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어느 모델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한 가지는 여전히 분명하다. 프랑스 혁명은 일단의 복잡한 정치적·재정적·지적·사회적 문제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그 기원이 프랑스 외부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발전상으로는 1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 무역의 확립과 17세기 전 세계적인 상업 회로들의 등장이 있다.

프랑스의 전쟁은 징세(다소 느리고 뒤엉킨 과정)에 내재한 문제들과, 가장 부유한 계층이 대체로 납세에서 면제되는 특권 체제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사실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을 지탱하는 돈은 세계 금융에서 나왔다. 18세기 내내 프랑스는 외국 채권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릴 수 있는 국제 자본시장에 갈수록 의존하게 되었다.

혁명적 움직임은 "어떤 일단의 통합적인 관념들, 희망과 항의를 표현하는 공통의 어휘, 한마디로 공통의 ‘혁명적 심리’와 같은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한 저명한 프랑스 역사가는 말한 바 있다. 계몽 운동은 그러한 "일단의 통합적인 관념들"을 제공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은 급진적 관념들을 옹호하고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주창했던 계몽철학자들의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끝난 뒤에 평형 상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을 포함하고 훨씬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울렀다. 이 전쟁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해상과 식민지에서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세력 다툼의 분명한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즉 프랑스보다 두 배가 넘는 전함을 보유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가 앞바다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군사력을 대륙에 봉쇄하는 사이, 영국은 대륙에서 동맹 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해외에서 군사적·상업적 패권을 확립했다.

‘강대국 체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이 개별 국가들이 그들의 정치적 목표와 열망을 형성하는 별개의 정치 세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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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근대사의 핵심 문제는 어떻게 해서 ‘주‘ 단위를 넘어 국왕통치하의 영토국가를 형성하고 그 단위로서 강력한 힘을 모으는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힘을 이 단위에서 형성하는가. 또 그  양자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상황을 한탄하고 프랑스 국왕의 업적을  칭송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 P65

부르주아 자본가의 등장과 엄청난 빈민의 증가, 16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장기적으로 도시 및 산업 부문, 다시 말해서  자본의 영역은 갈수록 힘을 더해갈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귀족은 완고한 힘으로 버티면서 자신의 몫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 변화의 와중에서 농민들은  분화되어갔고 그 중 일부는 빈민으로 전락했다.
근대 경제는 역동성을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위기도 내포하고있었다. - P75

하지만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사랑하던 여인 라우라를노래한 토스카나어 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였다. 1327년 그녀를처음 만난 순간부터 1348 년 그녀가 죽은 뒤까지 그녀에 대한 애모의 감정을 표현한 이 시집에서 그는 지상과 천상의 삶 사이를 방황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묘사했다. 언뜻 보기에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는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사랑하던 여인 베아트리체를 이상화시켜 천상에서의구원과 지상에서의 행복을 양립시킨 단테가 신학이 사상과 문학의 세계를 지배했던 중세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페트라르카에게서 인간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은 끝없는 갈등을 벌인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신뢰를 상실한 당대인들의 내면적 위기는 그의 제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에서 신랄하게 묘사되었다. - P96

이전의 개혁가들과 달리 루터의 주장과 행보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확산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면벌부에대한 맹신과 순례자들의 돈을 긁어내기 위한 가짜 성물, 기적으로 꾸며진 순례지를 비판하며 성서 읽기를 호소한 루터의 글과 연설이 수많은젊은 신학자들과 세속 식자층의 공감을 얻으며 널리 퍼져나갔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인쇄술이 크게 공헌했다. 타협에 굴하지않는 루터의 공격적인 태도 역시 사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공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일의 정치 지배자들이다. 영방정부를 억압하거나 간섭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나 대주교, 수도원장에게 분개한 그들은 비록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했지만 교회에 맞서 루터를  적극 지지하고 보호함으로써 루터 신학이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했다. - P126

칼뱅 신학의 핵심은 운명예정설과 선민의식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현세에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신의 선택에 부응하는 것이다.
근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 역시 신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루터가 이자 수입을 죄악시했던 중세 신학을 답습한 것과는 달리 칼뱅은 자본을 증대시켜 공동체의부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생산적인 대부를 고리대금과 차별화하고 인정해주었다.  - P133

이처럼 근대 초 유럽에서 군주와 귀족의 관계는 대체로 군주가 정치적, 법적 강제권을 독점하는 대신 귀족의 사회경제적 특권을 강화시켜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귀족은 면세권과 영주재판권 등 전통적인 특권외에도 상석권과 교수형을 면할 권리, 문장과 무기를 착용할 수 있는 권리 등 다양한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다양한 사회계층은 이처럼 사회적지위와 부가 보장되는 귀족을 동경하며 귀족사회에 침투하기 위해서 온갓 수단을 동원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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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실로 현대 유럽에는 엄청나게 중대한 10년이었으나, 당시 중요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의복이나 생각에서 자족적인 인습 타파의 충동은 매우 일찍 시작했다. 역으로, 1960년대 말에 정치와 공무에서 시작된 진정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몇 년 더 걸린다.

유럽의 공립 중학교, 리세, 김나지움은 지배 엘리트 양성소였다. 한때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차단되었던 고등 교과과정이 이제 증가 일로에 있는 모든 사회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개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과정을 마쳤고, 그 결과로 그들의 세계와 부모들이 아는 세계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60년대 주류 음악 문화가 대체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면, 적어도 마약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이 또한 대체로 스타일의 문제였다. 전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피임약은 과거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해졌으며 합법적이었다. 영화와 문학에서 육체를 공공연히 노출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표현하는 일은 적어도 북서유럽에서 더욱 흔해졌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옛 세대는 성적 구속이 철저하게 무너졌다고 확신했고, 자녀들은 기꺼이 그 악몽을 키웠다. 사실 60년대의 〈성 혁명〉은 남녀노소를 떠나 압도적인 다수에게 일종의 신기루였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도를 받은 문화인류학자들은 언어학 분야의 초기 이론을 차용하여 여러 사회에 걸친 변이와 차이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새롭게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관행이나 문화적 징표가 아니라 내적 본질, 다시 말해 인간사의 깊은 구조였다. 사람들이 〈구조주의〉라고 부른 이 같은 경향은 강한 매력을 지녔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의 〈아날〉학파와 계통의 유사성을 지녔다.

제3세계 폭동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1년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에 쓴 그 유명한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식민주의 혁명의 폭력은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유럽인을 쏴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이며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것이다. 죽은 자와 자유로운 인간이 남게 되며,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밑에서 국민의 땅을 느낀다.〉

권력과 권위의 편에서 보면, 학생들은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세력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신좌파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권위의 제도와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강의실은 그러한 일을 시작하기에 기계 공작소만큼이나 좋은 장소였다.

60년대 동유럽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 논쟁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일부 당 지도자들은 과거의 기술적 오류를 인정할 만큼 충분히 실용적이었다(또는 그 정도로 크게 걱정했다).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 체코 지도부조차 재앙에 가까운 제3차 5개년 계획이 절반쯤 진행된 1961년에 이르면 더는 중공업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계획이나 집단적 소유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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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유럽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독과 영국의 경제적 성취였다. 독일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이나 패전을 겪었다. 도시는 박살 났고, 통화는 붕괴되었으며, 남성 노동력은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운송과 공공사업의 기반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영국은 분명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유럽 국가였다. 폭격에 의한 파괴와 인적 손실을 차치하면, 도로와 철도, 조선소, 공장, 광산 등 국가 기반 시설은 전쟁을 거치면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독일 연방 공화국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유럽의 발전소로 번창한 반면, 영국은 성장률에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참 뒤처진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서독 경제의 규모는 이미 1958년에 영국 경제의 규모를 능가했다. 많은 평자들에게 영국은 유럽의 환자가 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독일이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된 배경은 1930년대의 회복이었다. 나치는 통신, 군수, 운송 수단 제조, 광학, 화학, 엔지니어링, 비철금속 등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에 투자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뜻밖에도 20년 후에 찾아왔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 경제의 뿌리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정책에 있었다.

강요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그리고 개인적 욕구의 과감한 무시는 공산당의 도시 계획이 초래한 재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서유럽의 도시 설립자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지중해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많이 이주한 탓에 도시의 재원에 대한 압박이 상당히 심했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 파괴,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고 한 세대 만에 폐허에서 초현대적 상태로 도약하려는 범유럽적 충동은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된다(고맙게도 1970년대에는 경기 후퇴의 도움을 받았다. 경기 침체로 공공 예산과 가계는 동시에 축소되었으며 광적인 재개발은 중단되었다)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성공담에는 어디서나 공공 부문의 역할 증대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국가 개입의 성격은 상당히 다양했다. 대륙 유럽의 국가들은 대체로 산업의 직접 소유를 삼가고 간접 통제를 선택했다(대중교통과 통신은 예외였다). 종종 이론상 자율적인 기관들을 매개로 했는데, 문어발처럼 여러 곳에 관여했던 이탈리아의 산업재건공사가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 민주당들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로 수십 년간 중단 없이 정권을 담당했다. 때때로 고분고분한 군소 정당들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를 이끌기도 했으나 대체로 단독으로 정부를 통제했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의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 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했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의 삶에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 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하지만 비록 표면적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종합 중등 교육 제도의 도입과 선택 중등학교 입학시험 폐지는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으나 1945년 이후 애틀리가 무시해 버렸다)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反)엘리트주의〉적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국가가 시민의 고용과 복지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동안, 시민의 도덕과 의견에 대한 국가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당시에 이러한 현상은 역설이 아니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를 옹호했던 자유당과 사회 민주당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주민의 경제적 안녕이나 의료 복지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복지를 보장하면서, 종교와 섹스 또는 예술적 취향이나 판단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시민들의 견해와 관행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이후 며칠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톨릭 기독교의 전례와 언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말 그대로다.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했지만 라틴어는 이제 교회의 일상적 의식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현대적 삶의 딜레마에 대한 교회의 반응도 바꾸었는데 이 점이 더 중요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보면 교회는 이제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 민주주의와 혼합 경제, 현대 과학, 합리적인 사고, 나아가 세속 정치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화해하려는 첫 번째 매우 시험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오래 지속된 설명을 고침으로써 교회에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책임이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많이 인정한 것은 아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이제 더는 권위주의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대자들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1960년대는 유럽 국가들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19세기 서유럽에서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군사적 필요와 정치적 요구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시민들의 현대적 권리는 왕국을 보호할 오래된 의무의 이행과 상계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그 관계의 특징은 국민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복지 혜택과 경제 전략의 조밀한 조직이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모든 것을 망라하려는 서유럽 복지 국가의 야심은 매력의 일부를 상실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약속을 절반이라도 지키려 했지만 실업과 인플레이션, 노령화한 인구, 경기 침체 탓에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을 안았다. 국내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은 국제 자본 시장과 현대 전자통신의 변화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입주의적 국가의 정통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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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시학 horology이 연구 분야로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계는 모든 정밀 기계의 원형이다. 일단 시계가 섬세하고 매혹적인 장난감으로서 단순히 찬탄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정밀 기계로 여겨지는 순간, 순진무구했던 산업의 시대는 끝난다.... <시계와 문명>은 한편으로는 명백하게, 한편으로는 뜻밖의 방식으로 <대포, 범선, 제국>을 보완한다. 즉 대포와 시계의 발전을 선도한 수공업자들이 흔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183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시계와 문명 Clocks and Culture: 1300-1700>은 그의 다른 저작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 Expansion 1400~1700>의 다른 축이다. 최소한 서양과 동양이 만났을 때, '시계'와 '대포'로 대표되는 서양의 대외진출의 두 상징이 보다 열렬하게 환영받은 지역이 중국과 일본으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이후 행보가 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양의 시계와 화기가 극동에 출현했을 대 공상적인 중국인들은 시계에 매료된 반면 호전적인 일본인들은 특히 총포에 매료되었다. 일본인들은 곧 화승총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분명 대량의 화승총을 생산했다(p98)... 중국의 기술력이 일본보다 부족했으리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는 있다(p101)...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두 나라의 크기의 차이와 대다수 중국인의 삶의 고립성이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2/183

 

  <대포, 범선, 제국>이 군사력을 활용한 서양의 대외거점 확보와 상업 독점권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포로 표현되는 상업자본주의의 진출을 그린다면, <시계와 문명>은 도시의 상공업자와 장인들에 의한 산업자본주의의 대외진출을 표현한다. 여기에 중국에서 시계가 예수회의 대(對)중국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의 진출 도구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수단 외에 상품으로 제국주의를 본다면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도 논의에 추가할 수 있겠다. 이상은 <시계와 문명>에서 제국주의의 진출과 관련해서 점검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럽 상인들은 선교사들의 실례를 금방 본받아, 무역 허가와 상업적 특권을 얻고자 유력 인사에게 값비싼 시계를 바쳤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면 뛰어난 솜씨와 기술로 만들어진 시계가 아시아의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선물 가운데 흔히 포함되었다. 특히 관료제가 권력 남용이 쉬운 여건을 제공하고 관리와 환관들이 때로 뇌물로 매수될 수 있는 중국에서 시계는 흔히 선물로 이용되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2/183


 

<시계와 문명>에서는 시계가 가지는 자체적인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science'과 '기술 technology'의 결합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이후 동방으로부터 수입된 자연과학 지식은 좌표계의 원점을 신(神)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그 과정에서 신학을 대신한 과학이 등장하고, 시장 경제 발전과정에서 정기시(定期市, fair)가 열리며, 도시 중심의 상공업자들과 길드의 형성은 대량 생산 기술과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대량의 독일어 성경 인쇄를 가능케 하며, 기술은 이미 가톨릭 신학과 중세에 일격을 가한 바 있었다. 이제, 기술은 과학과 결합하며 새로운 근대를 여는 입구에 서 있었는데, 이러한 과학기술 연합의 결정체가 바로 '시계'다.


 성숙한 과학자 대 단순한 수공업자란 식의 순진한 이분법으로 현상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더 미묘한 방식으로, 훨씬 더 복잡한 경로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작동한다(p29)... 결국에는 혁신자들이 승리했다. 그들의 승리는 경험주의와 실리주의에 물든 새로운 철학의 승리였고 새로운 철학은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침투했다. 수학은 분석의 주요 도구가 되었고 기계는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30/183


 측시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서로 맞물려 있는 기술적 변화의 더 폭넓고 복잡한 흐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햑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응용역학의 전반적 발달에서 첨단을 달리며 과학 기구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p61)... 정밀 기기는 과학의 진보를 가져온 반면, 과학은 정밀 기기의 향상을 가능케 했다(Les instruments precis font progresser la science, tandis que la science permet l'amelioration des instruments precis)". 오랜 잉태 기간을 거친 후 우리의 근대과학이 탄생했다. 그리고 누적된 과정은 점진적으로 그 발전을 가속화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3/183


 저자는 <시계와 문명>에서 시계의 의미를 이와 같이 발견하지만, 동시에 '왜 이러한 과학기술 문명'이 동양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이는 19세기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材)의 한계와도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시계의 부품이 아닌 시계침이 가리키는 움직임의 의미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 결과를 내려는 시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실증된다. 그렇지만, 치폴라는 여기에서 논의를 멈추지 않는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예술과 철학은 배웠지만 과학은 배우지 않았다. 리치 신부가 언급한 대로 "학문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려는 사람 어느 누구도 수학이나 의학에서 실력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도시 생활은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문인 상류층과, "분이나 시가 아니라 날과 달로 시간을 헤아리는" 다수의 농민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시계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로 활약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사회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나야, 다시 말해 사회의 구조와 필요가 싹 바뀌어야 했다. 기계는 환경과 다른 인간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만 실천적인 의미를 얻는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1/183


 동양에서 과학기술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문명의 한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들이 필연적으로 결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회구조, 사회적 요구와 필요성이 문명의 다른 화학적 결합을 끌어냈기에 문명의 우열(優劣)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3/183


 <시계와 문명>은 서양의 정밀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영향에 대해 분석하며. 이를 통해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큰 틀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과학기술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줌에도 이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책이다. 동서양 문명을 같은 선상에서 인식했을 때 오늘날 서구 문명이 처한 한계상황에 대한 처방을 동양 문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설명하는 물질문명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관계 설저에서 구조적인 움지임을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사치와 자본주의> <전쟁과 자본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과 <시계와 문명>은 미시적으로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때문에 이들을 서로 연결해서 읽는다면 보다 알찬 독서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제 다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마지막 3권으로 넘어가야겠다...


 16세기와 17세기는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을 목도하고 대양 항해가 크게 확장된 시기였다. 천문학자와 항해자 모두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고 별이 뜨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해 정밀한 시간 측정 기기가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고도로 정밀한 측시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과학혁명의 핵심인 역학의 기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과학자들이 시간 측정 문제에 주목하게 된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측시학에 과학적 원리와 체계적인 실험이 적용되었다. 당시 과학자와 시계공들은 긴밀하게 협력했고 그 결과 일련의 혁명적 발견이 이루어져 시계 제작의 기술 진보에서 돌파구가 열렸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0/183


PS.  치폴라는 '시계'가 중국에서 보다 환영받고, '대포'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서구화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니다. 치폴라 사후인 오늘날 정밀과학 기술에 보다 관심을 보인 '시계'의 중국이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첨단과학을 따라잡으며 G2로 우뚝 선 반면(최근에는 주춤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재무장에 열을 올리는 '대포'의 일본은 1985년 프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여년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역전된 이들의 위상을 지켜보며 근대화의 정의와 함께 역사 해석의 적정한 시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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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9 12: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이런 책 좋아하는데 요즘은 이런 류를 여유있게 보지를 못하네요
자극받고 갑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번역때문인지 잘 안읽히더라구요....^^
지중해의 기억 읽다가 그냥 몇페이지 참고만 하고 말았어요

겨울호랑이 2022-05-29 10:39   좋아요 4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편하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이루는 3층 구조를 설명하려는 브로델의 방대함과 꼼꼼함이 함께 들어가 있어 어려움을 더하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지중해의 기억>은 저자의 다른 작품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전에 먼저 읽으면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대작이 주는 느낌도 다르지만, 다만 학술서에 가깝기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내용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도 같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2-06-10 0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식 시간과는 너무나 다르군요. 묘시에 만나자는 어떻게 해석하나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기차와 함께 서양의 정확한 시계개념 들어왔다고 하던데 ㅠㅠ 이 리뷰를 제가 왜 놓쳤을까요. 넘 재미있어요 호랑이님 ㅎㅎ그리고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2-06-10 10:17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서양 문명의 특성은 수량화, 정량화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상품이 대포와 시계이고, 치폴라는 이들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알기 쉽게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하라 2022-06-10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기쁜 주말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0 13:26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6-10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0 22: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벌써 올해도 반이 지나갔네요.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6-11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1 08: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께서도 행복한 초여름의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thkang1001 2022-06-11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