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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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세 권째 박솔뫼이니 우리 작가 중에선 그래도 많이 읽은 편이다. 이이가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 현 행정부의 나이 계산으로 하면 서른 여덟이나 아홉인데 자신의 독특한 문장을 챙긴 것 같다. 무미하고 건조한 문장. 어느 작품을 읽어도 조금은 서걱거리는 느낌. 독자에 따라 이렇게 작은 석영 알갱이가 섞여 있는 듯한 이야기법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터이지만 나는 좋다.

  이 소설은 출판사 아르테의 한국소설선 ‘작은 책’이란 타이틀로 찍었다. 작가 노트까지 합해서 128쪽. 근데 책이 내 손바닥 보다 작다. 한 페이지에 열일곱 줄과 글자가 원고지 기준으로 28자 정도 들어간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 페이지가 쉴 새 없이 휙휙 넘어간다. 자, 진심으로 말하는데, 처음엔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야기의 연결을 놓치고 말았을 정도다. 분량은 단편소설 한 편. 7쪽에서 시작해 119쪽까지, 그러니까 113쪽이다. 이 책을 개가실에서 봤으니까 읽었지, 만일 시내 서점에서 봤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뚝뚝 읽어 치웠을 거 같다. 분량이 괘씸해 절대로 안 샀을 듯.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이야기는 재미있으니.


  홍한솔. 젠더가 별로 의미 없는 주인공이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니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가슴절제술을 해 편평한 가슴을 가진, 겉 모습만 보면 남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한솔의 친구 가운데 ‘영우’라고 있다. 영우는 몸과 마음이 다 여자다. 대학 동창으로 연극에 매력을 느껴 졸업 후에 연극을 더 하기 위해 예술대학에 응시했지만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다. 가끔 중요하지 않은 배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던 영우는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그리하여 한솔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

  일본은 청첩장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보낸다. 참석, 불참에 동그라미 하세요, 라고 정식 초청장을 보내고 반송 봉투와 우표까지 동봉한다. 한솔은 참석에 진한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냈다. 이제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한 사흘 놀다가 비행기를 타고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다음 열차로 갈아타서 고베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그리고 다음날 호텔 근처에 있는 교회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한 일주일 놀다 올 예정이다.

  시내구간이라 서행을 하던 고속열차가 광명역에 도착하더니 많은 사람이 탑승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가보다, 부심하게 앉은 한솔에게 차려 입은 입성만 보면 10대 후반으로도 보이는 여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가 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소 자주 여러 곳을 여행하는 한솔이 창가 자리에 미련 같은 걸 가질 이유가 없어서 순순히 그러겠노라 했고, 그리하여 창가에 앉은 이름이 ‘나미’인 젊은 여자는 창문을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통로를 지나는 사람으로부터 그저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솔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리로 곧 알게 된다. 나미는 무슨 폭력적이거나 감금 같은 걸 자행하지는 않지만 사이비 종교집단인 건 확실한 교회에서 몸만 빠져나와 집안의 가족과 친척들하고 담 쌓고 사는 이모네 집에서 며칠 숨어 지내다가 부산에 사는 이모의 친구네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 거였다. 종교집단의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기 위하여 나미는 남들 안 하던 짓을 한다. 옆에 앉은 겉으로 보기엔 남자한테 말을 붙이는 거. 옛날에야 옆에 앉은 승객하고 말도 트고, 삶은 달걀도 벗겨 먹고, 칠성 사이다도 나눠 마시고, 겨울 같으면 귤도 까먹고, 선데이 서울도 함께 보고 그랬지, 요새 누가 옆에 앉은 사람하고 말 트나? 확실히 나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오버하는 거였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한솔이 나미에게 탐정이 나오는 소설 한 권을 그냥 준다. 부산에서 자신이 머물 호텔과 자기 이름도 책 속지에 볼펜으로 써 주고.

  이렇게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 한솔은 코모도 호텔에 숙박을 하고, 나미는 이모의 친구 유미네 집으로 들어간다. 유미는 전직이 일본행 크루즈의 식당에서 엔카와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였다.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부산에 정착했는데, 새 가수들이 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가끔 대타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생활을 잘 하는 이런 직업의 여성들이 거의 그렇듯 세상 물정에 빠삭하고 매사에 현명하게 대처할 줄 아는 중년, 노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게 거의 다다. 부산에 도착한 한솔과 나미가 그곳에서 사흘동안 만나고, 선착장에 가서 배 구경을 하고, 서로 숙소로 가다가 한솔은 호텔 인근의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호텔방에서 포트로 데운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뭐 이런 거.


  근데 왜 제목이 “인터내셔널의 밤”이냐고? 부산이잖아. 거기에 러시아 선원들이 많은 모양이다. 난 부산 몇 번을 가도 러시아 사람은 못 봤는데, 아마 너무 오래 전에 가서 그럴 거다. 한솔이 만난 우람하고 단단하고 게다가 잘 생긴 러시아 선원이 우연히 두 번인가 길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 선원이 휘파람으로 노래하고 있던 것이 “인터내셔널 가”이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이런 작품은 스토리 읽기 위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끄는 쓸쓸한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박솔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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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10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긴 읽은 모양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제가 쓴 독후감을 다시 봐도 정말 까맣게… 예전에 문예지 신인공모할 때 담당자 부재라 동료 박*뫼가 수령했다는 우체국 택배 전송 알림 문자 받고 와 내 원고 박솔뫼가 받았다! 한 기억만 납니다 ㅋㅋㅋ(받기만 했다…흔적도 없다…)

Falstaff 2024-02-11 05:49   좋아요 0 | URL
이런 작품들은 나중에 기억이 정말 하.....나도 안 나는 경우가 많습지요. ㅋㅋㅋ 그 맘 제가 압니다.
어쨌건 박솔뫼하고 옷긴 스친 인연이 있는 열반인 님. ㅎㅎㅎ
 
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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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브 언털의 1937년 작품. 세르브 언털은 190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으나 1907년에 아버지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해 유대인이라기보다 유럽인의 정체성으로 평생을 살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은 유럽인으로 알았건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1944년 벌프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945년 종전을 눈앞에 두고 수용소 간수들한테 그만 맞아 죽었다. 사십 여 성상을 평생 부르주아로 살다가.

  1937년이라고, 조금 오래된 작품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코피난다. 서유럽이 아니고 동북부 유럽인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에서도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혁신적인 포스트 모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물론 이 배경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피폐한 산업과 이에 따른 인간의 상실이 토양을 만들었겠지만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장르는 원래부터 인간의 불행을 거름으로 삼아 발전하는 측면이 많은 법이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동유럽 작가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숙성을 시켜 특유의 문법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뭘 알아야지. 이거 아마추어가 폼 한 번 잡아보려고 잘난 척하는 “순 구라”다. 믿지 마시라. 하여간 내가 왜 이렇게 순도 백퍼센트의 구라를 풀었는가 하면, 헝가리 문학의 기념비라고 일컬어진다는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도 사실 해석해내기가 만만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쓰여진 그대로 읽는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 결혼해 신혼여행을 간 주인공이 사춘기 한 시절에 극도로 번민했던 죽음에 관한 사고에 여전히 빠져 있는 미성숙 상태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런 시각도 당연하지만,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과거 회상과 자의에 의한 죽음의 유혹과 책 표지처럼 어두운 배경으로 깔린 우울함, 공황상태를 1930년대 중후반 특유의 사회전반에 대한 반향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관점은 아닐 듯하다.

  나 역시 처음엔 스토리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이런 유아적, 아니지, 사춘기적 정서에 함몰되어 있으며 1930년대 작품 아니랄까봐 반여성주의적 사고방식도 여전한 주인공의 철딱서니 없는 방황과 무질서와 몽상과 방향 없는 사랑타령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점점 지루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런 상태를 애써 눌러 참고, 내 특기 가운데 하나가 지겨운 거 버티는 일이라서 계속 읽어 나갔는데, 이것, 앞에서 말한 모든 난처한 것들이 점점 하나의 집단적 고통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고착되더란 말이다. 당연히 제 밭에 물 주는 식의 사고의 확장일 수 있겠지만 작품은 질기게도 어둠, 밤, 공황, 죽음, 질병, 이별, 배신 등 삶의 극단적 부정으로 일관하다가, 로마 빈민들에 의한 탄생 영세식과 밤을 새워 벌인 축하 파티, 빈민들에 의한 죽음과 강절도의 공포가 아닌 친절과 염려를 기점으로 한 순간에 화면이 밝아지며 대단원을 맞는다.

  작가 세르브 언털이……. 자꾸 “언털”, “언털”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아 잠깐 덧붙이자면, 언털을 알파벳으로 쓰면 Antal이다. 내가 아는 Antal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스페셜리스트이자 내셔널 심포니, 로열 필하모니 음악감독을 했던 도러티 언털, 멘델스죤 무언가의 거장 일제 폰 알펜하임의 남편이다. 헝가리 발음으로 Antal을 “언털”이라고 읽는다. 하이든 교향곡 전곡과 오페라 전곡은 지금도 명반으로 꼽는다. 하이든 오페라 전곡은 내가 알기로 도러티 언털 녹음이 유일하다.

  하여간 세르브의 기본 정조는 대단히 우울하다. 비록 막판에 좋게 좋게 끝나 다행이지만 다분히 의도적으로 해피 엔드로 끌고 간 느낌이 드는 건 숨길 수 없다. 어떤 해피 엔드인지는 결코 일러드리지 않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쪽으로 해피 엔드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가 빠그러지는지 지금부터 보자. 난 언제나 이렇게 서두가 너무 길어서…… 지랄이다.


  첫 장면은 베네치아. 서른여섯 살의 미하이가 남자 주인공이고 아내 에르지가 여자 주인공이다. 에르지는 퍼터키 졸탄이라는 당시 헝가리의 큰 부자와 4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퍼터키 씨가 끝도 없이 바람을 피우는 건 알겠는데 하다못해 이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타이피스트도 건드리는 걸 보고 눈이 확 돌아버려 홧김에 서방질한 대상이 미하이였으며, 처음에는 미미한 홧김의 서방질이었건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데다가 미하이도 이하동문이라 슬슬 꼬드기기를, 하루빨리 이혼 서류에 인감도장 찍고 자신과 새롭게 결혼하자고 해서 정말로 헝가리의 막강한 부자 남편과 헤어진 다음 보건복지부 장관 입장에선 인정하기 힘들었겠지만 법무부 장관은 확실하게 인정한 총각 미하이와 새로 결혼한 거였다. 미하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몇 년 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업가의 막내 아들로 작가 세르브와 마찬가지로 여태 부르주아가 아닌 상태로는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기는 하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에르지와 이이의 전남편 퍼터키 씨 역시 미하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큰 주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 퍼터키 씨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미하이 가문의 사업 정도는 가뿐하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 근데 감히 퍼터키 씨 가족을 이혼시키고 새로 결혼을 했다고? 그렇다.

  첫 장면이 베네치아인 것은 이들이 신혼여행을 왔기 때문이다. 미하이는 이탈리아에 처음 온 반면 에르지는 남편보다 이탈리아 말에 더 능통하고, 처음 와본 것도 아니어서 일정이나 묵을 숙소, 메뉴 선택, 방문할 유적지 같은 것을 모두 정한다. 미하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는 과하게 관능적이라 위험 그 자체. 그래서 여태까지 이탈리아를 멀리 했던 것이고, 이제 결혼을 해 명실공히 어른이 되어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 오스트리아가 아닌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다. 이날 밤에 미하이가 하는 이야기의 논점은, 물론 말로만 주장이겠지만, 그리스와 가까운 지역이니 사모스 와인이나 마브로다프니 와인이 여기 베네치아의 술 판매점 딱 한 군데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겠다, 라고 주장해 아내 에르지를 홀로 호텔방으로 올려 보내고, 이미 어둠이 잔뜩 내려 앉은 베네치아 골목골목 이 음산한 지역, 물비린내와 폭력과 살인과 강도의 냄새가 자욱한 어두운 골목을 와드득 몸을 떨면서 돌아다닌다. 이 장면에서 어느 책에서 읽었더라, 기억나지는 않지만, 운하에 정박한 보트 속에 숨은 자객 이야기가 불쑥 생각나서, 책의 분위기도 그렇고 곧 사달이 나고 말지 싶었지만, 주인공 미하이는 동녘이 훤할 때까지 미쳤다고 섬뜩하게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쏘다니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이 철없는 미하이. 며칠 후 부부는 라벤나에 도착했고, 아침 일찍 에르지가 잠에서 깨지도 않았을 때 미하이 홀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호텔을 나가버린다. 가장 유명한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혼자 보고 싶어서. 라벤나의 모자이크는 미하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념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독자는 여기서 처음으로 미하이의 사춘기 시절 만난 친구들과 친구의 여동생 에버를 떠올린다. 가톨릭에 귀의한 유대인으로 나중에 움브리아의 프란체스코 파 수도사 세베리누스가 되는 에르빈, 일찌감치 자신의 금장시계를 훔쳐간 사기꾼 세페트네키 야노시. 그리고 친구들을 자기 집에 오게 해 함께 연극놀이를 하던 울피우시 터마시와 터마시의 동생 에버.

  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고교생 미하이는 핼쑥하고 불안하고 열정에 타서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상태를 보니 섬망장애 또는 공황장애가 틀림없는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었다. 주변에서 갑자기 땅이 열리고 소용돌이가 쳐 마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표에 휩싸이는 증상인데 눈 오는 날 부더 성에서 극도로 심한 소용돌이 증상을 겪고 있을 때 터마시가 나타나 어깨에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소용돌이 증상이 사라지면서 이 사이 좋은 남매와 절친 사이가 되었던 거다. 좀 이상할 정도로 친한 남매들. 그리고 몇 년 후, 터마시는 에버가 보는 앞에서, 에버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때 과량의 모르핀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후 주인공 미하이도 죽음을 선망하게 되고 신혼여행까지 와서, 아내 에르지에게 옛 사춘기 시절의 추억을 다 말했음에도, 절대 에버와 사랑으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고백했음에도, 결국 미하이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에버 한 명이었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그건 조금 나중의 일이고, 이들이 몇 군데를 더 거쳤다가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정거하는 역에서 십 분 동안 멈추었다 출발한다는 말을 들은 미하이는 짬을 이용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어 기차를 내렸고, 시간이 다 돼 기차가 떠난다고 소리치는 말에 허겁지겁 뛰어 다시 탑승을 했건만 자신이 내렸던 기차가 아니라 다른 열차를 타는 바람에 저절로 아내와 떨어지고 만다. 이것으로 이 부부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미하이와 에르지의 이탈리아/프랑스 여행은 본격적으로 막이 올라간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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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08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네치아의 골목 자객 나오는 그 소설 혹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지금 쳐다보지 마> 아닌가요?
단편집 첫 이야기요. 소설의 그 마지막 장면이 정말 섬뜩했어요.

Falstaff 2024-02-08 14:41   좋아요 1 | URL
옙. 마침 책이 책꽂이 바로 앞에 꽂혀 있어서 지금 확인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쳐다다보지 마>! 와, 대단하신 쿨캣님. 저는 책 열어 볼 때까지도 알렉상드르 뒤마나 빅토르 위고를 생각했었거든요. ㅋㅋㅋ

coolcat329 2024-02-08 17:28   좋아요 1 | URL
그 이야기가 워낙 강렬해서 잊혀지질 않았거든요. 폴스타프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윌리엄과 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6
톈샤오웨이.주주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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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연출가, 배우인 텐샤오웨이田曉威가 중앙연극아카데미를 다닐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학창 시절에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중국 연극계에 발을 들인 이들은 뜻을 모아 친구 왕펭페이는 프로듀서로, 텐샤오웨이는 연출자로 어린이 연극 교육을 위해 애를 썼다. 2020년 펜데믹이 들이닥쳐 작업을 그만 두어야 했을 때, 텐샤오웨이는 전통적인 희곡 작업을 써보고자 했으며, 원래 고전적 연극 스타일인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다루는 희곡을 썼다. 무려 세 시간 이상의 공연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작이지만 단 네 명의 배우가 수많은 등장인물 역할을 해야 하는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작을 만든다. 2022년 7월에 텐샤오웨이와 그의 아내 주주朱珠와 협업으로 작품을 개작해 베이징과 선전에서 공연을 해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이때 텐샤오웨이가 극작, 연출, 배우로 워낙 큰 비중을 맡아 <윌리엄과 나>에 관련한 인터뷰는 이이가 전담한다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텐샤오웨이는 1981년생으로 검색을 해보면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한 듯하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지만 실물로 본 거 아니니까 믿지는 마시라. 하여간 무대, 은막, TV를 막론하고 전성기를 달리는 인물인 듯하다. 텐샤오웨이가 공연/연기 전반에 걸쳐 가리는 것 없이 활약을 하니, 그의 극작품이 다분히 고전적 틀을 지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중국현대희곡총서 시리즈에서 소개하는 작품들 가운데도 포스트모던에 가까운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윌리엄과 나>는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의 삶을 다분히 대중적으로 친숙하면서도 세 시간이 넘는 공연이 별로 지루하지 않을 친숙한 방식으로 썼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세 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복잡다단한 삶을 산 셰익스피어의 일생을 그린 작품을 단 네 명의 배우가 어떻게 이야기가 섞이지 않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수 있다. 텐샤오웨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 극의 코러스 비슷한 장치를 가져왔다. 한 배우가 여러 배역을 맡는다고 해도 잠깐 쉴 참이 있다. 이 때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 배역을 맡아 대사를 하기 전에 짤막하게 지금 처한 상황이든지 맡은 배역이 왜 이런 장면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그게 아니더라도 극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 같은 것을 설명한다. 아예 배우나 성우 한 명을 더 출연시켜 코러스 역할을 통째로 맡기고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는 네 명은 연기에 전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극에 코러스가 없었으면 1박2일로도 끝내기가 쉽지 않았을 걸? <윌리엄과 나>도 그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등장인물 가운데 몇 명은 자신들만 쓰는 독특한 어구가 있다. 극장 소유주이자 여관 몇 개, 윤락가 몇 개를 가지고 있는 런던의 부자 사업가 필립 헨슬로는 말 끝마다 “끓는 물에 데인 것 같이”라는 부사구를 가져다 붙인다. 잉글랜드 수석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는 말 시작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길”이라 시작하면서 뇌물이면 뇌물, 향응이면 향응, 여인이면 여인를 주는 대로 꿀꺽 삼켜버리는 놀라운 식욕을 자랑한다. 셰익스피어의 중요한 후원자인 사우샘프턴 백작 3세 헨리 라이어슬리는 자기 주변의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금화 한 잎 내기를 해 언제나 이긴다. 사우샘프턴 백작의 친구이자 나중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반란을 도모했다가 황천길로 접어드는 에식스 백작 2세 로버트 데버루는 엘리자베스의 젊은 애인이었다가 여왕의 은밀한 비밀을 술집에서 취중에 떠들어 미움을 사고(여왕의 치마 속은 완벽하게 왁싱이 된 상태야!) 아일랜드 내전에서 형편없이 깨졌음에도 텐샤오웨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사소한 오류를 범했지만 그건 조금도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데버루 이야기는 영국 역사상 몇 개 없는 재미난 일이라서 소개했다.

  그러면, 그리스 극의 코러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관객을 향한 짧은 설명과, 등장인물의 특징적인 말투만 가지고 이렇게 긴 연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와 긴장을 가질 수 있느냐고? 에이, 그럴 리가. 내가 발견해서 여기다 쓸 수 있는 것이 두 개이고 만일 하나를 더 보탠다면, 세상에 누구의 삶도 사소한 경우는 없겠지만, 여왕의 치마 속은 말끔하게 왁싱이 되었을지언정 말도 많고 털도 탈도 많던 마지막 튜더 왕조 시대를 살아온 세계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한 생애를 그린 작품에 텐샤오웨이가 그야말로 적절하게 유머러스한 대사를 살짝 뿌려댄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유머라는 것이 색깔로 치자면 왕실의 색 보라와 비슷해서 흔하게 눈/귀에 띄면 순식간에 천박의 골짜기로 빠져버리는 거라서(아, 5공 시절 수도 서울의 넘치고 넘쳤던 보라색 시내버스의 질주여!) 적절한 순간에 잠깐씩 치명적 조미료를 뿌리듯 살포해야 하는 건데, 이 작품이 그랬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극이 엄숙의 도가니로 끌려가지 않고 관객이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물론 완전 아마추어인 내가 꼽은 것 말고도 더 있겠지만 그건 읽어 보시고 직접 보태 보시기 권한다.


윌리엄을 연기하는 텐샤오웨이


  극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다섯 번째 생일인 세인트 조지 데이, 기념일 날의 이름이 좀 그렇기는 하다 조지 데이가 뭐야, 조지 데이가, 윌이 삼촌이 베니스에서 가져온 초콜릿 시럽 과자를 들고 극장 구경을 갔다가 과자를 탐하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피해 극장의 백스테이지에 숨어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백스테이지에 가 보셨나? 나는 연극은 아니고 1970년대 오케스트라 연주회 백스테이지엔 가봤다. 세상에 그렇게 황량할 수가. 윌이 가본 곳은 황량한 것 더하기 암흑천지였나 보다. 겁이 덜컥 났겠지. 사방을 둘러보니 저 바닥에 불빛이 보여 앞뒤 재지 않고 냅다 뛰어가 불쑥 나와보니까, 에그머니, 글쎄 무대 위였다. 극장엔 제우스와 엔디미온과 달의 여신 셀레네 이야기 각색본을 공연하고 있었다. 셀레네가 엔디미온에게 술수를 써 자신한테 키스하게 만들었고, 이것을 본 제우스가 감히 인간 그것도 목동 주제에 신한테 입을 맞춰? 너 지금 당장 죽을래 아니면 영원히 살되 계속 잠만 잘래? 이렇게 할 참인데 난데없이 꼬맹이 하나가 툭 튀어나온 거다. 그렇다고 당장 극을 망칠 수도 없어서 갑자기 즉흥극으로 변해버린다. 엔디미온과 셀레네가 벌써 일을 벌여 아들을 낳았고 이게 다섯 살이 되어 초코 시럽과 크림까지 소복하게 얹은 과자를 들고 있어서 제우스가 냉큼 한 입 베어 물어 버린다. 엔디미온도 그게 맛있어 보여 제우스 손에서 얼른 빼앗아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리고 어린 윌은 울먹울먹. 그게 재미있어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광경이 놀라워 윌은 연극에 깊은 인상을 받는 것으로.

  이게 서막이다. 본막으로 들어가면 세월이 흘러 농사도 짓고 피혁일도 하는 집안의 아들 윌한테는 벌써 아이 셋이 있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귀족 출신 아내 메리 아덴 셰익스피어가 시집 올 때 가져온 마지막 혼수인 은식기를 내다 팔아 자기 빚을 갚았다고 엄살을 떨어 오지게 바가지를 긁힌다. 아내 앤 역시 농사꾼 윌이 하라는 농사도 안 짓고, 필요한 가죽을 얻기 위한 송아지 도살도 하지 않는다고 역시 주둥이가 댓 발 나와 있고. 윌은 돈 안 되는 시를 쓰느라 엄마와 아내가 밥 먹으라고 몇 번을 소리쳐도 꿈쩍 않고 원고지를 잡고 있다가 결국 엄마가 시끈거리더니 원고지를 찢어버리기에 이른다.

  아무리 시와 극작이 있는 젊은 윌이라 하더라도 당장 밥값은 해야 하는 법. 시냇가에 가서 송아지 한 마리를 처리하고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아버지가 와서 아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넨다. 엄마의 은식기를 팔아 얻은 것으로 평소 아들의 소원이었던 극작을 해보라고 마련해준 종자돈이다. 많은 돈이 아니어서 이것 가지고 베니스까지는 못 갈 거고 그저 런던에서 시작해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사실이었으면 윌의 가슴이 을매나 찢어졌을꼬? 집에 들르지도 않고 그 길로 런던으로 향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몇 가지를 소리쳐 당부한다.

  “아무하고나 깊이 사귀지 마.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새 옷을 두 벌 사. 남들이 너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 절대로 아무한테나 돈을 빌리지 마라. 아무한테나 빌려줘도 안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바람.

  “(자기 가문의) 앰블럼 하나를 가져와! 너한테 준 돈은 투자야.”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피 묻은 손을 닦은 손수건을 가슴 속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재미있는 희곡 <윌리엄과 나>는 시작해 드디어 <리어 왕>을 쓰고 <템페스트>를 끝내지 못하고 윌의 시간은 막을 내리고 만다. 그때까지 극은 놀라운 속도감으로 휘리릭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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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정도면 빠지는 인물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근데 정말 연극 보고 싶네요. 어떻게 했을지. 근데 3시간이면 분량이 상당할텐데 책은 그렇게 두껍지는 않네요.
저는 잘 차려진 무대도 좋지만 백스테이지가 더 좋더군요. 한때 누벼 본 사람으로서. 지금은 언감생심이지만. ㅠ
아, 근데 봐도 제가 쭝국말을 못 알아 듣겠군요. 😂

Falstaff 2024-02-07 16:26   좋아요 1 | URL
저 사진이 좀 덜 예쁘게 나온 겁니다. 잘 생겼습니다. 하긴 입이 십삼 억 개인데요. ㅋㅋ
이 작품은 저도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근데 처음 낭독공연을 놓쳤으니 다음 일정을 기약할 수 없겠습니다. 에휴...
별 님도 그 쪽 방면에 일 하셨군요. 누벼보셨다니.... 뭐 세상 일이 다 그렇지요.
 
신경 좀 꺼줄래
케빈 윌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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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에 케빈 윌슨이 쓴 <펭씨네 가족>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출판사 은행나무가 그만 절판시켜 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그럴싸한 현대적 엽기, 괴기 가족 이야기, 저 오래 전 유럽 북부를 지배했던 베오 울프 족의 후예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딸랑 한 가족만 남았는데 멀쩡한 사람을 죽여 피를 빨기는커녕 예술지상주의 이 가운데서도 행위예술에 전심전력을 다 하는 난장판, 이게 미국사람 마음에 꼭 들었는지 할리우드에서도 니콜 키드만을 캐스팅해 우리말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는 거다. 나도 하도 기막힌 스토리라서 작가 케빈 윌슨이란 이름을 딱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새 책이 작년 8월에 나왔다는 걸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얼른 새 책 사주세요, 희망도서를 신청했더니 어느 눈 밝은 독자가 있어서 벌써 신청이 되어 있어 해가 바뀐 뒤에야 읽게 된 거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기다렸다는 말씀.


  이 책도 <펭씨네 가족>만큼 어이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펭씨 가족처럼 베오 울프의 후손이라 예전에 사람의 피를 주식主食으로 빨아먹는 유전자가 있어서 송곳니가 기형적으로 발달했다는 등, 이런 거 말고 그동안 세월이 조금 흘렀으니 좀 더 어이없는 방향으로 상향 진화하여, 미합중국 테네시 주 상원의원 로버츠 씨네 후손들 가운데 특정 유전자를 가진 자손들은 화딱지가 나거나, 상처를 입거나, 그래서 아프거나, 누가 괴롭히거나,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체온이 처음엔 슬슬, 그러나 잠깐 사이에 팍팍 올라가는 증상이 있는데 열이 얼마큼 오르느냐 하면 화르르륵 파랑과 노랑 불꽃이 가슴에서 시작해 머리로, 양 팔로, 다리로 확 번져서 입고 있는 옷이 금방 불에 타고 옆에 재수없게 인화물질이 있으면 그냥 화재가 일어나고 말 정도였으며, 한 시절엔 테네시 주에서 가장 유능하고 능력있고 저 유명한 네이처 잡지에 다수의 논문도 발표한 존경받는 꼬부라진 은퇴 의사가 진찰을 하고는 자기 판단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불꽃을 발산하는 것과 같거나 비슷해서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삼배체 형질 또는 지옥의 대마왕 루시퍼와 같은 형질이 분명하지만, 자기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인체발화의 특성상 불꽃이 일어나 화재를 일으킬 정도라면 당사자 역시 불꽃, 그것이 아니라도 연기에 질식해 심각한 부상을 입든지 아니면 죽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떻게 생겨먹은 아이들이고 어떻게 터져 나온 플라즈마인지 몰라도 화재 발생 당사자는 머리카락 한 올 까닥하지 않고 옷과 만 달러짜리 커튼과 삼만 달러짜리 카펫만 태우고 멀쩡한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들이 이름을 베시와 롤란드라고 하는 열 살짜리 쌍둥이 남매인데, 아빠 재스퍼 로버츠 씨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테네시 주 상원의원이면서 지금 국무장관을 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 튼튼한 육체를 자랑하는 국무장관이 숟가락을 놓기만 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어 자신의 주변, 특히 가족사항에 흠 하나 없이 하고 싶어한다. 왜 아니겠어, 명색이 국방과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국무장관 후보자인데 아이들이 몸에서 불을 뿜는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적어도 자랑스럽지 않잖아? 글쎄, 내 생각엔 자랑도 아니지만 굳이 험이 되는 거 같지도 않지만 말이지. 하여간 쌍둥이를 낳은 첫번째 아내 제인한테 엄한 불평 불만 짜증 등 기타 온갖 난리를 죽여 결국 제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과 동시에 친정집으로 가서 홈 스쿨링을 하건만, 테네시 주에서 무지하게 큰 사업을 하던 친정아빠가 한 순간에 거덜이 나 감옥에 갈까 말까 하는 신세가 되어 그래도 정이라고 옛 사위가 뒷배를 봐주어 전과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많고 많던 재산은 다 휘리릭 날아가버리고 초라한 별장 비슷한 거 하나만 남아버렸으며, 제인 본인도 심각한 우울증이 생겨 아이들을 거의 방임 수준으로 키우다가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그동안 모으고 모으고 또 모은 온갖 약을 밥공기로 몇 개를 한 방에 삼켜 드런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이 사이에 상원의원 아빠 재스퍼 로버츠는 겁나게 재산이 많고 말타기와 말 수집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지 결혼 비슷한 것만 했는지 하여간 그런 상태로 있다가 성격차이로 헤어진 후에 선거 캠프에서 눈에 확 띄는 유능한 여성, 더군다나 늘씬하게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밴더빌트 대학 졸업생 매디슨 빌링스와 결혼하여 아들 티머시를 낳아 키우고 있다. 로버츠 씨 입장에서 전 아내가 죽었으니 좋거나 싫거나 하여간 쌍둥이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생겨버렸으니 이 불덩이들을 어찌할꼬. 이때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어디 한 구석 빠지는 구석이 없는 젊은 아내 매리언이 적절한 베이비시터 또는 예전 말로 여성 가정교사 한 명을 남편이자 쌍둥이 아빠한테 소개하니 드디어 이 책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사실은 첫 장면부터 등장하지만 그렇게 후다닥 소개해버리면 재미가 적을 거 같아서 뜸 좀 들였다. 좋게 봐주시라.


  때는 1995년 늦봄. 화자 ‘나’의 이름은 릴리언 브레이커. 아빠가 아니라 엄마 이름이 브레이커, 깨뜨리는 자, 망치는 자, 일 수도 있다. 아빠는 릴리언이 태어나서 코빼기 한 번 못 봤다. 엄마와 한 집에서 살았는데 릴이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엄마는 릴의 방에 노르딕 트랙 런닝머신을 들여놓고 릴을 다락방으로 쫓아버렸다. 아니꼬우면 나가면 되니까. 성인이잖아. 릴이 기억하는 시기부터 릴은 가난했고,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28세의 릴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슈퍼마켓의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두 곳의 사장 두 명한테 미움도 받고 돈도 받고 편의는 하나도 못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릴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 있는 떡잎이었고, 겁나게 전도유망한 소녀였다. 일찍이 세 살 때 알파벳은 물론이고 글자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별로 공부도 안 하면서 전과목 A를 채집하는 걸 취미생활로 했고, 여전사들의 훈련장인 줄 알고 철자법 대회에 설렁설렁 나가 최우수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운티 과학경시대회에 기존 과학논문을 조금 유치한 수준으로 다운 그레이드 시켜 베낀 것을 제출해 최우수상을 먹은 전력이 있다. 이밖에 무수하게 많은 호화로운 이력은 지면이 아까워 생략하거니와 골짜기 마을에 신동이 하나 나왔다고 동네 아줌마들 입술에 침이 마를 새가 없다는 거였다.

  테네시 산골짜기에 아이언 마운틴 사립여학교라고 기숙학교가 하나 있었다. 이곳이 전 미합중국에서 제일 돈 많은 집안의 딸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여 교육받는 곳으로 학비도 엄청나게 비싼 곳이었지만 전원을 부르주아의 딸로만 채우기 좀 거시기해서 공부 잘하는 극소수의 소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다른 아이도 아니고 우리의 릴리언 브레이커가 땄다는 거 아닌가. 이에 감격한 중학교 교사들이 비싼 교과서를 직접 구입해 릴에게 선물해 드디어 릴은 전국 최고의 기숙여학교에 가기로 결정을 했으나, 이 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는 똥을 쥐고 세상에 나왔는데 더 나은 걸 원하는구나. 똥을 금으로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렵단다. 어쩌겠니. 행운을 빈다.”

  해서 옷 가운데 가장 예쁘고 점잖은 걸 골라 입고 엄마의 똥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보니 제일 언짢은 수준의 학부모 차가 BMW였다나 어쨌다나. 도무지 릴의 입장에선 말 한 번 붙여보지 않았던,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던 같은 또래의 소녀들 무리에 끼어, 결코 주눅은 들지 않은 채, 기숙사에 들어가 만난 룸메이트가 훗날 재스퍼 로버츠 상원의원의 아내가 되는 매디슨 빌링스였던 거다. 이때부터 매디슨은 키도 크고, 예쁘고, 운동 특히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밤에 몰래 기숙사를 탈출해 근처에 있는 예술대학 남학생들과 술집에 가서 마리화나와 코카인 맛도 보고, 적당히 즐기기도 하는 별세계 소녀였지만, 자기하고 비슷한 부잣집 아이들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당돌한 아이였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면 부잣집 예쁜 아이들하고 밥을 먹으며 그 아이들하고만 외출을 했는데 뭐 그런가보다, 했던 릴. 이 또래 가운데 제일 덜 예쁜 아이가 무슨 심통이 났는지 교무실에 가서 매리언의 책상에 코카인이 있다고 고발을 해서, 선생이 들이닥쳐 서랍을 열어보니까 정말 코카인이 있는지라, 즉빵으로 매리언의 아버지가 새벽같이 학교로 쳐들어왔다. 왔지만 어떻게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코카인인데. 그리하여 이날 빌링스 씨는 그동안의 우정을 봐서 릴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해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음식점에 가니까 글쎄 엄마가 와 있는 거였다. 이렇게 두 식구 네 명이 밥을 먹다가 빌링스 씨는 위스키를, 엄마는 마티니를 홀짝거리다가 취기가 살짝 돌 즈음해서, 빌링스 씨가 은근히 엄마한테 제의를 한다. 사랑한다고? 천만의 말씀. 백만장자가 가난하고 나이든 과부를? 어림도 없는 얘기.

  매리언은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해서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걷기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 이름난 기숙학교를 그만두지 못할 상황이다, 반면에 릴은 가난한 집 딸이라 오히려 학교에서 선처를 해줄 가능성이 높고 그만두더라도 사실 잃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 매리언의 책상 서랍에 있었던 코카인이 사실은 릴의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엄마한테 만 달러를 주겠다고.

  엄마는 즉각 수락하고 빌링스는 그 자리에서 이미 엄마 이름이 쓰여 있는 만 달러짜리 수표를 봉투에 넣지도 않은 채 그냥 건네준다. 이튿날 매리언 대신 이미 더플백을 싸 놓은 릴이 퇴학처분서를 받고 엄마의 똥차를 탄 채 골짜기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며 다시 공립학교에 다닌다. 자신의 인생에 반전의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는 걸 이해하고 더 이상 삶의 총기를 발휘하지 않은 채.

  여름이 되자 매리언이 편지를 보냈고, 전화는 한 번도 없었지만 편지는 3~4 개월에 한 장씩 릴의 집 앞에 떨어져 이제 매리언과 릴리언은 펜팔이 된다. 모든 일에 용의주도한 매리언은 혹시 이런 방식으로 릴을 자신의 충실한 동지, 어떤 일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해줄 충성스러운 병사 한 명을 키운 거 아닐까? 해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십여 년이 흐른 후, 매리언 빌링스였던 매리언 로버츠는 두 군데 슈퍼마켓의 파트타임 계산원 릴리언 브레이커에게 편지를 해 자기 전처 자식의, 옛날 말로 가정교사 자리를 제의하고, 릴은 수락해 이 불꽃 튀는 쌍둥이 남매와 여름 한 철을 보내게 된다. 바로 그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애간장을 녹였던 한 마디.

  “자기 애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망치지 않은 부모를 하나라도 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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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쿠르초 말라파르테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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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1898년에 독일에서 이민 온 섬유기술자의 셋째 아들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프라토에서 “쿠르트 에리히 주케르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지역 명문 치고니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후배가 되지만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무작정 가출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에 도착, 이탈리아 출신 의용군에 합류하여 아르곤 전선에서 독일군하고 대치한다. 이때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귀가했고 1915년에 이탈리아가 정식으로 전쟁에 뛰어들자 다시 이탈리아 정규군에 지원해 알프스 산악부대 보병연대 중위로 입대한다. 낭만적으로 전쟁을 생각한 고등학생이 이제 본격적인 전쟁의 혹독한 맛을 경험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각각 무공훈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18년 7월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을 당해 평생 폐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처절하게 패배한 전투였던 카포레토 전투를 주제로 한 <카포레토 만세!>를 써 이탈리아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미 1922년부터 파시스트 당원이었으나, 아무리 나쁘게 봐도 다분히 낭만적인 파시스트였던 거 같다. 1925년에 쿠르트 주케르트는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라 개명하면서 계속 글을 쓰지만 어느새 일 두체,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논조로 바뀌어 버렸다. 이탈리아 최대의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그를 고용하여 파리 특파원으로 파견하지만 그곳에서 말라파르테는 히틀러를 희화화 한 <쿠데타의 기술>을 출간한다. 이 책의 이탈리아 판은 무솔리니에 의하여 판금조치 되고, 33년에 귀국한 후 곧바로 체포되어 반파시즘 활동을 한 죄목으로 5년 추방형을 선고받아 정치범 수용소에 유배된다. 책에도 등장하는 무솔리니의 미남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이 이를 딱하게 여겨 유명한 토스카나 해양도시인 포르테 데이 마르미고 이송을 시키는데, <망가진 세계>에서는 이 곳을 말라파르테의 고향으로 설정했다. 히틀러 풍자 서적 <쿠데타의 기술>이 이 와중에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유배 도중에도 인세가 꼬박꼬박 쌓여 그곳에서 근사한 별장을 구입하는 엽기행각도 벌인다.

  1940년이 오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대위로 징집된 말라파르테는 병역 대신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종군기자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를 다니며 몰래 <망가진 세계>의 원고를 쓴다. 히틀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누비고 다닌 말라파르테는 폴란드에서 <망가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완성하고 힘러의 게슈타포가 엄정하고 살벌하게 검문하는 데도 불구하고 원고를 각지에 분산시켜 폴란드를 빠져나와 핀란드로 들어간다. 1943년에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 도착하고 이틀만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얼마만에 석방되어 카프리 섬으로 들어간다. 섬에 입도하기 전에 열차를 타고 폐허가 된 나폴리의 장면이 이 책의 마지막 장chapter인 “파리fly”에 묘사되어 있다. 카프리 섬에서 원고를 끝낸 것이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3년 9월이었다.

  즉, 이 책은 아직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패배를 전망할 수 있을지언정 확언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시절에 쓴 작품이다. 모두 6부로 되어 있고 각 부는 동물 이름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말, 쥐, 개, 새, 순록, 파리. 이 작품은 르포르타주와 소설이 절반 정도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하나의 큰 이야기 줄기가 있고 여기서 몇 개의 에피소드라는 가지가 장식하고 있는 정식 소설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사실(적 이야기)을 종군기자가 쓴 기사, 르로르타주reportage로 보기도 어렵다. 이것들이 합해 있다면 문학으로서 이 작품은 당연히 소설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떤가. 그냥 읽으면 된다. 그동안 전쟁을 묘사하는 많은 책을 읽었으나 이 <망가진 세계>만큼 적나라하게 전쟁의 참상과 비참, 참담, 암담, 허탈을 있는 그대로 쓴 작품은 처음이다. 작가 자신도 이 책을 “대단히 유쾌하면서도 섬뜩한 책”이며 “전쟁동안 눈으로 본 유럽의 대재앙 중 가장 특이한 광경”이라서 독자에게 “섬뜩한 유쾌함”을 선사한다고 서문에 썼으나, 이 책에서 어떤 장면이든지 유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변태 아니면 맛이 좀 간 상테라고 봐도 될 것이다.


  첫 장면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의 동생인 오이겐 왕자의 거처 발러 발대마쇼덴이다. 9월이며 벌써 오크힐의 고목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가을. 빌라의 맞은편 티볼리 놀이공원의 말들이 구슬프면서도 무언가를 열망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허공에 공명시키는 곳. 이 해의 여름에 말라파르테는 핀란드의 라플란드 페차모 전선에서, 결코 지지 않는 무자비한 태양빛 아래에 피곤과 극도의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지내다 헬싱키의 병원에서 오래 입원한 후 퇴원, 스톡홀름에 도착해 오이겐 왕자를 방문한 터였다.

  이들은 의사 악셀 문테 이야기를 한다. 그가 말하기를 독일인은 병든 민족이라고. 늘 공포에 차 있어서 공포 때문에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독일인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모두 결코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 대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민족.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 약자, 병자, 여성, 어린이, 노인, 유색인, 집시,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 세상의 모든 소외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들이 바로 독일인, 나치 독일인이라 했다고. 말라파르테의 이런 관점은 책이 끝나는 시점까지 일관되게 펼쳐진다. 하다못해 연어를 잡기 위해 강에 수류탄을 던져 모든 하천 생물체를 말살시키는 독일인을 결국은 연어가 이길 것이고,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건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된 나폴리, 이미 귀족과 부르주아는 안전하게 피난을 떠나 여성과 노인과 어린이와 병자와 장애인만 남은 나폴리의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오랜 기근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와 빈대와 벼룩투성이의 민중이 되리라는 생명주의가 결론이다.

  능멸과 치욕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유럽의 한 가운데 떠 있는 행복한 섬 스웨덴. 이 섬에서 말라파르테는 전쟁 후 거의 처음으로 평온한 삶의 감각을, 인간적 위엄의 감각을 되찾은 느낌을 받지만 한편으로 스웨덴 풍경을 말horse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전쟁에 대하여 중립을 선포했으며, 독일 민족에 관한 냉소적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오이겐 왕자의 눈과 눈썹에 서린 차가운 잔인함은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난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이 언뜻 비쳐 보였던 거였다. 말라파르테는 오이겐 왕자에게 스몰렌스크 포로수용소에서 본 소련군 포로들 이야기를 해준다.


  “포로들이 동료 수감자의 시체를 뜯어먹는 동안 독일군들은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공포와 수치를 느꼈다. 오이겐 왕자에게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이겐 왕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회색 외투에 몸을 파묻은 채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들었는데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기분이 상해 날 질책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말라파르테가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소련군 포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났던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을 이때 본 거였다. 디트리히는 그의 얘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얘기한 것만 달랐을 뿐.

  “Hat es ihnen wenigstens geschmeckt? – 그들이 맛있게 먹던가요?”

  독일군 사병들도 어떻게 말릴 방법이 없었다. 그들도 먹을 것이 없었으니. 전쟁은 그런 것이다.


  1941년 4월, 나치 꼭두각시인 크로아티아 자유국가가 탄생하고 초대 총통 안테 파벨리치가 취임한 후 종군기자 말라파르테는 그를 만난다. 크고 넓적하면서도 강인하고 거친 느낌을 주어 마치 옛날 친구라도 만나는 느낌을 주는 친근한 얼굴. 거대하고 우스꽝스럽고 괴기하기까지 하게 큰 귀를 지녀 어딘지 모르게 좀 바보스러움을 가진 듯한 총통은 말라파르테의 감옥살이에 관해 물으며 흡족한 웃음을 흘리는 것까지도. 몇 달 후 다시 총통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크로아티아와 소련의 게릴라, 파르티잔이 밤이면 자그레브 근방까지 숨어들어 오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안테 파벨리치의 책상 위에 버들고리 바구니가 놓여 있었으며 그 속에는 런던 피커딜리 거리의 식료품 백화점에 진열될 만한 홍합과 굴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배석한 카제르타노 공사가 말라파르테에게 묻는다.

  “굴 찜 좋아하시죠?”

  “달마티아산 굴인가요?” 그가 총통에게 직접 묻는다.

  총통 안테 파벨리치는 바구니 뚜껑을 벗겨 홍합을 보여준다. 젤리처럼 미끈미끈한 덩어리들. 총통은 선량하면서도 어딘지 바보 같기도 한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의 충성스러운 우스타샤 대원들이 선물로 보내온 거랍니다. 사람들의 눈알 이십 킬로그램입니다.”

  생포하거나 죽인 게릴라, 파르티잔들의 눈알. 생굴처럼 보이는.

  이런 것이 전쟁이다. 그러나 결국은 약한 것, 소외된 것, 작은 것들이 이기고 마는 거대한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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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05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이렇게 개처맞고도 반항하는 작가 놈들 글만 보면 저는 사족을 못 씁니다…부럽습니다 먼저 읽으셔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2-05 17: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런 골통들이 가끔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른 읽으셔요!!

coolcat329 2024-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시스트 군인이 쓴 전쟁의 참상이라니...이 책 또 엄청 끌립니다.
작가가 보통 사람같지 않네요. 또 새로운 책, 작가 알게 돼서 넘 기쁩니다.

Falstaff 2024-02-05 17:52   좋아요 1 | URL
조국에 살기 위해서 마음엔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파시스트 군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참 험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살지 않은 게 어딥니까.
이게 유명한 작품인 모양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선 별로 인기가 없지만....

coolcat329 2024-02-05 18: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말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찾아보니 영어를 번역한 거 같던데 어떠셨나요?
숨겨진 걸작같아요. 땡투 받으시면 저인줄 아시길요~😅😅

Falstaff 2024-02-05 19:23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어를 번역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그냥 읽든지 해야 하는 거지요 뭐. 번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애입니다.
문장은 전혀 어색한 거 없었습니다. 수식 같은 문학성보다 내용이 중요한 작품이라 중역, 직역은 생각보다 영향을 덜 주는 거 같더라고요.
ㅎㅎㅎ 땡투 들어오면 쿨캣님 생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