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62. 비슷한말, 같은말, 다른말

― 저마다 즐겁게 쓰는 말



  한국말사전에는 ‘비슷한말’이 올림말로 나옵니다. 다만 이 낱말은 올림말로 나오되 ‘같은말’이나 ‘다른말’은 아직 올림말로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한자로 된 올림말’로는 ‘유의어(類義語)·동의어(同義語)·반의어(反義語)’가 있어요. 이밖에 ‘유어’와 ‘대어·대의어·상대어’ 같은 올림말도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한자로 엮은 ‘유의어’하고 ‘유어’는 올림말로 다룹니다. ‘반의어’에다가 ‘대어·대의어·상대어’까지 올림말로 다루고요. 이러면서 한국말로 쉽게 알아들을 만한 ‘같은말’이나 ‘다른말’은 올림말로 안 다루지요. 이밖에 ‘닮은말’도 올림말로 안 다루고요. 한국말을 다루는 사전이 너무 좁다고 할 만합니다.


  제가 낸 책은 어떤 사전일까요? 말 그대로 비슷한말 사전입니다.  ‘동의어 사전’이 아니지요. 저는 ‘같은말(← 동의어)’이 아니라 ‘비슷한말(← 유의어)’을 다루는 사전을 냈습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헤아린 나머지 동의어 사전이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습니다.


  ‘비슷한말’이라는 낱말은 사람들이 워낙 널리 쓰기 때문에 사전에 올림말로 실릴 만합니다. 그리고 다른 낱말, 이를테면 ‘같은말’이나 ‘다른말’도 사람들이 널리 쓰니, 이런 낱말도 머잖아 올림말이 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알맞게 살리고 즐겁게 살리며 아름답게 살리는 말이라면, 바로 이러한 낱말을 학자가 잘 알아채면서 사전에 담을 수 있으면 좋을 테고요.


  여기에서 더 헤아려 본다면, ‘비슷한말’이라는 낱말을 즐겁게 쓸 수 있듯이 ‘비슷한책’이나 ‘비슷한노래’나 ‘비슷한꿈’이나 ‘비슷한삶’이나 ‘비슷한글’ 같은 낱말도 재미나게 지어 볼 만합니다. ‘닮은-’을 앞가지로 삼아서 새 낱말을 지어 볼 수도 있어요. ‘닮은-’을 앞가지로 삼은 낱말로는 ‘닮은꼴’이 있어요. 이밖에 ‘닮은얼굴’이나 ‘닮은사람’이나 ‘닮은글’이나 ‘닮은일’이나 ‘닮은곳’ 같은 낱말도 얼마든지 쓸 만하리라 느껴요.


  생각을 담는 그릇이 말이에요. 생각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도록 새로운 말을 넉넉히 지을 수 있는 기틀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굳은 틀에 갇히는 말이 아니라, 야무지고 튼튼하면서 너른 품으로 어루만지는 슬기로운 기틀이 설 수 있기를 바라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 ‘비슷한마음·비슷한생각’이나 ‘닮은마음·닮은생각’이 되곤 합니다. ‘한마음’이나 ‘한뜻’이 되기도 하지만, 꼭 같은 마음인 한마음까지는 아니되, 서로 많이 비슷하다면 ‘비슷한마음’이 되지요. 어쩌면 이렇게 같다고 할 만한 모습일까 싶으면 ‘닮은마음’이고요.


  저마다 즐겁게 쓸 수 있는 말일 때에 저마다 즐겁게 가꿀 수 있는 생각입니다. 말도 생각도 삶도 모두 즐겁게 가꾸면서 너른 사랑과 꿈이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6.2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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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0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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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1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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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61. 우리가 ‘말’로 ‘생각’을 나타내는 뜻

― 알맞게 나누는 ‘표현·이해’는 무엇일까


[수수께끼]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많은 ‘교수’들이 ‘권위적·강압적’과 같은 ‘-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제가 저런 말을 많이 쓰는 ‘교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입장’ 바꿔 생각해 본다면, 저런 한자말이 가르치는 데 빠른 ‘이해’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자말을 너무 ‘남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우리말이 주는 맛을 모르고 ‘무분별’하게 한자말을 쓰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 대부분 한자말을 적당히 쓰고 ‘이해’하는 것에 서로 어느 정도 ‘약속’이 되어 있어서, 적당한 한자말이 ‘표현’과 ‘이해’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우리말을 쓰는 것도 좋지만, 저런 교수님들이 하는 ‘강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말로 생각을 나타냅니다. 말을 쓰지 않는다면 눈짓이나 손짓이나 몸짓으로 생각을 나타냅니다. 눈짓·손짓·몸짓을 쓰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생각을 나타내요. 자, 이러한 흐름을 헤아려 봅니다. 눈짓·손짓·몸짓으로 생각을 나타낼 적에는 ‘어떤 말’을 쓰는 셈일까요? 이때에 우리는 한국말이나 한자말이나 영어를 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지요? 그저 ‘생각’을 나타낼 뿐입니다. 마음으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다고 할 적에도 ‘마음’을 읽거나 밝힐 뿐이고, ‘마음’에 ‘생각’을 남아서 뜻을 주고받는 셈입니다.


  ‘말’을 쓰는 까닭은 바로 마음이나 생각이나 뜻을 곧바로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마음을 읽는 힘을 잃었다고 할 수 있기에 말을 빌어서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나라나 겨레마다 말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말만 다를 뿐 생각이나 마음은 같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름)’은 나라나 겨레마다 모두 다를 테지만, 돌이나 나무를 바라보는 생각이나 마음은 같아요. 그래서 눈짓·손짓·몸짓으로 ‘그려서’ 얼마든지 ‘마음 나타내기’하고 ‘마음 읽기’를 해요.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연장’이나 ‘그릇’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는 연장이거나, 생각이나 마음을 담는 그릇이지요. 어떤 연장이나 그릇을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영어라는 연장이나 그릇을 써서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프랑스말이나 네덜란드말이나 포르투갈말이나 일본말이라는 연장이나 그릇을 써서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낼 수 있어요.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떤 말을 쓸까요?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생각이나 마음을 슬기롭게 나타낼까요? 아니면, 허울로는 ‘한글’이지만, 이 한글(글)이라는 또 다른 ‘연장’이나 ‘그릇’에 ‘한국말답지 않은 말’을 끌어들여서 생각이나 마음을 그냥저냥 나타낼까요?


  번역투라는 ‘연장·그릇(말)’을 빌어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여느 사람은 못 알아들을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라는 ‘연장·그릇(말)’을 빌어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이라고 하면 될 테지만, 누군가는 굳이 영어로 ‘포토’라고 말하면서 사진강의를 해요. 요새는 ‘글’이라 말하지 않고 ‘텍스트’라는 영어를 써야 뭔가 비평이 된다고 여기는 지식인이나 작가나 비평가도 많아요. 그런데 어떠한 말짓이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도 함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우면서 정갈한데다가 곱기까지 한 말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연장·그릇(말)’을 골라서 쓰든 모두 ‘나 스스로 고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고르는 길은 내 ‘넋’을 이루고 내 ‘삶’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흔히 쓴다’고 하기에 나도 그 말을 똑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흔히 쓴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말을 구태여 똑같이 안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나쁘든 좋든 말이지요. 그래서 온누리 어느 나라에나 고장말(사투리)이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지은 자리에서 길어올린 말이 바로 ‘고장말(사투리)’입니다.


  대학교나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말은 ‘표준말’이나 ‘서울말’이나 ‘학문말’이나 ‘글말’입니다. 이러한 말도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옳거나 좋은 말이 아니고, 그르거나 나쁜 말이 아닙니다. 그저 ‘의사소통을 하는 연장이나 그릇’으로 삼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나 수많은 학교를 비롯해서, 지식이나 학문을 다루는 이들은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그릇’을 단단히 붙잡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그 울타리(학문 체계)에 그들이 들어서기까지 ‘그 울타리에 깃든 그릇’이 되는 말을 달달 외워서 그 울타리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기득권·권력’이라고 하겠지요. 기득권이나 권력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어렵게 쌓아올린 기득권이나 권력을 모든 사람이 아주 손쉽게 차지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말은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틀’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그 울타리에서 쓰는 말’이 어려운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번역투이든 일본 한자말이든, 그 울타리 안쪽에서는 이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그 울타리를 지키려고 ‘그 울타리 말’로 ‘기득권을 감싸는 의사소통’만 할 뿐입니다. 이러면서 ‘기득권을 감싸는 의사소통’을 가리켜 ‘전문용어·학술용어’라는 이름을 살며시 붙여요.


  ‘권위적’이나 ‘강압적’이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그들한테 이 말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그들 스스로 이 말에서 더는 새롭게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새롭게 지어서 새로운 말을 쓰려는 마음이 없으니 어느 한 가지 말에서 멈추거나 고이고 말아요. ‘권위적·강압적’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써야 ‘의사소통·표현·이해’가 더 잘 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말만 알고 이런 말로만 생각하고 이런 말로만 삶을 바라보려고 할 뿐입니다. ‘그 울타리에 걸맞는 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곳(학교나 강단이나 사회나 정치)에서는 ‘의사소통·표현·이해’라는 말을 쓸 테지만, 어느 곳에서는 ‘의사소통·표현·이해’라는 말이 없이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누고 ‘말하기’를 하며 ‘알아듣기’를 합니다. 힘을 내세우거나 힘으로 밀어붙이니 ‘권위적’이나 ‘강압적’이 됩니다. ‘말’도 얼마든지 ‘권력’이 되기 때문에 ‘권위적·강압적’ 같은 말마디로 ‘울타리 감싸기를 하는 권력’을 그대로 이으려 합니다. 그들하고 똑같이 권력을 물려받거나 이어받을 생각이라면 우리도 그들하고 똑같은 ‘권위적·강압적’ 같은 말을 쓰면 되고, 우리는 그들과 달리 새로운 마음이 되고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새로운 삶·살림·사랑을 이루려 한다면, 이제부터 새로운 말을 스스로 즐겁게 지어서 쓰면 됩니다. 다만, ‘새로운 말’도 ‘지식 권력’이 되지 않도록 ‘누구나 즐겁게’, 그러니까 그야말로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학교 문턱을 밟지 않은 누구나 즐겁게 알아듣고 나눌 수 있을 만한 ‘새로운 말’이 될 때에 비로소 ‘권력 아닌 삶을 짓는 말’이 될 만합니다. 2016.4.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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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8. 한국말에 없는 ‘소유격 조사’

― ‘-의’를 쓸 까닭이 없는 까닭



  흔히 쓰는 말이면서도 흔히 잊고 지나가는 말이 많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우리는 바람을 늘 마시는 목숨이면서도 늘 바람을 마시는 줄 잊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늘 마시지만, 참말 바람을 1초라도 안 마시면 죽는다고 여기면서 늘 ‘바람 마시기(숨쉬기)’만 생각한다면 아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늘 쓰는 말을 굳이 더 헤아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아주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이듯이 아주 부드럽게 흐르는 말입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쉽게 바람을 마시듯이, 아이와 어른 누구나 쉽게 말을 합니다. 많이 배우거나 똑똑하거나 힘센 사람만 숨을 쉴 수 있지 않듯이, 적게 배우거나 조금 어리숙하거나 힘이 여린 사람도 얼마든지 말을 합니다.


  ‘소머리국밥’이라고 합니다. ‘콩나물해장국’이라 합니다. ‘된장찌개’라 합니다. ‘들꽃’이라 하고, ‘복숭아나무 열매’라 하며, ‘상추쌈’이라 합니다. ‘언니네 이발관’이요 ‘쌀집’이며 ‘전주식당’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하면서 ‘-의’를 사이에 넣는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의’를 넣는 말투는 그야말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아예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남의집살이’나 ‘닭의장풀’ 같은 자리에는 ‘-의’가 들어갑니다. ‘-의’를 아예 안 쓰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쓰면서 ‘남집살이’나 ‘달개비’라는 말도 함께 씁니다. ‘-의’를 붙인 제법 오래된 낱말이 있어도 ‘-의’를 안 붙인 훨씬 오래된 낱말이 나란히 있습니다. ‘남의집살이’라는 낱말을 가만히 보면, ‘딴집살이·한집살이’ 같은 낱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나의집살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와 맞물려 ‘너의집살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남의집살이’ 같은 말은 언제부터 왜 누구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한국사람은 ‘딴집살이’처럼 말을 짓는 삶이었어요. 이 틀을 안 살피고 ‘-의’를 함부로 넣으려고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국말에는 ‘소유격 조사’가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처음부터 없었기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한국말에는 처음부터 소유격 조사가 없을까요? 한국말에서는 쓸 일이 없으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왜 소유격 조사를 쓸까요? 쓸 일이 있으니 쓴다고도 할 테지만, 쓸 일이 없으나 ‘학교 문법’이나 ‘사회 문법’으로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쓴다고 하겠습니다. 서양 말법 틀에 따라 한국 말법을 억지로 짜맞추다가 소유격 조사가 생기고, 일본 말투가 자꾸 스며들면서 소유격 조사를 쓸 일이 불거집니다.


  한국말에서 소유격 조사를 쓸 일이 없으나 앞뒷말을 이으면서 ‘ㅅ(사이시옷)’을 쓰기도 하기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처럼 ‘ㅅ’을 넣습니다. 그런데 ‘나무토막·나무젓가락·나무집·나무뿌리·나무눈·나무꽃·나무껍질·나무때기·나무말미’처럼 ‘ㅅ’을 안 넣는 낱말이 무척 많습니다. 앞뒷말을 이으면서 ‘ㅅ’을 쓰기는 하되 ‘ㅅ’조차 그다지 안 쓰는 한국말입니다. 일본사람은 ‘나무껍질’을 ‘木の皮’로 적습니다. 이를 잘못 옮기면 “나무의 껍질”처럼 됩니다. 일본사람은 ‘나무꽃’을 ‘木の花’로 적어요. 이를 잘못 옮기면 “나무의 꽃”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면서 학교 문법을 배웁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의’를 소유격 조사로 여기면서 배웁니다. 어른들이 사회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사회 문법에 따라 ‘-의’를 손쉽게 소유격 조사로 삼아서 퍼뜨립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밥맛’이나 ‘된장맛’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밥의 맛”이나 “된장의 맛”처럼 말법을 깨면서 쓰기 일쑤입니다. 한국말은 ‘들꽃’이나 ‘멧꽃’이나 ‘숲꽃’이지만, 한국 말법을 잊은 채 “들의 꽃·산의 꽃·숲의 꽃”처럼 잘못 쓰는 사람이 늘고, 이러한 말투가 올바른 줄 여기는 사람마저 나타납니다. 일본 영화 “茶の味”를 한국에서 “녹차의 맛”으로 옮겼는데, 일본 사람은 ‘の’를 넣더라도, 한국사람은 “녹차맛”이나 “차맛”으로 영화이름을 적어야 올바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도 소유격 조사를 부채질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앞서까지 한국에서 여느 사람은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고, 지식인이 한자를 쓰더라도 ‘-의’를 사이에 넣어 말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와 교육이 모두 식민지가 되면서 ‘-의’를 곳곳에 넣는 글투와 말투가 퍼졌고, 해방이 된 뒤에도 이를 바로잡으려는 물결은 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에 처음으로 ‘우리 글 바로쓰기’ 물결이 제법 일면서 ‘-의’를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내 시들해졌어요. 요즈음은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사회이든 ‘-의’를 살뜰히 털면서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려고 생각을 가꾸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바람맛을 몰라도 누구나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바람내음을 몰라도 누구나 바람을 쐬면서 살 수 있습니다. 바람을 생각하면서 숨을 쉬는 사람이 참으로 드뭅니다.


  말맛을 몰라도 누구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말결을 몰라도 누구나 말을 나누면서 살 수 있습니다. 말을 생각하면서 말을 주고받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문체’나 ‘표현 방법’을 바꾸어야 ‘내 글투’가 되지 않습니다. 바람맛을 헤아리듯이 말맛을 헤아릴 수 있어야 ‘내 말씨’가 깨어납니다. 말마다 다른 숨결을 살피면서 읽을 때에, 사람마다 다른 넋인 줄 살피면서 읽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숨결로 살아가는 넋인 줄 살피면서 읽을 때에, 삶마다 다른 숨결이로구나 하고 살피면서 읽을 수 있고, 다 다른 사랑결과 생각결과 꿈결을 느낍니다.


  나라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나라마다 ‘쓰는 말’이 똑같다면, 지구별에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말만 쓸 테지만, 나라마다 ‘쓰는 말’이 다르고, 삶과 넋이 다르기에, 어디에서나 ‘다른 말’을 씁니다. 그래서, ‘관사가 없는 말’이 있고, ‘관사가 있는 말’이 있습니다. ‘관사도 성별을 갈라서 쓰는 말’이 있고, ‘관사를 쓰더라도 성별을 안 갈라서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유격 조사를 쓰는 말’이 있을 테고 ‘소유격 조사가 없는 말’이 있어요. ‘토씨(조사)와 씨끝(어미)에 따라 달리 쓰는 말’이 있고, ‘토씨와 씨끝이 안 달라지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분사와 현재진행형과 온갖 때매김(시제)’을 낱낱이 가리는 말이 있다면, 이를 하나도 안 가리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이 나라 삶과 넋에 따라서 살펴야 합니다. 영어에 ‘소유격 표현’이 있으니 한국말에도 ‘소유격 표현’이나 ‘소유격 조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국말을 제대로 씁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배우고 가르쳐야 한국사람 누구나 한국사람답게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북돋우고 슬기롭게 꿈을 지을 수 있습니다. 4348.4.20.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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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7. ‘말짓기’는 ‘삶짓기’

― 새로운 말을 짓지 못한다면



  우리가 쓰는 말을 제대로 살펴야 하는 까닭은, ‘말짓기’는 언제나 ‘삶짓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제대로 살리는 사람은 언제나 넋을 제대로 살리고, 넋을 제대로 살리는 사람은 언제나 삶을 제대로 살립니다. 이 대목을 읽어야, 말과 얽힌 수수께끼를 풉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쓰는 말을 내가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땡큐’라는 영어를 쓸 적에 무엇을 생각할까요? ‘내가 바로 이곳에서 영어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내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까요? 거의 모든 사람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땡큐’라는 영어를 씁니다. 이런 영어를 쓰면서 영어라고 느끼는 사람은 대단히 드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한자말을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그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고맙다’라는 말을 가려서 쓸 줄 알아야 한국사람답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한자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이나 네덜란드말이나 버마말 들을 빌어서 ‘고맙다’를 나타낼 수 있어요. 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에 담는 넋’을 헤아리려는 몸짓이라면, 얼마든지 이렇게 해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글을 쓸 적에는 다릅니다. 글로 쓸 적에는 ‘다른 사람이 못 알아보는 글’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산’이라고 하면 되는데 ‘산(山)’처럼 적는다든지, ‘시’라고 하면 되는데 ‘시(詩)’처럼 적는 사람이 있습니다. ‘숭상하다’나 ‘고대’를 쓰고 싶다면 그냥 이대로 쓰면 되는데, 굳이 ‘숭상崇尙’이나 ‘고대古代’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이와 같아요. ‘봄seeing’이나 ‘컷(cut)’이나 ‘감성(heart)’이나 ‘선택할(셀렉트select)’처럼 적으면 여러모로 어지럽습니다. 따로 영어를 안 붙이고 글을 썼다면 그대로 지나갔을 테지만, 이렇게 한자나 영어를 붙이니 외려 헷갈리면서 글흐름이 가로막힙니다.


  한자나 영어를 뒤에 밝히면서 글을 쓰는 일은 ‘내가 한자나 영어를 쓴다는 생각’이 짙습니다. 그러니, 이웃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말아요. ‘내가 나누려는 뜻’을 이웃한테 밝히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짓기는 언제나 삶짓기입니다. 먼 옛날에 누군가 ‘풀’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지어서 쓴 사람은 이녁 삶을 지은 셈입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짓고, ‘별’과 ‘해’와 ‘땅’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지은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말을 지으며 생각을 새로 짓고, 말과 생각을 함께 지으면서 삶을 새롭게 지어요.


  오늘날 사회에서 현대교육을 받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새말을 안 짓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만 받아들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내 생각을 담을 새로운 말’을 떠올리거나 그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쓰는 ‘낱말 숫자’는 대단히 적습니다. 사전은 무척 두툼하지만, 사전에 실린 낱말 가운데 1/100이나 1/1000조차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전과 말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전 한 권’에 실린 한국말은 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 누구나 흔히 쓰던 말입니다. 사전에 실린 한자말과 영어를 뺀 모든 한국말은 먼 옛날부터 아이와 어른 모두 다 알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모든 말을 거의 다 잊습니다. 이러면서 받아들인 ‘새로운 말’은 한자말과 영어입니다.


  ‘보다’는 ‘바라보다·쳐다보다·들여다보다·살펴보다·넘겨보다·내다보다·마주보다·올려다보다·내려다보다·굽어보다’로 이어지고 ‘헤아려 보다(헤아려서 보다)’라든지 ‘생각해 보다(생각해서 보다)’처럼 깊거나 넓게 쓰임새를 넓힙니다. 이를 ‘관찰(觀察)’이라는 한자말로 꼭 나타내야 하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르다’는 ‘가리다·추리다·뽑다·솎다·집다·짚다·빼다’와 한동아리이면서 저마다 뜻과 느낌이 다릅니다. 이를 ‘선택(選擇)’이라는 한자말이나 ‘select’나 ‘choice’라는 영어로 꼭 나타내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떨어지니까 ‘떨어지다’라 할 뿐인데, 왜 ‘추락(墜落)’이라는 한자말을 한국말에 끌어들여야 할까요? 밤이니까 ‘밤’이라 할 뿐인데, 왜 ‘나이트(night)’라는 영어를 한국말에 끌어들여야 할까요?


  ‘떨어지다’와 ‘추락’을 함께 쓸 수 있고, ‘밤’과 ‘나이트’를 나란히 쓸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자유’와 ‘권리’라고도 할 만합니다.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누리면서 온갖 외국말을 섞어서 써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온갖 외국말을 한국말과 섞어서 쓰면서 ‘나한테 기쁘거나 반갑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운 일’은 무엇이 될는지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을 여러 외국말로 가리킬 수 있다면, 이때에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만한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숲’을 ‘森林’이나 ‘wood·forest’로 말할 수 있으면 ‘내 말’이 한결 넉넉할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숲을 ‘숲’이라 말할 수 있을 때에 ‘숲놀이·숲내음·숲집·숲바람·숲넋’이나 ‘사람숲·말숲·생각숲·이야기숲·책숲’처럼 새로운 말과 넋과 삶을 하나씩 짓습니다. 우리가 쓸 말은 ‘토박이말’이 아닌 ‘삶에서 바탕이 되는 말’이어야 합니다. 바탕을 읽고 느끼면서 생각을 뻗어야 합니다. 물이 흐르듯 말이 흐를 노릇이기에, 새롭게 나아가며 넓어지는 말과 넋과 삶이 되도록 할 노릇입니다. 샘물이 내가 되고, 내가 가람이 되며, 가람이 바다가 되도록 할 노릇입니다. 샘물에 설탕이나 소금을 섞는들 샘물이 넓어지지 않는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삶을 노래하려면 ‘노래가 될 말’을 슬기롭게 살펴야 하고, 삶을 사랑하려면 ‘사랑할 말’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사람이 처음 살던 때부터, 어버이와 어른은 아이한테 ‘아이가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짓는 바탕이 될 말’을 물려주었습니다. ‘토박이말’이 아닌 ‘삶말’을 물려주어서, 이 삶말을 바탕으로 아이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손수 일구도록 이끌었습니다. 말과 넋을 아이가 스스로 지어서 삶을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짓도록 가르쳤습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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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4. ‘표준말’은 없다

― 사람답게 삶을 가꾸며 쓰는 말



  오늘날 ‘정부 맞춤법’은 ‘정부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낱말은 붙여서 쓰고, 여기에 안 실린 낱말은 띄어서 쓰도록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에서 ‘표준으로 삼는 한국말사전’에 안 실린 낱말은 ‘한국말이 아닌’ 셈입니다.


  ‘꿈터’라는 낱말은 정부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안 실립니다. 그러나 ‘꿈터’라는 낱말은 유치원이나 학원 이름에도 쓰고, 교회나 식당 이름에도 쓰며, 사진관에다가 수많은 가게에서 두루 씁니다. ‘온누리’라는 낱말도 정부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안 나옵니다. 그러나 ‘온누리’라는 낱말도 약국이나 교회나 학교나 출판사 이름으로도 쓰고, 수많은 곳에서 이 이름을 널리 씁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부에서 국어학자가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하는 ‘한 가지 한국말사전’에 올림말로 실어야, 이 낱말만 ‘표준말’로 배워서 써야 할까요? 아니면, 생각을 북돋우고 마음을 살찌워서 ‘우리 생각과 마음을 나타낼 낱말’을 스스로 지으면서 기쁘게 써야 할까요?


  ‘꿈터’라는 낱말을 ‘꿈 터’처럼 띄어서 쓰기만 해야 한다면, ‘꿈노래’나 ‘꿈누리’ 같은 낱말도 못 씁니다. ‘온누리’라는 낱말을 ‘온 누리’처럼 띄어서 쓰기만 해야 한다면, ‘온사랑’이나 ‘온마음’ 같은 낱말도 못 씁니다.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다가 171쪽에서 “지구 온난화, 굶주림에 관한 뉴스를 쉽게 접한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같은 글월을 보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글월에는 ‘뉴스(news)’와 ‘소식(消息)’이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두 낱말은 모두 한국말이 아닙니다. ‘뉴스’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새 소식’으로 고쳐쓰라 나오고, ‘소식’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알림’으로 고쳐쓰라 나옵니다. 이러한 한국말사전을 헤아린다면, ‘뉴스 = 새 알림’인 꼴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알림’이라는 말도 그리 알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글월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굶주림 같은 얘기를 쉽게 듣는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를 알렸으며, ‘이야기’를 들었어요. 영어는 ‘뉴스’이고, 한자말은 ‘소식’이며, 한국말은 ‘이야기(얘기)’입니다.


  한국에서는 학교나 사회에서 말을 제대로 안 가르칩니다. 교과서에서는 말을 제대로 못 짚습니다. 정부에서는 사람들 생각과 마음을 틀이나 굴레에 가두려고만 합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태어나서 사는 사람은 ‘한국말’뿐 아니라 ‘말’도 제대로 모르고, 옳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지구별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다른 말’을 씁니다. 나라나 겨레가 달라서 ‘다른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삶터가 달라서 다른 말을 씁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만 들여다보아도, 크게 가르면 평안말과 강원말과 전라말과 경상말과 충청말과 함경말과 제주말이 모두 다릅니다. 서울말과 부산말과 광주말만 다르지 않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교과서와 학교와 신문과 책과 공공기관 때문에 고장마다 거의 비슷한 말을 주고받지만, 교과서와 학교와 신문과 책과 공공기관이 없던 옛날에는 고장마다 모두 다른 말을 썼습니다.


  지난날 이 나라에서 중앙권력을 누리던 이들이 ‘한국말’을 안 쓰고 ‘중국말’을 쓰면서 ‘중국글’을 쓴 까닭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장마다 말이 대단히 크게 다르니까, 중앙권력을 누리며 다스리려는 이는 ‘같은 말(표준말)’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자는 ‘여느 시골에서 여느 사람이 흙을 일구고 숲을 돌보면서 쓰던 말(한국말)’을 쓸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여느 시골말(숲말)을 쓰려고 해도 고장말이 죄 다르니 어느 하나를 골라서 쓸 수도 없습니다. 이리하여, 중앙권력은 ‘북경말’로 대표할 중국말을 표준으로 삼았고, 이를 중국글(한자)로 나타내려 했습니다. 중앙권력이 중국말과 중국글을 받아들여서 쓰면서 차츰 한자말이 퍼졌지만, 여느 시골에서 지내는 사람은 ‘제 고장말(한말)’만 쓰면 될 뿐이었습니다. 시골사람은 손수 씨앗을 심고 들과 숲을 가꾸었으니, 굳이 중국말이나 중국글을 익힐 까닭이 없고, 들을 일조차 없습니다. 해방 뒤 새마을운동이 퍼지기 앞서까지 한국에서 여느 시골에서 살던 사람은 한자말을 거의 한 마디조차 안 썼어요.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 바람이 휘몰아친 뒤부터 아이들을 몽땅 학교에 보냈고, 학교에만 보냈을 뿐 아니라 도시로 보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치고 도시로 간 시골아이는 시골말을 버립니다. 도시에서 쓰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1960∼70년대 ‘도시말’은 ‘한자말을 바탕으로 하는 표준 권력말’입니다. 토씨만 한국말일 뿐, 알맹이는 오롯이 한자말인 셈이었어요. 이 흐름이 198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사회에 민주 바람이 불면서 ‘토씨만 한국말’이던 껍데기를 차츰 걷어냈고, 요즈음은 ‘알맹이도 한국말’인 말을 두루 쓸 수 있으나, 중앙권력을 쥔 쪽에서는 다시 ‘알맹이는 영어’인 말을 퍼뜨립니다.


  정부에서 사람들한테 퍼뜨리려는 ‘표준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표준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키우지 못하거나 짓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못 키우거나 못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스스로 삶을 짓는 길’과 멀어집니다.


  우리는 ‘토박이 한국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짓고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는’ ‘말다운 말’을 스스로 생각으로 지어서 써야 합니다. 권력말이나 표준말이 아니라 ‘내 말’을 써야 하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랑을 꿈꾸는 ‘우리 말(우리가 함께 짓는 말)’을 써야 합니다.


  ‘참다운 이야기인 생각을 그려서 보이는 말’일 때에 ‘참말’이면서 ‘삶말’이고, 이러한 말만 오직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문서를 쓰거나 의사소통을 하자면 표준말이나 맞춤법을 따르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눈길은 언제나 ‘삶을 짓는 말’과 ‘생각을 짓는 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348.4.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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