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2. 한국말이 흘러온 길

― 싱그러운 말과 책에 담긴 글



  시인 신현림 님은 아이들과 함께 읽을 아름답고 즐거운 동시를 살피다가 어느새 스스로 동시를 씁니다. 누구보다 이녁 딸하고 함께 읽으면서 즐길 이야기요 동시이기에, 스스로 써서 나눌 때에 한결 환하며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초코파이 자전거》(비룡소 펴냄,2007)라는 동시집을 읽습니다. 맨 처음 실린 〈초코파이 자전거〉를 보면 “초코파이 자전거를 탔더니 / 바람이 야금야금 / 다람쥐가 살금살금 / 까치가 조금조금 / 고양이가 슬금슬금 먹어서”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봄바람〉을 읽으면 “봄바람에 / 내 머리카락 살랑살랑 / 엄마 치마 하늘하늘 // 봄바람에 / 벚꽃잎 화르르르 // 어느새 / 봄이 활짝 피었네”와 같은 이야기가 흘러요. 〈청소〉를 읽으면 “쓱쓱쓱 빗자루로 쓸고 / 싹싹싹 걸레로 닦고 / 쓱쓱싹싹 청소를 했네 // 어느새 방 안은 / 환한 보름달”과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집에 실은 다른 동시를 읽어도 이처럼 낱말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면서 구슬처럼 또르르르 구릅니다. 시나 동시이기에 말구슬이 곱게 구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말을 처음 배울 아이들과 나눌 사랑을 마음속으로 곱게 그렸기에, 시나 동시에 고운 말이 그득그득 깃들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곧 아이들이 쓰는 말이 됩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레 말을 하며 살면, 아이들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깊이 살피지 않거나 널리 돌아보지 않으면서 거칠거나 뒤틀린 말을 아무렇게나 쓰며 살면, 아이들은 거칠거나 뒤틀린 말에 아무렇게나 젖어듭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학교를 다닙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오래 보냅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들려주는 말을 가장 오래 듣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가장 오래 들여다봅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아이들은 ‘교사 말투’와 ‘교과서 말투’에 젖어들어서 이러한 말투대로 저희 말투를 삼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학교에서 어른(교사)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는 어떤 말이 실렸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밖에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쓰는 말이 거칠거나 뒤틀렸다고 한다면, 아이들 탓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이룬 사회와 교육이 거칠거나 뒤틀린 탓입니다. 아이들한테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숨결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주지 못한 탓이지요.


  한국말이 흘러온 길을 생각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쓴 말입니다. 정부에서 내놓은 통계를 보면 2013년까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92%가 넘는다고 합니다. 통계에 가려진 숫자를 본다면, 그러니까 주민등록은 시골에 두고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 숫자까지 헤아린다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99%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고등학교만 마치면 거의 모두 도시 학교로 빠져나가거나 도시에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는데, 초·중·고등학교를 아예 도시에 자취방을 얻어 다니는 아이가 무척 많습니다.


  1960년에는 시골사람이 60%였어요. 더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0%를 넘었어요. 조선이나 고려 같은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9%라고 할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이 나라를 이룬 거의 모든 사람은 시골사람이었습니다.


  지난날 시골에서는 글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고 책을 읽거나 읽히지 않았습니다. 시골사람은 한자나 한문을 안 썼고, 이런 글은 알지 않았습니다. 한자나 한문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1%가 될까 말까 했다고 할 만합니다. 조선이나 고려 무렵이라면 한자나 한문을 알던 사람은 훨씬 적었겠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쓴 말은 늘 ‘한국말’이었고, 집권자나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쓴 말만 ‘한자하고 얽힌’ 셈입니다. 이런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도 엇비슷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진 사람들은 ‘글(한자나 한문)’을 알지 않았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한자로 이룬 문화’를 사람들이 두루 마주한 지는 아직 백 해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집권자와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입으로 나누는 말’로 삶과 노래와 이야기와 마을을 지으며 아이를 낳아 돌보고 흙을 일구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 아닙니다. 정치 권력을 누리거나 지식 권력을 누린 몇몇 사람만 쓰던 한자나 한문은 ‘문화권’이 아닌 ‘권력’이었을 뿐입니다.


  이 같은 대목을 살핀다면, 오늘날 우리가 즐겁게 쓰면서 아름답게 가꿀 ‘말’이란 무엇인지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싱그러운 말이란 무엇이고, 책에 담긴 글이란 무엇인지 잘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말이란, 그냥 쓰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란, 우리 생각을 담아서 이웃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음고리이자 징검돌입니다. 말이란, 집과 밥과 옷을 짓는 삶에서 밑바탕을 이룹니다. 말이란, 언제나 노래가 되고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먼먼 옛날부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글(한자)과 책을 모르던 사람들이 스스로 노래를 짓고 모든 삶을 입말로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삶을 노래로 듣고 이야기로 배우면서 ‘몸으로 익히는 삶말’을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익혀 새롭게 하루를 지었습니다. 풀이름 하나부터 씨앗을 심어 거두는 모든 얼거리를 몸으로 함께 일하고 놀면서 입말로 배웠어요.


  흐르고 흐르는 말입니다. 냇물처럼 흐르는 말입니다. 구름이 모여 비를 뿌리고, 빗물은 숲과 들에 깃들어 골짝물이나 시냇물이나 샘물이 됩니다. 우리는 물을 즐겁게 마시면서 말도 즐겁게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냇물이나 샘물이나 빗물이 아닌, 댐에 가둔 수돗물을 마십니다. 숲과 들하고는 동떨어진 도시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지냅니다. 사회가 바뀌었으니 말도 바뀔 만할 텐데, 그러면 한국말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노래처럼 들려주는 구슬 같은 동시는, 아이와 함께 어른도 기쁘게 누릴 삶말은, 참으로 어디에 있을까요.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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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군포시에서 내는 문화잡지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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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0. 삶을 비추는 거울

― 가을에 부는 바람과



  제비는 팔월 끝무렵에 한국을 떠납니다. 삼월 끝무렵부터 사월 첫무렵에 한국으로 날아오는 제비는 한국에서 옛집을 손질해서 알을 낳고 새끼를 돌보다가 칠월 첫무렵에 새끼들한테 날갯짓을 가르치고는 팔월 끝무렵에 다시 태평양을 가로지르기까지 바지런히 날개힘을 키웁니다.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림을 가꾸기에 언제나 제비를 바라보면서 제비 한살이를 읽습니다. 해마다 몇 월 몇 일에 제비가 돌아오는지 읽고, 언제쯤 알을 낳으며, 알을 낳은 뒤로는 수컷 제비가 얼마나 자주 제비집을 들락거리고, 알에서 새끼가 깐 뒤로는 암수 제비가 얼마나 자주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날마다 제비집을 살피면서 새끼가 얼마나 자라는가를 헤아립니다. 이윽고 제비가 둥지를 떠나는 날을 돌아보고, 마을 너른 들에 제비가 무리를 지어 마지막 춤사위를 벌이다가 다 같이 태평양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누군가 제비 한살이를 좇아서 지은 책을 읽어도 제비 한살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비 한살이를 책으로 엮자면 퍽 여러 해 동안 제비를 지켜보았을 테니, 책만 보아도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박쥐라든지 소쩍새라든지 꾀꼬리 한살이 이야기도 누군가 알뜰히 엮은 책을 장만해서 읽으면 고맙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곁에 두는 한국말사전도 이와 같지요. 뜻있는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땀을 흘려서 엮은 사전을 뒤적이면서 말을 새롭게 살펴서 익힐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곁에서 모든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책이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읊는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배웁니다. 아이들 몸짓과 말짓은 모두 어버이한테서 삶으로 물려받습니다. 어버이는 학교나 학원이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아닌 삶을 가르칩니다.


  가위질을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수저질을 책으로 익히지 않습니다. 고무줄놀이나 소꿉놀이를 책으로 배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뜀박질을 할 적에 책으로 익히는 아이는 없습니다. 요즈음은 요리학원이나 요리책이 많기는 합니다만, 먼먼 옛날부터 밥짓기는 늘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아주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종이책이 아니어도 인터넷이나 손전화 기계에서 찾아보면 말풀이를 곧장 알아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문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종이사전뿐 아니라 인터넷사전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작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이고, 슬기롭게 못 쓰곤 합니다.


  아주 쉽게 말풀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왜 오늘날 사람들은 한국말을 더 모르고, 한국말을 더 잘못 쓰며, 일본 말투라든지 번역 말투에 왜 자꾸 길들거나 물들기만 할까요? 대학 교육 받는 사람이 늘고, 요즈음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의 모든 사람이 꼬박꼬박 다니는데, 왜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아름답게 못 쓰고 참다웁게 못 쓰며 사랑스럽게 못 쓸까요?


  예부터 말을 ‘한국말사전’이나 ‘책’이나 ‘교재’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부터 말은 어버이가 아이한테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사전도 책도 교재도 없었지만, 아주 많은 말을 아주 쉽고 빠르며 즐겁게 아이한테 물려주었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오래 다니고 사전도 책도 교재도 많지만, 정작 한국말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 담은 낱말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머리에 담아서 언제 어디에서나 홀가분하게 흔히 쓰던 말’입니다. 지식이 아닌 말이었고, 정보가 아닌 말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한국말사전이나 도감이 없었어도 풀과 물고기와 나무와 꽃과 새와 짐승과 온갖 이름을 다 알았어요. 이름을 다 알 뿐 아니라 쓰임새나 한살이나 빛깔과 무늬를 모두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베틀’이나 ‘절구’나 ‘물레’라는 이름을 압니다. 그러나 베틀을 어떻게 만들고, 베틀로 어떻게 천을 짜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기둥’이나 ‘처마’나 ‘들보’라는 낱말을 압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를 어떻게 베어 어떻게 손질할 때에 기둥이 되고 처마가 되며 들보가 되는 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스로 나무를 베어 손질한 뒤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바람이 붑니다. 사월에서 오월로 접어드는 바람빛이 다르고, 칠월에서 팔월로 넘어가는 바람결이 다릅니다. 오월에서 유월로 넘어설 때 바람맛이 다르며, 팔월에서 구월로 들어서는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아니, 하루하루 바람노래가 달라요.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쐽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후끈후끈한 바람을 쐬었다면, 이제는 보들보들 산뜻한 바람을 쐽니다. 우리 식구는 유월부터 칠월을 지나 팔월까지 마을 골짜기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골짜기로 가요. 우리 식구는 이를 ‘골짝마실’이라 합니다. 골짝마실을 하면 골짝물에 몸을 담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고, 푸르게 우거진 숲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물소리는 언제나 물노래입니다. 냇물노래이고 골짝물노래입니다.


  우리 마을 뒤쪽을 감싸는 멧자락에 있는 골짜기는 아직 깨끗합니다. 다슬기와 가재와 도룡뇽과 송사리가 함께 삽니다. 이곳에는 아직 개똥벌레가 밤에 춤을 추리라 생각합니다. 군청에서 시멘트로 덮은 데가 있으나, 흙바닥이 그대로인 곳이 있으니, 개똥벌레도 다른 숲짐승과 숲벌레도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거나 알을 낳을 만합니다. 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숲이 이루어집니다.


  바람이 철을 알려줍니다. 바람은 철과 달과 날을 알려줍니다.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으면 하루와 한 해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부터 지구별 모든 겨레는 숲과 바람과 해와 흙과 풀을 읽으면서 말을 짓고 넋을 가꾸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어머니 품이란, 시골에서 흙을 가꾸는 포근한 손길로 아이를 사랑하는 넋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는 말이란, 푸르게 우거진 숲을 사랑하고 맑게 부는 바람을 누리는 즐거운 빛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느끼고 찾을 때에 우리가 쓰는 말은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삶을 사랑스레 가꾸고 나누는 하루를 새롭게 열 적에 우리가 쓰는 글은 살가이 짓는 웃음노래가 됩니다. 4347.8.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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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17 21:31   좋아요 0 | URL
군포시에서 문학잡지도 나오나요?

그건 그렇고 낱말은 알지만 그 쓰임새나 내용을 모른다는 것, 그래서 글은 읽었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것같습니다. 누구는 한자교육을 안해서라고 말하던데, 실은 삶에서, 생활에서 그것들을 보고 배울 일이 없어서 그런거겠지요.

숲노래 2014-12-18 07:31   좋아요 0 | URL
올해에 네 차례 우리말 이야기를 실었는데...
막상 이 글을 올리려니
그 책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
`군포시 사외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책이 아주 멋지게 나온답니다.

한자말을 잔뜩 쓴 논문 같은 인문책을 알아듣자면 한자를 가르쳐야 할 테지요 ^^
그러나, 지식으로는 다 `읽`어도 `알`지는 못하기 마련이에요.
하양물감 님 말씀이 옳습니다 ^^
 

말넋 44. 말은 흐르지만 사회는 갇혀서

― ‘한국말’은 어디에서 있는가



  일본사람 사노 요코 님이 쓴 글을 윤성원 님이 한국말로 옮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106쪽에서 “남동생은 상처받은 마음을 동물을 통해 치유하려 했다. 사랑새를 애지중지하며 정성껏 돌보았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사랑새’라는 이름을 보고 살짝 놀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꼬(いんこ)’라는 일본말을 쓸 뿐, ‘사랑새’라는 한국말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잉꼬’라 말하면서, 이 이름이 일본말인 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본사람이 가리키는 이름 말고 한국말로 예부터 가리키던 이름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가리키던 한국말을 배우거나 들은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요?


  그런데, ‘사랑새’라는 이름을 잘 살려서 옮긴 책은 “우리 엄마 시즈코”가 아닌 “나의 엄마 시즈코상”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私の’로 적었을 테지만, 이를 한국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내 엄마”라 하든 “우리 어머니”라 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나의’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내’와 ‘너·네’가 한국말입니다. ‘나의·너의’는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동물을 통(通)해 치유(治癒)하려 했다”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한글이지만 알맹이는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적자면 “동물로 다스리려 했다”나 “짐승을 곁에 두어 달래려 했다”로 고쳐써야 합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精誠)껏 돌보았다”는 겹말입니다. ‘애지중지’와 ‘정성껏’은 같은 뜻입니다. 무엇보다 ‘애지중지’이든 ‘정성껏’이든 한국말로 다시 옮기면 ‘살뜰히’나 ‘알뜰히’입니다. 두 가지 말을 함께 쓰고 싶다면, “사랑새를 알뜰살뜰 돌보았다”처럼 한국말로 제대로 적으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어떻게 배울까요.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집에서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어떻게 알려주거나 물려줄까요.


  학교는 ‘배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교과서 지식만 배우는 곳이 되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교과서는 대학입시에 얽매여 대학입시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다고 한다면 ‘대학입시 지식을 배우’는 셈입니다.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교과서 지식을 배울 뿐이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슬기롭게 배우지 못합니다.


  얼마 앞서 전남 고흥 도화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교 2학년 푸름이가 쓴 글에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가 있어서, 이 말마디를 칠판에 적고 다른 푸름이한테 “타인을 배려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아무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왜 푸름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지 아무 말을 못할까요? 아주 마땅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같은 말은 이 말을 듣는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알아들을 말이요, 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도 모두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는 ‘한국말로 다시 풀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훈화라든지 지식인이 쓰는 글에 ‘타인’이나 ‘배려’ 같은 말마디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곧바로 느끼거나 알 만한 말이 아닌 셈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옮기거나 ‘한국말로 제대로’ 거듭 풀어야 하는 말인 셈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영어는 영어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일본말은 일본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무엇인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하면서 지냅니다. 이러면서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뒤죽박죽 파고듭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얼거리가 퍽 오랫동안 뿌리를 내립니다.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해방을 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 해 동안 ‘시름시름 앓는 한국말’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잘못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주 많은 사람들 입과 손에 들러붙습니다. 틀림없이 잘못 쓰는 말이지만, ‘잘못인 줄 못 느끼’기도 하고,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매무새가 없’기도 합니다. 잘못 깃든 버릇대로 내처 달립니다. 잘못 물든 버릇을 바로잡아서 슬기롭고 똑똑하며 아름답게 거듭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오덕 님은 지난날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 책은 ‘이대로만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찬찬히 짚으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다스릴 줄 알아야 ‘말과 넋과 삶이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부터 열까지 하루아침에 모두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날마다 한 가지씩 가다듬어서 찬찬히 바로잡거나 고칩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도 안 고치고 하나도 안 다듬습니다.


  말은 흐릅니다. 말은 흐르니 말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납니다. 고인 말이란 없습니다. 갇힌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얼마나 잘 흐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학교와 사회와 정치와 문화는 부드럽게 잘 흐르는가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흐르는가요? 말은 사회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한국말이 한국말다움을 잃는다면, 한국 사회가 ‘한국 사회다움’을 잃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이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시름시름 앓는다’면 한국 사회가 제자리를 못 찾고 이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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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펴내는 이야기책에 싣는 글입니다.

말과 넋과 삶을 모두 아우르면서 사랑하는 길을

우리 모두 슬기롭게 헤아리기를 빕니다.


..



말넋 37. 어른이 쓰는 말 한 마디

― 아이들은 모든 말을 물려받는다



  어느 그림책을 읽다가 “오렌지 나무 가지 위에는 큰부리새가 앉아 있었지요”, “사과나무 아래로 소풍 가서 점심을 먹었어요”, “난로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야채를 썰어 냄비 속에 넣고”, “선실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고” 같은 글월을 보았습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월이기 때문에, 여느 어른이라면 이 글월을 그대로 아이한테 읽어 줄 테고, 글을 제법 읽는 아이라면 이 글월을 고스란히 읽으면서 이러한 말투를 모두 받아들이리라 느낍니다.


  요새는 이런 글월이 올바른지 안 올바른지 짚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림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도 이런 대목을 손질하거나 다듬지 않기 일쑤입니다. 출판사에서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살피지만, ‘올바르게 쓰는 한국말’인지 아닌지까지 다루지 못하곤 합니다.


  어른들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문사나 잡지사에는 교열부가 있는데, 교열부에서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살필 뿐, ‘올바르거나 알맞게 쓰는 한국말’까지 건드리지는 못하곤 해요.


  어른들이 쓰는 모든 말을 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어른들이 거칠게 말하면 아이들도 거친 말씨를 물려받습니다. 어른들이 부드럽게 말하면 아이들도 부드러운 말씨를 물려받아요. 어른들이 마구잡이로 말하면 아이들도 마구잡이 말버릇을 물려받고, 어른들이 상냥하게 말하면 아이들도 상냥한 말버릇을 물려받아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얄궂은 말씨를 어른들이 털어내지 않으면, 아이들도 이런 말씨를 똑같이 씁니다. 어렵거나 딱딱한 말씨로 어른들이 늘 이야기하면, 아이들도 그만 어렵거나 딱딱한 말씨에 길듭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교과서로 배우면서 교과서 말투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퍽 많은 어른들은 교과서에 어떤 줄거리를 담느냐 하는 대목을 따지곤 하는데, 교과서 말투와 낱말이 ‘아이가 배울 만한 말투와 낱말’인지 아닌지 하는 대목은 안 따지거나 못 따집니다.


  앞서 든 보기글에서는 ‘위’와 ‘아래’와 ‘속’과 ‘안’을 잘못 썼습니다. 이 글월을 바로잡겠습니다. “오렌지나무에는 큰부리새가 앉았지요/오렌지나무 가지에는 큰부리새가 앉았지요”, “사과나무 그늘로 나들이 가서 도시락을 먹었어요”, “난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푸성귀를 썰어 냄비에 넣고”, “선실로 서둘러 들어갔고”


  새는 “나뭇가지 위”에 앉지 않습니다. 냄비는 “난로 위”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한국말에서 ‘위’를 쓰면, 나뭇가지 위나 난로 위는 ‘하늘’입니다. 잘 생각해 보셔요. “새가 나무 꼭대기에 앉았어요”나 “새가 우듬지에 앉았어요”나 “새가 지붕에 앉았어요”처럼 쓸 뿐입니다. “지붕 위”라든지 “우듬지 위”는 모두 하늘입니다. 물건을 올려놓을 적에는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책상 위”에 놓지 않아요. 아니, 놓을 수 없습니다. “사과나무 아래”라고 한다면, 나무뿌리가 있는 땅속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나들이를 가서 도시락을 먹으려 한다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에 앉겠지요. 그러니 “사과나무 그늘”로 고쳐서 써야 옳아요. 다만, “사과나무 밑”처럼 쓸 수는 있습니다. ‘아래’와 ‘밑’은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말하지요? “등잔 아래가 어둡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아래’는 ‘위’와 맞물리면서 높이를 가리키는 자리에만 씁니다. ‘밑’은 바닥과 가까운 어느 자리를 가리키면서 쓰기에 “사과나무 그늘”이나 “사과나무 밑”이라고만 쓸 수 있습니다.


  냄비에 무엇을 넣는다는 대목과 비슷하게, “가방에 책을 넣는다”라든지 “주머니에 손을 넣다”라든지 “지갑에 돈을 넣다”라든지 “저금통에 돈을 넣는다”처럼 씁니다. 이런 글월에는 ‘안’이나 ‘속’을 쓰지 않아요. 한자말로는 ‘수중(手中)’을 쓰는데, 한국말로는 “손 안”처럼 쓰지 않습니다. “수중에 돈이 얼마 있니?”처럼 묻겠지만 “손 안에 돈이 얼마 있니?”가 아니라 “손(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니?”처럼 물어야 올바르게 쓰는 한국말입니다.


  “선실로 들어갔다”와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는 어떠할까요? “자,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라든지 “방에 가서 자야지”라든지 “학교에 가요”라든지 “교실로 들어가자”처럼 씁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나 “방 안에서 자야지”나 “학교 안에 가요”나 “교실 속으로 들어가자”처럼 쓸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는 ‘in’이 있고 한자말에서는 ‘中’이 있는데, 한국말에서는 ‘속/안’을 아무 데나 함부로 안 씁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사전을 보면, “지갑 안”이나 “극장 안”이나 “공원 안” 같은 보기글을 함부로 실어요. 이런 말은 한국말이 아닌데 말이지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다”이지, “극장 안에 가서 영화를 보다”가 아닙니다. “공원에서 담배 피지 마셔요”이지 “공원 안에서 담배 피지 마셔요”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시인 서정홍 님은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2008)이라는 동시집에 〈우리 말 1〉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사고 다발 지역이 무슨 뜻인지 /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알았지만 / 사고 많이 나는 곳은 /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물어보지 않고도 / 알 수 있는 쉬운 우리 말, / 나는 우리 말이 좋다.”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에는 우리 삶이 깃듭니다. 아이들이 물려받는 말 한 마디에는 어른들이 지은 삶이 고스란히 깃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지난날에는 한국말사전이나 여러 가지 책이 없었어도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말을 슬기롭게 물려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말사전도 여럿 있고, 아이들은 학교를 오랫동안 다니는데, 정작 한국말을 제대로 알거나 살피거나 다루거나 쓰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지난날에는 ‘위·아래·속·안’을 잘못 쓰는 어른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말을 책이 아닌 내 둘레 어른한테서 배웠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줄 만할까요? 우리 어른들은 날마다 어떤 말로 우리 삶을 나타내거나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요?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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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6. ‘익숙한 한자말’이기에 고친다

― 한자말을 왜 바로잡아야 하는가



  책을 읽을 적에 ‘맞춤법 살피기’나 ‘띄어쓰기 바로잡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자면 ‘책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는 ‘이야기나 줄거리 읽기’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찬찬히 읽고, 어떤 줄거리를 들려주려는지 가만히 읽으려면 그예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생각하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얽매여 다른 대목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이웃이나 동무와 이야기를 나눌 적에 무엇을 듣습니까? ‘이야기’를 듣겠지요? 말투가 거친 사람이 있고, 어느 고장에서는 사람들이 으레 거칠다 싶은 말씨로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경상도나 전라도에 가서 깜짝 놀라거나 어리둥절할 수 있어요. 말씨와 말투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내기라 하더라도 말씨와 말투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와 줄거리’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서로 오붓하고 즐겁게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돌아볼 노릇입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들, 이를테면 서너 살이나 예닐곱 살 아이는 ‘틀린 말’을 곧잘 씁니다.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바로잡아 주더라도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자꾸 틀려요. 그런데, 아이가 자꾸 틀린 말을 할 적에 ‘틀린 말 바로잡기’만 끝없이 시키면 어찌 될까요? 둘 사이에 이야기가 될까요? 아이는 그만 입을 앙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할 테지요. 더더구나, 두어 살이나 서너 살 아이가 ‘틀린 말’을 쓰더라도 어버이라면 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밝히려는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아차립니다. 어버이는 ‘틀린 말 바로잡기’가 아니라 ‘이야기 나누기’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옆사람이 ‘한자말을 섞어서 지식을 자랑하든’ 말든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온갖 영어를 섞어서 쓰든’, 아니면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이야기를 헤아린다면 모두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몇 가지 알려줄 수 있어요. 글을 다 읽고 나서 이야기와 줄거리를 찬찬히 곰삭힌 뒤 몇 가지 짚을 수 있어요.


  《아델과 사이먼》(베틀북 펴냄,2007)이라는 예쁜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도 예쁘고 이야기도 예쁩니다. 이 그림책을 찬찬히 읽다가 “둘은 그림 찾기를 포기하고 공원으로 갔어요(7쪽)”라는 대목에서 ‘포기(抛棄)하고’라는 한자말을 ‘그만두고’나 ‘그치고’로 고칩니다.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8쪽)”라는 대목에서 ‘당장(當場)’이라는 한자말을 ‘어서’나 ‘바로’로 고칩니다. “하루 종일(15쪽)”이라는 대목에서 ‘종일(終日)’이라는 한자말을 ‘내내’로 고칩니다. “제발 조심해(15쪽)”라는 대목에서 ‘조심(操心)해’라는 한자말을 ‘잘 살펴’로 고칩니다. “결국 찾지 못했어요(19쪽)”라는 대목에서 ‘결국(結局)’이라는 한자말을 ‘끝내’나 ‘그예’로 고칩니다.


  예쁜 그림책에 나오는 번역글입니다. 이 그림책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읽는 그림책이기에 연필로 죽죽 금을 그은 뒤 바로잡습니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혼자 읽을 적에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익혀서 곱고 사랑스레 쓰기를 바라면서 바로잡습니다. 그런데, 책에 적힌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꽤 익숙한 낱말입니다. 어린이책에까지 쓰는 이런 한자말은 사람들한테 무척 익숙하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오늘날 익숙하게 쓰는 한자말’이기 때문에 바로잡습니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이라면 구태여 바로잡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익숙하게 안 쓰는 한자말’은 구태여 바로잡지 않아도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어집니다. 모든 것은 늘 똑같습니다. 익숙하게 널리 쓰는 한자말이기에 안 고쳐도 된다는 생각은, 일제강점기가 서른다섯 해쯤 되었으니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하고 똑같이 이어집니다. 참말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식민지 종살이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아주 많은 분들이 ‘종으로 지내는 삶’을 익숙하게 받아들여 일본말을 쓰고 일본 이름을 지으면서 살았어요. 해방된 지 일흔 해가 되도록 ‘일제강점기 찌꺼기 말투’가 사회 곳곳에 아주 깊이 뿌리내린 채 안 뽑힙니다. 어른들 스스로 ‘익숙하게 쓴다’는 핑계를 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쓸 말은 ‘써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쓸 말은 ‘삶을 가꾸는 말’과 ‘삶을 짓는 말’과 ‘삶을 사랑하는 말’입니다.


  한국말은 ‘파랑’이고 한자말은 ‘靑色’이며 영어는 ‘blue’입니다. ‘블루’나 ‘청색’ 같은 바깥말을 쓰고 싶다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은 ‘파랑’입니다. 한국말은 ‘하늘’이고 한자말은 ‘蒼空’이며 영어는 ‘sky’입니다. ‘스카이’나 ‘창공’ 같은 바깥말을 쓰려 한다면 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하늘’입니다.


  오늘날 꽤 많은 어른들은 ‘청색’이나 ‘창공’ 같은 한자말이 익숙합니다. ‘블루’나 ‘스카이’ 같은 영어도 익숙합니다. 익숙하니까 이런 바깥말을 아무렇지 않게 읊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떠나, 익숙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른들한테는 익숙하더라도 아이들한테는 안 익숙한 낱말입니다.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배워서 생각다운 생각을 키울 노릇이고, 아이들은 말다운 말을 가꾸어서 삶다운 삶을 지을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이녁한테 익숙한 말로 늘 똑같은 생각과 삶을 되풀이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노릇입니다. 어른들은 ‘나한테 익숙한 말’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사랑을 북돋우며 생각을 키우는 말’을 슬기롭게 찾아서 새롭게 배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면서 받아들일 즐겁고 기쁜 말을 배울 노릇이요, 어른들은 날마다 새롭게 생각하면서 꿈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다시 배울 노릇입니다. 4347.11.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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