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계나’는 어디에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p161    


   

한국이 싫다고 외치는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 여성의 호주 이민 성공기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왜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지를.

   헌법에는 행복추구권이 있으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적’과 ‘인종’으로 소속감을 강조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주인공 계나는 마침내 깨닫기를, 자신이 처음에야 그저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가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호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자신은 한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계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는 곳이다.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11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신이 지금까지 충분히 살았지만 한국과는 맞지 않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행복감과 연결된다. 계나가 느끼기에 한국은 정글 같은 곳이다. 자신은 까다롭긴 해도 정글 속에서 사자와 맞짱을 뜨는 것보다는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그 결심으로 인해 계나가 부딪치는 것은 부모의 반대,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물론이거니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다. 그럼에도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별 일을 겪는다. 어찌 보면 호주로 떠날 때 역시 계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호주에서의 생활에서도 ‘두려움’ 없는 미래가 보장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계나는 호주에서 쭈욱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한국이 싫었던 처음의 감정보다 더 적극적인 마음, 보다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이고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보다 호주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보다 재미없다. 책을 덮고 난 후의 첫느낌은 그랬다. 아니, 지금까지도 재밌지는 않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확 끌어안고픈 문장도 없고 구조나 스토리에서 놀라움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제목. 이 책의 제목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이들 열에 아홉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 한국이 싫다! 이 말은 ‘일하기 싫어’, ‘직장 다니기 싫어’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준다. 포괄적이고 아주 아프고 슬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싫다니.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나도 다 그런다. 이런,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정말, 정말 문제가 많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암흑, 구렁텅이에 홀로 있지 않다는 안도감은 더욱 큰 절망감과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이 책이 재미없는 이유는 ‘생각보다’라는 데 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 처절한 공감의 마음을 내용이 채워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보다 더욱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목만큼이나 보다 강렬하고 보다 확고하게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감정을 이끌어주길 바랬건만, 그냥 싱거운 간이 된 국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부분적으론 제목을 통해 사회비판을 국민들의 기분을 대변했다는 데 대해선 공감한다. 그러나 이 짧은 장편 소설을 순식간에 읽혀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하기보다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기서 통쾌라는 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말함이다. 스토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 보기에 왜 주인공은 지속적으로 어설픈 어퍼컷만을 날리는 느낌일까. 강력한 한방이 아니라.

  마치 대화를 하듯 지속적으로 혼자 내뱉는 주인공의 말은 친한 친구가 내게 하는 이야기, 토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 지점이 그래서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불편하게’ ‘통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왜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대화 형식으로 하기엔 여성이 훨씬 나을 듯해보였을 지 모르겠다. 대화, 혹은 수다는 ‘여성’에게 좀더 부각된 이미지이니까. 그래서 분위기는 읽히나 한국 사회에서의 20대 후반의 여성이 가지는 고민과 부딪치는 현실문제가 좀더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책 제목이 가지는 무게감에 비해서 내용이 조금 가벼이 여겨지는 탓에 된장녀의 이미지가 조금 드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20대의 보편적 고민과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처절함이나 치열함이 덜 느껴지는 것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이 싫은 이유에 대한 보편적이고 문제 비판적인 흐름에서 계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과 선택으로 이어져서일까. 한국이 싫다는 데 대한 생각은 비슷할 수 있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난 전자에 더해져 보다 비판적 시각을 원했나보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수많은 “한국의 계나”로 보이지 않고 특정한 “계나”만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내겐 제목만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계나를 지지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계나 이상의 계나를 생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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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그럴 리가!



  제목에서 1920~30년대의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의 모던걸의 이미지가 그냥 생각났는데 연유는 모르겠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기울여 선 자세의 누군가를 그린 표지 속 소설은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이야기라고, 더 나아가 청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당연, 그런가? 그럴 리가!

 의미의 차이인 듯하다.

  이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당선작 선정  이유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현실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래서 현실 속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가. 소설 속 주인공은 스물셋. 그녀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법은 아르바이트다.

  

내가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바이트였다. 날씨연구소 문을 열 때나 인형극이 끝나고 아이들과 배우들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안내할 때, 평범한 스카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써서 올릴 때, 준비해 간 한류 스타 사진에 일본 아줌마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볼 때 ‘아, 내가 대학생이구나’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마치 바리케이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린 길이라는 걸, 유령이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처럼. 학생인 나와 캐스터인 나와 인형극 배우인 나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알아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룰이다. p40


  스물셋의 대학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생활비와 학비로 쪼들리며 전전하다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 이름이 아니라 익명 또는 별명으로 일하는 곳은 ‘날씨연구소’다. 정말로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날씨를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손님의 마음상태를 잘 예측하고 들어주는 칵테일 주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주인공이 잘 예측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등장인물과 손님들은 하나같이 제 이름이 없다. 역시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그들이 이 ‘날씨연구소’를 벗어나면 그 별명 외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도 각각의 일들을 하는 서로 다른, 서로를 통일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부정하고픈 주인공이 바라보는 사회도 역시 뿌연 안개가 가득한 익명일 것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164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베개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은 당연 주인공의 일상과 감정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그저 흘러 가버릴 경험이 아니기에 스물셋의 ‘그녀’에겐 더욱 그렇다. 단골인 일본 손님이 갑자기 바에서 사망하는 일이나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 언니에게 당하는 사기, 예술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인 듯 행하던 유부남 영화감독 등. 이 영화감독의 언사들을 보면서 마침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감독이 생각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왜인지 이 영화감독의 모습도 영화나 소설 등에 조금은 익숙하게 등장하는 유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내 방의 벽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가 사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진실도 허세가 되고, 허영도 현실처럼 보였다. p100 


  글쎄.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학업과 경쟁에 시달리어 소위 일탈을 일삼는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이 세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에 밀리어 마냥 주체적 생각없이 한량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이것을 이 세대 청춘의 모습이라 부르며 너도 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서 모두가 같이 겪는 무게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 현실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규정지어 새삼 충격을 받는 일이 없는 듯하다. 놀라움과 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규정화된 청춘의 모습과 일상만이 남아, 그렇다 한들 그것이 당연한 듯이. 그 어떤 일들을 경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 속에서 어떤 청춘들은 그 듣기 싫은 ‘청춘의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래 안고 있던 베개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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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작가의 그들은 스타일리쉬한 느낌이다. 제목이나 느낌 때문에 그런 듯하고 패션잡지에서 일한 작가의 이력 때문에 은연 중 그런 생각이 굳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첫장편 <스타일>이 출간될 시기에 한창 칙 릿(Chick Lit, chick + literature)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아니,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써서 한국의 칙 릿 분위기를 이끌은 건가. 칙 릿 소설은 젊은 현대 여성, 대체로 2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소설이라 하는데 이런 스타일의 책 중엔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었고, 전혀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백영옥 작가가 기억 속에 특별히 자리한 것은 칙 릿의 선두 작가라서가 아니었다. 어쩌다 읽게 된 작가의 단편 제목 때문이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제목이었다. 이 책 출간 당시(2007년 봄)는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저 말을 달고 사는 분위기였던 것을 기억하기에 그것을 소설화 한 작가에게 놀랐던 기억. 이 작가는 정말 트렌드에 밝구나라고 느끼기도 했고.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사실 글을 보면서 파악하기엔 애매했던. 작가 역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쓴 건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이고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던 듯한데 언젠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 소설을 다시 찾아보려니 제목이 바뀐 듯 했던 것도 같아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때엔 저런 소설 제목도 그런 이야기도 쓸 수 있었고 당당히 출간이 되는 시대였구나! 검열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언론이든 정치권에서든 문제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는 시대였기도 한, 온전히 문학은 문학으로서 바라보는 시대였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2007년은 대선이 있던 시기였으니 세기말적인 분위기로 묻혀진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부추겨진 것인가. 어쨌든 새삼, 검열이 일상화된 시대에 저 소설의 제목이 너무나 달리 느껴진다.

  


  이 책은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이라는 단편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 단편은 여러 작가들과 함께 여행 소설 형태로 출간된 책에 삽입되어 있다. 짝사랑하는 남자를 알고 싶어 서블렛을 이용하여 남자의 자취를 느끼는 여자, 이정인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단편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 많아 장편으로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제목은 <애인의 애인에게>로. 이정인이 바라보고 서술하는 이야기에서 더 풍부하게 나아간 이야기의 시점은 2부와 3부가 첨가되어 이정인이 짝사랑하는 조성주의 아내 장마리의 시점이 2부에서, 조성주가 짝사랑하는 김수영의 시점의 이야기가 3부로 전개된다. 세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요 등장인물은 그렇게 4명이 된다. 먹이사슬이 아닌데도 이렇게 물리고 물린 관계의 양상을 보다 보면 아련하고 쓸쓸한 맛이 맴돈다. 젊은 청춘들의 어긋나는 사랑의 작대기는 그들이 가진 아릿한 사연을 서로에게 품어주는데 사용되지 못한 채 서로를 밀어버린다. 우습게도 표면적으로 보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세 명의 여자 이야기다. 무대는 뉴욕이고 이들은 예술가들이고.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p18


  분명 어긋난 사랑의 이야기인데 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분명,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적극적이구나, 그런 생각이었다. 아마도 누구보다 이를 대표하는 이가 이정인이다. 정인은 짝사랑하는 성주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 그가 한달간 세놓은 집으로  들어가는 적극성을 보인다. 정인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에서 정인은 성주의 흔적 위에 놓인 그의 아내 마리의 흔적에 점점 끌려간다. 그의 아내에게 느끼는 연민은 아마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가 아니라 또다른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되면 세 여자의 감정을 쥐고 있는 조성주가 궁금하다.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며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주위에 맴돌고 있는 남자. 포토그래퍼란 직업을 가진 이 남자는 예술가의 성공에 집착하는 남자로 그것을 위해 마리에게 적극적이었다. 그런 욕망과 병행한 또다른 욕망이 그에겐 있다. 남편이 있는 여자에 대한 사랑이다. 조성주가 사랑하는 여자 김수영은 큐레이터로 결혼 10년차지만 계속된 유산과 더불어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쳐 있는 중에 조성주의 끈질긴 구애에 흔들린다. 이들 등장인물들 모두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열정적인 듯 혹은 무모한 듯한 기질을 예술가적 기질이라 뭉뚱그리면 너무나 단순하고 단정적인 편견이겠지. 


자기 결혼이 영주권 획득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때문이었다는 걸 법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남자가 있어요. 아마 그건 가장 숨기고 싶은 사적인 경험을 온갖 공식적인 서류들로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일 거예요. 여전히 사랑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와 헤어져야 한다고 결심한 여자가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이 이미 깨져버린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었다는 걸 법적으로 증언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건 어떤 고통일까. 남자의 변호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도움을 요구하듯 끝없이 전화를 해댄다면. 남자와 여자.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힘들고 괴로울까. p258

      

  글쎄. 누가 더 힘들고 괴로울까. 여기 등장하는 이정인, 장마리, 김수영, 조성주. 그들 각자는 닿지 않는 욕망 속에 힘들어 하고 충분히 괴로워 한다. 뉴욕이란 도시에서의 그들의 삶은 화려한 도시 뉴욕만을 생각하며 보지 못한 뉴욕 골목의 풍경처럼 감춰진 속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삶들이었다. 사랑이란 이토록 제도와 어긋난 미묘함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이 뉴욕의 연인들은 어긋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는 잔뜩 쓸쓸한 표정으로 각인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연민을 이용한다.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을 손쉽게 착취한다. 나의 부모님이 그것을 ‘상황이 거짓말하게 한다’라거나 ‘철든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진실과 진심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 것인지도. p100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 애인들의 행동이다. 아마도 가장 관찰자적인 눈으로 조성주를 바라보기만 할 것 같은 이정인은 뉴욕 조성주의 집에 찾아 들어가고 그의 감정, 불륜까지도 알아낸다. 조성주는 어떤가. 사랑인듯 열병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장마리를 이용하는데 적극적인 남자. 그런 적극성으로 또다시 김수영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는 남자. 거침없이 제 욕망을 발산하는 그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속으로 울부짖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엔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애인의 애인에게 툭, 뱉는다.


건너편 창틀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여전히 길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이어지지 않는 저녁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서글프지 않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짝사랑은 선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자학이며 자책이니까. p36


  작가는 “실패로 끝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는 아무리 길어도 귀 기울여 듣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고약한 심보로 듣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어쨌든 누군가의 감정에 대한 위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 감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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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닥'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도시와 나-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성석제·백영옥·정미경·함정임·서진·윤고은·한은형


  여행에세이가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안내를 서술하는데 치중되어 있다면 이 책은 ‘이야기’에 힘을 쏟는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만들게 되는.

  성석제, 정미경, 함정임, 백영옥, 서진, 윤고은, 한은형. 연령과 성별과 문단 경력이 각기 다른 소설가들은 각각 떠난 일곱 개의 도시에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온다. 배경이 해외라는 것, 여행이 깃들어 있다는 것, 낯선 도시의 느낌이 가미되는 것, 이런 특징을 가지고서 일곱 명의 소설가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엮어 낼까. 그들이 찾아간 도시에서 각기 다른 것에 시선을 두고 써내려간 일곱 개의 소설을 만나면 생생한 여행에세이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성석제 작가는 프랑스 아비뇽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연극제에 초대받아 극단과 함께 아비뇽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홀로 자전거 여행에 도전한다. 성석제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주인공의 자전거 모험의 익살스러움을 잘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희곡작가이기에 더욱 더 연극적인 느낌이 든다. 작가의 유도대로 자연스레 주인공의 험난한 자전거 여행에 동참하며 프로방스의 모습을 훑는다. 결국 자전거로 통과하지 못하는 노후화된 다리를 맞닥뜨리고 마는 그런 자전거 여행을.

  백영옥 작가의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은 미국 뉴욕의 도시를 보여준다. 뉴욕의 서블렛 문화를 통해 짝사랑하는 남자의 자취를 엿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려진다. 스토커 같은 여성의 모습과 기이한 부부의 모습, 인간의 관계란 정말 다양하구나 싶은 이 이야기는 관찰자적으로 지켜보며 내면의 일렁임이 짝사랑하는 남자에게서 그의 아내에게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반응이 좋았던지 작가는 이 단편에 이야기를 더 엮어 장편소설 <애인의 애인에게>를 만들었다.  

  정미경 작가는 일본 도쿄로 향한다.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남녀가 나오시마 섬으로 동행하는 여정을 그린 <장마>. 여행이란 그런 것인지, 여자의 특별한 사연과 분위기에 이끌린 남자는 제 일정은 잊어먹고 여자의 여행 경로에 동승한다. 일본 공연예술 부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남자의 여행 일정이었다. 이 부토에 대한 묘사가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두 사람 모두 이 부토를 찾아 관람하고 서로의 일정을 오가며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다. 한번쯤 우연히 만난 낯선 이와의 교감에 대해 꿈꾸게 되는 것, 그것도 여행의 한 부분인 것도 같다. 이것 역시 영화와 드라마가 주입해 놓은 건가.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p119 정미경, <장마>


  함정임 작가는 여행을 많이 떠나고 여행책을 많이 쓴 모양이다. 정미경 작가는 프랑스 브장송으로 간다. 그곳에서 사라진 남편의 자취를 찾아 호텔들을 순례하는 여자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여자에게 매혹된 프랑스인의 모습도.

  윤고은 작가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찾는 딸의 모습을 그려보인다. 주소 하나만을 가지고서 지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주인공의 세비야를 돌고 돌며 흔적을 찾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서진 작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최초로 머물렀었는데 그 기억을 가지고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전개한다. 꿈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를 가지만 향수만 쌓아가는 88만원 세대의 안쓰러운 모습들을.

 한은형 작가는 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이 도시를 방문한 적 없다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온전히 머릿속에서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이다. <붉은 펠트 모자>라는 제목으로 2010년 시민혁명으로 운명이 바뀐 튀니지 고위관료의 이야기를 상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튀니스의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결국 작가도 그려낸 것이라니. 물론 수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형상화 한 것이겠지만.

  책 뒷부분에는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이들의 여행경험과 여행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하는데 서진 작가의 여행의 의미가 딱 눈에 띈다.


  우리가 사는 삶이 '그닥'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여행이란 잠시 제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머물다 오는 듯하다고. 어디를 가든.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신을 차리는 일은 더딜 때가 있다.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제정신을 버리고 사는 거였던가. 어쨌든 여행에서 마냥 그곳에서이 사건과 감상이 아니라 이 소설들처럼 상상의 세계 속에 나를 두어 보는 일도 재밌으리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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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이코패스인가?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프로이트˝ p380

 

   

  그러고 보니 작가 정유정의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청소년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 여행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까지. 그 사이에 ‘심장’이 있었고 ‘7년’이 있었고 ‘28’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나 역시 매니아처럼 작가의 책을 읽어 온 것 같다.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유정 작가가 책을 낸다면 굳이 안 읽는다고 발악할 독자는 아니어서 빗발치는 <종의 기원>의 여론에 힘입어 책을 읽었다. 열렬한 독자층을 거느리고 장르문학의 대가로 우뚝 선 작가답게 이번 신작에 기대하는 이들 역시 많았던 모양이다. 출간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출간 후에도 ‘역시 정유정’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종의 기원>.

   전작들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인지 <종의 기원>은 심심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좀처럼 “악”의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내 속의 악이 더 악랄한 걸까. 줄거리가 예상 가능하게 흘러 간 것이 흥미가 약한 요인이었다. 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이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유진의 행동이, 전개가 예상한대로 흘러가 긴장감이나 몰입감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런, 유진의 행동을 예측하다니, 나 사이코패스인가?

   살인사건을 추리하는 장르가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워낙 넘치고 있기에 웬만한 살인의 이야기엔 극적인 느낌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밥먹으라는 말이 귀찮아 엄마와 이모를 죽인 19세 남학생 사건도 발생한 터라. 살인의 이유와 목적은 익숙한 패턴이고 구성의 쫄깃함이 소설이나 영화를 흥미있게 돋우는 장치가 된 것 같다. 허나, <종의 기원>은 1인칭 시점이 차이가 있다. 어차피 정유정 작가의 소설 속에서 늘 범인을 찾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독자도 주인공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가 누구와 대립하는지 알고 있으며 명확히 안티를 알기에 주인공이 그 대립에서 이기기를 응원하게 되었을 뿐이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63

 

   그 대립이 약했던 탓일까. 몰입이나 흥미가 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응원할, 감정을 이입할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악을, 내 안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건가. 나는 유진에게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공감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기에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유진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살인의 대상이 자신에게 가까운 엄마와 이모, 그리고 함께 생활해온 친구였다는 이유로 유진을 더욱 ‘악한 본성’의 소유자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악의 어떻게 점화되는가가 작가의 의도라면 “얼마나” 악한 지는 부차적인 요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유진 역시 시작은 자기도 모르는 어느새 살인을 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니까. 그래서 최초의 살인의 기억을 유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좀더 악랄하려면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인물이 되려면 자신이 “살인”의 느낌을 기억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작가의 말대로 하면 작가의 소설에서 가장 ‘악’은 바로 유진이다. 그렇게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애를 쓴다. 그 기억을 모두 잊은 채 마치 기억처럼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진을 조금이라도 옹호라는 측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불만을 가진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206

 

   내 이런 불만을 알기라도 한 듯 작가는 기억을 잃은 채 살인을 한 유진의 행동에 대해 변명까지도 만들어두었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문제가 공감능력의 상실이라고 한다는데 유진은 공감능력이 없었던가? 이렇게 유진의 공감 능력을 따져보는 건 유진이 절대적 악인이라고 생각하려는 이유일까, 그 반대일까. 작가의 의도는 반대인 듯하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 p379

 

   상황에 따른 변화가능성. 본성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발현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 그러나 생존이 더 우월한 본성이고 핵심이라면 생존가능한 방향으로 선과 악을 행한다. 그리고 그 생존가능한 방향이라는 것은, ‘살인’이라는 진화심리학자의 말은 왜인지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아니, 유진의 재판이 진행된다면 유진의 행동에 대한 변론의 말처럼 들린다. 자, 그렇다면 유진의 행동들 어머니와 이모와 해진을 죽인 것은 진화과정이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한, 자신의 경쟁자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 몇 백번을 생각해도 그렇다. 안타깝지만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으로 그것이 그 상황에 더 발현되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다. 그러니 인간 유전자를 가진 우리 모두는 유진이라는, 유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최초의 살인은 왜인가. 그것도 생존을 위한 악의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왔다. 그 진화의 한 방식으로 문화 또한 선점해왔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만드는 ‘나’의 생존. ‘어떡하든 살아남으라’라는 말이 한없이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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