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지수를 높이고 싶다. 북플의 독보적 활동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아침 걷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독보적 활동을 시작했다. 평일에 5000보 이상을 걷고(이건 문제 없다)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추가하면 된다. 문제는 읽고 있는 책을 알라딘에서 구매한 책 안에서만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밀리의 서재, 크레마클럽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시립 전자 도서관 두 곳도 이용 중이다. 구매한 책만 읽는 것이 아닌데 구매한 책만 '독보적'에 등록하라고 하니 난감하다. 아, 물론 구매하지 않은 책도 등록이 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럴 경우 스탬프를 주지 않는다. 스탬프 받으려고 하는 건데!!!


방법은 딱 하나, 서재 지수를 5000점 이상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면 구매한 책이 아닌 책을 읽은 경우에도 스탬프를 준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서재 지수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북플 독보적 때문에 서재지수가 너무 신경 쓰인다. 어떻게 하면 5000점까지 단숨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서재지수를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설명해주는 글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실험을 해봤다. 며칠 전 나의 서재지수는 3218점이었다. 그 후에 리뷰 한 개, 백자평 두 개를 작성했고 오늘 오전에 확인한 나의 서재지수는 3347점. 리뷰 하나랑 백자평 두 개로 129점을 끌어올렸다. 서재지수가 내가 작성한 글 개수로만 판정이 되는 것인지 조회수 및 좋아요 수도 같이 집계가 되는 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재 지수를 5000점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리뷰든 페이퍼든 계속해서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서재 지수를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서재 지수를 어떻게 올릴지 고민하는 글을 쓴다.


독보적 활동은 해보니까 재미있다. 어차피 걸을 건데 독보적 기록도 하고 스탬프도 모아서 적립금도 타면 좋겠다. 게다가 월마다 추첨해서 추가 적립금도 준다고 하니 완전 땡큐다. 문제는 이것 때문에 책을 더 사게 생겼다는 거다. 서재지수가 5000점이 되기 전까지는 구매한 책 중에서만 읽어야 하므로 '구매'에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된다. 물론, 사놓고 안 읽은 책이 굉장히 많다. 사놓은 책 중에서 안 읽은 책을 골라서 '독보적'에 등록하고 그걸 읽으면 된다. 그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나는 '구매한 책만 읽을 경우에만 스탬프를 준다고?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다른 구독 서비스에서 읽고 있는 책을 구매해야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독보적'에서 스탬프 10개를 모으면 적립금 500원으로 바꿔주는데 그걸 받으려고 책을 사는 사람이 있다니. 주객전도도 이 정도면 심각하다.


어쨌든 어제 산 책 이야기를 해보겠다. 빛소굴 출판사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다. 검색해보니까 종이책으로는 9권이 나와있는데 전자책은 6권만 존재한다. 그 6권을 한꺼번에 결제했다.

이번 충동구매는 전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탓이다. 얼마 전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으로는 <어제의 세계>를 읽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작가가 죽기 전에 남긴 회고록의 성격이 짙으니 가장 마지막으로 읽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달은 나 혼자 정한 슈테판 츠바이크 집중 읽기 기간이다.) 그럼 뭘 읽을까 하다가 이 작가가 소설도 잘 쓴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기에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있는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우체국 아가씨>를 읽기 시작했다.


재밌다, 역시나 이 작가 글을 잘 쓰는군, 하면서 읽다가 이 문장에서 심장을 후드려 맞았다.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 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어머니가 준 황금 머리핀이 머리에서 사라졌고, 어머니의 결혼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갔으며, 다마스크 식탁보가 식탁에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던져 넣어도 소용없었다. 그 시커먼 지옥 같은 구멍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늦게까지 잠도 못 자고 앉아서 털스웨터를 짜거나 방을 전부 세놓아도, 부엌을 침실 삼아 다른 사람과 같이 사용해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잠을 자는 것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돈 안 드는 일이었다. 여자는 늦은 밤, 지옥 같은 현실은 잊은 채 지치고 수척해진 육체를, 설렘이 사라져 버린 돌덩이 같은 육체를 침대에 눕혔다.」

갑자기 이 책을 사야겠어, 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 부름을 받고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했다. 종이책 정가의 40%로 할인한 가격에 전자책을 팔고 있었다. 40%면 거의 반값이다. 이 정도면 할인폭이 꽤 높은 거라서 바로 구매 버튼을 누르려다가 이게 페이지터너스라는 시리즈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시리즈를 통으로 검색해봤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이 두 권이 있고 그걸 제외하고는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작가들이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평점이 높고 무엇보다 출판사가 페이지터너스라고 자신있게 명명해서 그 책들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에 마음이 혹했다. 그 중 하나인 <우체국 아가씨>가 정말로 재미있으니 신뢰도 가고 말이다. 다만 <우체국 아가씨> 말고는 전자책 할인폭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이것만 종이책 대비 40% 할인이고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종이책 대비 30% 정도 할인된 가격이었다. 하지만 전자책 10% 할인쿠폰 적용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가 지금 보유한 전자책 캐시 안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6권을 한꺼번에 질러버렸다......

원래는 한꺼번에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사는 일은 없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전자책 적립금이 천 원, 이천 원 쌓일 때마다 하나씩 구매하는 것이 나의 구매 패턴이다. 세 권짜리인 <나는 고백한다 1-3>을 지금 그런 식으로 사고 있다. 몇 주 전에 1권을 샀고 또 얼마 전에 2권을 샀고 아직 3권은 구입 전이다. 전자책 적립금 모이면 그때 사려고 맨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을 정도로 나는 인내심이 강하다. 적립금 없는 곳에 구매도 없다는 신조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빛소굴 출판사의 시리즈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장바구니에 홀로 남아있는 <나는 고백한다3>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얼른 3권을 구입해 나의 책장을 완성해야 하니 전자책 적립금이 팍팍 쌓였으면 좋겠다.)


일단 지금 <우체국 아가씨> 읽고 있는데 이거 다 읽고 나면 츠바이크의 또 다른 책인 <과거로의 여행> 읽을 거고 그 다음엔 <쇼샤> 읽을 거다. <쇼샤>는 크레마클럽에 올라와있는 책이다. 예쁜 보라색 표지와 쇼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에 꽂혀서 진작 내 서재에 담아놓은 책인데 크레마클럽에서 읽기도 전에 알라딘에서 구매를 해버렸다


혹시나 밀리의 서재에 이 책들이 전부 들어와있는지 궁금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한 번 검색을 해봤다. 아뿔사, 빛소굴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가 밀리의 서재에 전부 올라와 있다. 하하하, 하지만 사서 읽는 게 더 재미있으니까 괜찮아. <우체국 아가씨>도 밀리에서 읽다가 산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전자책이 구독 서비스에 올라가면 책이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 같은)어떤 독자들은 일단 빌려보고 재미있으면 구입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그 작가의 그 문장들이 내 소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자책을 결제한다. 물론 전자책은 종이책에 비해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심히 떨어지기는 하지만...그래도 일단 돈을 냈으니까 내 거라고 우겨본다.(전자책 이용자들은 인터넷 서점이 망하면 자신이 산 책들이 전부 공중분해될 거라는 근원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망하지마, 알라딘. 책을 많이 팔란 말이야. 그래야 내 전자책이 영원히 보존될 수 있어ㅠㅠ)

그나저나 알라딘에는 <정신과 의사> 전자책이 아예 등록되어 있지 않은데 밀리의 서재에 이 책의 전자책이 버젓이 올라와있다. 그것도 '독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뭐야 도대체 뭔데. 알라딘과 교보문고와 예스24를 다 뒤져도 이 책의 전자책은 없다. 아니, 밀리의 서재에 올릴 정도면 전자책 파일이 있다는 건데 그걸 왜 안 팔고 여기에만 올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밀리의서재 소개글에 있는 전자책 출간일을 봤다. 2024년 1월 31일. 허허..지금이 1월 15일인데 이 책은 시간을 거슬러 왔구나. 그러니까 정식 출간 되기도 전의 전자책 파일을 밀리에서 독점 계약에서 올린 거다. 그렇다면 이 책은 밀리에서 봐줘야겠다.


서재 지수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 이 페이퍼는 빛소굴 출판사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지름신 영접을 거쳐 밀리의 서재로 끝나게 되었다. 이 글의 정체성이 뭔지 나는 모르겠다. 글을 시작하기는 쉬운데 글을 끝맺는 것은 항상 어렵다. 서재 소개글에 일부러 '미완성의 기록들'이라고 적어놨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미완성이라는 의미로, 더 나아가서는 미완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은 것이다. 어떤 글을 완성하려고 하면 시작하기가 힘든데, 미완성으로 끝내겠다고 다짐하면 글 쓰기가 쉽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가 뚝 끝내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의 모든 기록은 미완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일단 서재지수 5000점을 향해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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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책 파는 법 - 온라인 서점에서 뭐든 다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 땅콩문고 시리즈
조선영 지음 / 유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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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 MD라는,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알려주는 책. 화면 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 출판사의 시리즈를 전부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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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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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에피소드 모두 재미있는데 황금의 땅 엘도라도, 레닌, 미국 유럽 간 해저 케이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번역도 매끄러워서 읽는 내내 막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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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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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정신의학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혹은 과학사에 족적을 남긴 우연한 발견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커다란 역사의 사건 뒤에 숨겨진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워털루 전투에 대해 쓰면서 나폴레옹이 아닌 그루쉬를 주인공으로 삼고,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인 잔혹한 행위에 대해 쓰면서 피사로가 아닌 발보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 튀어나오고,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 듯 싶다가도 모두가 아는 결말로 끝나게 된다. 그런 글이 열네 편 실려있다. 거의 모든 문장이 현재형으로 적혀 있어서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살아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글은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저주'와 '봉인 열차'다. '황금의 땅' 이야기는 서터라는 사람과 캘리포니아, 그리고 골드러시에 얽힌 이야기인데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가 실화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 정도로 다이내믹할 수가 있을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더 이상은 스포가 될 수 있어서 쓸 수 없다.)


'봉인 열차'는 누구나 다 아는 레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혁명 시기의 레닌이 아니라 혁명 이전 스위스에서 구두 수선공 세입자로 살던 시기의 레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읽어본 다른 역사책에는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당시 국외 망명 생활 중이었던 레닌이 독일이 마련해준 특별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핀란드역으로 귀국했다고만 쓰여있었다. 혁명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다른 에피소드들은 거의 다 어떤 사건 혹은 인물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데 레닌의 경우 제일 재미있는 지점에서 서술을 끝내버린다. '여기서 끝내면 어떡해!!제발 좀더 써주세요!!'를 외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괴테, 헨델에 관한 내용은 쪼오끔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이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발은 책 전반적으로 고르게 훌륭하다. 심지어 톨스토이에 관한 챕터는,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작품에 덧붙여 슈테판 츠바이크가 짧은 희곡 하나를 쓴 것인데, '뭐야, 희곡? 재미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다가 완전히 빠져들어버렸다. 그리고 유럽이랑 미국 사이에 전신 연결한 이야기, 이것도 정말 재미있다.


이 책에서 특히 좋은 점은 지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의 지도, 발보아가 이동한 경로의 지도가 있어서 좋았다. 이거 없었으면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번역도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막히거나 갸웃거리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 번역가가 츠바이크 선집을 쭉 번역하신다면 계속 따라가면서 읽을 생각이다. 역자 해설도 읽으면 도움이 된다. 키케로와 츠바이크를 엮어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해설을 읽고 나니 키케로 챕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글을 너무 잘 쓴다는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이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볼 생각인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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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색하는 인간은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리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역사에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울려 나온 소리는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이며 보이지 않는 탑이 되어갔다. 천재가 짓는 투명한 건물은 그림자 하나 없이 찬란하게 위로 쑥쑥 솟아올랐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를 끌어 올려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명징한 감각의 세계로 데려가더니 이제 그를 내동댕이쳐 버렸다. 몽롱한 피로감이 그를 덮친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깊이 잠든다. 그러는 동안 그의 내면에 깃들었던 창조자, 시인, 천재는 다시 죽어버린다."


"이 진지한 사람들이 그 와중에 겨울의 정점인 6월에 멋진 성탄절 파티를 했으며 「사우스 폴라 타임스South Polar Times」라는 익살스러운 신문을 펴내며 즐거워했다는 기록을 읽으면 뭉클해진다. 예를 들어 고래가 나타난 일, 조랑말이 넘어진 일과 같은 자잘한 일들이 엄청난 사건이 되고, 작열하는 오로라, 끔찍한 혹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독감 같은 대단한 일들이 익숙한 일상이 된 삶은 묘한 감동을 준다." 


"우연한 성공과 손쉬운 성취를 보고 고무되는 것은 명예욕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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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책 파는 법 - 온라인 서점에서 뭐든 다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 땅콩문고 시리즈
조선영 지음 / 유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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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파는 법>의 부제는 ‘온라인 서점에서 뭐든 다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다. 온라인 서점 MD가 어떤 직업인지, 출근해서 뭘 하는지, 책을 팔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는지 말해준다. 아주 오랫동안 온라인 서점을 이용했지만 정작 온라인 서점 MD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뭘 하는지는 정확히 몰랐기에 '재밌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이 저자, 글을 상당히 잘 쓰신다. 막히는 부분 없이 잘 읽힌다. 무엇보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얼마 전에 해외 출판 편집자가 쓴 책은 주제에서 벗어난 글이 너무 많아서 읽다가 중단했다. 일관되게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온라인 서점 MD가 출판사에 연락해서 책을 주문하고 그 책들을 판매해서 서점의 매출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라는 걸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온라인 서점 MD라고 하면 막연하게 여러 가지 책을 읽고 구매자들에게 추천할 책을 고르고 간략한 리뷰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MD 추천‘란에 들어가는 그런 글 말이다. 그런데 이분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책 재고 주문부터 하는 사람들이었다. 


온라인 서점 MD의 출근 시간은 8시.(이분은 예스24 직원이다.) 상당히 이른 시간이다. 출판사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회사에 도착해서 전날과 새벽에 들어온 주문서들을 싹 검토해서 책 주문을 넣는다고 한다. 아니, 나는 이런 건 시스템이 알아서 하는 건 줄 알았다. 일일이 고객들의 주문량을 검토해서 오늘은 이 책을 몇 권 주문해야 하는지 정하는 직원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해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세상에도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온라인 서점 MD의 책 주문 작업이라는 게 정말 흥미롭다.


온라인 서점 MD는 재고를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사들이고(당연히 많이 사야 싸다) 그 책들을 얼마나 많이 파는가, 로 승부를 보는 직업이다.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해서 사들인 책들이 생각보다 안 팔릴 때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MD도 많이 주문할 땐 즐겁다. 많이 주문할수록 공급가 조정도 좀 더 수월하니 원래 가격보다 3~5퍼센트 낮춰서 사들이면 정말이지 신이 난다. 문제는 책이 안 팔려 지옥을 맛볼 때다. 아무리 스테디셀러라고 해도 특별한 이슈가 없다면 판매는 자연 감소하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책을 쌓아 둘 공간이 없으니 안 팔릴 것 같으면 주문 좀 하지 말라는 물류센터 담당자의 항의에, 특별한 판매 계획이 없으면 출판사로 반품하라는 팀장의 통보 메일을 받아 보시라. 사들일 때의 흥겨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쪼그라든 죄인이 되어 지옥을 맛본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전화를 걸어 “혹 반품이 가능할까요”라고 어렵게 입을 뗀다. 내가 보낸 대량 주문 발주서를 받으실 땐 웃으셨던 부장님의 깊은 한숨이 전화기 너머로 들리니, 나는 더욱 움츠러들어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아, 알겠습니다. 반품은 역시 어렵겠죠. 대신 굿즈 제작비 지원은 가능하실까요……?"」


출판사에 전화해서 책을 반품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온라인 서점 MD의 괴로움이라니...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 했다. 책 판매는 오로지 출판사의 사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라인 서점 MD는 때로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하지 않는 일을 해야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책의 크기와 무게를 재서 기입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들어보면 직관적으로 아는 정보들을 온라인 서점에서는 알 수 없으니 그런 걸 구매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도 어디선가 자동으로 입력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는데 MD들이 일일이 가로세로 길이 재고 저울에 무게 달아서 기입했다고 한다.(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예전에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굿즈 관련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알라딘 서점이 굿즈로 대박을 치고 나서 다른 온라인 서점들도 너도나도 굿즈 전쟁에 뛰어들었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굿즈의 진화를 굿즈 1.0시대부터 3.5시대(현재)까지 나누어 설명한다. 굿즈의 진화 과정을 지켜봤기에 새록새록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 중 내 혈압을 오르게 한 부분이 있다. 바로 '띠지'다. 저자는 웹상에 띠지 두른 표지를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온라인 서점과 출판사의 의견이 갈리는 것을 '띠지 갈등'이라고 표현했다. 출판사는 띠지가 책 판매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면서 띠지 두른 표지를 웹에 올리기를 원한다. 온라인 서점은 띠지 없는 표지를 올리기를 원한다. 웹에 띠지 두른 표지를 올리면 구매자들은 띠지도 엄연한 상품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배송 중에 띠지가 훼손될 경우 책을 아예 바꿔달라고 항의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 입장에서는 띠지가 골치 아픈 존재다. 


하지만 띠지 갈등을 논할 때, 출판사도 온라인 서점 관계자들도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전자책 구매자들의 불편함이다. 책을 받아서 띠지를 제거할 수 있는 종이책 구매자들과 달리, 전자책 구매자들은 웹상에 있는 표지에서 띠지를 벗길 수가 없다! 띠지를 입힌 채로 웹에 올리면 내 전자책 책장에도 그 띠지 두른 표지가 보여지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띠지를 선호하지 않는데, 특히 사람 얼굴이 들어간 띠지는 정말로 선호하지 않는데, 온라인 서점이 띠지 두른 표지를 올려버리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 표지를 간직해야만 한다. 나는 그게 온라인 서점의 횡포라고 생각했는데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었다니, 대충격이다.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전자책 관련 네이버 카페에 '띠지 없애기 캠페인'을 벌이는 분이 나타나셨다. 그 분은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서 웹에 올리는 표지에서 띠지를 제거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하신다.(그 분은 그게 출판사의 정책이라는 걸 진작에 알고 계셨나보다.) 그 메일을 보고 실제로 표지에서 띠지를 제거해준 출판사가 있고 그런 요청 따위 사뿐히 무시하고 띠지 두른 표지를 고수하는 출판사도 있다고 한다.


제발 출판사들이 띠지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 아니면 띠지를 따로 촬영해서 이 책을 사면 이런 띠지가 나간다고 안내를 해주든지.(그럼 온라인 서점MD의 일이 엄청나게 늘어날테지만.) 아무튼 나는 띠지 없는 표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 간에 ‘띠지 갈등‘이 벌어졌을 때 부디 온라인 서점이 승리하시어 깔끔한 표지가 웹에 등록되기를 바란다.


고개를 갸웃하게 했던 것은 리커버에 대한 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몇몇 환경 관련 책을 리커버하면서 나무 심기라는 공익적 활동까지 묶은 이벤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고 한다. 리커버와 환경 운동, 올바른 조합인건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매대에 깔린 책이 이 모두 소진되고 나서 이왕 새로 찍는 거 새로운 표지로 바꾸겠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리커버 되는 책들 중에는 유행따라, 계절따라, 판매부수 따라 책표지를 갈아치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이 책에도 언급되지만 봄에는 벚꽃 에디션을 출시하면 잘 팔린다고 한다.)


책을 굿즈처럼 소장하는 팬덤을 지닌 작가들의 책은 리커버 할 때마다 판매량이 늘어날테니 출판사나 온라인 서점 입장에서도 욕심나는 작업일테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것도 하나의 마케팅이니 리버커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환경 운동과 묶은 리버커라는 말이 가능한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환경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자책을 홍보하는 건 어떨까. 전자책은 종이도 필요없고 인쇄도 필요없다. 온라인 서점 MD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 재고 관리도 필요 없다. 물류센터 공간도 차지 안 하고, 배송도 필요 없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물론 내가 모르는 전자책 관련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건 그저 전자책을 사랑하는 한 독자의 근거 없는 헛소리다.)


아무튼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여기 쓴 내용 말고도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이 아니라면 온라인 서점 MD가 뭘 하는 사람들인지 어디 가서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책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디 가서 온라인 서점 MD가 뭐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것이 책 읽는 사람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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