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뮤즈란 없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유혹적인 글쓰기

메러디스 매런 (엮은이), 생각의길, 2013-12-13.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 20인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20인 작가들의 이력을 보면 퓰리처상, 오헨리문학상, 오렌지문학상, 펜포크너상, 맨부커상 등을 수상하거나 매번 다양한 언론에 올해의 책으로 소개된 책의 ‘저자’들이다. 이들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엮은 매러디스 매런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을 “재능기부”라는 기획 덕분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모두 유명하고 잘 팔리는 작가들이지만 그들이 지금의 결과를 이루기까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작가들은  이 경험들을 글을 쓰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

   작가들 각자의 글쓰기 방법이나 ‘작가’에 대한 생각은 유사점도 있고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 물어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대답을 이들 역시도 하고 있었다.

   “일단 써라.”

    다양하고 흥미로운 제목으로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고 있는 책들의 최고의 방법은 항상 그랬다. 일단 많이 읽고 쓸 것! 허무의 끝을 달리는 말이긴 하지만 어느덧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방법임을 수긍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의 글쓰기 방법을 말하는 책들은 똑같은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토록 무수하게, 계속 나올 수 있는 거지?

 

쓰고 싶은 기분이 안 내킬 때도 글을 써라. 세상에 뮤즈란 없다. 글쓰기는 고된 노동이다. 나쁜 원고는 언제라도 교정할 수 있지만, 빈 원고지를 들고 교정할 수는 없다. - 조디 피코

 

   조디 피코의 ‘빈 원고지를 교정할 수 없다’는 말이 와 닿는다. ‘뮤즈’란 없다는 말 또한 격하게 공감한다. 왜, 특히 남성들에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뮤즈’가 필요했을까. 그런 인상들이 각인되어 ‘뮤즈’나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이 있다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다수의 창작자들에게 뮤즈란 여성이었고 여성은 창작의 주체자이기보다는 창작자를 보조하는 수단이었다. 여성의 창작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그래서 폄하되거나 남성에게 빼앗기거나.

   20인의 작가들을 보니 여성 작가가 훨씬 많다. 이들은 특별한 ‘뮤즈’에 대해서 언급하진 않았는데 그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내면으로 돌리고 있다. 글을 씀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자신만의 ‘행복감’이 그들이 글을 쓰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 채 완전히 몰입해버린다.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세계에 깊이 빠져서, 현실의 삶이 약간 모호해진 느낌이 너무 좋다. - 제니퍼 이건

 

나는 꿈꾸기 위해 글을 쓴다. 다른 인간과 접속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기록하기 위해,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방문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일종의 원초적 욕구 때문에, 그리고 돈 때문에 쓴다. - 메리 카

 

글쓰기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냥 내 자신이다. - 수전 올리언

 

   이런 시간을 더욱 많이 누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이들에게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일처럼 보인다. 직장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의 고통, 글에 대한 반응이 없을 때, 어느 에이전시에서도 글에 대한 연락이 오지 않을 때의 참담함,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쓰지 못하는 답답함이 작가들이 가지는 문제이다.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시간외에 어떡하든 시간을 만들어 내어 글을 쓰기 위해 분투하는 작가들의 글쓰기 습관은 이들이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 준다. 짬이 나는 모든 시간을 글쓰기에, 글쓰는 습관에 들이기 위한 처절한 노력들이 결국 글쓰기의 비결이라고 작가들은 말한다.

   어떤 영감이 찾아오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뮤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늘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매일쓰기, 습관의 글쓰기가 그들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매혹되어 있는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들이 글을 매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작가들은 ‘특별’하기에 그런 작품들을 썼고 상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이들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들으면 전혀 특별하지 않게도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읽었고 글쓰기 강좌를 들었고 그리고, 열심히 썼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또한 이 단순한 일을 잘 해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래서 특별해 보인다.

   뮤즈를 기다리지 않는 것. 뮤즈가 찾아올 때 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 스스로가 뮤즈라는 것을 믿는 것. 이들이 얘기하는 유혹적인 글쓰기의 비결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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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 은유, 서해문집, 2016.12.26.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제목을 보면서 감정의 분출로 인해 그 순간의 속시끄러움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했다. 싸웠다는 자체로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가 작용할 테니. 물론, 일방적으로 깨지는 싸움이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라면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렇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좋다 생각했다.

  작가는 필명만큼이나 은유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느니만큼 “수유너머향”이 글에도 풍긴다. 철학과 인문학의 접합, 니체향이 좀더 더해지고 일상의 행위와 사유에서 존재를 생각하는 것. 아무튼 글쓰는 일이 힘들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방식이 글쓰기인 작가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자, 존재, 사랑, 일. 책속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다.

  이 땅에서 여성이란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특히 피곤한 일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여성이란 명명에 타인의 시선과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같다. 여자라서 엄마의 삶으로 더 살아가야 하는 것, 육아와 가사와 삶, 직장일을 공존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로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남편과 아이에 종속된 삶의 존재로서의 ‘나’, 사랑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들.

 수많은 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경험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 같다. 그러니 특별히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너무 같은 이야기의 돌림이라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의 글쓰기를, 페미니즘이란 책을 계속 읽고 읽는 것일까.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말하는 사람이 다르니까. ‘누가’ 이야기하느냐라는 점에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각각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같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각각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너의 생각이 이렇구나, 너의 경험에 네가 힘들었구나, 잘 버티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버티어 나가자, 라고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매번 이런 책을 찾아서 아픔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수월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 이러한 책들이 많아진다는 건, 아픈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가. 발버둥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인가. 사는 일에 부칠 때마다 글쓰기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글쓰기로도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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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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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열망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5.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런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풍경화같은 표지가 고요하고 여유로운 느낌과 약간의 쓸쓸함도 깃든 듯한데, 제목으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또한 대체로 산문집이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해 보고 느낀 것들을 다루기에, 소설적 상상력이 아닌 일상의 줌파 라히리의 생각을 맛볼 수 있는 책이려니 한다.

  한마디로 하면, 이 책은 작가가 새로운 언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의 이야기다. 그 과정은 집안에 들어 앉아서 마냥 책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기간 또한 길었다. 아마도 이 산문집의 묘미는 작가가 이탈리아어로 이 산문을 썼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산문이라서인지 소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문장의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탈리아어를 안다면 잘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번역본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 언어의 벽. 그래서 작가처럼 이렇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강하게 든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을 읽고 싶을 때, 번역된 책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면 늘 원서를 직접 읽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다음날이면 실천할 의지를 잊어버린다. 그저 세상엔 너무나 많은 나라가 있고,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있기에라며 효율성을 생각하며 늘 번역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작가는 왜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을 했을까. 외국어를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이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영어권 국가에서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반사이니까. 작가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직접 로마로 향한다. 이탈리아 친구도 없다는 작가의 이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그것은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잠시의 방문으로 스치듯 강렬하게 자리잡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던 작가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다.

  그것은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이전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주요한 이유가 된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에서의 안정감이 위험하”기에 이탈리아어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자유로운 영어가 아닌 변화와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이탈리아. 작가는 영어로 된 책을 읽지 않고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읽으며 생활한다. 작가로서의 열망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모험은,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를 익히는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에의 의지도 심어주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가 이 산문을 쓴 후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와 민족과 인종 간 이해와 평화를 도모했다고 상을 건넸다. 그런데 네루다나 권터 그라스도 받았다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 언어의 사고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가 이 유명한 작가에게 이러한 상을 수여하는 것은 감사함일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는 일’인 만큼 매우 절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니까.

  여전히 작가가 로마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에서 생활하는 이 여정은 마치 여행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의 잠시의 방문처럼 가볍게 로마에 얹어져 있는 느낌이 드니까. 어떤 느낌일까. 주로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작가 자신이 이주민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난 나라도, 확실한 문화도 없다. 난 글을 쓰지 않으면, 말로 일하지 않으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고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75~76


  작가의 글쓰기.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보아오던 이민자의 정체성이 완전히 작가 자신의 감정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규정지어 얘기하는 것을 작가는 탐탁치않게 여기겠지만 인도인으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그 상황이 어릴 때부터 줌파 라히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알듯한 느낌이었다.


 내 불완전을 잊기 위해, 삶의 배경으로 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다. 어떤 의미에서 글쓰기는 불완전에 바치는 경의다. 사람처럼 책은 창작 기간에는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p94


  이 산문집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차분하고 고요하다.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저 ‘말’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작가로서의 감정과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산문집이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것은 소설과 비교한 문장에서 느끼는 것이고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줌파 라히리의 생각은 여전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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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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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잔 손택 /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2013.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밀함을 데이비드 리프는 허락했다. 자신의 글이 아니기에 결정이 쉬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머니의 일기엔 아들의 이야기가 필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다. 어머니의 일기를 아들은 공개했다. 어머니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글, 생각은 어머니의 입과 글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일기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과 형식을 갖게 되는데, 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망 전 일기의 존재를 알린 것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모든 면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앎에도 아들은 어머니의 글을 출판했다. 그 자신, 어머니 수잔 손택의 아들이 아니라 저술가, 편집자로서 출간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수전 손택의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이 책엔 14세부터 30세 때의 수전 손택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전생애에 걸쳐 일기를 썼고 그 기록은 많다는데 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수전 손택을 만나게 된다. 아니면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갖는 그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좀더 깊고 처절한 감수성. 낙서처럼 끄적인 글귀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외침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아들 말대로 자신감에 차 보인다. 또다른 표현, 자아도취라….

 어린 시절부터 수전은 많은 문학책을 읽고 그에 관한 생각들을 기록했다. 문학에 대한 감수성, 지성, 글쓰기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환멸 등등등. 수전 손택의 동성애 성향을 좀더 이르게 자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이기에 결혼에 대한 환멸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당시 17세는 이른 결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정이지만 결혼 생활이 서로의 갈등과 다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수전 손택의 삶은, 생각들은 다르게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성과 감수성의 홍수 속에 가득찬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가 사실적 삶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수전의 이 고백엔 평생 수전에게 따라다니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성정체성,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절의 일기 속엔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삶의 기록이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고 대안의 제시라는 고민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수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사회는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간주하니까,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동성을 향한 연정들이 자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들엔 그러한 언어들이 해방구처럼 쏟아져 있다.


오르가슴의 도래와 함께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더 협소해졌고 가능성들은 봉쇄되었으며 그 덕분에 대안들이 명료하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한하지 않다. 나는 무無다.

섹슈얼리티는 패러다임이다. 예전에 내 섹슈얼리티는 수평적이었다. 무한한 분화가 가능한 무한한 선이었다. 이제 내 섹슈얼리티는 수직적이다. 위로 올라가 넘어가 버린, 어쩌면 무無. p282


  수많은 일기를 썼다는 수전 손택. 그 일기들이 대안이라면, 그녀 스스로 만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보여주었듯이 글쓰기로 나타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나는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맞서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게 내 동성애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해 준다. p286

 

  수전의 치열한 글쓰기가 동성애 욕망의 반동형성이라 생각한다면 약간 김이 새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떤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모두 동성애로 인해서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수전에게 있어 이 동성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보다 새롭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사회가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매우 적절히, 아니 그 자신은 괴로웠을지 모르지만, 조화시키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애자들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늘 작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측면으로 수전 손택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의 바탕이 실패한 연애 경험이었어라고 말하면 호기심과 김이 빠지는 것이 열렬한 투쟁가들에게 느끼는 더 큰 대의를 말하리라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대의라는 말도 웃기거니와 모든 인간은 제 삶을 살아내는 거 자채에서 벌써 치열함을 내장하고 있다.

  또한 욕망에 좌절한 수많은 이들이 반사회적인 형태로 욕망을 해소하거나 좌절된 욕망에 대한 분노를 펴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전 손택의 욕망의 해결 방법, 그 자신의 대안은 매우 긍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그랬다. 책을 한번 쓴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수전 손택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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