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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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빌이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발표하고 5년이 지나 1981년에 출간한 책이 <케플러>. 하도 오래 태양을 육안으로 관찰하느라 나중엔 거의 맹인 수준이 된 코페르니쿠스. 16세기 초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바람에 거의 지옥 구경을 한 뻔했던 코페르니쿠스는 16세기 말에 케플러 교수가 쓴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최초로 공식적인 옹호를 받았다. 그러니 코페르니쿠스를 썼으면 후속작으로 케플러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듯.

  케플러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그리고 점성술사였다. 말을 좀 더듬고 도무지 조리있게 이야기할 줄 몰라 교수로써 인기가 거의 빵점 수준이었으나 당대에 비견할 학자가 없을 정도의 천재였다. 근데 사실 이런 교수들 짜증난다. 좋은 학자인 건 알겠는데 입에서 우물우물 하며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하게 강의를 해놓고 학생만 때려잡는 교수. 나도 한 명 이상 알고 있다. 아마 이젠 다들 가셨을 거야. 케플러가 그짝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보헤미아에서 제국 수학자로 일하기 전까지 도무지 수입이 변변치 않아 점성술, 즉 별점을 쳐주고 돈을 좀 만들었던 모양이다. 책에 나오기를 당시 달력에는 별점을 쳐 해당 월에 벌이질 수 있는 일을 써 놓기도 했던 모양이다. 한 해는 케플러가 그것을 맡아 예를 들어 1월 백송엔 소식을 듣고, 2월 메조에 나비가 되어, 3월 사쿠라 산보간다. 4월엔 튀르크 인들이 침공을 할 운세라 성을 튼튼히 하고, 5월엔 천연두가 몰려올지니 반드시 손을 씻고 마스크 착용을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이런 메모를 달았다가, 이것들이 덜커덕 들어맞는 바람에 점성술사로의 명성이 드높았다고 한다. 케플러 자신도 점성술, 별점 보는 일이 천문학의 딸이지만 어머니 천문학을 먹여 살린다고 했단다.


  작품은 요하네스 케플러가 스승인 메스틀린 교수에게 실망해 슈타이어마르크 주의 그라츠에서 하던 수학교사 일을 때려 치우고 바르바라 뮐러의 세번째 남편이자 의붓딸 레기나의 양아버지가 된 3년차 유부남으로 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와 천문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덴마크 사람 튀게 브라헤의 조수를 하기 위하여 프라하로 향하는 마차 안 풍경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주목. 튀게 브라헤. 덴마크 사람이지만 먹고 살기 위하여 보헤미아에 거주하며 천문학 공부를 위한 자신만의 천문대 “우라니보르그”를 소유하고 있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을 받아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굳게 믿는 학자이다. 이런 브라헤 선생이 학문의 적수인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최초로 공식 옹호한 <우주의 신비>를 쓴 케플러를 고용한 것이다. 브라헤는 성인일까 잡인일까? 당연히 반반이다. 케플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은 누가 봐도 이해가 가고, 하여튼 책에 의하면 직속 조수도 아니고 조수의 조수로 일하게 했다는 점을 들어 하필이면 그를 “고용”해 손아귀에 잡았다 해서 옹졸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신이 죽은 다음에 후임 제국 수학자로 케플러를 추천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실력을 인정한 학자적 양심을 가진 인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양면을 다 보아야 한다.

  둥글고 매끈한 대머리에 금속으로 만든 인조코를 달고 다니는 튀게 브라헨 선생은 젊은 시절 사건에 휘말려 섣부르게 결투에 나섰다가 코가 달아나는 운명을 가진 이로, 요하네스 케플러가 <우주의 신비>를 출간한 다음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기도 하고, 자기 학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해 유럽 각지의 학자들에게 책을 발송했을 때, 적당하게 예의를 차리는 수준의 짧은 편지를 보낼 뿐이었던 이탈리아의 거만한 갈릴레오와 달리 꽤 길게 쓴 따뜻한 편지를 보내 건투를 바란다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이이는 자신의 천문대인 우라니보르그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후원하기는 하지만 황실 재정집행관인 호락호락하지 않은 유대인 카스파르 폰 뮐스타인이 정말 집행을 할지, 한다면 얼마나 서두를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유대인의 이름까지 밝히는 건, 앞으로 케플러한테도 마찬가지로 체불 임금 지불 같은 돈이 나가는 일을 그저 글로만 “지불하겠다.”고 확인해주는 증서로 때울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요하네스 케플러의 팔자가 앞으로도 그리 편하지 않을 거란 거다. 장인 욥스트 뮐러 씨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알부자로 딸이 두 번에 걸친 결혼에 일찌감치 과부가 되어버리자 평생 혼자 살라고는 할 수 없어서 삼혼으로 그나마 괜찮은 인간을 찾는다고 찾은 것이 케플러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쉬웠던 쪽이 뮐러 씨였지만 결혼하자마자 안면을 싹 바꾼 장인은 사위 알기를 구변, 즉 개똥으로 알아 늘 시원치 않은 돈벌이 같은 걸로 시비를 걸었다. 자기는 딸한테 적지 않은 돈을 지참금으로 주었다는 게 사위 타박의 근거이기도 했다. 아내 바르바라 역시 아버지를 탁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조금도 미안해 하지 않고 늘 불평불만을 일삼아, 의붓딸 레기나, 창백할 만큼 흰 얼굴과 은색이 도는 금발, 예쁘지는 않고 야위기까지 했으나 스스로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는 완성된 존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에게 정을 붙여 살았다. 그러나 처복 없는 남자가 자식 복이 있겠는가? 열일곱 살에 결혼해버린 레기나는 결혼과 동시에 지난 날의 부녀간 정을 싹 무시해버리고 만다. 다행스럽게 바르바라가 남편보다 먼저 죽는 일이 벌어지지만, 자기가 일찍 죽자마자 케플러 선생이 화장실에 가서 키득키득 웃을 것임을 벌써 알아버린 아내는 자신의 전재산을 첫번째 남편의 딸 레기나한테 백퍼센트 증여해버리는 유서를 남긴 채였다. 아내 바르바라는 남편이 옆에 있든 없든 사람들에게 늘 무시당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을 뿐임에도. 하지만 믿지 마시라. 존 밴빌은 케플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픽션을 쓰고 있는 중이니.


  뭐 대충 이렇다. 작가는 뒤에서 이 책이 막스 카스파어의 전기 <케플러>와 욘 드라이어의 전기 <튀코 브라헤>를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어 작품 가운데 주요 사건은 모두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고, 아니면 적어도 틀린 내용은 자기 탓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설이라는 픽션이라는 걸 읽는 내내 염두에 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나는 모든 형태의 전기傳記를 좋아하지 않아 이런 류는 <닥터 코페르니쿠스> 한 편으로 충분했던 거 같다. 쉽게 얘기해서 <케플러>가 괜찮은 작품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건 내 취향에 국한해 드리는 말씀이오니 다른 분께서는 아무쪼록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기를 앙망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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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05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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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에마뉘엘 보브, <나의 친구들>
화요일: 구젤 야히나, <나의 아이들>
목요일: 왕팅팅, 스류, <재∙봉 – 고할머니편>
금요일: 바이센융, <서자孼子>

포스트잇 2024-04-05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케플러를 너무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렇잖아도 이책 궁금했거든요. 거기에 존 밴빌이라. ...

Falstaff 2024-04-05 16:25   좋아요 0 | URL
저는 밴빌의 <바다>를 좋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독후감 말미에 썼다시피 취향에 맞지 않아서 좀 고전했습니다.

stella.K 2024-04-05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퍼렇게 빛나는 문장이 어떤건지 알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봐야겠군요.^^

Falstaff 2024-04-05 16:29   좋아요 2 | URL
˝시퍼렇게 빛나는 문장˝이라고요? 헥...
설마 제가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진 않았습죠?

그레이스 2024-04-05 16:35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도!

stella.K 2024-04-05 18:28   좋아요 1 | URL
아, 책소개에 그렇게 나와 있어서요. 앞의 시 자는 제가 붙인거고요. ㅋ

Falstaff 2024-04-05 19:38   좋아요 1 | URL
아휴.. 전 제가 그렇게 쓴 줄 알고 본문을 한 다섯 번 훑었을 겁니다. ㅋㅋㅋㅋ

stella.K 2024-04-05 19:41   좋아요 1 | URL
아유,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ㅠ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04-05 22:25   좋아요 1 | URL
ㅋㅋㅋ
 
코미디언스 페이지터너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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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도 제도 산토도밍고 섬의 북쪽에 자리한 아이티 공화국을 배경으로 세 명의 영국인 남성이 펼치는 전형적인 백인 드라마. 그린답게 내놓고 대중소설이다. 대중소설도 얼마든지 좋을 수 있다는 걸 그레이엄 그린만큼 잘 보여주는 작가도 별로 없다. 이이는 세계대전 중에 첩보 부대에서 첩보원, 그러니까 스파이로 활약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 구조 안의 역학관계를 묘사하는 데 특별한 설득력을 가졌다. 다만 영국 백인 출신 작가라서 제삼세계 인물 가운데는 정의로운 사람이 별로 없는 반면 영국인이나 백인들 대부분은 적어도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즉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인들이 아무리 유색인에 관해 관대하다 해도 이들이 유럽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눈에 띈다. 더구나 이 작품은 1966년에 출간했다. 미국에서 흑인 분리법인 짐크로 법이 폐기된 지 겨우 1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다. 반 세기가 흐른 다음 자기 작품에 대해 이처럼 이야기하는 독자가 있다는 걸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 상태인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좋은 소설 <남쪽으로>를 보면, 유럽의 유한 여성들이 휴가를 맞아 카리브해의 아이티 섬을 찾는다. 천국 같이 아름다운 해변과 길쭉길쭉하게 잘 생긴 흑인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몸처럼 긴 생식기를 즐기기 위하여. 그러나 세월은 아름다웠던 옛 시절을 무정하게 지나쳐 지금의 아이티 공화국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로 꼽힌다. 내가 알기로 아이티의 비극은 1820년대 프랑스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막대한 독립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키피디아에서 아이티를 검색해보면 나쁜 방향으로 참 알뜰하게 말아먹었다.

  산토도밍고 섬을 점령한 스페인 군대와 그들이 지니고 온 바이러스는 섬의 토착민인 타이노인의 99%, 그러니까 모두 죽여버렸고 어찌어찌 생존한 극히 일부마저 학살해버렸다. 이후에 노동력이 없어져버리니 다른 서인도제도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의 기골이 장대한 흑인을 수입해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었으며, 우월한 체격과 체력을 보유한 흑인들은 후에 거꾸로 백인과 백인의 피를 물려받은 물라토를 제거하고 독립을 선포해 완벽한 흑인의 나라를 만들었다. 밖으로는 스페인에 이어 식민지를 경영하던 프랑스에 매년 거액의 보상금을 물어주느라 죽을 맛이었으며 안으로도 어려운 살림 안에서마저 곪아버린 부패 왕국이었던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도 시계는 멈추지 않아 노베첸토가 찾아오고 7년이 더 흐른 1907년.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판사 집안에 똑똑한 아들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태어난다. 아이는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1934년에 아이티 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하며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공공의료에 관해 배우기도 한다. 귀국한 뒤발리에는 주로 머릿니를 매개로 하는 후진국형 전염병인 발진티푸스를 예방하고, 고질적인 열대병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헌신적인” 노력을 해, 아이티 국민들로 하여금 아빠 의사, Papa Doc. 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파파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비”라는 뜻으로 쓰였다니 그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것. 그러다가 군부에 의해 탄압을 받아 시골에서 은둔생활도 하는 등 고난의 시간을 조금 보낸 후 1957년에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부정도 없이 당당하게 비밀, 경쟁투표에서 72%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오른다.

  거의 모든 경우 거대 악의 근본 문제는 권력이라는 게 내 소신이다. 세상의 모든 자비를 베풀던 파파독은 권력의 단맛을 잠깐 맛보았음에도 단박에 단맛에 도취, 이후 감히 비교의 대상이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정을 시작한다. 과거 도라이 왕들도 쉽게 저지르지 못했을 만행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아니, 예를 들기에도 잔인할 정도이니 차라리 조금 짬을 내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시기 바란다. 웃기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196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단다. 이때 투표자 1,320,748 명 가운데 1,320,748 명의 지지를 얻어 1백퍼센트의 득표를 해 당당하게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니, 이거 북한의 김씨 왕조에도 없던 일이다.

  작품 속에는 한 번도 파파독이 직접 원고지 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파파독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은,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항상 죽음/암살의 두려움 속에 사느라 대통령궁에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최후는 언제나 죽지 않기 위해 권력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비극이다. 파파독은 서인도제도의 가장 빈번했던 권력교체 방법인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웠으니 웃지 마시라, 이름하여 “통통 마쿠트.” 국가보안자원민병대. 민담 속 말 안 듣는 아이를 잡아가는 자루를 든 아저씨로 우리나라의 “망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면 딱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이 부리는 악귀로 여기면 된다. 날씨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다니는 무소불위의 집단. 군대보다 더 막강한 힘과 권세를 자랑했으나 참으로 다양하게 무식한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상세하게 쓰느냐 하면, 작품의 큰 스토리가 영국인 등장인물(들)과 통통 마쿠트로 대변하는 아이티의 공포권력과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미디언에 대하여. 누가 코미디언인가? 넓게 이야기하자면 전부 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코미디언일 수 있다. 살다보니 “웃기지도 않는”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지구 행성의 모든 이들. 작품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명의 백인이 등장한다. 물론 콕 집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화자 ‘나’ 브라운은 1906년에 몬테카를로에서 영국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나지만 아버지는 브라운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확실히 영국인은 아니었던 어머니는 어린 브라운을 기숙학교인 예수회성모방문 칼리지에 떠맡겨놓고 사라져 등록금도 치루지 않아 끝까지 학교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한 시절엔 학년에서 가장 유력한 사제 후보생이었으나 어떻게 하다 예상치 못하게 총각 딱지를 떼게 됐고, 이 사실이 알려져 억지로 졸업만 한 후에 영국 각지를 떠돌며 사기 비슷한 행각을 하다 최종적으로 명함에 “라스코빌리에 백작부인”이라 파고 다니는 엄마가 암에 걸려 오늘 내일 할 때 아이티 공화국으로 불러 호텔 “트리아농”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처음엔 호텔이 드라마틱하게 호황을 만나 이게 무슨 대박인가 싶었다. 바로 이 시절이 저 위에서 말한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남쪽에서>의 무대 같은데, 브라운한테는 이 시절이 딱 3년 갔다. 이후 파파독이 정권을 잡고 학정을 시작해 곳곳에서 불법체포와 고문과 학살과 시신 유기가 벌어지는 바람에 여차하면 브라운한테도 목발이라는 기념품이 전달될까 싶어 뉴욕으로 날아가 호텔을 팔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짱구인가, 그걸 사게. 맨손으로 돌아오게 된 브라운은 네덜란드 왕립 증기선 회사의 화물선인 메데이아 호에서 1948년에 미국의 대통령선거 후보자였던 윌리엄 에이블 스미스 씨 부부와, 인도와 버마전선에서 대 일본 밀림 게릴라 전을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H.J. 존스 자칭 소령과 동승한다.

  순박한 시인이나 지방대학 총장 스타일의 스미스 씨 부부는 아이티의 사회복지부 장관 닥터 필리포의 초청을 받아 포르토프랭스에 채식주의 기념관을 짓는 등 채식주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한 방문길이었다. 소설에서도 극히 드문 인자한 미국인 할아버지인 스미스 씨도 지금 말하기는 그렇지만 확실한 코미디언이다. 마음 좋고 선한 코미디언. 그는 당연히 아이티에서 하는 모든 일이 생각과 어긋나는 경험을 당할 팔자라서, 결국 일을 진척시키기도 전에 담당 장관만 거액의 부당 이익이 생기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좌절해 국경을 면한 도미니카로 가버린다.

  존스 소령은 ‘나’ 브라운과 비슷한 성향의 사기꾼이거나 적어도 사기꾼으로 보인다. 이이는 손보다 입과 혀가 앞서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고 자신만만해 결국 브라운에 의해 자기 덧에 걸려버려 어처구니없게도 과거 버마에서 경험한 게릴라전을 아이티에서 재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버마 밀림은 바닥이 보들보들한 진흙이기라도 하지 아이티는 거의 산악 지형이라 존스 자칭 소령이 가지고 있는 평발로는 그리 쉽지 않을 걸?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의 MSG,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 브라운은 남미 어떤 나라의 대사 부인, 독일 출신인 마르타와 사랑에 빠진다. 대사 부인과? 그렇다. 사랑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를 돋게 하고 궁금증을 유발하고 유난히 재미있는 것이 불륜. 맞지? 수도 포르토프랭스 곳곳에 시퍼런 눈을 검정색 선글래스 뒤에 숨긴 채 도사리고 있는 통통 마쿠트를 피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 설마 그곳에서 연애 행각을 벌일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는 컬럼버스 동상 앞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서 질펀한 몸의 유희를 벌이는 남녀. 근데 소설 속에서 연애 이야기는 뭐라? 맞다. 이별 이야기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거 보셨어? 이 책에서는? 흐흐,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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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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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올레타>는 2022년, 이사벨 아옌데가 여든 살에 발표한 장편이다. 2022년은 세계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선언했듯 세 번째 펜데믹으로 전 인류가 불통의 시기로 진입했을 때이다. 아옌데는 이때로부터 백 년 전인 1920년의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렸다.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8년에 유럽을 휩쓸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전장에서 죽어간 인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천 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유럽 열강들은 각국의 피해자 현황을 발표할 수 없었다. 국력 혹은 국격의 노출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정말로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스페인이 유일하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발생을 인정하고 자국의 피해 상황을 발표하는 바람에 졸지에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게 됐던 펜데믹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2년 후인 1920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그러니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펜데민은 백 년 만에 도래한 재앙이었으며, 아옌데는 이것에 착안해 1920년에 태어나 2020년에 생을 마치는 ‘비올레타 델 바예’라는 순혈 스페인/포르투갈 혈통 백인 여성의 한 생애를 소설로 구상하게 됐다.

  책의 판매 부수에 최대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와 서점은 백 년 터울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펜데믹에 방점을 두어 책 광고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1920년 펜데믹은 주인공이 이제 막 태어날 시기이니 굳이 질병을 연결시키려면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비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전세계 모든 인류 가운데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또한 2020년의 펜데믹 때 주인공의 나이는 백 살. 한 세기를 살아 이제 오직 편안한 휴식만 기대하고 있는 잘 늙은 노인하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유행 질병과 그리 큰 연관은 없을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사벨 아옌데 역시 두 번의 펜데믹에 걸쳐 생을 살았던 여성을 착안해 작품을 시작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아예데의 시각에는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간 질병보다 20세기 여성운동에 더욱 관심을 집중했다. 교조적 가톨릭이 국민의 사상을 장악했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개선, 개선을 넘어 혁신해야 할 관습과 행동, 법률은 넘치고도 넘쳤던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광고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펜데믹에 집중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싶다. 아옌데가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진보적,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쓰고 마누라 님 저녁 드신다기에 아욱국 끓여드리고 겸사겸사 국 안주로 막걸리 한 통 해치웠다. 내가 끓였어도 진짜 맛있다. 장사할 만큼은 안 되지만 이 정도면 B+. 술 기운 퍼지기 전에 얼른 써야겠다. 속도를 올리자!)


  하긴, 벌써 독후감 쓴지 십년이다. 그간 2천 권 이상 읽었을 거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 동안 썼다. 이제 사실 지겹기도 하다. 그냥 훌훌 책이나 읽고 말지 싶다가도 여태 해온 지랄이 있는데 여기서 말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계속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터.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여태 키보드를 두드려대고 있나, 한심할 때도 있다. 뭐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맙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한 1920년 폭풍우가 몰아치던 금요일에 이 세상에” 온 비올레타 델 바예는, 성인이 된 후, 즉 초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삶이 연속되는 임신한 상태이거나 막 출산한 산모이거나, 그도 아니면 자연 유산에서 회복하는 시간으로 채워진, 한 때는 이 나라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데뷔당트, 즉 이제 사교계에 정식 데뷔한 상류사회 처녀였지만 이젠 잦은 임신과 출산, 유산으로 체형이 바뀌고 기력마저 소진한 마리아 그라시아 델 바예 여사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로 세상에 비집고 나왔다. 이때 맏아들 호세 안토니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맏오빠는 늙을 때까지 막냇동생 비올레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우호관계를 이어가다가 동생의 집에서 숨을 거두는데, 하여간 비올레타가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 마리아 여사가 나이를 아는 유일한 아들이 호세 안토니오 뿐이었다. 호세 안토니오는 수천 명이 사망한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해에 출생했으며, 생일은 물론이고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머지 네 아들들 역시 이 나라의 큰 환란이 생겼던 해에 태어났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즉, 어머니는 늘 출산 또는 유산 이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출산할 때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에서 천장에 고정시켜 놓은 고리에 연결한 줄(또는 천)을 잡고 아이를 낳는 모양이다. 우리의 비올레타가 세상으로 나올 당시에 평생 숫처녀로 살게 될 피아 이모가 아이를 받았는데, 의학과 약초에 관한 지식이 대단했던 피아 이모는 정작 아이가 나올 때 제때 받지 못해 그만 거꾸로 떨어뜨려 바닥에 콩, 머리를 찍어 갓 나온 아이의 이마에 혹이 솟아버렸다. 당연히 아들일 것이라 생각한 아빠가 자신이 직접 조립한 라디오 통신을 통해 유럽과 북미를 휩쓰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해 첫 딸 비올레타를 보았고, 이마에 솟은 희한한 혹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때까지 처녀였던 필라르 큰이모는 매부한테 원래 그렇게 나오는 아이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 있으면 가라 앉는다고,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암시랑토 않다니께!) 안심시킨다.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할아버지 때부터 건사해온 집안의 부wealth가, 자신의 대에 이르러 열세 명의 남매 중에 열한 명이나 살아남아 부친의 재산 일부만 유증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속칭 “동물적인 감각”으로 남의 돈을 빌려 투기 비슷한 돈 놓고 돈 먹기 사업이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형제 자매들의 신뢰를 깨면서까지 할아버지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은 거대한 재산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이 별로 없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저택은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생전 처음 딸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아들만 키운 나도 전혀 몰랐다. 근데 손녀가 생기니까 집안에 딸이 있는 것이 얼만큼 축복인지, 이해한다, 이해해.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라틴 아메리카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상륙하자마자 라디오 통신을 통해 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예방책을 미리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제재소의 신뢰할 수 있는 벌목꾼 두 명을 데리고 와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아무도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도 영국에서 밀수한 웸블리 리볼버를 한 정 사들여 혹시 모를 무단 침입 보균자를 막으려 한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어 대가족 가운데 펜데믹 피해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거봐, 작품하고 펜데믹은 시대상 말고는 관련이 없다니까.

  이후 비올레타는 세상 버르장머리 없는 천방지축으로 성장한다. 아들한테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딸 아이 특유의 다정다감이 아버지를 그만 녹여버렸던 것. 아버지가 얼마나 편애했는지 성격이 버릴 정도로 예뻐해주는 바람에 정말로 비올레타는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고, 이게 급기야 아버지를 향해 몇 번 터져, 화딱지가 난 아버지로 하여금 비올레타를 전담할 영국인 가정교사를 들이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정에 들어온 미스 테일러.

  조세핀 테일러. 키가 조금 작고 대신 살집이 좀 있는 밀wheat색 금발의 20대 여성.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스 테일러는 비올레타의 반항기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의 바람직한 행동규범들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핀 테일러는 영국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차티스트 운동에 가담한 죄와 왕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1846년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형 후에 온몸이 난도질당한 아일랜드인 할아버지에 자부심을 갖는 여성이었다. 미스 테일러는 숨이 다 할 때까지 비올레타 주위에 머물며 조언과 도움을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몇 년 후에 비올레타와 함께 참석한 델 바예 가문의 파티에서 만난 남장 페미니스트 테레사 리바스와 연인관계를 이어가며, 테레사와 함께 부르주아가 된 비올레타의 인식의 각성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백인 부르주아 출신의 1920년생. 우리는 안다. 비올레타가 사춘기를 맞기 전에 특히 금융업에 전력하고 있는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한테 닥쳐올 역사적으로 높은 파도를.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1929년 9월이 오고, 미국의 주식시장이 한 순간에 폭락했으며 비올레타의 나라 역시 국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삶의 급격한 하락을 맞게 된 시민들은 시위에 참여해 급격하게 정국이 심하게 불안해졌는데, 이 순간에도 맏오빠 호세 안토니오는 다섯 살 많은 비올레타의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에게 석류석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를 동원한 청혼을 거절당하면서, 이후 30년 동안 반지를 품 안에 지니고 살게 된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자기 사업에 동참하게 했던 맏이 호세 안토니오는 그동안 수없이 자산 관리에 관해 사업주인 아버지에게 빚을 줄이라 고언을 해왔다. 그러나 모험적 투자의 매력에 빠진 아버지 아르세니오는 자신의 주관대로 사업을 밀고 나갔으며, 그 결과로 델 바예 집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된 상태.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소설작법 제 7장 3절, 작품에 총이 나오면 언젠가 한 번은 발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 웸블리 리볼버에서 뛰쳐나온 총알이 자기 관자놀이를 관통시키게 만든다. 이 모습을 처음 본 아이가 바로 비올레타.

  그리하여 아버지도 잃고, 집도 절도 잃은 델 바예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두 이모와 외할머니, 어머니, 큰오빠 호세 안토니오와 비올레타는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의 동성 연인 테레사 리바트의 시골집으로, 네 오빠는 친척집으로. 저 남반구 남쪽의 한대지방 농촌으로 내려간 델 바예 가족들은 말 그대로 유배, 또는 피난의 시절을 겪을 수밖에. 이후 비올레타가 살아야 하는 남은 삶은 무려 85년 이상이다. 그러니 나는 적어도 작품의 85퍼센트를 숨겨놓았다는 말이다.


  전형적인 라틴 아메리카의 부르주아 백인 시선으로 쓴 작품이다. 델 바예 가문은 애초부터 특혜를 안고 살았다.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돈을 버는 다양한 방법을 선천적으로 체득한 진골 가문이다. 비록 한 시절 불운을 만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을 겪었으나 다섯 아들 다 다시 사회의 훌륭한 지위와 부를 확보해 상류계급으로 복귀한다. 비올레타의 아들은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하다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될 순간 극적인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로 탈출해 그곳에 정착한다. 딸은 미국에서 히피 생활과 중증의 마약중독이라는 지옥을 거치지만 악당이면서 지하의 막강한 권한을 지닌 생물학적 아버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딸의 아들, 즉 비올레타의 손자 역시 좋은 교육을 받아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비올레타가 낼 모래 환갑을 맞을 손자 카밀로에게 주는 편지라고 해도 큰 까탈이 없다. 비올레타는 새로 사업을 시작한 오빠 호세 안토니오를 도와 남매가 다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이것을 이용해 여성의 인권을 확장하기 위한 사업을 모색한다.

  당연하지. 부를 이루는 법,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키는 방법을 세습적으로 알고 있는 구성원들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좌파 작가라면 이 계급 구성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 대중들, 일반 시민들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겸연쩍음이랄까, 하여간 어떤 종류가 됐건 간의 유감또는 부채감은 적어도 한 번쯤 표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곤란한 처지를 만나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이 가족을 도울 은인이 있고, 망해버렸을지언정 좋은 교육을 받아 다시 부흥시킬 아이디어를 낼 만한 사업계획을 꾸릴 수 있는 계급과 애당초 한 번 만난 환란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대중이란. 씁쓸하다. 하여간 나는 씁쓸했다. 자신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환경을 특권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부르주아일 수도 있다는 씁쓸함. 내일 독후감을 쓸 그레이엄 그린은 “윗양반과 잡것”의 관계라고 했다. 윗양반과 잡것은 딱 한 방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닐 터. 윗양반이 늘 당연하게 행사하는 권한과 습관과 인맥과 이를 다 합쳐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애초에 잡것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특권인 것을 그들은 모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좋다. 그러나 진보를 주장하는 작가라서, 활자를 통해 자기 생각이 드러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이런 의미로 읽으면 이 작품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편향, 굴곡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별점으로 이야기하자. 생각 같으면 이런 한계 때문에 별 세 개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역시 이사벨 아옌데가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힘이라니. 차마 네 개 아래로 떨어뜨릴 수 없다. 이야기의 힘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대신 읽을 때는 눈을 똑바로 뜨시라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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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02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흥미롭네요. 푹빠져서 읽었어요. 이야기의 힘과 눈 똑바로 뜨라는 말까지 담아갑니다.

Falstaff 2024-04-02 16: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근데 꼭 잘난 척한 거 같아서 영 송구하기도 합니다. -_-;;

잠자냥 2024-04-02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02 16:37   좋아요 1 | URL
아욱국 잘 끓인 거요? ㅎㅎㅎ 거참 우연인지, 오늘 또 아욱국 끓여 먹었답니다.
잠자냥 님은 계속 쓰셔야지요. 바로 앞에 있는 거 같은데, 결국 순간이 오고야 말지 않겠습니까? ㅎㅎㅎㅎ

stella.K 2024-04-0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십년 동안 이천 권! 굉장하십니다. 근데 왜 안 쓰시려구요? 계속 쓰십시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또 모르잖습니까? 쓰고 싶어도 못 쓸 때가 올지. 계속 쓰시길 응원합니다.
이 책 언젠가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4-02 16:38   좋아요 1 | URL
안 쓰겠다는 건 아니고요, 이젠 독후감 쓰는 일이 자꾸 징글징글해져서 말입죠. 그럴 때가 됐다 싶기도 하잖아요? ㅎㅎㅎㅎ

Falstaff 2024-04-0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무 서재는 우짜 휴대폰으로는 답글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놔서리.... 혹시 쓰는 방법을 저만 모르는 건가요?

stella.K 2024-04-02 16:45   좋아요 1 | URL
엇, 저 스마트폰으로 쓰는건데. 북플 까셨죠? 그럼 안될 리가 없을텐데요.

Falstaff 2024-04-02 17:28   좋아요 1 | URL
앗, 북플 안 깔았습니다. ㅎㅎㅎ 그렇군요. 그냥 지내는 걸로....

stella.K 2024-04-02 21: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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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는 슈라이비. 그는 1926년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의 마자간에서 파트미 페르디와 그의 독실한 이슬람교 아내 사이에서 소설 중에는 일곱 형제, 순서대로 카멜, 드리스, 압델 크림, 나짐, 마디니, 자드, 하미드 가운데 둘째 아들로, 실제로는 (역자의 주장에 따르면) 세명의 누이를 포함한 열 남매의 일원으로 마자간, 현재 지명으로 엘 자디다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엔 다른 형제와 같이 기숙 쿠란 학교에 다니다가 라바의 프랑스계 ‘게수 초등학교’에 다녔다. 시설도 형편없고 저승사자 같은 교사한테 학대 비슷한 교육을 받다가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으니 갑자기 뇌활동이 활발해져 눈부신 학업성취를 이끌어 냈다. 저절로 큰 기대를 갖게 된 아버지 슈라이비 씨는 드리스를 카사블랑카에 있는 프랑스 “기독교” 사립 리세 리예 고등학교에 입학시키는데, 여기서도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작문, 독일어 등 주요과목은 최우등이거나 차석을 차지해 일찌감치 “신세계”를 배우기 위한 재목으로 선택받기에 이른다. 근데 문제는 이게 위키피디어에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쓴 소설 <단순한 과거>의 한 대목이라는 점. 하지만 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1954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에 발표한 데뷔작 <단순한 과거>가 자서전과 소설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니까. 막내아들 하미드가 실제로는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엄마는 여든 살이 넘게 장수한 반면, 소설에선 막둥이는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으며 엄마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 다르다고 했다.

  드리스 슈라이비가 <단순한 과거>를 발표해서 데뷔작부터 스타덤에 오른 다음 해 1955년에 카틀린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았고, 1978년에 스코틀랜드 여성 시나 맥칼리언과 재혼해 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낳은 거야? 그건 아빠 닮았구먼.

  위의 두 문단을 보면, 실제로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소설 속에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 실제로는 진짜 자기 아버지 파트미 슈라이비 씨일 수도 있는 아버지는, 설마 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한 순간 열을 받아 휘두른 주먹으로 막둥이 아들을 때려 죽였으며, 얼마 후 자기 주관이라고는 1도 없이 그저 어려서는 아버지, 커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들, 삼종지도의 길만 충실하게 걷던 어머니도 삶에 얼마나 넌더리가 나던지 그냥 창문에서 자유낙하를 감행해 자살함으로써, 위대하신 알라의 품에 들지 못하고 억겁을 세월을 지옥의 유황불에 불살라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 주인공 드리스 페르디가 프랑스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 시절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가정의 폭군으로 존재한 아버지와 (요새 이런 말이 유행이던데) 시스템 적으로 그런 폭군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던 이슬람 문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 부정은 하지 못 할지언정, 이슬람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반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이 소설이 나온 1954년은, 모로코를 위시해서 튀니지와 알제리, 이렇게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영재로 인정받아 식민 모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해 화공학을 전공한 미래의 모로코 인재라는 작자가 모국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써서, 이슬람교와 모로코의 가치와 문화에 거칠게 저항했다는 점이 당시 모로코 식자들한테 매우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같은 프랑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더라도 프랑스인 또는 백인이 아니라 모로코인이 학생일 경우에 받아야 했던 차별 같은 것도 묘사가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괴물 폭군 아버지와 이슬람의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하도 커서, 프랑스 백인 문화에 대한 반감을 모국의 독자들이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라마단. 난 이게 뭘 말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허공에 해 있을 때 밥 안 먹는 날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라며? 무함마드가 쿠란의 첫번째 경구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거란다. 올해는 3월 10이부터 4월 8일까지라고. 이슬람에 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서 갑자기 내 입도 무거워진다. 그래도 쿠란의 경구를 받았으면 좋은 날 같은데 왜 밥을 안 먹지? 드리스 슈라이비에 의하면 마시지도, 먹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섹스도 못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책을 열면 첫 장면이 라마단의 스물네 번째 밤이다. 때는 1940년대 초. 모로코의 전통이 깊은 도시 페스 거리엔 훈족처럼 거지들이 떠돌았고, 이 거지들은 지난 13세기부터 천삼백 년 동안 내려오는 이슬람의 종이었던 같이 ‘나’ 드리스 페르디는 이슬람교의 결정체인 군주의 종 신세였다. 여기서 말한 ‘군주’가 바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를 일컫는다. 페스 시 앙고라 거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집에서 군주는 상체를 똑바로 펴고, 앞을 똑바로 보고 앉아 있다. 별로 차갑지는 않았지만 권위적이었고, 별로 권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집에서는 전지전능했다는 것이다. 3년 간 성지순례를 다녀온 아버지. 성지에 가 검정 돌에 손을 대고 묵상을 한 사람들에게 부치는 단어 ‘핫지’를 이름 앞에 달아 ‘핫지 파트미 페르디’라고 불리는 차tea 전문 도매상인.

  핫지 파트미 페르디의 일곱 아들은 태어나면 1년 동안 젖을 먹고, 2년 동안 울었다. 이게 유아기에 할당된 최소한의 자유 시간이었고 이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공포 속에서 자라며 침묵을 배워 나갔다. 이렇게 엄한 훈육이 다 선한 인간을 만드는 건 아니라서 맏이 카멜은 아무 생각 없고 무책임했으며 주인 앞에서 완벽한 꼭두각시 노릇을 했지만 집 밖에 나가기만 하면 할 짓은 다 하고 다녔다. 라마단 24일차 밤에도 카멜은 식구들이 자기를 기다리느라 밥도 안 먹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명백하게 술에 취한 채 다 늦게 사창가에서 귀가했다. 드리스는 아버지 앞에 따로 앉아 있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어 벽에 드리운 다섯 그림자로 불안한 시간과 배고픔을 견디고 있었고. 살벌한 우리의 군주. 당장이라도 가볍지 않은 폭력이 발생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 어머니는 기도한다.

  “저의 군주이자 주인에게 헌신하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작은 사고가 나거나,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알 수 없는 세균에 감염되거나, 독일군 폭탄이 터지거나, 아무거나 좋으니, 저를 죽여주세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그리고 드디어 군주는 카멜의 몸을 잡아 벽에 밀쳐 누르고, 내동댕이친다.

  “이것이 다 네가 자랑스럽게 마신 포도주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조금 전에 품었던 반항심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칼 내놓아라.”

  집안 저 구석에 버려져 있던 주머니칼을 시간 날 때마다 닦고 기름치고, 날을 세운 칼. 형이 들어오면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서 칼날을 군주의 목에 꽂아버리겠다고 각오를 다지던 칼이었다.

  군주가 내리는 가장 큰 벌. 그건 여기, 집에서 머무는 것. 각자는 파렴치한 행동과 증오와 과부생활과 분노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히 너, 드리스 페르디. 하루 종일 굶은 나는 저녁 식사를 거절하고 일어난다. 너무 오래 기다려 배 고프지 않았고, 내일부터 더 이상 금식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군주가 하사한 보리빵 한 덩이는 창문 밖 거지에게 적선해버렸다.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부자관계. 사회적으로도 억압적일 수 있는 이슬람 문화. 프랑스 학교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 프랑스 학교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아 압도적 성적을 거둔 드리스. 그러나 면접관에게 드리스는 요구한다.

  “제 요청은 이곳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예를 들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든가, 영광스럽게도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오히려 저의 태도에 격분하셨다든가? 제가 혁명가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든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나요?”

  면접관은 마지막으로 남은 최종 심사에서 빵점을 주겠다고 협박하지만 드리스는 오히려 평온하다. 이제 세상에서 드리스는 완전한 소외를 만나게 된 것.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은 누구? 죽으나 사나 군주, 아버지 밖에 없었다. 전쟁과 미군에 의하여 사업이 결딴난 줄 알았던 군주는 카사블랑카 근방에 어마어마한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토마토 농장을 만들고 있었는데, 거 참, 잘 나가다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군주가 먼저 드리스에게 화해를 청하고, 면접관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빵점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화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괴물 아버지. 많이 읽었다. 그의 난데없는 화해신청. 그거 가능해?

  어떻게 하다 보니 결론을 말해버리고 말았네? 정말 이렇게 끝나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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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3-29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진위청, <번화>
화요일. 이사벨 아옌데, <비올레타>
목요일. 그레이엄 그린, <코미디언스>
금요일. 존 밴빌, <케플러>
아옌데, 그린, 밴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건?

stella.K 2024-03-29 12:13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이리 마치시니 진짜 예고편 같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3-29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음 주 독후감은 별거 없을 듯하네요. ^^;;

그레이스 2024-04-04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큭큭거리며 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왜 밥을 안먹지?˝에서 웃어버렸네요.
궁금한게 있는데... 폴스타프님 현실 말투가 이러신지...?

Falstaff 2024-04-04 16: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기분 좋습니다. 근데 웃기지 않아요? 좋은 날에 왜 밥을 안 먹어요? 잔치라도 할 판인데 말입죠.
말투... 좀 세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아닌 거 같습니다만. ㅎㅎㅎ
근데 천성은 비둘기파에 마음 약하고, 그래서 영화보다가 질질 짜고 그래요.
 
한스 암슈타인 / 친구들 / 꿈속의 집 / 렘볼트 혹은 어느 주정뱅이의 하루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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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유작. 헤세의 세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아내이며, 그와 함께 묻힌 유일한 아내인 니논 헤세는 남편이 죽은 후 1965년에 열다섯 편의 유작을 모아 《Hermann Hesse: Prosa aus dem Nachlass》, 대강 “헤르만 헤세의 산문 유품” 정도로 읽히는 책을 발간한다. 출판사 지만지의 “편집자 일러두기”에 분명하게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가운데 역자가 “작품성이 높은 네 작품을 선정해 번역한 것”이 이 책이다. 본문은 215페이지에서 끝난다. 이후에 해설이 35페이지, 헤세의 연보가 12페이지, 역자 소개와 저작, 그리고 논문 목록이 31페이지 달려 있다. 즉 안 읽어도 인류평화에 그리 영향을 주지 않을 분량이 78페이지에 이른다. <한스 암슈타인>은 31쪽, <꿈속의 집>은 49쪽, <렘볼트 혹은 어느 주정뱅이의 하루>는 15쪽 밖에 안 되는데 부속 잡글이 78페이지라고? 이미 생을 마감한 이인웅 전 외국어대 교수의 논문 목록을 알고 싶다고 내가 언제 말한 적 있어? 이래놓고 정가가 22,800원이다. 원서가 열다섯 편의 산문, 번역서가 여기서 달랑 네 편 싣고 말이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지만지 또 이 지랄이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어도 이렇게 열이 풀풀 나는데, 행여 내돈내산 했으면 심장병 도질 뻔했다.


  나는 유고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냥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에 끌려 읽었지, 유고집이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가 왜 젊은 시절에 쓴 글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그거 눈에 보이는 거 같지 않나? 왜 작품을 쓰다가 중도에 쓰기를 그만 두고 책상 서랍에 쑤셔 놓았는지 뻔할 뻔 자 아냐?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건 헤르만 헤세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헤르만 헤세가 아니라 헤르만 허세. 역시나.

  제일 앞에 실은 <한스 암슈타인>은 한스 암슈타인이라는 철부지 청년의 줏대 없는 사랑 이야기. 1903년이니까 분명히 20세기 작품이지만 괴테나 휠덜린이 눈썹을 휘날리던 18세기 시절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헤세 여사님도 책에 관해 조예가 깊었던 걸로 쓰여 있다. 그러면 이런 작품은 남편의 유지를 유념해서 그냥 불 싸질러야 마땅하지, 이렇게 책으로 내 놓으면 어쩌냐는 말이다. 한 번 활자로 찍히면 죽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을.

  <친구들>은 가장 긴 소설로 125쪽 분량이다. 하지만 그동안 읽었던 헤세의 작품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데미안>과 <싯다르타> 등등. 출연진들이 대학생인 것만 다르고.

  나머지 두 편의 미완성 작품은 입에 올리기 싫다. 이런 책은 읽지 않는 것이 속 편하고, 내지 않는 것이 국가 경제를 위해 이바지하는 일이요, 아마존 밀림의 보존에 기여하는 일이다.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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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3-28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심 화나심이 보입니다. 저도 공감해요. 유고집 저도 신뢰하지 않는데 작가가 생전에 출간하지 않은덴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젤 잘 알죠. 그걸 굳이 굳이 찾아내 출판하고 낭비하고 이름에 먹칠하고... 왜 그러는걸까요...
저도 알지만 말을 않겠습니다. 엊그제 저도 당한 일이라...
이건 당한 거예요^^

Falstaff 2024-03-28 16:13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PC 앞에 앉았군요.
지만지가 이런 짓 자주 합니다. 특히 단편집 원본에서 한 두 작품만 떼어 단행본 한 권 만드는 일이요.
이 책은 유고집 유감에다가 지만지 출판사가 하는 짓까지 다 합해서 왕창 열 받았답니다. ㅎㅎㅎ 열 내봐야 뭐합니까, 명만 줄지요.