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가 어떻게 알아요?" 존 삼촌이 물었다. "모든 것을 유지시켜 주는 힘이 뭐지요? 모든 사람들이 피로에 못 이겨 쓰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무엇이지요?"

어머니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른 손의 반질거리는 손등을 비비더니 오른손 손가락들을 왼손에 깍지 끼웠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어떤 방향을 향해서 굴러가는 것 같아요. 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아요. 배가 고픈 것도, 그리고 심지어 병이 드는 것도 말예요. 어떤 사람은 죽지만 나머지 사람은 더 억세고 씩씩해지지요.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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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러고는 내 손을 잡은 채 말하기 시작했네.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오래전부터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아는 것과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건 다르다고 했어. 그래, 어떤 중요한 사실을 새로 깨닫게 되면 한동안 그 사실이 모든 생각과 꿈을 차지하게 되지.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건 언어가 아니라 그림처럼 영상화된 하나의 장면이라네. 그러다가 어느날 확신을 갖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좌우로 한 칸씩밖에 못 움직이는 장기처럼 말이야. 그런 게임은 계속하나 포기하나 마찬가지인 거야. 인생이라는 적은 '장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늘 한 수씩만 물려주지. 그래서 희망도 없으면서 유일한 한 수를 기대하며 사는 거야. 그렇지만 안나는 그 마지막 한 수마저도 지겨워져 버린 거지. 지겨워진 거라고!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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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달의 궁전> 가운데 마르코 포그가 예술의 목적은 '세계를 가로질러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일입니까?

오스터: 때로는 그렇지요. 스스로도 왜 쓰는 것일까 종종 의아해하곤 합니다. 단지 아름다운 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쓴다고 할 수 없어요.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가요? 글을 쓰지 않을 때 가장 저기압이 됩니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일이 대단히 즐거운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더욱 나빠질 뿐입니다.

...

래리: 어떤 의미에서 당신의 책은 모두 '같은 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것은 '어떤 책'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스터: 한마디로 나 자신의 강박관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내게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을 써 내려간 장편 역사소설 말입니다.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이, 내 작품은 모두 같은 문제 군, 같은 인간 딜레마 주위를 맴돌고 있어요. 쓴다는 행위는 이미 내게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무엇입니다. 어떤 이미지가 내 안에서 마구 솟아올라 막다른 곳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그래서 꼼짝 못하고 그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한 마주침을 되풀이하는 동안 한권의 책이 조금씩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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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돌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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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흔 2004-02-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ooey님, 님의 <밑줄 긋기> 잘 보았어요. 마치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를 읽는 듯 하네요. 그래서 10년 전쯤 읽었던 그 책을 꺼내 보게 되었어요. 그때의 기억도 다시 되새기게 되어 기쁘고 고마워요. <그리고 나의 남은 이야기> 훔처갑니다. 행복하세요.

zooey 2004-02-1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흔님. 고맙습니다. 요새는 통 서재 업뎃을 못하고 있어 민망한데; 이렇게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님도 행복하셔요. :)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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