯합니다. 반면, 어떤 경우에는 예전에도 현재와 비슷한 사건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교훈을 주는 것이 역사의 매력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시공간을 넘어선 역사의 법칙은 이 점에서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
 
쟁기, 칼, 책 - 인류 역사의 구조
어니스트 겔너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경 사회는 식량의, 그리고 식량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다른 재화의 체계적인 생산과 저장에 의해 정의된다. 저장된 잉여가 실재하므로 사회는 그 잉여의 분배의 실행, 그리고 그 대외 방위에 불가피하게 힘을 쏟게 된다. 따라서 수렵인들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폭력은 농업 생산자들 사이에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잉여의 규모와 실재는 일반적으로 사회를 복잡한 내적 분화로 이끌어 간다. 저장물의 실재가 낳을 수밖에 없는 내적 갈드의 결과, 사회는 몹시 불평등해지고 첨예하게 계급화된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351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 1925 ~ 1995)가 바라보는 농경 사회는 불평등한 계급사회이면서 매우 안정적인 사회다. 책 제목인 생산의 도구인 '쟁기 plough', 억압의 도구인 '칼 sword', 그리고 인식의 도구인 '책 book'은 이 시기를 상징하는 도구이자 계급의 상징이다. 겔너에 의하면 농경 사회는 시대의 이름과는 다르게 노동을 천시하고, 생산이 인정받지 못한 사회다. 생산의 잉여가치는 힘을 가진 자에게 돌아갔으며, 생산자들이 수탈을 막기 위해 의지한 종교는 피지배층으로부터는 존경과 부를 헌납받으며, 지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시대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켰다. 일찍이 플라톤(Platon, BC428 ~ BC348)이 <국가/정체 Politeia>에서 말한 분업(分業)으로 유지된 불평등한 계급사회가 바로 농경사회였다.

사람들은 노동하며 살아가지만, 특권을 소유하는 건 억압자들이거나 신호를 조작하여 억압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자이다. 농경 사회는 인류의 상당수를 굶주림과 억압에 종속시킨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351

칼은 쟁기보다 강하다. 칼을 쓸 때 전문성을 늘 갈고 닦는 이들은, 간헐적으로 그리고 '절박할 때'에만 칼을 잡는 농부들보다 칼을 훨씬 잘 다룰 것이다... 권력의 평형상태는 지속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칼을 쥔 이들이 우세할 때, 무방비의 생산자들에게 생존과 생산에 필요한 것 이상을 허용할 이유는 거의 없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199

억압 전문가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른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무시무시한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부를 종교와 연결하여 신성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p130)... 이런 유형의 사회에서, 생산자가 축적한 잉여는 폭력의 독점자들에게 강제로 탈취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무인 계층으로 진입하는 입장권을 구매하거나 사회의 제의적 장치를 강화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간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131

농경사회의 불평등한 안정적 관계는 인식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에 의해 깨지게 된다. 인식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종교개혁, 계몽주의를 통해 과학의 시대를 불러왔고, 과학을 통해 갑작스럽게 늘어난 생산은 경제 체제의 변화와 함께 분업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활동의 세 영역인 인식, 억압, 생산 모두가 동시에 그 기적이 일어난 특별하고도 이로운 조건 속에 놓였을 것이다. 인식에서는, 제의에서 교리로 강조점이 이동하고, 그 교리에 단일한 정점을 부여함으로써 관점을 통합시켜, 통합되고 질서 정연한 세계라는 관점을 낳았다... 통합되고 질서 정연한 자연과 평등주의적인 보편적인 이성이라는 관념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자연에 대한 효과적인 탐구와 이용으로 나아갔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353

이성(理性)에 대한 각성으로 가져온 자연관(自然觀)의 변화, 이와 함께 발달한 과학(科學)을 통한 대량 생산 체제는 기존의 농경 사회의 농민의 쟁기, 기사의 칼, 성직자의 책을 함께 지닌 전문인을 요구하는 사회로 변화시켰다. 이처럼 변화된 시대 속에서 새로운 인류 역사의 구조를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겔너가 <쟁기, 칼, 책>을 통해 던진 큰 물음이다.

우리는 인간 활동의 3대 영역인 인식과 생산, 억압이 분업의 중요한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 온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미래에 관하여 무엇을 예상할 수 있을까?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274

싸우고 기도하고 일하는 세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과거의 질적인 분업은 마침내 무너졌다. 그것을 대체한 것은, 자유롭고 유능하며 자신의 전문 분야를 기꺼이 변화시키는, 동질적 '기능적' 전문인들이었다. 그들은 지적이지만 세속화된 동일한 관용구 안에서 소통했고, 그 관용구는 기록에 의해서 전파되지만 배타적인지는 않은 고급문화에서 비롯된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354

이상에서 보듯 겔너는 <쟁기, 칼, 책>을 통해 농경사회의 불평등성이 근대사회의 평등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인식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가 종교개혁, 산업혁명 등으로 이어져 기존 질서를 붕괴시켰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겔너가 설명한 이론으로 비서구권 사회에 대한 설명을 적절하게 할 수 있을까. 마치 세 다리를 가지고 있는 정(鼎)과 같이 농경 사회를 유지시켜온 서구의 계급관계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기반으로 인식세계를 지배한 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겔너의 인식은 농경 시대 중에서도 유학(儒學)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를 분석하기에는, 그리고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범위를 서구사회로 한정짓는다면, <쟁기, 칼, 책>은 근대 서양사를 움직이는 동력(動力)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플라톤은) 신화를 보유하고 고대 그리스의 관습과 제의를 영속화함으로써 이성이 강화되리라 잘못 판단했다. 어떤 면에서 인도는 플라톤의 계획을 서구 이상으로 증명해 보였다. 강력한 윤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신학에 갇히지 않았던 중국은 하나의 변형 사례였으며, 유교에서는 비개인적인 도덕을 존중하기에 이르렀다. _ 어니스트 겔너, <쟁기, 칼, 책> , p1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묘주의 제국을 일군 미국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점’들은 툴레나 비키니 환초, 스완 제도와 같은 섬이나 외딴 장소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인구가 극도로 밀집된 지역에 점이 찍히기도 했다. 기지에서 군인들이 쏟아져나와 술을 마시고 클럽을 드나들고 암시장에서 거래를 하고 밀회를 즐겼다. 그리고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기지에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군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 기지와 주변 지역은 다시 말해 미국인들이 외국인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부산한 국경지대인 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