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56. 한자말은 영어처럼 외국말

― 한국말, 우리말, 토박이말, 시골말, 숲말



  ‘한자’로 지은 말을 제대로 살필 줄 아는 학자가 무척 드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말은 으레 ‘외국말’인 줄 알면서, 막상 ‘한자’로 지은 말이 ‘외국말’인 줄 제대로 느끼거나 바라보는 지식인이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한자로 지은 말이 퍽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사람이 여느 때에 늘 쓰는 말 가운데 ‘한자로 지은 말’은 얼마 안 됩니다.


  한국말사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사전을 베낀 탓에, 일본에서나 쓰던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아직 꽤 많이 나돕니다. 한국사람이 쓴 일도 쓸 일도 없는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뜬금없이 실리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자가 쓰던 ‘궁중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지나치게 많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슬기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조선 무렵에 정치권력을 거머쥔 사람은 ‘인구 통계로 치면 몇 퍼센트’가 될까요? 1퍼센트는커녕 0.1퍼센트도 안 됩니다. 조선 무렵에 ‘중국글로 쓴 책’을 익히면서 지식인 노릇을 한 사람도 ‘인구 통계로 치면 0.1퍼센트는커녕 0.01퍼센트’조차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중국글로 쓴 책’에 적힌 한자말이 그대로 나오고, ‘궁중 한자말’도 고스란히 나와요. 이와 달리, 조선 무렵에 이 땅에서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에 이르던 여느 사람이 쓰던 말은 모두 실리지 않습니다. 고장마다 다르게 쓰던 고장말을 한국말사전에 제대로 담지 않아요. 시골마다 다르게 살려서 쓰던 시골말을 한국말사전에 알차게 싣지 못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토박이말’은 한국사람이 예부터 손수 지어서 쓰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토박이말’이나 ‘한국말’을 가리키기도 하고, 둘을 아우르기도 하는 이름입니다. ‘표준말’은 현대 사회나 정치나 문화를 펴면서 나라에서 한 가지 틀로 세운 말입니다. ‘시골말’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스스로 짓는 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로 지은 말입니다. 그러면, 한자말은 어디에 들어갈 만할까요? 한자말은 어디에도 들어갈 만하지 않습니다. 한자말은 한국말도 토박이말도 우리말도 표준말도 시골말도 아닙니다. 한자말은 그저 ‘한자말’입니다. 알파벳으로 지은 ‘영어’는 어떠할까요? 영어도 한국말이 아니고 토박이말이 아니며 우리말이나 표준말이나 시골말이 아닙니다. 영어도 그저 ‘영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자말과 영어는 모두 ‘외국말’입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외국)’에서 쓰는 말이 바로 한자말과 영어입니다.


  조선 무렵 궁중에서 한자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궁중에서는 왜 한자말을 썼을까요? 중국 정치를 섬기려는 뜻에서 한자말을 썼고, 조선 무렵 궁중에서는 ‘중국 한자말’을 썼습니다. 궁중에서 쓰던 ‘중국 한자말’을 한국 지식인도 받아들여서 썼습니다. 이들은 ‘중국 한자말’로 정치를 하고 사회를 지키며 문화를 폈습니다. 이들은 손수 흙을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느 사람(백성,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삶을 지으면서 ‘풀’이나 ‘나무’나 ‘숲’을 가꿀 적에, 궁중 권력자나 지식인은 ‘草’라든지 ‘木’이라든지 ‘林’ 같은 한자를 썼습니다.


  조선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 힘에 무너지면서 일제강점기가 되니, 이때부터 ‘중국 한자말’이 차츰 밀려나면서 ‘일본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오고, ‘일본말’까지 뒤따라 들어옵니다. 조선 사회는 마흔 해 가까이 식민지가 되어 짓눌려야 했는데, 식민지에서 풀려난 뒤에 ‘일본 제국주의 부역자’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한자말’과 ‘일본말’을 익히면서 공무원이 되거나 지식인 노릇을 하던 이들은 예전과 똑같이 ‘일본 한자말·일본말’로 글을 쓰거나 신문을 내거나 책을 묶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한국’으로 이름을 바꾼 이 사회에는 ‘중국 한자말’에다가 ‘일본 한자말’이 두루 퍼집니다. 정치권력자와 지식인은 ‘여느 시골사람이 쓰는 말’은 조금도 안 쓰면서 ‘권력자가 쓰는 한자’로 생각을 펴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선 무렵뿐 아니라 고려 무렵도 똑같습니다만,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우리말’이라고 할 ‘한국말’을 살피거나 가꾸거나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언제나 ‘다른 나라 말(외국말)’인 한자말을 썼고, 이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뜻이 같으나, 다르게 쓰는 한자말’이 몹시 많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궁중 사회와 지식 사회는 이웃 두 나라 정치권력을 섬기던 버릇으로 ‘다른 나라 말(외국말)’로 정치·경제·학문·문화·문학 따위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해방 뒤에 미군정을 거쳤고, 미국 사회와 문화 물결이 다시금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그만 ‘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 + 미국말(영어)’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다가 한국에서 정치와 지식을 거머쥔 이들이 ‘한국 한자말’을 새로 지어서 씁니다.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인 ‘한자말’인데, 한국에서 쓰는 한자말은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한국 한자말’ 이렇게 세 가지로 더 가지를 칩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한자말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도 쓸 만한 영어가 있으니, 외국말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느 사람이 쉽게 쓰는 수수한 한자말은 ‘외국말’에서 ‘들온말(외래어)’로 자리를 바꾸면서 ‘한국말’ 품으로 녹아듭니다. 외국말이기에 모두 손사래를 쳐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외국말을 받아들여서 쓰듯이 ‘학교’나 ‘교과서’나 ‘사회’ 같은 외국말(한자말)도 받아들여서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외국사람’이 아닌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으로서 스스로 우리가 쓸 말을 손수 짓는 넋을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외국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 아무렇게나 쓰는 삶이 아니라, 손수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 슬기로운 마음이 될 수 있어야지요. 오늘 우리가 한국말(우리말)을 새롭게 짓는다면, 이 말은 ‘숲말’입니다. 푸른 바람을 나누어 주면서 스스로 우거지는 숲처럼, 우리 삶과 사회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 바탕이 되는 말이라는 뜻에서 ‘숲말’입니다. 4348.3.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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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9. ‘자유로운’ 생각과 삶과 말

― 아이한테 들려줄 노래에 담는 말



  어른이 지어서 아이와 함께 부르려는 노래를 가리켜 ‘동요(童謠)’라고 하지만, 이 한자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현대문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널리 쓰던 말마디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동시’나 ‘동화’라는 낱말도 이와 같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에 안 써야 할 낱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을 거치든 중국을 거치든 미국을 거치든,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가장 알맞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새 낱말’을 지을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한 뒤 즐겁게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아직 안 실리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부를 노래요, 어린이가 즐기는 노래라는 뜻에서 ‘어린이노래’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한국에서는 지난날에 그냥 ‘노래’라고만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굳이 가른다면 ‘일노래’와 ‘놀이노래’가 있습니다. 어른은 일을 하니 ‘일노래’이고, 아이는 놀이를 하니 ‘놀이노래’입니다. 지난날에 아이가 부르던 노래는 모두 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예요. 그러니, ‘어린이노래’란 모두 ‘놀이노래’이면서 그냥 ‘노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얌전히 앉아서 듣거나 부르지 않아요. 춤을 추거나 웃거나 뛰놀면서 노래를 불러요. 어른들은 무대나 공연장 같은 데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이런 노래가 몹시 힘듭니다. 좀이 쑤시지요. 한편, 노래를 더 살피면 지난날 어른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들노래’와 ‘마을노래’로 가를 수 있어요. 들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고, 마을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면 ‘살림노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거나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이면서 ‘살림노래’로 여길 만해요.


  오늘날 널리 퍼진 어린이노래 가운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고,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지은 어른이나 오늘날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나 그냥 듣고 부릅니다. 그런데, 두 어린이노래에서 크게 잘못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산 위에서”와 “산 속 옹달샘”입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바닷바람입니다. “바다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도 “들에서” 불 뿐, “들 위에서” 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부는 바람”이나 “멧골에서 부는 바람”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사람들은 “산에 나들이를 갈” 뿐, “산 속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집 속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깊은 산에 옹달샘”이나 “깊은 멧골 옹달샘”처럼 어린이노래를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잘못 쓰는 말투라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를 ‘자유’로 보아야 할까요? 널리 퍼진 노래라 하더라도 잘못 쓰는 말투가 더 퍼지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할까요? 널리 퍼졌으면 잘못된 말투라 하더라도 그대로 써야 할까요? 널리 퍼지기 앞서 바로잡았으면 가장 나았을 테지만, 노래를 선보이거나 문학을 선보이거나 책을 선보이는 어른들은 ‘낱말 하나’와 ‘말투 하나’까지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은지 제대로 안 살피기 일쑤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살피지만, 말다운 말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갈래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가게에 놓인 과자에 ‘독성 물질’이 섞였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빵집에 놓인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이라고 해서 소와 닭을 수십만 마리나 산 채로 파묻기까지 하는 어른들 모습은 무엇일까요? 입에 들어가는 밥에서 아주 조그마한 잘못이 하나라도 드러나면, 하늘이 무너지듯이 깜짝 놀라면서 아주 발빠르게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생각을 가꾸는 말은? 사랑을 살찌우는 말은? 넋을 북돋우는 말은?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 마음을 이끕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사랑과 넋을 움직입니다. 널리 퍼진 노래에서 한두 군데 잘못된 대목이니, 슬쩍 눈을 감고 지나쳐도 될까요?


  자유로운 말이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말이란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을 곱게 가꾸면서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참다운 자유가 되리라 느낍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피는 까닭을 돌아봅니다. 마음을 알뜰살뜰 여미어 이웃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꿈을 짓고 싶기에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핍니다.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리는 까닭을 짚습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내 보금자리와 우리 마을을 모두 아름답게 일구고 싶기에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규칙이니까 지켜야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마음을 살찌우고 싶기에 말을 곱게 가다듬습니다. 원칙이니까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다 함께 기쁘게 노래하듯이 생각을 키우고 싶기에 글을 정갈히 추스릅니다.


  전남 광주에서 다달이 나오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2015년 1월호를 보면, 전남 곡성 수월리 김봉순 할매가 들려주는 “우덜이 날마다 밭고랑으로 기어댕긴께 도시사람들 묵제. 내 손이 키와서 전국이 다 묵제. 힘들다고 모다 호맹이 자리 땡개불문 모다 못 묵제(27쪽).” 같은 말마디가 고스란히 나옵니다. 전라말이요 곡성말이면서 수월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표준말이나 서울말로 고쳐서는 말맛이 나지 않습니다. 곡성 옆에 있는 구례에서는 구례말을 쓸 테고, 구례 옆에 있는 하동에서는 하동말을 쓸 테지요. 마산은 마산말, 진주는 진주말, 순천은 순천말을 씁니다. 자유롭게 쓰는 말이란 내가 나고 자란 터전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때에 참으로 자유로우면서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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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군포에서 내는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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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8. 이야기꽃 피우는 겨울에

― 말꽃을 피우는 바탕인 한국말사전



  봄에 피기에 봄꽃입니다. 겨울에 피는 꽃은 겨울꽃일 테지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봄꽃·가을꽃’은 올림말로 나오지만, ‘여름꽃·겨울꽃’은 올림말로 안 나옵니다. 요즈음 한글맞춤법에서는 한국말사전에 안 나오는 낱말은 띄어서 적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봄꽃·여름 꽃·가을꽃·겨울 꽃’처럼 달리 적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놀이노래’라는 낱말은 나오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은 안 나옵니다. ‘일노래’와 ‘들노래’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숲노래’나 ‘바다노래’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서 찾을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들과 숲과 바다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노래·숲 노래·바다 노래’처럼 적어야 할까요?


  한국에도 ‘노숙자(露宿者)’가 무척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깎아내리는 낱말이라 하면서 ‘노숙인(露宿人)’으로 고쳐서 써야 한다고도 합니다. 한자 ‘者’를 ‘人’으로 바꾸면 사람 대접도 달라진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예부터 ‘노숙’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아닌 길바닥에서 자거나 쉬거나 지낼 적에는 ‘한데’라는 낱말을 썼으며, 집에서 잠을 못 자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면 ‘한뎃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에 집이 없이 길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내는 이웃은 ‘한뎃잠이’입니다. 조금 더 살피면, 집이 없는 이는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외로운 이들입니다. 사회에서 쫓겨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떨꺼둥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가을이 저물 무렵, 그러니까 겨울 문턱에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캡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고구마 상자나 푸대를 놓고 겨우내 고구마를 삶아서 먹어요. 요새는 시골에서 비닐농사를 짓는 분이 매우 많기에 감자는 ‘비닐농사 감자’가 있고, ‘비닐을 안 쓰고 맨땅에 심어서 거둔 감자’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으레 ‘비닐 안 씌운 땅에서 키우는 고구마’인데, 땅바닥에 아무것도 씌우지 않으면 ‘맨땅’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농협이나 생협 같은 데에서는 한국말 ‘맨땅’을 안 씁니다. 일본에서 농사짓는 이들이 쓰는 한자말 ‘노지(露地)’를 빌어 ‘노지 감자’라고 해요. 왜 ‘맨땅 감자’라고는 말하지 않을까요? 왜 농협과 생협은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까요?


  곰곰이 살피면, 농협이나 생협에서 일하는 분 가운데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쯤 올려놓고 낱말을 알맞게 살피면서 쓰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느 공공기관과 일터뿐 아니라, 동사무소나 학교에서도 책상맡에 한국말사전 한 권 살포시 놓고서 즐겁게 한국말을 꾸준히 익히고 배우면서 서류를 꾸미거나 글을 쓰는 분이 드물어요. 시나 소설을 쓰는 이가 아니라면 한국말사전을 거의 안 봅니다.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수험생도 영어사전은 들추지만 한국말사전은 안 들춥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들추어도 뜻을 알 수 없기 일쑤예요. 이를테면 ‘파종’과 ‘씨뿌리기’를 들 수 있어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오면 시골에서는 모두 씨를 뿌리려고 연장을 손질하고 땅을 고릅니다. 이러한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 ‘파종(播種)’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으면, “곡식이나 채소 따위를 키우기 위하여 논밭에 씨를 뿌림. ‘씨뿌리기’, ‘씨 뿌림’으로 순화”로 풀이하는데,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으면 “= 파종”으로 풀이해요. ‘씨뿌리기’로 고쳐써야 한다는 한자말 ‘파종’인데, 막상 ‘씨뿌리기’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뜻풀이는 없이 ‘파종’이라는 낱말만 덩그러니 적어요. 그리고, ‘외롭다’를 찾으면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로 풀이하고, ‘쓸쓸하다’를 찾으면 “외롭고 적적하다”로 풀이합니다. 낱말풀이가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서야 한국말사전을 책상맡에 놓아도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창피하다’와 ‘부끄럽다’와 ‘수줍다’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려고 한국말사전을 살펴도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창피하다’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여 부끄럽다”로 풀이하고, ‘부끄럽다’는 “(1)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2) 스스러움을 느끼어 매우 수줍다”로 풀이하며, ‘수줍다’는 “숫기가 없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렵거나 부끄럽다”로 풀이합니다. 말풀이가 이리저리 오락가락입니다. 더군다나, ‘창피하다’라는 한국말하고 소리값이 같다면서 ‘猖披’라는 한자에서 이 낱말이 생겼다고 적기까지 하는데, ‘猖披’라는 한자말은 “미쳐 날뛰다”를 가리킵니다. 옛사람이 한문으로 적은 글에서 ‘猖披’를 “옷고름이나 치마끈을 풀어놓고 죄어 매지 않은 것”을 가리키면서 쓴 적이 있다고 하지만, 입으로 읊는 소리가 같다고 해서 함부로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창피하다’는 얼굴이 깎여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럽다’는 거리끼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이 있거나 잘못을 했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기 떳떳하지 않거나 숨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줍다’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거나 몸짓을 보이기 어려운 마음을 나타냅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슬기롭게 살펴서 제대로 알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옆에 즐겁게 놓으면서 말과 넋과 삶을 새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가을일을 모두 마치고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방바닥을 따숩게 하면서 온 식구가 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모여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겨울은 이야기꽃이 피는 철입니다. 겨울에 들과 숲에서는 동백꽃이나 복수초가 피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겨울에는 이야기꽃이 핍니다. 봄은 들에 들꽃이 흐드러지는 철이요, 겨울은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가꾸면서 이야기꽃과 생각꽃과 사랑꽃과 꿈꽃을 아름다이 일구는 철이에요.


  말꽃을 피울 수 있는 겨울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이야기 씨앗 한 톨을 곱게 심어서 이야기 열매를 알차게 맺는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겨우내 노래꽃, 춤꽃, 글꽃, 그림꽃, 사진꽃 모두 곱게 피울 수 있기를 바라요. 4347.11.25.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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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7. ‘사람’과 ‘국민’과 ‘백성’

― 누가 ‘이곳’에서 쓰는 말인가



  요즈음은 정부에서 ‘국민(國民)’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요즈음 생각 있다는 사람은 ‘시민(市民)’이나 ‘서민(庶民)’라는 낱말을 쓰는데, 한동안 ‘민중(民衆)’이나 ‘민초(民草)’ 같은 낱말이 두루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권력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저모 살피면, 정부에서 쓰는 말이나 지식인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을 좀처럼 안 쓰고, 여느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흔히 쓰는 ‘이웃’이라는 말도 어지간해서는 안 씁니다.


  ‘국민’은 일제강점기에 천황을 섬기던 이웃나라에서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퍼뜨린 한자말입니다. 이리하여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그렇지만 ‘국민투표’라든지 ‘국민의 소리’라느니 하면서, 이 낱말을 제대로 씻거나 떨치려는 사람은 거의 안 보입니다. 지난날 조선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가른 탓에, 사람을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고, ‘이웃’이란 시골자락에서 수수하게 흙을 짓던 사람들이 마을을 조촐히 이루어 서로 주고받는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지난날 조선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이웃 사이가 아니었으며, 양반과 농사꾼도 서로 이웃 아이가 아니었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쓰던 말이 ‘백성’이요, 이런 낱말에는 예전 사회와 정치 얼거리가 고스란히 깃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우리는 국민도 백성도 아니지만, 시민이나 서민도 아닙니다. 낱말로만 보아도 ‘시민’은 “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군이나 읍이나 면에서 사는 사람은 군민이나 읍민이나 면민이에요. 오늘날은 도시사람이 92%가 넘는다지만, 여느 사람을 함부로 ‘시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벼슬이나 특권이 없는 사람을 ‘서민’이라 한다는데, 이 또한 사람을 계급과 신분으로 가르는 이름입니다. 지식인은 ‘민중·민초’ 같은 이름을 한자말로 짓지만, 정작 민중이나 민초라 할 사람은 한자 권력이나 지식하고는 등진 채 살았습니다. 지식인이 “여느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쓰려 했다면, 여느 사람 살림과 터전을 헤아려 ‘시골사람’이나 ‘들사람’ 같은 이름을 써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와 나 사이에 울타리를 걷어내어 오롯이 ‘사람’이라고만 써야지요.


  지난날 ‘훈민정음’은 한자를 중국말대로 읽도록 적으려고 쓴 소릿값(발음기호) 구실을 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라는 그릇은 권력자와 지식인만 살짝 썼을 뿐, 여느 자리에서 살던 사람(백성)은 이러한 그릇을 알지도 배우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입으로 말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말을 담는 그릇입니다.그런데 오늘날 한글이라는 그릇에는 한국사람이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담기기보다는, 온갖 한자말과 영어가 어수선하게 섞일 뿐 아니라,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가 두루 파고들어 짬뽕이 됩니다.


  짬뽕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짬뽕이 되면서 한국말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으면서 어떤 생각을 말이나 글로 담으려 했는지 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잃거나 팽개치면서 어떤 넋을 말이나 글에 실어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가까지 잃거나 팽개칩니다.


  ‘사람’과 ‘人間’은 다릅니다. ‘사람’과 ‘human’은 다릅니다. 이러한 말이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이러한 말을 쓴 발자취와 나날도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나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북돋우기보다는, 학교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두어 입시지옥으로 내몰아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다가, 대학교를 마치면 다시 취업지옥으로 몰아세워서 도시에서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도록 들볶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사람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새로 아이를 낳을 적에도 사람다운 숨결을 쉬지 못합니다. 말이 말다웁기 앞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이 없습니다. 말이 말답게 서기 앞서 사람이 사람답게 설 수 있는 터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백성도 국민도 시민도 서민도 민중도 민초도 대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입니다. 모두 똑같이 사람으로 이 땅에 서서 다 함께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사람으로서 쓸 말을 생각할 노릇이고, 이웃끼리 주고받을 말을 헤아릴 노릇이며, 동무끼리 나눌 말을 살필 노릇입니다.


  깨끗하다는 토박이말을 살린다거나, 지식을 키우려고 한자말이나 영어를 섞어 써야 한다거나, 죽은 옛말을 살린다거나, 사자성어를 부려 써야 한다거나, 시사상식을 키워야 한다거나, 이런 허울이나 저런 틀에 갇히지 말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쓸 말을 찾고, 이웃과 이웃이 아낄 말을 깨달으며, 동무와 동무가 어깨를 겯을 말을 지어서 가꿀 노릇입니다.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어떤 말’로 ‘국무회의’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한국말’을 썼을까요, 아니면 중국말을 썼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뿐 아니라 양반은, 그무렵 이 나라에서 99%를 웃돌던 여느 시골자락 흙지기가 수수하게 쓰던 ‘한국말’로 정치나 정책을 펼쳤을까요, 아니면 중국말로 말과 글을 썼을까요?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학자와 교사는 어떤 말을 쓰는가요? 교과서에 얽매인 말을 쓰는가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는가요? 높고 낮은 신분이나 계급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말’을 여느 사람 눈높이로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쓰는가요?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잘 캐내든 말든 놀랍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이웃과 동무를 아끼는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날마다 새롭게 배워서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4347.12.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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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1-31 01:57   좋아요 0 | URL
사람다운 말, 맞습니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말. 또 배우고 갑니다.

숲노래 2015-01-31 09:58   좋아요 1 | URL
사랑스러우면서 평화로운 말이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람이 되는 말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민들레처럼 2015-01-31 11:23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상관이 없는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아내를 부르는 말이 무엇인가요? 주로 저희 집사람은 여보, 저는 당신 이렇게 부르는데. 부부 사이는 평등하다고 해서 임자, 가시버시..이런 말들이 있던데 어떻게 부르는게 제일 좋을까요?

숲노래 2015-01-31 11:41   좋아요 1 | URL
http://blog.aladin.co.kr/hbooks/7343434

이 주소에 쓴 글이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쓰든 `말하는 사람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져요.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을 쓰더라도
말하는 사람 마음이 곱지 않으면
고운 말은 태어나지 못해요.

예부터 시골에서는 `이녁`이나 `임자` 같은 말을 썼어요.
어느 한쪽 성별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에 없어요.
둘을 아우르는 이름만 있답니다~

`여보`는 ˝여 보시오˝ 하고 부르는 말일 뿐이랍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내는 문화잡지 2015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


말넋 45. ‘눈결’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다

― 함께 놀며 지은 말을 물려준다



  시를 쓰던 김남주 님이 있습니다. 1994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우다가 몸이 너무 나빠서 쉰 살이 안 되어 죽었습니다. 이녁 동생은 시인이 나고 자란 전남 해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산다 하고, 《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2014)라는 조그마한 책에 이녁 동생 목소리가 전남 해남 고장말로 찬찬히 흐릅니다. 25쪽을 보니 “우리 논 옆으로 조그마한 똘(실개천)이 항시 흘러요.” 같은 말마디가 나옵니다.


  책에서는 묶음표를 치고 ‘실개천’이라 덧붙입니다. ‘실개천’과 같은 뜻이라는 소리일 테지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개천(-川)’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라 하고, ‘개골창’은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해요. 그러니, ‘개천’은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이 이어지도록 판 물줄기” 를 가리켜요. 요즈음은 도시가 커지면서 개천이나 개골창을 보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이밖에 다른 물줄기를 구경하기도 퍽 어려워요. 이를테면, 시내와 내와 도랑과 개울과 가람과 개를 보기란 아주 어렵지요.


  ‘시내’는 “조그마한 내”를 가리킵니다. ‘내’는 “‘시내’보다 크지만 ‘가람(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킵니다. ‘가람(강)’은 “넓고 크게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고, ‘개’는 “가람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가리켜요. ‘도랑’은 “매우 작고 좁은 개울”을 가리키고, ‘개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키지요.


  도랑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내가 되며, 내는 가람이 됩니다. 가람은 개를 거쳐 바다로 갑니다. 물줄기는 흐릅니다. 골골샅샅 다른 물줄기가 흐릅니다. 예부터 물을 아주 알뜰히 여기고 고이 건사했기에 물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조그마한 개울은 ‘실개울’이고, 논에는 ‘논도랑’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냇물이 꽁꽁 얼어요. 실개울도 개울도 도랑도 얼어붙습니다. 겨울논에 물을 대면 논에는 얼음판이 널찍하게 생깁니다. 추운 고장에서는 겨울볕에도 ‘논얼음판’이 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얼음이 언 곳을 찾아서 발을 지치느라 부산합니다. 신발 바닥에 쇳날을 박지 않아도 얼음을 슬슬 지치면서 즐겁습니다. 솜씨 좋은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나무를 만져서 썰매를 만듭니다. 썰매에는 한 사람이 탈 수 있고 둘이 탈 수 있습니다. 서로 갈마들면서 놀 수 있습니다.


  도시에는 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개울도 실개울도 시냇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사람이 헤엄치기 어려운 ‘가람(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겨울에 이곳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골목 한쪽을 놀이터로 삼아서 비료 푸대를 타든 맨몸으로든 눈놀이를 했어요.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을 굴려 눈사람을 빚으며, 눈길을 타며 눈썰매 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놀이’가 아니에요. 요새는 도시에서 따로 시설을 지은 ‘눈썰매장(-場)’이라든지 ‘스노우파크(snowpark)’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노는 곳이기에 ‘놀이터’이듯 눈썰매를 탄다면 ‘눈썰매터’여야 할 텐데, 이처럼 이름을 짓지 못합니다. 겨울에 눈놀이를 즐기는 곳이라면 ‘눈놀이터’여야 할 테지만, 이렇게 이름을 짓지 않고 ‘스노우파크’가 되어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 있는 시골에서는 여름에 ‘여름놀이’나 ‘물놀이’라 하지 않고 ‘워터파크(waterpark)’라 해요.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으니, 33쪽에 “아이들에게는 긴장을 풀고 숨을 쉴 여유가 필요하다. 놀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놀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틈이 있어야 하고, 어른들은 마음껏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따로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시설에서가 아니라, 집이나 일터나 학교 둘레에서 넉넉히 뛰놀거나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을이나 동네마다 있던 커다란 나무그늘이 여름날 놀이터요 쉼터입니다. 시내와 개울과 도랑도 놀이터이면서 쉼터입니다. 어른은 시내와 개울과 도랑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면서 일하지만, 일하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물놀이를 하고 까르르 웃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른도 아이도 ‘개울’이라는 낱말이나 ‘눈싸움’이라는 낱말이나 ‘시냇물’이라는 낱말이나 ‘눈사람’이라는 낱말을 입에 굴리기 어렵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이나 그림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막상 맨눈으로는 삶자리 둘레에서 못 보거든요.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에서 늘 마주하고 만나며 부대끼는 말입니다. 책으로만 읽은 말은 머리에 안 남습니다. 살면서 몸으로 겪는 말이 머리에 남습니다. 책에서만 본 꽃은 냄새나 빛깔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들이나 숲이나 밭에서 만나는 꽃을 살그마니 쓰다듬을 적에 꽃내음과 꽃빛을 제대로 압니다. 맨눈으로 보고 맨손으로 만지며 맨몸으로 마주하는 꽃은 오래도록 이름을 떠올려요. 개울을 집 둘레에서 못 보고 사전이나 도감에서만 본다면, 동네에서 골목을 자동차한테 빼앗겨 동무들과 눈싸움을 하지 못하고, 동무들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어쩌다가 스노우파크에 나들이를 간다면, 겨울과 눈과 썰매와 고드름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얼굴이나 손바닥으로 받으면 차가운 느낌이 상큼할 뿐 아니라, 눈이 녹아서 물방울이 되기 앞서 어여쁜 무늬(결정)를 볼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눈결’이나 ‘눈무늬’라 할 텐데,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날에도 이 눈결이나 눈무늬는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먼 옛날부터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가 어우러지면서 지은 낱말입니다. 우리는 옛 어버이와 아이한테서 ‘개울’과 ‘썰매’와 ‘놀이터’라는 낱말을 물려받았는데, 앞으로 어떤 낱말을 뒷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7.12.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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