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테니스 대회에 나간단다. 아이들 수능이 끝나는 다음 주로 일정이 잡혔다. 남편 후배 말에 따르면 ‘저 형이 운동을 하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편은 한때 운동에 미쳐 있었단다. 실제로 결혼을 해보니 입고 나설만한 외출복은 별로 없는데 고가의 트레이닝복은 숱했다. 테니스만 치는 줄 알았는데 수영복에 수영 모자도 있었다. 스포츠양말은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했더니 옷이나 용품을 사면 거저 주는 것이라 했다. 나도 그가 얼마나 테니스를 좋아하는 지는 사귈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결혼 전부터 내게 전문적인 레슨을 권유했었다. 지난 여름에는 여성용 테니스 라켓을 사갖고 와서 나한테 구박을 듣기도 했다. 7만원 하는 배드민턴 라켓도 큰마음 먹고 구입했던 나로서는 그 놀라운 가격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인데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눈치 보랴, 고3 담임하랴, 마음껏 즐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운동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딴엔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했는가 보다. 그런 귀찮은 오해는 그만두라고, 아이들 수능 끝나면 여유가 생길 테니 시간 내서 운동도 하고 그러라고 했더니만 무척 좋아한다. 말을 그리 해놓고 옷장을 둘러보니 트레이닝복이 거의 낡거나 오래된 것들뿐이라 한 벌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브랜드는 주로 테니스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인데 얼마 전까지 없던 매장이 우리 동네에도 생겼다. 야자 감독이 없는 저녁, 남편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매장도 작고 종류도 많지 않은 편이지만 남편 말로는 여기 옷이 질도 좋고 편하단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주인아주머니가 테니스를 잘 치시나 봐요, 하신다. 대회 나가면 트로피는커녕 휴지 두 통 타오는 게 전부인데 이번에도 휴지 타오라고 운동복까지 새로 사 입힌다고 했더니 막 웃으신다. 아주머니 남편도 대회만 나가면 무조건 파트너가 잘못해서 등수 안에 못 들었다고 불평하신다고.

  카탈로그에서 본 것만큼 간지 좔좔은 아니었지만 입고 나온 모습은 깔끔하니 괜찮았다. 세일기간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비싸긴 했지만 일단 마음에 드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트럭에서 오징어, 쥐포 등등 건어물을 팔고 있었다. 예전에 추운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쥐포 사먹던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쥐포를 한 묶음 샀다. 장사하는 청년은 프라이팬에 구워 드시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스 불에 직접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옆에서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며 쥐포를 굽고 냉장고에 있던 병맥주를 꺼냈다. 맥주는 남편이 마시고 나는 쥐포를 우유와 함께 먹었다. 맥주가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지만 쥐포와 우유도 궁합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듯.

  남편은 새 옷을 고마워하면서도 자기는 원래 옷 여러 벌 걸어놓고 입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지 말고 예전에 입던 것은 버리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은 비교적 유행을 덜 타지만 이제는 색도 바라고 담가 놓았다 손빨래를 해도 제 빛이 안 난다. 혼자 사는 남자의 관리 소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남편과 사는 동안, 가끔 그가 혼자 살던 풍경이 상상이 될 때가 있다. 퇴근 후 테니스를 치고 땀에 흠뻑 젖어 불 꺼진 집으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며 저녁을 먹는 남자. 냉장고를 뒤져서 있는 거 다 넣고 부대찌개를 해먹거나 있는 거 다 넣고 볶음밥을 해먹거나, 이도저도 귀찮으면 파도 계란도 없이 라면을 끓이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밤에는 맥주 한 캔 하면서 테니스나 축구를 보다 잠들었겠지. 문득문득 외로움을 동반했을 너무 많은 자유.

  그렇다 해도 나는 종종 결혼 전의 내 모습, 싱글인 친구들이 부러운데 남편은 어떠한가. 남편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더라고 말해서 나한테 맞을 뻔 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이 더 좋단다. 좋기는 한데 자기가 왠지 지고 사는 느낌이 든다고 말해서 나한테 맞았다. 예전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맞지요, 라고 점잖게 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억울해진 거냐고, 그리고 당신이 지는 게 대체 뭐가 있냐고 난리를 쳤더니 생각해보면 내 말이 맞는단다. 내가 내 뜻대로 못하고 사는 것도 없는데 왜 져주는 느낌이 들지? 이러고 앉았다. 나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다니 내가 당신을 잘 못 다루는 모양이라고 자학했다. 비싼 옷 사 입히고 나서 고작 그런 말이나 듣다니. 부들부들.

  겉으로는 그렇듯 고래고래 질러댔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들 말로는 별명이 대마왕이었다니 과연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젊은 날의 긴 시간을 그리 보냈던 사람이 나라는 여자와 남은 생을 공유하려 하니 얼마나 양보한단 느낌이 들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아끼던 책들에 먼지가 쌓여가도 오늘의 밥 짓기를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시시때때로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면 서로 져준다는 느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형국이라니 각자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에서였든, 연민에서였든 그만큼 서로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태릉인도 아니면서 삶의 낙을 운동으로 알고 살았던 남편과 작가도 아니면서 책보다 나은 동반자가 없다고 자신하던 나. 두 사람이 만나 살다보니 테니스 실력은 예전만 못해지고 책 읽는 속도 또한 과거에 한참 못 미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으려니 한다. 서로 양보한다는 착각 속에서 혼자일 때는 결코 배울 수 없었고, 배우기 싫으면 안 배워도 그만이었던, 공존의 룰 같은 것을 익혀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어서 컴퓨터를 끄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퇴근한 그는 양보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고. 트레이닝복 사줬으니 트로피 타오라고 잔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그는 파트너만 잘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칠 것이고. 결국 트레이닝복에 먼지만 잔뜩 묻혀서 기념품 수건 한 장 달랑 들고 와도 양보하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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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11-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9-11-09 09:46   좋아요 0 | URL
^^;

2009-11-0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벌써 11월.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남편 출근하는데 도톰한 재킷을 챙겨주고 나는 집에서 쉬고 있다. 병가 기간이 끝나 일주일간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곧바로 산전휴직을 다시 받았다. 아이들이 기침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 그냥 다 접고 쉬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예방접종도 믿을 수 없고 타미플루도 미심쩍은 고위험군, 의심 많은 임산부인지라 두문불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뉴스를 보니 오늘부터 신종플루가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단다. 각급 학교장에게 떠밀던 휴교 조치도 적극적으로 고려되고 있는가 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반 학생 하나도 확진 판정을 받아서 내가 있는 동안 얼굴을 못 봤다. 다른 반은 확진 및 의심 환자가 더욱 많을뿐더러 선생님 한 분도 확진 판정을 받아 병가를 내셨다. 얼마 전, 출산한 선생님도 내게 전화를 주셨다. 본인도 아이 때문에 무척 조심하고 있다면서 산전휴직을 당겨썼다고 하니 정말 잘했다고 하신다. 날씨는 점점 추워질 텐데 이 공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이다.

  나의 건강과 안위에 이렇게 신경써가며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주변에 송구하고,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또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돌아왔을 때, 두 분의 선생님이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많이 기다리셨던 분들이라 그만큼 안타까움이 컸다. 입덧 때문에 뱃속의 아이를 미워하고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종종 신경질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의 인연은 하늘의 뜻이지만 아이를 지키는 것도 엄마의 의무라는 결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육아 책이나 인터넷을 보니 태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특별히 시작한 건 없다. 십자수나 뜨개질을 권하기도 하던데 그냥 걸레질 열심히 하는 게 더 쉽고, 클래식을 들으면 정서안정에 좋다는데 내가 그다지 당기지를 않으니 잘 안 듣게 된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도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평소처럼 소설책 등등을 읽고 있다.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먹거리. 잃었던 입맛이 차츰 돌아오면서 한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있다. 입덧이 심할 때는 밥 익는 냄새만 나도 메스꺼웠는데 요즘은 밥이 가장 맛있다. 특히 동치미나 냉이나물처럼 상큼하거나 향긋한 반찬들이 구미를 당긴다. 나중에 세상에 나와서도 우리 음식을 고루 즐길 줄 아는 아이였음 좋겠다.

  하긴 지금 같아선 아무런 욕심도 안 생긴다. 학교에 돌아가 아이들을 보니 모두가 소중하다.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손가락, 발가락이 멀쩡한 것도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아이의 행동은 미워해도 아이는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아이들을 저만큼 아무 탈 없이 키워낸 부모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입으로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며 잔소리를 하지만 감기 안 걸리고 건강하게 학교에 나오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 외 나머지는 다 욕심이란 생각도 든다. 딱 이만큼의 마음으로 살면 참 행복하련만 부모 욕심이 어디 그런가. 나 역시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은, 딱 그만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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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0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 최고의 건강 유지 비결이랍니다.
제가 에너지 여사로 사는 것도 삼남매의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 덕이라 생각해요.
잘 먹고 욕심내지 않는 평상심이 최고의 태교겠지요.^^

깐따삐야 2009-11-04 10:2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순오기님처럼 건강하고 씩씩한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어떤 태교를 하든 결국 저와 제 남편을 닮았으려니 합니다.^^

레와 2009-11-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이 건강 조심해요! ^^

깐따삐야 2009-11-04 10:21   좋아요 0 | URL
넵! 레와님도 감기 조심.^^

무스탕 2009-11-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임산부들은 특히나 몸 사려야해요. 이렇게 뒤숭숭한 시국에 말이에요..
건강 잘 살피세요~

깐따삐야 2009-11-04 10: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스탕님도 건강 유의하세요~

비로그인 2009-1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 달을 품어 밖으로 끄집어내서, 희노애락을 지켜보는 존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믿음은 만들어지고 채워지는 것 같아요. 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에 놀라는 순간이 많아요.

깐따삐야 2009-11-04 10:30   좋아요 0 | URL
지금은 그저 건강하고 평범한 아기였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모든 아이들이 엄마의 이런 바람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겸허해집니다.
 

  책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서점에 다녀왔다. 시내에 대형서점이 두 곳 있지만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집 근처의 지하서점이다. 그 서점의 재미있는 점은 주인이 알라딘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책이 많지는 않은데 주인의 취향이 보인다. 시내 서점처럼 어수선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단, 도너츠 가게와 원두커피 가게가 위층에 있다 보니 지날 때마다 고소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것이 곤욕이다. 한 잔은 괜찮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곧 출근하게 되면 안 마실 수 없게 될 것 같다.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를 읽기 시작한 오후.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낮잠을 안 자보려고 버둥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C선배였다. 졸업한 후로는 동아리 멤버들의 경조사가 있거나 시전이 열릴 때, 선배가 가끔 이 도시로 출장을 올 때마다 얼굴을 보곤 했었다. 선배는 사흘 동안 연가를 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나와 동기였던 선배의 와이프 E는 그새 둘째를 가져 만삭이라고도 했다. 저녁에 남편과 친정에 가기로 되어 있던 터라 미리 연락을 주지 않은 선배를 탓했지만 선배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듯 평소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선배는 갑작스런 이야기로 사람을 당황시켰다. 전혀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 선배는 대학 시절, 꽤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동창이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얼핏 들었는데 동아리 회식 자리에 언젠가 얼굴을 비추기도 했었다. 여자는 직장인이었고 선배는 복학생, 더욱이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양과 질이 모두 훌륭한 연작시를 쏟아낼 만큼 참으로 끈끈한 연애였다. 우리는 농담으로 언젠가 이별의 연작시를 쓰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지껄였지만 다들 C선배의 재능과 매력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축복했다.

  하지만 얼마 후 선배는 그녀와 헤어졌고, 내가 싫어졌나 보지, 웃으면서 툭 던지는 말로 상황을 종료했다. 항상 대충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모두를 놀라게 하더니 얼마 안 있어 E와 결혼했다. 곧이어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을 낳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게 살기를 주창했던 사람이니만큼 어디서도 자기 색깔 유지하며 잘 살겠거니 했다.

  그런 선배가 물어온 것은 십년 전의 그녀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미련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기에 갑자기 왜 그러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욕심이라고 했더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단다.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를 포함해서 들어보고 싶은 말이 있단다. 연락처는 모르지만 근무하는 곳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면서 근처에서 기다렸다 만나보면 어떨까, 한다. 나는 여자가 남자한테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결혼한 케이스면 뻔한 거 아니냐고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선배는 다 알지만,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을 뿐이란다.

  선배의 목소리는 간절하기 보다는 너무나 심상해서 그녀와의 이별을 전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심상함에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더니 십년씩이나 흘러서 이러기야 정말. 나는 마치 철없는 남동생을 다그치는 나잇살 먹은 누나처럼 식상한 충고들을 늘어놓았다. 마누라가 만삭인데 시간이 남아돈다는 둥, 계절 탓인 것 같으니 정신 차리라는 둥.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선배가 아닌 것 같아 허공에 손짓하는 느낌만 가득했다. 선배님은 누가 뭐라던 결국 그녀를 만나겠지요. 하지만 내가 그녀라면 보는 것도, 만나는 것도 싫을 거에요.

  동기 E는 선배의 지난 앨범을 손수 정리할 정도로 담대한 사랑을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지난 일, 힘이 없는 추억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백 장의 사진을 버린들, 남편이라는 사람은 십년 전 그녀를 다시 만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니. 선배는 자기 주변엔 바람피는 사람들도 많은데 결혼 5, 6년차 쯤 되어 이런 생각하는 게 그렇게 잘못인 거냐고 반문해왔다. 그래, 만나서 서로의 안부 묻고 옛 추억에 잠겨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질 수 있겠지. 선배는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순수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르지. 아주 잠깐 동안,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리고 야속한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선배가 안쓰러웠다.

  사람이 항상 쓸데 있는 생각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에 유용하지 않은 생각들을 절로 부르는 계절이 아니던가. 나 역시 아주 가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마음 같으면 정말 덤덤하게 커피 한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뭐하나 싶다.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했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섰을 때, 미련이 잔뜩 남았을 선배의 그리움, 궁금함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별별 이유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지는 것이 사람인데 십년 후의 이런 포즈는 미련을 넘어 사치스럽다. 물론 선배의 그런 면 때문에 선배가 선배인 거고, 그런 선배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저 사흘간의 가을여행을 잔잔하게 마쳤으면 하는 바람. -어째 별 것 아닌 이야기에 나 혼자 오버한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얼마 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가수 김태원이 그랬다. 과거는 뭐든지 다 아름다운 겁니다. 이제는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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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10-2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는 되지만, 안 하는 게 좋을 일인 것 같네요. 과거는 그냥 과거일뿐.
그 때 그 영상으로만 남겨두어야 아름다운 건데 말이죠. 괜히 한번 더 덧칠해서 버리게 되는 그림처럼, 현재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우면 남는 건 회한 뿐 아닐까요...

깐따삐야 2009-10-24 10: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한번 더 덧칠해서 버리게 되는 그림처럼. 아마 본인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으니 물어온 거겠죠.

2009-10-23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09-10-2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한 기회로 깐따삐야 님의 「가을바람」을 읽었는데요. 글맛이 담백하고 차분해서 다 읽고 상념 속에 젖습니다.

단지 “가을바람” 때문에,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인 옛 연인을 만나보겠다는/만나보고 싶다는 생각…… 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문득 혹은 알게 모르게 마음을 적셔오는 옛 추억의 유혹들…… 누군들 그런 유혹을 느끼지 않으실까마는, 그런 유혹을 현실로, 생활로 불러들이는 건,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인 듯하더이다...

깐따삐야 2009-10-24 11:09   좋아요 0 | URL
처음 뵙네요. qualia님.^^

남자들의 첫사랑은 생각보다 참 질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헤어지던 순간에 멈추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힘을 잃은 지난 시간이겠죠. 님 말씀처럼 경계해야 할 감정이기도 하구요.

순오기 2009-10-2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위험을 부르는 가을바람이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지만, 마음에서 끌어당기면 반드시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은거죠. 아내가 만삭인데...이건 아니에요.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잔주름이 져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만나야 꿈이 깨진답니다.

깐따삐야 2009-10-24 11:1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말씀이 명언입니다. 마음에서 끌어당기면 반드시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은. 아마 선배도 이 사람, 저 사람이 말리고 있으니 실행에 옮기진 못할 거에요. 더더 나중에 서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늙어서 만나라고 해야겠네요. 화악 깨지라고.^^

2009-10-27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말에 친구 아기의 돌잔치에 다녀왔다. K가 만삭의 몸으로 우리 결혼식에 왔던 것이 일 년 전인데 그새 아기가 돌이 되었다. 홀에 들어서자 세 가족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런 풍경들이 나에게 항상 낯설다. 친구들의 결혼식, 집들이, 출산, 돌잔치 등 쟤가 수년 전에 나랑 같이 술에 취해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부르던 그 애 맞는가? 서로의 나이 듦에 대하여 당최 언제쯤 익숙해질지 모르겠다.

  입덧이 잦아들고 있어서 모처럼 잔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 많은 곳, 음식 냄새 나는 곳은 질색이었는데 기사로 대동한 남편, 다른 친구 둘과 함께 수다를 떨며 저녁을 즐겼다. 아직 미혼인 친구들은 남편이 잘해주는가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내 대답이 가관이어서 모두가 민망해했다. “이 사람은 특별히 잘해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잘못하는 것도 없고 그냥 살아갈 뿐이야.” E는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고 S는 얘가 원래 직설적인 편이라며 웃어 넘겼다. 밖에만 나가면 더 자상해지는 남편은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점잖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이벤트 퀴즈에서 아기의 혈액형을 맞히는 바람에 선물도 받았다.

  아기는 돌잡이에서 아빠의 바람대로 실타래를 잡았다. 엄마인 K는 연필을 잡았으면 했지만 두 번째 찬스에서 아기는 골프공을 잡았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가 원하는 걸 잡을 수 있도록 센스를 발휘한다던데 그 날 옥의 티라면, 이벤트 진행하는 아가씨의 무신경이었다. 말만 많을 뿐 경험이 부족한지 주위 사람 얼굴 벌개지게 하는 데 뭐가 있었다. 멀리 포항에서 온 여고생 손님한테 “교복 참 안 예쁘지?”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가 하면, 엄마인 K가 보기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기도 했다. 좋은 말만 오가도 부족한 잔칫집에서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급기야 퀴즈 상품 받으러 나간 나한테까지 막말을 일삼는다. K가 친구라고 소개하자 “어머, 선배 언니 같은데요?” 이런 말을 한다. 순간 어질어질. 어디 가서 나이 들어 뵌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다. 내가 슬슬 배가 불러와서 나름 감추느라 굽 낮은 신발에 낙낙한 옷을 입고 갔더니 아주 날 묻어버리는구나. 이런저런 지인들이 많은 자리인데 그런 말이나 듣고. 슬펐다. 속으로, 그런 너는 참 생긴 데로 노는구나 싶었지만 좋은 자리이니만큼 아기한테 덕담까지 해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로 돌아왔다.

  남편과 친구들은 왜 아까부터 계속 말을 저렇게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저런 식이다가는 일거리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나마 간만에 마주한 반가운 지인들과 잔치 음식으로 위안을 받는다. K와 K의 남편에게 인사,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길, 남편은 친구들 중에 내가 가장 어려 보인다며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위로를 하지만 나는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은 이제 어딜 가나 얼굴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데, 나는 고작해야 폭삭 늙었다는 말만 듣는다면서 아기까지 낳고 나면 내가 연상인줄 알겠다고 성질을 냈다. 친구들 앞에서 남편 민망하게 한 건 뒷전이고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남편은 정해진 멘트에 신경 쓰지 말라며 토닥이는데 결혼 전보다야 어딘가 나이 들어 뵈겠지 싶은 것도 사실이긴 했다. 인정하지 못하고 버텨봤자 나만 더 추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려 보이는 데에 올인해서 사는 TV속 아줌마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던 것이 엊그제다.

  아기는 시끌벅적한 잔치 중에 용케 울지도 않고 장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K나 그녀의 남편이나 다들 좋은 성격 톱 텐 안에 들 정도이니 아기도 그럴 수밖에. K는 학교 다닐 적부터 또래 친구들보다 더 언니 같았다. 나는 농담조로 그걸 능글맞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항상 배려심 많고 의젓했던 그녀가 한번 아니라고 말한 것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개 작은 일로 서로 상처 주고 틀어졌다, 돌아섰다, 를 반복하는 우리들이 가질 수 없는 카리스마가 그녀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K가 만삭의 몸으로 내 결혼식에 왔을 때, 절대 화해하지 않을 것 같았던 또 다른 친구 Y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을 보았다. 원래 큰 그릇이긴 했지만 세월이 주는 경험치 덕분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녀의 그런 면 때문에 부조도 다른 집의 두 배로 하게 되는 것일까?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상대와, 입으로 들어가는 떡까지 뺏어버리고 싶은 상대가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인가 보다.

  우리는 돌잔치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자기 애는 자기나 이쁘지, 남의 애가 뭐가 이쁘겠느냐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초대받는 사람들도 부담이고 잔치를 가서도 썩 흡족했던 경우를 못 봤기 때문이다. 더욱이 으앙,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잔치를 즐겼던 K의 아기와는 달리 아마 내 뱃속의 아기는 나를 요만큼이라도 닮았다면 잔치 내내 짜증을 낼 게 분명하다. 남편과 나는 -본인들이 준비하지도 않을 거면서- 미역국 끓이고 전 부치고 등등 잔치음식 마련해서 가족들, 가까운 친구들하고 단촐하게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고 결정했다. 엄마도 원래 아기 첫돌에는 아기 엄마가 잘 먹어야 하는 거라고 하신다. 이처럼 뭐든 생략하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더라도 경우 없는 사람만 되지 않으면 되는데, 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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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9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1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0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1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 아파트 화단 근처에 누군가 호박꼬지와 대추를 널어놓은 것을 보았다. 자연색 그대로 가을볕에 쪼글쪼글해지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시골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이맘때 마당에는 참 여러 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 고추, 콩, 호박꼬지, 깨도 있었지 아마. 가을이 좀 더 깊어져 겨울이 가까워오면 처마 밑에는 시래기도 걸리고 옥수수도와 감도 걸리고 그랬었다. 그때는 항상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의식에 시달렸는데 이제 나도 나이를 먹는 건가. 이렇게 아기를 가졌을 때나, 나중에 아기를 낳았을 때, 옛날에 살던 그 집에 가서 풀냄새, 흙냄새 맡으며 조용히 쉬고 싶단 생각을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뜨듯한 아랫목에 몸을 뉘였다가, 아궁이 숯불위에 무 좀 썰어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 청국장에 밥 한 그릇 먹고 나면 절로 기운이 날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은 대도시라기보다는 중소도시에 속하고 십분만 차를 끌고 나가면 전원 풍경이 펼쳐지는 곳인데도 언제부터인가 늘 향수에 시달린다. 이미 문명의 편의에 길들여진 탓에 다시 옛날처럼 살라고 해도 며칠 못 버틸 줄 알면서도 TV에서 고향과 닮은 곳이 보이기라도 하면 그리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열세 살 이전까지 알파벳도 잘 몰랐고 인터넷은커녕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모두가 건강했고 스트레스라는 말과도 거리가 멀었다. 선행학습이라고는 새로 받은 교과서를 읽는 것 이외에는 해본 적이 없기에 그만큼 순진하게 학업에 몰두했고, 학교 도서관조차 책이 부족해 읽던 책을 읽고, 또 읽고 반복했다. 내가 모르는 엄청난 바깥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며 두려움이 점점 커졌지만 정말로 더 큰 세계를 접했을 때 나를 지켜준 것은 유년시절의 따듯하고 소박했던 추억이었다.

  그런데도 남편과 나는 내년 쯤 더 넓은 집으로, 한 블록 옮겨간 더 편리한 위치로 이사를 갈 계획을 하고 있다. 지금 마음은 당장 귀농이라도 할 것 같은데, 우리는 미래 쪽을 더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기도 하지만 계획 없이 사는 일도 익숙하지 않은지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구상하고, 아직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에 다가가기 위해 일상에 집중한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어그러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고, 때론 오롯이 마음을 비웠을 때 그득 차오르는 것들도 있다. 다만 내 마음 속 밑그림들이 과거, 더 어린 날의 나를 사로잡았던 허황된 서정이 아님을 확인하고 어느 새 안심이 되곤 한다. 그 시절에 멈추어 있었다면 나는 아마 영영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에 바치다
- 이선영

세월로부터 한 살 한 살 근근이 수확하는 나이를 평범에 갖다 바치다

소작농이 그의 지주에게 으레 그리하듯

그러나 나의 나이여, 평범의 지주에게 갚는 빚이여, 지주의 눈을 피한 단 한 줌 이 손아귀 안의 움켜쥠을 허락해주지 않으련

  지주의 눈을 피해 도망갈 곳도 없지만 ‘단 한 줌’만 있으면 되고 ‘단 한 줌’도 없으면 안 된다. 그 한 줌은 유년시절의 한 장면일 수도 있고 마음을 쨍하게 울리는 시 한 편 일수도 있다. 그만큼은 허락하며 살자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나이 먹으며 평범해져 가는 일에 점점 더 담백해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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