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38. 쉬운 말
―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하는 말


  《조지 아저씨네 정원》(시공사,1995)이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이 무척 멋있다고 느낍니다. 글과 그림이 아주 아름답게 어우러졌거든요. 그림책에 나오는 ‘조지 아저씨’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아저씨네 땅은 넓지 않아요. 아주 작답니다. 아저씨는 조그마한 땅을 일구며 살지만 언제나 흐뭇하고 넉넉해요. 모든 풀·꽃·나무하고 속삭일 줄 알고, 새·벌레·짐승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 마음으로 사귀어요.

  그런데 이 멋진 그림책에 붙은 이름은 ‘정원(庭園)’입니다. 정원이란 어떤 곳일까요. 그림책에 ‘정원’이란 한자말로 이름을 붙인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뒤져 ‘정원’ 말뜻을 살피면, “집 안에 있는 뜰이나 꽃밭”이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은 ‘뜰’이나 ‘꽃밭’이라는 소리예요.

  다시금 한국말사전을 살핍니다. ‘뜰’을 “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 화초나 나무를 가꾸기도 하고, 푸성귀 따위를 심기도 한다”로 풀이합니다. ‘꽃밭’은 “꽃을 심어 가꾼 밭”으로 풀이해요. 더 살피면, ‘화초(花草)’는 “꽃이 피는 풀과 나무”를 가리켜요.

  멋진 그림책에 “조지 아저씨네 꽃밭”이나 “조지 아저씨네 앞뜰”이나 “조지 아저씨네 뜨락” 같은 이름이 붙으면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뜰·앞뜰·뒷뜰·옆뜰·뜨락·꽃밭’ 같은 낱말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자랄 수 있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집숲’이나 ‘숲집’ 같은 낱말도 듣고, ‘풀꽃집’이나 ‘나무꽃집’이나 ‘꽃숲집’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자란다면 어떠할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철’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었습니다. 아마 열 살 즈음이었지 싶은데, 일흔 살이 넘은 이웃 할아버지는 열 살짜리 아이한테 “얘야, 철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아니란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지요. “할아버지, 그러면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되어도 철이 안 들면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할아버지, 그러면 할아버지가 아직 철이 안 들었으면 할아버지도 어른이 아닌가요?” “그렇지.” “우와, 그러면 철이 들어야 어른이 되네요.”

  이때부터 저는 ‘철’이라는 낱말을 들을 적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어요. 봄철·여름철·가을철·겨울철 같은 낱말을 들으면서 괜히 웃음이 나면서 즐거웠어요. 198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철’이라는 낱말과 함께 ‘계절’이라는 낱말이 나오고, 어른(교사와 어버이와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철’이라는 낱말보다 ‘계절’이라는 한자말을 더 즐겨 씁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날씨를 알리든 여느 방송이든, 어른들은 으레 ‘계절’이라는 한자말만 읊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는 대중노래에서도 언제나 ‘계절’이에요.

  스무 살이 넘은 어느 때, 동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철’이라는 낱말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동무들은 이 낱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저더러 ‘철’이 무엇이느냐고 묻습니다. 어리둥절해서 ‘철’도 모르느냐고, ‘봄철’ 할 때에 철이라고 말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한자말 ‘계절’이 한국말로 ‘철’이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알아듣지만 다시 묻지요. ‘철’이라는 낱말이 참말 있느냐고.

  여느 어른들은 ‘철’이라고 하면 ‘쇠’를 가리키는 한자 ‘鐵’을 떠올립니다. 한국말 철을 그리는 어른이 몹시 드뭅니다. 쇠를 ‘쇠’라 가리키지 못하니, 쇠를 가시처럼 엮은 그물을 놓고 ‘쇠가시그물’이라 가리키지 못하고 ‘철조망(鐵條網)’이라고만 가리킵니다. 부엌에서 쓰는 수세미도 ‘쇠수세미’라 하는 사람보다 ‘철수세미’라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느껴요.

  철이란 무엇일까요. 철은 날씨를 가리키면서 때를 나타냅니다. 제대로 찾아오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이 든다”고 할 때에는 “옳고 그름과 참거짓을 살피거나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뜻해요.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을 살피거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마음바탕일 때에 ‘어른’이라는 소리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않아요. 성년식을 치렀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가게에서 주민등록증 없이 술이나 담배를 살 수 있기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철이 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이 바르게 설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아름답게 키워서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짓고 삶을 가꿀 때에 어른입니다.

  생각을 이어 보면, 우리 사회는 ‘철’이라는 낱말을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책이나 교과서에서도 올바르게 안 다룹니다. 아니, 억누르거나 짓밟거나 내팽개친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길을 막는다고 할 만해요.

  ‘하늘’이나 ‘바람’이나 ‘숲’이나 ‘집’이나 ‘사랑’이나 ‘사람’이나 ‘삶’ 같은 낱말을 찬찬히 읽고 들으면서 생각하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이 같은 낱말을 언제 어디에서 어느 만큼 들으면서 생각을 키울 수 있는가요. 껍데기말만 자꾸 퍼뜨리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껍데기말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이들한테 알맹이말하고 멀어지도록 부추기는 어른이지 싶습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써야 하늘을 생각합니다. ‘바람’이라는 낱말을 써야 바람을 생각합니다. 깊이 들여다보고 넓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이 아닌 ‘가옥·주택·주거지·부동산’이라는 이름만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집을 잊어요. 집이 어떤 곳인지 잃습니다. ‘사랑’이 아닌 ‘연애·애정·자비·자애·러브’ 같은 이름을 자꾸 쓰면,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잊거나 잃어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사랑을 지으며 삶을 가꾸는 사람은 어떤 빛일까요.

  쉬운 말 한 마디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주고받는 말 한 마디는 저마다 생각을 꽃피우도록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 한 마디란 ‘삶을 누구나 즐겁게 짓도록 이끌거나 돕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스스로 내 모습을 돌아보고 삶을 바라보면서 길을 찾도록 드리우는 빛이 ‘쉬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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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0. 말넋을 거스르는 네 가지 ㄴ

― ‘-的’을 떨구어야 한다



  말은 그저 말이기도 하기에, 말은 말대로 쓰면서, 말에 어떤 마음을 담느냐를 살필 수 있으면, ‘수수한 말’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살 어린이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느냐, 일흔 살 할머니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꽃을 피우려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웬만한 문학책과 인문책은 거의 ‘읽을 값어치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하게 쓰는 인문책이 드물고, 아이들이 배울 만한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펼치는 문학책이 드뭅니다. 일흔 살 할머니나 여든 살 할아버지가 알아듣도록 쓰는 인문책은 없다시피 하며, 아흔 살 할머니나 백 살 할아버지가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도록 북돋우는 문학책은 아예 없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항상(恒常)’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그림책에 이 한자말이 나오면 연필로 죽죽 그은 뒤 ‘늘’이나 ‘언제나’ 같은 한국말을 적어 넣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항상’을 찾으면 낱말풀이를 “언제나 변함없이”로 달아요. 그러니까, 한국말사전을 엮은 이들도 ‘항상 = 언제나’인 줄 안다는 뜻이고, 이 한자말은 쓸 만하지 않다고 밝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말사전은 얄궂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언제나’를 찾으면 “때에 따라 달라짐이 없이 항상”으로 풀이해요. ‘항상 = 언제나’로 풀이하면서 ‘언제나 = 항상’으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은 돌림풀이를 깨닫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러한 돌림풀이가 엉터리인 줄 알아차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빛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늘·언제나·노상’ 같은 한국말을 씁니다. 때로는 ‘한결같이’를 씁니다. 이 낱말은 저마다 뜻과 느낌이 살짝 다릅니다. 이러한 낱말을 혀에 얹어서 읊으면, 이 낱말은 어느새 가락을 입고 노래로 거듭납니다. 낱말 한 마디가 새롭게 살아나면서 환하게 타오르는 해님처럼 따스합니다.


  둘레에서 이웃들이 ‘항상’ 같은 낱말을 쓰면, 내 귀로 이 낱말이 들어오며 곧바로 ‘늘’이나 ‘언제나’로 바뀝니다. 다만, 내 귀와 머리와 마음은 늘 ‘옮기기(번역)’를 하지만, 이웃한테 “그런 말을 쓰기보다 이런 말을 써야 뜻과 느낌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어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웃은 이웃 나름대로 그 낱말에 이녁 뜻과 느낌을 담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웃이 스스로 이녁 말을 다시 바라보면서 다시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서 말빛과 말숨을 살찌우려고 해야 비로소 말을 바꿉니다. 남이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


  ‘읽을 값어치가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함부로 말할 대목은 아니라 할 텐데, ‘말이 왜 말이고, 우리가 말을 왜 쓰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또한 말이 말답게 설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이야기를 담으면서 수수한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수수한 말을 찾거나 생각해야 할까요. 햇볕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바람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빗물과 같으며, 풀과 같은 말이 바로 수수한 말입니다. 해가 떠서 온누리를 비출 적에 ‘대단하구나!’ 하고 느낄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해가 뜨는 일을 아주 마땅히 받아들입니다. 아니,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바람을 마시는데, 바람을 마시면서 ‘아 내가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초라도 새 바람을 안 마시면 모두 죽는 몸이지만, 1초라도 숨을 쉬는 줄 생각하지 않아요. 바람은 그만큼 수수하면서 마땅한 빛입니다. 빗물과 풀과 나무와 숲도 이와 같아요. 이들은 모두 아주 대단하고 대수롭지만, 우리가 따로 더 깊거나 넓게 생각하거나 따지지 않아요.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해와 같고 바람과 같이 수수하다 싶은 말을 제대로 보면서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가슴에 담아 제대로 입으로 꺼내거나 제대로 손으로 옮길 수 있을 때에, 말빛이 환합니다. 풀이나 나무와 같이 수수하면서 늘 우리와 함께 있는 말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깨달아 마음에 씨앗으로 심을 때에, 말숨이 싱그럽습니다.


  심우성 님이 한국말로 옮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1996)라는 책을 읽는데 첫머리에 “일제의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간접으로 동조한 것이라는 의견”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글에서는 ‘-적(的)’을 안 붙이고 ‘간접으로’라 적습니다. 생각해 볼까요. 이 글에서 ‘간접적으로’라 적으면 얼마나 다를까요. ‘간접으로’와 ‘간접적으로’는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우리는 왜 굳이 ‘-적’을 붙이려 할까요.


  이 글을 더 살핀다면, “일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살며시 뜻을 같이했다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간접으로 동조한”은 “살며시 동조한”이나 “여러모로 동조한”이나 “옆에서 동조한”으로 손볼 만합니다. 이렇게 ‘간접(間接)’을 손질할 때에는 ‘-적’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소모적(消耗的)인 논쟁”은 무엇일까요. 이런 한자말을 꼭 써야 할까요. 처음에 “부질없는 말다툼”이나 “덧없는 말씨름”이나 “쓸데없는 말싸움”처럼 글을 쓰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생각”이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나 “낡은 생각”이나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적’을 붙이는 한자말은 모두 손질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적’을 붙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적’이 들러붙지 않도록 처음부터 아주 오롯하다 싶은 한국말을 제대로 살펴서 쓸 일이에요. “향토적 서정”이 아닌 “고향빛”이나 “시골 느낌”을 말하면 되고, “정적인 놀이”가 아닌 “차분한 놀이”나 “조용한 놀이”나 “얌전한 놀이”를 말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닌 “손꼽히는 것”이나 “뛰어난 것”을 말하면 돼요.


  ‘-적’을 붙일 적에 말넋을 거스르는 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온누리 모든 사람이 넋을 거스르거나 흐트리는 낱말이 아닌, 넋을 살찌우거나 곱게 가꾸는 낱말을 쓰기를 빌어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마음을 아름답게 보살피면서 생각을 튼튼하게 북돋우는 말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7.6.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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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사외보 5-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어느덧 7월이 되는군요.

마을마다 아름다운 이름과 말이 살아나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



말넋 28. 마을에서 살아나는 이름

― 모래내, 한가람, 아랫복골, 동백마을



  서울에 ‘모래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래내는 서울에만 있지 않습니다. 전북 전주에도 있고, 충북 음성에도 있으며, 인천과 강원 원주에도 있습니다. 아마 전국 곳곳에 크고작은 ‘모래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전국 어디에나 냇물이 흐르고, 전국 어디에나 냇가에 모래밭이 있었을 테니까요.


  경남 하동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조문환 님은 섬진강을 두루 걸어서 마실한 이야기를 엮어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북성재,2013)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 197쪽을 읽다가 “섬진강의 이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두치강 등으로도 불렀다.”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섬진강’은 ‘모래가람’뿐 아니라 ‘모래내’라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고 해요. 왜 모래가람이고 모래내냐 하면, 물줄기 흐르는 옆으로 모래가 몹시 곱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람’은 한자말 ‘강(江)’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가람’보다 작은 물줄기는 ‘내’입니다. ‘내’보다 작은 물줄기는 ‘시내’예요. 섬진강 물줄기는 넓게 흐르는 데가 있을 테고 좁게 흐르는 데가 있겠지요. 넓게 흐르는 물줄기 둘레에서 살던 이들은 ‘모래가람’이라 가리켰을 테며, 그리 넓지 않다 싶은 물줄기 둘레에서 살던 이들은 ‘모래내’라 가리켰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을살이가 달라 이름이 다릅니다. 마을마다 살림살이가 다르기에 이름을 달리 붙입니다. 같은 꽃과 풀이라 하더라도 고장과 고을마다 다른 삶자락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여요.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 이름은 ‘한가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같은 커다란 도시가 아닌, 서울에서도 논밭 일구는 사람이 많던 지난날에는 서울 한복판을 흐르던 물줄기를 가리켜 ‘한가람’이라 했을 테고, 이 물줄기가 그리 넓지 않게 흐르는 데에서는 ‘한내’라 했겠구나 싶어요. 행정에서는 ‘한강’이라고만 쓰지만 ‘한가람’이라는 이름은 학교나 아파트나 회사에서 두루 씁니다. ‘한내’라는 이름도 여러 곳에서 두루 써요.


  인천에서는 ‘인천’ 말고 ‘어진내’라는 이름을 두루 써요. 춘천에서는 ‘춘천’ 말고 ‘봄내’라는 이름을 두루 씁니다. 행정에서 쓰는 이름이 있더라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오랜 나날 수수하게 붙이며 주고받던 넋이 숨쉬어요. 행정에서 붙이는 ‘율목동’ 같은 이름이 있지만, 이 마을에서 오래 살던 분들은 ‘밤나무골’이나 ‘밤골’이나 ‘밤실’이나 ‘밤말’이나 ‘밤마을’ 같은 이름을 잊지 않아요. 시골에는 ‘밤재’와 ‘밤티재’와 ‘밤티마을’도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서울은 아주 큽니다. 사람도 바글바글 매우 많습니다. 옛날을 돌아보아도 서울은 무척 큰 고을이었지 싶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시골은 더 작았을 테니까요. 옛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걸어서 서울로 찾아갔어요. 작은 시골에서 다른 작은 시골로 천천히 걸어서 찾아갔고, 이렇게 시골과 시골을 거쳐 서울로 갔습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도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나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물줄기 위쪽은 ‘강웃마을’이었고, 강 아래쪽은 ‘강아랫마을’이었습니다. 그러면, 옛날 분들은 ‘가람웃마을’이나 ‘가람아랫마을’이라고 말했을까요? 1500년대나 500년대 무렵 옛사람은 어떤 이름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강북’과 ‘강남’이라고만 쓰고, 행정에서 붙이는 이름도 이런 한자말뿐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이대로 쓰기만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앞으로는 새로운 우리 이름을 빚을 수 있고, 오랫동안 쓰던 살갑거나 수수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을이름과 땅이름과 길이름을 생각할 때에 아름다울까요.


  이상국 님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1998)를 읽는데, 〈방앗간카페에 가서〉라는 시에서 “아랫복골 개울말 루핑집 지붕 위에서 검은 연기가 가락지를 만들며”라는 대목을 봅니다. ‘아랫복골’과 ‘개울말’이라는 이름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아래쪽에 있대서 ‘아랫복골’이었을 테고, 가까이에 개울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개울말’이었으리라 봅니다. ‘웃복골’이나 ‘가운뎃복골’도 있었을까요. 어쩌면 있겠지요.


  시골에서 살며 해를 보고 바람을 마시며 비를 맞고 달과 별을 누리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인터넷이 널리 뻗어 시골에서도 서울과 부산 이야기를 곧바로 읽을 수 있어요. 거꾸로, 고흥처럼 깊은 시골이나 신안처럼 먼 섬에서 태어나는 이야기를 서울과 부산에서 막바로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며 종이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서 어떤 일이 터지는지 아랑곳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거꾸로,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이들이 외진 시골이나 먼 섬에서 어떤 이야기가 자라는가를 살피는 일이 드뭅니다. 먼먼 옛날에는 한국이나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옛조선 같은 울타리가 아닌 마을살이요 마을노래요 마을빛이었겠구나 싶어요. 흑산도면 흑산도가 나라이면서 마을이요 고장입니다. 강진이면 강진이 나라이면서 마을이요 고장이에요.


  봄이기에 봄맞이 들일을 합니다. 봄이기에 봄맞이 나물을 뜯고 쑥을 캡니다. 봄나물을 먹으면서 봄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봄들을 달리면서 봄놀이를 합니다. 삼월 끝자락과 사월 첫머리에 눈부신 하얀 꽃송이 터뜨리는 들딸기가 있습니다. 매화꽃이 지면서 앵두꽃이 피고, 앵두꽃이 지면서 딸기꽃이 피어요. 딸기꽃이 지면? 찔레꽃이 피면서 딸기알이 빨갛게 익습니다. 사월 끝물부터 바야흐로 딸기철이 되어 들과 숲을 누비면서 손과 입술이 빨갛게 되도록 배를 채워요.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은 ‘동백마을’입니다. 왜 동백마을일까 살짝 궁금하지만, 집집마다 동백나무가 으레 있어 새봄에 동백꽃이 환하게 피어나니 동백마을이라 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동백나무는 우리 마을에만 있지 않아요. 이웃 여러 마을에도 많고 다른 고장에도 많아요. 동백섬이 있고 동백골이 있습니다.


  어여쁜 이웃 여러 마을을 떠올립니다. 배골, 능금골, 복사골, 진달래골, 박골 …… 냇물 노래와 꽃내음과 숲빛을 담는 마을은 얼마나 고운 이름이 될까 그려 봅니다. 4347.4.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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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에서 펴내는 <책이 열리는 마을>에 싣는 글입니다.

올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

우리 말 이야기를 싣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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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7. 이웃과 나누는 글내음

― 봄꽃이 봄바람을 부르듯이



  한국은 예부터 ⅔에 이르는 땅이 멧골이나 멧자락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⅓은 들이었겠지요. 멧골에 집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들에 집을 장만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터입니다. 멧골에 마련하면 멧골집인데, 멧골집 둘레는 숲이기 마련입니다. 숲에 깃든 집, 그러니까 숲집에서 살아야 땔감을 얻습니다. 숲집에서는 멧나물을 캐거나 뜯어서 먹고, 멧자락에 밭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합니다. 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나무가 우거진 곳에 집을 짓습니다. 들에 짓는 집이면 들집이 될 텐데, 나무가 가까이 있어야 땔감으로 삼습니다. 여러 가지 연장도 나무를 깎아서 만드니, 나무는 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냇물이 흐르고 숲으로 둘러싼 들이 사람이 살기에 알맞다 할 만한 터인 셈입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들’과 얽힌 낱말을 퍽 많이 썼어요. 이를테면, ‘붉은닥세리’라든지 ‘노해’라든지 ‘펀더기’라든지 ‘푸서리’ 같은 낱말을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낱말을 쓰는 분이 없고, 이런 낱말을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에 넣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못 알아들으리라 느껴요. 모두 ‘들’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옛날처럼 들집을 지어 들밥을 먹고 들일을 하는 ‘들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이루어 도시사람으로 살기에, ‘들말’은 잊히거나 사라집니다.


  낱말뜻을 살피자면, 붉은닥세리는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거친 땅”이고, ‘펀더기’는 “펀펀하면서 너른 들”이며, ‘노해’는 “바닷가에서 들을 이룬 곳”입니다. ‘푸서리’는 “거칠면서 풀이 우거진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자말로 ‘불모지(→ 붉은닥세리)’와 ‘광야(→ 펀더기)’와 ‘황야(→ 푸서리)’를 쓰곤 해요. 들살이와 멀어지면서 들빛을 잃지만, 들말을 써야 할 자리가 곧잘 있습니다.


  이러한 들말과 함께 ‘들녘·들판·벌·벌판’ 같은 낱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어느새 쓰임새를 잃으면서 차츰 우리 마음에서 잊힙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시골에서 들을 가꾸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새로운 도시를 ‘신도시’나 ‘뉴타운’으로 넓히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서 삶도 나란히 달라집니다.


  봄을 맞이해 어디에서나 봄꽃이 피어납니다. 시골숲에서는 할미꽃과 진달래와 복수초 같은 꽃이 고개를 내밉니다. 시골마을에서는 냉이꽃과 봄까지꽃과 별꽃과 코딱지나물꽃 들이 방긋 웃습니다. 삼월에는 산수유나무나 동백나무나 매화나무나 닥나무에서 마알간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사월에는 앵두꽃이랑 딸기꽃이 하얗고, 오월에는 찔레꽃과 탱자꽃이 하얗습니다. 삼월부터 오월까지 유채꽃이 노랗게 물결을 칩니다. 사이사이 냉이꽃이랑 꽃다지꽃이랑 민들레꽃이랑 콩꽃이 빙그레 웃어요.


  온갖 봄꽃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월 첫무렵에 피는 현호색을 바라볼 적에 ‘현호색빛’이라는 말 아니고는 현호색 꽃빛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딸기꽃은 ‘딸기꽃빛’입니다. 탱자꽃은 ‘탱자꽃빛’이요, 동백꽃은 ‘동백꽃빛’입니다. 사월에 느티나무도 새 잎사귀를 내면서 조물조물 조그마한 꽃을 줄줄이 매달며 옅푸른 빛이 감돌아요. 느티나무 느티꽃은 풀빛이면서도 풀빛이라는 말로는 모자라 ‘느티꽃빛’이라고 가리켜야 비로소 제대로 나타낸다 할 만합니다.


  풀빛과 얽혀 일본 한자말 ‘녹색’이라든지 중국 한자말 ‘초록’이 있어요. 영어로는 ‘그린’입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은 좀처럼 한국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가 저희 삶터에 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을 몽땅 받아들여 뒤죽박죽으로 써요. 한국말 ‘빨강’과 ‘붉음’이 있으나 구태여 ‘적색’과 ‘레드’를 끌어들입니다. 서로 헤어지는 자리에서 ‘잘 가’나 ‘살펴 가셔요’라 말하기보다는 한자말로 ‘안녕’이나 ‘조심히 가셔요’라 말한다든지, 영어로 ‘바이바이’를 쓰곤 합니다.


  봄꽃은 봄바람을 부릅니다. 봄꽃이 퍼뜨리는 꽃내음은 봄바람에 살포시 실려 온 집안과 마을을 감돕니다. 멧새 날갯짓에도 봄꽃내음이 묻어 골골샅샅 퍼집니다. 일찌감치 깨어난 벌과 나비한테도 봄꽃가루와 봄꽃내음이 깃들어 이곳저곳으로 번집니다.


  도시에서는 어떤 빛이 될까요. 도시에서는 어떤 내음이 퍼질까요. 자동차가 그득그득 넘치기에 자동차 배기가스가 골골샅샅 퍼지겠지요. 공장 곁에서 공장 매연이 두루 번지겠지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바람은 무엇이고, 우리가 먹는 밥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맑은 바람을 마셔야 몸이 튼튼해요.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정갈한 밥을 먹어야 몸에 새 기운이 솟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가 거칠거나 메마르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글 한 줄에 사랑스러움이나 살가움이 깃들지 못하면 우리 넋은 어떤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기에 한국말을 배우고 씁니다. 한국에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니 이웃과 오순도순 주고받을 아름다운 한국말을 살핍니다. 우리는 어떤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꾸면서 어떤 말빛을 밝힐 때에 즐거울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글내음을 퍼뜨리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사랑스러울는지 생각합니다.


  말 한 마디는 천 냥 빚을 갚을 뿐 아니라, 말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고운 빛으로 거듭납니다. 콩을 심은 곳에서 콩이 나듯이, 따뜻한 말 한 마디 심은 자리에서 따뜻한 말이 사랑스럽게 태어납니다. 새봄에 새롭게 눈부신 봄빛을 마음속으로 그려요. 내 마음을 살찌울 ‘봄말’ 한 마디 그려요. 스스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듯이 말빛을 북돋우면, 이 말빛이 이웃한테 살그마니 퍼지면서 좋은 기운으로 깃들어요. 스스로 마음자리에 나무 한 그루 돌보듯이 글내음을 보듬으면, 이 글내음이 이웃한테 시나브로 스미면서 기쁜 웃음으로 샘솟아요.


  온누리를 촉촉히 적시는 빗물을 머금으며 흐르는 구름과 같은 넋으로 말빛을 가다듬습니다. 온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햇볕과 같은 마음씨로 글내음을 다스립니다. 4347.3.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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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1. 《이방인》 새 번역 생각하기 ㄱ

― ‘어떤 한국말’로 옮겨야 ‘번역’이 될까



  번역은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입니다. 또는 한국말을 외국말로 옮기는 일입니다. 번역을 하려면 맨 먼저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외국말을 잘 해야 할 테고, 이와 맞물려 한국말을 잘 해야 합니다. 외국말을 잘 하지 못하면, 외국책을 잘 읽지 못합니다. 외국책을 잘 읽지 못한 채 한국말로 옮길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한국말을 잘 알지 못하면 외국책을 아무리 잘 읽었어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옮기지 못합니다.


  외국책을 잘 읽으려면 외국말뿐 아니라 외국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모두 잘 알아야 합니다. 한국말로 잘 옮기려면 한국말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모두 잘 알아야 합니다. 번역을 하거나 통역을 하거나 외국말·한국말·외국 문화·한국 문화를 골고루 살피고 헤아리는 눈썰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2014년 봄에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새롭게 한국말로 나옵니다. 새움출판사라는 곳에서 나왔고, 옮긴이는 이정서 님이라고 합니다. 2014년에 새로 나온 번역책은 지난날 김화영 님이 번역한 책에서 잘못된 대목을 여러모로 짚는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합니다. 2014년 봄에 새로 나온 《이방인》은 번역을 얼마나 잘 했을까요? 외국말을 알뜰히 읽어냈다면, 나로서는 무엇보다 한국말로 얼마나 잘 옮겼을까 궁금합니다. 새움출판사 《이방인》 첫머리부터 차근차근 헤아려 봅니다.



1.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 양로원에서 전보 한 통을 받았다

: ‘-(으)로부터’는 한국 말씨가 아닙니다. 일본 말씨입니다. 이런 토씨로 첫머리를 여니 안타깝습니다.



2. 오후 중에는 도착할 것이다

→ 낮에는 닿는다

→ 낮까지는 닿을 듯하다

: 한국말은 ‘낮’입니다. 한국말은 아침·낮·저녁입니다. “오후 中”처럼 쓰는 말투는 일본 번역 말투입니다. 일본사람이 쓰는 번역 말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잘못 스며든 이런 번역 말투는 걸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장에게 이틀의 휴가를 신청했다

→ 사장에게 휴가를 이틀 신청했다

→ 사장한테 휴가를 이틀 달라고 했다

→ 사장한테 이틀 쉬겠다고 했다

: ‘휴가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을 더 헤아린다면 이렇게 옮기기보다는 ‘쉬겠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틀의 휴가”는 한국 말투가 아닌 일본 말투입니다. ‘の’를 매우 사랑하는 일본사람들 말씨입니다.



4. 내게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탐탁지 않아 했다

→ 내게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탐탁지 않아 했다

: ‘-ㅁ에도’처럼 쓰는 말투는 ‘-ㅁ에도 불구하고’ 하고 똑같습니다. 뒤에 ‘불구하고’를 안 붙이더라도, 이 말투는 일본 말투예요. ‘-지만’으로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5. 요컨대 내가 사과를 할 필요는 없었다

→ 그러니까 내가 사과를 할 까닭은 없었다

→ 말하자면 내가 사과를 할 일은 없었다

: ‘要’는 일본사람이 아주 즐겨쓰는 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컨대’ 또한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말투에서 퍼진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자리와 흐름에 따라 다 다르게 고쳐야 알맞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그러니까’나 ‘말하자면’으로 고칠 만하고, 다른 자리에서는 ‘곧’이나 ‘이를테면’이나 ‘두말 할 까닭 없이’로 고칠 수 있습니다.



6. 그가 내게 조의를 표해야 할 일이었다

→ 그가 내게 조의를 해야 할 일이었다

→ 그가 나를 위문해야 할 일이었다

→ 그가 나를 달래야 할 일이었다

: ‘表하다’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글로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글월은 “조의를 해야”로 적으면 됩니다. ‘조의’라는 낱말이 어려울 수 있으니 다른 한자말로 손보거나 더 쉽게 적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려서 아주 쉽게 적어도 됩니다.



7. 하지만

→ 그렇지만

→ 그러나

: ‘그러하지만’을 잘못 줄여서 ‘하지만’으로 쓰곤 합니다. 이런 이음씨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정서 님은 옮긴이 머리말에서 ‘하여’라는 낱말도 씁니다. 이런 엉터리 이음씨는 제발 안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나 ‘이리하여’로 써야지요. 줄여서 쓰는 일이 잘못은 아니고, 얼마든지 줄임말을 쓸 수 있습니다만, 엉터리 줄임말은 함부로 쓸 일이 아닙니다.



8. 상장을 달고 있는 나를 보면

→ 까만 띠를 단 나를 보면

→ 까만 천을 단 나를 보면

: ‘상장(喪章)’이라는 낱말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누군가 죽었을 적에 서양에서는 으레 까만 띠를 달곤 합니다. 그러니, ‘까만 띠’라고 적을 수 있어요. 이 글월에서는 “달고 있는”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습니다. “달고 있는”이 아닌 “단”이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밥을 먹고 있어요”가 아니라 “밥을 먹어요”라 해야 올바릅니다. “책을 읽고 있어요”가 아니라 “책을 읽어요”라 해야 알맞습니다. 한국말은 이렇습니다.



9. 좀 더 공식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터였다

→ …… 모습을 갖출 터였다

: “공식적인 모습”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부디 이 대목을 ‘한국말로 번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게 될’과 같은 입음꼴은 한국말에 없습니다.



10. 내게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 내게 위로하는 말을 했으며

→ 내 슬픔을 다독이는 말을 했으며

→ 내 슬픔을 따뜻한 말로 달래 주었으며

: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유감을 표한다”고 하면 “섭섭하다고 말한다”나 “불만을 말한다”는 소리입니다. 아무래도 이 글흐름하고 안 맞겠지요? 누군가 죽은 자리에서 “유감을 표한다”고 읊는 말은 일본말입니다. 일본사람이 쓰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함부로 쓰지 않기를 바라며, 이런 말투로 번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1. 그는 몇 달 전 자신의 삼촌을 잃었다

→ 그는 몇 달 전 삼촌을 잃었다

: “자신의 삼촌”이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다”가 아니라 “아버지를 잃었다”라 하면 됩니다. 우리 삼촌이 아닐 때에만 어떤 삼촌인지 밝히면 됩니다.



12.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렸다

→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렸다

: 한국말이 한국말다우려면 한국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말은 일본말과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번역 말투에 너무 물들었습니다. ‘-기 爲해’도 일본 말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13. 길과 하늘의 반사광까지, 아마도 내가 존 것은 이 모든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 길과 하늘에 되비추는 빛까지, 아마도 내가 존 까닭은 이 모두 때문이다

: 토씨 ‘-의’를 아무 자리에나 넣으면 뜻이 흐리멍덩하거나 뒤죽박죽이 됩니다. 번역을 하든 창작을 하든 ‘-의’를 넣지 않고 슬기롭게 적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것’을 세 차례 넣는데, 세 군데 모두 덜어야 알맞습니다.



14. 나는 한 군인에게 기대어 있었는데

→ 나는 군인에게 기대었는데

→ 나는 군인 몸에 기대었는데

: 한국말에는 관사가 없어요. “한 군인”도 “한 오빠”도 “한 아버지”도 아닙니다.



15. 양로원은 마을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 양로원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 떨어졌다

→ 양로원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 토씨 ‘-로부터’가 아닌 ‘-에서’를 넣어야 올바릅니다. “떨어져 있었다” 같은 번역 말투가 아닌 “떨어졌다”나 “떨어진 데에 있었다”로 바로잡습니다.



  외국책을 한국말로 옮기는 분들이 한국말을 즐겁게 익히고 꾸준히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랑스말도 영어도 일본말도 잘 해야겠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면 번역은 부질없이 되고 맙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다스리지 못하면 번역책은 너무 뒤죽박죽이 됩니다.


  잘못 옮기거나 엉터리로 옮기지 않으려고 마음을 쏟는 한편, 슬기롭고 올바르며 알맞게 한국말로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전 낱말풀이에만 기대지 않기를 바라고, 한국사람이 먼 옛날부터 오늘을 거쳐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주고받을 한국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한국말로 나오는 책은 마땅히 한국사람 말씨와 말투와 말결과 말빛이 살아나도록 가다듬을 때에 빛납니다. 한국말로 펴내는 책은 마땅히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즐기고 누리면서 이야기와 줄거리를 받아들이도록 북돋아야 아름답습니다. 다른 번역가가 옮긴 책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일도 뜻이 있겠습니다만, 다른 번역가가 옮긴 책을 나무라거나 꾸짖기 앞서, 이정서 님 스스로 이녁이 옮긴 책이 ‘한국말다운 한국말로 빛나는 번역책’이 될 수 있도록 새로 추스르고 손질하시기를 바랍니다. 4347.4.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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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4-23 02:2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번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번역자와 회사 대표가 같은 사람이었다지요? 다른 이를 공격할 때에는 최소한 그 자격은 갖춰야 하는 것 같습니다.

숲노래 2014-04-23 10:31   좋아요 0 | URL
그런 모습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번역을 아름답게 잘 했으면
대수로울 까닭은 하나도 없어요.

다만, 다른 사람을 '이름을 들먹이며 비판'한다고 하면
비판을 하려는 사람도 스스로 그 앞에 나와야 할 테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곧 드러날 그런 '숨은 뒷자리'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싶고,
얼마나 훌륭히 번역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