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도 가혹한 속박, 너무나 완전한 침체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선 여성도 남성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이란 집안에 처박혀서 푸딩이나 만들고 양만이나 짜고 피아노나 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의 소견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관습에 의해서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선고된 일 이상의 것을 하고 또 배우려고 하는 여성을 탓하거나 비웃는 것은 소갈머리 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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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이 그렇게 잘 팔렸던 데에는, 물론 모든 공인 경기에선 소가죽 공만을 써야 한다는 축구협회의 규정이 끼친 영향도 컸으나,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마케팅 실력이 한몫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는, 군함을 앞세워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든 국가 덕분에 갑자기 돈에 여유가 생긴 중산층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간파했다.

현대적 마케팅 기법이나 광고학도 배우지 않은 토마스 굿맨이 어떻게 그런 대단한 판매 기법을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당시 런던에서 가장 잘나가던 신문인 ‘데일리모닝’과 손잡고 ‘한 가족 한 축구공 가지기 운동‘ 이라는 생소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당대 최고의 내과의사가 쓴 사설을 가장한 광고문을 보면 그때 런던을 휩쓴 축 구공 광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즉 거 기서 의사는 "체력은 곧 국력이며, 지구 반대편까지국가의 힘이 뻗어나가는 이때 어린 시절부터 공을 차고 달리며 심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 국"임을 엄숙하게 설파한 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그런데 얼마 전 필자가 직접 공을 차보니, 토 마스 굿맨이라는 업자가 만든 가죽 공이 체력단련에 가장 좋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는 사연을 덧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어느 정도 여유 있는중산층 집안에선 아들들에게 토마스 굿맨 상표가 새겨진 가죽 축구공을 선물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으로자리잡았다.

그렇게 하여 일군 부를 바탕으로 토마스굿맨은 왕실로부터 작위를 얻었으며, 일약 체육계의명사가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군납업체로까지 선 정되는 행운마저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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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었다. 여자는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오는 걸 느꼈다. 남자였다. 여자는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의 걸음도 함께 빨라졌다. 열 걸음 너머에 그녀의 아파트가 보였다. 그녀는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때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핸드폰 키패드로 112를 눌렀다. 손이 떨렸다. 남자가 말했다.

"저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술집에서부터 따라왔다고 말했다. 중간에 말을 걸 틈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의 집은 십오층이었고, 이제 겨우 오층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남자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처럼 팔뚝이 무척 굵었다.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핸드폰에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뜨는 번호가 제 번호예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멍청한 여자들에 대해 들어왔다. 마음을 함부로 주는 여자들, 쉽게 승낙하는 여자들,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여자들. 그녀는 위험한 남자들보다 멍청한 여자들에 대한 경고를 더 많이 들어왔다. 쉽게 보이면 안 돼. 그건 네 값을 떨어뜨리는 일이야. 이제 십삼층이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남자가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자는 서둘러 내렸다. 남자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마치 그게 굉장히 신사적인 태도라는 듯이. 예의를 아는 남자라는 걸 보여준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연락을 할 테니 꼭 받아달라고 했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러니까 그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따뜻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현관문 쪽으로 팔을 뻗었고, 초인종을 미친듯이 눌러댔다. 가족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집안에는 띵동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강화길 <호수 -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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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희네 어머니가 문득 멈춰 서더니 계곡에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희네 아버지가 동의했다. 물이 저기에 있으니 물 곁에 자리를 잡고 밥을 먹자는 것이었다.

말이 나오자마자 제희네 아버지가 계수나무 사이로 성큼 내려섰다. 첫번째로 발 닿는 곳에 낙차가 좀 있었다. 그는 노부인이 내려오기 편하도록 주변을 오가며 돌을 옮기고 굵은 나뭇가지를 모으고 꺾어서 발 디딜 곳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여기는…… 안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혼자 중얼거리듯이 물으며 안절부절 서 있었다. 저기 앉으면 된다고 하는데 내 눈엔 앉을 수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젖은 흙이 달라붙은 채로 축 늘어진 나무들은 음산해 보였고 햇빛도 들지 않았다. 돌들 위로는 물에 휩쓸렸다가 쌓인 채로 썩어가는 잎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거기 내려가는 게 싫었다.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공공의 장소라는 검열도 작동했으나 무엇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장소가 싫었다. 나는 그곳에서 분명히 뭔가가 비참하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수목원이지만 본래는 숲이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나는 말렸다. 제희가 좀 거들어주기를 바라며 돌아보았으나 제희는 카트에 기대서서 체념한 듯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곡 바닥은 습했고 부패중인 식물 냄새로 공기가 진했다.

제희가 축축하게 젖은 돌들 위로 돗자리 두 개를 펼치자 제희네 어머니가 도시락을 열었다.

(중락)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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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작가가 돼보는 게 어때요.
다시 생각해달라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고,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눈을 감고 그의 번호를 지웠다. 눈꺼풀에 인 두로 지져놓은 것처럼 그의 번호가 선명히 떠올랐지만 언젠가는 이것조차 기억에서 지워지리라 생각했먹
두다.
결국에 우리는 함께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농약을 마셨다. 차가운 아메리카노에농약을 부으며, 이 커피조차도 그에게는 미제의 산물 이자(이름이 아메리카노이기까지 하니) 제3세계 노동 착취의 결과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웃 겨서 한참을 웃다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엄보
다시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엄 마가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이었다. 위세척을 마친 뒤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데 발치에 엄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랐던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거나 냅다 울어버리거나, 주님, 으로 시작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한탄을 시작하거나 일단은 뭐가 됐든 아침 드라 마처럼 감정을 터뜨리고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이 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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