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윤성희, 베개를 베다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한때는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특히 어느 사고를 당한 시점에선, 어떤 사건에 맞닥뜨려서 갖는 생각이라면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일상의 잔잔한 일과를 가장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기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일상,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그저 그런 날들의 일이 윤성희의 글을 거치면 정말 특별한 사건처럼 느껴진다. 굳이  따지고 보면 소설적 ‘사건’이라 느낄 만한 일이 없어 책을 덮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게 되지만 글을 읽는 동안에는 그 잔잔함이 너무도 익숙하면서, 그래서 뭔지 뭐를 아득함과 가슴이 저린다. 이것이 소설인가라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수필 느낌이 나는 글이라서 그렇다. 수필이 어떤 글쓰기이던가. 내가 겪은 일상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이니,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에 실화의 이야기에 대한 감정의 반응인 것이다.

  여기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들이 섞이어 등장인물이 섞이어 모든 가족들을 만나는 듯하다. 그리고 한 생애가 저무는 느낌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고 그리고 생을 마감하고. 마치 아주 머언 날에 삶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가 함께 했던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딱히 즐거운 일만 가득한 것이 아니고 꼭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하루, 또 하루, 그런 하루의 삶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간다.

  베개를 베고 누워 멈칫 멈칫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내 가까운 이에게 들려주고 듣는 일들이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다. 예기치 못한 사물들 하나에 미운정, 고운정이 붙어 버린 듯 사람과 사물 속에서 ‘기억’들과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다. 내 감정을 담고 있어 일회용 물건이라도 버리면 안될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비어 있는 집안의 모든 것들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하신 것일까.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현관에 서서 집안을 향해 다녀왔습니다. 빈집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그 말은 꼭 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분들. 액자들, 텔레비전. 개지 않은 이불.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들. 그런 것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내가 지금 나가니 빈집 잘 부탁한다. 내가 지금 들어왔으니 걱정 마라. 뭐 그런 신호로. p174, 낮술


   그래서 그는 이혼한 아내가 연수간 사이 빈집을 돌보는 것일까. Tv를 보고 음식을 시켜먹고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보며 옛 일들을 기억하며. 빈집에게 인사하기 위해, 신호를 보내기 위해. 텅빈 집안에서 1인분은 배달되지 않아 음식을 더 시켜먹으며 뒤척이며 tv를 보는 ‘그’의 모습이 애잔하다. 하지만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물받이 아래 흘러내린 물처럼 잔잔한 눈물이 나려 한다.


나는 죽은 화분에도 물을 주었다. 듬뿍. 물받이 아래로 물이 흘렀다.

p124, 베개를 베다


  무심히 흘러가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특별히 악에 받쳐 타인을 해치는 이도 없고, 특별히 유쾌하여 타인을 달뜨게 하는 이도 없지만 한번 생각하면 다 기억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두 번 생각나면 다시는 기억나진 않을 것도 같은 이야기들. 소설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보다 사람들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도 건네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보지 않아도 우리들의 일상의 수다는 정말 많았고, 다양했다. 그런 수다들이 모여서 가슴에만 남지 않고 사물들에 사람들 속에 속속히 각인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 하루 하루의 날들의 삶에 신호를 보내고 싶다. ‘사건’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익숙해서 무심해져버린 일상의 하루가 소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고.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달리 보일 일들인데. 문을 열고 나가 다시 들어와 이렇게 외쳐야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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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섞은 말


  은희경, 중국식 룰렛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묻지? 뭘 알고 싶어서? 삶의 후회와 실수를 타인에게 말하고 싶은가. 아니 타인의 진심을 알고 싶을 뿐이다. 내 진심은 거짓을 섞어 순도를 줄이면서 타인이 제 진심을 얘기할 거라 기대하는가. 그럼에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런 게임. 그것에 기대어서라도 상대의 진심을 추측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별것 아닌 게임으로 위장해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는 진심.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진실을 말하고픈, 진실을 듣고픈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일까. 진심이란 건 감추어야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공교로운 운명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p28, 중국식 룰렛


  내 삶의 거짓은 악의를 감추기 위함일까. 선의를 드러내기 위함일까. 그래서 그것은 나의 운명을 어디로 끌고 가고 있을까. 어떡하든 내 이기를 위해 거짓을 일삼았대도 삶은 그저 우연의 연속이라면 그렇다면 이젠 이렇게 말하리, 세상의 모든 불운과 행운에 건배!

 

미혹과 욕망이 수없이 나를 낭떠러지로 몰았지만 나는 한번도 거짓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지난 일을 편집하고 방어장치를 만들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다. p133, 불연속선


  지난 삶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지난 삶이 아니라 다가올 삶에서조차도 “한번도 거짓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자신하지 못하겠다. 거짓에 휘둘리기에 미혹과 욕망의 낭떠러지로 골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비참하게도 미혹과 욕망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것을 점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듯, 늘 밀려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거짓에 휘둘린 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절대 휘둘릴 수 없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이라고? 아니, 지금 이 삶의 결과는 정해진 채로 흘러가고 있다. 거짓과 진실을 얼마만큼 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루한 삶으로의 낙인은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으려 바둥거리는 모습을 쳐다보며 게임처럼 즐기는 이는 따로 있다. 그렇기에 거짓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몹시도 억울했을, 아니 진실의 비율이 높은 것이 더 억울한 것이 되려나. 마치 가진 자들의 게임판의 말이 되어 달그닥거리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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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친절


 정세랑, 은행나무, 2014-12-24


   삼남매는 곧 헤어질 시간을 앞두고, 여행을 떠난다. 각자의 인생을 위한 길이 있기에, 그 길이 서로 다르기에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 그 헤어짐의 시간을 앞두고 형제애를 다지고 싶었던 것이라 해두자. 유난스런 말과 행동도 없고, 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는 듯 뚱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한 차를 타고 가는 삼남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특별히 끈끈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는 사이. 그래서 유난스럽지 않은 그들의 여행은 ‘각자 해수욕을 하고, 모기에 시달리고, 해산물을 먹는’ 코스로 이루어진다. 돌아오는 길엔 배고픔에 서둘러 미묘한 형광색을 띠지만 표준적인 바지락 칼국수를 사먹으며 머릿속으로는 얼른 각자의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이 재인, 재욱, 재훈이 함께 한 휴가다.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된다. 사실 가족이라 해도, 형제들이라 해도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들 남매 역시 그렇다. 재인은 대전으로 재욱은 아랍의 공단에 파견을 갈 것이다. 재인과 열 세 살, 재인과는 열 살 차이가 나는 고등학생 재훈만이 서울에서 엄마와 산다. 작은 실수에도 폭언과 때론 극적인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와 함께. 사고가 난 적 있는 재훈은 그 이후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계속 신경을 쓰는 걸 어려워한다. 오죽하면 중요한 말이나 중요한 일에 다른 색깔로 표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재훈이었다. 그들이 알아챈 것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다. 재훈은 자기 마음대로 엘리베이터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재인은 손톱이 부러지지 않았다. 재욱은 시야가 이상했다. 붉어지는 것이다. 아랍의 플랜트에서 일하는 그에게 설계와 설계 사이설계와 실제 사이 간극이 클수록, 잘못 시공되었을 때, 위험이 클수록 시야가 붉어진다. 마치 트러블 감지기가 내장된 것처럼. 그리고 그들에겐 이상한 소포가 배달되어 왔다. 누군가를 구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초능력이라기엔 미미한 이 증상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으며, 누구를 구하라는 말인가.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던 재인은 실험실 사고가 빈번하니 손톱을 배양한 판을 만들어 실험실 사람들의 옷에 넣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재인이 도움을 준 이는 자신의 룸메이트였다. 스토커로부터 공격당하던 친구에게 손톱을 활용하고, 강하고 단단해진 자신의 손톱으로 사고로 아파트에서 추락하던 엄마를 구조하기도 한다. 교환학생으로 조지아 염소농장에 간 재훈은 환각 버섯을 먹은 총을 든 이들로부터 친구 세 명을 구한다. 심지어 그들은 재훈을 괴롭히던 아이들이다. 재욱은 전쟁에 의해 고아가 되고 인신매매단으로 끌려갔을지 모를 두 아이를 구한다.

  이들 애틋하지 않은 세 명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각자의 경험을 떠벌이지 않는다. 그저 히어로 영화를 나누며 담소하며 각자의 생각에 빠질 뿐이다.


 “이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p164


  세상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이들 세 명처럼 그래도 ‘어떤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내게 ‘넌 누군가를 구해야 해’라는 사명감을 심어준다면 나도 모르게 언제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도대체 뭐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능력이나마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래, 그런 것이 마음가짐 아닐까 싶다.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한 제 나름의 납득도 다 달랐다. 재인은 먼 미래에서 경아의 후손이 일을 도모했을 거라고 믿었고, 재욱은 사막에서 잘 보이는 별에 있는 다른 문명에서 온 신호라 여겼고, 재훈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바지락조개를 의심해서 해양과학 쪽으로 진학할까 고민 중이었다.

 여름에 시작되어서 겨울에 끝난 삼남매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삼남매는 가끔 동시에, 혹은 조금 어긋난 순서로 생각하곤 했다.

 이 모든 일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p166~167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무심한 듯한 이 삼남매의 짧은 여행의 경험은 그들이 떠벌이며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서 좋듯이, 그들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계속 그들의 작은 친절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잔잔한 다정함을 쏙쏙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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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 가고 싶네


 안보윤, 알마의 숲


   소년은  삶을 접으려 한다. 어느 숲 속 소나무에 밧줄을 매달고 소년은 머리를 넣는다.

  힘겹게 발목이 빠지는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소년이 챙겨간 것은 밧줄과 이어폰.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처럼 소년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의 말은 이승을 떠나는 소년에게 전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그치고 비난하면 아이들은 더욱 과격해지죠. 화해와 용서의 움직임으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제자리에 멈춥니다.”

 “웃기고 있네”


  이승과의 교신을 거부하듯 이어폰을 눈 속으로 집어 던진 소년은, 그렇게 고리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그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왜 소년이 자살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 아들 자살도 못 막아”라는 기사들이 실리도록. 소년이 고리 속으로 머리를 넣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목표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산장이었다.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호한 어느 지점, 소년은 숲 속 알마의 산장에서 알마라는 소녀와 소녀의 삼촌과 올빼미를 만난다.

  

 나는 아침마다 반 뼘씩 자라난 감정의 가지들을 쳐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생이었다. 혹독하게 감정을 잘라낼수록 삶의 가능성이 커졌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증후군이라 이름붙이는 겁니다. 따님의 증상이 워낙 특이해서요. p38~39 


 알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알마는 감정을 키우지 않는다. 기쁨에서 슬픔에도 눈물은 나오니까.


 늘 궁금했었다, 왜 하필 눈물일까. 분노로 뇌압이 상승하면 죽는다든가 웃음소리의 데시벨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죽는 방법도 있는데 왜 하필. 그런데 알았다.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은 거세되었다. 나는 누구도 애틋해하지 않고, 무엇도 아쉽지 않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무엇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텅 비었다. 나를 지키는 엄마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엄마의 병을 눈치채고도 놀라지 않고, 엄마와 헤어질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가래떡이 되어 나타났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이 병이 내게서 빼앗아간 건 인간의 영역이었다. 나로 하여금 짐승의 영역에서 살도록, 이기심과 본능 외에는 필요치 않은 황폐한 영역에서 살도록 했던 것이다. 비겁하다, 비겁하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눈밭을 뛰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p123~124 


  이런 알마이기에 소년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을 두려워하는 소년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지탱하는 알마 사이에 유대는 형성이 될까.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될까.


죽음이 왜 두려워? 무섭고 두려운 건 삶인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어, 사실은 알마도 그렇잖아,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봐, 그래서 죽어버릴까봐 조마조마하잖아,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책 읽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잖아. p128


  알마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박감으로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산다. 오히려 알마에겐 정열적으로 살아갈 수 없이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소년은 그토록 청소년의 마음을 잘 아는 ‘엄마’가 자신의 아들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힘겨워한다. 삶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되는 것은 알마가 될까. 소년이 될까. 소년의 힘겨운 삶은 알마가 겪는 것에 비하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어리석고 멍청하고 성급하게. 하지만 알마의 숲으로 가게 된 것은 소년의 힘겨운 마음과 상처 때문이다. ‘누구에 비해서 부족하기에’ 소년의 상처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소년의 상처는 소년에게는 그 상태 그대로 절대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p132


   알마의 삼촌은 소년에게 말한다. 그 숲에서 소년은 ‘노루’로 불렸고 다시 소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문’이 열려야 한다. 소년 자신도 모르는 새 통과해 온 그 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언제 죽을 모르는 알마가 생을 절박하게 즐기는 것처럼, 그 숲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 아닐까. 새삼 알마가 삼촌이 존재하는 알마의 숲이 있기는 한 걸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순 있는 걸까. 어쩌면 소년의 환상에서 만들어 냈을지 모르는 몽환의 그 숲에서 소년은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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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방인영


 이재찬, 펀치


  자칫 오해가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여서도 아니고 오로지 ‘펀치’라는 제목을 보고, 드라마 ‘펀치’의 원작인 건가?

   여고생이 화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 고3 여고생 ‘방인영’은 여느 여고생과 다른가, 비슷한가를 생각했다. 결론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여고생,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불안정한 고교생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내렸다. 이에 대해 말도 안된다고, 방인영은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랑은 확연히 차이가 있는 독보적 존재라고 반대하는 이의 말도 그렇다고 수긍한다. 하지만, 후자보다 전자에 더 방점을 두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 땅의 고교생의 불안정한 상태와 정립되지 않은 가치, 여차하면 삐뚤어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더 매몰되는 모습들을 ‘방인영’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면의 기사를 보면 ‘방인영’과 같은 어른들은 수두룩하고, ‘방인영’과 같은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굳이 놀랍다거나, 새롭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가르치는 입장에서 ‘방인영’을 바라봤을까. 내 시선은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분명 ‘방인영’을 분리해냈는데, 그것이 어느 지점인지 모르겠다. 콕 찍어 특정한 사건과 시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점층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일탈이란, 사회에 부적응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 속에는 가정이 포함하고 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화하도록 돕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늘 당연하듯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므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건’ 발생 후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가정환경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19세나 20세나, 1세나 22세나 생각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싶기도 하다. 개인차가 있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특정한 ‘틀’로 구분지어 해석하려는 이유 때문도 아닌가 싶다. 섣부른 틀을 끼워서 이야기하나 한다면, 청소년들의 일탈과 반항, 범죄 행동은 같아 보이지만 가정환경의 차이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형태의 사건을 두고서 빈곤가정 청소년들의 일탈과 범죄는 ‘잔인한’ ‘악랄한’이, 부유한 환경의 경우엔 ‘불화와 갈등’ ‘청소년기의 반항’ ‘부적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펀치의 주인공은 부유한 경제환경에 부모는 학벌이 높다. 방인영의 부적응은 국회의장의 폭생 사주 사건을 맡을 정도로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와 자신을 달달 볶으며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엄마, 그리고 주말이면 가야 하는 구원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교회 역시 소위 ‘급’이 되는 이들의 끼리끼리 모임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결국은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는 사회, 이 모순의 구렁텅이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는 방인영은 이 구렁텅이를 탈출하기를 고대한다. 이 탈출이 가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어쨌든 과정인지 결말인지, 방인영이 내린 선택은 살인계획이다.

  철저하게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에 대해 냉소적이며 육두문자를 날리는 방인영은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의 방법을 따라 계획을 세운다. 절대 자기 손으로가 아닌, 청부의 방법을 ‘기획’하면서. 19세 여고생의 살인계획에 동참된 이는 40대의 계약직 공무원 ‘모래의 남자’다. 이 어린 소녀는 40대의 심리를 요리 조리 휘둘러가며 자신의 계획에 이용한다. 자신은 부모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모품이 되기 싫었던 이 소녀는 자신도 이 ‘모래의 남자’를 자신이 휘두르는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방인영의 이 살인계획에는 어떠한 이해를 가할 부분도 아픔을 공유할 틈도 없다. 오로지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풍부한 아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일탈과 반항으로만 비춰지는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겪게 되는 낮은 자존감을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겠다. 어쩌면 철저하게 ‘안타깝지만 그럴 만도 했어’라고 방인영을 이해할 지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방인영’이 가진 특징이 되는 건가. 작가의 의도이겠지만,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펀치’를 강하게 맞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전혀 펀치가 없기도 하다.


모래의 남자는 작고 빼빼 말랐다.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후줄근하다. 파란색 남방에 쥐색 점퍼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싸구려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두 부류다. 자신감이 넘치거나 포기했거나. 모래의 남자는 분명 후자다. 언젠가는 자신감이 넘쳤던 적도 있었을 거다. 나는 언제 잃어버렸을까.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학교 성적과 비례하는 얕은 자신감 따위가 아닌, 깊은 곳에 저장된 자신감이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 속의 직유가 깊이 침범해 내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 냈다.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동영상에서 태아를 긁어낸 것처럼. 아이가 기계를 피해 도망가듯 내 자존감도 달아나려 안달했다. 이젠 더 이상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자존감은 내 안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니란 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 p187


   자, 그럼 방인영의 계획에서 대상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내신도 외모도 모두 평범한 5등급 소녀의 평범하지 않은 ‘살인계획’의 대상은 부모다.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부모들이라 소녀는 항변하지만, 그래서 반성도 후회도 슬픔도 아픔도 없지만 문제적인 시스템에 대해 비웃음을 날리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가 날리는 ‘펀치’인가? 분명 정의로운 펀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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